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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웃길 준비가 되어 있는 개그맨 김원효

의 ‘꽃미남 수사대’ ‘비상대책위원회’ 등의 코너를 통해 인기를 끌며 최근 그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곤한 내색이라고는 없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재미난 표정을 지으며, 최선을 다해 답변해 주었기에, 그와 함께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웃음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개그맨 김원효씨의 삶 그리고 마음 이야기.

최창원,  사진 홍성훈

범인들이 고등학교에 독가스를 살포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10분 안에 학생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상황. 그런데 비상대책위원회의 본부장은 안 된다는 타령만을 늘어놓는다.

“야, 안 돼! 방독면 500개를 언제 구해서 어떻게 씌우고 어디로 대피시키냐? 어? 그러면 우리가 위에 가서 예산 결재해 달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청장님한테 가서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이러면 청장님이 ‘야! 방독면이 우리 거냐? 비상 물품 아니야? 국방부로 가봐’ 그럼 내가 국방부로 가면 ‘에이, 그건 구호 물품이잖아, 보건복지부로 가야지’ 그럴 거 아냐, 어?” 원맨쇼를 하듯, 속사포처럼 빠르게 이어지는 본부장의 대사에 박장대소하는 사람들.

지난 8월, KBS 2TV <개그콘서트>에 신설된 코너 ‘비상대책위원회’는 관료 조직을 풍자하는 내용과 김원효를 비롯한 최고 개그맨들의 뛰어난 연기력에 시작하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요즘 인기 최고시죠? 축하드려요.

뜻밖에 너무 많은 사랑을 받게 돼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근데 기분은 되게 좋은데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면도 있어요. 살면서 보면 뭔가 되게 잘될 때 사건, 사고도 많이 터지더라고요. 항상 그걸 되새기면서 겸손하게, 늘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코너는 어떻게 생기게 된 걸까, 궁금해요.

이번 여름에 홍수 피해가 많았잖아요. 뉴스를 보는데, 좀 높은 사람들은 탁상공론을 많이 하더라고요. 되게 급해 보이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아 보이고.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빨리 구해야지, 저럴 시간이 있을까, 생각만 많고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있네, 그러는 사이 사람은 죽어 나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답답했고, 그걸 웃음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코너 속에서 안 돼, 안 돼~ 외치는 건, 정말 ‘안 돼’가 아니고 다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그를 짜는 거예요.

대사 분량이 굉장히 많던데요, 어떻게 외워요?

보통 한 회 녹화분이 A4용지 두 장 정도 돼요. 외우고 또 외우고 100번도 넘게 외워요. 대사가 저절로, 알아서 나올 때까지 외우는 거죠. 저도 제가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어요. 처음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했는데, 그냥 해야지,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외워지더라고요. 이 코너는 아이디어 회의도 장난이 아니에요.

제 부분은 제 입맛에 맞게 따로 정리하는데, 이번에도 부산 갔다 올라오는 길에 차 안에서 타이프를 쳤어요. 월화 리허설, 수요일 녹화, 목금 아이디어 회의, 토요일 정리…. 계속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한 코너, 몇 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고생해요. 매 주마다 발명품 하나씩 만드는 거잖아요. 그래도 무대에 딱 섰을 때 많은 분들이 웃어주시면 고생 같은 건 싹 사라져요. 개그맨들은 그때 최고의 쾌감을 느끼죠.

의외로 김원효씨는 학창 시절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한다. 하지만 연기하는 것을 좋아해 성격파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2003년 무작정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다.

연극, 뮤지컬….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우연히 개그 쪽으로 먼저 인연이 닿았고, 2005년 <개그사냥> ‘진상소방서’로 데뷔한다. 소방서에 걸려온 전화를 진상으로 받는 어눌한 소방대원의 모습으로 자신을 알렸지만, 그것도 반짝이었다.

그 후 <폭소클럽2> 등에서 간간히 코너를 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피자 배달, 호프집 전단지 돌리기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점점 개그보다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굶어 죽더라도 개그 아이디어 짜는 데 시간을 더 많이 내자’ 결심했다 한다.

차비가 없어 2시간을 걸어 방송국에 가는 등 어려운 시절도 보냈지만 2007년,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된다. <개그콘서트>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 코너에서 범죄자의 협박에 엉뚱하게 대답하는 형사 역할로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이다.

그해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남자 신인상까지 받았지만, 또다시 침체기를 맞았다가 올해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꽃미남 수사대’의 현란한 패션으로 중무장한 경찰서장, ‘9시쯤 뉴스’의 회색 트레이닝에 5대5 가르마를 탄 엉뚱한 기자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엉뚱한 반전, 어리버리한 말투, 독특한 표정…. 사람들은 ‘김원효’ 하면 떠오르는 ‘김원효식’ 개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웃음을 준다는 건 참 대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아이디어는 어떻게 찾으세요?

평소에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발상의 전환을 많이 해요. 처음 진상소방서 할 때도, 보통 소방서에 장난 전화를 많이 하는데, 오히려 소방관이 장난을 하면 어떨까? 상상했어요. “불이 났어요, 빨리 와주세요” 하는데, “죄송한데요, 저희가 밥을 시켜놔서…” 이런 식으로. 그리고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도 보통 항상 형사들이 범인한테 끌려다니는데, 거꾸로 범인이 “내가 네 딸을 데리고 있다” 하면, 형사는 “잘 부탁해”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있는 허점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더 크게 보이게도 하고요. 비상대책위원회에서의 경찰 본부장도, 정복은 입었는데, 5대5 가르마로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면 거기서 웃게 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는 코너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몰랐던 의뢰인의 잘못까지 다 얘기하는 그런 바보 같은 변호사를 해볼까 구상 중이에요.(웃음)

정작 본인이 스트레스받을 때 어떻게 하세요?

아이디어를 실컷 짰는데, 잘렸다거나 하면 스트레스받죠. 하지만 그런 일적인 부분은 순간이고, 마음이 힘든 게 제일 힘든 거 같애요. 제가 개그맨 생활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올해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예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서 키워주셔서 굉장히 친했거든요. 근데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는 잘 못 뵙고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부산에 내려가서 뵀어요. 그런데 발인 다음 날이 바로 녹화 날인 거예요. ‘9시쯤 뉴스’ 할 때였는데, 사람들 앞에서 바보 분장을 하고 ‘네, 김원효 기잡니다, 이렇게 웃길 수 있을까’ 온갖 고민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할머니한테 그동안 해드린 것도 없으니, 오늘 빵빵 터트려서 요걸 선물로 드려야겠다. 다행히 녹화도 잘됐고, 좀 뿌듯하더라고요.

개그맨,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분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요?

뭐든지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에요. 그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최고가 과연 어디까지가 최고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또 최고가 되기 위해서만 달리다 보면 서로 도와주지 못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래서 그냥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 마음먹었어요. 사실 요즘 사람들이 참 야박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인기 하나에 대우가 확연히 달라지니까. 2007년에도 조금 느꼈지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가 보니까 그런 것들을 많이 느끼게 되더라고요. 잘나가든 잘 안 나가든 항상 최선을 다하자, 그런 마음으로 살려고요. 그러려면 이 책 이름처럼 항상 마음을 수련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변 평도 그렇고 참 긍정적이고 성실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항상 저한테 뭘 하든지 “감사합니다” 생각하고 살라고 하세요. 한번은 방송 촬영 중에, 귀에 황토가 들어가서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더니, “그래도 남은 한쪽 귀가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살아라 하시고, 차 왼쪽을 누가 박았다 하면 “오른쪽은 멀쩡하니까 감사합니다” 해라 하시고. 그래서 우리 집 유행어가 그거였어요. ‘감~ 사합니다.’(웃음) 그렇잖아도 이게 재밌을 것 같아서 코너를 만들면 좋겠다 했는데, 정태호 형이 먼저 ‘감사합니다’ 코너를 만든 거예요. 사람이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구나 싶었죠.(웃음) 그리고 아버지가 항상 문자도 보내주세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하다 보면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런 운세 문자요. 제가 결혼한 뒤에는 저희 와이프한테도 보내주세요. 그런 것 보면 아버지는 참 부지런하세요. 저도 답을 매일 보내드려야 하는데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고는 뭐라 표현할 게 없는 게 죄송하죠. 늘 아버지 덕분에 힘도 얻고, 마음도 고쳐먹게 돼요. 아버지한테 배운 심성, 사랑을 나중에 제 아이한테도 가르쳐주고 싶어요.

김원효씨는 지난 9월 25일, 동료 개그맨 심진화씨와 극장에서 주례 없이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신랑, 신부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례자가 없는 한, 차라리 부모님 덕담을 듣는 것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외동아들이라 외로움을 많이 느끼면서 컸던 그는, 늘 ‘소중한 가정을 이루고 남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목표였다 한다. 아내 심진화씨 역시 이미 결혼 전부터 고아원 등에서 많은 봉사를 해왔다 한다. 검소하고, 예의 바른,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아내와의 결혼 후 훨씬 더 안정되고, 힘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요즘 개그만 하지 말고, 버라이어티로 외도도 하면서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벌지 그러냐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개그 쪽으로 쭉 열심히 하려고요. 개그에서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능력들을 계속 발견하고 계발해보고도 싶고, 그냥 방송하면서 내 즐거움을 찾아가며 살고 싶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웃음밖에 없으니까, 매 분 매 초 매 시간 매일을, 여러분들을 웃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데 바치겠습니다.

그는 요즘 운전할 때도 되도록 한 차선으로만 쭉~ 간다고 한다. 옆 차선이 잘 뚫리는 것 같으면 사람 마음이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생각하지만 결국 도착하는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다른 차선에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마음만 복잡해지고, 상황이 더 꼬이기도 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단순하게, 성실하게, 어떻게 보면 바보처럼 하나만 보고 살고 싶다는 그에게서 개그맨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웃음기 쫙 빠진 진지한 얼굴로 웃음에 대한 각오를 이야기하는 개그맨 김원효. 순간 그 앞에서 책상을 탁 치며 이렇게 말할 뻔했다.

“안 돼~ 그 약속 안 지키면 안 돼~!” 아, 이런 천생 개그맨 김원효에게 중독되었나 보다. 그를 떠올리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개그맨 김원효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KBS 2TV <개그사냥> ‘진상소방서’로 데뷔했습니다. 2007년 KBS 2TV <개그콘서트>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그해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남자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최근 <개그콘서트>의 ‘9시쯤 뉴스’ ‘꽃미남 수사대’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그는, 언제나 초심으로, 최선을 다해, 매 분 매 초 웃음을 준비하겠다는 천생 개그맨입니다.

이제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섯 가지 비밀 이야기.

 

꼭꼭 숨겨둔 비밀을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이희윤 24세. 고려대학교 <쿠스파> 동아리 팀장. ‘포스트시크릿 코리아’ 진행

“난 수영할 때 쉬하는 걸 좋아해.”

흥겨운 물놀이 때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웠던 꼬꼬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귀여운 고백으로 시작된 이 영상은 미국의 ‘포스트시크릿’이라는 프로젝트 소개 영상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익명으로 엽서에 적게 했고 이것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고해성사 창구가 된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수십만 통에 이르는 엽서들이 모였다.

작년 말, 이 영상에 푹 빠진 나는 즉시 ‘포스트시크릿’ 책을 구입했다.

책의 구성은 매우 간단했다. 이제까지 도착한 엽서들을 모은 것인데, 그림이 반이요, 글자는 한두 줄이었다. 하지만 난 그처럼 한 장, 한 장에 담긴 무게감에 넘기기 어려운 책을 본 적이 없었고, 여러 밤에 걸쳐 눈물을 흘리며 읽어야 했다.

“아들이 내가 게이란 걸 알게 될 게 두려워요. 그리곤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까 봐”…. 어떤 사연에는 깊이 공감을 하며 위로받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 상당수의 사연에는 공감할 수 없음에 감사했다.

서평에도 말해놓았듯이 꼭꼭 묻어둔 비밀을 어딘가에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쓰는 사람에게는 치유를, 읽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는 것이다.

카이스트 대학생 자살 문제가 끊이지 않던 올해 초, 나는 ‘포스트시크릿’을 한국에서 직접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자살 방지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신건강협회로부터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먼저 프로젝트 원작자인 프랭크 워렌씨께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허락을 받았고, 마음이 맞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올해 7월 9일, ‘포스트시크릿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작은 사서함과 블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우선 대학가에 우표를 붙인 엽서 2,000장을 배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포스트시크릿 코리아’에는 2백여 통의 사연들이 도착했다.

“난 공무원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지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큰딸이고 싶어요. 그래서 그와의 사랑도 자꾸 망설여요. 부끄럽게 생각하실까 봐…” “초라한 내 모습.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요. 모두들 외모만 따져요. 나도 예쁘다는 말 듣고 싶어요” “나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아 너무 두려워요”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엄마를 때리는 게 미워서” “도와주세요, 자신이 없어요” “내가 자살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어서 기뻐요”…. 사연들을 읽으며 같이 울고, 때로 같이 웃는다.

익명의 사람들이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 위안해주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3년 전 심장병을 앓던 우리 아가가 천사가 되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가가 우리에게 준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이를 잃은 엄마의 사연을 홈페이지(www.postsecret-korea.blogspot.com)에 올렸고, 얼마 후 자식을 잃은 또 다른 어머니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약이 아니라 이 엽서의 내용 하나가 저를 그렇게 위안해주네요.”

그때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였으니까.

사람들이 내게 비밀을 적어 보내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엽서를 통해 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시각을 넓히게 됐다. 낯선 이에게 이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비밀을 고백해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몬드리안 작. <선의 구성: 흰색과 검은색의 구성> 유화. 108.4×108.4cm.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국립미술관

 

어머니와 자취방

신호진 29세. 대학생. 서울시 광진구 자양4동

나는 지방 출신 서울 유학생이다. 처음엔 학교 근처의 친척 집에서 신세를 지던 나는 친척 집이 이사를 가게 되는 덕분에 결국 자취를 허락받게 되었다. 얼마나 신났는지 바로 돈을 타와 집을 계약하고, 어머니께서 사주신 부엌살림과 이불과 전기장판 등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아들 사는 곳을 한번 봐야겠다며 상경을 하셨고, 꼬박 이틀 동안 아들의 첫 자취방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셨다.

내가 생각하기엔 참 깨끗하게 잘 정리해놓은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는 “사내놈이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 놓고 사는 게 없어 보인다”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두 번째, 세 번째 자취방으로 이사할 때마다 상경해 며칠씩 청소를 해주셨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내 나이 27살 때였다. 나는 의류학과라는 전공을 살려 옷을 디자인해서 파는 사업을 친구들과 해보기로 했다. 처음 다녔던 학교가 안 맞아, 다시 재수를 하는 바람에 거의 삼수나 마찬가지로 학교에 들어간 나는 남들에 비해 늦었다는 조바심도 있었고, 더 늦기 전에 뭔가 자리를 잡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집에선 모르게 사업을 하겠다며 휴학을 했고 자취방 보증금 1,000만 원도 쓰고 말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다짐을 했었다. ‘반드시 돈을 벌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면 그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다짐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친구 4명이 함께 시작한 동업은 점차 힘들어지자 두 명이 포기했고, 나와 다른 친구는, 또 집에는 비밀리에 한 학기 등록금을 받아 사업 자금으로 쏟아부었지만 결국 폐업을 하고 만 것이다.

그때의 좌절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 모르게 돈만 까먹고,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힘든 마음을 몇 달간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내 마음을 돌아보니 정말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한방에 큰돈을 벌어보자, 하는 조급함뿐이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된 지금 일을 배울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 학교 공부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며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사업을 접었을 때는 집에는 막 사업을 시작했다고 알린 후라, 폐업 소식은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런 반전의 말씀을 하셨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지난 학기까지 학교 안 다녔지? 별것도 아닌데 왜 말 안 했어.”

이럴 수가! 어머니께서는 내가 사업과 함께 비밀로 부쳤던 휴학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도 아들을 믿는 마음에, 아무 소리도 안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자취방에 대해서만은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방만 각자 있고 거실과 주방은 다른 친구들과 공용으로 쓰는 하우스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나만의 자취방에서 지내는 걸로 아신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때쯤부터 어머니의 일이 바빠지면서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셔서인데, 철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작은 방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청소해주셨던 나의 자취방들이 떠오른다. 혼이 나더라도 어머니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벌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이것도 인생 수업이다’ 생각하고 어머니께 번듯한 집을 보여드릴 수 있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하려고 한다.

“어머니!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앞가림 잘하는 아들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다음 자취방 구하면 올라오셔서 꼭 다시 청소해 주세요!”

 

몬드리안 작. <구성 제VI> 캔버스에 유채. 95.2×67.6cm. 1914년. 바젤, 바이엘러 컬렉션

 

외톨이는 아량이 없었다

이계승 50세. 작가.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어릴 때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B라는 친구가 생겼고 완전 죽이 맞아서 다녔다. 둘 다 책과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집에는 맘대로 크게 들을 수 있는 전축과 레코드판이 잔뜩 있었다. 둘의 집은 1.5km쯤 떨어져 있었는데, 놀러 가면 저녁밥까지 얻어먹고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놀았다.

B는 늘 형 자랑을 했다. 머리가 엄청 좋아서 공부 따위는 열심히 안 했는데도 서울공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 특유의 괴짜스러움도 갖고 있어서 그의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야구장에서 응원하면서 박수를 어찌나 세게 쳤던지 시계가 고장 나 버렸고 그걸 고친답시고 뜯었다 조립했는데 초침과 시침이 바뀌어서 1초에 한 시간이 가버렸다는 에피소드는 몇 번을 다시 들어도 배꼽을 잡곤 했다.

그런 형님을 만나 장래의 진로 같은 것도 묻고 싶었지만 형은 워낙 바쁘게 사는 인생이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외톨이 중학생이었고 2학년이 되기까지 B와 더욱 밀접하게 붙어 다녔다. 학년이 바뀌어 서로 다른 반이 되자 약간 소원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주말마다 도서관을 같이 다니거나 시험공부를 같이 하고 수영장에도 놀러 가고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교우 관계가 여전히 단출했던 나와 달리 B는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고등학생이 되자 B에겐 여자 친구도 생겼다. 그런데 녀석은 그녀의 청순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만 할 뿐, 명색이 가장 가까운 친구인 나에게조차 소개를 해주지 않았다. 무척 서운하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고3이 되면서 우린 한 달에 두어 번 만날 정도로 바쁜 인생이 되었다. 우리보다 4배쯤 인생이 바쁜 서울대 형님은 결국 얼굴 한 번 안 보여주고 군대를 가버렸고 녀석은 여자 친구와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헤어지기로 했다고 근황을 말해주었다.

B는 수학을 잘했다. 그래서 가끔 그의 도움을 받곤 했는데 어느 날 어려운 함수 문제를 가지고 그의 집에 갔다. 있겠거니 하고 연락도 없이 갔지만 마침 그날따라 녀석은 귀가가 늦었다. 기다리는 동안 B의 어머니께 형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뜨악한 얼굴로 “형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라며 되묻는 것이었다.

“서울공대 다니다 군대 간 형님 말이에요.” “얘가 무슨 소리를? 우리 B는 형이 없어. 걔가 우리 집 장남이라구.”

그 말을 들으면서도 어머니가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사조차 없이 황급히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 후 심하게 앓았다. 학교에도 안 가고 며칠 끙끙 앓아누웠는데 B가 찾아왔다.

나는 누워서 아는 체도 않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B도 한동안 아무 말 않고 앉아 있더니 조심스럽게 가공의 형에 대한 고백을 했다.

“미안해, 형 얘기…. 너한테만 그런 게 아냐. 다른 애들한테도 그랬는데… 처음엔 그냥 재미로 그랬어. 근데 너한테는 정말 미안했다….”

독백처럼, 방백처럼 B는 더듬더듬 고백을 해나갔다. 열등감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여자 친구 얘기도 틀림없이 너의 소설일 뿐이었지?’라고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한마디 대꾸도 않는 것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B는 할 수 없이 방문을 나서며 휴~ 하고 한마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어떤 미안함이나 회한보다는 마음의 짐 덩어리를 내려놓았다는 안도의 한숨으로 느껴졌고, 비밀이란 발설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더욱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훨씬 몇 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고하는 B에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토닥이는 아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몬드리안 작.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캔버스에 유채. 127×127cm. 1942/43년. 뉴욕, 근대미술관

이제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섯 가지 비밀 이야기.

 

그 겨울, 대학 입학 원서비 유용 사건

유연철 33세. 직장인.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1998년. 혹독하게 힘들었고 너무나도 길었던 고등학교 3년이 끝난 후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또래에게는 수능을 보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동안의 억압된 청춘의 로망, 이성 교제를 하는 것이 유행이자 희망이었다.

나 역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수능 점수 발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저녁, 친구에게서 소개팅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게 됐다!

동네 근처-떡볶이 집, 빵집은 말도 안 되고ㅋㅋ-호프집에서 당당히 만났다. 2:2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는 평범했지만 맘에 들었고 계속 만나는 관계로 급속도로 진행이 되었다. 그동안 못 해본 연애의 한풀이를 하듯 매일 만나 놀러 다녔다.

하지만 돈이 어디 있었겠는가! 당시는 IMF까지 터진 마당이라 집안에도 돈줄이라고는 말라붙은 상황이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궁색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아르바이트 월급날은 아직 멀었고. 그런 나를 강하게 유혹한 건 대학 입학 원서 비용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 원서를 낸다며 돈을 받아, 한 건 한 건 유용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가정통신문을 위조하던 실력으로 원서 접수증을 훌륭하게 만들어 집에 보여드린 것이 7~8건. 금액으로 보면 50만 원 정도 되는 큰 액수였다. 그 돈으로 데이트를 할 때 밥값을 내고, 마음껏 놀러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을 참 힘들게 보낸 나는, 노력해도 될 것 같지 않은 세상 앞에 ‘될 대로 되라지’였다. 대학은 가서 뭐하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런 허무주의로 가득 찬 나였기에 그런 거짓말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시 모집하는 대학들이 마감될 때쯤, 그래도 안전장치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의 모 전문대학에 입시 원서를 넣었다. 장학금이나 받아서 다니다, 나중에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이었다. 슬슬 원서 접수했다고 거짓말한 대학들의 합격자 발표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겐 일부는 떨어졌고 일부는 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거짓말을 했다. 점점 들키면 어떡하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 괴로운 건 떨어졌다고 하면 너무나 순진하게 믿으며 안타까워하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하나씩 합격되어갈 때쯤 유일하게 넣었던 원서, 모 전문대의 발표 날이 다가왔다. 충격! 100점이나 하향 지원을 했는데, 전체 장학생은커녕 과 장학생도 못 되었다.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하향 지원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회가 몰려왔다. 어려운 형편에도 그 비싼 원서 비용을 마련해준 부모님과 누나에게 죄송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소개팅녀와는 100일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그 달콤한 유혹의 대가는 내 마음의 빚과 비밀로 남게 되었다. 대학 생활도 재미있을 리 없었다. 여전히 나는 세상을 향해 냉소적이었다.

그러다 대학 1학년 가을, 어머니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더욱 후회가 몰려왔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 이제 제대로 살아보자.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비밀 같은 건 만들지 말고 살자.

어느덧 10년이 훨씬 지났다. 한동안은 말할 용기가 안 나서 못 했고 시간이 지난 후엔 잊혀져간 사건이 되어버려서 못 하고, 지금까지 비밀로 묻혀 있던 그 일.

아버지, 누나! 죄송해요. 철없는 막내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용서를 비네요. 어쩌면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도 들었어요. 늘 묵묵히 봐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몬드리안 작. <큰 빨강 색면과 노랑, 검정, 회색, 파랑의 구성> 캔버스에 유채. 59.5×59.5cm. 1921년. 헤이그시립미술관

 

제가 먹어도 살찌지 않는 이유, 그 비밀을 밝힙니다

유윤서 26세. 직장인.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나는 키 169cm에 몸무게 50~51kg의 늘씬 날씬한 26살 처자이다. 나에게는 가족에게도 말 못 하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4.4kg의 우량아로 소위 ‘떡대’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못 먹는 것 없이 잘 먹고 일주일에 3번 이상은 고기를 먹을 정도로 육식을 사랑하는 대식가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키 161cm에 50kg이 넘는 장신(?)이 되더니, 고등학교 때는 키 169cm에 몸무게 74kg의 거구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 농구부 오빠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안 보던 거울을 보며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유행하는 다이어트는 다 해보며 끊임없는 살과의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먹던 습관과 생활 패턴을 바꾼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힘들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운동까지 잘하던 그 오빠는, 나 같은 외모의 아이가 접근하기에는 너무 높아 보였다. 그렇게 고백도 못 한 채 졸업하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외모 콤플렉스가 깊이 자리 잡았다. 육지로 나와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인생의 숙제와도 같은 다이어트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굶는 것부터 줄넘기, 달리기, 테니스, 스쿼시, 수영, 킥복싱…. 운동이란 운동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좌절, 실패, 좌절, 실패…를 반복하던 중 점차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요가 자격증을 따서 강사 생활까지 하다 보니, 몸매는 균형이 잡혀갔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늘씬한 외모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그것으로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나만의 비밀을 고백하고 싶다.

항상 내 안에는 다시 살이 찌면 어떡하지, 예전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이 깊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안함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자유롭게 먹는 것 같아도, 먹은 만큼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있다. 누가 조금이라도 살이 찐 것 같다고 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아무도 몰래 당장 운동을 한다.

2년 전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와서도, 나는 가족들 몰래 운동을 하고 있다. 하루에 많게는 네 시간, 적게는 두 시간씩, 가족들이 일어나지 않은 새벽과 가족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시간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나의 이런 피나는 노력을 모르는 지인들은 “체질이 변했네” “먹는 만큼 살이 안 쪄서 부럽네” 등등 나를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복 받은 사람으로 분류하여 버렸다.

하지만 나는 먹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다. 그럴수록 나에게 아침 운동과 밤 운동은 쉴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을 오픈하고 싶지만 열심히 운동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매일매일 아무도 모르게 나 자신과 싸움을 한다.

“운동을 그렇게 했는데 그것밖에 안 빠졌어?” “운동을 하는데도 살이 찌네” 라는 소리를 듣는 게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 가벼워지고 싶어, 용기를 내어 <마음수련>에 처음으로 고백을 해본다. 이 글이 실린다면,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정말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졸리면 자고, 운동하기 싫을 때는 좀 안 하기도 하고, 살에 대해서 그냥 편하게 말하면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다른 것들에도 집중하며 살고 싶다.

 

몬드리안 작. <백합> 종이에 수채. 25×19.5cm. 헤이그시립미술관

 

다시는 비밀 같은 거 만들 일 없기를

팔천사 50세. ‘팔천사’ 블로그(blog.naver.com/a508004) 운영

지난 6월의 일이다. 운전 중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의 딸이 주유소에 일하고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어라,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어야 하는데 왜 저 아이가 주유소에 있지? 이제 고등학교 2, 3학년 정도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란다.

주변에 수소문해 보니, 그 직원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 매일 술이나 마시고 폐인이 되었다 한다. 참 성실했던 친구인데 자기 사업하면서, 부도도 맞고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겨우 집 전화를 알아내 부인과 통화를 했다.

부인에게 큰딸아이는 학교에 잘 다니냐고 안부처럼 물었다. 부인은 은정이가 가출한 지 5개월이나 되었다며 울었다. 아빠는 매일 술이나 마시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학교생활도 할 수 없어서 자퇴를 하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가슴이 시려왔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은정이 밑으로 둘이나 더 있는 아이들과 겨우 생활하는 듯했다.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함께 주유소로 가서 은정이를 만나게 했다. 얼싸안고 우는 모녀를 보니, 나 역시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은정이가 동생과 아빠의 안부를 묻는다.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서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도 들어가겠다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저렇게 맑고 착한 아이가 있다니,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하지만 아직 부모의 그늘에서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은정이를 한 시간 동안 설득해서 타협을 봤다. 일단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은정이는 근처에 있는 이모네 집으로 가, 이모 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원에도 다니기로 약속을 했다. 내 덕분에 아이를 찾았다고 감사해하는 부인에게 은정이 아빠는 기술이 있어, 마음만 잡는다면 살아갈 능력이 되니까 둘이서 다시 좋은 아빠로 만들어 보자고 했다.

우리 셋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나는 은정 아빠와 통화를 했다. “일 좀 해볼래?” 하니 바로 대답을 한다. “안 그래도 형님 한번 만나서 의논 좀 할라고 했습니다.” “내가 자네 소문은 들었어. 일단 일주일 동안 금주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지방 건축 현장에 기사로 보내줄게.”

나의 약속에 은정 아빠는 지금 너무 힘들게 살고 있다면서 꼭 금주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다. 큰아이가 자기 때문에 가출까지 했다며 울었다. 그것이 더 괴로워서 계속 술로 살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잡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이도 함께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일주일 후에 만나기로 했다. 부디 일주일만이라도 버텨주기를 바라며.

일주일 후, 그는 정말 술을 먹지 않고 나타났다. 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모로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지방에 일자리를 마련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다행히 그는 술을 뚝 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은정이와 은정이 엄마와의 비밀을 털어놓았고, 지금은 은정이와 가족 모두가 그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오순도순 예전처럼 살고 있다.

“형님 고맙습니다.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나에게 그 친구가 나직이 속삭인다. 괜시리 눈물이 핑 돌며 돌아서는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은정아, 은정이 어머니, 다시는 우리끼리 비밀 같은 거 만들 일 없게 행복하게 사세요.’

 

몬드리안 작. <그리드 5의 구성: 색채 마름모 구성> 캔버스에 유채. 대각선 84.5cm. 1919년.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국립박물관

몬드리안 작. <그리드 3의 구성: 마름모 구성> 캔버스에 유채. 대각선 121cm. 1918년. 헤이그시립미술관

그림 출처_ <피트 몬드리안>(수잔네 다이허 | 마로니에북스)

<몬드리안(재원 아트북 24)>(재원아트북 편집부 | 재원)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5)

어떤 사람이 동굴 속에 들어앉아 버렸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완전한 마음의 고요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이었습니다. 동굴 앞에서 한 어린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는 그 소년이 내는 소리를 견딜 수 없습니다.

동굴 속에서 혼자 사는 동안 정신이 너무 약해져

작은 소음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그의 평화는 무참히 깨집니다.

 

온몸으로 노동하고, 노래하고 춤도 추고,

실패하고 혹은 성공하고, 이런저런 사람들 속에 놓아져도,

흐트러짐 없는 마음의 평화.

그것이 결국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일 것입니다.

올 한 해 좀 좋았으면 어떻고 좀 안 좋았으면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그 길 위에 있으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한순간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충분히 뜻깊은 한 해’를 보냈습니다.

 

 

빼기가 나를 바꾼다

공부가 재미있어지기까지,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

 

나는 학창 시절 공부 욕심이 아주 많았다. 성적이 오르면 부모님의 사랑도, 친구들의 관심도, 나의 열등감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강박증에 이르며, 시험 기간이면 책상 한쪽에 참고서를 높이 쌓아놓고 도서관에 하루 종일 앉아 공부를 했다.

그런데 투자하는 시간만큼 성적이 안 오르는 것이 문제였다. 같은 페이지를 하루 종일 반복해서 보다가 금방 조바심이 나서 이 책 저 책을 10분마다 돌려 보기도 했다.

1시간 중 50분은 시험에 대한 걱정으로 보냈기에, 정작 문제를 풀 때는 공부한 것이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매 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까지 시험의 연속인 고등학교 생활, 뇌혈관이 터져나갈 것만 같아 머리를 부여잡고 드러누워 버린 적도 있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학교에 못 다니겠구나 싶었다.

그때 엄마가 권해주신 것이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다. 수련하며 어릴 적 기억 중 엄마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엄마와 단둘이 산책을 하다가 무심코 시험 등수를 이야기 했는데 그 순간 싸늘하게 돌아서던 엄마의 뒷모습.

‘공부를 못하면 엄마의 모든 관심과 사랑이 다 없어지겠구나.’ 충격이었다.

이어서 떠오른 기억은 아빠에 관한 것이었다. 중학교 방학 때마다 아빠에게 영어 과외를 받았는데 영어에 딱히 재능이 없던 나는 매일 혼이 났고 매일 전쟁이었다. 그때부터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여 나중에는 한 공간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아빠가 미워졌다.

결국 그런 모든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공부와 등수에 집착하게 했던 거였다.

이 마음들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나만의 세계 속에 갇혀 평생 불행하게 살겠구나, 심지어 몸이 없어지고도 그 마음만큼은 똑같겠구나, 생각하니 끔찍했다. 나는 나의 그런 마음세계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열심히 마음을 버리자 열등감과 공허한 마음이 없어졌다.

차츰 부모님에게 예전의 이야기들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는 싸늘하게 돌아섰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 또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했던 아빠도 그저 자식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으셨다는 것, 나를 항상 배려해 주셨고 의외로 다정다감하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2학기. 나의 공부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다. ‘쟤보다 잘해야 되는데’ 하는 걱정들도, 비교하는 마음도,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시간을 허비했던 것도 없어졌다. 수업 시간에도 요점이 쏙쏙 들어왔다. 그 후로는 줄곧 반에서 일등을 한 것 같다. 점점 공부하는 게 편안하고 재밌어졌다.

만약 그때 마음수련을 안 했더라면 공부도 가족 관계도 엉망진창인 학창 시절을 보냈으리라.

나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배우기에 앞서 마음을 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후배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한창 예민했던 청소년기에 이런 기회를 주셨던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허유정 24세. 간호사. 부산시 북구 화명동

빼기의 건강법

내 나이 칠십, 마음 버리니

병에서 자유로워져

 

마음수련은 여동생이 하면서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부터 여동생은 마음수련을 권했지만 나는 마음을 닦기보다는 그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믿고 살았다. 사랑 앞에는 당할 자가 없으니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봉사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행복한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부지런히,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스트레스가 많았다. 유교적 가풍을 고스란히 교육받고 자란 나는 말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다. 화도 원망도 가슴에 접어두고 겉으로는 “네”라는 대답뿐이었다.

그게 수십 년간 쌓이며 몸으로 전해진 것인지 60대에 접어들자 몸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이 이름 모를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삼 년간 약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근근이 앉아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지만 설상가상으로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몸 굳는 병을 치료하느라 갑상선 정기 검진을 소홀히 했는데 그새 암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몸에 암 딱지까지 붙이고 나니 내 인생이 왜 이런가 낙심이 컸다.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나서야 나는 마음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음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든데, 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도 삼십 만 명이나 이 수련을 했다고 하니 꼴찌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 결심했다. 다른 사람 두 배의 시간을 수련하고 나니 그때부터 진짜 나를 볼 수 있었고 진심 어린 참회가 되었다.

‘1 더하기 1은 2’라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온 철저하고 빈틈없는 인생. 잘 살아왔고, 마음 닦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완벽하다는 자부심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너무나 미안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늦은 귀가와 잦은 술자리도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 마음속에 못마땅함이 가득해 남편을 집 밖으로 내치고 있었으니 남편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져 쉴 곳이 없었겠구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큰절을 했다.

“마음수련 안 했으면 당신 원망만 하며 평생을 살았을 텐데 그 마음 다 버리고,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니 너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몸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 꾸준히 등산을 병행하여 지금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갑상선 암 수술한 지는 이제 7년이 지났고 수술을 했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몸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부른다는데, 지금 이 마음으로만 살면 앞으로 영원히 병은 오지 않겠다는 확신이 든다.

요즘은 남편과도 너무나 재미나게 지내고 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래 걱정 몸 걱정 안 하고, 인생의 참맛을 즐기며 살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

조청자 69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마음수련 우명 선생의 특별대담

2002년 9월, 우 명 선생은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의

찰스 메르시에카 박사를 만난 바 있다. 미국 뉴욕의 UN본부를 방문하여 당시 한승수 UN총회의장을 만나

세계 평화의 실현 방안에 대해 논의한 뒤의 일정이었다.

 

메르시에카 박사는 우 명 선생을 만난 뒤 마음수련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계 평화의 대안이라 확신했고, 당시 인간 본성 회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우 명 선생에게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여하고, ‘세계 평화 대사’로 위촉했다.

 

그리고 2011년 가을, 9년 만에 다시 만남을 가졌다.

2시간 동안 진행된 대화는 인간 완성과 세계 평화가 실현 가능한 것임이 확인된 의미 있는 자리였으며,

‘지구촌에는 여전히 전쟁과 차별, 굶주림이 존재하지만, 이제 마음수련이라는 해법이 있으니

평화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메르시에카 박사는 기뻐했다.

 

인류 내면의 성찰과 영원한 행복에 대해 나눈 두 거장의 대담을 특집으로 싣는다.

대  담  우 명 선생 마음수련 창시자, 저술가, 시인

찰스 메르시에카 박사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 회장, 정치학, 철학 박사  

일  시 2011년 10월 11일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

정  리 최창희 발행인

메르시에카 박사: 연락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정말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우명 선생: 우리가 처음 만났던 9년 전보다 마음수련은 엄청나게 성장했지요.

이미 전 세계에 3백여 개의 수련원이 있고, 3년 안에 1천 개의 수련원이 문을 열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어떻게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나요?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우명 선생: 마음수련은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우주에서 다시 나면 영원한 우주마음으로 살게 되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그러면 이 세상이 진정으로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이 일에 열정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마음수련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우명 선생: 이제 더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가속도(momentum)가 붙겠지요. 마음수련의 이런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우명 선생: 진리를 깨친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이 완성이 되어서지요.

마음수련은 인간 완성을 이루는

Total Education입니다.

마음수련 방법은 인간완성을 이루는 Total Education

 

메르시에카 박사: 처음 여기 오셨을 때 그걸 알 수가 있었습니다. 다른 이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명 선생: 9년 전 그때 메르시에카 박사가 나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맞습니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못 보던 것을 보게 하시고 되게 하시니 그게 카리스마지요.

일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내시는지요?

우명 선생: 그래요. 한국은 워낙 잘되고 있기 때문에 잘 안되는 지역을 방문하고 있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국에서 이미 이루신 그 업적이 유산이 되어

잘되고 있다 생각됩니다. 이미 그 정도의 업적을 이루신 분이 솔선수범하여

직접 현장을 다니시는 것이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걱정해주는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우명 선생: 나를 알리는 것이 무슨 뜻과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진리 만드는 일이 중요하지 명성을 알리지는 않아요.

메르시에카 박사: 개인의 명성을 추구하셨다면 이룰 수 없었겠지요.

안 그러셔서 이루신 것입니다. 개인의 명성을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묵묵히 뒤에서

받쳐주는 분이 더 성공하는데 우 명 선생님이 그러신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내 나라, 네 나라 없이 되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래야만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지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는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온 세계가 나의 나라라고 했을 때”라고요.

우명 선생: 맞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지금까지는 그런 세상이 왜 오지 않았을까요?

우명 선생: 완전한 존재가 세상에 안 왔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본성을 회복했을 때 그런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이 세상 모든 교육 제도가 우 명 선생님의 마음수련 철학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우명 선생: 학교 공부가 먹고사는 공부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했어요.

메르시에카 박사: 맞습니다. 특히 미국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육 제도에 마음수련이 필수 과목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우명 선생: 인간마음이 우주마음이 되고 거기서 모두 나면 하나가 되어 내 나라, 네 나라가 없지요.

세계 각 곳에서 연설을 할 때도 완전한 대안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안 태어났어도

우주는 있었고, 당신이 마음세계를 다 없애서 거기서 다시 나면 우주마음이 되고 완전해질 수 있다’,

마음수련은 방법이 있어 가능합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동안은 방법이 없었는데, 이젠 방법이 있어 빠르게 성취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지금까지는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렇습니다.

우명 선생: 지금은 이 방법이 되니까 센세이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그 방법대로 되어지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깨쳐서 그런 것이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아주 인상적입니다.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실 것입니다.

우명 선생: 세계는 지금도 종교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지 않고 갈라져서 그런 것이지요.

우명 선생: 허상인 자기 마음속에 가진 허상의 예수도 허상의 마호메트도 없애 우주마음이 되면

하나가 됩니다. 마음수련은 오직 빼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더하기만 해왔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예, 맞습니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우명 선생: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비워진 마음(empty mind)이 됩니다.

마음의 실체를 알고 빼기하는 것이 세계 평화의 대안

 

메르시에카 박사: 선생님의 저서는 책 제목도 아주 좋아요. ‘살아서 하늘 사람 되는 방법’은

100% 진실입니다. 그동안 마더 테레사도 이 말을 진실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는데 이젠 눈이 뜨이는 것 같아요.

우명 선생: 이런 종류의 책이 열 권 나왔지요. 9개 국어로 번역 중인데,

이것이 이상 문학(idealistic literature)이에요.

메르시에카 박사: 이 책을 읽으면 제게 아주 큰 유익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명 선생: 인간이 자기의 마음세계를 벗어나 고통 짐을 벗고 완성이 되는 방법이 있으니 그러하지요.

메르시에카 박사: 사람이 고통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이게 기적이고 내면의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지요.

우명 선생: 마음수련이야말로 인간을 완성시키는 전인교육입니다.

이걸 하면 하나가 되고 완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메르시에카 박사: 맞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벗어나 진리가 될 때 세상이 참으로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수련은 세계 평화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 대안입니다. 저희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는 우 명 선생님과 마음수련을 적극 지지합니다. 진리와 평화에 관한 말씀,

앞으로도 자주 듣고 싶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림 우명

우 명 선생과 마음수련은…

우 명(禹明) 선생은 1996년 마음수련을 창시하여 마음과 진리에 대한 일깨움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2002년 9월,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IAEWP;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하고 세계 평화 대사로 위촉되었다. 저서로는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 영역본 등 다수가 있다. 2011년 11월 현재 전 세계 312여 개 지역에서 마음수련 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행복한 삶으로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찰스 메르시에카 (Dr. Charles Mercieca) 박사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는…

찰스 메르시에카 박사는 전 미국 알라바마주 A&M대학 정치학 및 철학 교수이며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의 회장이다. 1967년 여러 중남미 대학교에서 북미와 남미의 단합을 논의한 후, 세계 모든 대륙을 돌며 국가 간 이해와 교육을 통한 국제 평화에 대한 교육자들의 관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강연 투어에 착수했고, 1969년 알라바마 헌츠빌에서 열린 세계교육자회의를 계기로 이듬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IAEWP)가 창립되었다.

IAEWP는 비영리단체로서 세계 시민 교육을 통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3년 UN 경제사회이사회와 유엔공보국(UNDPI)의 비정부민간기구가 되었으며 1990년에는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와 공식적으로 연계되었다. IAEWP는 유엔 자문 자격을 가지고 80개 이상의 국가에 설립되어 있으며 평화에 대한 중요한 공헌을 인정받아 1987년 유엔 평화 메신저로 지정되었다.
 
대담 안에는 계속되는 세계의 종교 전쟁, 서로 하나되지 않고 서로를 사이비다 이단이라 규정하며 갈라져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있다. 자기 것만 맞다며 주장하는 것 못지 않게 온갖 분야에서 진짜와 비슷한 사이비들이 판을 치며 혼란을 야기하는 일들이 많다. 대담에 이어 지금 시대에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수련 우명 선생의 사이비에 대한 글들을 소개해본다.

-From Possessing to Throwing Away, From Regrets to No Regrets

By YongHee Park (57)

Housewife, Psychological Counselor/Therapist

From the time I was young I had to be the best. In my twenties, I worked extremely hard on my appearance in order to look beautiful because I felt I had to stand out more than anyone. My ability had to be the best, and I had to have a lot of money. I lived in a good family, so I didn’t have to envy others; but I was not even satisfied with this because I felt I had to be outstanding in comparison with others.

I married at the age of 25 and we left for Holland, the first assignment for my husband. Of course, my marriage had to be the best. Since I was perfect, I wanted my husband and children to be perfect also. Because my children must be the best, I spent my life during my thirties being an extremely frantic mother. In my forties, I tried hard to have my own career. Psychological counselor/therapist, Yoga instructor… Just as I aimed for, the reputation and money came along.

I believed if I had the reputation and money I had dreamed for, I would be happy. However, the sense of success was so temporary, only for that moment; I was not happy. All around me, there were always people much greater than me.

My husband, who didn’t seem to have any worries, also had strong desires for success and money. That mind had left him with a feeling of being inadequate, so he naturally felt small in front of people who had more than he had. In order to fill the emptiness of inadequacy we had to make what was around us the best. Even when our children did everything well, if they made one mistake we scolded them over that.

Every single moment, I had to become better and higher, and I felt lacking with what we already had. In this mind, happiness never existed.

I was always in the pursuit of happiness from outside of myself, so it was the natural consequence. When I went abroad, I would experience my tightly held sentiments crumbling apart. I also had many experiences wherin I naturally came to respect the subtle and mystic qualities of nature. When I would look up to the sky, tears tumbled down for no reason. I used to cry a lot, deep in the quiet forests.

Why did I come to this world and live like this? Who I am, where did I come from and where do I go? Why I had always been comparing, greedy, envious and jealous to people better than me… I felt too exhausted, I thought that even though I am born again tens of billions of times again I would live just like this, holding those minds.

It was the end of 2003. It hadn’t been that long since I had come back from Belgium after my husband’s work was completed there. My friend gave me a book [World Beyond World] as a present. What would be the ‘world beyond world’? I read it all night long, and read it again and again. I might have read it 10 times. Then, I decided to try Maum Meditation. I cried a lot while meditating.

Although my husband had done everything for me, I had ignored him and the people around me. With my strong pride, which meant I never wanted to lose to anyone, I tried to do everything for my own sake. Actually, I myself was inferiority itself. I had been trying so hard to hide it.

As I started to let everything go, I changed little by little. I was the perfectionist, who had to logically quibble over whether every little detail was right or wrong. But I gradually mellowed.

My husband started the meditation too. After a week of Maum Meditation, my husband said with comfortable face, “nothing bothers me because I let everything go from my mind. After I subtracted everything, I truly had regrets about my life that I have lost by pursuing false things.

As my husband and I threw out the mind, we came to know what is living truly without regrets and what is living truly happily. With inferiority, superiority and desires to become the best, you cannot help but live with regrets every moment; because this is the life that is only for me and the futile dream which soon disappears.

The life truly without regrets is one of being without any pieces of ‘me’. You only have to become the mind of sky, which always stays the same, even over foreign lands. Has the sky ever blamed or envied anyone? Or, has it ever made discernments whether something is right or wrong, or this or that? When you live with nature’s mind, hoping for others to be happy and helping them from your heart, with no worries or possessions, then no regrets will be left behind.

When I counseled others before, I did it with superiority. I pretended to be friendly, but deep in my mind I wanted to reign over them with a sense of superiority that even I didn’t recognize. However, after I threw out myself and emptied out the mind, I could just become one with them by being truly peaceful and calm. Before I started Maum Meditation I believed people requested the counseling mostly because they were, for various reasons, unfortunate or unhappy. However, I now know that their mind was so full that no more breakthroughs were possible because of their desires to possess more; so I help them to realize this. They were actually who I was in the past.

As I looked back at my life, I realized that I had made up so many trivial must-not-dos; not having suppers, not taking off socks anywhere, not squeezing toothpaste in just any way…

From those little matters to big matters, I lived building up my own boundaries perfectly. My husband says that when he sees people that are like how he was in the past, he feels sorry for them. The biggest regret that anyone can have is when they come to know that they have wasted their precious life time on chasing what is false. Nobody would repent if they have lived pursuing what’s true and genuine, treating and loving others with no expectations. Some of you might say everyone knows this and anyone can talk about it. We used to think the same as you.

However, we now truly know that by emptying out the mind you can live true life, becoming one with the sky, living every day with no regrets. That’s why I am truly happy today, and every day.

-Solution to Live without Regrets, The Answer Is in Your Mind

 

Joo Hyung Kang (30) Physics Research Professor, Korea University

As soon as I graduated from the science high school and entered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AIST), my life became unfocussed and aimless. Up until entering the university, I was used to doing what had been scheduled in a fixed timetable. So university life was something I was not familiar with at all. Although I liked being free, over time I gradually lost my interest in studying. I started to be pessimistic about why I must fiercely compete when man eventually dies anyway. I couldn’t be bothered to do anything. I became lost in my life more and more, and I seldom attended classes because I slept in and played games. But at the same time, I was nervous and anxious about my grades, especially during the exam periods. After every semester was over I had reproached myself severely as to why I had spent my time like that.

I tried to make up my mind to do better, consoling myself that ‘if I try hard starting from tomorrow, I can do better than anyone else’; but once a new semester started, my life just remained unchanged. Only the regrets had been accumulated, and gradually I lost my confidence. I eventually abandoned myself to despair as I came to think that ‘studying is not for me’. I just wasted the whole three years. My father recommended Maum Meditation to me at the end of my third year, when it became difficult for me to graduate because my grades had gradually dropped. I was also strongly determined to ‘disconnect from this loop of vicious cycles’. It was too obvious that I would continue to live just like this unless my mind’s attitude changed.

I took a semester off and concentrated on meditating. After I discarded the mind, the original self within me was naturally revealed. I was happy, like I was obtaining the whole world, as the unsolvable philosophical questions I had were also solved one by one. My roaming naturally came to an end; probably because I had found the answer to the fundamental question.

After the meditation, I returned to school and what I first felt was that ‘it was truly easy to live in the world!’ It is definitely the truth that if you just try your best at where you are, the exact best outcome occurs. I was also full of confidence that I could now put this into practice and physically take action. I eventually batted away my endlessly-lazy body and mind through Maum Meditation, and I felt like I was flying.

In order to recover from my low grades, I had to take as much as 28 units of credit every semester, but I was never exhausted. I actually felt the joy of studying that I hadn’t had for so long. I could even work part-time as I regained my composure. Fortunately, I got a much higher GPA than I used to get when I took only 12 units of credit, and I enrolled in the master’s course at KAIST, which I could never have thought of doing before.

 

There have been huge changes in my daily life as well. Every time I was given something to do, I put my brain working on finding any excuse for not doing it, and eventually I was sorry for doing that. However, I now found myself being able to do such tasks by taking action right away. Now, ‘a nuisance’ became something that was totally irrelevant to me. Thanks to Maum Meditation, I have completed the Ph.D. course in 3 years, instead of the normal 4~5 years.

Next month, I am going on a fellowship to Stanford University, in America, as a post-doctorate researcher. If it was the “me” from before the meditation doing this, anxiety and nervousness about whether I could do it well would have overwhelmed me. However, I don’t have any of those feelings now. Rather, I am full of excitement and expectation about a new environment, because I am confident that I can enjoy my life anywhere in the world with no regrets!

– What Is Truth And Falseness? – Let’s Go, Let’s Go

What Is Truth And Falseness?

It is the living and the dead;

It is the existing and non-existing;

It is Truth if it exists in the world,

And if it does not, it is false.

One is eternally alive and exists,

And the other does not, because it does not exist.

The former exists because it is in the world,

And the latter does not because it is not in the world.

What exists in the world exists,

And what does not exist in the world, does not.

People’s countless stories are non-existent

Because they do not exist in the world;

What is against the ways of the world does not exist.

A person born in the complete world has achieved everything;

In order to live and not die,

One’s soul and spirit must be reborn

As the Soul and Spirit of the Universe.

Let’s Go, Let’s Go

 

Leave behind your regrets and everything of human life,

And let’s go to the eternal and invincible land of God.

Discard, and discard again, all the many things you had in the human world,

Those things that have become greed in your mind,

And be reborn in the world where you do not exist,

In the world where there is only Truth.

Only when you are born as a new person

With a new mind and body, Are you an eternally living immortal.

Then, there is nothing of the human world?

Ageing, sickness, birth, life, Joy, sorrow, anger and happiness,

The seven emotions and five desires, These do not exist there.

And though you live, you are not within life.

There, none of the many human conceptions? This is this, that is that? exist.

God’s mind is one that has departed from all knowing;

It is the mind of non-existence.

That which is non-existent, exists,

But it is said to be non-existent because its mind is complete.

Heaven, which we have only heard of, is the land

Where those who become the consciousness of the great universe

Have gone, and it is where they dwell.

Drawings and writings of Woo Myung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in 2002.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on discovering Truth including ‘Wisdom for Life’ (1996), ‘The Natural Flow of the Universe’ (1998), ‘True Mind’ (1998),’The Enlightened World’ (1998), ‘World Beyond World’ (2003), ‘Forever Living World’ (2004), ‘The Formula from Heaven that will Save the World'(2005),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2006), ‘The Place where One Becomes Real is the Real Place(2008) and ‘Stop Living on this Land. Go to the Everlasting World of Happiness. Live There Forever(2011).

-本物と?物とは -行こう、行こう


本物と?物とは

生きているものであり、死んでいるものであり

在るものであり、無いものである

この世に在るのなら本物であり

この世に無いのなら?物である

永遠に生きているから在り、存在していないから無い

この世に在るから在り

この世に無いから無い

この世に在るものは在り

この世に無いものは無い

幾多の話は

この世に無いものだから無く

この世の道理に外れているものは無いものである

すべてを成し遂げた者は完全なる世界に生まれた者であり

成し遂げられずにいる者は完全なる世界に生まれられずにいる者だ

自らの?魂が宇宙の?魂として復活してこそ

死ぬことなく生きられることだろう

行こう、行こう

 

人間の生の中にあった未練やあらゆるものを手放して

永生不滅の神の?へ行こう

自分の心の執着になっている

人間の世界で手にした幾多のものを捨てて捨てて

自分がいない、?理のみがある世界で生まれ?わり

新しい人?新しい心と?に生まれ?わって生きてこそ永生不死の神となれる

人間の世界にあるものが何一つ無く

生老病死、喜怒哀?、七情五欲が無いのだ

存在していても存在の中におらず

生きていても生の中におらず

人間の?念である幾多の「あれだ、これだ」が無い

神の心は知ることから完全に離れた心だ

神の心は無い心だ

「無い」というのは、あるが、その心が完全だから、無いということである

話の中にしかなかった天?は、その心が

大宇宙の精神になった者が行っている?である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この世界に生きずに、永遠なる幸福の?へ行って生きよう」「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동네 노는 아저씨의 친절한 고민 상담소

저는 평범한 대학생 남자입니다. 그런데 요즘 키 때문에 심각합니다.
169 정도 되는데, 오락 프로에서도 키 작은 게 자꾸 놀림거리가 되고,
실제로 키가 큰 애들이 인기도 많고, 취업도 잘되는 것 같아요.
키높이 깔창이라도 신어야 하나 고민입니다.
키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키 크다고 능력이 더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자꾸 큰 친구들 틈에 있으면 주눅이 듭니다.

최00 / 26세. 제주도 거주

흔히 키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면 나폴레옹을 예로 들곤 합니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느냐….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지금 죽은 지가 20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까지 키 얘기입니다.
무덤에서도 썩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고민남님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작은 키로 인한 사회적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또 하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 위축되곤 한다는 것.

첫 번째 사회적 불이익은 제가 인생 선배로서 단언컨대 절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호주에 사는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먹고 삽니다. 조금 작은 코알라가 나뭇잎에 손이 안 닿아서 굶어 죽었다는 해외 토픽 들어 보셨어요? 까치발을 들었거나 남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먹지 않았을까요? 코알라한테 없는 게 우리한테는 있죠. 고민남님이 언급하신 바로 키높이 깔창! 깔 거 깔고 신을 거 신으세요. 충분히 보완됩니다. 그리고 운동하세요. 균형 잡힌 몸매는 한결 커 보입니다.

두 번째 고민, 남들의 시선. 앞으로 서로 부딪치며 살아갈 사람들이 많아 보이시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세요. 내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아마 다섯 손가락 꼽기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TV 등에서 루저 타령을 하고 주위에 키 큰 친구들이 맴돌아도 이 사람들은 절대 님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즉 님의 삶에 어떤 영향도 어떤 자극도 되지 않은 사람과 말들입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손가락을 꼽을 때 새끼손가락부터 꼽아보세요. 마지막 엄지는 남겨 놓으세요. 그 엄지가 당신, 인생에서 최고는 당신입니다. 자신감 있는 당신이 가장 커 보입니다.


동네 노는 아저씨 백일성. 올해 나이 41세,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초딩 남매 그리고 1930년대생 부모님과 함께 한집에서 박 터지게 살고 있음. 3년 전 우연히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박 터지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됨. 2년 전에는 <나야나 가족 만만세>라는 수필집도 발간했음. 좌우명이라고 할 거는 없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 “지랄도 많이 하면 는다~”를 한 가지 일에 꾸준히 하라는 말로 새기고 살아오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