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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아프리카 희망기구 캄보디아 파견 간사 이나희씨

문진정

앙코르와트 사원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 시내에서 버스로 한 시간을 달리면 도착하는 칸셍 마을. 소달구지가 덜그럭거리며 오가는 한적한 이 농촌 마을에 3년 전 초등학교 하나가 생겼습니다. 세이하라는 한 관광 가이드가 자신의 월급으로 만든 칸셍학교입니다.

지난봄, 칸셍학교에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 면장, 군장님까지 모두 모이는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마을에 처음으로 도서관이 생긴 것입니다. 이름 하여 ‘꿈꾸는 도서관’입니다.

꿈꾸는 도서관을 만든 사람은 바로 한국인 이나희(31)씨입니다. 작년 서울시립청소년문화교류센터의 ‘희망누리 체험단’을 통해 캄보디아의 국제기구와 NGO를 방문한 나희씨는 식민 지배와, 내전의 상처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역사를 접하게 됩니다. 오랜 문화가 한순간에 사라진 캄보디아의 역사는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 행운아인 것 같아요. 좋은 시절에 한국에서 태어나 배우고 싶은 것을 다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자문해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한 것들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3월, 그녀는 홀로 캄보디아 씨엠립에 왔습니다. 캄보디아의 초·중등학교와 한국의 중·고등학교가 친구를 맺어 도서관을 만드는 아시아아프리카희망기구(WHAF)의 ‘꿈꾸는 도서관’ 프로젝트를 이곳 칸셍학교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현지 아이들에게는 도서관을 만들어주고 한국 아이들은 이곳을 방문해 문화 체험과 봉사 활동을 하면서 3년간 교류해 나가는 것입니다. 비가 새는 교실을 리모델링하여 한 달 만에 문을 연 도서관에는 캄보디아의 역사책 360권과 영어 책 1000권이 채워졌습니다.

캄보디아의 시골에서 책이란 아주 귀한 물건입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학교에서는 흑백 교과서를 빌려주기도 하지만 방학 때는 반납을 해야 하지요. 그런 곳에 도서관이 생긴다는 것은 아이들이 자신의 문화를 배우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문이 열리는 셈입니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책 구석구석을 가리키는 손가락들. 아이들은 꿈꾸는 도서관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뜨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80년대 한국의 농촌 마을처럼 새벽에 일어나 모내기를 하고 동생을 돌보느라 바쁜 아이들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대단합니다. 나희씨는 청소년 센터에서 한글과 영어 그리고 피아노를 가르칩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매일 자전거로 40분을 달려와 수업을 듣는 등,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 덕분에 나희씨의 보람도 큽니다. 편안한 일상을 뒤로하고 타국의 생활이지만 오히려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나희씨. 조금이나마 자신의 재능과 경험들을 아이들과 나누며 살고 싶다는 그녀의 꿈이 캄보디아 구석구석에 행복한 에너지로 퍼져나가리라 믿습니다.

아이들이 이나희씨에게 선물한 그림.

캄보디아 파견 간사 이나희 씨는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것이 좋아 5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교육 봉사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 주변에 좋은 자극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후회 없는 시간 관리를 위하여

“너무 바빠” “바쁘게는 산 것 같은데 결과가 없어”….
우리는 자주 이런 후회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에야
그때 더 잘해 줄 것을 후회하고, 나이가 들어서야 그때 더 많이 배울 걸,
더 소중한 것에 투자할 걸 후회한다.
잠깐 멈추어서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일들 속에 파묻혀 살진 않았는지….
정작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에는 한 번도 제대로 시간을 쏟지 못하지는 않았는지를.
우리는 매순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선택하고, 우리 삶은 그 선택의 결과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중요한 시작이다.

이경재 마음코칭센터 대표

어떤 활동을 결정하는 두 가지 요소는 ‘긴급성’과 ‘중요성’이다. ①에 속하는 긴급하면서도 중요한 활동으로는 급박한 문제 처리, 보고서 작성, 기간이 정해진 프로젝트 진행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며, 일상생활을 하며 우리 모두는 여기에 속하는 활동들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점점 일이 늘어난다. “너무 바빠” 이게 우리 일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바쁜 상태는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고 지칠 정도로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바쁜 일에 쫓기다 보면 지치게 되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TV와의 시간으로 도피하게 된다. 쓸데없는 TV 시청, 험담, 오락 등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달래는 것이다. ①과 ③ ? ④ ? ① 과 ③… 이러한 시간 패턴은 결국 삶을 후회하게 만들고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②에 속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활동들을 하는 시간들이다. 장기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키워주고, 건강 관리를 하고, 지속적으로 자기 계발을 하고, 힘겨워 고민하는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지 구상해보고, 중요한 회의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진솔하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는 여유와 평화가 찾아온다. 여기에 사용하는 시간이 증가하면 우리가 점점 나아진다는 것을 느낀다. 능력이 커지고, 다른 관점에서 보고, 더 자신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위해주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럴 때 나오는 창의력은 놀라운 것이다.

나아가 I에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사전에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여,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풍요와 의미를 주는 활동들은 긴급하지 않기 때문에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잊지 말고 챙겨야 한다. 소중한 것에 우선적으로 시간을 쏟고 싶을 때 중요한 건, 이전의 것을 끊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③이나 ④에 속하는 활동들에 대해 때로 “못한다”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런 용기는 자신의 내면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하겠다’라는 강렬한 결심에서 나온다. 대부분 ②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실천력과 자제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가 만든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의 마음과 정신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데에 있다.

후회 없는 시간 관리를 위해 매일 1%만 계획을 세우는 데 투자를 하자.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내가 바라는 변화를 구체화하고, 나는 어떻게 시간 관리를 하고 싶은지, 원하는 결과는 무엇인지,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요구되는 행동은 무엇인지, 돌아본 후, 우선순위를 매기고 계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중한 것’이 아닌 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받은 가장 훌륭한 두 가지 선물은 시간과 선택의 자유다. 우리는 시간을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할 수 있다.

-동료들 위해 매실차를 담가 보니… -‘Early Bird’를 아시나요?

동료들 위해 매실차를 담가 보니…

손여진 26세. 직장인. 경기도 파주시 문발읍

첫 직장에 들어간 지 1년이 넘어가던 때였다. 나름대로 적응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업무량은 늘어나고 후배들도 들어오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처음 해보는 일들도 대인 관계도 모두 잘 하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까 왜 그랬지… 이랬으면 더 좋았을 걸…’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며 사람들을 분별했고, 안 좋은 면만 보였다. 일을 하는 중간에도 불쑥불쑥 잡생각이 떠올랐다. 점점 회사 생활이 힘겨웠다.

답답한 마음에 회사 마당에 있는 30여 개의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만큼은 부정적인 잡생각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잡생각이 날 때마다 일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조금씩 보였다. 쓰레기통이 가득 찼으니 비워야겠다, 동료들이 나른한 오후에 졸려 하는 거 같으니 커피를 타줘야겠다 등등. 자연스럽게 나보다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동료들을 위해 매실차를 담가 보았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소화가 잘 안돼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 때 마실 매실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실차 한 잔을 건넸을 뿐인데도 너무나 고마워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 팀워크도 훨씬 좋아진 느낌이다. 그 이후로 나는 나를 비롯한 남의 잘잘못에 대해 생각하는 게 줄어들었다. 동료들은 여전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고, 그런 동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동안 얼마나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그런 생각들로 허송세월을 보낸 걸 생각하면 많이 부끄러워진다. 이제는 책상에 앉으면 업무에 집중도 잘되고, ‘나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 동료들을 분별하고 매일매일 후회하며 하루를 보냈던가 싶다. 까마득하다.

‘Early Bird’를 아시나요?

이영희 32세. 디자이너.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나는 올해 초까지 게임 회사에서 근무를 했다. 게임 캐릭터 3D 모델러로 그려진 원화를 3D 캐릭터로 만드는 일이었다. 원래 편집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나는 일을 하면서도 뭔가 부족함을 느꼈지만 코앞에 닥친 많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잊어버리거나, 다른 취미거리로 그 허전함을 달랬다.

마음 한 켠엔 언제나 ‘공부를 해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직을 해야지’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스킬을 익혀야지, 그림을 그려야지, 결심했지만, 역시나 달라진 건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지만, 번번이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고,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냈다. 때마침 평소 즐겨보던 잡지에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란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 이거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회사의 친한 친구에게 제안을 했다. 매일매일 회사에 조금 일찍 나와서 같이 그림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잘해보자는 의미로 일주일에 그림 한 장을 못 그리면 3,000원씩 벌금을 내기로 했다. 처음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몹시 괴로웠지만 벌금 내기가 아까워 겨우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찍 나오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잘 그리는 분에게 보여주고 고쳐나가면서 그림 실력도 점차 좋아졌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블로그에 올렸고,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주는 걸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올해 초 팀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러 다녔을 때, 나는 아침 시간에 그렸던 그림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하였다. 덕분에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현재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서 월간지 편집디자인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 직장에서도 난 ‘얼리 버드(Early Bird)’란 모임을 만들었다. 자기 계발의 시간을 아침에 갖기로 한 것이다. 현재 함께하기로 한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졸린 눈을 부비며 각자 그림, 동영상 편집,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 후회 없는, 매일매일 알찬 하루가 되고 있다.

 

가짐에서 버림으로, 후회에서 후회 없음으로

박용희 57세. 주부. 심리 상담 치료사

저는 어려서부터 뭐든지 최고여야 했습니다. 20대에는 제일 돋보이고 싶어 외모를 치장하는 데 굉장히 공을 들였습니다. 능력도 최고여야 했고, 돈도 많아야 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주변과의 비교에서 내가 우위에 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고, 남편의 첫 부임지인 네덜란드로 함께 떠났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도 최고여야 했습니다. 내가 완벽한 만큼 남편도, 아이들도 완벽하기를 바랐습니다. 내 아이들이 최고여야 했기에, 30대는 참으로 극성스러운 엄마로 보냈습니다. 40대에는 나름대로의 커리어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심리 상담 치료사, 요가 강사…. 목적한 바대로 명성과 돈도 따랐습니다.

내가 꿈꾸던 명예, 돈…. 그런 것을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성취감도 그때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주위에는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걱정할 게 없어 보이던 남편도 알게 모르게 출세와 돈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마음이 열등감을 만들어,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왠지 주눅 들어 하더군요. 그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주변의 것들을 최고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99개를 잘해도 언제나 못한 1개에 초점을 맞춰 야단을 쳤지요.

매순간 더 나아져야 하고, 더 높아져야 하고, 현재 가진 것에 대해서는 늘 부족해하는 그 마음에 행복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밖에서 행복의 조건을 구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갇혀 있던 정서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곳에서 자연의 오묘함과 신비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던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하늘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조용히 숲에 들어가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항상 비교하고 욕심내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수백억 번을 다시 태어나도 똑같을 것 같은 이 마음들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2003년 말, 해외 근무를 마친 남편을 따라 벨기에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낸 한 지인으로부터 <세상 너머의 세상>이란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세상 너머의 세상’이란 무엇일까? 밤새 읽고 또 읽고 10번 정도는 읽은 듯합니다. 마음수련을 해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수련을 하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모든 여건을 마련해준 남편임에도, 남편을 무시하고, 주변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강한 자존심으로 모든 것을 내 위주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내 자체가 열등감 덩어리였습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부단하게 노력했던 거였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조금씩 변화되어 갔습니다. 요만한 것도 넘어가지 못하고 맞나, 틀리나 논리적으로 따지던 완벽주의의 내가, 점점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남편도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수련 일주일 후 남편은 “내 마음에서 내려놓으면 힘들 게 없네. 마음을 빼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헛된 것에 마음을 뺏기고 살았나 후회가 된다”며 참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버리며 우리 부부는 알았습니다. 진짜 후회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열등감, 우월함, 최고가 되려는 욕심, 그런 마음속에서는 매순간 후회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삶이기에, 그것은 곧 사라져버리고 말 허망한 꿈이기에.

진짜 후회 없는 삶이란 ‘나’라는 것은 티끌도 없는 것입니다. 이국땅에서도 언제나 똑같이 있어주었던 그 하늘 같은 마음이 되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늘이 누구 탓을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던가요. 옳다 그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던가요. 그 자연의 마음으로 걱정 없이, 가짐 없이, 남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고 도와주며 살 때 후회는 남지 않더라고요.

예전의 저는 심리 상담을 할 때도 우월감을 갖고 했었습니다. 친절한 척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도 모르는 우월감과 군림하려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나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나니 무척이나 편안하고 고요해져 그냥 그들과 하나가 되더군요. 마음수련을 하기 전에는 상담을 요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불행해서 오는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도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마음이 들어찰 대로 들어차서 더 이상 돌파구가 없어진 상태가 된 것임을 알고 그 점을 많이 인지하도록 해줍니다. 바로 그것이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으니까요.

되돌아보면 옛날에는 사소한 금기 사항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밤참은 먹으면 안 되고, 양말은 아무 데나 벗어놓으면 안 되고, 치약도 아무렇게나 짜면 안 되고….

그런 작은 것들부터 큰 것까지 완벽하게 테두리를 쳐놓고 살았었지요. 남편은 예전의 자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소중한 인생을 허망한 것을 좇느라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찾아올 것입니다. 참된 것을 찾고, 진실한 것만 추구하며, 아무 바람 없이 사람을 대하고, 사랑하며 살았다면 절대 후회는 없을 텐데 말이지요. 머리로는 누가 모르며 말로는 누가 못 하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희 부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희 부부는 압니다. 마음을 비우면, 저 말 없는 하늘과 하나가 되어 진짜 삶을, 후회 없는 나날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오늘도 참 행복합니다.

무말랭이

 

무는 해독 작용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기침이 날 때 생무 끓인 물을 마시고, 돼지고기나 치킨을 먹을 때 옆에 꼭 두고 먹기도 하지요. 생무는 말리면 매운맛이 날아가고 색이 노릇노릇해지면서 소화기에 더욱 좋은데요, 그걸 반찬으로 만든 것이 바로 무말랭이지요. 시골집, 지붕 소쿠리에 담긴 채 바람과 햇볕에 온몸을 말리고 있던 무말랭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할머니, 무말랭이 어떻게 만들어요?” “무를 잘 썰어가지고 말려야 되는데 11월 넘어서 나오는 무가 맛이 제대로여. 그 무를 그늘에 말리면 잘 마르지가 않아서 햇볕에 말리는데 또 그것이 바짝 말리면 맛이 없어. 약간 습기가 남아 있는 상태까지 한 달 넘게 말려야 돼. 말려진 거를 갖다가 우짜냐 하면 먼지가 있으니까 물에 살짝 헹궈서 꾹~ 짠 뒤에 조청 새우젓 고춧가루 간장 설탕 마늘 파 깨도 넣고…. 할미가 해서 보내주마, 남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여.”

무를 말릴 때는 그늘에서 바람으로 말리는 것(음건)이 가장 좋은데 도심에서 한 달씩이나 말려두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보통 건조기에서 말린 무를 물에 불려 사용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무 고유의 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한 달간 꼬들해지려고 하는 그 순간까지 잘 말려서 무 자체의 수분을 남기는 것이 맛있는 무말랭이의 비결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기간 동안 햇볕 바람 습도 계절의 모든 기운이 스며들고 거기에 할머니의 정성까지 더해지니, 자연의 맛이 그대로 담긴 건강 반찬입니다.

고춧잎을 살짝 말려 함께 무치면 더 맛있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구르는 물통 ‘Q-Drum’

만든 사람 헨드릭스 형제(P. J Hendrikse, P. S Hendrikse)
출처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스미소니언 연구소/에딧더월드)

이름은?
큐드럼(Q-Drum). 알파벳 Q를 닮은 모양의 원형 통(Drum)이라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사용 지역?
앙골라, 에티오피아, 가나, 케냐,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아프리카 시골 지역에는 콜레라와 이질 같은 수인성 질병들에 많은 사람들이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래서 이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깨끗한 물을 먹기 위해 무거운 물통을 머리에 이고 수킬로미터를 걸어서 물을 길어온다. 이러한 노동은 목과 척추 부상으로 이어진다. 깨끗한 물을 장거리로 쉽게 옮기는 방법을 찾다가 Q-Drum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오랫동안 바닥에 굴려야 하기 때문에 내구성이 강한 폴리에틸렌 소재를 사용했고 떨어져나가는 손잡이나 축이 없도록 도넛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가운데 구멍으로 통과되는 끈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식물 재료나 가죽으로 만들어 대체할 수 있다.

주변의 반응은?
주변의 반응은?  수세기 동안 노동으로 여겨졌던 물 긷기를 놀이에 가깝도록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물을 위생적으로, 적은 힘으로 운반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와 여성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시간에 여성들은 가정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남아프리카 화폐로 510R(랜드)-한화로 약 7만5천 원-인 큐드럼은 사용자에게는 비싼 가격이지만 국제적 비정부기구와 민간 기업의 지속적인 지원이 있다면 식수 때문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자격 청춘 합창단, 소년원 방문의 커다란 의미


‘남자의 자격-청춘합창단’의 첫 공연은 바로 서울소년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청중은 물론 서울소년원(고봉중고등학교)의 남학생들이었고, 더불어 국내 유일의 여자 소년원이라는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의 여학생들도 함께 자리하였습니다.

‘청춘합창단’의 대부분의 어르신들에게 이 아이들은 거의 손주뻘일 것이고, 50대의 젊은 분들께도 막내뻘의 어린 자식 같겠지요.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 해도 자식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그런 뜻에서 ‘청춘합창단’의 소년원 방문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지나온 날들이 아무리 어두웠다 해도, 이 아이들의 삶에는 아직 너무나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얼굴 위쪽 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비춰지는 까칠한 얼굴들.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까까머리 뒤통수들. 조금만 덜 외롭고 덜 추웠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 아이들이 ‘청춘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며 환히 웃고 있었습니다. 김태원 지휘자는 아직 연습이 덜 되었음에도 그들을 위해 ‘아이돌 메들리’를 선물했고, 까르르 퍼져가는 웃음소리와 신나는 박수 소리는 따스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속에서 얼어붙었던 아이들의 마음이 녹아드는 소리 같았습니다.

고봉중고등학교에도 합창단이 있더군요. 그쪽도 신생 합창단인데 ‘청춘합창단’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열심히 답가를 준비했다면서, 까까머리 소년들이 머뭇머뭇 단상에 올라 줄을 섰습니다. ‘You raise me up’의 전주가 조용히 흐르는 동안, 아이들은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분들 앞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너무나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전주가 끝나자 고개를 들고 입을 열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은 나를 일으켜 산 위에 설 수 있게 하고… 당신은 나를 일으켜 성난 바다를 건너게 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나는 강인합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저 노랫말 속의 ‘당신’이란 누구일까요? 그날 하루 동안만큼은 ‘청춘합창단’이 그 존재가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청춘합창단’과     ‘고봉합창단’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부르는   ‘사랑으로’였습니다.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사랑과 열기가, 그 아이들에게 현재의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연 후의 인터뷰. 역시 아이들의 얼굴은 절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입가에 흐르는 미소에는 기쁨과 그리움이 가득했습니다. 한 소년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제일 보고 싶습니다. 못난 짓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곧 밖에 나가면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가수의 꿈을 꾸는 한 아이는 몰래 김태원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었습니다. 가수가 되려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를 하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김태원은 말했습니다. “내 마음에 기억해 두고, 언젠가는 만나겠지. 내 손이 닿는 데까지만 오면, 내가 잡아주지!” 그 말은 100% 진짜였고,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청춘합창단’의 첫 번째 공연을 관람했던 한 명의 까까머리 소년은, 몇 년 후 부쩍 성숙해진 모습으로 김태원을 찾아가 말하겠지요. “그날, 선생님께 편지를 쥐어드렸던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그러면 반가움을 주체 못한 김태원은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덥석 안아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 간절한 꿈이 실현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가을 풍경

고궁의 가을도 깊어만 갑니다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만남도, 우리의 기쁨도, 그렇게 깊어만 가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역사로 남을 수 있게….

창덕궁에서. 2005년 11월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

한라산에서 단풍을 보내며. 2006년 11월

사진, 글 김선규

탑리역에서

지난여름, 새내기 대학생 딸이 생애 첫 기차 여행을 하였다.
사박 오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딸은 어느 간이역에서 본 그림 같은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동해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어요. 차창 너머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들이 영화처럼 지나고 있었어요. 얼마나 달렸을까. 긴 철길이 들판과 마을 사이를 지나는 곳에 탑리역이 있었어요. 기차가 정차하자 사람들은 분주한 걸음으로 플랫폼을 빠져나갔어요. 그런데 그 속에 한복 차림을 한 노부부가 계셨어요. 하얀 모시옷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와 초록색 치마에 흰 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노부부의 여름 한복은, 짧고 간편한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어요.

나는 얼른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 친구를 깨워 창문을 가리켰어요. 우리는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객차 앞을 지나가시는 두 분을 유심히 바라보았죠. 머리카락이 새하얀 백발인 할아버지는 양손에 알록달록 무늬가 있는 가방을 들고 씩씩하게 앞서 지나가시고, 그 뒤 서너 발자국 뒤에 할아버지와 똑같이 완전 백발인 할머니가 다소곳이 따르고 있었어요. 성큼성큼 걷는 할아버지와 뒤따르는 할머니와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졌어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전통의 남성상! 친구와 나는 마주 보고 쿡쿡 웃었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할아버지는 역사에 양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바삐 할머니 쪽으로 되돌아오셨어요. 그리고 할머니에게 손을 내미셨어요.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을 할아버지에게 맡기더군요. 두 분은 그렇게 손을 잡고 천천히 역사 쪽으로 걸어가셨어요.

우리가 탄 기차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카메라가 롱샷으로 주인공을 따라가며 촬영한 것처럼, 그 고운 영상을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어요. 차창으로 바라본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너무 예뻤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늙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예뻤어요! 진짜! 그래서 손 흔들 줄도 모르고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니까요.^^

간이역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리고 어디로 떠나갔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먼 어느 곳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다녀가기도 했다.
그래서 간이역은 역무원이 없어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거다.

최형식

산악인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하고 나눔의 산을 오르다

산악인 엄홍길. 1985년 첫 등정 이후 38번의 도전 끝에 2007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 기록을 세운다. 그 모든 것이 산이 받아주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산이 보여준 그 큰 배려와 사랑을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과 동료들에게 나누려 한다. 새로운 인생길, ‘엄홍길 휴먼재단’이란 17번째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엄홍길 대장을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 지구상 가장 높고 험준한 히말라야 8000m 산 16개 봉우리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도전장을 내민 이후 2007년 마지막으로 16좌 로체샤르 등반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였다.

“히말라야는 왜 나를 살려서 보내준 것일까….” 22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성취했다는 기쁨도 잠시, 돌아보면 인고와 고통의 세월이었다. 38번의 도전, 20번 등정과 18번의 실패. 그 과정에서 후배 6명과 셰르파(Sherpa, 히말라야 산악 등반 안내인) 4명을 먼저 보내야만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히말라야를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또 하나의 인생 목표가 생겼다. 그동안 산행에 도움을 준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 결실은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새로운 목표인 8,000m 17좌 휴먼재단이란 산을 오르기 위해…. 살아남은 자로서, 영원한 산사람으로 남는 길을 ‘나눔’에서 찾은 것이다.

해발 4060m 네팔 팡포체 마을에 지어진 첫 번째 휴먼스쿨 전경.

휴먼재단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16좌를 완등했듯이 히말라야에 16개 학교를 짓는 거예요. 교실, 화장실, 컴퓨터실, 도서실, 양호실도 짓고, 그 밖에도 학교 선생님의 월급을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현지인에게 간호 교육을 해 보건소 같은 역할을 하도록 약품도 지원하고 있죠. 학교 준공식이나 기공식을 할 때는 의료 봉사도 병행해서 하고 있습니다.

+ 그에겐 학교 짓는 일도 ‘도전’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건 교통의 열악함이었다. 대개 산간 오지 마을인데다 트럭이 갈 수 없어 헬기로 나르거나, 최종 목적지까지 자재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자재 운송비가 건축비만큼 소요됐고, 건물을 짓는 사람들도 고산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간 오지에 학교를 지은 건 소중한 인연인 셰르파들이 살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6년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목숨을 잃은 셰르파 술딤 도르지와의 인연은 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고향에 학교가 없다는 사실에 늘 가슴 아파했던 도르지. 그의 소원은 곧 엄홍길의 소원이 됐다.

2010년 5월, 드디어 휴먼재단의 첫 번째 학교가 술딤 도르지의 고향인 해발 4060m 히말라야 팡포체 마을에 세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학교 타르푸에 이은 세 번째 학교가 룸비니에서 한창 신축 중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 가난을 대물림하는 셰르파의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 엄대장의 바람이 하나씩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게 뭔가요?

제일 중요한 건 지형, 기후, 특성에 맞게끔 건물을 짓는 거예요. 세 번째 학교 룸비니는 완전 평야 지대인데 더 열악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보리수나무 아래 땅바닥에 천막을 쳐놓고 공부하고 있고….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에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우선 동네 지하수 우물부터 파고 시작했어요. 그동안 NGO 단체에서도 학교를 지었지만 문제는 짓고 끝난다는 거예요. 그게 참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저희는 학교 옆에 마을회관도 짓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도 애들이 공부하는 걸 관심 갖고 지켜봐야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교육의 중요성도 알게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문짝도 망가지는 등 폐교가 되거든요.

꾸준한 관심을 통해서 학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네요.

아이들의 변화도 느끼시죠?

그럼요. 열악한 상황에서의 아이들과 새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표정, 행동은 완전히 달라요. 진짜 해맑고 진짜 좋아해요. 마치 ‘우리들 세상이다’ 하는 표정을 보면 행복감을 느끼고, 후원해주신 분들께 감사하죠.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재단을 꾸리고 계신데요,

어떤 말씀에 선뜻 동참하시던가요?

제가 히말라야를 20년 동안 다녔잖아요. 거기서 무엇을 깨우쳤겠습니까. 결국엔 나눈다는 겁니다. 산이 저를 받아준 거잖아요. 산이 저한테 베푼 거잖아요. 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감히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상부터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과 동료들의 노력, 희생 덕분인 거거든요. 저는 제가 지금도 살아서 땅을 밟고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진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이 엄청난, 기적보다 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준 산과 동료들에게 저도 보답하고 싶다고 간곡히 말씀드리면 많이 공감해 주시더라고요.

산을 타는 것보다 마음을 모으는 게 더 어렵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나가고 계신지요?

물론 힘들 때도 많아요. 사람들한테 실망할 때도 많고 감정이 통제가 안 될 때도 있어요. 근데 그 순간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아, 그래! 저 사람이 내가 아닌데, 나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안 될 때도 많은데, 어떻게 내 맘 같기를 바라느냐, 생각해요. 그리고 아침이면 산에 갑니다. 산에 가면 확 풀어지면서 정리가 돼요. 자연은 우리 인간에 생명력을 불어주는 신비의 명약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받아주잖아요. 바다도 모든 걸 다 쓸어안아 주지 않습니까. 산과 같은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웃음)


네팔 타르푸 마을 두 번째 휴먼스쿨 기공식.

준공식 후 아이들과 함께한 엄홍길 대장.

+ 엄홍길, 그가 하는 일엔 늘 ‘휴먼’이란 말이 붙는다. 휴먼재단, 휴먼스쿨, 휴먼장학금….

그는 휴먼이란 말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녹아 있다고 했다. 8000m 등정을 네 번이나 같이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눴던, 친형제보다 더 절친한 후배인 박무택 대원이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후배와의 깊은 인연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엄홍길은 세계 제3위의 거봉 칸첸중가에 도전하다가 무려 세 명의 동료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에 빠져 원정대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말없이 동행해준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배 무택이었다.

그런 후배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 8500m 지점에 시신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거였다. 헬기도 갈 수 없는, 오직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결국 2005년 엄홍길은 자신을 포함한 18명으로 구성된 대원들을 결성, 산을 오르기에 이른다. 후배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세계 등반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휴먼원정대의 활약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감동했고, 훗날 휴먼재단 설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휴먼원정대를 통해 삶과 등반을 대하는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하셨지요.

‘죽음의 지대’ 8000m를 넘어서면 곳곳에 시신이 즐비해요. 전엔 공포와 연민은 잠시일 뿐 정상을 향해 앞으로만 나아갔어요. 성취욕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은 겁니다. 그런데 과연 동료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히말라야 정상에 선다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그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지 않았나…. 지금도 위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 10명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워요. 극한 상황에 처할 땐 더욱 간절하게 불러요. 너희들이 오르지 못한 산을 너희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나에게 힘을 달라, 용기를 달라….

+ 엄홍길은 유년 시절을 산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등산객을 상대로 식당과 숙박업을 했고, 고교 시절까지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같이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등산객과 친구가 되면서 그는 자연스레 산사나이가 되어갔다. 그러다 197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심장을 멈추게 하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다. 바로 ‘고상돈,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산 등정’이었다. 이후 그 역시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꿈을 품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산악 인생. 돌이켜보면 실패의 연속이었다.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도전, 결과는 실패였다. 1988년 등정에 성공했지만, 1992년까지 여섯 번이나 히말라야 정상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에베레스트는 3번 만에, 세계 7번째의 고봉 로체샤르는 3번 실패 후에, 안나푸르나는 5번의 도전 끝에 올랐던 것이다.

산을 오를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

젊은 시절엔 어떤 산이라도 오를 수 있다는 용기와 패기로 자신만만했었어요. 그러다가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 산이 무섭다는 걸 느끼고, 내가 산을 소유하려고 한 건 아닌가…. 무수한 실패를 통해 겸허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산을 오를 땐 마음을 비우고, 거대한 대자연과 동화돼서 하나가 돼야지, 나는 나다 너는 너다 내가 널 이겨야 한다, 욕심을 갖고 오르면 절대 안 돼요. 저는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서 산을 오르겠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산도 마음을 열어줘요. 정말 초심으로, 그리고 평상심 잃지 말고 한 발 한 발 내딛어야 합니다.

매번 목숨 걸고 도전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산은 나에게 존재의 이유고, 삶의 전부예요.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처럼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르는 거죠. 사실 산에 오를 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많겠어요. 그때 무섭다, 두렵다, 살아야겠다 하면 정상에 오르질 못하는 거죠.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이겨내야 해요. 무아지경 상태로 그렇게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선을 딱 넘어서면 올라가는 거예요. 그 단계에 진입 못 하기 때문에 실패를 하는 거죠. 그만큼 모든 걸 비우고 완전히 거기에 몰입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열려요. 그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선생님처럼 도전 정신과 자신감을 갖고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으시다면?

자기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 성취감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취감을 느꼈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거든요. 그리고 저는 산이 거의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생각해요. 상처로 인해 갇혀 있던 마음들이 열리고. 초등학생도 히말라야에 갔다 오면 고등학생처럼 굉장히 의젓해지거든요. 모두들 산에 많이 다니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최근에는 환경운동가로도 활동 중이신데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히말라야 기후가 엄청나게 변하고 있어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녹아서 빙하 길이가 짧아지고, 겨울에도 3500m 1월의 기후가 영상 5도 10도니 그곳 사람들도 걱정을 하는 거죠.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관심을 갖게 하고, 앞으로 장학 재단 기금을 마련해서 유자녀들의 학업을 돕고 싶습니다. 그렇게나마 그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산 같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산에 미쳐,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며 그가 산에게서 배운 건 결국 ‘사랑’이었다 했다. 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안아주고 받아주었듯이, 자신도 그렇게 사람을 향해 다가갈 것이라는 엄홍길. 그가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모두에게 인사를 전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는 네팔어로 ‘당신께 귀의한다’란 뜻이다.

 

산악인 엄홍길 님은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시작하여 2007년에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이란 기록을 세웁니다. 2008년에는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 셰르파 가족들과 유가족들을 돕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