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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짐에서 버림으로, 후회에서 후회 없음으로

박용희 57세. 주부. 심리 상담 치료사

저는 어려서부터 뭐든지 최고여야 했습니다. 20대에는 제일 돋보이고 싶어 외모를 치장하는 데 굉장히 공을 들였습니다. 능력도 최고여야 했고, 돈도 많아야 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주변과의 비교에서 내가 우위에 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고, 남편의 첫 부임지인 네덜란드로 함께 떠났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도 최고여야 했습니다. 내가 완벽한 만큼 남편도, 아이들도 완벽하기를 바랐습니다. 내 아이들이 최고여야 했기에, 30대는 참으로 극성스러운 엄마로 보냈습니다. 40대에는 나름대로의 커리어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심리 상담 치료사, 요가 강사…. 목적한 바대로 명성과 돈도 따랐습니다.

내가 꿈꾸던 명예, 돈…. 그런 것을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성취감도 그때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주위에는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걱정할 게 없어 보이던 남편도 알게 모르게 출세와 돈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마음이 열등감을 만들어,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왠지 주눅 들어 하더군요. 그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주변의 것들을 최고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99개를 잘해도 언제나 못한 1개에 초점을 맞춰 야단을 쳤지요.

매순간 더 나아져야 하고, 더 높아져야 하고, 현재 가진 것에 대해서는 늘 부족해하는 그 마음에 행복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밖에서 행복의 조건을 구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갇혀 있던 정서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곳에서 자연의 오묘함과 신비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던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하늘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조용히 숲에 들어가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항상 비교하고 욕심내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수백억 번을 다시 태어나도 똑같을 것 같은 이 마음들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2003년 말, 해외 근무를 마친 남편을 따라 벨기에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낸 한 지인으로부터 <세상 너머의 세상>이란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세상 너머의 세상’이란 무엇일까? 밤새 읽고 또 읽고 10번 정도는 읽은 듯합니다. 마음수련을 해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수련을 하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모든 여건을 마련해준 남편임에도, 남편을 무시하고, 주변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강한 자존심으로 모든 것을 내 위주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내 자체가 열등감 덩어리였습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부단하게 노력했던 거였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조금씩 변화되어 갔습니다. 요만한 것도 넘어가지 못하고 맞나, 틀리나 논리적으로 따지던 완벽주의의 내가, 점점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남편도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수련 일주일 후 남편은 “내 마음에서 내려놓으면 힘들 게 없네. 마음을 빼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헛된 것에 마음을 뺏기고 살았나 후회가 된다”며 참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버리며 우리 부부는 알았습니다. 진짜 후회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열등감, 우월함, 최고가 되려는 욕심, 그런 마음속에서는 매순간 후회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삶이기에, 그것은 곧 사라져버리고 말 허망한 꿈이기에.

진짜 후회 없는 삶이란 ‘나’라는 것은 티끌도 없는 것입니다. 이국땅에서도 언제나 똑같이 있어주었던 그 하늘 같은 마음이 되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늘이 누구 탓을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던가요. 옳다 그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던가요. 그 자연의 마음으로 걱정 없이, 가짐 없이, 남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고 도와주며 살 때 후회는 남지 않더라고요.

예전의 저는 심리 상담을 할 때도 우월감을 갖고 했었습니다. 친절한 척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도 모르는 우월감과 군림하려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나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나니 무척이나 편안하고 고요해져 그냥 그들과 하나가 되더군요. 마음수련을 하기 전에는 상담을 요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불행해서 오는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도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마음이 들어찰 대로 들어차서 더 이상 돌파구가 없어진 상태가 된 것임을 알고 그 점을 많이 인지하도록 해줍니다. 바로 그것이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으니까요.

되돌아보면 옛날에는 사소한 금기 사항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밤참은 먹으면 안 되고, 양말은 아무 데나 벗어놓으면 안 되고, 치약도 아무렇게나 짜면 안 되고….

그런 작은 것들부터 큰 것까지 완벽하게 테두리를 쳐놓고 살았었지요. 남편은 예전의 자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소중한 인생을 허망한 것을 좇느라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찾아올 것입니다. 참된 것을 찾고, 진실한 것만 추구하며, 아무 바람 없이 사람을 대하고, 사랑하며 살았다면 절대 후회는 없을 텐데 말이지요. 머리로는 누가 모르며 말로는 누가 못 하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희 부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희 부부는 압니다. 마음을 비우면, 저 말 없는 하늘과 하나가 되어 진짜 삶을, 후회 없는 나날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오늘도 참 행복합니다.

무말랭이

 

무는 해독 작용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기침이 날 때 생무 끓인 물을 마시고, 돼지고기나 치킨을 먹을 때 옆에 꼭 두고 먹기도 하지요. 생무는 말리면 매운맛이 날아가고 색이 노릇노릇해지면서 소화기에 더욱 좋은데요, 그걸 반찬으로 만든 것이 바로 무말랭이지요. 시골집, 지붕 소쿠리에 담긴 채 바람과 햇볕에 온몸을 말리고 있던 무말랭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할머니, 무말랭이 어떻게 만들어요?” “무를 잘 썰어가지고 말려야 되는데 11월 넘어서 나오는 무가 맛이 제대로여. 그 무를 그늘에 말리면 잘 마르지가 않아서 햇볕에 말리는데 또 그것이 바짝 말리면 맛이 없어. 약간 습기가 남아 있는 상태까지 한 달 넘게 말려야 돼. 말려진 거를 갖다가 우짜냐 하면 먼지가 있으니까 물에 살짝 헹궈서 꾹~ 짠 뒤에 조청 새우젓 고춧가루 간장 설탕 마늘 파 깨도 넣고…. 할미가 해서 보내주마, 남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여.”

무를 말릴 때는 그늘에서 바람으로 말리는 것(음건)이 가장 좋은데 도심에서 한 달씩이나 말려두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보통 건조기에서 말린 무를 물에 불려 사용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무 고유의 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한 달간 꼬들해지려고 하는 그 순간까지 잘 말려서 무 자체의 수분을 남기는 것이 맛있는 무말랭이의 비결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기간 동안 햇볕 바람 습도 계절의 모든 기운이 스며들고 거기에 할머니의 정성까지 더해지니, 자연의 맛이 그대로 담긴 건강 반찬입니다.

고춧잎을 살짝 말려 함께 무치면 더 맛있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구르는 물통 ‘Q-Drum’

만든 사람 헨드릭스 형제(P. J Hendrikse, P. S Hendrikse)
출처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스미소니언 연구소/에딧더월드)

이름은?
큐드럼(Q-Drum). 알파벳 Q를 닮은 모양의 원형 통(Drum)이라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사용 지역?
앙골라, 에티오피아, 가나, 케냐,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아프리카 시골 지역에는 콜레라와 이질 같은 수인성 질병들에 많은 사람들이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래서 이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깨끗한 물을 먹기 위해 무거운 물통을 머리에 이고 수킬로미터를 걸어서 물을 길어온다. 이러한 노동은 목과 척추 부상으로 이어진다. 깨끗한 물을 장거리로 쉽게 옮기는 방법을 찾다가 Q-Drum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오랫동안 바닥에 굴려야 하기 때문에 내구성이 강한 폴리에틸렌 소재를 사용했고 떨어져나가는 손잡이나 축이 없도록 도넛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가운데 구멍으로 통과되는 끈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식물 재료나 가죽으로 만들어 대체할 수 있다.

주변의 반응은?
주변의 반응은?  수세기 동안 노동으로 여겨졌던 물 긷기를 놀이에 가깝도록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물을 위생적으로, 적은 힘으로 운반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와 여성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시간에 여성들은 가정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남아프리카 화폐로 510R(랜드)-한화로 약 7만5천 원-인 큐드럼은 사용자에게는 비싼 가격이지만 국제적 비정부기구와 민간 기업의 지속적인 지원이 있다면 식수 때문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자격 청춘 합창단, 소년원 방문의 커다란 의미


‘남자의 자격-청춘합창단’의 첫 공연은 바로 서울소년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청중은 물론 서울소년원(고봉중고등학교)의 남학생들이었고, 더불어 국내 유일의 여자 소년원이라는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의 여학생들도 함께 자리하였습니다.

‘청춘합창단’의 대부분의 어르신들에게 이 아이들은 거의 손주뻘일 것이고, 50대의 젊은 분들께도 막내뻘의 어린 자식 같겠지요.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 해도 자식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그런 뜻에서 ‘청춘합창단’의 소년원 방문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지나온 날들이 아무리 어두웠다 해도, 이 아이들의 삶에는 아직 너무나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얼굴 위쪽 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비춰지는 까칠한 얼굴들.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까까머리 뒤통수들. 조금만 덜 외롭고 덜 추웠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들이 ‘청춘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며 환히 웃고 있었습니다. 김태원 지휘자는 아직 연습이 덜 되었음에도 그들을 위해 ‘아이돌 메들리’를 선물했고, 까르르 퍼져가는 웃음소리와 신나는 박수 소리는 따스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속에서 얼어붙었던 아이들의 마음이 녹아드는 소리 같았습니다.

고봉중고등학교에도 합창단이 있더군요. 그쪽도 신생 합창단인데 ‘청춘합창단’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열심히 답가를 준비했다면서, 까까머리 소년들이 머뭇머뭇 단상에 올라 줄을 섰습니다. ‘You raise me up’의 전주가 조용히 흐르는 동안, 아이들은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분들 앞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너무나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전주가 끝나자 고개를 들고 입을 열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은 나를 일으켜 산 위에 설 수 있게 하고… 당신은 나를 일으켜 성난 바다를 건너게 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나는 강인합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저 노랫말 속의 ‘당신’이란 누구일까요? 그날 하루 동안만큼은 ‘청춘합창단’이 그 존재가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청춘합창단’과     ‘고봉합창단’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부르는   ‘사랑으로’였습니다.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사랑과 열기가, 그 아이들에게 현재의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연 후의 인터뷰. 역시 아이들의 얼굴은 절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입가에 흐르는 미소에는 기쁨과 그리움이 가득했습니다. 한 소년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제일 보고 싶습니다. 못난 짓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곧 밖에 나가면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가수의 꿈을 꾸는 한 아이는 몰래 김태원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었습니다. 가수가 되려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를 하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김태원은 말했습니다. “내 마음에 기억해 두고, 언젠가는 만나겠지. 내 손이 닿는 데까지만 오면, 내가 잡아주지!” 그 말은 100% 진짜였고,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청춘합창단’의 첫 번째 공연을 관람했던 한 명의 까까머리 소년은, 몇 년 후 부쩍 성숙해진 모습으로 김태원을 찾아가 말하겠지요. “그날, 선생님께 편지를 쥐어드렸던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그러면 반가움을 주체 못한 김태원은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덥석 안아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 간절한 꿈이 실현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가을 풍경

고궁의 가을도 깊어만 갑니다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만남도, 우리의 기쁨도, 그렇게 깊어만 가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역사로 남을 수 있게….

창덕궁에서. 2005년 11월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

한라산에서 단풍을 보내며. 2006년 11월

사진, 글 김선규

탑리역에서

지난여름, 새내기 대학생 딸이 생애 첫 기차 여행을 하였다.
사박 오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딸은 어느 간이역에서 본 그림 같은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동해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어요. 차창 너머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들이 영화처럼 지나고 있었어요. 얼마나 달렸을까. 긴 철길이 들판과 마을 사이를 지나는 곳에 탑리역이 있었어요. 기차가 정차하자 사람들은 분주한 걸음으로 플랫폼을 빠져나갔어요. 그런데 그 속에 한복 차림을 한 노부부가 계셨어요. 하얀 모시옷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와 초록색 치마에 흰 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노부부의 여름 한복은, 짧고 간편한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어요.

나는 얼른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 친구를 깨워 창문을 가리켰어요. 우리는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객차 앞을 지나가시는 두 분을 유심히 바라보았죠. 머리카락이 새하얀 백발인 할아버지는 양손에 알록달록 무늬가 있는 가방을 들고 씩씩하게 앞서 지나가시고, 그 뒤 서너 발자국 뒤에 할아버지와 똑같이 완전 백발인 할머니가 다소곳이 따르고 있었어요. 성큼성큼 걷는 할아버지와 뒤따르는 할머니와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졌어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전통의 남성상! 친구와 나는 마주 보고 쿡쿡 웃었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할아버지는 역사에 양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바삐 할머니 쪽으로 되돌아오셨어요. 그리고 할머니에게 손을 내미셨어요.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을 할아버지에게 맡기더군요. 두 분은 그렇게 손을 잡고 천천히 역사 쪽으로 걸어가셨어요.

우리가 탄 기차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카메라가 롱샷으로 주인공을 따라가며 촬영한 것처럼, 그 고운 영상을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어요. 차창으로 바라본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너무 예뻤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늙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예뻤어요! 진짜! 그래서 손 흔들 줄도 모르고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니까요.^^

간이역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리고 어디로 떠나갔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먼 어느 곳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다녀가기도 했다.
그래서 간이역은 역무원이 없어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거다.

최형식

산악인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하고 나눔의 산을 오르다

산악인 엄홍길. 1985년 첫 등정 이후 38번의 도전 끝에 2007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 기록을 세운다. 그 모든 것이 산이 받아주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산이 보여준 그 큰 배려와 사랑을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과 동료들에게 나누려 한다. 새로운 인생길, ‘엄홍길 휴먼재단’이란 17번째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엄홍길 대장을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 지구상 가장 높고 험준한 히말라야 8000m 산 16개 봉우리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도전장을 내민 이후 2007년 마지막으로 16좌 로체샤르 등반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였다.

“히말라야는 왜 나를 살려서 보내준 것일까….” 22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성취했다는 기쁨도 잠시, 돌아보면 인고와 고통의 세월이었다. 38번의 도전, 20번 등정과 18번의 실패. 그 과정에서 후배 6명과 셰르파(Sherpa, 히말라야 산악 등반 안내인) 4명을 먼저 보내야만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히말라야를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또 하나의 인생 목표가 생겼다. 그동안 산행에 도움을 준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 결실은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새로운 목표인 8,000m 17좌 휴먼재단이란 산을 오르기 위해…. 살아남은 자로서, 영원한 산사람으로 남는 길을 ‘나눔’에서 찾은 것이다.

해발 4060m 네팔 팡포체 마을에 지어진 첫 번째 휴먼스쿨 전경.

휴먼재단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16좌를 완등했듯이 히말라야에 16개 학교를 짓는 거예요. 교실, 화장실, 컴퓨터실, 도서실, 양호실도 짓고, 그 밖에도 학교 선생님의 월급을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현지인에게 간호 교육을 해 보건소 같은 역할을 하도록 약품도 지원하고 있죠. 학교 준공식이나 기공식을 할 때는 의료 봉사도 병행해서 하고 있습니다.

+ 그에겐 학교 짓는 일도 ‘도전’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건 교통의 열악함이었다. 대개 산간 오지 마을인데다 트럭이 갈 수 없어 헬기로 나르거나, 최종 목적지까지 자재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자재 운송비가 건축비만큼 소요됐고, 건물을 짓는 사람들도 고산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간 오지에 학교를 지은 건 소중한 인연인 셰르파들이 살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6년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목숨을 잃은 셰르파 술딤 도르지와의 인연은 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고향에 학교가 없다는 사실에 늘 가슴 아파했던 도르지. 그의 소원은 곧 엄홍길의 소원이 됐다.

2010년 5월, 드디어 휴먼재단의 첫 번째 학교가 술딤 도르지의 고향인 해발 4060m 히말라야 팡포체 마을에 세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학교 타르푸에 이은 세 번째 학교가 룸비니에서 한창 신축 중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 가난을 대물림하는 셰르파의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 엄대장의 바람이 하나씩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게 뭔가요?

제일 중요한 건 지형, 기후, 특성에 맞게끔 건물을 짓는 거예요. 세 번째 학교 룸비니는 완전 평야 지대인데 더 열악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보리수나무 아래 땅바닥에 천막을 쳐놓고 공부하고 있고….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에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우선 동네 지하수 우물부터 파고 시작했어요. 그동안 NGO 단체에서도 학교를 지었지만 문제는 짓고 끝난다는 거예요. 그게 참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저희는 학교 옆에 마을회관도 짓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도 애들이 공부하는 걸 관심 갖고 지켜봐야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교육의 중요성도 알게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문짝도 망가지는 등 폐교가 되거든요.

꾸준한 관심을 통해서 학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네요.

아이들의 변화도 느끼시죠?

그럼요. 열악한 상황에서의 아이들과 새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표정, 행동은 완전히 달라요. 진짜 해맑고 진짜 좋아해요. 마치 ‘우리들 세상이다’ 하는 표정을 보면 행복감을 느끼고, 후원해주신 분들께 감사하죠.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재단을 꾸리고 계신데요,

어떤 말씀에 선뜻 동참하시던가요?

제가 히말라야를 20년 동안 다녔잖아요. 거기서 무엇을 깨우쳤겠습니까. 결국엔 나눈다는 겁니다. 산이 저를 받아준 거잖아요. 산이 저한테 베푼 거잖아요. 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감히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상부터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과 동료들의 노력, 희생 덕분인 거거든요. 저는 제가 지금도 살아서 땅을 밟고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진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이 엄청난, 기적보다 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준 산과 동료들에게 저도 보답하고 싶다고 간곡히 말씀드리면 많이 공감해 주시더라고요.

산을 타는 것보다 마음을 모으는 게 더 어렵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나가고 계신지요?

물론 힘들 때도 많아요. 사람들한테 실망할 때도 많고 감정이 통제가 안 될 때도 있어요. 근데 그 순간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아, 그래! 저 사람이 내가 아닌데, 나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안 될 때도 많은데, 어떻게 내 맘 같기를 바라느냐, 생각해요. 그리고 아침이면 산에 갑니다. 산에 가면 확 풀어지면서 정리가 돼요. 자연은 우리 인간에 생명력을 불어주는 신비의 명약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받아주잖아요. 바다도 모든 걸 다 쓸어안아 주지 않습니까. 산과 같은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웃음)


네팔 타르푸 마을 두 번째 휴먼스쿨 기공식.

준공식 후 아이들과 함께한 엄홍길 대장.

+ 엄홍길, 그가 하는 일엔 늘 ‘휴먼’이란 말이 붙는다. 휴먼재단, 휴먼스쿨, 휴먼장학금….

그는 휴먼이란 말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녹아 있다고 했다. 8000m 등정을 네 번이나 같이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눴던, 친형제보다 더 절친한 후배인 박무택 대원이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후배와의 깊은 인연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엄홍길은 세계 제3위의 거봉 칸첸중가에 도전하다가 무려 세 명의 동료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에 빠져 원정대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말없이 동행해준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배 무택이었다.

그런 후배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 8500m 지점에 시신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거였다. 헬기도 갈 수 없는, 오직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결국 2005년 엄홍길은 자신을 포함한 18명으로 구성된 대원들을 결성, 산을 오르기에 이른다. 후배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세계 등반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휴먼원정대의 활약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감동했고, 훗날 휴먼재단 설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휴먼원정대를 통해 삶과 등반을 대하는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하셨지요.

‘죽음의 지대’ 8000m를 넘어서면 곳곳에 시신이 즐비해요. 전엔 공포와 연민은 잠시일 뿐 정상을 향해 앞으로만 나아갔어요. 성취욕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은 겁니다. 그런데 과연 동료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히말라야 정상에 선다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그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지 않았나…. 지금도 위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 10명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워요. 극한 상황에 처할 땐 더욱 간절하게 불러요. 너희들이 오르지 못한 산을 너희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나에게 힘을 달라, 용기를 달라….

+ 엄홍길은 유년 시절을 산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등산객을 상대로 식당과 숙박업을 했고, 고교 시절까지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같이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등산객과 친구가 되면서 그는 자연스레 산사나이가 되어갔다. 그러다 197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심장을 멈추게 하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다. 바로 ‘고상돈,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산 등정’이었다. 이후 그 역시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꿈을 품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산악 인생. 돌이켜보면 실패의 연속이었다.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도전, 결과는 실패였다. 1988년 등정에 성공했지만, 1992년까지 여섯 번이나 히말라야 정상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에베레스트는 3번 만에, 세계 7번째의 고봉 로체샤르는 3번 실패 후에, 안나푸르나는 5번의 도전 끝에 올랐던 것이다.

산을 오를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

젊은 시절엔 어떤 산이라도 오를 수 있다는 용기와 패기로 자신만만했었어요. 그러다가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 산이 무섭다는 걸 느끼고, 내가 산을 소유하려고 한 건 아닌가…. 무수한 실패를 통해 겸허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산을 오를 땐 마음을 비우고, 거대한 대자연과 동화돼서 하나가 돼야지, 나는 나다 너는 너다 내가 널 이겨야 한다, 욕심을 갖고 오르면 절대 안 돼요. 저는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서 산을 오르겠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산도 마음을 열어줘요. 정말 초심으로, 그리고 평상심 잃지 말고 한 발 한 발 내딛어야 합니다.

매번 목숨 걸고 도전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산은 나에게 존재의 이유고, 삶의 전부예요.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처럼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르는 거죠. 사실 산에 오를 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많겠어요. 그때 무섭다, 두렵다, 살아야겠다 하면 정상에 오르질 못하는 거죠.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이겨내야 해요. 무아지경 상태로 그렇게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선을 딱 넘어서면 올라가는 거예요. 그 단계에 진입 못 하기 때문에 실패를 하는 거죠. 그만큼 모든 걸 비우고 완전히 거기에 몰입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열려요. 그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선생님처럼 도전 정신과 자신감을 갖고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으시다면?

자기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 성취감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취감을 느꼈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거든요. 그리고 저는 산이 거의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생각해요. 상처로 인해 갇혀 있던 마음들이 열리고. 초등학생도 히말라야에 갔다 오면 고등학생처럼 굉장히 의젓해지거든요. 모두들 산에 많이 다니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최근에는 환경운동가로도 활동 중이신데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히말라야 기후가 엄청나게 변하고 있어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녹아서 빙하 길이가 짧아지고, 겨울에도 3500m 1월의 기후가 영상 5도 10도니 그곳 사람들도 걱정을 하는 거죠.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관심을 갖게 하고, 앞으로 장학 재단 기금을 마련해서 유자녀들의 학업을 돕고 싶습니다. 그렇게나마 그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산 같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산에 미쳐,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며 그가 산에게서 배운 건 결국 ‘사랑’이었다 했다. 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안아주고 받아주었듯이, 자신도 그렇게 사람을 향해 다가갈 것이라는 엄홍길. 그가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모두에게 인사를 전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는 네팔어로 ‘당신께 귀의한다’란 뜻이다.

 

산악인 엄홍길 님은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시작하여 2007년에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이란 기록을 세웁니다. 2008년에는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 셰르파 가족들과 유가족들을 돕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를 자꾸만 붙잡아두던 것들을 시원하게 버린 사람들의 버렸기에 얻은 자유와 평화, 그 유쾌한 이야기들.

 

머릿속 잡념들을 TV 전원 끄듯 꺼버리다

이영순 43세. 공무원. 대전시 서구 둔산동

살아 있다는 자체가 참 힘들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기에 먹고 입어야 했고 돈도 벌어야 했고, 자식 교육도 시켜야 했다.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 청소하고, 반찬 만들고….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일상들이 나에게는 참 버거웠다.

배 과수원집의 3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기본적인 체력이 너무 약했었다. 부모님조차 나에게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이 없으셨던 거 같다. 그저 내가 숨 쉬고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대견해하신다 할까. 과수원이 엄청 바쁠 때에도 나한테 맡겨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맡겨지더라도 “엄마 힘들어” 하면 바로 “쉬렴!”이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렇게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결혼을 하고 직장 생활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첫아이를 낳을 즈음,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집안일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자신의 공부만 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부하 직원의 일까지 하다 보니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앉아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누워 있으면 땅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직장 생활이 보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가 나의 위치를 낮게 취급했고, 항상 대접을 받으려고만 했다. 내 존재 가치가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하나? 마음이 참 힘들었다.

병가를 내고 허리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복직해야 했는데,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싶어 눈앞이 깜깜해지고 가슴이 꽉 막혔다. 이런 힘듦 속에 있을 때 친구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래, ‘과감하게 버려 보자!’ 생각했다. 살면서 쌓아온 기억들, 그로 인해 뼛속 깊이 배어버린 관념과 관습들,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없게 하는 것들을 버리는 수련이었다. 집중 수련을 마친 후 생활 속에서 늘 수련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 내 나름대로의 방법도 생각해냈다. 내가 TV를 보고 있을 때 TV 속 사람들이 가짜이듯이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TV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전원을 꺼버리는 것이다.

‘난 여태까지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어!’라는 생각이 들면 내 머릿속의 TV를 끄듯 꺼버렸다. 그렇게 머릿속의 잡념들이 사라지니 마음도 편해지고, 힘들었던 일도 점점 수월해졌다.

직장에서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여길 때, 자존심이 상하고 열등감에 시달릴 때, 이건 가짜지 하며, TV를 끄듯 그 생각을 버렸다. 집안일을 할 때도 이 일을 했더니, 너무 피곤해! 하는 마음을 껐다. 이걸 하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하는 부담도 하나 둘씩 지워나갔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리고 집착, 남편이 나의 부모처럼 모든 걸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역시 내 머릿속의 TV 전원 스위치를 꺼버렸다. 그렇게 내 머릿속의 쓸데없는 잡념들을 TV 전원을 끄듯이 계속 꺼나갔다.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미워했던 사람도 항상 좋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는 감정들에 이끌리지 않고, 마음 없이 대하다 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듯했다. 버리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싶다.

하늘의 해, 달, 별들이 ‘하루 종일 비추고 있으려니 힘들어’라는 마음 없이 그냥 있듯이, ‘그냥 산다는 것’,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전미경 작. <티움> 모시에 나뭇잎, 풀꽃. 36×33cm. 2005.

 

버렸다, 식탐(食貪)!

국승철 59세. 자영업.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워낙 식성이 좋아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던 나는 항상 식탐에 시달리는 편이었다.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한 환경에서 못 먹고 자랐던 우리 세대의 한이라고 할까. 음식의 질에 상관없이 일단 배가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음식을 남긴다는 걸 거의 죄악으로 생각했기에, 회식 자리에서도 뒤처리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덕분에 음식을 준비한 분들에게는 인기 짱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배가 부른데도 끝까지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배가 고플 때면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집에는 항상 먹을 것이 풍족하게 있어야 하고, 밥을 배불리 먹고도 또 다른 빵이나 후식을 먹어야 하는 나.

이렇게 먹을 것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먹는 것 앞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싶고, 먹을 것에 초탈하고 싶었던 나는 나중에 단식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몇 년 전,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그 기회가 왔다. 퇴직을 변화의 계기로 삼기로 한 나는 그 시작으로 식탐을 버려보기로 했다.

처음 단식은 아내가 먼저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하루하루의 몸 상태를 상담하고 지도받으면서 일상생활을 똑같이 하는 생활 단식이었다. 아내의 단식을 도와주면서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를 은근히 염탐했다. 준비 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내의 단식 과정을 보면서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하루 종일 입으로 들어가는 건 생수와 죽염뿐이라 뱃속은 당연히 텅 비어 있어, 음식 냄새만 맡아도 환장할(?) 상황일 걸로 짐작했는데 아내는 너무도 태연히 아침저녁 가족들 식사 준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주는 게 아닌가.

‘저 사람에게 저렇게 독한 면이 있었던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큰일 났다, 이제 와서 결혼을 무르자고 할 수도 없고….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

아내는 단식을 시작하니까 식욕 자체가 없어져서 음식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이윽고 나도 단식을 시작하고서야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 역시 하루 종일 물과 죽염만 섭취하면서 일상생활을 똑같이 하고, 거기에다 의무 사항인 1일 30분 운동까지 하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도 없고 음식을 봐도 먹고 싶다는 식욕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속이 비워지면서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단식을 하면서도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나가 술과 안주 대신 생수만 마시면서 ‘위하여!’도 하고 2차까지 따라가 분위기를 맞춰주니, 친구들은 “저놈이 저렇게 독한 놈이었냐”는 소리를 해댔다.

단식에 고비가 많다는데, 이상하게 나에겐 고비가 없었다. 3일 계획을 10일로 연장해 도전했다. 단식이 계속되자 그동안 과잉 섭취되어 내 몸 안에 쌓여 있던 온갖 독소들이 분해되면서 나는 냄새는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역겨웠다. ‘정말 몸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많이 먹기는 먹었구나.’

그저 입을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내 안에 채워 넣기만 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비움으로써 내 몸 안에 쌓여 있던 해로운 물질들이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숙변이 나오고, 아랫배도 서서히 들어가고 10kg 정도 감량이 되었다.

단식은 나의 식탐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먹는 것을 다스려봤다는 것, 어떤 것을 한번 끊어봤다는 경험은 삶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3년 후에 또 한 번의 단식을 했고, 내년에도 다시 할까 생각 중이다. 몸이 비워졌을 때의 즐거움을 알기에 평소에도 적게 먹는 소식을 즐기고 있다.

 

전미경 작. <축제> 종이에 나무껍질, 씨앗. 24.5×28.2cm. 2006.

 

‘왕년의 나’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다

하영준 45세. 기업인. 베트남 호치민 12군

1993년, 내 나이 스물아홉 살, 대기업 그룹 내 최연소 현지 법인장으로서 카자흐스탄에서 근무했다.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여러 해외 국가들과 인연을 맺으며 나름 최고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잘나갈 줄 알았던 내 인생에 고비가 찾아왔다. 이후 개인 사업을 시작했는데, 약 10여 년 남짓 운영해오던 공장에 화재가 나서 완전히 다 태워 먹고, 지분을 넘기고 투자를 받은 회사가 기업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바람에 회사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이를 만회하고자 소송을 시작하였고 관련 관공서를 수도 없이 찾아다니며 2년여간을 진행하였으나 끝내 아무 득도 없이 합의를 보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항상 남보다 앞서 살아왔고, 옳다고 믿는 바를 이루어내지 못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동안에 내가 쌓아온 성취가 고스란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이제까지의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이 너무나 허무하고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과감히 그것들과 결별하고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면 어떻고, 누가 나쁜 사람이면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옛날을 곱씹으며 세상을 탓하고, 남들을 탓하지 말자, 이제 내가 가진 쓸데없는 자만심과 미래에 대한 욕망을 과감히 벗어 던져버리고, 지금의 굴욕과 두려움과 질시는 기꺼이 받아들이며 다시 준비하자고 다짐했다. 과거에 잘나갔던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어느 회사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 회사는 해외 시장 개척 업무가 꼭 필요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이건, 회사가 원하는 곳, 회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고, 베트남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다.

나에게 특별히 부여된 임무는 현지(LOCAL)업계 시장 개척이었다. 한 달간의 본사 교육 기간, 나는 내가 접해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였기에 시작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도 뜨지 않은 사무실에 누구보다도 일찍 나와서 제품에 대한 공부와 베트남어를 공부해 나갔다. 저녁이면 생산 부서로 뛰어가 야근하고 있는 분들과 실제 제품 조립도 같이 해보면서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그리고 2010년 7월, 마침내 베트남에 도착하여 지사로 들어서니 정리되지 않은 기계들과 치우지 않은 나무 박스들로 뒤엉켜 마치 시골 농기계 판매점 같구나 했는데, 바로 정전이 되었다.

“음… 그래, 이제 베트남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모든 것이 낯선 환경, 하지만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처지가 바뀌었으니 아무리 하찮은 일, 아무리 큰일도 거리낌 없이 해나가야 했다. 현실적으로 현지 업계 개척을 위한 준비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현지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아닌 현지인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현지인을 같은 인간으로 대해 주는 것이 시작이었다. 먼저 조직을 개편했다. 최대한 현지인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었고, 새벽부터 최소 5개~7개 업체를 매일같이 밤낮으로 방문하면서 영업의 기본기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3개월여가 지나자 직원들의 수도 늘었고, 이전에 4시 반이면 퇴근하던 현지 직원들은 저녁 7시가 넘어서까지도 내일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1년 상반기 베트남 판매 실적 1위, 판매 신장률 1위 등 엄청난 성과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도 더 많고 힘겨운 과제와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나간 일과 옛날의 나, 나의 경력과 업적이 오히려 우리의 실행을 방해한다는 생각도 든다. 옛날에…, 왕년에…, 내가 무엇을 할 줄 아는데, 나의 경력은 어떠어떠한데, 그런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미래를 옥죄일 뿐이다.

지금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아가느냐’는 ‘얼마나 <내가 왕년에…>를 버릴 수 있느냐’인 것은 아닐까.

 

전미경 작. <여명> 삼베에 나뭇잎, 풀꽃. 65×53cm. 2005.

나를 자꾸만 붙잡아두던 것들을 시원하게 버린 사람들의 버렸기에 얻은 자유와 평화, 그 유쾌한 이야기들.

 

그 추억의 보물상자를 버리다

남명희 49세. 주부.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난 20년 가까이 일기를 썼다. 나의 일기를 모아 환갑 때 출판기념식을 하리라 기대하며.

결혼 후 두 아들을 키우면서는 나중에 남겨주려고 사진도 많이 찍으러 다녔다. 앨범뿐 아니라 육아일기도 몇 년에 걸쳐 썼다. 기록하는 습관에 자부심을 갖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설악산으로 등산을 떠났다. 혼자 남은 난 집안을 확~ 뒤집기로 작정하고 묵은 짐을 다 끄집어냈다. 상자째 쌓아놓은 책들, 아이들 장난감 상자, 방 하나가 마치 창고처럼 어수선했던 터라 어지간한 것은 다 버릴 참이었다. 맨 아래 구석진 곳에 포개져 있던 라면 상자 두 개. 열어보니 온통 손때 묻은 노트, 메모장들로 가득했다.

서른 살까지의 내 청춘의 독백들, 결혼 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일기장 상자였다. 이사 다닐 때마다 상자째 끌고 다녔던 짐, 행여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상자에 넣어둔 채로 짐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겐 너무 소중한 보물인 줄 알았던 일기장들. 기록들 사이로 파노라마처럼 추억들이 지나갔다. 춘천 어느 레스토랑에서 냅킨에 적어놓은 날짜와 동행했던 친구의 이름 약자. 아래쪽엔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또 어느 장에는 부모 곁을 떠나 살던 때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멀리 있는 벗에게 썼던 미완성의 편지 등도 있었고, 어느 장에는 책에서 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유행하던 노랫말, 말려서 붙여 놓은 단풍잎이나 꽃잎들, 거기에도 날짜와 생각들이 적혀 있었다. 공연 입장권, 영화표 등을 붙여 놓은 장에는 관람 소감이 빼곡히 적혀 있기도 했다. 또 어느 장에는 산 정상에서 머리 흩날리며 찍은 사진도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신문 기사들까지도 사이사이 다 붙여져 있었다.

그래, 이때는 참 많은 시간을 일기 쓰기에 쏟았지. 돌이켜보니 일기는 내게 비밀 은신처와 같았다. 세상과 마음을 활짝 열고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자꾸만 과거를 붙잡아 놓고 그 속에 숨으려 했던 흔적이었다.

과거의 사연들과 이틀을 보내면서 현재의 내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언제나 그 순간을 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삶. 그 순간이 멋있었다기보다 일단 그럴 듯하게 포장한 후, 재구성된 과거를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10권도 훨씬 넘게 모아둔 가족 앨범들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지. 순간 마음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기록을 위해 현재를 과거 속에 파묻는 것과 같은 짓을 하고 있구나. 항상 “여기 서봐, 이쪽을 보라구, 움직이지 말구, 잠깐만….” 그렇게 현재보다는 기록에 치중했으면서 그 기록들 또한 짐짝처럼 여겼었다. 내 마음을 가두고 박제해둔 상자들, 현재의 나를 그 속에서 꺼내는 것만 같은 체험이었다.

일기를 상자째 버렸다. 그리고 두 아들의 사진도 앨범 한 권씩만 남기고 과감하게 폐기해 버렸다. 책들까지 싹 정리하고 나니 그 홀가분함이란.

이후 나는 일기나 사진 대신 아들의 건강하고 밝은 미소를 더욱 보려 한다. 그리고 자주 웃는다. 여드름이 송송 난 얼굴, 겨드랑이에 털이 많아서 고민이라는 작은아들의 사춘기는 카메라로는 찍을 수 없는, 기록을 위해 멈출 수 없는 현재다. 멈칫거리던 일상의 흐름이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진 건 버려본 후에야 깨달은 소박한 기쁨이다.

 

전미경 작. <나무에 걸린 초승달> 종이에 풀꽃. 36×33cm. 2008.

 

권위와 자존심 버리고 진짜 교사가 되다

김민정 33세. 초등학교 교사. 부산시 해운대구 제송동

심호흡을 하고 교단에 섰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담임을 맡게 된 김민정 선생님입니다.” 나하고 고작 11살 차이 나는 이 녀석들이 나의 첫 제자들이다.

“선생님이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많아요. 여러분이 잘 가르쳐주세요~.” 이 말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선생님~ 애인 있어요?” “선생님~ 어디 살아요?” “선생님~ 우리 자리 좀 남남 여여로 바꿔요.” “선생님~ 청소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숙제는….”

30명의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처음이라 잘 모른다는 선생님을 말 그대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임 교사였던 나는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선생님을 예쁘게 봐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착하고 어린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자 또한 만만한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은 자기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나에게 제재를 가했다. 농담 따먹기로 분위기를 흐리고, 선생님의 훈육을 장난으로 받아넘기며 무시하기도 했다.

마냥 좋게만 대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선생님으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을 세우려면 좀 더 무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따끔하게 혼을 내고, 정색을 하며 수업 분위기를 잡았다. 아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고, 아이가 내 뜻대로 따르게 만드는 것만이 교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2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나는 한 번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내기에 앞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순전히 아이들의 입장에서.

거짓말을 하는 아이도, 선생님을 무시한다고 여겼던 행동도, 알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처럼 만들었다는 걸 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기분이 안 좋아 있는데 아이가 즐거워서 떠들면 선생님한테 반항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하고, 교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누르고 윽박질러야만 교사로서의 자존심이 세워진다고 생각했다니…. 아, 나는 정말로 교사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8년, 지난 3월이다. 하루 종일 만화책만 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어르고 달래보아도 소용이 없다. 시종일관 교사는 무시한 채 자기 할 일만 한다. 전담 수업 시간에 또 노래를 부르며 수업을 방해했다고 해서 아이를 불렀다.

“OO야,  전담 수업 시간에 왜 노래를 불렀니?” “심심해서요.” “그랬다면 선생님은 참 속상하구나, OO가 원래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아이가 아닌데, 다른 친구들은 다 공부하는데 혼자 노래를 불렀다니. 방해가 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니?” “사실은.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니 흥분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노래가 저절로 나왔어요.” “그랬구나. OO는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는 몹시 방해가 되었단다.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래 안 해야 돼요.” “흥분되는 마음을 좀 참아볼 수 있겠니?” “네.”

사실 그 아이는 선생님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것이다. 몇 개월을 지나며 보니,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표현의 차이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해마다 나는 제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진심으로 마주하는 순수한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자존심은 버리고 교사로서의 진짜 자존심을 갖춰가면서 비로소 가질 수 있었던 기쁨이다.

 

전미경 작. <별과 꽃과 사랑의 이야기> 삼베에 풀꽃. 36×33cm. 2005.

 

내가 버린 건 잡동사니만이 아니었다

전정민 29세. 직장인. 대구시 달서구 성당동

언제나 내 방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 준비물, 문제집들, 인형, 장난감, 갈아입으려고 꺼내놓은 옷들…. 어지르기만 할 뿐 치우지 않으니 늘 지저분했다. 내가 잠잘 공간만 겨우 남아 있는 내 방은 내가 보기에도 어지러웠다.

“제발 좀 치워라, 정신 사납다”는 소리를 항상 들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 치워야지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오랫동안 안 입었지만 언젠가는 입을 것 같은 옷들, 예전에 쓰던 노트, 학년이 바뀐 교과서까지 정이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했다.

반면 친언니는 어릴 적부터 정리 정돈의 달인이었다. 언니는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해서 수시로 버리는 게 생활화되어 있었다. 공짜로 주는 사은품이라도 필요하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불필요하다고 여기면 아무리 새것 같아도 바로 버렸다. 덕분에 언니의 방은 늘 깨끗했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대조적인 방의 모습처럼 언니와 나의 성적도 차이가 났다. 학교 성적이 상위권인 언니는 미술 대회, 주산 대회에 나가서도 늘 수상을 하였다. 반면 비슷하게 노력하는 것 같아도 나는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대학교 1학년 어느 날이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여겼는지 언니는 내 방을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지금 방의 모습이 나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거야.” 언니는 청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한 오래된 교과서들, 노트, 필기구들, 어린 시절 재밌게 보던 만화책, 시간이 훌쩍 지난 과월호 잡지들, 오래된 옷들…. 그런 것을 언니는 큰 가방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나중에 볼 거란 말이야.” “나중에 입을 거란 말이야.” “이건 버리면 안 돼, 이것도 안 돼…”를 외쳤지만 언니는 막무가내였다. “이거 네가 입은 거 몇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거든, 그럼 앞으로도 안 입어” 하며 큰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느덧 언니의 큰 가방에 가득 들어찬 내 잡동사니들, 언니는 무겁디무거운 큰 가방을 메고 홀연히 사라졌다.

터엉~! 좁아 보이기만 했던 방이 훤하게 넓어져 있었다. 순간 내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았다. 일주일 정도 오래된 물건과의 헤어짐에 허전했지만, 곧 비워진 공간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언니가 큰 가방 안에 넣은 건 단지 잡동사니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니 말처럼 버려진 물건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그 후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은 정리 정돈 하는 습관이 생겼다. 필요 이상으로 잡념이나 고민이 많았던 나는 청소를 하고 정리 정돈을 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책이 떠오르거나, 씻은 듯이 고민이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더욱더 정리 정돈의 재미를 느꼈다.

시험 성적도 예전에 비해 내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같은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니와 내가 왜 그렇게 성적 차이가 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건에 대한 미련과 집착들로 나는 항상 산만했고, 언니는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내 삶에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버림과 비워냄’일 거라 믿는다.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 소중한 것들로 채울 수 있으니까.

 

전미경 작. <무지개 뜨는 언덕> 모시에 나뭇잎, 풀꽃. 36×33cm. 2005.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4)

“제가 다음 생에서 사람으로 태어날까요?”

할머니는 쌀을 한 움큼 쥐어, 꽂아놓은 바늘 끝에 쏟는다.

“쌀알이 바늘 끝에 서면 얘기해.”

“어떻게 그렇게 돼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란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값진 것이야.”

영화 ‘황구의 동굴’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기까지는 3,000년의 시간이 걸린다고도 하지요.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가장 축복받은 삶이라고 합니다.

그 축복받은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을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내 인생에 오직 한 번뿐인 이 순간, 나의 내면과 깊숙이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내가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찾으시기를….

 

 

빼기가 나를 바꾼다

부끄럼쟁이 ‘홍당무’

반장 선거에 출마하다

 

어릴 적 나는 울보에다가 고집도 세고, 언니가 가진 건 나도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해야 되는 욕심쟁이였다. 게다가 낯가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서 제일 두려운 게 명절 때 친지들이 모두 모이는 것일 정도였다. 학교에서 발표라도 하려면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부터 빨개져 ‘홍당무’라는 놀림도 받았다. 남 앞에 잘 나서는 친구들이 너무 부럽고 그런 애들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은 싫어졌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엄마의 권유로 마음수련 청소년 캠프에 가게 되었다. 소심함과 부끄러움이 제발 없어졌으면… 항상 바랐는데 마음을 버릴 수 있다니!

수련을 하면서, 그동안 여러 번 전학을 다니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기적이고 정 없는 친구들, 남을 의식하는 마음, 소심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은데…’ ‘애들이 왜 이렇게 쌀쌀맞지?’ 그런 생각들 때문에 항상 머뭇거리고 뒤로 숨게 되었던 거였다. 이 사람은 이래, 저 사람은 저래, 내 멋대로 쌓아둔 변덕스러운 마음들이 길가의 쓰레기보다 더 더럽고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런 가짜마음들을 다 버리고 2학기를 시작했다. 나는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저의 튼튼한 다리가 반쪽이 될 때까지 우리 반 50명과 선생님의 다리가 되겠습니다.”

선거 연설을 하는데 하나도 떨리지가 않았다. 친구들은 나를 뽑아주었고 그 후로 매년 학급 임원을 맡고 있다. 고1 때부터는 사물놀이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데 부장을 맡아 북도 가르치고 봉사 활동도 한다.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따듯한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 챙겨주니 후배들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

화장실 청소를 할 때도 ‘더러운 거? 씻으면 되잖아. 내 마음이 더 더러운데’ 무대에서 춤을 출 때도 ‘부끄러움? 원래 없는 거잖아’ 생각하니 뭐든 할 수가 있었다.

친구들이랑 얘기를 하다 보면 학교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나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한다. 그럴 때마다 그런 마음을 버리면 된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잡생각도 스트레스도 버리면 없는 거라고 하면 친구들도 금방 이해를 하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마음수련을 만난 것은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만큼의 설렘과 감사함을 합쳐놓은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친구들이 함께 마음을 버려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고 자유롭게 생활했으면 좋겠다. 마음수련 FOREVER!

김소선 고등학교 2학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빼기의 건강법

마음을 비워요,

공황장애 따위는

미미해지리니…

 

학교를 졸업하고 금융권에서 일하게 되었다. 월급은 많았지만 그만큼 혹독한 환경이었다. 여직원의 근무 태도와 성과를 매달 평가해서 공개적으로 등급을 매겼다. 나는 시제 금액의 1원까지 맞춰가며 매번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금융계 감사에게 칭찬받을 정도로 완벽을 추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거칠게 몰아쉬어지고 팔다리가 경직되는 것이었다. 손가락과 팔목이 마구 돌아가고 혀도 마비가 되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와중에도 정신은 또렷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고 그 생각이 강해질수록 호흡도 가빠졌다. 응급실에 실려가 위기는 모면했지만 그 이후로도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호흡 곤란이 왔다. 오감이 예민해지면서 말초신경이 경직되고 내가 이러다 잘못되는 건 아닐까 부정적인 생각들이 겹치면서 불안감이 가중됐다.

그러던 중 착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고 몸살을 앓았다. 일년에 반 이상 감기를 달고 살 정도로 면역력이 떨어졌고,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각에 내 몸을 더 금덩이처럼 보살폈다. 많이 힘들고 지치면 어김없이 과호흡 증상이 나타났고 또 과호흡을 하게 될까 두려워 나를 더 아꼈다. 그럴수록 체력은 더 떨어지는 바보 같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이삼 년간 고생을 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어릴 적 풍족하지 못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나 무언의 책임감을 항상 마음에 지고 살아왔다. 완벽주의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세상 어떤 사람도 내 기준으로 바라보고 내 틀에 맞추려고 했었다. 열등감이 너무 많아서 그걸 감추려고 모든 걸 다 잘해야겠단 그 마음이 나를 더 구속했었다는 것도 알았다. 당연히 스트레스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련을 하면서 그 모든 것이 나의 좁은 마음그릇 탓임을 알게 되었다. 속 좁은 내 틀과 욕심, 세상을 향한 원망을 버린 만큼 마음은 여유가 생겼고 스트레스는 내가 만드는 거지, 이 세상에는 원래 없는 것이구나, 모두 다가 내 욕심 때문에 그랬구나라고 마음으로 진정 깨치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과호흡 증상이 없어졌다.

지금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움직여도 다음 날 거뜬히 일어날 만큼 체력도 좋아졌다. 정말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말을 확실히 안 것 같다.

요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면 연예인들도 종종 공황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마음수련 몇 달만 하면 깨끗이 없어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공황장애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알고 근본적인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어느새 난 힘들 줄만 알았던 임신도 하고 지금은 17개월 된 사랑스런 아들과, 수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신랑과 함께 세상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런 벅찬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자체가 세상의 기적인 것 같다.

민정현 35세. 경남 창원시 진해구 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