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꾸만 붙잡아두던 것들을 시원하게 버린 사람들의 버렸기에 얻은 자유와 평화, 그 유쾌한 이야기들.

 

그 추억의 보물상자를 버리다

남명희 49세. 주부.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난 20년 가까이 일기를 썼다. 나의 일기를 모아 환갑 때 출판기념식을 하리라 기대하며.

결혼 후 두 아들을 키우면서는 나중에 남겨주려고 사진도 많이 찍으러 다녔다. 앨범뿐 아니라 육아일기도 몇 년에 걸쳐 썼다. 기록하는 습관에 자부심을 갖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설악산으로 등산을 떠났다. 혼자 남은 난 집안을 확~ 뒤집기로 작정하고 묵은 짐을 다 끄집어냈다. 상자째 쌓아놓은 책들, 아이들 장난감 상자, 방 하나가 마치 창고처럼 어수선했던 터라 어지간한 것은 다 버릴 참이었다. 맨 아래 구석진 곳에 포개져 있던 라면 상자 두 개. 열어보니 온통 손때 묻은 노트, 메모장들로 가득했다.

서른 살까지의 내 청춘의 독백들, 결혼 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일기장 상자였다. 이사 다닐 때마다 상자째 끌고 다녔던 짐, 행여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상자에 넣어둔 채로 짐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겐 너무 소중한 보물인 줄 알았던 일기장들. 기록들 사이로 파노라마처럼 추억들이 지나갔다. 춘천 어느 레스토랑에서 냅킨에 적어놓은 날짜와 동행했던 친구의 이름 약자. 아래쪽엔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또 어느 장에는 부모 곁을 떠나 살던 때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멀리 있는 벗에게 썼던 미완성의 편지 등도 있었고, 어느 장에는 책에서 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유행하던 노랫말, 말려서 붙여 놓은 단풍잎이나 꽃잎들, 거기에도 날짜와 생각들이 적혀 있었다. 공연 입장권, 영화표 등을 붙여 놓은 장에는 관람 소감이 빼곡히 적혀 있기도 했다. 또 어느 장에는 산 정상에서 머리 흩날리며 찍은 사진도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신문 기사들까지도 사이사이 다 붙여져 있었다.

그래, 이때는 참 많은 시간을 일기 쓰기에 쏟았지. 돌이켜보니 일기는 내게 비밀 은신처와 같았다. 세상과 마음을 활짝 열고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자꾸만 과거를 붙잡아 놓고 그 속에 숨으려 했던 흔적이었다.

과거의 사연들과 이틀을 보내면서 현재의 내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언제나 그 순간을 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삶. 그 순간이 멋있었다기보다 일단 그럴 듯하게 포장한 후, 재구성된 과거를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10권도 훨씬 넘게 모아둔 가족 앨범들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지. 순간 마음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기록을 위해 현재를 과거 속에 파묻는 것과 같은 짓을 하고 있구나. 항상 “여기 서봐, 이쪽을 보라구, 움직이지 말구, 잠깐만….” 그렇게 현재보다는 기록에 치중했으면서 그 기록들 또한 짐짝처럼 여겼었다. 내 마음을 가두고 박제해둔 상자들, 현재의 나를 그 속에서 꺼내는 것만 같은 체험이었다.

일기를 상자째 버렸다. 그리고 두 아들의 사진도 앨범 한 권씩만 남기고 과감하게 폐기해 버렸다. 책들까지 싹 정리하고 나니 그 홀가분함이란.

이후 나는 일기나 사진 대신 아들의 건강하고 밝은 미소를 더욱 보려 한다. 그리고 자주 웃는다. 여드름이 송송 난 얼굴, 겨드랑이에 털이 많아서 고민이라는 작은아들의 사춘기는 카메라로는 찍을 수 없는, 기록을 위해 멈출 수 없는 현재다. 멈칫거리던 일상의 흐름이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진 건 버려본 후에야 깨달은 소박한 기쁨이다.

 

전미경 작. <나무에 걸린 초승달> 종이에 풀꽃. 36×33cm. 2008.

 

권위와 자존심 버리고 진짜 교사가 되다

김민정 33세. 초등학교 교사. 부산시 해운대구 제송동

심호흡을 하고 교단에 섰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담임을 맡게 된 김민정 선생님입니다.” 나하고 고작 11살 차이 나는 이 녀석들이 나의 첫 제자들이다.

“선생님이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많아요. 여러분이 잘 가르쳐주세요~.” 이 말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선생님~ 애인 있어요?” “선생님~ 어디 살아요?” “선생님~ 우리 자리 좀 남남 여여로 바꿔요.” “선생님~ 청소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숙제는….”

30명의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처음이라 잘 모른다는 선생님을 말 그대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임 교사였던 나는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선생님을 예쁘게 봐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착하고 어린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자 또한 만만한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은 자기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나에게 제재를 가했다. 농담 따먹기로 분위기를 흐리고, 선생님의 훈육을 장난으로 받아넘기며 무시하기도 했다.

마냥 좋게만 대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선생님으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을 세우려면 좀 더 무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따끔하게 혼을 내고, 정색을 하며 수업 분위기를 잡았다. 아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고, 아이가 내 뜻대로 따르게 만드는 것만이 교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2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나는 한 번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내기에 앞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순전히 아이들의 입장에서.

거짓말을 하는 아이도, 선생님을 무시한다고 여겼던 행동도, 알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처럼 만들었다는 걸 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기분이 안 좋아 있는데 아이가 즐거워서 떠들면 선생님한테 반항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하고, 교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누르고 윽박질러야만 교사로서의 자존심이 세워진다고 생각했다니…. 아, 나는 정말로 교사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8년, 지난 3월이다. 하루 종일 만화책만 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어르고 달래보아도 소용이 없다. 시종일관 교사는 무시한 채 자기 할 일만 한다. 전담 수업 시간에 또 노래를 부르며 수업을 방해했다고 해서 아이를 불렀다.

“OO야,  전담 수업 시간에 왜 노래를 불렀니?” “심심해서요.” “그랬다면 선생님은 참 속상하구나, OO가 원래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아이가 아닌데, 다른 친구들은 다 공부하는데 혼자 노래를 불렀다니. 방해가 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니?” “사실은.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니 흥분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노래가 저절로 나왔어요.” “그랬구나. OO는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는 몹시 방해가 되었단다.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래 안 해야 돼요.” “흥분되는 마음을 좀 참아볼 수 있겠니?” “네.”

사실 그 아이는 선생님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것이다. 몇 개월을 지나며 보니,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표현의 차이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해마다 나는 제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진심으로 마주하는 순수한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자존심은 버리고 교사로서의 진짜 자존심을 갖춰가면서 비로소 가질 수 있었던 기쁨이다.

 

전미경 작. <별과 꽃과 사랑의 이야기> 삼베에 풀꽃. 36×33cm. 2005.

 

내가 버린 건 잡동사니만이 아니었다

전정민 29세. 직장인. 대구시 달서구 성당동

언제나 내 방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 준비물, 문제집들, 인형, 장난감, 갈아입으려고 꺼내놓은 옷들…. 어지르기만 할 뿐 치우지 않으니 늘 지저분했다. 내가 잠잘 공간만 겨우 남아 있는 내 방은 내가 보기에도 어지러웠다.

“제발 좀 치워라, 정신 사납다”는 소리를 항상 들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 치워야지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오랫동안 안 입었지만 언젠가는 입을 것 같은 옷들, 예전에 쓰던 노트, 학년이 바뀐 교과서까지 정이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했다.

반면 친언니는 어릴 적부터 정리 정돈의 달인이었다. 언니는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해서 수시로 버리는 게 생활화되어 있었다. 공짜로 주는 사은품이라도 필요하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불필요하다고 여기면 아무리 새것 같아도 바로 버렸다. 덕분에 언니의 방은 늘 깨끗했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대조적인 방의 모습처럼 언니와 나의 성적도 차이가 났다. 학교 성적이 상위권인 언니는 미술 대회, 주산 대회에 나가서도 늘 수상을 하였다. 반면 비슷하게 노력하는 것 같아도 나는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대학교 1학년 어느 날이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여겼는지 언니는 내 방을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지금 방의 모습이 나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거야.” 언니는 청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한 오래된 교과서들, 노트, 필기구들, 어린 시절 재밌게 보던 만화책, 시간이 훌쩍 지난 과월호 잡지들, 오래된 옷들…. 그런 것을 언니는 큰 가방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나중에 볼 거란 말이야.” “나중에 입을 거란 말이야.” “이건 버리면 안 돼, 이것도 안 돼…”를 외쳤지만 언니는 막무가내였다. “이거 네가 입은 거 몇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거든, 그럼 앞으로도 안 입어” 하며 큰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느덧 언니의 큰 가방에 가득 들어찬 내 잡동사니들, 언니는 무겁디무거운 큰 가방을 메고 홀연히 사라졌다.

터엉~! 좁아 보이기만 했던 방이 훤하게 넓어져 있었다. 순간 내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았다. 일주일 정도 오래된 물건과의 헤어짐에 허전했지만, 곧 비워진 공간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언니가 큰 가방 안에 넣은 건 단지 잡동사니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니 말처럼 버려진 물건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그 후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은 정리 정돈 하는 습관이 생겼다. 필요 이상으로 잡념이나 고민이 많았던 나는 청소를 하고 정리 정돈을 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책이 떠오르거나, 씻은 듯이 고민이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더욱더 정리 정돈의 재미를 느꼈다.

시험 성적도 예전에 비해 내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같은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니와 내가 왜 그렇게 성적 차이가 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건에 대한 미련과 집착들로 나는 항상 산만했고, 언니는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내 삶에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버림과 비워냄’일 거라 믿는다.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 소중한 것들로 채울 수 있으니까.

 

전미경 작. <무지개 뜨는 언덕> 모시에 나뭇잎, 풀꽃. 36×33cm.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