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오지랖 넓기로 하면 그는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는다.
시민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참여연대, 삶을 돌아보게 한 재활용 운동 아름다운 가게,
나눔의 가치를 알려 기부 문화를 확산시킨 아름다운 재단, 그리고 우리 사회의 취약 지대인
지역 사회, 농촌, 소기업의 활성화를 위한 일을 해온 희망제작소에 이르기까지,
‘어렵고 힘든 곳에는 반드시 박원순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는 해외에서도 한 수 배우러 오는 그의 마법 같은 희망 이야기를 들어본다.
글 최창희 사진 홍성훈
그는 매일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방문하고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낸다. 희망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싱크탱크 희망제작소’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보고 싱크대 제작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름의 효과는 대단했다. 진짜 희망을 제작할 것으로 기대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방문하거나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그만큼 희망에 목말라 있었다.
희망제작소의 ‘사회 창안 아이디어’는 지금까지 4천여 개 가까이 된다. 그 가운데는 열매를 맺은 아이디어도 많다. 호화 관용차 등급 낮추기, 식품 유통기한 표기 확대, ATM 현금 인출 수수료 사전 고지, 경차 택시 도입 등. 아무도 연구하지 않던 문제들이 어느 날 개선됐다면 희망제작소 덕일지 모른다고 짐작해도 좋을 듯하다. 지방자치단체와 농촌을 일으키고 소기업을 지원하고 공공 리더, 모금 전문가 양성을 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시작할 수 없었던 ‘꿈같은’ 일들을 그는 실현해내고 있다.
희망제작소를 하며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 지었다. ‘세상을 바꾸고 디자인하는 사람’이라 한다.
정책보다 마음이 바뀌는 게 먼저라고 강조해 오셨는데요, 실제로 적용됐는지요.
생각했다고 바로 행동이 되거나 마음이 바뀌지는 않죠. 행동이 습관에 기반하기 때문이에요. 주로 제가 하는 일이 사회적인 일인데 그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게 인간의 내면, 정신적 치유, 평화로움, 수련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시민의식을 향상시키고 그 바탕에서 시스템과 제도가 바로 설 수 있어요.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몸과 마음을 다 의미하는 것이죠. 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면의 성찰과 이웃에 대한 배려, 시민정신은 사회의 중요한 인프라죠. 우리 사회가 이를 위해 노력할 때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희망의 조짐도 역시 사람에게서 나타나겠죠.
그럼요. 물론 언뜻 보면 절망적인 면이 훨씬 많죠. 하지만 현장에 가서 자세히 보고 관찰해보면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돼요. 저는 미래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입니다. 한국 사회만큼 다이내믹한 사회가 없거든요. 보세요, 제가 무슨 재주로 세상 변화를 지원하는 시민들을 하루에도 백 명이나 모으겠어요.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여전히 착한 마음을 갖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겠다는 사람이 많은 거죠.
수많은 사람을 만나시면서 제안도 하고, 모금도 하고 동참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전하고 공감을 얻으시는지요.
진심이 담겨 있으면 그 사람의 눈과 얼굴과 몸과 모든 행동을 통해 다 드러나죠. 모금이라는 것도 그 바탕은 마음이거든요. 단돈 만 원이라도 그 사람한테는 귀한 돈이잖아요. 그 돈을 내놓을 때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죠.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확신, 정말 도와주시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하는 진정한 마음, 그걸 제대로 쓴다는 믿음이 있어야 설득력이 생겨요. 저는 늘 간사들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회원들을 향해서 절을 하라고 얘기해요. 그 마음이 통할 때 지원하는 사람도 생겨나요. 저는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뭘 못 한 적은 없어요. 늘 맨주먹으로 시작하는데 때가 되면 하늘에서 돈다발이 막 내려와요.(웃음)
처음 참여연대가 출범할 당시, 회원 수는 고작 7백여 명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소액주주운동이 호응을 얻으며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고, 자발적인 회비만 연간 1억원이 되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했을 때는 나눔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였다. 연예인들과 기업들도 기부에 적극 동참하면서, 설립 10년 만에 연간 백억 원 이상을 모금할 정도로 성장했다. 헌 물건을 기증받아 싸게 파는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 3월에 시작해 8년 만에 전국 백여 개 매장, 자원봉사 5천 명을 기록할 정도로 대성공했으며, 희망제작소도 최근 회원 4천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이 궤도에 오르면 바로 짐을 꾸렸다. 합리적인 비판과 정책 대안으로 정부와 재벌 기업을 긴장시키던 참여연대가 탄탄하게 자리 잡았을 때인 2002년 그는 사무처장을 그만두었다. “자리는 권력이기도 했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싫었다” 한다. 하지만 열과 성을 다한 그곳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앓아누웠다’는 그는 ‘하늘에 떴다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심정이었다’고 저서에서 표현했다.
참여연대를 떠나시면서 ‘시작부터 떠날 준비를 함께 해야겠다’ 결심하셨는데, 희망제작소는 어느 지점에 와 있나요.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늘 제 목표죠. 어느 정도 되면 저는 언제나 떠납니다. 처음엔 그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후론 처음부터 회원들이 주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합니다. 희망제작소도 거의 다 왔어요. 당장 그만두지는 않지만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주간 회의에도 안 들어간 지 일년 됐어요. 대부분의 사업이 저 없이 잘 돌아가요. 다만 새로운 사업들만 챙기죠.
인터뷰를 했던 당일은 공공여행 연합투어를 새롭게 출범시킨 날이었다. 흔히 ‘외유(外遊)’라고 비판받아왔던 공무원들의 해외시찰교육을 제대로 프로그램화한, 획기적인 사업의 시작이었다. 일본, 영국 등 전 세계에 네트워크가 있어 가능했는데, “이제 기반을 다졌을 뿐”이라는 희망제작소의 노하우를 이미 영국, 일본 등지에서도 배워 제2, 제3의 희망제작소들이 생겨나고 있다.
희망제작소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정책을 마련하고 실현해내는 비영리 조직은 사실상 세계 최초 아닌가요?
우리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하는 덴 잘 없죠. 외국에서 와보면 되게 놀래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요. 우리는 지방 정부하고는 일년에 몇 천 명씩 교육을 계속하거든요.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정부 일이에요. 그러면서 비영리 단체이고 기업이기도 하구요. 기존엔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죠. 그래서 저는 월급 안 받는 공무원이라고 이야기해요. 회원들이 세금을 내시니 우리도 작은 정부잖아요. 아니, 우리가 오히려 더 잘하는 거죠. 적은 돈으로.(웃음)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인데요, 누군가가 좋은 비전의 깃발을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마음수련도 세상의 마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잖아요.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게 그런 거죠.
1980년에 사법시험에 합격, 그는 검사가 되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고 일년 만에 변호사가 되었다. 스스로를 꽤 건전한 전문인이라고 자부했던 그가 전혀 다른 인생의 길로 접어든 것은 선배이며 인권 변호사로 존경을 받던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작고하기 전 병상에서 한 말 한마디가 계기가 되었다.
“박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
인권 변론은 물론 여러 단체에 크고 작은 기부금을 내고 있었고, 어려운 친구나 가족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온 그였지만 그 말은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젊은 나이에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고 제법 큰 집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는 더 좋은 차와 집이 눈에 밟히는 자신을 자각했단다. 더 늦기 전에, 그는 변호사 업무를 중단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민운동가의 길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고, 그는 다시는 부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리니 오히려 세상은 더 풍요로워졌다고 한다.
남들처럼 갖는 삶이 아니라 버리는 삶을 택했다고 하셨는데 어찌 보면 구도자의 삶 같네요.
사실은요, 저는 큰~ 장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웃음) 작게 버리면 작게 얻고, 다 버리면 다 얻어요. 저는 인생에서 집을 크게 짓고 큰 돈을 벌고 높은 직책을 갖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아래로 갈수록 더 귀함을 받고, 더 사람들의 박수를 받거든요. 우리는 늘 현장에서 뛰는 일꾼이고 싶어요. 근데 어딜 가나 대우하고 대표 하라고 하고, 사실은 그게 더 힘들어요.
참다운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세기 리더십은 희생과 헌신의 리더십이다, 이런 얘길합니다. 정치인이 됐든 기업인, 민간단체 리더가 됐든 자기 먹을 거 다 챙겨놓고 나서 남을 살피면 그건 리더가 아니죠. 리더는 늘 주변 사람들이 제대로 밥을 먹고 있는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살핀 다음에 자기가 쉬고 자기가 밥 먹어야 되는 사람이니까요. 부담과 희생의 자리죠. 그런데 그런 자격 없는 사람들이 리더를 가지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지난해 12월, 국회는 굶는 아이들을 위한 급식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시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결식아동제로캠페인’을 벌여 3주간 3억여 만 원을 모았다. 백만 명에 이르는 결식 아동을 다 돕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온라인을 통한 캠페인으로는 대단한 모금액이었다. 가난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는 게 원칙이지만, 굶는 아이들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정책에야말로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결식이란 말도 안 써요. 그 말 자체가 아이들한테 상처를 주잖아요. 무상급식에 대해서 부자 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냐고도 하지만 그러면 가난한 애들만 모아놓고 따로 주나요? 돈 조금 더 써가지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안 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죠. 돈보다 훨씬 귀한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수련을 정부에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래도 우리 사회가 희망이 많다고 믿는다”는 그는 할 일 많은 세상에 태어난 게 감사하단다. 올해 농촌 소기업, 청년 사회적 기업, 장애인 기업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팔아주는 일, ‘희망 수레’를 계획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아침부터 자정까지 뛰어다닌다. 그는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진로를 묻는 젊은이들에게 가급적 삶의 가장자리를 찾아가라고 권한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 그곳엔 기회도 많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이 너무 편안한 길만 간다고 우려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고된 일이 기다리는데도 희망제작소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섰다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희망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려면, 고민하고 계산하기보다 쉽게 버리는 데에서 힘이 나온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서 행복해지는가, 아니면 불행해지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누군가의 삶에 보탬이 되는가. 이런 물음이 돈과 사회적 지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누는 마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1956년 경남 창녕 생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후에 다시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잠시 검사 생활을 하다가 1983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80년, 90년대를 아울러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치열하게 살았다. 1996년 참여연대를 창립하여 사무처장으로 소액주주운동 등 획기적인 성과를 이끌어냈고, 2000년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 진보사회운동을 나눔과 기부로 확장하고, 2006년부터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희망’을 실현해내고 있다. <국가보안법연구 1, 2, 3> <NGO,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꾸다>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막사이사이상’ ‘단재상’ 등을 수상했다. http://www.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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