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아빠’ ‘아버지’… 가슴 깊이 불러봅니다.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우리 시대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김충근 51세. 농부.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박수근 작 <소와 유동>

Oil on Canvas. 116.8×72.3cm. 1962.

아버지! 그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아버지는 어린 저를 무릎에 앉혀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도 매로 다스리는 엄마와 달리 그저 마음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말과 소를 끌고 다니며 운송업을 하셨던 아버지.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때, 말은 병에 걸려 죽고, 소는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집안은 삶의 터전을 잃었지요. 그렇게 집안이 힘들 때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삼 일 내내 당신의 주검 앞에 울부짖던 철모르는 아이를,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때론 원망도 했지만 아버지가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너무나 컸습니다.

고2 때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비행 청소년처럼 방황했고, 그땐 누구도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습니다. 단지 아버지만이 나에게 위로였습니다.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부모와 어머니도 미웠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나는 진정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가세가 힘들어졌을 때, 저를 가슴에 꼭 안고 흘려주었던 아버지의 눈물이 아니었던들 저는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부모와 입양해서 잘 키우고자 했던 어머니의 또 다른 사랑을 모르고 세상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어리석게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하던 저를 아버지가 살려주신 겁니다. 그 후 열심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힘을 냈습니다.

지금 제겐 다섯 아이가 있습니다. 세 아이는 배로 낳았지만 셋째 현지와 막둥이 승민이는 가슴으로 낳았습니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선지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 유독 마음 아파하던 아내의 제안으로 입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보고 대단하다 합니다. 하지만 우린 부끄럽습니다. 그 아이들로부터 받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차이가 있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다섯 아이 중 어떤 아이라도 없으면 못 견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다음에 커서 친부모를 찾지 않겠느냐? 걱정스레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그들의 뿌리를 찾아줄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들도 소중하니까요.

나는 농사꾼입니다. 유기농을 꿈꾸며 귀농했지만 딱히 내놓을 만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 농사만큼은 잘하고 싶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신의 사랑을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삶이 힘들어져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아버지’ 하면서 나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힘들 때 언제나 위로가 되어주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도 들려드리지 못했었네요. 사랑합니다….”

아빠의 흰머리가 말을 걸었습니다

강현민 25세. 대학생. 경북 김천시 지좌동

박수근 작 <길>

Oil on Hardboard. 31×18cm. 1964.

저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무서워하면서도 따랐고 따르면서도 무서워했습니다. 그렇게 아빠는 제게 친구 같기도 하면서 먼 사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칭찬도 잘 안 해주고, 잔소리만 늘어놓고 감정 표현에 서투셨습니다.

컴퓨터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항상 듣는 소리는 부정적인 말이었습니다. 고맙다, 잘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아빠만이 옳은 양 저를 이해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빠가 싫었고, 차츰차츰 대화를 안 하게 되더니, 꼭 필요할 때도 얼굴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된 것을 봤습니다. 머리카락을 보고 나니, 얼굴을 보게 되고, 몸 전체를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너무나 늙으신 아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저렇게 늙으셨는지….

마치 아빠의 흰머리가 저에게 말을 거는 듯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아빠와 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뭐 때문에 아빠를 봐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고 진짜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었나. 그 무렵 마음수련을 하고 있던 저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에 대해 쌓아놓은 부정적인 마음들이 어느새 벽으로 쌓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빠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수련을 시작한 이후 지금은 아빠에 대한 부정적 마음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나간 만큼 아빠를 대할 때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태도와 행동 또한 많이 바뀌며 그냥 아빠가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08년 입대를 앞둘 무렵 가정불화가 폭발하여 아빠가 정말로 힘들어할 때가 있었습니다. 회사, 술, 회사, 술…. 그때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답답했고, 싫었습니다.

“아빠 잘못이잖아” “엄마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하며 아빠에게 상처가 되는 말만 해댔습니다. 설령 아무리 아빠가 잘못했다 한들,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그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아빠, 그때는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동안 부정적으로 쌓아놓은 제 마음 때문에 진실로 아빠를 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가짜마음들에 속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아빠와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빠,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좀 내주세요. 제가 십 년은 젊어 보이게 염색해 드릴게요.”

철없던 막내딸의 고백

최윤아 32세. 직장인.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 어느덧 막내딸이 32살이나 되었네요. 하필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는 나이 사십에 막내딸을 낳으셨어요. 새벽 5시면 엄마랑 같이 꽃 배달을 다니시며 대가족을 먹여 살리시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셨던 아버지! 벌써 칠십이 넘으셨네요.

아들만 둘이 있던 집안에 뒤늦게 막내딸을 얻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쏟아주셨죠. 엄마 말로는 어릴 때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어주셨다지요. 돌아보면 자라면서 갖고 싶다는 것, 하고 싶다는 걸, 안 해주신 적이 없었어요. 형편도 어려웠을 때 어떻게 그것들을 다 마련해주셨을까요.

휴일도 없이 일하셨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안 하셨어요. 정말 아프실 때 빼고는, 하루도 늦잠을 주무신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셔서 다시 재기하신 아버지를 뵈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 철이 없었죠. 아빠를 보며 늘 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선뜻 제 주장도 하지 못하고 꾹꾹 참는 일도 많았지요. 그리고 지나치게 사랑받다 보니, 제 내면에서는 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졌잖아요. 성인이 되어,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때였어요. 갑자기 저에게 우울증 증세가 찾아온 거예요.

난 잘해야 한다, 내 뜻보단 부모님에게 맞춰드려야 한다, 거기에 왠지 모를 열등감, 중압감, 압박감들…. 그렇게 제 안에 차곡차곡 눌러놓고 살았던 것들이 터져버린 거예요. 항상 보호만 받고 살았기에, 의지력도 약하고 독립적으로 크지 못했던 저는 이 모든 상황에서도 아빠를 원망했으니, 얼마나 철모르는 딸인가요.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저는 부랴부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듣고 부모님께서 찾아오셨죠. 하지만 저는 부모님을 볼 자신이 없었어요. 6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오신 부모님께, 저는 그냥 가라고만 했죠. 혹여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나가시긴 했지만 병실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엄마 아빠….

몇 년이 지나고, 다행히 지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사이 마음수련을 하게 되어, 오랜 세월 쌓아왔던 마음을 버린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 그때는 아버지도 참 당황스러우셨지요? 힘들어하는 딸을 보면서 또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요…. 그때만 해도 저는 아버지 마음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못난 딸내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아버지. 제가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언제나 변함없고 언제나 똑같았던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 32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께 마음으로 전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철없는 막내딸 지금까지 예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박수근 작 <강변> 종이에 크레파스, 과슈. 11.5×29cm. 1950년대.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7)

임진(壬辰)년 용띠 해입니다.

청룡도 아니고 백룡도 아니고, 60년 만에 찾아온 흑룡(黑龍)의 해라 하니,

올해는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용은 열두 띠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예로부터

하늘의 선행과 풍요를 상징하며,

구름과 비를 만들고 물과 바다를 다스리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숨길 수도 있다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동물이기에 왕의 상징물로 쓰였습니다.

때문에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 임금이 앉는 자리는 용상(龍床), 옷은 용포(龍袍),

임금이 타는 수레는 용거(龍車)라 했으며 임금이 흘리는 눈물은 용루(龍淚)라 불렀지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용은 본래 큰 못이나 깊은 물에 살지 개천이나 흙탕물에는 살지 않으며,

여의주와 물, 비, 바람, 구름을 만나고

뿔이 나야만 승천할 수 있으므로,

빈천한 환경에서도 걸출한 인물이 난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또한 ‘등용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용은 신분 상승의 상징이기도 하며,

예전보다 훌륭한 모습으로 변했을 때 ‘용 됐다’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되어보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관념과 내 관습이 바뀔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내 속에 갇힌 작은 의식일랑 깨부수고,

내 몸에 묶인 안 좋은 습관일랑 깨버리고,

더 크고 더 귀하고 더 자유로운 ‘나’와 만나시기 바랍니다.

모두 모두 ‘용’ 되시기 바랍니다.

 

 

빼기가 대안이다

공격성은 감소되고 자신감은 길러지고

<마음수련 명상 프로그램이 중고등학생의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영향> 2011. 2. 24.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중에서.

최근 잇달아 일어난 중학생의 학교 폭력과 그로 인한 자살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현 시대 청소년의 공격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폭력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있는지 드러내며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성 회복과 전인교육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학생들에게 정서적 불안감, 열등감 및 자아존중감 상실을 가져다준다. 특히 자아존중감과 공격성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자아존중감이 낮은 학생의 경우 적의성, 분노감 같은 공격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며 이를 폭력적인 언어와 행위로 나타낸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된 바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공격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그동안 쌓아놓은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은 곧 자아존중감 향상과 연결된다.

실제로 지난 2010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참여해 20여 일간 중고생 한 조와 일과를 함께하며 관찰한 결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14~18살 10명이 마음 빼기를 통해 부정적인 마음과 폭력성 등을 버리면서 이삼 일 만에 소통이 잘되고 공격성은 감소되며 자아존중감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중 공격적 성향이 강했던 중학생 2명의 변화 사례를 소개한다.

9살 때 부모가 이혼한 윤○○군 이야기

윤○○군이 9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부모와 사이가 안 좋고 말수도 적은 윤군은 중국 유학 중 장기 결석으로 학교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친구와 다투어 책걸상을 부수는 등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말투에 늘 화와 신경질이 있고 평소에도 ‘XX, 왜 쳐다봐’ 등의 말이 자주 나왔다.

캠프 초반,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있어, 학생들에게 “우리 방도 노래할 생각이 있니?” 하니 윤군은 “싫어요, 선생님부터 그 마음 버리세요” 한다.

캠프 중반, 화와 짜증을 많이 버렸다는 윤군이 선생님이 청소를 하려고 하자 ‘제가 할게요’ 하며 자진해서 청소를 하는 등 중반부터는 친구들, 선생님들과의 대화가 편안해지고 웃는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캠프 후반, 장기자랑 시간에 노래를 부르기로 자청했다. 긍정적 자신감이 길러진 것이다.

윤○○ 군이 직접 작성한 마음수련 이야기

버려진 마음 3가지 안면 홍조, 피부, 감정

캠프 후 좋아진 것 3가지 인간관계, 명확한 목표 정하기, 인간 본분

캠프 참가 소감 마음수련이라는 것을 인생을 걸고 한다면 크게 성공하고 어린 나이에 한다면 인간 본분,

그리고 전체적으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마음수련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면 세상의 범죄와 경찰 등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말레이시아 유학 중 생활 부적응으로 힘들었던 이○○군 이야기

말레이시아에 갔다가 생활 부적응으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던 이군은 무엇을 하자 해도 ‘아니요’ 등 반대로만 얘기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캠프 초기에는 수련에 집중이 잘 안되고 가정에 대한 불평불만과 ‘XX놈’ 등의 욕설이 여러 번 나왔으며 무서운 영화와 사건을 많이 이야기했다. 캠프 중반, 수련에 조금씩 집중하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부모님과 친구, 동생에게 한 행동에 대해 반성을 많이 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버렸다고 했다.

이○○ 군이 직접 작성한 마음수련 이야기

버려진 마음 3가지 시험 못 본 것, 수련하기 싫었던 것, 소극적인 마음

캠프 후 좋아진 것 3가지 마음이 편해짐, 친구들을 많이 사귐, 감사함을 알게 됨

캠프 참가 소감 캠프에 와서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캠프 오기 전엔 저는 엄마와 다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마음을 버리면서 나는 항상 다른 사람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했었고 뭐든지 비아냥거리면서 어른들을 무시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마음을 버리다 보니까 제가 그동안 너무 막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캠프를 마치고 가면 부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해야겠다고.

이석기 57세. 부산시교육청 학교정책과 사무관

 

 

빼기가 나를 바꾼다

가슴 한가득 튤립 안고

친구들에게 전한 내 마음

“미안해, 고마워

 

내 나이 13살! 여름 방학을 시작했을 때 나는 서울로 상경했다. 경기도에 있는 할머니 댁에 잠시 짐을 풀고 당시 이름도 들어본 적 없었던 예술중학교 입시를 치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강남에 있는 미술 학원으로 통학했다.

시골에서는 선생님들의 기대를 받으며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탔던 나는, 서울에 보내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기에, 또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매일 지하철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꾸벅꾸벅 졸며 화실에 다녔다.

서울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낯설게 다가왔다.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화려했다. 성격도 활발했고 씀씀이도 컸다. 내 한 달 용돈에 가까운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척척 사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점점 열등감이 커졌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도, 소풍이나 여행을 갈 때도 친구들 앞에서는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활달한 척했다. 하지만 무심결에 하는 친구들의 말이 내게는 상처로 다가왔고 아이들과 한번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웠다. 대신 나는 필사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에 관한 한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전날에도 제일 마지막까지 화실에 남아 그림을 그렸고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다.

장학금까지 받으며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내 안의 문드러진 마음은 곪아갔다.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쏟기 일쑤였고 나오지도 않은 성적을 두고 지하철역에서, 화장실에서 엄마와 전화를 하며 한없이 울었다. 제대로 등교도 하지 못했고 학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결국 나는 그해 겨울, 학교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어느 날 교사인 아버지께서 마음수련을 권하셨다. 사람들 모두가 하나 되는 공부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돌아보니 친구들에게 모질게 대했던 행동들이 후회가 되고 미안했다. 처음엔 남과 벽을 두는 내 마음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열등감, 비교하는 마음들이 버려지면서 편안해지고 활기가 생겼다. 웃음이 많아지고 나이가 많건 적건 모두와 웃고 떠들고 인사하며 포옹도 할 수 있었다.

‘더 나아진 내가 되어야지’ 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나’마저도 털어 버렸다.

서울로 다시 돌아와 나는 검정고시를 본 뒤, 친구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곤 예술고등학교 졸업식 날, 가슴 한가득 튤립을 사서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나누어 주었다.

내 열등감으로 인해 고생했었을 친구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의 전달이었고 화해였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고 요즘은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 상대를 시비하는 마음을 버리면 버릴수록 상대를 편하게 대할 수 있다. 나를 괴롭혀왔던 마음들을 버리고 이제 누구든 포용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고 즐겁다.^^

고아라 24세. 충남 홍성군 홍성읍

-이 세상의 쓸 말 -구원이란 무엇인가, 허가 참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말이 많은 세상이라

수많은 말이 있어도 쓸 말은 하나도 없는 것이라

쓸 말이란 참의 말이고 사람을 살리고

쓸 말이란 산 말이어야 쓸 말이라

산 말이란 생명이 있어야 하고

산 말이란 생명의 말이라

결론적으로 쓸 말이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이 쓸 말이라

쓸 말이란 산 자의 말이고 산 말이고

쓸 말이란 진리의 말이고

쓸 말이란 생명의 말이라

기독교에서는 재림 예수님이 하늘에서 천사들과 함께 나팔을 불면서 하늘구름을 타고 구세주가

오신다고 했고, 불교에서는 미륵이 사바세계 중생세계에 와서 중생을 구원해 준다고 했고, 증산 선생은

대두목이 온다고 했고, 소태산 선생도 미륵이 온다고 했다.

서로가 말의 표현은 달라도 똑같은 예언이다.

이것은 빈 허공이, 이 세상의 본래의 주인이 사람으로 온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란 천지 만물만상을 지은 주인이고 참인 진리의 존재다.

이 존재인, 이 우주의 근원인 정과 신의 존재가 세상에 와야

이 정과 신의 존재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천지 만물만상이 나오기 이전의 자리이고 천지 만물만상이 이곳으로부터 나왔기에 이 존재가

창조주이신 살아 있는 진리고 참의 존재다.

이때까지 수많은 이가 노력하였지만 사람이 노력하여 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참이 아니기에 참을

모르고 참이 되는 방법이 없어서이다.

사람이 자기가 이루었다면 이루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깨친 자와 성인이 많이 있었는 줄 아나 깨친 성인이 있었다면 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미완성이기에 종교와, 다른 어디에서 완성이 되기 위하여 찾고 또 구하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란, 각 종교에서 부르는 존재는 참이기에 그 존재처럼 허인 인간이 참이 되는 것이다.

글, 그림 우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My mom’s love is like a beneficent virus

by Wha Ik Cho Seoul

The hide and seek game between my mother and I started when I was in the fifth grade and continued until my freshman year of high school. Out of the blue she would register me at private academies for extracurricular English and math classes, not even considering how distasteful academics were to me. I did not attend even one of them for more than a month before I would slip out like a slimy eel. My mother would pressure me, burden me and have huge expectations towards me about things she wanted to accomplish; and when it came to my academic studies she was especially strict and fearsome.

Even if I got to see my busy mother only once a day her greeting to me would be “How are your studies going?” or “Did you go to the academy today?” I started disliking my mother more and more, finally getting to the point where I would get angry just by looking at her.

Then one day, when I was a sophomore in high school, my mother suddenly decided to stay at the Maum Meditation Main Center in Nonsan for a week. Yes! I felt liberated; felt that I could breathe now. I was really grateful that she had left.

After a while my mother returned from Nonsan and we noticed a subtle change in her. But I was doubtful; in fact everyone in the family was skeptical. There was no way she could have changed so much so quickly. But a day later, and then a month later, we realized that she had really changed. We were astonished that she was not angry all the time. On top of that I began to feel a genuine understanding of me through her words and looks. For example, in the past she was only concerned about whether or not I had attended class, or she would only ask how my studies were progressing. But now she would only ask questions that showed genuine concern for me; like “Are you feeling ok? Can I get you something to eat?”

The way my mother began joking around with my father was also surprising. My father would make jokes just as he always did, but because he had a vulgar sense of humor his jokes would, in the past, offend my mother. However, now she would just accept what he said and laugh with him leaving the entire family speechless. Before she did Maum Meditation their relationship had not been bad, but it was not a close, friendly one. But thanks to my mother’s abundance of positivity and warmth, and always being readily able to say “I’m sorry,” or take the initiative and say “I’ll do it, don’t worry,” in any situation, our home had suddenly turned into a harmonious place to be.

I began to wonder what this Maum Meditation was that could make such a positive change in my mother. I began to have a small expectation, a hope and desire that even I might be able to break free from the shadow of my present self.

I had always been very unfocused and indecisive, and never had the backbone to stick with things to the end, not even when I learned something new. When people would ask me about my skills or achievements I would say that I was good at a lot of things, like licking a watermelon rind. I was never confident enough in what I had done to consider myself accomplished at anything.

But I was sick and tired just talking about how I wanted to change, when in fact I would not follow through with anything and so I never made any progress. After seeing the change in my mother I decided to begin doing Maum Meditation. I knew that this was something I wanted to do completely.

As I meditated I came to realize how meaningless it is to live blaming the world and blaming others. During this time of introspection I came to see the real value in this meditation. At that time in my life I was drowning in the pain of failing an exam for a degree. But Maum Meditation gave me a way to overcome myself. Because of the meditation my concentration level had improved substantially and it was my great fortune to pass the exam for my degree.

Nowadays I brag about my mother to my friends. To me she is a friend that I will always cherish. Even now she tells me “If there is anything you want to do in life I will stand behind you and support you; and I know you will never regret anything you do.” My mother’s love and embraces are like a beneficent virus that spreads illumination and goodness throughout, not just in my family, but it shines on everyone, everywhere.

 

-Heaven, which is Truth

Heaven, which is Truth, is freedom, liberation, and endless peace, because in heaven there is no self. The various things from human life? good and bad, interesting and boring, judgment and discrimination, right and wrong, hot and cold, suffering and happiness- do not exist there. Aging, sickness, birth and death do not exist there; it is just freedom and liberation. There, one’s mind is the mind of the emptiness itself, and one just lives. His mind is the mind of Truth itself – the eternal and never-changing heaven. His self of the past is a picture and a very illusion. In heaven, everything from human life is gone, and there is nothing but Truth. In heaven, one has as much happiness and joy as the blessings he has amassed. It is paradise. This land of existence is the real land? the world of reality. The land that has been resurrected as Truth has no death, and one lives as an eternal immortal. A person born in this worldis true; he is Truth; he is existence; he does not die; he lives forever. The world is complete but the human mind does not exist, because in the world of his mind, man takes pictures of the world like the footage of a video.

The mind of Truth- of God and the origin- is the true nature that is metaphysical; it is existence; time and space do not exist in it; and it exists of and by itself. It exists everywhere and within all things; it existed from the beginning and before the beginning, and it is the immortal that will exist for an eternity after. It is the Creator- this existence itself is the great Soul and Spirit; it is the source of the infinite Universe, the origin itself; it is the mother and father of all creation. When this existence comes to the world as a person, man and everything in heaven and earth can be saved, which is the reason it is called the Savior and Maitreya. Having been born in the world, the only thing that man really needs to do is to truly live- he needs to become this existence of Truth. Only when everything has died can all creations be resurrected as Truth and live, for only then can they be reborn. The land of Truth is the land that is alive, which man cannot see or know because he does not have the mind of Truth. Human completion means to become Truth, and when man becomes Truth, he can live eternally. Truth is the place we must get to; it is the place where we must be reborn; the place where we must live.

Casting everything off means one departs from all human matters- money, love, fame, family and your illusionary self- for only then can you go to the land of Truth and be reborn as Truth. Truth itself must come to the world in order for man to become Truth and complete. Man’s mind only contains the minds of pictures taken of the world; it does not have any Truth within it. Therefore the existence of Truth must come as a person of the world, and give new birth to man and all creations of heaven and earth. This is heaven and it is salvation. Only Truth can take us to the land of Truth

and give us new birth as Truth.

Heaven is the place that exists after the complete death of your false self. While you are living you must be reborn; reborn with the body and mind of Truth and completion and live in the complete land. Only those who have gone to this land while they are alive can live in heaven. It is illogical to believethat you can go to heaven after death if you are not real and true now. What is false does not exist – it will die, it will completely disappear, because it is an illusion. Heaven is a place where only those that are true and real live; it is a place of completion, far from human matters. A place of freedom and liberation because it is endlessly peaceful; a place where there is no time and space or any delusions; a place where one’s mind is always at rest and there is only endless peace.

Drawings and writings of Woo Myung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in 2002.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including World Beyond World an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which have been published in English. His other books, Where You Become True Is The Place Of Truth, Heaven’s Formula For Saving The World, The Living Eternal World, The Book Of Wisdom, Mind, Universal Order and The Enlightened World are in the process of being translated into English as well as Chinese, French, German, Italian, Japanese, Portuguese, Spanish and Swedish.

동네 노는 아저씨의 친절한 고민 상담소

30대 초반의 직장인 남성입니다.
연말연시엔 회사에서 행사를 참 많이 하는데요, 저는 끼가 없어서 노래도 못 부르고
춤도 못 추고, 우스갯소리도 못하고, 장기 자랑하라 해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잘하는 동료들이나 후배들을 보면, 부럽고 괜히 위축이 됩니다.
뭔가 장기 하나는 계발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성격상 쉽지가 않네요.
무슨 행사나 엠티, 모임이 있을 때면 항상 하게 되는 고민입니다.

제가 사회 초년생일 땐 개인기 시키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노래를 할 때 저는 성대모사를 했는데, 그것에 다들 관심을 보였습니다. “진군하라~” 이 한마디에 회식 자리는 조용해졌고 저는 을지문덕 성대모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틈을 주지 않고 비명을 연달아 다섯 번 정도 질렀습니다. 3천 궁녀 낙화암 성대모사를 한 겁니다. 부장님이 조용히 술 한잔 드시더니 “너 3천 궁녀 끝까지 해보라”는 말에 몇 번 더 소리 지르다, 다시는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끼라는 것은 타고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차지합니다. 고민남님의 나이로 봐서 30평생을 남 앞에 나서지 않았던 끼가 지금 와서 남들이 부럽고 왠지 위축된다는 이유로 어떤 거라도 배워서 남들 앞에 서고 싶으시다는 건데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찾아오는 행사나 모임에서 기죽어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고민남님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치입니다. 바닥에서 시작하니 밑져야 본전이고 좀만 잘하면 대박입니다. 두 번째 고민남님이 가지고 있는 열정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신다는 자체와 고치려고 노력까지 하셨다는 자세가 이미 가슴 한구석에 열정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그 자그마한 열정에 불씨를 지필 수 있는 부싯돌은 딱 한 가지 열심히 하는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달인 코너의 개그맨 김병만씨를 보면 외줄 타기를 하고 방송 내내 철봉에 매달립니다. 관객은 그의 재능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걸 하기까지의 인내심과 노력을 알기에 환한 미소를 보내는 겁니다. 저도 그날 3천 궁녀를 열심히 끝까지 한번 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ㅎㅎ

동네 노는 아저씨 백일성. 올해 나이 41세,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초딩 남매 그리고 1930년대생 부모님과 함께 한집에서 박 터지게 살고 있음. 3년 전 우연히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박 터지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됨. 2년 전에는 <나야나 가족 만만세>라는 수필집도 발간했음. 좌우명이라고 할 거는 없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 “지랄도 많이 하면 는다~”를 한 가지 일에 꾸준히 하라는 말로 새기고 살아오고 있음.

안과 의사 김동해씨, 24개국 가난한 안과 질환자들에게 빛을!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아직도 크고 작은 총격전이 끊이지 않는 파키스탄의 라호르. 불안한 사회 분위기만큼이나 의료 시설도 열악한 이곳에서 병원에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생명에 큰 지장이 없는 안과 질환의 경우에는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길이지요. 한국이라면 단 한 번의 수술로 완치될 수 있는 백내장 질환도 가난 때문에 방치됐다가 실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곳 사람들에게도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일년에 두 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로 개안수술을 해주는 캠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캠프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한국인 안과 의사 비전케어서비스의 김동해(48) 대표입니다.

대학 졸업 후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에서 3년간 보건의로 생활하면서 ‘남을 위하는 일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김대표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며 무료 수술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2001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9?11테러 그리고 계속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회의 충돌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던 종교 단체들이 서로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과연 나는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방법을 찾다가 파키스탄에 안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대표는 곧바로 현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수술 장비와 약품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의사와 간호사, 봉사자들과 함께 파키스탄에서 처음으로 무료 개안수술 캠프를 열게 됩니다.

이후로 수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때마다 지역을 하나씩 늘려나갔고, 어느새 24개국에서 무료 수술 캠프를 진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꾸준히, 상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다 보니 저절로 길은 넓어지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김동해 대표. 그가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한 번 간 곳은 매년 방문하는, 책임지는 원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한쪽 눈씩,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수술을 해주고 나머지 한쪽 눈은 6개월 후를 기약합니다.

각 나라를 생각하면 선하게 떠오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2012년 새해에도 그의 해외 일정은 빼곡히 채워졌습니다. 캠프에 다녀올 때마다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는 김대표는 ‘해외 봉사 덕분에 다양한 수술 경험에다 실력까지 늘었으니 봉사 활동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20분 남짓한 짧은 수술만으로 십 년간 잊었던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할머니,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게 된 아버지,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아이들….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자 이 일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말은 안 통해도 표정만 봐도 느껴지죠. 아, 이 사람이 보이는구나! 빛을 찾았구나! 환한 웃음, 밝은 표정을 보는 그때가 가장 기분 좋죠.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한 곳에 쓰인다는 거, 그게 가장 큰 기쁨 아니겠습니까?”

비전케어서비스 대표 김동해님은 가톨릭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91년부터 3년간 꽃동네에서 공중보건의로 생활했습니다. 2002년 파키스탄 무료 개안수술 봉사를 시작으로 비영리단체 비전케어서비스를 설립하여 10년간 100여 차례, 24개국 9천여 명의 안과 질환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왔으며 그 외에도 실명 예방운동, 병원 건립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www.vcs2020.org

-‘감사’가 행복이다

요즘 KBS-2TV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중 ‘감사합니다’라는 코너가 인기입니다. “세상에는 감사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이 개그는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지루했는데, 비가 오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능 시험 날, 아는 문제도 틀릴까봐 걱정했는데,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웃음을 주고, 덕분에 아이들 사이에서 ‘감사합니다’ 놀이가 유행이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학자들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뇌가 감사한 이유를 찾아서, 정말로 감사하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가 언어 습관이 되면, 의식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이나 작은 행복에 초점을 맞추어 감사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감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_ 편집자주

‘감사하는 마음’이

심장을 가장

편안히 만들어준다

감사하기 훈련의 과학적 효과는 신경심장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통해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회복탄력성>(김주환/위즈덤하우스)에서는 그 연구 결과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경질적이고 짜증을 많이 내는 사람은 심장이 약해서, 심장의 박동수가 불규칙하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즉 화가 나서 심장박동수가 불규칙하다기보다 불규칙한 심장박동수가 그 사람을 불안하고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심장박동과 감정의 관계에 주목한 학자들은 심장박동수를 가장 이상적으로 유지시켜주는 긍정적 정서가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보통 성인의 심장박동수는 1분에 70번을 기준으로 미세하게 변화한다. 분노나 좌절감 등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에는 매우 불규칙하게 변화하지만, 감사한 마음을 느낄 때 심장박동수는 매우 규칙적으로 변하게 된다. 편안한 휴식, 심지어 수면 상태에 있을 때보다도 감사할 때, 가장 편안한 심장 상태를 유지했다.’

출처_ McCraty & Childre(2004)(<회복탄력성>에서)

매일매일

‘감사할 일’ 찾기가

가져다준,

왕복 200분의 변화

2011년 ‘서울메트로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윤보라(23)씨의 체험담.

‘집에서 학교까지 전철로 100분. 지방대에 다니는 나는 전철이 점점 서울에서 멀어지고 차창 밖으로 드넓은 밭과 논이 나타나면, 그만큼 주류에서 떨어져 있다는 불안함과 자격지심, 열등감으로 무기력해졌다. 왕복 200분의 통학, 그것은 200분의 자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네시며 말씀하셨다.

“꽃다운 청춘이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지하철에서 멍하니 있지만 말고 오늘부터 감사일기를 한번 써봐.”

느닷없이 감사일기라니. 도대체 감사할 만한 게 뭐가 있다는 건지. 처음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아주 사소한 것을 대충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전철에서 운 좋게 앉아 갈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날씨도 정말 좋고, 저녁노을이 정말 예뻤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감사합니다’란 단어를 쓸 때마다 진짜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닌가. 신기한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지고 점점 쓸거리가 많아졌다. 무탈했던 하루, 계절의 아름다움, 내 친구들 등등 나를 둘러싼 소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왕복 200분의 긴 통학, 나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전철 안에서 자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 성적과 교우 관계 등 학교생활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전철의 진동마저 작지만 끊임없이 뛰고 있는 내 심장처럼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나를 응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 – 마하트마 간디

제가 아는 한 사장님은 직원이 실수를 하여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히면 질책을 하는 대신에 ‘이번 일로 무엇을 배워 감사한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합니다. 잘못한 것이야 당연히 본인도 느끼고 있을 테니, 그 실패를 회사의 자산으로 끌어안고자 하는 사장님의 지혜인 것이지요.  – 북코치 권윤구

둥근 지구의 꼭대기에 앉아 더 높은 곳만 쳐다본다. 눈앞의 즐거움은 안 보이고 자꾸 남의 떡만 크게 보인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저기에 가 논다. 내 손에 쥔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은 지가 참 오래되었다. 더 가지고 다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가진 것을 다 잃는다. 기쁨은 먼 데 딴 데 있지 않다. 즐거움은 코앞 발밑에 있다. 그것을 찾아라.  – 다산 정약용 <다산어록청상>(정민|푸르메)에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두려움을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은 빛이 어둠을 뒤덮어 버리듯 두려움을 뒤덮을 수 있다. 둘째, 거만해지지 않도록 막아준다. 감사의 마음은 조용하고 겸손한 인간을 만든다. 삶이 선사한 조그만 선물에도 기뻐하게 만든다.  – <여자는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보도 섀퍼|21세기 북스) 중에서

감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분노와 우울, 그리고 절망의 피해를 덜 받는다. 감사하는 마음은 소유하고 지배하기를 원하는 아상의 딱딱한 껍데기를 점차 녹여주는 약과 같은 구실을 하여, 우리를 관대한 존재로 바꾸어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영혼의 연금술로 우리를 도량이 넓고 고결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한다.  – 샘 킨. 철학자

범칙금과

아이스크림

양경만 46세. 제주도 제주시 연동

어느 날 운전을 하다 신호 위반을 하게 되었다. 경찰차 한 대가 따라붙었고, 경찰관에게 면허증을 보여줬는데, 경찰관이 면허증과 내 얼굴을 수차례 번갈아 보는 게 아닌가.

“혹시 양경만 선생님 아니십니까?” 물었다. “윽! 맞는데요.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제가 어찌 잊습니까. 일단 차를 저쪽으로 움직이십시오.” “혹시 95년도에 OO 경찰서 정문의 의경, 기억 안 나십니까?”

순간 어렴풋이 뇌리를 스쳐가는 얼굴이 있었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친구의 사무실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 근처 경찰서 정문에서 매일같이 보초를 서던 의경이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 늘 벌겋게 상기된 얼굴, 게다가 아스팔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도 부동자세로 가만히 서 있으니 보기에도 정말 힘들어 보였다. 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으면 식당 옆에 있는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곤 했는데, 순간 더운데 고생하는 의경이 생각났다. 처음 아이스크림을 건넸을 땐 한사코 마다했지만,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시민이 사주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고 설득한 끝에야 어렵게 받아주었다. 그 일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경찰관이 바로 그때의 그 의경이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머나먼 타향에서 군 생활을 하던 때 낯모르는 사람에게서 건네받은 아이스크림 한 개에 눈물을 왈칵 쏟아냈던 당시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일은 힘들었던 군 생활에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친형보다도 더 애틋했던 정을 잊을 수 없어 제대를 하고서도 다시 이곳을 찾아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범칙금 딱지 안 끊느냐?”는 말에 그 돈으로 조카들 아이스크림 사주라고 하는 경찰관. 설마 이런 사연으로 경찰관이 직무 유기라고 문제 삼지는 않겠죠?^^

살아 있음에 감사할 때 기분이 최고로 좋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감정은 모든 것에 감사할 때 생겨난다.

–  루이스 스미디스

우리 엄마는 해피바이러스

조화익 29세. 취업준비생.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나와 엄마와의 숨바꼭질은 중1 때부터 고1때까지 계속됐다. 엄마는 공부에 별 뜻이 없는내 의지와 상관없이 영어, 수학 학원에 덜컥 등록하고는 했다. 나는 미꾸라지마냥 빠져나왔고, 어떤 학원도 한 달 이상 다닌 적이 없었다. 엄마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걸 자식에게 기대하고 압박하고 부담을 주셨는데,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 아주 엄격했고 무서웠다.

가게 일로 바쁜 엄마는 하루에 한 번 볼 때도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니?” “학원 갔냐?”가 인사말의 전부였다. 그런 엄마가 점점 싫어졌다. 나중엔 엄마만 봐도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고2 때 엄마는 갑자기 마음수련을 하러 일주일간 논산에 있는 교육원에 가겠다고 했다. 아싸! 숨통이 트이는 듯한 이 해방감, 엄마의 빈자리가 정말 감사했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의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반신반의했다. 에이, 설마~!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엄마는 진짜 변해 있었다. 우선 엄마가 화를 내지 않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나를 이해해주는 엄마의 말들과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전엔 “학원 갔다 왔냐?” 하면서 오직 결과만 묻던 엄마가 “아픈 데는 없니?” “먹고 싶은 것은 없어?” 하면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특히 아빠와 농담하는 게 놀라웠다. 아버지는 평소 유머러스했지만,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유머라 엄마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엄마를 보며 온 가족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전 엄마 아빠의 관계는 뭐랄까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많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미안해요” “제가 할게요” 하는 엄마의 초긍정과 따스함 덕분에 우리 집은 어느새 화목해졌다.

어느 순간 궁금해졌다. ‘마음수련이 도대체 뭐기에 엄마가 저렇게 바뀐 거지?’ 그리고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나도 수련하면 지금의 내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나는 참 우유부단했다. 뭘 하나 배워도 끈기 있게 해나간 적이 없었다. 남들이 잘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수박 겉핥기로 이것저것 한다고 했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 덕분에 마음수련을 하게 되면서, 마음수련만은 꼭 끝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뀌고 싶다고 말만 했을 뿐 늘 제자리였던 내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며 세상 탓, 남 탓하며 사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었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나는 자격증 시험 실패로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수련이야말로 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올해 나는 한결 좋아진 집중력으로 자격증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요즘은 친구들에게 엄마 자랑을 많이 한다. 내겐 엄마는 둘도 없는 친구다. 지금도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후회 없이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하신다. 늘 지켜봐주시는 엄마의 사랑은 우리 가족 모두를 그리고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해피바이러스다.

살아날 확률 8%의 행운, 백혈병 극복한 배종건씨

“만성골수성백혈병입니다.”
2000년 겨울, 배종건(62)씨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떨어졌다. 19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입사,
30년간 한길을 내달려왔던 그는 능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그해 초 지점장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백혈병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순간 인생이 확 돌아가는 느낌과 동시에 헛살았구나 싶었죠.”

설상가상 1년 만에 병은 만성에서 급성으로 급속도로 악화됐다. 백혈병 치료 방법은 골수이식뿐이었지만, 골수가 맞는 사람도 찾지 못했었다. 그 무렵 희소식이 들려왔다. 글리벡이라는 백혈병 신약이 처음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살아날 확률은 불과 8%. 그나마 약을 복용해도 내성이 생기면 소용없었다. ‘언제 죽나’ ‘언제 내성이 생길까’ 늘 불안해하며 지내던 날들….

죽음 앞에서 삶은 단지 물거품이란 사실에 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

백혈병으로 인해 지점장직도 그만두고 은행연수원에서 근무를 하던 때였다. 금융감독원이 주최한 연수 프로그램에서 마음수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버려진다는 말이 와 닿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부터 내려놓고 싶었다. 그는 1주 휴가를 내서 논산에 있는 마음수련 교육원에 들어갔다. 모처럼의 휴가였다. 이렇게 자신과 마주하고 지난 삶을 돌아본 게 언제였던가.

‘세상엔 나쁜 놈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이런 병에 걸리나…’ 하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가여워 울분을 토했던 지난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놈 참 안됐다, 하는 그런 말도 듣기 싫었어요. 다 가식적으로 들렸으니까요.”

처음엔 세상에 대한 분노,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을 탓하는 마음들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서였을까. 수련으로 혼잡한 마음들을 걷어내자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면서 학교 다니기도 힘들었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무수히 다짐했던 시간들. 은행에 취직해 받는 월급 족족 부모님께 드렸다. 사업하는 형제들도 도와주었다. 그건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스스로는 돈 한 푼 없이 지낼 때도 있었지만 그게 도리라 여겼다 한다.

“돈 벌어서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와줘도 못사는 형제들을 보면 답답했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친 형제들과의 관계도 갈수록 서먹해졌다. 돈을 못 받을까 전전긍긍했고, ‘도와줄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다들 나한테만 기대하고 힘들게 하는구나…’ 불만이 커져갔다. 40대 후반이면 퇴직을 준비해야 한다, 그 이후 자식들 결혼과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런저런 생각이 40대 가장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하지만 가족은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했다.

가족, 형제 등에 대한 마음들을 버려나갔다. 돌아보니 그가 가졌던 생각들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내가 집안의 중심이니까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으면 잘 못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각자 열심히 살고 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을 뿐이었다.

도와주었다는 마음은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열심히 사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가족을 무시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주위 형제 가족들에게 참 많이 미안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가족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게 뭔가 돌아봤지요.”

결국 마음을 잘못 먹고 살아온 대가가 병으로 나타난 거였다. 이제 버리면 되었다. 일주일 수련을 마치고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다녀온 그는 동네에 있는 지역 수련원에 다니며 계속 마음수련을 이어갔다.

수련을 하며 무엇보다 병에 대해서 잊고 산다는 게 좋았다. ‘내가 죽으면 가족은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죽으면 끝이라는 두려움과 공포에서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마음은 점차 가벼워졌고, 늘 피로감에 휩싸이던 몸도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온갖 미련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던 자신은 ‘진짜 나’가 아니라는 걸…. 그동안 돈, 명예, 출세를 위해 살았던 삶이 왜 그토록 허망한지도 알 수 있었다 한다.

스스로가 만든 수많은 조건과 인연에 끌려다니느라 ‘진짜 나’로 한 번도 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뭔지도 모른 채 살아왔는데, 병이 저를 돌아보게 한 겁니다. 사람이 아파봐야 세상 이치를 알고 겸손하게 살겠구나 싶을 정도로, 저는 내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산다는 게 직장 다니고 돈 버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2009년 정년퇴직을 한 후 현재까지 건강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는 진실로 나를 돌아볼 수 있었기에 아픈 것조차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욕심과 집착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며 마음 없이 도와줄 수 있게 되어 진정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가볍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한 덕분일까. 약을 복용한 지 11년째이지만 흔히 나타나는 발진이나 근육통 등 부작용도 없고, 내성조차 없는 그를 보고 의사는 ‘기적’이라 했다.

“의사가 그래요. 선생님은 골수이식한 사람보다 경과가 더 좋은, 8%에 들어간 행운아라고. 하지만 전 그 8%의 힘은 바로 마음수련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죽음이란 어마어마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견뎠겠습니까. 이제야 정말 사는 것 같고, 요새는 뭘 해도 행복해요. 다른 분들은 저처럼 아프기 전에 인생의 참 의미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알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