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열등감, 비교 스트레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김영희 45세. 화장품 영업. 서울시 강북구 쌍문동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25세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9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다가
화장품 영업 일을 처음 시작했다.
애들 돌볼 시간도 있고, 돈도 벌 수 있겠다 싶어서 선택한 일.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라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나는 일단 사람들의 메이커 옷차림과 명품 가방 앞에서 기가 죽었다. 특히 전문직 여성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대화 중에 문득문득 외래어나 영어가 나올 때면 못 알아들어 애먹을 때도 많았다. 말문이 막혀 대화가 끊겼고, 자신감은 떨어졌다. 똑똑하고 일 처리 잘하는 동료들과 비교될 때마다 기운은 없어지고,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한숨만 나왔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 리더십 강의를 들으러 다녔지만, 거기서도 영어는 큰 걸림돌이었다. 칠판 가득 써 있는 영어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적었지만, 내 노트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영업 잘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웃으면서 하루에 열 번씩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쳤다. 하지만 그 무수한 다짐도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영업 지역이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지면서 영업 실적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로에 섰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육성회비를 제일 늦게 내서 선생님께 또 혼나고 있었다. 간식으로 우유를 먹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가게 앞을 지나다가 과자가 먹고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초등학교 때 기죽어 살았던 사진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가난하고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난 지지리 복도 없어.’ 불만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달란트를 골고루 주신다는데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태어났나, 한탄하던 나를 계속해서 버리던 어느 날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내 모습이 너무나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나만 잘살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떼쓰는 꼴이었다. 똑같은 자식들이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마음 써주는 자식과 나만 예뻐해 달라고 떼쓰는 자식들 중 누가 더 예쁠까? 세상 이치가 그러할진대, 오로지 나, 내 가족만 잘살게 해달라고 투정 부린 나는 아무리 봐도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업이 힘든 것도 당연했다. 고객에게 친절했던 것도 오직 돈 한 푼 벌기 위해서일 뿐, 거기에 상대방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잘못 살아온 게 너무나 창피해서 한동안 울면서 다녔다.

우선 악착같이 돈 벌고 싶은 마음부터 내려놓았다. 매출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훨씬 일이 쉬워졌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 상대방도 편하게 받아들였다. 고객의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들으면 솔직하게 “제가 잘 모르거든요” 하며 다시 묻는 용기도 생겼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영업 실적도 10배나 올랐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 버린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함을 배웠고, 진정한 자기 계발이란 진심을 이야기하는 거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 같은 표정이야.” 정말 그렇다. 일을 하되 일이 아니라 마치 신나는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고권호 48세. KT 네트웍스 근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사진 홍성훈

입사 5년 만에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의 일은 지금까지 해온 일과 달랐다.
낯선 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상사의 지시는 쉴 새 없이 내려왔다.
책상 앞에 서류는 끊임없이 쌓여갔고,
현장은 현장대로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사람들과도 부딪쳤다.
상사의 지적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었고,
반면 상사한테 칭찬받는 동료에 대한 열등감은 커져 갔다.

 

‘동료는 예뻐하고, 나는 미워하는구나. 고향도 다르니까 대우를 더 못 받는 거야….’ 동료들의 모습을 확대 해석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혔고, 매사 비굴해져 갔다. 내가 자라온 환경도 원망스러웠다. 섬 머슴아로 태어나고 자라 대도시에 왔을 때부터 가졌던 열등감이었다. 작은 상처에도 꽁해지고, 대범하게 받아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불안이 엄습해왔다. 마치 전깃불이 확 하고 켜지듯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불안감이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지만, 결국 중간에 내려야 했다. 미친 듯이 병원을 찾아 헤매었고,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숨 쉬기도 힘들고, 발끝과 손끝이 점점 마비되는 듯했다. 이렇게 죽나 보다….

그렇게 예고탄도 없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는 큰 압박감을 주었고 결국엔 과부하가 걸린 거였다.

공황장애라 했다. 의사는 약은 보조 역할일 뿐 마음을 바꿔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고로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긴장 상태이고 심장은 쿵쿵 뛴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무대에 혼자 서 있는 기분.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올라가면 과호흡으로 위험해진다. 겨우겨우 호흡 조절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불안감에 몰골은 수척해갔다.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하고, 24시간 지옥 같은 공포가 이어지기도 했다. 한적한 곳으로 가면 나을까 싶어 시골로 발령을 내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업무는 여유 있는데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업무 습관은 그대로였다.

내가 마음이 여리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보니, 이런 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도 보면서 안정을 취하려고 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치 기타줄 당기듯이 뒷골이 당기는 증상까지 겹치면서 죽음의 공포가 연거푸 밀려왔다. 40대에 가장 많다는 ‘돌연사’. 내가 바로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때 불현듯 동료가 권유했던 마음수련이 떠올랐다.

죽어라 마음을 버렸다. 마음이 나약해서 이런 병에 걸렸다며 그동안 얼마나 한탄했던가.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다. 처참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가족들 앞에서도 노래도 못 부를 정도로 소심했고, 학급 회의 때도 말 한마디 못 했던 학창 시절….

나는 여리다, 소심하다, 하는 기억의 사진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나약하게 태어나게 했다며 부모님을 원망했던 마음도 버렸다. 나는 평소 사람들한테 잘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나의 내면을 살펴보니,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때문에 내 딴엔 잘해주던 상대한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런 자잘한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더 작아졌다. 마음사진들이 나를 계속해서 여리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사진이 스트레스였다.

부지런히 그 사진을 버려나갔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서류 한 장, 사람들의 말 한마디, 지시 사항에 쪼그라들고 상처받던 예전의 ‘고.권.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죽어라고 마음을 빼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공황장애도 밤손님처럼 언제 간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다.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연히 직장 생활도 달라졌다. 마음의 빼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과의 부딪침은 줄어들었고, 세상을 넓게 보고 수용하는 마음이 커졌다. 일을 할 때도 ‘과연 잘될까?’ 하며 미리 결과를 걱정하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는 나오듯이, 이제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고맙고, 남을 분별하기보다는 내가 과연 내 역할을 잘하는지부터 점검하게 된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모두들 직장 생활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해온 일만 고수하고 내 모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살아온 내 모습을 버리며 틀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 또한 바꿀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후배들도 존중하며 스스럼없이 도움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남 앞에서 말도 못 하던 내가 어느덧 가족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도 주도한다. 일도 모임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생활에 치인다는 마음이 없다. 안될 거란 생각 자체가 없다. 늘 긍정이다.

세상은 나의 마음을 펼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스트레스로 힘들거나, 안 좋은 일 때문에 괴롭다면 내 마음부터 살펴보길 권유하고 싶다. 자기를 되돌아볼 줄 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아요, 새싹채소 샐러드, 딸기 드레싱

여러 가지 쌈 채소의 어린잎을 따서 모은 새싹채소.

잎이 여리고 부드러워 생으로 먹기에 좋고,

샐러드는 물론 요리에 곁들이는 채소로도 아주 좋다.

비타민C와 식이섬유가 풍부한 새싹채소와 딸기 드레싱으로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은 샐러드를 만들어보았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새싹채소 200g, 노랑·빨강 파프리카 1/4개씩,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큰술, 드레싱(딸기 5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3큰술, 레몬즙 1 1/2큰술, 꿀 1작은술, 소금·후춧가루 조금씩)

만들기

① 새싹채소는 찬물에 씻어 물기를 잘 빼두고, 파프리카는 씨를 뺀 뒤 4~5cm 길이로 얇게 채 썬다.

② 딸기 드레싱을 만든다. 볼에 딸기를 넣고 포크로 짓이긴 뒤 나머지 드레싱 재료를 넣고 고루 섞는다.

③  큰 볼에 새싹채소와 파프리카를 넣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큰술을 넣고 살짝 버무린 뒤 그릇에 올린다.

④ ③에 ②의 드레싱을 끼얹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추위 이겨내고 다시 태어난 튤립처럼

새 학기, 새 직장….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봄날입니다.

튤립을 보고 있으면 이때에 정녕 딱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고 못생긴 알뿌리에서 ‘우리 이렇게 부활했어요’ 하고

당당히 꽃대를 드는 튤립들.

실내 식물 중에서도 노지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드문데요,

튤립 같은 알뿌리식물은 겨우내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가

영하의 추위를 다 이겨내고 이렇게 예쁜 꽃으로 피어오른답니다.

생명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는 튤립은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줍니다.

햇빛 밝은 햇빛과 서늘한 기온을 좋아해요.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꽃이 지고 나면 꽃송이 아랫부분을 자르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두세요.

잎이 완전히 시들면 알뿌리를 캐내어 그물망에 넣고 서늘한 곳에 뒀다가, 가을이 되면 냉장고에서 두 달 정도 보관합니다. 저온 처리 기간 동안 알뿌리 숫자가 불어납니다. 겨울에 알뿌리들을 흙에 심어주세요. 봄이면 다시 예쁜 꽃을 볼 수 있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1박 2일’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한 여행

KBS-2TV ‘1박2일’에서 외국인 근로자 특집을 마련했다고 할 때, 처음엔 좀 의아했습니다.
왜 굳이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국인 근로자’ 특집을 마련했을까 하고요.
그러나 방송은 예상치 못한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번 방송은 ‘글로벌 특집 2탄’이라고도 명명되었는데,
작년 여름의 ‘글로벌 특집 1탄’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KBS

니띤과 와프와 스캇 등 1탄의 외국인 참가자들은 노동이 아니라 공부와 예술 활동 등을 위해 한국에 왔고, 끼와 예능감까지 겸비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타향에서 외롭게 고생하고 있는 2탄의 외국인 참가자들은 성격도 수줍고 약간씩 위축되어 보였지요. 그들의 사연에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눈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이 받는 월급 중 5~6만 원을 제외한 모두를 고향으로 부친다는 네팔 친구, 강호동의 짝꿍 ‘까르끼’. 고향에 두고 온 여섯 살과 두 살의 어린 딸들이 매일 보고 싶다는 까르끼는 어머니가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자기가 부쳐주는 돈으로 약을 사 먹어서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이제껏 그들을 개별적, 인간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읽었던 신문 기사에는 중소기업주들이 외국인 근로자 고용 문제로 골치 아파하거나 차별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1박2일’에 등장한 사장님들은 아주 달랐습니다.

까르끼의 회사 사장님은 자신의 젊은 시절, ‘오일 머니’를 벌기 위해서 중동에 나가 일할 때 겪었던 어려움을 기억하기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진심으로 차별 없이 대해주고 싶다 말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우리의 형제들도 지금 어디선가 낯선 곳에서 이들과 똑같은 설움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민의 짝꿍인 스물여덟 살의 캄보디아 청년 쏘완은 방송에 출연한다고 나름 멋을 부리고 나왔던 모양인데, 사장님은 “멋 내고 갔다가 너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면서 자기의 점퍼를 벗어 입혀주시더군요. 하필이면 그날은 사상 최대의 한파가 몰아닥친 날이었습니다. 점퍼를 입고도 “사장님, 추워요!”라며 떠는 쏘완의 옷깃을 여미며 토닥여주는 사장님은 정말 아버지 같았습니다.

이승기의 짝꿍은 ‘예양’이라는 이름의 미얀마 친구였는데, 작업반장님은 예양을 굶기면 안 된다고, 복불복에 져도 밥은 먹여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으며, 사장님도 이승기를 향해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양을 향해서는 “고생하는 것도 재미있다. 한국에 와서 이런 추억 만들기는 정말 힘든 거다. 너는 행운아다”라고 격려했습니다. 역시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당신은 함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막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이 제 가슴에도 와 닿았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지구상에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함께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니까요.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 영화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타샤 튜더의 마음의 정원에서 봄을 맞는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버몬트주 30만 평에 자리한 비밀의 정원.
미국의 가장 사랑받는 동화 작가였으며 일러스트 화가로 백 권이 넘는 그림책을 펴냈던 타샤 튜더는
2008년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옷을 지으며 19세기 생활 방식으로 살았다.
일년 내내 꽃이 지지 않아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낙천적이며 소박하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철학을 두 권의 저서를 통해 만나본다.

출처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지음, 리처드 브라운 찍음)
<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리처드 브라운 찍음) (도서출판 윌북)

 

 

 

타샤는 붉은 꽃잎이 너울대는 자포니카 동백을 좋아한다. 아이리스 모양뿐 아니라 장미 형태를 지닌 종류도 갖고 있다. 모두 가운데 가루 같은 노란 수술이 있다. 3월이면 동백꽃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집에 와서, 여러 개의 백랍 단지에 꽂고 또 꽂는다. 그 섬세한 색과 극적인 움직임에 이끌려 믿기 어려울 만치 탐스럽고 복슬대는 귀한 동백꽃들을 모아놓는다.

타샤는 마당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식물 하나하나를 그대로 애지중지하면서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타샤는 꽃들에 대해 ‘그 아이가 싹을 예쁘게 틔웠는데, 날이 건조해서 시무룩해졌지요’라고 말한다. 정원이 늘 황홀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듯싶다.

헛간이나 집에서 일할 때면 종종 인생을 살면서 저지른 온갖 실수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얼른 그런 생각을 뒤로 밀어내고 수련을 떠올린다. 수련은 항상 불쾌한 생각들을 지워준다. 새끼 거위들도 수련처럼 마음에 위안을 준다. 새끼 거위의 눈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지? 단춧구멍을 낸 듯한 눈 주변과 보송보송한 솜털이라니. 기분 좋을 때 내는 이상한 휘파람 소리 같은 지저귐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 20~30년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수선화는 낙천적인 꽃이고 잘못될 리 없는 꽃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제비가 엄두를 내기 전에 오는 수선화, 3월 바람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네’라고 읊었다.

당신이 빛날 때

월요일 아침, 직원 회의를 마치고 우르르 교실로 향하던 중, 함께 걷던 오십 대 여선생님이 앞서 가던 이십 대 처녀 선생님에게 말했다.

“하선생, 어쩜 그렇게 예쁘고 날씬하노?”

젊디젊은 이십 대 선생님은 뜻하지 않은 찬사에 뒤돌아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에도 젊음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오십 대 여선생님도 그런 빛나는 청춘의 세월이 있었을 터이다. 그래서 나는 누님 같은 여선생님을 위로하듯 또는 아부하듯 한마디 하였다.

“뭘 그렇게 부러워하십니까? 선생님도 젊었을 때는 한 인물 했잖습니까?”

그랬더니 오십 대 여선생님이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더. 나는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예뻐예. 우리 집 아저씨가 그랬어예.”

함께 걷던 동료 교사들의 웃음꽃이 쏟아졌다. 그 속에 중년 남교사도 맞장구를 쳤다. “맞십니더. 우리 마누라도 내가 나이 들수록 멋지다 그랍니다.”

봄나들이 가는 아침이 밝았다. 정성 들여 세수를 하고 매끈하게 면도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데 아무래도 옷차림이 겨울의 칙칙함을 떨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봄날에 어울리는 화사한 스타일이 좋을 듯했다. 안되겠다 싶어 옷장 서랍을 열고 기웃거리니 아내가 깃이 있는 티셔츠를 입으라고 권했다.

“나이 든 아저씨 같아 보여서 싫은데?” “당신 나이 든 아저씨잖아? 점잖아 좋아 보이구만.” “나는 점잖은 스타일보다 나쁜 남자 스타일이 어울리는데….”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입지 않았던 원색 셔츠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 서 보니 가슴에 있는 큰 체크무늬가 상쾌했다. 아까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흡족했다.

“음. 적당히 나빠 보이는군. 됐어!”

그때 문밖에서 힐끗 나를 흘겨보던 아내가 중얼거렸다.

“나쁜 남자? 별꼴이야. 정말.”

아내의 혼잣말을 또 귀 밝은 내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별꼴’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지 않았다. 짧은 순간, 젊은 시절 시시껄렁한 수작을 거는 터벅머리 총각과 좋은 듯 싫은 듯 뽀로통해져서 톡 쏘아붙이는 콧대 높은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재미있어서 속으로 나를 옹호했다.

‘별꼴이 반쪽이다. 흥!’

지난 시절은 우리 곁을 떠나 이미 사라져 버린 빛. 젊은 날 풋풋했던 우리 모습도 믿지 못할 기억의 편린. 하지만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광경은 화사하게 쏟아지는 눈부신 빛의 향연. 강물과 유리창, 새벽하늘과 아스팔트 그리고 나뭇잎과 아이의 눈망울이 그렇게 빛나는 이유를 이제야 어슴푸레하게 알겠다. 삼월이다. 당신도 눈부시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우리 동네 어르신들을 소개합니다

동대전고 학생들의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

노가윤 동대전고등학교 3학년

2학년 학기 초였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우리 주위의 평범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자서전을 써드리는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하는데,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오라”고 하셨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운 작업’이라고 하셨지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어른들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런 점도 개선해보고 싶었고, 또 글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지원자가 꽤 많았는데, 최종적으로 20명의 아이들로 꾸려졌습니다. 복지관에서 다섯 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추천받았고 우리는 다섯 팀으로 나누어서 한 분씩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할머니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2010년 6월 12일. 인영순 할머니를 처음 뵌 날 너무나 떨렸습니다. 어색하게 첫 질문을 드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살아오신 이야기를 쭈욱 해주셨습니다. 형제분들과 부모님 이야기를 여쭙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얘기해주셨고, 점점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뵀습니다.

인영순 할머니는 음력 1938년 2월 3일에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태어나셨다 했습니다. 화장품 장사, 물비누 장사, 블라우스 공장….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셨고, 한국 전쟁 때는 작은오빠가 전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시절, 매일매일 울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셨을 때는 저희도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런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에 우리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저희는 할머니 댁에 가는 날이 기다려졌습니다. 저희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꼬들꼬들한 쌀밥과 된장국, 부드러운 계란찜 등 맛있는 반찬을 준비해주셨어요. 할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꼭 친할머니 댁에 온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말씀을 듣게 될까 기대도 컸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오신 이야기뿐 아니라, 저희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우리 때는 여자들은 공부를 할 수 없었어. 그저 시집을 가야 했지. 지금은  너무 좋은 시대니까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 “화내지 말고 상대방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덕분에 좋은 사람도 만나고 지금까지 잘 살 수 있었구나 싶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인생이 저렇게 허망하구나’ 싶었지. 나는 어리석게 살아왔지만 너희들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사실 그즈음 친구랑 사이도 안 좋아지고 해서 의기소침했었는데, 할머니 말씀을 들으며 자꾸자꾸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너무 경솔하게 살았구나, 편하게만 살려고 했구나, 우리는 환경이 잘 갖춰져 있는데도 만날 불평만 했구나, 하는 반성도 되었고요.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을 잘 가꿔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수업에도 활발히 참여하게 되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성공한 인생도 아니고 그저 기구하게만 살아왔는데, 글로 남긴다는 것이 부끄럽다 하시고, 내가 좀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분이셨어요. 어려운 와중에 자식들을 다 공부시키셨고, 돈을 많이 벌어 남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를 하신다는 할머니. 73세의 연세에도 노인복지회관에 다니면서 할머니보다 더 불편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도우시며 “내가 아직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하다”는 할머니.

할머니를 만나면서 어느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할머니의 인생 또한 가치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편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왜 불행할까 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아이가 되어갔어요. 하지만 할머니를 만나면서 많이 밝아지고 나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10월 중순,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문장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녹음해 놓은 할머니 말씀을 각자 맡아 정리하고 그것을 서로 돌려가면서 읽었습니다. 11월 중순에는 선생님께서 가제본을 만들어주셔서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확인을 받았습니다.

“아유, 뭐 말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내용이 뭐가 많네.” 할머니가 뿌듯해하시면서 당신의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고맙다고 하실 땐 정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제목이랑 표지는 할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편집했고, 드디어 11월 말에 책이 나왔어요. 제목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영순, 글 김민정·김현지·곽진빈·노가윤’이라고 우리 이름도 나와 있었습니다.

12월 3일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출판기념회도 열었습니다. 할머니는 “뭐 대단한 거라고 출판기념회를 해”라고 하셨지만 막상 그날은 자녀분들도 다 데리고 오셨답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자서전을 쓰는 데 보내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도 했지만,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송구스러울 만큼 너무 많은 것을 얻었거든요. 무엇보다 제가 정말 많이 밝아졌다는 겁니다.

지금 할머니의 소망은 후손들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평생 간직할 겁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주변의 평범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라고요. 왜냐하면 어느 유명한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말씀을 듣게 될 거니까요. 바로 그분들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분들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

2010년 6개월간의 작업 끝에

<여호와 이레> <그리스도와 함께> <夢꿈> <엄마의 일기> <송암 회고록> 5권의 자서전이 탄생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켰다

글 박초희 동대전고등학교 3학년

예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고지식할 것 같고, 우리가 하는 것을 억제하고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드셨다는 이유로 무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친구들 중에는 어른들 앞에 서면 투명인간이 된 듯 대화를 어려워하는 애들이 많았다 하지만 자서전을 쓰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우리 모두는 달라져갔다.

우리 조가 맡은 분은 이순금 할머니셨다. 1944년 생이셨는데,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기억, 즐거웠던 기억,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때론 할머니와 함께 한국 전쟁 피란길을 떠나야 했고, 때론 연탄가스가 방 안 가득 차는 위험한 고비도 맛봐야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께도 우리처럼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고,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지금도 열정이 있으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할머니들을 볼 때의 마음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냥 할머니려니, 했는데 이제 어떻게 사시는 분일까 관심이 가고 뭐든 도와드리고 싶어진 것이다. 한번은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가시는 할머니를 만나 도와드렸는데, 그러고 나니 뭔가 마음이 찡했다.

할머니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부모님의 마음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엄마가 나를 낳았으니까 용돈을 줘야 하고 아빠는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너무나 자식들을 사랑하며 키운 이야기를 해주실 때,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께서 “아무리 자식이 밉게 해도 퍼주는 게 부모니, 너희들이 효도를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더욱 엄마,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 친구는 엄마가 잔소리하면 예전에는 무시하고 지나치고 그랬는데 지금은 말도 잘 듣고, 엄마가 집안일 할 때면 할머니 말씀이 생각나서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것저것 돕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다.

희망을 디자인하다, ‘소셜 디자이너’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오지랖 넓기로 하면 그는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는다.
시민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참여연대, 삶을 돌아보게 한 재활용 운동 아름다운 가게,
나눔의 가치를 알려 기부 문화를 확산시킨 아름다운 재단, 그리고 우리 사회의 취약 지대인
지역 사회, 농촌, 소기업의 활성화를 위한 일을 해온 희망제작소에 이르기까지,
‘어렵고 힘든 곳에는 반드시 박원순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는 해외에서도 한 수 배우러 오는 그의 마법 같은 희망 이야기를 들어본다.

최창희 사진 홍성훈

 

그는 매일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방문하고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낸다. 희망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싱크탱크 희망제작소’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보고 싱크대 제작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름의 효과는 대단했다. 진짜 희망을 제작할 것으로 기대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방문하거나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그만큼 희망에 목말라 있었다.

희망제작소의 ‘사회 창안 아이디어’는 지금까지 4천여 개 가까이 된다. 그 가운데는 열매를 맺은 아이디어도 많다. 호화 관용차 등급 낮추기, 식품 유통기한 표기 확대, ATM 현금 인출 수수료 사전 고지, 경차 택시 도입 등. 아무도 연구하지 않던 문제들이 어느 날 개선됐다면 희망제작소 덕일지 모른다고 짐작해도 좋을 듯하다. 지방자치단체와 농촌을 일으키고 소기업을 지원하고 공공 리더, 모금 전문가 양성을 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시작할 수 없었던 ‘꿈같은’ 일들을 그는 실현해내고 있다.

희망제작소를 하며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 지었다. ‘세상을 바꾸고 디자인하는 사람’이라 한다.

정책보다 마음이 바뀌는 게 먼저라고 강조해 오셨는데요, 실제로 적용됐는지요.

생각했다고 바로 행동이 되거나 마음이 바뀌지는 않죠. 행동이 습관에 기반하기 때문이에요. 주로 제가 하는 일이 사회적인 일인데 그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게 인간의 내면, 정신적 치유, 평화로움, 수련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시민의식을 향상시키고 그 바탕에서 시스템과 제도가 바로 설 수 있어요.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몸과 마음을 다 의미하는 것이죠. 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면의 성찰과 이웃에 대한 배려, 시민정신은 사회의 중요한 인프라죠. 우리 사회가 이를 위해 노력할 때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희망의 조짐도 역시 사람에게서 나타나겠죠.

그럼요. 물론 언뜻 보면 절망적인 면이 훨씬 많죠. 하지만 현장에 가서 자세히 보고 관찰해보면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돼요. 저는 미래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입니다. 한국 사회만큼 다이내믹한 사회가 없거든요. 보세요, 제가 무슨 재주로 세상 변화를 지원하는 시민들을 하루에도 백 명이나 모으겠어요.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여전히 착한 마음을 갖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겠다는 사람이 많은 거죠.

수많은 사람을 만나시면서 제안도 하고, 모금도 하고 동참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전하고 공감을 얻으시는지요.  

진심이 담겨 있으면 그 사람의 눈과 얼굴과 몸과 모든 행동을 통해 다 드러나죠. 모금이라는 것도 그 바탕은 마음이거든요. 단돈 만 원이라도 그 사람한테는 귀한 돈이잖아요. 그 돈을 내놓을 때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죠.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확신, 정말 도와주시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하는 진정한 마음, 그걸 제대로 쓴다는 믿음이 있어야 설득력이 생겨요. 저는 늘 간사들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회원들을 향해서 절을 하라고 얘기해요. 그 마음이 통할 때 지원하는 사람도 생겨나요. 저는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뭘 못 한 적은 없어요. 늘 맨주먹으로 시작하는데 때가 되면 하늘에서 돈다발이 막 내려와요.(웃음)

처음 참여연대가 출범할 당시, 회원 수는 고작 7백여 명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소액주주운동이 호응을 얻으며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고, 자발적인 회비만 연간 1억원이 되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했을 때는 나눔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였다. 연예인들과 기업들도 기부에 적극 동참하면서, 설립 10년 만에 연간 백억 원 이상을 모금할 정도로 성장했다. 헌 물건을 기증받아 싸게 파는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 3월에 시작해 8년 만에 전국 백여 개 매장, 자원봉사 5천 명을 기록할 정도로 대성공했으며, 희망제작소도 최근 회원 4천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이 궤도에 오르면 바로 짐을 꾸렸다. 합리적인 비판과 정책 대안으로 정부와 재벌 기업을 긴장시키던 참여연대가 탄탄하게 자리 잡았을 때인 2002년 그는 사무처장을 그만두었다. “자리는 권력이기도 했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싫었다” 한다. 하지만 열과 성을 다한 그곳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앓아누웠다’는 그는 ‘하늘에 떴다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심정이었다’고 저서에서 표현했다.

참여연대를 떠나시면서 ‘시작부터 떠날 준비를 함께 해야겠다’ 결심하셨는데, 희망제작소는 어느 지점에 와 있나요.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늘 제 목표죠. 어느 정도 되면 저는 언제나 떠납니다. 처음엔 그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후론 처음부터 회원들이 주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합니다. 희망제작소도 거의 다 왔어요. 당장 그만두지는 않지만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주간 회의에도 안 들어간 지 일년 됐어요. 대부분의 사업이 저 없이 잘 돌아가요. 다만 새로운 사업들만 챙기죠.

인터뷰를 했던 당일은 공공여행 연합투어를 새롭게 출범시킨 날이었다. 흔히 ‘외유(外遊)’라고 비판받아왔던 공무원들의 해외시찰교육을 제대로 프로그램화한, 획기적인 사업의 시작이었다. 일본, 영국 등 전 세계에 네트워크가 있어 가능했는데, “이제 기반을 다졌을 뿐”이라는 희망제작소의 노하우를 이미 영국, 일본 등지에서도 배워 제2, 제3의 희망제작소들이 생겨나고 있다.

희망제작소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정책을 마련하고 실현해내는 비영리 조직은 사실상 세계 최초 아닌가요?

우리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하는 덴 잘 없죠. 외국에서 와보면 되게 놀래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요. 우리는 지방 정부하고는 일년에 몇 천 명씩 교육을 계속하거든요.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정부 일이에요. 그러면서 비영리 단체이고 기업이기도 하구요. 기존엔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죠. 그래서 저는 월급 안 받는 공무원이라고 이야기해요. 회원들이 세금을 내시니 우리도 작은 정부잖아요. 아니, 우리가 오히려 더 잘하는 거죠. 적은 돈으로.(웃음)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인데요, 누군가가 좋은 비전의 깃발을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마음수련도 세상의 마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잖아요.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게 그런 거죠.

1980년에 사법시험에 합격, 그는 검사가 되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고 일년 만에 변호사가 되었다. 스스로를 꽤 건전한 전문인이라고 자부했던 그가 전혀 다른 인생의 길로 접어든 것은 선배이며 인권 변호사로 존경을 받던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작고하기 전 병상에서 한 말 한마디가 계기가 되었다.

“박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

인권 변론은 물론 여러 단체에 크고 작은 기부금을 내고 있었고, 어려운 친구나 가족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온 그였지만 그 말은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젊은 나이에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고 제법 큰 집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는 더 좋은 차와 집이 눈에 밟히는 자신을 자각했단다. 더 늦기 전에, 그는 변호사 업무를 중단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민운동가의 길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고, 그는 다시는 부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리니 오히려 세상은 더 풍요로워졌다고 한다.

남들처럼 갖는 삶이 아니라 버리는 삶을 택했다고 하셨는데 어찌 보면 구도자의 삶 같네요.

사실은요, 저는 큰~ 장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웃음) 작게 버리면 작게 얻고, 다 버리면 다 얻어요. 저는 인생에서 집을 크게 짓고 큰 돈을 벌고 높은 직책을 갖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아래로 갈수록 더 귀함을 받고, 더 사람들의 박수를 받거든요. 우리는 늘 현장에서 뛰는 일꾼이고 싶어요. 근데 어딜 가나 대우하고 대표 하라고 하고, 사실은 그게 더 힘들어요.

참다운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세기 리더십은 희생과 헌신의 리더십이다, 이런 얘길합니다. 정치인이 됐든 기업인, 민간단체 리더가 됐든 자기 먹을 거 다 챙겨놓고 나서 남을 살피면 그건 리더가 아니죠. 리더는 늘 주변 사람들이 제대로 밥을 먹고 있는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살핀 다음에 자기가 쉬고 자기가 밥 먹어야 되는 사람이니까요. 부담과 희생의 자리죠. 그런데 그런 자격 없는 사람들이 리더를 가지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지난해 12월, 국회는 굶는 아이들을 위한 급식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시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결식아동제로캠페인’을 벌여 3주간 3억여 만 원을 모았다. 백만 명에 이르는 결식 아동을 다 돕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온라인을 통한 캠페인으로는 대단한 모금액이었다. 가난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는 게 원칙이지만, 굶는 아이들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정책에야말로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결식이란 말도 안 써요. 그 말 자체가 아이들한테 상처를 주잖아요. 무상급식에 대해서 부자 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냐고도 하지만 그러면 가난한 애들만 모아놓고 따로 주나요? 돈 조금 더 써가지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안 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죠. 돈보다 훨씬 귀한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수련을 정부에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래도 우리 사회가 희망이 많다고 믿는다”는 그는 할 일 많은 세상에 태어난 게 감사하단다. 올해 농촌 소기업, 청년 사회적 기업, 장애인 기업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팔아주는 일, ‘희망 수레’를 계획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아침부터 자정까지 뛰어다닌다. 그는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진로를 묻는 젊은이들에게 가급적 삶의 가장자리를 찾아가라고 권한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 그곳엔 기회도 많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이 너무 편안한 길만 간다고 우려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고된 일이 기다리는데도 희망제작소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섰다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희망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려면, 고민하고 계산하기보다 쉽게 버리는 데에서 힘이 나온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서 행복해지는가, 아니면 불행해지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누군가의 삶에 보탬이 되는가. 이런 물음이 돈과 사회적 지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누는 마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1956년 경남 창녕 생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후에 다시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잠시 검사 생활을 하다가 1983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80년, 90년대를 아울러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치열하게 살았다. 1996년 참여연대를 창립하여 사무처장으로 소액주주운동 등 획기적인 성과를 이끌어냈고, 2000년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 진보사회운동을 나눔과 기부로 확장하고, 2006년부터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희망’을 실현해내고 있다. <국가보안법연구 1, 2, 3> <NGO,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꾸다>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막사이사이상’ ‘단재상’ 등을 수상했다. http://www.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