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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편안한 친구, 우리 엄마를 소개합니다

지금도 엄마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만약 명상을 안 했더라면 아마 우리 둘 중 한 명은 이 세상에 있지 못할 거라고….” 그땐 그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나는 어릴 때 문제아였다.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친구들을 괴롭혔고,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에 비하면 동생은 정말 양반이어서 항상 비교되었고, “동생보다 못한 놈”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늘 나를 의심하고, 체크하는 엄마가 싫었다.

이창욱. 미국 버지니아주 거주

중학교 때 엄마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고백했었다. 엄마는 당장 헤어지라고 하셨다. 이유는 단 하나, 공부 잘하는 동생은 되지만, 공부 못하는 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난 집에선 항상 무뚝뚝했고, 부모님에게 ‘귀한 아들’이 아니라 문제아에 더 가까웠다. 말 안 듣는다고 동생 때리고,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엄마를 몇 번이나 불려 오시게 했다. 어느 날 엄마가 하신 말씀, “너한테 큰 기대를 가졌었는데, 지금은 아무 기대도 안 한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엄마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남 앞에서는 좋은 엄마인 척, 잘난 아들이 있는 척하다가, 나하고만 있으면 남처럼 대하는 엄마가 너무 싫고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밤늦게 오고 공부도 안 하는 게 친구들 때문이라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셨다. 실시간 전화로 체크하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그 집착이 끔찍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말을 더 안 들었다.
한번은 학원 가기가 싫어서, 친구와 오락실 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빠가 오시더니 갑자기 나의 뺨을 때렸다. 집에 와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저 엄마의 전화 한 통, 지금 아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을 거란 얘기만 듣고 그러신 거였다. 그 뒤로 엄마 아빠와 대화를 거의 안 하고 살았다. 엄마는 항상 나를 의심하고 남과 비교했다. 무조건 학원부터 보내려는 엄마의 욕심에 한때는 정말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엄마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 안 들으면 벌써 회초리가 날아왔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셨다. 몰래 오토바이를 탔던 터라 늘 조마조마했던 내게 “조심해서 타라”고 하셨고, 집 밖에서 친구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릴 때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실 땐 정말 놀랐다. 동생에게 엄마가 왜 저러냐고 물어봤더니 마음수련 명상을 하신다고 했다. 그래도 난 시간이 지나면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모습이 점점 눈에 띄었다. 공부 못한다고 무작정 학원을 보내려던 전과 달리 너 편한 대로 다니라고 하셨다. 어느 순간 진심으로 느껴졌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의 사진을 하나하나 버릴 때마다 홀가분해졌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고, 의심했다 여겼던 기억과 마음을 버리니 정말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확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자 웃음 없이 우울했던 엄마가 보였다. 나 때문에 속 썩어서 늘 아팠던 엄마, 후회가 많이 되었다. 나를 낳고 시댁에서 이쁨받던 엄마,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서 힘들어했을 고통이 느껴졌다. 난 너무 이기적이었다.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잘못했다고, 엄마 아빠의 마음을 몰랐었다고, 제가 힘들었던 만큼 엄마의 마음은 더 많이 아프고 힘드셨을 텐데 그래도 아들이라고 밥 챙겨주시고 신경 써주셨던 거 정말 감사하다고…. 그 말씀을 들은 부모님은 오히려 “그동안 너무 큰 욕심으로 너를 힘들게 했다”면서 정말 잘못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명상을 하시고 나서 건강을 회복하셨고 늘 밝게 웃어주신다. 엄마의 변화가 나에겐 더 큰 변화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좋은 친구도 더 많이 생기고, 선생님들도 항상 밝아서 좋다고 칭찬하신다.
지금은 미국 유학 중이다. 낯선 그곳에서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마다 엄마의 전화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전엔 ‘무조건 안 돼’였는데 이젠 ‘그것 괜찮다’ 하시면서 편한 친구처럼 상담해주신다. 지금은 엄마가 내 친구 소식을 더 잘 아실 정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커서 뭘 해야 할 지 몰랐는데, 지금은 꿈이 생겼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를 좋아한 나는 훌륭한 자동차 정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자동차 매케닉 대학에도 입학할 예정이다.
예전엔 엄마 없을 때만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이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항상 명절 때면 찾아가 세배를 올리는 친구들 덕분에 마음 놓고 공부하고 있다. 친구들도 엄마가 되게 많이 변하신 거 같다면서, 친구들 엄마 중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편하다고 한다. 한국에 가게 되면 엄마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애들과 남편이 그냥 앉아만 있어도 햇살처럼 빛난대요”

엄마들은 늘 꿈꾼다. 자식들을 통해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고,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어 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자녀들이 우울증을 겪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엄마 정태연(58)씨와, 사랑받고 살면서도 늘 공허하고 우울했던 엄마 정영숙(52)씨는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난 후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풀었다 한다.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두 엄마가 말하는 ‘내 삶의 변화와 감동’ 이야기.

정리, 사진 김혜균 진행 문진정

난 꽤 괜찮은 여자인데 세상이 몰라주는 줄 알았죠
태연 저는 결혼 전부터 남 앞에서 잘나고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어요. 근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세상이 원망스러웠죠.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가 다섯 형제를 키우셨거든요.
영숙 저는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시골에서 ‘교장 선생님 딸’ 하면 알아주니까 커서도 은연중에 남이 알아주길 바랐던 거 같아요. 근데 충족이 안 되니까 외롭고 자신감도 없고, 많이 우울했죠.
태연 옛날엔 나이 차면 빨리 결혼시켰잖아요. 생활이 너무 어려우니까 엄마가 시집가래서 갔어요. 힘든 상태에서 결혼하니까 남편도 안 좋은 것만 보이는 거예요. 첫아이 낳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둘째 낳기는 싫었는데 남편과 친정 엄마가 낳으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설상가상으로 쌍둥이인 거예요. 냉장고, 세탁기도 없고, 남의 집 셋방살이에 갓난아이가 셋이다 보니, 기저귀 빨면서 맨날 울고, 원망하고, 짜증 내고. 이건 사람이 아니에요.
영숙 제 남편은 가정적이었어요. 그런데도 ‘도대체 나는 뭐지’ 하면서 불만이 많았어요. 남편이 직업군인이라 외진 지역에 주로 다녔기 때문에 외로움을 더 탔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애들한테 깊은 사랑을 못 줬더라고요.
태연 쌍둥이 낳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 세상이 참으로 원망스럽더라고요. 주인아주머니가 시끄럽다고, 물 많이 쓴다고 나가라고 한 거예요. 돌아서면 기저귀가 쌓이고, 밤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아기들 한번 따듯하게 안아서 우유 먹인 적도 없어요. 나중에 아이들이 크니까 어릴 때 엄마한테 받지 못한 사랑이 나타나더라구요.
영숙 형편이 좀 낫다 해도 허한 마음은 같아요. 이것저것 많이 배웠죠. 조리사에 가스 점검, 발마사지, 비즈공예, 양재, 근데도 허하더라고요. 명상하면서 보니 그게 다 열등감 때문이었어요.
태연 그런 욕구 불만을 저는 자식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생각한 거 같애요. 남한테 흠잡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굉장히 심해서 애들도 많이 때렸어요.
영숙 그런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태연 제가 척하는 데 왕이에요. 남들은 저를 절대로 화를 낼 사람으로 안 봐요. 근데 완전히 괴물이었죠.(웃음) 그건 우리 애들밖에 몰라요. 지겹게 잔소리하고 신경질 내고 때리는 엄마였어요. 아이 셋 다 내성적이고 순종적이고 공부도 잘했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아이들을 최고로 가르치겠다, 나 같은 설움, 콤플렉스 없이 키우겠다는 집념만 있었죠. 아들은 대학 보내고 딸들은 돈이 없어서 상고를 억지로 보냈는데, 쌍둥이한테 우울증이 왔어요. 직장 적응 못 하고, 친구 관계도 안 좋고. 아들은 대학에 적응 못 해 군대 가고. 그때까지도 저는 돈 버느라 몰랐어요. 큰딸이 대학에 다시 들어가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에 둘째 딸도 대학엘 보냈는데 얘는 더 심해지는 거예요. 애들과 싸우면서 10년이 지나더라고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에서 마음수련 명상을 만났어요.
영숙 저는 2006년도 중앙일보에 난 마음수련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1과정을 하면서 혼자 만세를 불렀어요. 업연의 고리를 이제 끊었다 싶었어요. 왜 사는지 알았고, 맨날 외롭다, 나란 존재란 도대체 뭘까, 고민 많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풀리니까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태연 그 시원함, 명상한 사람은 다 알죠. 명상센터 가면 조용한 게 그렇게 좋았어요. 집에선 맨날 싸웠으니까요. 한 열흘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한 거예요. 아, 이런 게 다 있나 싶어서 더 열심히 버렸어요. 근데 명상 중에 어릴 때 오빠가 동생들 때리는 걸 본 장면이 사진처럼 딱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애들을 때린 게 거기에서 온 거였어요. 눈물이 많이 났어요. 이 사진 한 장이 우리 세 아이를 그렇게 때리게 했구나. 정말 어렸을 때 찍어놓은 ‘사진’이 전 인생을 끌고 가더라고요. 누굴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이 사진이 계속 연결되는 고리구나, 이걸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정영숙(52). 2006년 마음수련 명상 시작. 1983년에 남편 국승철씨와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정태연(58). 2007년 마음수련 명상시작. 1977년에 남편 이재홍씨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쌍둥이 3남매를 키우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 ‘사진 한 장’이 평생 좌우
영숙 아까 고리를 끊었다 한 게 바로 그거였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집에 많이 안 계셔서 많이 외로웠어요. 한번은 저녁이 돼서 컴컴하니까 등잔불을 붙였는데 불이 확 났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워서 막 울었거든요.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서부터 외롭고 두려운 마음이 커졌더라고요.
태연 그걸 대물려 준 거예요. 벗어나지 않으면 아이들도 나랑 똑같은 인생이 되겠구나, 너무나 기가 막히더라고요. 싫었던 내 인생을 애들한테 그대로 강요한 거예요. 혼났던 거, 두려웠던 것들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빠가 아버지한테 맞았던 걸 동생들한테 그대로 했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나는 절대 오빠같이 안 한다 했는데, 제가 그대로 자식들한테 하더라구요.
영숙 애들이 결혼 전에 마음공부를 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자식 낳아도 우리처럼 안 키울 수 있잖아요.
태연 물론이죠. 옛날엔 일거수일투족 잔소리를 했거든요. 왜 이리 늦게 일어나냐, 엄마 힘든데 너는 왜 그리 사냐, 근데 내가 달라지지 않고는 자식보고 달라지라고 할 자격이 없더라고요. 그런 지독한 엄마 밑에서 살아준 것만도 감사하죠. 요즘은 가끔 잔소리를 해도 바로 후회하죠. ‘아직 내가 남아 있어서 잘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반성하고.
영숙 아이들이 많이 좋아졌겠어요.
태연 저희 가정은 다시 태어난 거예요. 아빠하고 부딪치는 것도 손가락 꼽을 정도고, 애들은 거의 웃질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잘 웃어서 탈이에요.(웃음) 며칠 전엔 큰딸한테 전화했어요. 가만히 보니까 마음으론 회개하지만 실제로는 안 했더라고요.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했다 하니까 딸이 ‘엄마도 모르고 그런 거니 이해한다’고 하더라구요.
영숙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한테 충분히 사랑을 못준 게 미안하고 그 죄책감이 많았어요. 제가 느낀 외로움을 줬잖아요. 그동안 내 안에 갇혀서 외로웠는데, 지금은 그게 다 허물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정말 새로워요.
태연 남편도 명상하고부터는 먼저 잘못했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잘해요. 남편이 다 내 잘못이라고 할 땐 그 말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다 내 잘못이더라고요.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 말들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전엔 뭐든지 비교했어요. 누구는 이런데 내 신세는 왜 이러나 하고.
영숙 맞아요. 저도 돈 많고 남편이 잘해주는 친구들 보면 질투도 많이 났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친구들이 여유 있게, 웃고 사니까 좋고요.
태연 제가 시집 식구들에 대한 미움이 참 많았어요. 남편하고 싸울 때 항상 시집 식구들을 걸고넘어지고, 잘사는 형제들이 밉고, 안 도와주는 게 원망스러웠는데 명상하고부터는 친척들은 물론 친구들이 잘사는 것도 감사한 거예요.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못살아도 옆의 사람이 잘살면 그게 더 좋으니, 그렇게 변한 내가 참으로 놀라워요.
영숙 정말 이거 나 맞어? 정영숙 맞어? 하는 거죠.(웃음)

인상 좋아져 평생의 보톡스 맞은 셈
태연 전부 다 똑같으면 이 세상이 굴러가지가 않잖아요. 작고 크고 높고 낮고 모든 만상만물이 다 다르니까 완전한 거죠. 그걸 아니까 내가 못났다는 것도, 비교하는 마음도 저절로 없어지더라구요. 솔직히 지금 제가 하는 일이 거리 청소거든요. 명상하고부터는 맨날 즐거워요. 썩은 음식을 치우면서도 감사하고 불만이 없어졌어요. 또 전에는 가족들한테 희생했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명상하고부터는 내가 희생한 게 아니라 온 세상이 나를 지금 여기 살게 해주고 있더라고요.
영숙 잘해야 한다, 돋보이고 싶다 그런 게 없어지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니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대로 보여주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마음도 편안해지고요. 잘해야지 하는 마음도 없는데 정성은 더 들이게 돼요. 마음 없이 하니까 음식도 더 맛있고 뭘 해도 전보다 더 잘 만들어지고. 있는 대로 세상을 산다는 게 대충 사는 게 아니구나, 결과는 더 완벽하더라고요.
태연 거기서 이게 행복이구나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가족을 쳐다볼 때 남편이 예뻐 보일 때. 이런 마음을 찾게 되었다는 게 감사하죠.
영숙 보통 같으면 화나야 할 상황에도 마음이 안 일어나요. 아, 마음을 비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한테 편안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얼굴에 생기가 있고,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오기도 하고. 전엔 얼굴 표정이 나도 모르게 경직됐는데, 애들 말로는 찌푸렸던 미간이 활짝 폈다고 하더라고요. 보톡스 맞은 것처럼.(웃음) 그러니까 엄마들이 진짜 마음을 비워야 해요. 요즘 엄마들 자식 교육 욕심이 극에 달했잖아요. 여유도 전혀 없고, 마음에 빈틈이 없는 거 같아요. 마음을 비운 만큼 아이들과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럼 엄마로서 잘하고 싶은데도, 자꾸만 꼬여가던 많은 문제들의 해결방법도 보일 거예요.
태연 엄마들이 마음의 짐이 많잖아요. 명상하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서 제일 골칫덩어리가 딸이었는데 명상하고 나서는 다들 모두를 살린 복덩이라고 해요.
영숙 기적이 멀리 있나요, 이게 바로 기적이죠.(웃음)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존댓말 써야 대화하던 남편의 엄청난 변화

남편한테는 항상 존댓말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좀 편해진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말을 놓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갑자기 남편은 하던 말을 멈췄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대화가 끊긴 게 감지되면 ‘아, 내가 존댓말을 안 했구나’를 알 수 있었다. 남편과 편안한 대화가 어렵다 보니 부부 사이는 편치 않았고, 마음의 벽은 쌓여만 갔다.

송영선. 서울시 구로구

한번은 하도 답답해서 왜 꼭 존댓말을 써야 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신입 사원 때 상사 댁에 갔다가 그 부인과 차를 마시게 되었다 한다. 그때 부인이 상사한테 반말하는 게 보기가 좋지 않았다면서, 남편한테는 꼭 존댓말을 써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다.
남편은 집안일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혼 후 첫아이를 낳을 때였다. 삼칠일 동안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다가 집에 갔는데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오기 전날 분명 남편한데 청소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소용없었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 그동안 보지 않은 신문지도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걸 본 뒤로 나는 남편이 집안일을 돕는 것에 대해선 아예 포기하고 살았다.
남편과 시댁에 가는 일도 큰 스트레스였다. 시댁에서 돌아오면 남편은 시댁에서 한 말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당신은 어머니에게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돼!” 말만 하면 꼬투리가 잡힌다 싶어 말을 할 땐 남편이 트집 잡을까봐 마음이 항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했다.
3년 전부터인가 남편과 대화를 하는 게 점차 편안하다고 느껴졌다. 대화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속으론 ‘이상하네. 이 사람이 왜 꼬투리를 안 잡을까’ 생각했다. 처음엔 잠깐이려니 했지만 그 후에도 편안한 모습 그대로였다.
남편의 존댓말 시비가 없어지면서 나도 점차 남편에 대한 시비가 없어졌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집에 오면 겉옷을 벗자마자 청소부터 한다. 매끌매끌한 바닥이 좋아 발을 동동 구를 때면 남편도 “우리 아내가 나이 들어도 귀엽다”면서 좋아한다. 집안 정리 정돈에다 청소는 물론 설거지까지, 남편은 그야말로 완전히 바뀌었다.
또한 남편은 언제부턴가 계속 칭찬을 해주었다. 뭐를 하든 “참 잘했어” “당신 전보다 어머니 뜻을 잘 받들어주네” 하면서 그냥 속으로 지나칠 수 있는 말들도 딱 집어서 얘기해 주었다. 남편이 칭찬을 해주니 나도 남편의 단점보다 장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남편과의 대화가 즐거워졌다.
차츰 물들어가듯이 남편의 변화에 나도 마음이 편해지고 좋아지면서 작년부터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20년 동안 운영한 가게를 그만두었을 때 남편은 한 달 동안 쉴 겸 해서 마음수련 메인센터에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오랫동안 집을 비워도 남편이 잘할 거란 믿음 덕분에 갈 수 있었다. 살아온 삶을 버리자 진짜 버려지는 게 신기했다. 남편이 왜 그렇게 바뀌었나 했더니 삶의 ‘마음사진’을 버린 데 그 비결이 있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먼저 장점이 보이고 또 감사한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아빠를 아주 편안해한다. 전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아빠여서 아이들도 꼭 존댓말을 해야 했고, 아빠와의 대화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명상을 하면서 격이 없어지니까 아이들도 편하게 얘기한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아들들도 점점 본받는 것 같다. 아빠가 하듯이 엄마한테 안부 전화도 잘하고, 배려도 해준다. 또한 식사하다가 물컵이 쏟아지거나 음식을 떨어뜨리며 실수를 하면 전엔 “너 그럴 줄 알았어” 하며 힐책을 했었지만 이젠 서로 먼저 일어나 걸레를 가져와 닦는다.
요즘은 자기 전에 늘 남편이 나의 손등에 잘 자라며 입을 맞춰준다. 가끔 손을 보면 다정다감해진 남편 생각이 나서 웃기도 한다. 명상 전과 후의 남편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남편 따라 명상을 한 가족 모두가 이젠 그 차이를 체감한다. 좁은 마음세계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지내는 진짜 행복을 실감하고 있다.

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차갑던 마음을 풀어준 햇볕은 마음수련 명상이었죠

강영성 한의사. 2005년에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했다.

다정다감 아빠의 비결
강영성씨와 가족의 대화

컴퓨터 게임 하느라 공부를 등한시했던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던 아빠 강영성(52)씨. ‘인생은 부지런히 살아야 보람차다’는 신조로 살아온 강영성씨는 가족들이 태만해 보이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처럼만 열심히 살아라”는 강요에 아들과 딸은 냉랭했고, 이를 바라보는 아내 조부덕(49)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한다. 틀 세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버지를 부드럽게 변화시킨 건 마음수련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이들 가족의 화해기를 들어본다.

정리, 사진 김혜균


당신은 ‘인상파 강영성’이었어요
아들 우리 집이 정말 화목해지긴 했나 봐요. 이렇게 잡지에도 나오고.(웃음)
아빠 이게 다 우리 아들 덕분이다. 니 덕분에 우리 식구가 모두 마음수련을 시작했고 아빠도 많이 바뀌었잖니.
엄마 당신은 얼굴부터가 확 펴졌어. 전엔 집에 들어오면 인상부터 썼잖아.
아빠 전에야 당신 마음에 얼마나 안 들었겠어. 무슨 말 한두 마디만 하면 ‘됐다, 그만해라’ ‘알았다, 그리 안 할게. 끝!’ 했으니까.
엄마 ‘그리 안 할게’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나 하면서 자기가 잘못한 걸 인정한 적이 없었지.
아빠 맞다, 맞다. 내는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무조건 열심히 사는 게 제일 잘 사는 거라 생각했어.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잘못한 게 없다 생각했지.
엄마 당신 인생의 목표가 ‘열심히’였잖아.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고 일요일 날 한 번도 집에 있는 걸 못 봤어. 하루에 세 번 정도는 나갔다 들어와야 하고, 쉴 새 없이 움직여야, ‘보람찬 하루였다’ 했잖아.(웃음)
아빠 한 시간이라도 몸을 땅바닥에 붙이면 보람찬 하루가 아니었지.(웃음)
아들 내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배운 말이 ‘보람차다’였어요. 아빠가 하도 그러시니까 제가 보람차다가 뭐야? 물었더니, ‘하루를 억수로 한 일 많게!’라고 설명해주신 게 기억나요. 그래서 저도 맨날 일기장에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라고 쓰고.(웃음)
아빠 아빠도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농사를 지었는데 내내 일하고도 한 번도 아프다고 드러누운 적이 없으셨어.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열심히 살아야겠다가 몸에 밴 거지.
엄마 옛날엔 먹고사는 게 제일 큰일이었지만 요즘 애들은 원하는 게 다르잖아. 내가 당신은 애들한테 너무 해주는 게 없다고 하면 첫마디가 “내가 할 일 안 하는 게 뭐 있노. 일 열심히 해서 돈 벌어주는데” 했잖아. 항상 12시 넘어서 들어오고, 일찍 들어오는 날은 자기 공부하고, 애들하고 같이 놀아준다는 거 자체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게 불만이었던 거라.
아들 저도 아빠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밥도 잘 안 먹고, 용돈 달라는 소리도 잘 못했어요.
아빠 그래. 니들하고 진짜 오순도순 이야기해 본 적이 없던 거 같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할 건데 그걸 못 참아서 이래라 저래라 야단만 쳤지. 니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아빠하고 대판 싸운 거 기억나나?
아들 그때가 학원 다니다가 가출했을 때였잖아요.

강태규. 2005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아빠랑 대화하면 TV랑 하는 것 같았어요
아빠
중학교 때는 공부해야 된다는 개념이 딱 들어 있었거든. 근데 공부 안 하지, 컴퓨터 게임도 많이 하지, 야단치고 혼내도 바뀌지 않으니까, 아빠도 너무너무 힘들어서 퇴근하기가 싫었어. 집에 오는 게 꼭 감옥소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지.
아들 저도 아빠가 집에 오는 게 싫었어요. 배가 좀 차가지고 깨작깨작 먹으면 아빠가 밥상 엎으면서 “왜 밥을 그래 먹노!” 하고…. 제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혼내고 화내시니까요. “왜 꼭 그래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빠랑 대화하면 TV하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대화가 안 통하니까.
아빠 다행히 그 무렵에 마음수련을 하게 됐지. 엄마가 잘 가는 미장원 원장님이 니가 오락에 빠져 있다고 하니까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 보내라 한 거야. 부모부터 해야 한다고 하기에 아빠도 했지. 근데 수련을 해보니까 아빠가 정말 잘못한 게 많더라. 한 번도 니들이나 엄마 말을 수용한 적이 없었어. 미안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엄마 당신 바뀐 거 보고 나도 너무 놀랐어. 나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하고, 애들한테 너무 해준 게 없다 하고.
아빠 수련하고 처음 한 달 동안은 정말 마음이 편안하데. 근데 또 아들이 게임을 하면 속이 디비지고, 딸내미까지 친구하고 문제가 있어 학교를 휴학하겠다고 하니까 마음수련을 계속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아들 아빠를 이해하면서도 나한테 강요하는 게 싫었어요. 저도 수련하면서 아빠에 대한 마음 버리면서 울기도 했는데, 아빠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느껴져서였어요. 아빠가 틀에 매여 사는구나, 그래서 아빠도 괴롭고 주변 사람도 괴롭구나, 하고요.
아빠 그래 맞다. 작년에는 너하고 아빠하고 엄청 다퉈서 결국 문짝 다 부숴지고, 엄마가 보기에 이러다 진짜 아들하고 애비하고 원수가 되겠다 싶어 니가 원룸 구해서 집 나갔잖아. 그러고 나서 아빠도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나. 그렇게 불같이 성질을 내고 보니까 너무나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데. 진심으로 제대로 버린 게 없었구나 싶었어. 그때부터 수련을 정말로 열심히 했어.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나로 인해서 비롯됐다는 걸 깨닫게 됐지. 그래, 우리 가족부터 100% 수용해보자 다짐을 하고, 일단 너희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엄마 그래도 아빠가 아들한테 얼마나 공 많이 들였노. 아침 먹다가 아들 좋아하는 거 있으면 엄마한테 그것 좀 싸라 해서 아빠가 차에서 아침 먹이고, 학교도 데려다 주고.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잖아. 그러더니 니가 거짓말같이 게임 안 하고 올해 2월부터 공부하겠다 했잖아.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생긴 거지
아들
이제 게임 그만하고 공부해야겠다 결심했을 때 그냥 눈물이 났어요. 왜 울었는지 몰라도 속으론 기뻤어요. 제가 공부 안 해도 겉으론 되게 편안해 보이니까 친구들이 속세를 떠난 도인 같다 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부턴가 쟤들은 저리 열심히 하는데 나는 뭐하고 있지 이런 생각도 들고.
아빠 공부하겠다 하고는 휴대폰도 컴퓨터도 다 끊어버렸잖아. 집에도 다시 들어오고.
아들 나갈 때 아빠 얼굴 죽을 때까지 안 볼 거다 하고 나갔는데, 아빠도 바뀌고 있고, 올해 아빠가 화내는 건 한 번도 못 봤으니까요. 밤늦게 컴퓨터 하다 아빠한테 들켜도 그냥 들어가라고만 하시고. 아빠가 옛날엔 전부 부정이었으면 요즘은 항상 긍정인 거 같아요.
엄마 태규가 어느 날 우리 가족 중에 아빠가 제일 힘들겠다고 한 거, 당신 알아요? 자기는 공부하기 싫으면 안 하고, 엄마도 우리 보내고 나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아빠는 우리를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해야 되고, 돈 벌어야 한다고 하면서.(웃음)
아빠 우리 아들이 그런 소리를 했나?(웃음)
아들 아빠는 보면 은근히 정이 많으신 거 같애요. 친척 분들이 어려우면 아빠가 많이 도와주시잖아요. 항상 엄마도 아빠는 저 작은 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책임지냐고, 그런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아빠도 힘드니까 우리한테 신경질 낼 수도 있는 건데, 그걸 이해 못 했던 게 반성이 됐어요.
아빠 수련하면서 우리가 다 서서히 바뀐 것 같애. 당신도 그랬잖아. 세상 살면서 어떻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애들이 다 그렇게 클 수 있겠냐고. 애들한테 너무 바라지 말자,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아, 맞다 내가 애들한테 너무 집착해서 내가 바라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했구나,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데.
엄마 내도 참 잘못한 게 많았지. 당신하고 사이가 안 좋다 보니까 애들한테 당신과의 자리를 못 만들어준 거 같애. 늘 당신은 바쁘니까 하고 제외시켰으니까.
아들 전엔 대학 갈 생각이 없어서 공부도 안 했는데 요즘은 목표가 생기니까 좋아요. 한번은 나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해 보는데, 장점은 못 적겠더라고요. 그때 내가 진짜 안될 놈이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엄마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생긴 거지. 전엔 지겨워서 일부러 학교에서 잤는데 지금은 잠 올까봐 밥도 조금 먹고 수업 다 듣고 한다며. 공부한 지 한 달 만에 성적도 많이 올랐고.

조부덕. 1989년도에 강영성씨와 결혼해서 남매를 키우고 있다. 명상은 2005년에 시작했다.

아빠가 매사 긍정적이니 집안이 화목해요
아빠
니 얘길 들어보니까 아빠가 자꾸 내를 돌아보듯 너도 똑같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잘못인지 스스로 찾고 해결하려 하고.
아들 아빠가 매사 긍정적이 되니까 집안 자체가 화목하게 돌아가잖아요. 옛날엔 불화의 원인은 아빠라고 생각했는데.(웃음)
아빠 (웃음) 맞다. 아빠가 바뀌니까 모든 게 순리대로 되잖아. 아참, 올 초 니가 고3이라고 보약을 지어줬는데, 너는 괜찮다고 아빠 힘드니까 아버지 주라는 얘기 엄마한테 들었을 때, 아빠가 얼마나 짠했는 줄 아나.
아들 약 먹기 싫어서 그런 건데요.(농담^^)
아빠 하하하. 그 말 들었을 때 아빤 정말 행복했다. 우리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열리고 있구나 싶었어.
엄마 언제부턴가 아들이 아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전에는 무늬만 가족이었잖아. 근데 수련하고 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가족이 됐다는 게 너무 고마워.
아빠 알다시피 아빠가 얼마나 잘난 척하고 자존심 강하고 남한테 굽히는 거 억수로 싫어했나. 그런 내를 니들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해준 거라. 요즘 나는 진짜 근심 걱정이 없고, 누가 조금만 우스갯소리 하면 그냥 웃음이 나고 그래. 요즘은 환자들이 “같은 사람 맞습니까?” 그런다니까. 전엔 사람들이 “저 한의원 원장은 완전 얼음이다. 사람 보고 가지 말고 병 나으러만 가라”고 했다잖아.
엄마 맞어. 당신 진짜 많이 달라졌어.
아들 다 제가 복이 많은 아이라 그런 거예요.(웃음)
아빠 그래. 니가 복덩이다. 엄마 아빠 마음수련도 하게 해주고.(웃음)

우는 남자가 아름답다, 중년 남성의 눈물 바람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는 말이 있다. 울고 싶어도 아무나 울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나마 울 수 있으면 다행이다. 특히 남성들은 눈물을 흘리지 못해 병난다. ‘울 수 있는’ 방을 만들어 남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곳이 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울 수 있는 공간에서 한바탕 울고 난 중년 남성들은 ‘울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안해지는 것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취재, 사진 정하나

“난 여태 울어본 적도 없고, 울 새도 없었어요”
말쑥한 양복 차림의 50대 남성이 굳은 얼굴로 들어선다. 중소업체의 대표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 증상으로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아, 내가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은 뛰는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하고 아무래도 안 되겠는 깁니다. 괜찮아지는 약 있으면 좀 줘보이소.”
“언제부터 그런 증세가 있으셨어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갓집 다녀오는 길에 그럽디다. 밀리는 차 안에서 가슴이 답답~ 해지는데, 갑자기 숨을 못 쉴 것 같고 이대로 죽을 것 같더라고. 마음이 심약한 것도 아닌데, 나는 사막에 던져놔도 사는 사람이란 말이요.”
“그런 증세는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한테 많이 나타나지요.”
“그렇죠. 열 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장남인데 그때부터 안 해본 게 없어요. 지금도 나를 따르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게 힘들게 사시면서 마음이 괴로울 때는 없으셨어요?”
“참,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게 없겠습니까?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르지….”
“….”
“아버지 돌아가신 날 울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요번에 친구 아버지 돌아가시는 것 보는데 아버지 생각도 나고. 이러다가 죽으면 우리 노모와 자식들도 결혼 안 했는데 어떻게 죽나 싶고. 거 참….”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이 있으셨나 보네요.”
“그런 순간이 많았죠…. 말해 뭐합니까….”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흠, 흠 헛기침을 하며 눈물을 감추려 하자 김성미 원장이 다시 말을 잇는다.
“힘드신 거 있으면 얘기를 하세요. 사장님도 사람인데 어떻게 한 면만 보이며 살아가시겠어요. 울고 싶으면 우세요.”
“내가 여지껏 한 번도 울어본 적도 없고, 아버지 죽은 후로는 울 새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상갓집 갔다 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납디다. 인생이 이게 뭔가 싶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리막길밖에 없구나, 인제 죽는구나, 너무너무 불안하고 외롭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6남매 맏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며,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심경을 토로하던 그는 마침내 눈물을 보이고야 만다. 봇물이 터진 눈물은 이내 흐느낌이 된다.
“우세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사장님이라고 울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 못 운 거 지금 우세요. 여기서는 괜찮아요.”
한참 동안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진정이 될 즈음, 조용히 지켜보던 원장은 그를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김성미 원장은 <마음과마음> 정신건강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가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의 방을 만든 것은 6년 전이었다. 상담하다 보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남성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억누르려 하거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처음부터 울 생각으로 오는 분은 안 계세요. 그런데 상담하다 보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동안 참 외로우셨겠다, 하는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시고요. 한번 울고 나면 무장해제가 돼요. 나중엔 함빡 웃음을 지으면서 울 수 있는 게 이렇게 편해지는 것인 줄 몰랐다고 하세요.”

“그동안 참 외로우셨겠어요.” 자기의 감정을 돌아볼 새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중년 남성들은 이런 공감의 말 한마디에도 금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로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꼽는 김성미 원장은 영화는 ‘파이란’, 소설은 조두진의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추천한다.

자기 감정조차 잘 모르는 ‘마음 난독증’
처음엔 정신과를 찾아온 것만 해도 남자들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다. 게다가 의사가 여성인 것을 알면 눈물을 흘리기는 더욱 어려운 조건이 되니, 이런 상황에서 한동안 흐느끼다 보면 자연히 자신의 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된다.
“40~60대의 중년 남성들이 특히 많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회사의 중견 간부급이나 경영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지요. 이분들은 대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뒷골이 댕긴다, 머리가 아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라며 신체 증상을 호소하지만 결국 마음에서 기인한 병이라는 것이다. 열심히 앞만 보며 살아오다가 이제 어느 정도 정점에 선 단계가 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건강마저 예전 같지 않으니 불안이 크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가 큽니다. 회의감 위기감도 잘 느끼고, 슬프고, 허전하고, 마음도 약해지지만, 직장이나 가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도 많은 거지요. 나약한 모습을 어디 호소할 곳도 없고 겉으로는 더 강한 척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남성 중엔 마치 난독증처럼 자신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감정을 억압만 하며 살아오다 보니 진짜 자기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지식에 대해서 늘어놓는 것에는 능숙하지만, “오늘 기분이 어땠어요?”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김원장은 때로 다음과 같은 말로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바꾸어 말해준다고 한다.
“위장병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화가 날 일이 많다고 이야기하세요”라고 말하고, “위장이 아픈 것은 화난 것을 참아서 아픈 것”이라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얼굴이 자주 화끈화끈해진다” 하면 “사람들 앞에서 바보 취급을 당할까봐 두려웠다 이야기하세요”라며 신체의 증상이 아닌 감정이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너무 자기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어릴 때처럼 잔잔하게 이야기하세요”라고 하면서.

남편이 울 땐 부끄럽지 않게 격려해주세요
사람의 마음을 보살피는 정신과 전문의인 김성미 원장도 한때는 눈물을 흘리는 환자를 보면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니 중증이구나’ ‘이제 좀 덜 울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남자들의 울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다. 이십대 후반의 젊은 의사인 그녀는 환자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보다는 의학 서적을 파고들면서 진단명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 많은 아이였지만, 성인이 되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매진하는 그 시간은 눈물을 잊고 산 세월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 세 명을 낳고, 쉴 틈 없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다시 눈물을 되찾게 되었다.
“전투적으로만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 후 환경이 바뀌면서 몸도 아프니까 예전만큼 활동할 수가 없었어요. 뭔가 이렇게 숨 가쁘게 사는 게 다가 아닌데 하며 저를 돌아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흘린 눈물이 많았죠.”
그 눈물은 진정으로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환자가 무슨 이름의 병이냐를 찾기에 앞서 환자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서 귀 기울였다. 그리고 ‘눈물’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결국 환자들 이야기가 제 얘기죠. 이제는 울면 성공이라 생각해요. 울 수 있다는 것은 꼭 흑백TV를 보다가 칼라TV를 보는 느낌처럼, 세상이 바뀌는 거더라고요.”
김성미 원장은 가정에서도 아빠나, 남편이 눈물을 흘릴 때 편안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말한다.
“중년이 되면서 마음이 약해지니까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려요. 그럴 때 아내들이 ‘와 우노, 보기 싫다, 애들 보는데 빨리 들어가라’ 그러세요. 남편이 약해지면 자기 울타리가 무너질까봐 겁이 나는 거죠.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남편이 울면 드디어 저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었구나, 귀한 기회로 보시면 좋겠어요. 손수건 갖다주면서 옆에서 등을 쓸어준다든지, 부끄럽지 않게 격려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저 어릴 때는 잘 울었어요. 이 마루는 누나들하고 놀던 시골 들마루 같네요.” 눈물방에 들어간 남성들은 그 공간을 무척 편안해한다.

“울고 싶어진다는 것은 약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눈물은 진정한 자기와 만나는 신호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원장은 집에서도 자신의 우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단다. 친구나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좋은 교육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잘 우는 막내아들에 비해 맏딸은 참 씩씩하지만 강한 척하고 눈물 안 보이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그녀다.
“가족이든 친구든 또는 환자든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울 수 있는 공간에서 울라고 조언합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면 되거든요. 물론 제 자신에게도 해당되고요.”
때로는 그녀도 뭔가 너무 꽉 찼다 싶을 때는 혼자만의 장소를 찾는다. 차 안이나 가까운 절을 찾아간다. 두 아름 정도 되는 산벚꽃나무와 냇물이 흐르는 그곳에서 실컷 울고 나면 개운해진단다.
자신을 만나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성공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 앞만 보고 질주할 것이 아니라, 가만히 멈추어 서서 자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첫 시작인 것이다.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그런 상황과 마주쳤을 때 외면하거나 부딪쳐 싸우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 들어줄 사람을 찾아 울거나, 혼자만의 장소를 찾아가 우세요. 울고 싶어진다는 것은 약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2010. 6. June 월간마음수련

그냥 존재하는 진리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참인 그 마음에는 그냥 있구나
흘러가는 물도 세상이 변하여도
참인 그 마음은 그냥 있구나
흘러가는 세월 따라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늙어가도 그 마음은 그냥 있구나
죽어도 그 마음은 그냥 있구나

소리 높이 외치던
가슴 치며 통곡하는 수많은 인생사에
모든 한도 모든 원도 그 마음에는
인간사에 일체로부터 떠나갔구나
어디 가고 어디에 있느냐
한이 많은 인생사는
뜬구름 같은 것을 마음에다 담고 살아가면서
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시비하지만
모두가 잘난 이가 없는 뜬구름 인생사
말만 많았고 말만 잘났지 잘난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물거품 인생사인 줄
알지를 못하는 것은
물거품이니 세상 나 살지 못하니
알 수가 없는 것이라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갈 곳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속서 뱅뱅 돌고 있기만 하누나
소리도 냄새도 맛도 없이 소리 소식도 없이
언젠가는 참이 와서
세상에 이치를 가르치고 세상을 말하나
뜻도 이유도 모르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소리도 안 들리고
보지도 못할 것이다

詩_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6. June 월간마음수련

불안 제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다

title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고 전문 지식으로 세계 최고의 다국적 기업에서 CEO로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벌어들인 돈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이는 나에게는 선택이 아닌 일종의 사명이었다. 일등을 향한 의지가 강했던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목표를 향해 영어와 전공 공부에 임했고, 토익 고득점 획득, 편입 합격, 교환 학생 파견 등 소위 말하는 ‘취업 스펙’을 갖추었다. 나는 스스로 진취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진석. 중앙대 경영학과 4학년

바둥거리며 열심히 사는 현실의 삶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충족되지 못했다. 현실과 이상의 격차 속에서 불안, 초조, 집착의 마음은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 심리적 고통이 극에 달해 수업을 한 시간만 들어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강의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다른 학생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발표할 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 등으로 몸도 늘 긴장 상태였고 경직되었다. 수업 후에는 그런 마음으로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무기력해져 버리곤 했다. 달성하려던 목표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러한 집착의 마음을 바꾸겠노라 마음을 먹어 보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결과는 더 큰 고통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이 마음으로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고, 결국 나는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교내의 학생상담센터에서 6개월간의 상담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는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제시해주신 분은 의외로 아버지셨다. 책을 통해 마음수련 명상을 알게 되었다며, 권해주신 것이다. 나는 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을 뒤로하고 명상을 하러 갔다.
마음수련 명상은 누가 봐도 납득이 가는 방법인지라 해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나를 옥죄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정말 마음을 버리면 버려지냐”고 몇 차례 물어보기도 했다. 명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버려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마음을 버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꼼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이어서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버리는 데에만 남보다 여러 날이 걸렸다. 또 명상 후 달라진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끊임없이 의심한 탓에 명상이 굉장히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여러 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명상을 시작한 후 2주일이 채 되기 전에, 어린 시절 상대에게 억눌려오고 또 그 상대에게 나중에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앙갚음을 해주겠노라 다짐했던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을 돕기 위해서 성공하려 한다고 합리화시켰던 그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은 내가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세상에 인정받고 싶어서 그토록 성공에 집착했던 것이었다. ‘항상 남을 위해 산다고 생각해 왔던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었구나.’ 내가 가졌던 완벽주의 또한 나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교묘한 도구임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나를 힘들게 했던 불안, 초조, 집착의 근본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나만의 잣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닌, 내가 바라는 목표를 내세워 그것을 고집해 왔다. 그렇게 효율성에 매여 살고 사소한 결과에도 연연하다 보니, 좁은 마음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현재 조건에서 그냥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나를 움직여온 수많은 무의식의 마음들이 버려지면서 차츰 혈색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 일이든 몸을 먼저 움직여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요즘은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쉽다. 그만큼 어떤 일이든 잡념과 걱정 없이 하니 재미가 있다. 싫어하던 전공 공부를 수월하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도 보너스처럼 얻은 수확이다.
수업 시간에도 내가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고 넘어가니 훨씬 마음이 편하고 오히려 효율성도 높아졌다. 발표를 할 때도 긴장이 덜 되고 주변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줄도 아는 나의 새로운 모습이 경이로울 정도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했던 내 모습이 수련을 한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게 느껴진다.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 마음이, 현재 내가 취하고 있는 이 행동이 바로 나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미래의 어떤 모습도 내가 아니기에, 더 이상 그 허상에 속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힘든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싶은 소원이 또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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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발행’ 소원 이룬
소녀 시인 유진이의 희망 이야기

뇌동정맥기형을 앓고 있는 장유진(16)양의 소원은 ‘시집을 내는 것’이었다. 절망 속에서 별빛 같은 희망을 안겨준 것은 시(詩)였다. 그리고 주위의 도움으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을 때, 유진이에겐 또 다른 소원이 싹텄단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것. 자신의 시가 아름다운 희망이 되길 기원하는 유진이의 소원 이야기.

취재, 사진 정하나

저도 이젠 쓸모 있는 사람 된 거 맞죠?
“처음에 시집을 내주신다고 했을 때는 정말 될까, 안 해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그런데 시집을 받았을 때 벅차고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예전엔 정말 자신감이 없었거든요. 사실은 제가 별 볼일 없잖아요. 옛날에는 울기만 했는데 저도 이제 쓸모가 있는 거 같아요.(웃음)”
유진이는 불과 열 살 때인 6년 전, 첫 시집이 나왔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첫 시집을 내준 복지관에선 이 ‘꼬마 시인’을 위해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마련해주었다.
그날 유진이는 너무 떨려서 잠도 이루지 못했단다.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유진이는 뇌혈관들이 엉키는 ‘뇌동정맥기형’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여섯 번의 뇌출혈과 그로 인한 마비로 신체 왼쪽이 불편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다. 유진이가 학교 가는 날은 일주일에 나흘, 그것도 4교시 수업만 받는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싶고 친구들과도 놀고 싶지만 몸이 약한 유진이에게는 무리다. 또래 친구들의 일상조차도 유진이에게는 간절한 ‘소망’일 뿐이다.
외롭고 쓸쓸한 유진이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시 짓기. 글을 쓰다 보면 자유롭게 꿈꿀 수 있어서란다. 하늘, 바람, 꽃처럼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물론, 때로는 자신을 놀리는 아이에게 상처받은 마음조차도 시를 쓸 땐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다.

거울을 보면 / 슬퍼지는 내 마음… / “왜 이렇게 못나졌을까?” / “난 왜 이래야 하는 걸까?” / 하늘에게 원망도 하지만 / 내 마음에서는 / 자신감이 피어납니다 / “그래, 난 못났지만 열심히 / 노력해서 지금보다 더 착하고 / 예쁜 마음으로 다듬을 거라구” / 그러고 보면 / 거울은 모두에게 / 자신감을 주는 요술 거울인가 봐요 – 거울을 보면

유진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뇌출혈로 쓰러지고 나서였다. 장시간의 수술 끝에 구사일생으로 회복했지만 그해 겨울 뇌혈관이 다시 터지면서 마비가 왔다. 그로부터 거의 2년간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걸을 수도 없었다. 수술, 입원과 퇴원의 반복, 온갖 치료들…. 한순간에 장애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아홉 살짜리 꼬마는 “그냥 죽고 싶어!”라며 눈물 흘렸고, 그럴 때마다 병실은 환자들의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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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이뤄주는 소원별처럼 더 아픈 이들을 위해 꼭 ‘밥그릇’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병실 창가, 별빛 같은 야경 보고 시를 쓰다
“살기 싫었어요. 건강해서 막 뛰어다녔는데 한순간에 아파서 절뚝절뚝 걷게 되고.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재활 치료를 다녔는데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가면 택시도 안 태워줬어요. 그때 엄마랑 같이 우울증을 앓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심심하다고 보채는 유진이를 엄마가 병실 창가에 앉혀주었다. 13층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졌다.
“꼭 별처럼 예쁜 거예요. 그래서 엄마 저거 뭐야? 반짝거려, 그랬더니 엄마가 야경이래요. 그 느낌을 글로 쓰고 그림도 그렸는데, 엄마가 유진아, 너 시도 쓸 줄 알아? 이거 시야, 하시면서 너무너무 잘 쓴다고 칭찬해주시는 거예요. 주변 분들도 그러시고요. 저는 어린 마음에 칭찬을 받으니까 너무 신났어요. 느낌만 써도 칭찬을 받는구나 싶어서 그 이후로는 책이든 가방이든 보기만 하면 느낌을 적기 시작했어요.(웃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아픈 것도 잊고 힘과 용기가 생기곤 했다. 또 지나가는 사람이나, 사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였다.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재활 치료를 받을 때 로버트 다리를 가진 아저씨가 있었어요. 제가 엄마보고 저 아저씨 로버트 다리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브이자를 내보이면서 ‘아저씨 로버트 다리야, 멋있지?’ 하면서 가시는 거예요. 저는 그때 서는 연습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는 다리가 없으니까 나보다 더 아픈 건데 저렇게 밝구나 감동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고 희망을 많이 얻었어요. 웃음도 찾고 시도 많이 쓰게 되었어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생각하자 / 나보다 더 아픈 양우진 오빠를 생각하자 / 8살 적 그네 타기 실컷 한 것 생각하자… / 가족들 모두 있는 것을 생각하자 /… 나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어서 / 건강한 사람을 보면서 / 나 자신과 싸워 이기자 / 웃자 웃자 울지 말고 웃으면서 / 모든 것을 이기고 있는 그대로 생활하자 – ‘좋은 것만 생각하자’ 중에서

유진이는 “자신을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해 힘들어했는데 어느새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시가 벗이 돼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를 통해서 절망의 시간을 이겨냈듯이, 자신의 시를 읽고 아픈 사람들이 희망을 얻었으면 하는 ‘소원’이 싹텄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이 시들이 책으로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단다. 어머니 이성자씨는 유진이의 시집을 내주고 싶어 여러 출판사에 연락해 보았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유진이는 “보잘것없는 내 시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면 슬퍼지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소원은 이루어졌다.
2004년, 유진이의 사연을 알게 된 지역 복지관의 도움으로 드디어 첫 시집이 출간됐고, 2007년에는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인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재단’의 도움으로 네 번째 시집을 낼 수 있었다.
시집 출간을 계기로 ‘발달장애우 제주도 첫나들이 기금 마련’ 행사에 초대되어 시 낭송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읽기 시간에 시를 발표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집을 학교에 가져간 날, 유진이의 시집은 베스트셀러 못지않은 인기를 모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 나는 아무리 왼손을 못 쓰더라도 / 희망을 가지면 /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 지금은 학교도 다니고 / 시도 적고 이제는 TV에도 나왔으니 /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소원을 이루고 나서 유진이는 큰 희망을 얻었고, 한때는 꼬인 혈관이 다 없어졌다는 기적 같은 판정을 받기도 했다. 성장기라 다시 재발되었지만 투병에 임하는 유진이와 어머니의 마음 자세는 이전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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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가 많이 도움을 받았으니까 자기보다 약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해요.”
시집을 내는 소원을 이루고 나서 투병에 임하는 유진이와 어머니의 마음자세도 달라졌다 한다.

‘숨겨놓은 친구 같은’ 새벽에 시를 써요
“관심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의미 있는 낱말인 줄 몰랐어요. 부모가 해줄 수 없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니까 되더라고요. 처음엔 너무나 속상해서 비 오는 날 같이 울고 그랬는데 이젠 저도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감사함이 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유진이가 많이 도움을 받았으니까 자기보다 약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해요.”
그동안 노트 32권, 5천여 편이 넘는 시를 써온 유진이는 앞으로 시집을 백 권까지 내는 게 꿈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 꿈도 이룰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리고 자신의 겉모습만 보고 놀리는 아이들에게도 웃으며 대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지나가다 보면 야, 쟤 걸음 좀 봐봐, 하며 쑥덕거리는 애들이 많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맨날 울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좀 깨달았죠. 어떤 책에서 봤는데, 어떤 순간에든 두 갈래 길이 있대요. 한 길은 밝게 웃는 길, 그 길로 가면 좋은 일만 가득할 거래요. 또 한 길은 좌절하고 슬픈 길이에요. 그걸 읽고 아, 나도 맨날 상처받지 말고 웃음을 택해야겠구나 싶었어요. 누가 놀려도 그래, 나는 장애인이야, 나도 아프기 전에는 장애인 보고 신기해했잖아, 하면서 제 자신을 위로해요.”
유진이의 손등에는 ‘웃음 vs 슬픔’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을 때가 많다. 슬픔이 차오르거나 힘겹다고 느낄 때 ‘어느 쪽으로 갈래?’라고 자문하면서 웃고 싶어서다.
유진이는 보통 새벽 5시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시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숨겨놓은 친구 같은’ 깨끗한 새벽 시간이 좋단다.
유진이는 바쁜 게 너무나도 좋다. 머리 빡빡 밀고 병원에서만, 집에서만 있을 때 너무나도 그리웠던 생활이었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이 순간을 좀 더 누리고 싶단다. 그리고 아프고 힘든 장애인들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꾼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꼭 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시인도 되고 싶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도 되고 싶고, 내레이터도 되고 싶다는 유진이.
“저는 희망이 있고, 목표가 있어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더 열심히 시를 써서 저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정말로 보답하고 싶어요.”

밥그릇은 좋겠다 /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서 말이다 / 배부름을 채워주니까 /… / 나도 언젠가는 / 누구를 도울 수 있는 / 밥그릇이 되고 싶다 – ‘밥그릇’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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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는 보통 새벽 5시면 일어나 시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두 편 이상의 시를 꼭 쓰려고 하는 유진이의 꿈은 앞으로 백 권까지 시집을 내는 것이다.

 

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한 번밖에 없는 내 삶의 후회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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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시집온 지 18년이 지났다. 결혼 후 한국 생활과 사회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왔고, 항상 밝고 친절한 태도와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다. 일본인인 나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접할 때마다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겉으로는 맞추려 했다.
조금씩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내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때론 너무 괴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몰래 운 날도 많았다. 복잡하게 상처받은 마음을 풀기 위해 여러 가지 해소법을 시도했지만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진 않았다.
“다 이런 거지, 사람은 누구나가 고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라고 포기하던 어느 날, 나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준 것은 마음수련 명상이었다.
2007년의 봄, 남편과 친구를 통해 연이어 듣게 된 마음수련 센터에 찾아갔다. 수련 방법을 알려주시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외국인인 나에게도 쉬웠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명상을 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에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항상 밖에서 뭔가를 추구해왔던 나에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명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상 방법은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내가 안고 살았던 마음을 버림으로써 ‘나다움’을 상실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고, 오만하게도 누구보다 착하고 상냥하고 바르게 살아온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하니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내면과 정면에서 싸웠다. 내 마음세계를 제3자 입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내 인생이 비디오테이프처럼 흘러갔다. 본심을 가리며 살았던 나의 마음속은 이중인격 정도가 아니었다. 몇 겹으로 겹친 양파 껍질을 벗기듯, 얽히고설킨 실이 풀리듯 복잡했던 마음이 하나하나 버려지고 있음이 확인되자 명상이 즐거웠다.
2과정에 이르면서는 속이 완전히 텅 비워진 것같이 느껴지며 상쾌했다. 그러나 단계가 올라가면서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의외의 마음들도 나왔다. 한마디로 냄새나는 쓰레기통 속에서 썩은 쓰레기를 하나하나 집어내는 작업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더럽고 천한 쓰레기 같은 마음들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이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한 단계씩 과정이 올라갈수록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서 환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나타나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기도 했고, 때론 나 자신도 놀라운 여러 생각들이 올라와서 집중을 방해했지만 나는 계속 해나갔다. 7과정에 이르자 드디어 터널의 출구에 도착한 것 같은 안도감과 함께 감사의 마음으로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8과정에 이르러선 터널 밖의 세계를 맛보았다. 마치 새장의 새가 넓은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며 자유를 만끽하듯이,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세계의 테두리로부터 해방되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중3인 아들도 중1 때부터 방학 때면 청소년 캠프에 참가했다. 의식이 굉장히 넓고 커져서인지 변화된 아들의 언행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오랜만에 찾아오신 친척분에게 “진지는 맛있게 드셨습니까?”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또 괴로운 일이 생기거나 불리한 상황에 닥쳐도 변명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항상 안정되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우주처럼 웅대한 마음, 대자연과 하나가 된 순수한 마음, 그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전인 교육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후회 없는 값진 삶을 살 것인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지만 나는 마음수련 명상을 만나서 정말로 좋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늘 말한다. “가무사하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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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September 월간마음수련

청소년, 화를 다스리다

제목

중학교 2학년 다운이와 나원이는 같은 해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부모님끼리도 잘 아시는 사이라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 하며 자랐다. 일곱 살 때 다운이가 이사를 가면서 헤어졌던 둘은 3년 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서 다시 만났다. 친구들이 조금만 건드려도 화가 났던 다운이와 동생과 잘 다투었던 나원이.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난 뒤 이제는 친구들의 친절한 상담자가 될 정도로 너그러워졌단다. ‘그냥 절친’에서 ‘진짜 절친’이 됐다는 두 소녀의 성장 이야기.

정리, 사진 김 혜 균


“니는 돌멩이한테도 화냈다”
다운   나원이 니는 진짜 내성적이었잖어. 낯가리고 말도 잘 안 하고.
나원   니는 진짜 많이 셌어. 다혈질에다 조금만 짜증 나도 발끈발끈하고.
다운   그래. 니가 내 성질 많이 받아줬지. 고맙다 친구야. 역시 베프(베스트 프랜드). 니는 학교보다 집에서 짜증 많이 냈다고 했지. 동생이 말 안 듣는다고.
나원   동생이 자기 멋대로 하고 자기 맘대로 안 되면 드러눕고 떼쓰니까.
다운   난 엄마 때문에 힘들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혼내니까 무서웠어. 니 알잖아. 엄마가 안 돼, 하면 내는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았던 거. 스트레스받으니까 사소한 것에 짜증 내고, 학교에서 심했지. 맨날 남자애들이랑 싸우고, 막말하고, 그때도 난 멀쩡한데, 개념 있고 착한 나를 사람들이 가만 안 둔다고 생각했어.
나원   나는 맨날 동생한테 시비 걸고 때리고 화내고 그랬어.
다운   만만한 사람이나 친구들한테 그렇게 하게 되잖아.
나원   맞다. 친구들 중에 되게 순했던 친구를 골리기도 했지. 그래두 니는 내가 봐도 진짜 이상했단 말이야. 말하는 자체가 ‘뭐 했어? 왜 상관이야?’ 따지듯이 그랬어, 니는.
다운   그랬지. 누가 밥 먹었니? 물으면, 왜요? 밥이라도 사주게요? 밥 먹었으면 어쩔 건데요? 그러고, 지나가다 그냥 쳐다볼 수 있는 건데도 쳐다본다고 화내고. 날씨가 더우면, ‘우이씨~ 해를 다 뿌셔 버려!’ 그러고.
나원   니는 가만히 있는 돌멩이한테도 화냈다. 진짜 힘들었어.
다운   무조건 내 맘대로 하고, 내 맘대로 안 되면 그 자리에서 퍼부었어. 뇌에 필터가 없었던 것 같애. 할 말을 걸러서 해야 하는데 그냥 막 하는 거야. 근데 5학년 땐가 니가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받고 나서 점점 나처럼 돼가는 거야. 6학년 땐 우리 성격이 서로 바뀌었잖아. 니는 별거 아닌 거에 짜증 내고, 오히려 나는 들어주고.
나원   맞다. 잘 지내던 남자애들이랑 싸우고. 그땐 다 귀찮았단 말이야. 말 거는 것도 싫고.
다운   나두 5학년 때부터 애들이 만만하게 보니까 힘들었다. 찐따찐따 하면서. 엄마한텐 무서워서 말도 못 하고, 니한테 전화 많이 했잖아. 왜 학교에서 이런 취급당해야 하냐면서 울고. 그때 니도 안절부절못했잖아. 죽고 싶다 하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괜찮다고. 그땐 살도 많이 쪘었어. 난 내 분에 못 이기면 미친 듯이 먹거든. 말 그대로 성격파탄자였다. 책 다 찢고 문제집 다 던지고, 막 울고.
나원   진짜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욕이 들어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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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원 평상시엔 온순하다가도 동생과 다툼이 있으면 폭발하는 성격에 별것 아닌 일에 짜증도 잘 냈다고 한다. 하지만 명상 후 엄청나게 변화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도 크게 바뀌었다.

애들한테 상처 준 게 미안해 펑펑 울었어
다운   그때 정말 맨 밑바닥까지 갔다. 친구 관계도 성적도 부모님하고도. 그때 니한테 하루에 몇 번씩 문자 하면서 청캠(청소년 마음수련 캠프) 가자고 졸랐잖아. 진짜 마지막 소원이다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제발 같이 가자고. 그전엔 솔직히 엄마가 명상하라 해도 그렇게 절실한 적은 없었다.
나원   난 원래 명상하는 건 재밌었는데. 수영하고, 놀이공원도 가고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었으니까.
다운   명상하면서 선생님, 엄마, 아빠를 떠올리는데, 감정이 복받쳐 올라오니까 처음엔 버리기가 힘들었어. 선생님한테 혼났던 거, 엄마 아빠와 싸웠던 거 버리면서 계속 울었다. 그게 허상인데 버리면 없는 건데, 아무것도 아닌 걸 붙잡고 슬프다고 괴롭다고 죽고 싶다고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하냐고, 이거 들고 있으면 내가 만신창이가 되는 걸 아니까, 제발 버리게 도와달라고 목메어 울었데이.
나원   난 동생하고 싸웠던 거, 친구한테 집착하는 마음을 많이 버렸다. 따돌림당했던 것도 버리고….
다운   내도 친구들 많이 버렸다. 근데 진짜 상처 준 게 너무 미안해서 펑펑 울었다. 얼마나 막말하고 못되게 굴었으면 애들이 나한테 그랬을까. 내가 보낸 하나의 화살이 백 개로 돌아오더라. 말을 함부로 뱉으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나원   나도 그랬다. 다행인 건 명상하면서 저 친구도 나고, 이 친구도 나라는 걸 알게 되잖아.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나한테 한 것과 똑같다는 것도 알게 되고.
다운   엄마한테 왕따당한 거 이야기했을 때 ‘니가 한 만큼 돌아온다. 그건 알아야 된데이’ 이러시는 거라. 처음엔 엄마가 내 편을 안 들어줘서 섭섭했는데 명상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더라. 사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우리는 잔소리로 듣잖아. 근데 명상하고 달라지는 거 같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는 거 알게 되지.
나원   명언인데!(웃음) 그거 나도 되게 느끼고 있다. 동생 괴롭힌 거, 친구한테 막말한 거 다 미안했다. 엄마한테 짜증 낸 것도 미안하고.
다운   나도 엄마한테 쌓인 게 많았지만, 명상하면서 엄마가 아빠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나한테 푸는 걸 알겠더라. 그냥 엄마가 불쌍했어. 미안하기도 하고. 엄마가 우리한테 집착이 강했어. 우리만은 잘됐으면 좋겠고, 좋은 대학 가야 하고. 아빠도 큰딸이라고 날 강하게 키우려 했어. 맨날 기둥이다, 니가 우리 집 짱이다, 니가 잘돼야 동생이 잘된다 하고. 엄마가 수련하고 많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내 틀로 보니까 엄마가 변한 줄을 몰랐어. 처음엔 엄마가 옛날엔 잘못하면 때렸는데 말로 조용조용하니까 그게 더 무서운 거야. 나중에 확 폭발할까봐. 근데 끝까지 좋은 말로 하시는 거야. 우리 엄마가 왜 그러지? 그랬다.
나원   우리처럼 어른들도 마음을 버리면서 틀이 깨지니까 관대해지고 남의 입장에서 이해를 잘하게 되니까 변하시는 것 같애.
다운   내 틀이 네모난 창틀이라면, 다른 사람은 둥글 수도 있고, 세모일 수도 있잖아. 그 사람을 내가 맞춰줄 수도 있는 건데 내 네모 틀에 맞추려고, 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상처 주고 잘라 버렸잖아.
나원   맞아. 근데 그런 게 없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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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심리 치료를 권유받을 정도로, 제 분을 참지 못하면 머리카락을 뜯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은 공부도 스스로 하고, 특히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내 별명이 ‘엄마’야, 편한가봐
다운   정말 명상은 지우개 같아. 그 틀을 조금씩 지워주니까. 옆 창틀도 없어지고 위의 창틀도 없어지고. 텅텅 비워지니까 네모도 세모도 받아줄 수 있고 관대하게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돼.
나원   우리도 이제 사소한 것에 짜증 안 내잖아. 완전 관대, 관대.
다운   대박! 우린 베프(베스트 프렌드) 비비(베스트 오브 베스트)!! (웃음)
나원   난 어쨌든 이 명상 끝까지 할 거야. 어쩔 땐 애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좀 답답할 때 있지 않나? 난 답답하다. 분명히 안 좋을 걸 알면서도 하고 나서 후회하고. 우리는 안 좋은 일 있으면 마음 비우면 되잖아.
다운   싸우고 나서 힘들다고 울고.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 자신을 못 이겨서 힘들어하잖아. 한 번만 돌아보면 자기 잘못인 줄 알게 되는데, 무조건 남 탓 하고 자기 탓인 거 인정하기 싫어하잖아.
나원   전엔 동생하고 싸워도 무조건 동생 잘못이다 생각했는데, 마음을 버리니까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겠어.
다운   나도 친구들한테도 사과했어. 내가 왕따시킨 애한테 전에 못되게 굴었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니까 그 친구도 나한테 못할 짓 했다고 미안해하더라. 이제 뇌에 큰 필터가 생긴 거 같애. 옛날엔 막말했는데 지금은 할 말만 하고. 그러니까 애들이 나를 좋아해줘. 완전 용 됐지.
나원   니 진짜 달라졌어. 똑같은 말을 해도 기분 나쁘게 안 하고, 성격도 되게 순해졌다. 나도 요즘엔 친구랑도 잘 지내고 엄마랑도 연애상담 하고 그래. 전엔 엄마랑 말할 때 뭔가 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편해. 난 또 친구 집착이 진짜 강했거든.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혼자 길도 못 다니겠는 거야. 친구 없으면 죽을 거 같고, 외톨이가 된 거 같고, 왕따당할 거 같은 불안감, 그런 게 없어졌다.
다운   내가 그랬잖아. 옛날에 내 주위엔 친구가 없었다고. 전엔 솔직히 너밖에 없었잖아. 근데 요즘은 친구들이 다가와. 상담도 진짜 많이 들어 와. 하루에 5명씩 해주는 거 같다. 내 별명이 ‘엄마’야. 그만큼 편한가봐.(웃음)
나원   나도 애지만 요즘 애들 스트레스 많다.
다운   솔직히 부모님들이 자꾸 자기 틀에 가두려고 하시니까 더 반항하게 되잖아. 근데도 어른들은 자기 탓이라 안 해. 그래서 부모님들이 먼저 명상을 해야 하는 것 같애. 요즘 엄마한테 고마운 게 나를 존중해주셔. 옛날엔 엄마 틀에 맞추려 했는데 지금은 나를 인격체로 대해 줘. 그러니까 나를 믿으시는구나 싶어 안심이 돼. 전엔 뭘 해도 엄마가 무섭고, 혼날 것만 같았거든. 어떻게 변명하나, 무슨 말을 해야 믿어줄까, 그것 때문에 힘들었다. 근데 이젠 우리가 알아서 하잖아.
나원   맞아. 요즘 되게 느끼는 게 엄마, 아빠가 명상 안 하고, 성적으로 구속했으면 난 가출했을 거 같아.
다운   세상의 부모님들이 다 명상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야 애들도 바뀌고, 엄마도 아빠도 애들도 다 편해지니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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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Sept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