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전통 가구에 칠해지는 천연의 갈색 도료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옻칠의 고정관념을 깨주고,
다채로운 색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 칠예가 전용복(61).
그의 열정은 일본 최대 국보급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내면서 빛을 발하기에 이른다.
23년간 일본에서 활동해오다가 옻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칠예가 전용복씨를 만나보았다.
글 김혜진 사진 홍성훈
옻은 옻나무의 수액을 말한다. 15년 이상 자란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상처 치유를 위해 스스로 나무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100일간 20회에 걸쳐 채취하는 양은 불과 150g.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이라 작가에겐 더없이 귀한, 최고의 순수 자연 도료이며 접착제이다.
150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렸고 세월이 흘러 군데군데 금이 났지만, 1500년 전 고구려 벽화나 700여 년 전의 팔만대장경이 잘 보존된 이유는 무얼까? 답은 바로 옻칠이다. 옻칠은 제대로 잘 발라놓으면 만년이 가는 데다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준다. 그런 옻칠의 매력에 푹 빠져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옻칠의 위대함을 되살리려는 작가가 바로 칠예가 전용복이다. 그가 내딛던 발길은 곧 옻칠의 역사였다.
1991년 일본의 최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복원과 함께 세계적인 칠예 작가로 인정받은 이후, 그는 또 다른 일에 도전한다. 4년간 피나는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옻칠 시계를 선보인 것이다. 4개월 만에 최고가 8억 4천만 원 시계를 포함한 24개 전량이 팔린 기록을 세웠다. 순수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시계, 전자기타, 피아노 등 생활과 밀접한 영역까지 옻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혀갔던 칠예가 전용복. 그랬던 그가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일본 땅이 아닌, 고국에서 우리 고유의 옻칠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기 위해서다.
옻칠이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는 게 신기합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300년 이상 음색이 변하지 않는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이 있는데, 사실 나무는 조금만 습기가 있어도 금방 뒤틀리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 원래의 형태와 음색을 유지할까 궁금해서 조사해서 유추해 보니 옻칠이란 결론이 났어요. 사실 나무로 만든 악기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때 소리가 가장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뒤틀리고, 화학성 도료를 바르면 마치 비닐을 씌운 것처럼 소리의 울림을 막아버리거든요.
그는 독일의 한 제조 회사에 악기를 주문했다. 직접 옻칠을 하기 위해서다. 미세한 음감을 구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일반 화학 도료와 옻칠판의 소리 차이를 비교하는 등 꼬박 3년간 옻칠 악기에 몰입한 끝에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옻칠의 두께를 찾아냈고,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 피아노 등 옻칠 악기를 탄생시켰다. 유럽과 일본에서 실내악 연주로 명성이 높은 세계적인 연주가 ‘노부작 트리오’는 “처음 연주하는 악기에서 어떻게 이렇게 오래된 악기 소리가 나지요? 사람을 매혹시키는 친숙하고 은근한 음색이 돋보였다”며 감탄했다.
이렇게 좋은 옻칠이 그동안 제대로 쓰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옻칠을 다루는 건 힘이 듭니다. 옻은 나무에서 뽑아낸 생물인데, 말리는 방법이 계절마다 또 어느 나라 옻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옻 속에 안료를 개어 넣고 배합할 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요. 막상 만들어도 옻칠의 특별한 건조 방법으로 인해 색상이 변해버리곤 하죠. 그 과정이 어렵다 보니 수십 년 동안 옻칠 이미지가 검은색이나 붉은색 정도로 인식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고 싶은 고정관념 중 하나가 옻칠은 다양한 색상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미 선조들은 벽화나 불당에서 화려한 색을 써왔어요. 정성을 다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제해 바르면 다른 어떤 도장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이 나타납니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자연, 마음, 우주 등 영원한 것을 주제로 하시는데, 옻칠의 특성이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옻칠은 만년의 빛이다’ 란 말을 한 것도 그 뜻이죠. 자기가 만드는 것이 10, 20년 만에 소멸된다면 신중함도 10, 20년 가지만, 내 작품에 내 이름이 적힌 것이 만년 이상 간다고 생각하면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어요. 옻칠 자체가 워낙 영원한 거니까 작품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보고 싶었어요.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고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 평생을 이걸 한 거죠.
그가 정식으로 옻을 접한 건 1980년이라 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목재 회사에 다니던 그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가구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그만둔 뒤, 예린공예사를 차려 가구를 만들어 팔았었다. 그러나 운영이 어려워지자 활로를 모색하던 중 그는 우연히 토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 기법’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치는 가구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찾았던 그에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와태칠을 하면서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후 순수 옻칠 작가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1987년,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 일본인이 ‘오젠’이란 밥상을 수리해 달라며 가져왔던 것. 수리를 의뢰한 곳은 다름 아닌 1931년에 지어진 일본의 최대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이었다. 이후 그는 그곳을 방문하면서 엄청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이 총망라된 그곳은 옻칠 작품 5천 점이 벽과 천장,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결국 메구로가조엔은 이 땅에서 건너간 옻칠로 일본인들이 피워 올린 옻칠 문화의 불꽃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처음 들어서는데 천마도가 있는 거예요. 말의 근육을 전복 껍질의 질감으로 표현했는데 기가 막힙니다.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기법이죠. 일본에 끌려간 장인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삭이며 한 톨 한 톨 자개를 새겨 넣었을 걸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겁니다.”
당시 메구로가조엔은 도시의 하천 확장 문제로 철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직원은 혹시 있을지 모를 복원 사업 계획을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철거보다는 복원 가능성이 클 것이라 예상한 그는 ‘선배 장인들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반드시 살려내리라’ 다짐하기에 이른다.
메구로가조엔 복원이 결정된 뒤, 일본인들을 상대로 설득할 때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벌이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걸 수 있는 건 목숨밖에 없었죠.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어요. 그래서 더 끊임없이 연구, 실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길밖에 없었어요. 이런 엄청난 과정을 통해 터득한 옻칠 기법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고 옻칠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게 된 거죠. 그때 저는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천혜의 기회인데,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요. 아마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는 먼저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완벽한 일본어 구사를 위해 34살에 대학에 입학, 일본에서 노숙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말을 건네며 일본어를 익혔다. 또한, 일본을 무수히 드나들며 메구로가조엔의 모든 작품을 꼼꼼히 조사, 분석하며 연구를 거듭했고, 일본 전국 각지의 옻칠 산지를 순례하며 장인들을 만나 기법을 귀동냥했다. 그런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쳐 그는 1989년 3,000명의 일본 장인을 물리치고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총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목재 문화가 발달한 일본. 일본을 뜻하는 ‘Japan’을 소문자 ‘japan’으로 쓰면 그 뜻이 옻칠일 정도로, 옻칠 문화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한국인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1조원대의 엄청난 공사, 3년간 연인원 10만 명이 투입돼야 해낼 수 있는, 무려 10톤의 옻칠이 사용된 거대한 작업. 그는 한국에서 데려간 장인 300명과 함께 3년 만에 메구로가조엔 내의 4~5천여 점의 작품들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중 2/3는 단순 복원이 아닌 그의 창작품으로 채워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옻칠 작품인 <이와테의 혼> 18×2.42m.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소재.
드디어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일할 기회를 준 일본인들에 대한 보답으로 세계 최고의 옻칠 미술관인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을 혼자 힘으로 7년간 운영해 왔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시 여러 장인들이 마음을 모아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합니다.
사실 장인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옛날에 일본에 왔던 선조들이 우리만큼 대우를 받았을까, 아니다. 이 좋은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이 했던 걸 되살려 놓으니 얼마나 보람된 일이냐, 우리의 작품이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했죠. 기술도 중요하지만, 마음가짐이 앞서지 않고는 안 되거든요.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짧은 역사관이었지만 선조들이 남긴 이야기를 하던가, 시간이 나면 일본의 역사 문화 탐방을 다니면서 견뎌냈죠.
복원 때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옻칠에 대해 더욱 연구하게 되셨다고요.
복원 작업을 하는 동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나를 돕고, 믿고 따라주었습니다. 저는 비록 이름 석 자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무명의 장인으로 돌아가 열악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들이 조금이나마 옻칠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보답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으셨을 텐데 다시 한국으로 오셨지요.
일본에서 귀화 요청을 했지만, 그건 아니더라고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 우리 산하를 보면 강과 못이 보여요. 그걸 볼 때마다 우리 조상님들의 어떤 한 맺힌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엔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진흙탕 속에서 퍽퍽하게 살았잖아요. 그 발자국이 굳어졌고, 그 발자국에 옻물이 고이기 시작해 전용복은 그걸 퍼서 먹고 있는 거고요. 세월이 흘러 시간을 잘 만나서 나같이 부족한 인간이 이런 대우를 받구나 싶어 황송하고 황공스러워요. 조상님들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러면 후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남겨야 하고 정리해서 전해줘야죠.
후학 양성에 힘쓰시고 계신데,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옻칠을 잘 모르는 게 안타까웠어요. 밥상, 가구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같이 알리자고 하죠. 선조들이 물려준 기법은 이어가되, 표현은 지금 시대를 해라, 가장 현대적인 것이 가장 전통적이다, 그래야 100, 200년 후에 새로운 전통이 될 것이다, 라고 하죠. 제자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옻이 올라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우리 미래는 밝구나 싶어, 너무 기쁩니다.(웃음)
사실 선생님이 하신 일들은 ‘옻의 재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옻이라는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알리고 남겼다는 말만 듣는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습니다. 또 옻이란 어떤 물질인지, 살균력이 뛰어나고, 전자파를 흡수하고, 새집증후군도 없애주는 등 얼마나 이롭고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 물질인지를 체계적으로 남겨놓고 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옻칠 작품만 있어도 공기가 정화되며,
옻칠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두뇌를 맑은 상태로 유지해준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시 막바지 6개월 동안
살인적인 노동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완벽한 옻칠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인천의 한 가구 회사와 손을 잡고 옻을 생활공간에 접목해 친환경 도장재로 쓰이도록 연구 중이다. 이 땅의 옻칠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불꽃처럼 살고 싶다는 칠예가 전용복. 이름 없이 사라져간 선조들의 발자국을 잇고자 하는 그의 대장정은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칠예가 전용복님은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80년 예린칠예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6년 한국 현대미술전 대상 수상으로 본격적으로 옻칠 작가로 활동한 님은 1991년 일본의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하면서 세계적인 옻칠 작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23년간 일본에서 활동하다 한국의 옻칠 문화 발전을 위해 2년 전 한국에 돌아온 이후, 옻을 생활공간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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