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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마을 ‘무지개빛청개구리’ 아이들 이야기

오승관 24세.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끝자락, 고층 빌딩들 사이에 낮게 모여 있던 비닐하우스들. 사람들이 ‘개미마을’이라 불렀던 그곳이 나의 고향이자 나의 마음을 길러준 뿌리이다. 개미마을은 1980년대, 집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빈 비닐하우스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생긴 마을이었다. 판자를 대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운 판잣집들이었는데, 내가 갓 돌이 지날 무렵 우리 집도 사정이 어려워지며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다.

사람들 눈에는 ‘가난’한 마을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마을이 좋았다. 주변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작은 도랑과 큰 나무들 그리고 많은 들꽃들이 있는 곳, 마치 도심 한가운데의 시골 같았다.

인심도 정말 좋았다. 어른들은 마치 동네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보살피셨다. 지저분한 교복이나 놀다가 찢어진 교복을 보면 무료로 세탁해주고 수선해주던 세탁소 아줌마, 아이들의 머리는 언제나 반값에 잘라주던 미용실 누나…. 그리고 달팽이건설 아저씨들이 있었다. 지물포집, 철물점, 인테리어 하시는 아저씨들이 마음을 모아 조합을 만들어, 사정이 어려운 집의 벽지도 발라주고, 장판도 깔아주고, 고장 난 곳도 고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꿈나무학교’라는 곳도 있었다. 부모님이 거의 맞벌이를 하셔서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는 집이 많았기에,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항상 어른들께 받기만 하며, 또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나누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득이 되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나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점점 위축이 되어갔다. 하굣길이면 친구들과 갈림길에 서는 나. 친구들은 높디높은 패밀리아파트로 향하고, 나는 개미마을로 들어선다. 점차 나를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도,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는 것도 부끄러워져갔다. 항상 전해지는 철거 소식, 불안해하는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 가난한 자와 부자로 나뉘는 사회의 시선들 속에서 겪게 되는 억울함과 분노, 열등감….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쌓여갔다.

그러다 내가 고1이 되었을 때 우리 마을에 ‘무지개빛청개구리’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정식 공부방이 생겨났다. 이곳에 전담 교사로 오신 이윤복 선생님이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밴드를 꾸리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려주고, 자신감도 심어주고, 서로 간에 끈끈한 정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을 줄여서 ‘무청’이라 불렀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셨다. 기타, 베이스기타, 키보드, 드럼…. 내가 배운 것은 드럼이었는데, 처음에는 악기가 없어서 폐타이어를 가지고 연습을 했다. 음악을 잘 몰랐지만, 그렇게 연습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무지개빛청개구리(줄임말: 무청)는 청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각자 자기만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아이들이 무지갯빛처럼 아름다운 빛깔로 함께 어우러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현재 이곳에 등록한 학생이 45명. ‘청개구리밴드’는 그동안의 나눔 활동들을 인정받아, 2010년 대한민국휴먼대상 휴먼네트워크상을 수상했다. 무청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 ‘즐거운가’ 입구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그림을 새겨 넣었다.

“왜 우린 여기서 태어난 거죠?” “불쌍하게 보지 마.” “우릴 그냥 내 버려둬요.”…

노래를 하며 우리 속에 맺혀 있던 그런 것들을 풀어갔던 것 같다. 우리는 평소에는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모으고,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다. 거기에 어른들이 후원해주시는 비용을 보태 점차 악기들도 구비가 되어갔다.

두 달 만에 첫 공연,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청개구리밴드’가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우리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마을 할머니들을 모시고, 또 우리와 비슷한 비닐하우스 촌에 응원 공연도 갔다. 일년에 한 번씩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모금 공연도 했다. 드럼을 칠 때마다, 사람들이 환호해줄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는 가난하니까, 나는 과외를 받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가 안 되니까, 그렇게 탓하고 핑계를 대기보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찾아 하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싹터갔다.

이제는 그렇게 같은 시기를 보냈던 친구들과 동생들이 다들,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었다. ‘우리에게 ‘무청’ 같은 공간이 없었다면?’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어떤 반항을 해도 언제나 그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안아주던 선생님, 몇 번의 철거 위기 때마다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준 마을의 어른들, 아무 대가 없이 우리의 공부를 봐주던 대학생 선생님들….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꿈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이곳에 온다.

‘즐거운가’. 무지개빛청개구리 아이들, 마을 사람들 누구나 와서 차도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마을의 사랑방 같은 곳. 2010년 9월, 개미마을의 철거 소식으로 무청의 공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마을 분들이 힘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나(왼쪽)는 밴드실에서 후배들을 가르친다.

이곳에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한 아이들이 있다. 소극적이고, 자신 안의 열정은 있지만 스스로를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친구들…. 태곤이는 직장을 다니는데, 퇴근하면 항상 이곳으로 와서 동생들을 챙긴다. 미술을 전공하는 성욱이는 만화 동아리를, 성국이는 베이스기타를 가르쳐주고, 운동을 잘하는 상신이는 아이들과 같이 체육 활동을 한다.

나는 밴드 후배들을 가르치며, 몇 달 전부터, 동네 주부 밴드인 ‘꿈마밴드’를 만들어서 가르치고 있다. 주부님들이 스스로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 활동들을 통해 한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느껴가고 있다.

“꿈을 꾸면 온 우주가 너를 지지해줄 거야.” ‘무청’ 선생님들께 늘 듣던 말이다. 이 말은 늘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말이다. 좁은 골목 끝에도 푸른 하늘은 언제나 공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금 거창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공평하게 온 세상이 평화로워질 꿈을 꿔본다.

이제 실제의 ‘개미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5년부터 법조타운 등이 조성될 예정으로 철거를 한다는 공고를 하다,
얼마 전 완전히 강제 철거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개미마을’에서 배운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칠예가 전용복, 옻칠에 생명을 불어넣다

옻칠, 전통 가구에 칠해지는 천연의 갈색 도료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옻칠의 고정관념을 깨주고,
다채로운 색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 칠예가 전용복(61).
그의 열정은 일본 최대 국보급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내면서 빛을 발하기에 이른다.
23년간 일본에서 활동해오다가 옻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칠예가 전용복씨를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옻은 옻나무의 수액을 말한다. 15년 이상 자란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상처 치유를 위해 스스로 나무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100일간 20회에 걸쳐 채취하는 양은 불과 150g.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이라 작가에겐 더없이 귀한, 최고의 순수 자연 도료이며 접착제이다.

150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렸고 세월이 흘러 군데군데 금이 났지만, 1500년 전 고구려 벽화나 700여 년 전의 팔만대장경이 잘 보존된 이유는 무얼까? 답은 바로 옻칠이다. 옻칠은 제대로 잘 발라놓으면 만년이 가는 데다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준다. 그런 옻칠의 매력에 푹 빠져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옻칠의 위대함을 되살리려는 작가가 바로 칠예가 전용복이다. 그가 내딛던 발길은 곧 옻칠의 역사였다.

1991년 일본의 최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복원과 함께 세계적인 칠예 작가로 인정받은 이후, 그는 또 다른 일에 도전한다. 4년간 피나는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옻칠 시계를 선보인 것이다. 4개월 만에 최고가 8억 4천만 원 시계를 포함한 24개 전량이 팔린 기록을 세웠다. 순수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시계, 전자기타, 피아노 등 생활과 밀접한 영역까지 옻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혀갔던 칠예가 전용복. 그랬던 그가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일본 땅이 아닌, 고국에서 우리 고유의 옻칠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기 위해서다.

옻칠이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는 게 신기합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300년 이상 음색이 변하지 않는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이 있는데, 사실 나무는 조금만 습기가 있어도 금방 뒤틀리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 원래의 형태와 음색을 유지할까 궁금해서 조사해서 유추해 보니 옻칠이란 결론이 났어요. 사실 나무로 만든 악기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때 소리가 가장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뒤틀리고, 화학성 도료를 바르면 마치 비닐을 씌운 것처럼 소리의 울림을 막아버리거든요.

그는 독일의 한 제조 회사에 악기를 주문했다. 직접 옻칠을 하기 위해서다. 미세한 음감을 구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일반 화학 도료와 옻칠판의 소리 차이를 비교하는 등 꼬박 3년간 옻칠 악기에 몰입한 끝에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옻칠의 두께를 찾아냈고,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 피아노 등 옻칠 악기를 탄생시켰다. 유럽과 일본에서 실내악 연주로 명성이 높은 세계적인 연주가 ‘노부작 트리오’는 “처음 연주하는 악기에서 어떻게 이렇게 오래된 악기 소리가 나지요? 사람을 매혹시키는 친숙하고 은근한 음색이 돋보였다”며 감탄했다.

이렇게 좋은 옻칠이 그동안 제대로 쓰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옻칠을 다루는 건 힘이 듭니다. 옻은 나무에서 뽑아낸 생물인데, 말리는 방법이 계절마다 또 어느 나라 옻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옻 속에 안료를 개어 넣고 배합할 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요. 막상 만들어도 옻칠의 특별한 건조 방법으로 인해 색상이 변해버리곤 하죠. 그 과정이 어렵다 보니 수십 년 동안 옻칠 이미지가 검은색이나 붉은색 정도로 인식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고 싶은 고정관념 중 하나가 옻칠은 다양한 색상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미 선조들은 벽화나 불당에서 화려한 색을 써왔어요. 정성을 다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제해 바르면 다른 어떤 도장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이 나타납니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자연, 마음, 우주 등 영원한 것을 주제로 하시는데, 옻칠의 특성이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옻칠은 만년의 빛이다’ 란 말을 한 것도 그 뜻이죠. 자기가 만드는 것이 10, 20년 만에 소멸된다면 신중함도 10, 20년 가지만, 내 작품에 내 이름이 적힌 것이 만년 이상 간다고 생각하면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어요. 옻칠 자체가 워낙 영원한 거니까 작품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보고 싶었어요.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고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 평생을 이걸 한 거죠.

그가 정식으로 옻을 접한 건 1980년이라 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목재 회사에 다니던 그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가구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그만둔 뒤, 예린공예사를 차려 가구를 만들어 팔았었다. 그러나 운영이 어려워지자 활로를 모색하던 중 그는 우연히 토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 기법’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치는 가구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찾았던 그에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와태칠을 하면서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후 순수 옻칠 작가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1987년,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 일본인이 ‘오젠’이란 밥상을 수리해 달라며 가져왔던 것. 수리를 의뢰한 곳은 다름 아닌 1931년에 지어진 일본의 최대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이었다. 이후 그는 그곳을 방문하면서 엄청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이 총망라된 그곳은 옻칠 작품 5천 점이 벽과 천장,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결국 메구로가조엔은 이 땅에서 건너간 옻칠로 일본인들이 피워 올린 옻칠 문화의 불꽃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처음 들어서는데 천마도가 있는 거예요. 말의 근육을 전복 껍질의 질감으로 표현했는데 기가 막힙니다.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기법이죠. 일본에 끌려간 장인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삭이며 한 톨 한 톨 자개를 새겨 넣었을 걸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겁니다.”

당시 메구로가조엔은 도시의 하천 확장 문제로 철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직원은 혹시 있을지 모를 복원 사업 계획을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철거보다는 복원 가능성이 클 것이라 예상한 그는 ‘선배 장인들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반드시 살려내리라’ 다짐하기에 이른다.

메구로가조엔 복원이 결정된 뒤, 일본인들을 상대로 설득할 때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벌이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걸 수 있는 건 목숨밖에 없었죠.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어요. 그래서 더 끊임없이 연구, 실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길밖에 없었어요. 이런 엄청난 과정을 통해 터득한 옻칠 기법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고 옻칠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게 된 거죠. 그때 저는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천혜의 기회인데,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요. 아마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는 먼저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완벽한 일본어 구사를 위해 34살에 대학에 입학, 일본에서 노숙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말을 건네며 일본어를 익혔다. 또한, 일본을 무수히 드나들며 메구로가조엔의 모든 작품을 꼼꼼히 조사, 분석하며 연구를 거듭했고, 일본 전국 각지의 옻칠 산지를 순례하며 장인들을 만나 기법을 귀동냥했다. 그런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쳐 그는 1989년 3,000명의 일본 장인을 물리치고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총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목재 문화가 발달한 일본. 일본을 뜻하는 ‘Japan’을 소문자 ‘japan’으로 쓰면 그 뜻이 옻칠일 정도로, 옻칠 문화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한국인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1조원대의 엄청난 공사, 3년간 연인원 10만 명이 투입돼야 해낼 수 있는, 무려 10톤의 옻칠이 사용된 거대한 작업. 그는 한국에서 데려간 장인 300명과 함께 3년 만에 메구로가조엔 내의 4~5천여 점의 작품들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중 2/3는 단순 복원이 아닌 그의 창작품으로 채워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옻칠 작품인 <이와테의 혼> 18×2.42m.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소재.

드디어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일할 기회를 준 일본인들에 대한 보답으로 세계 최고의 옻칠 미술관인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을 혼자 힘으로 7년간 운영해 왔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시 여러 장인들이 마음을 모아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합니다.

사실 장인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옛날에 일본에 왔던 선조들이 우리만큼 대우를 받았을까, 아니다. 이 좋은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이 했던 걸 되살려 놓으니 얼마나 보람된 일이냐, 우리의 작품이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했죠. 기술도 중요하지만, 마음가짐이 앞서지 않고는 안 되거든요.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짧은 역사관이었지만 선조들이 남긴 이야기를 하던가, 시간이 나면 일본의 역사 문화 탐방을 다니면서 견뎌냈죠.

복원 때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옻칠에 대해 더욱 연구하게 되셨다고요.

복원 작업을 하는 동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나를 돕고, 믿고 따라주었습니다. 저는 비록 이름 석 자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무명의 장인으로 돌아가 열악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들이 조금이나마 옻칠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보답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으셨을 텐데 다시 한국으로 오셨지요.

일본에서 귀화 요청을 했지만, 그건 아니더라고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 우리 산하를 보면 강과 못이 보여요. 그걸 볼 때마다 우리 조상님들의 어떤 한 맺힌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엔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진흙탕 속에서 퍽퍽하게 살았잖아요. 그 발자국이 굳어졌고, 그 발자국에 옻물이 고이기 시작해 전용복은 그걸 퍼서 먹고 있는 거고요. 세월이 흘러 시간을 잘 만나서 나같이 부족한 인간이 이런 대우를 받구나 싶어 황송하고 황공스러워요. 조상님들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러면 후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남겨야 하고 정리해서 전해줘야죠.

후학 양성에 힘쓰시고 계신데,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옻칠을 잘 모르는 게 안타까웠어요. 밥상, 가구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같이 알리자고 하죠. 선조들이 물려준 기법은 이어가되, 표현은 지금 시대를 해라, 가장 현대적인 것이 가장 전통적이다, 그래야 100, 200년 후에 새로운 전통이 될 것이다, 라고 하죠. 제자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옻이 올라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우리 미래는 밝구나 싶어, 너무 기쁩니다.(웃음)

사실 선생님이 하신 일들은 ‘옻의 재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옻이라는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알리고 남겼다는 말만 듣는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습니다. 또 옻이란 어떤 물질인지, 살균력이 뛰어나고, 전자파를 흡수하고, 새집증후군도 없애주는 등 얼마나 이롭고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 물질인지를 체계적으로 남겨놓고 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옻칠 작품만 있어도 공기가 정화되며,

옻칠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두뇌를 맑은 상태로 유지해준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시 막바지 6개월 동안

살인적인 노동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완벽한 옻칠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인천의 한 가구 회사와 손을 잡고 옻을 생활공간에 접목해 친환경 도장재로 쓰이도록 연구 중이다. 이 땅의 옻칠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불꽃처럼 살고 싶다는 칠예가 전용복. 이름 없이 사라져간 선조들의 발자국을 잇고자 하는 그의 대장정은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칠예가 전용복님은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80년 예린칠예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6년 한국 현대미술전 대상 수상으로 본격적으로 옻칠 작가로 활동한 님은 1991년 일본의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하면서 세계적인 옻칠 작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23년간 일본에서 활동하다 한국의 옻칠 문화 발전을 위해 2년 전 한국에 돌아온 이후, 옻을 생활공간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 가슴 깊이 불러봅니다.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우리 시대 아버지 이야기.

 

어느 추운 겨울 아침 청승

김수련 38세. 직장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박수근 작 <아기 보는 소녀>

Oil on Hardboard.

48.2×22.2cm. 1960년대.

날이 차다. 그래서 하늘이 더 시리다. 기러기 두 마리 날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 “기~러~기 울어에~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서늘도 하여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너도 가하고 나도 가한다”

한 맺힌 울 아버지의 18번이다. 울 아버지는 음량 좋은 음치다. 목소리는 되게 크고 울림이 좋은데 음이나 박자가 제멋대로다. 노래를 좋아하는 울 엄마가 강요해서 노래방에 가게 되면 얼큰히 취하신 음성으로 꼭 저 노래를 부른다. 정말 박자도 음정도 하나도 안 맞게 느리고 굵은 목소리로. 외로운 당신의 인생처럼.

아버지는 열두 살에 전쟁을 겪으셨다. 5남 2녀의 어린 가장이었던 내 아버지는 그 나이에 동생 셋의 죽음을 겪었다. 홀어머니와 남은 2남 2녀의 가족들은 함께 살 수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외할머니의 손에 키워지던 아버지는 그마저도 어려워 보육원에 보내졌다.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 아버지. 사람들은 아버지를 ‘한쪽 다리를 저는 침놓는 사람’이라 했다. 당신이 건강에 불편함이 많았기 때문에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셨는가 보다.

아버지랑 같이 일한 지 15년째가 되어간다. 난 아버지를 매일 보아왔다. 아버지의 삶을, 일하는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 속의 어린 아버지를.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 섞이지 못하셨다. 운동회, 졸업식, 입학식장에 아버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버지가 항상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며칠을 치통 때문에 앓았다. 어제는 약을 한 보따리 주셨다. 소금에 송진과 유향을 넣어 볶아서 물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 때문인지 이상하게 콧물이 줄줄 흐른다. 근데 아침엔 눈물이 그런다. 그 소금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신 그 소금.

금요일 아침부터 주책이다. 내가. 근데 이 마음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이, 내가 외로워서, 아버지의 무게 다른 걸음 소리가 가슴 아파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아버지께 사랑한다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빠! 제가 아버지의 딸이라서 자랑스럽고 또 사랑합니다!”

산타가 되신 나의 아버지

최상진 27세. 유니온프레스 기자

박수근 작 <골목 안>

Oil on Canvas. 80.3×53cm. 1950년대.

매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아버지 생각이 가슴에 가득해집니다. 유치원도 다니기 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머리맡에 놓아 있던 케이크 하나. 산타가 없는지조차 모르던 꼬마는 로봇 대신 케이크를 놓고 가던 산타를 원망했지요.

아버지께서는 “산타 할아버지는 못된 일을 많이 하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고, 조금만 착한 아이에게는 과자나 로봇을, 가장 착한 아이에게만 온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주는 거야” 말씀하시며 매년 저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던 여섯 살 무렵의 크리스마스, 속셈 학원 원장님과 나타난 산타 아저씨는 제게 이순신 전기 한 권만을 주고 가버렸습니다. 위인전을 손에 쥔 어린아이는 ‘내가 그동안 착한 일을 덜 해서 아버지도 아프시고 케이크도 안 주나 보다’ 하며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산타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물을 나눠줄 산타가 부족했는지, 아버지까지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저는 새벽에 케이크를 선물해주던 이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께서 동생 세진이의 머리맡에 장난감과 책을 놓고 잠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세진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세진이가 물었습니다.

“형, 착한 일 많이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다 주는 거야?” “그럼. 너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봐.” “아빠 만나는 거.”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랑 선물 나눠주러 다니느라 바빠. 다른 거 말해.” “없어, 그럼.”

세진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동생의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동생이 너무 안타까워 다음 날 어머니랑 세진이 몰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써놓으신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아버지가 홀연히 가족을 떠나간 지도 이제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아들은 어느새 군대를 제대하고, 기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4살배기였던 둘째도 예비역 복학생이 됐을 만큼 훌쩍 자랐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아버지의 몫까지 해내야 한다고 다짐하며, 야간학교 교사 생활도 하고, 심리학을 전공하며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했습니다. 주변에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앞장서 달려가고, 사회의 불의를 놓치지 않고 취재해왔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산타가 되어 무료 공부방 아이들을 찾아가기도 했지요. 아버지처럼 케이크를 사들고 말이지요. ‘너희들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들이구나’라는 멘트도 잊지 않고 써넣었습니다. 7천 원짜리 귤 한 박스를 내려놓기 무섭게 몰려들던 아이들. 단지 귤 3개를 받았을 뿐인데도 더없이 행복해하던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이 울컥 났습니다.

내가 겪은 과정을 이 아이들도 그대로 감내해내야 할 것임을 알기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지만,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내가 그들의 산타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나의 영원한 산타이신 아버지…. 어느덧 장가갈 나이가 되어버렸건만 아직도 아버지의 손길이 그립기만 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목소리

박도 67세.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저자

아들아, 오늘은 몇 년 전 함께 망가진 화단을 손질하던 순간이 떠오르는구나. 뒷산 기슭에서 너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흙을 퍼다 날랐지. 나는 네가 흙을 담아 재빠르게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의 성장에 뿌듯함과 함께 나도 이제 늙어 내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는 서글픈 두 마음이 교차했었다.

아버지도 군 복무 때는 완전군장을 하고 밤새 행군을 해도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양동이로 흙을 나르며 한두 번은 쉬어야 되는 체력의 노쇠함에 숙연해졌다.

30년 넘게 중고교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을 이야기한다. 나 또한 너희에게 “세대 차이가 난다” “나는 아빠처럼 안 살 거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섭섭했으나 곧 그것이 인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긍정으로 이해하였다. 집안이 잘되려면 자식이 부모보다 나아야 되고, 나라가 융성하려면 자라나는 세대가 구세대보다 나아야 한다. 어차피 다음 세상은 너희 것이기에.

박수근 작 <맷돌질하는 여인>

Oil on Hardboard. 21.5×27cm. 1940년대.

너희의 예리한 눈으로 볼 때 아버지를 비롯한 기성세대의 삶이 못마땅하고 모순덩어리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를 건전하게 비판은 하되 부정하지는 말아라. 아버지와 대화가 안 된다고 피하지만 말고 한 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아버지에게 접근해 봐라.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고 다가가면 아버지도 반갑게 너희를 맞을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때, 아버지는 가장 삶의 보람을 느낀다. 아버지는 누구냐? 아버지는 너희에게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다. 너희가 나무라면 아버지는 뿌리다.

“아버지는 백 사람의 스승보다 낫다”고 한다. 이는 자녀에 관한 한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세대가 다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동안 나는 무슨 일이 그리도 바빴는지 너희에게 밥만 갖다 주는 아버지에 지나지 않았구나.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우선 너희에게 풍족하게 해주려고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한 점을 솔직히 사과한다. 아이들은 밥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데 너희에게는 밥만 있었지 진지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 같다. 뒤늦게나마 너희 남매에게,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구나.

아버지는 고교 시절, 집안이 어려워 타지에서 홀로 신문 배달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었다. 그때 아버지는 객지에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자주 편지를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편지글에는 늘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 사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글귀가 아버지로서 책임을 회피한 말로 들려 무척 짜증스러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매번 빠짐없이 그 글귀를 써 보내셨다. 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그 글귀가 적힌 편지를 수십 번은 더 받았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내게 그런 글을 보내주시던 아버지가 이승을 뜨신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내가 새삼 지난 얘기를 들추는 것은, 앞으로 너희에게 부닥칠지 모를 ‘젊음의 뒤안길’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다.

젊음의 뒤안길이란 ‘인종(忍從, 묵묵히 참고 따름)의 인생길’로 젊은 날의 방황과 시련, 고뇌를 말한다. 어느 분야든지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대부분 젊음의 뒤안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또 그런 길을 거쳐 온 사람들은 웬만한 역경에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단다. 그분들이 정상에 오른 것은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딸들아, 아들들아, 내일을 준비하는 젊은이가 되라. 어차피 다음 세상은 너희 것이다. 이 세상은 네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네 운명이 달라진다. 이런 세상에서 네 꿈을 한번 멋지게 펼쳐라. 너를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에 참으로 위대하다. 그렇기에 아무렇게 살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 삶이기에.

 

아빠와의 추억, 다시 만들어가려고요

장희지 25세. 직장인. 대구시 북구 고성동3가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저녁이 지나도 밤이 되어도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여쭤보니 모르겠다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신다.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엄마는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 1주일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글썽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동생과 아빠랑 산에 올라 산책을 자주 했다. 무슨 이름 모를 꽃도 보고, 운동도 했다. 산에서 내려올 땐 100원짜리 요구르트를 나와 동생에게 사주시고 아빠는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항상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갔다.

가끔은 자전거로 등교도 시켜주셨다. 충분히 걸어서 가도 된다 해도 아빠는 자전거 뒤에 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은 어릴 때가 전부였다. 늘 함께 있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어느 순간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10월 17일 토요일.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아빠는 손가락 하나를 못 쓰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다며 내게 양말을 신겨 달라고 했다. 아빠에게 양말을 신겨 드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순간 내가 그동안 아빠께 해드린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안경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항상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셨고, 야근도 자주하셨다. 그렇게 일해서 삼 남매를 키우셨다.

박수근 작 <모란>

Oil on Canvas. 40.9×53cm. 1960년대.

하지만 나는 항상 아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른 가족이 재밌게 TV를 보고 있는데도 아빠가 보고 싶은 것으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아빠, 가족들의 의견에는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 아빠.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생각했다.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아빠를 보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고 있는 피붙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지금껏 버텨왔을 아빠가 보였다.

가족을 위해 아끼기만 했던 아빠. 아빠의 작고, 초라해진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아빠의 헌신과 희생으로 나는 자랄 수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었다. 아빠의 입원을 계기로 아빠를 보려고 찾으려고 노력하는 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퇴원 후 아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장녀로서 나도 그렇게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지만, 아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았다. 휴대전화 문자 쓰기, 컴퓨터 타자, 인터넷 검색하는 것도 가르쳐 드렸다.

그 후 2년이 지났다. 이제는 퇴근 후에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간혹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셔도 우리 아빠만의 특징이라 생각하며 가벼이 웃고 지낸다.

어느새 아빠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마음의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아빠가 오래오래 사셔서 못 해본 것 많이 해보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열심히 돈도 모아서,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많이 시켜드리고 싶다.

‘아빠’ ‘아버지’… 가슴 깊이 불러봅니다.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우리 시대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김충근 51세. 농부.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박수근 작 <소와 유동>

Oil on Canvas. 116.8×72.3cm. 1962.

아버지! 그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아버지는 어린 저를 무릎에 앉혀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도 매로 다스리는 엄마와 달리 그저 마음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말과 소를 끌고 다니며 운송업을 하셨던 아버지.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때, 말은 병에 걸려 죽고, 소는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집안은 삶의 터전을 잃었지요. 그렇게 집안이 힘들 때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삼 일 내내 당신의 주검 앞에 울부짖던 철모르는 아이를,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때론 원망도 했지만 아버지가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너무나 컸습니다.

고2 때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비행 청소년처럼 방황했고, 그땐 누구도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습니다. 단지 아버지만이 나에게 위로였습니다.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부모와 어머니도 미웠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나는 진정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가세가 힘들어졌을 때, 저를 가슴에 꼭 안고 흘려주었던 아버지의 눈물이 아니었던들 저는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부모와 입양해서 잘 키우고자 했던 어머니의 또 다른 사랑을 모르고 세상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어리석게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하던 저를 아버지가 살려주신 겁니다. 그 후 열심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힘을 냈습니다.

지금 제겐 다섯 아이가 있습니다. 세 아이는 배로 낳았지만 셋째 현지와 막둥이 승민이는 가슴으로 낳았습니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선지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 유독 마음 아파하던 아내의 제안으로 입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보고 대단하다 합니다. 하지만 우린 부끄럽습니다. 그 아이들로부터 받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차이가 있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다섯 아이 중 어떤 아이라도 없으면 못 견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다음에 커서 친부모를 찾지 않겠느냐? 걱정스레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그들의 뿌리를 찾아줄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들도 소중하니까요.

나는 농사꾼입니다. 유기농을 꿈꾸며 귀농했지만 딱히 내놓을 만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 농사만큼은 잘하고 싶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신의 사랑을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삶이 힘들어져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아버지’ 하면서 나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힘들 때 언제나 위로가 되어주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도 들려드리지 못했었네요. 사랑합니다….”

아빠의 흰머리가 말을 걸었습니다

강현민 25세. 대학생. 경북 김천시 지좌동

박수근 작 <길>

Oil on Hardboard. 31×18cm. 1964.

저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무서워하면서도 따랐고 따르면서도 무서워했습니다. 그렇게 아빠는 제게 친구 같기도 하면서 먼 사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칭찬도 잘 안 해주고, 잔소리만 늘어놓고 감정 표현에 서투셨습니다.

컴퓨터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항상 듣는 소리는 부정적인 말이었습니다. 고맙다, 잘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아빠만이 옳은 양 저를 이해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빠가 싫었고, 차츰차츰 대화를 안 하게 되더니, 꼭 필요할 때도 얼굴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된 것을 봤습니다. 머리카락을 보고 나니, 얼굴을 보게 되고, 몸 전체를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너무나 늙으신 아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저렇게 늙으셨는지….

마치 아빠의 흰머리가 저에게 말을 거는 듯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아빠와 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뭐 때문에 아빠를 봐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고 진짜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었나. 그 무렵 마음수련을 하고 있던 저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에 대해 쌓아놓은 부정적인 마음들이 어느새 벽으로 쌓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빠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수련을 시작한 이후 지금은 아빠에 대한 부정적 마음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나간 만큼 아빠를 대할 때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태도와 행동 또한 많이 바뀌며 그냥 아빠가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08년 입대를 앞둘 무렵 가정불화가 폭발하여 아빠가 정말로 힘들어할 때가 있었습니다. 회사, 술, 회사, 술…. 그때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답답했고, 싫었습니다.

“아빠 잘못이잖아” “엄마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하며 아빠에게 상처가 되는 말만 해댔습니다. 설령 아무리 아빠가 잘못했다 한들,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그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아빠, 그때는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동안 부정적으로 쌓아놓은 제 마음 때문에 진실로 아빠를 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가짜마음들에 속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아빠와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빠,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좀 내주세요. 제가 십 년은 젊어 보이게 염색해 드릴게요.”

철없던 막내딸의 고백

최윤아 32세. 직장인.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 어느덧 막내딸이 32살이나 되었네요. 하필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는 나이 사십에 막내딸을 낳으셨어요. 새벽 5시면 엄마랑 같이 꽃 배달을 다니시며 대가족을 먹여 살리시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셨던 아버지! 벌써 칠십이 넘으셨네요.

아들만 둘이 있던 집안에 뒤늦게 막내딸을 얻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쏟아주셨죠. 엄마 말로는 어릴 때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어주셨다지요. 돌아보면 자라면서 갖고 싶다는 것, 하고 싶다는 걸, 안 해주신 적이 없었어요. 형편도 어려웠을 때 어떻게 그것들을 다 마련해주셨을까요.

휴일도 없이 일하셨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안 하셨어요. 정말 아프실 때 빼고는, 하루도 늦잠을 주무신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셔서 다시 재기하신 아버지를 뵈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 철이 없었죠. 아빠를 보며 늘 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선뜻 제 주장도 하지 못하고 꾹꾹 참는 일도 많았지요. 그리고 지나치게 사랑받다 보니, 제 내면에서는 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졌잖아요. 성인이 되어,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때였어요. 갑자기 저에게 우울증 증세가 찾아온 거예요.

난 잘해야 한다, 내 뜻보단 부모님에게 맞춰드려야 한다, 거기에 왠지 모를 열등감, 중압감, 압박감들…. 그렇게 제 안에 차곡차곡 눌러놓고 살았던 것들이 터져버린 거예요. 항상 보호만 받고 살았기에, 의지력도 약하고 독립적으로 크지 못했던 저는 이 모든 상황에서도 아빠를 원망했으니, 얼마나 철모르는 딸인가요.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저는 부랴부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듣고 부모님께서 찾아오셨죠. 하지만 저는 부모님을 볼 자신이 없었어요. 6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오신 부모님께, 저는 그냥 가라고만 했죠. 혹여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나가시긴 했지만 병실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엄마 아빠….

몇 년이 지나고, 다행히 지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사이 마음수련을 하게 되어, 오랜 세월 쌓아왔던 마음을 버린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 그때는 아버지도 참 당황스러우셨지요? 힘들어하는 딸을 보면서 또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요…. 그때만 해도 저는 아버지 마음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못난 딸내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아버지. 제가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언제나 변함없고 언제나 똑같았던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 32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께 마음으로 전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철없는 막내딸 지금까지 예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박수근 작 <강변> 종이에 크레파스, 과슈. 11.5×29cm. 1950년대.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7)

임진(壬辰)년 용띠 해입니다.

청룡도 아니고 백룡도 아니고, 60년 만에 찾아온 흑룡(黑龍)의 해라 하니,

올해는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용은 열두 띠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예로부터

하늘의 선행과 풍요를 상징하며,

구름과 비를 만들고 물과 바다를 다스리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숨길 수도 있다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동물이기에 왕의 상징물로 쓰였습니다.

때문에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 임금이 앉는 자리는 용상(龍床), 옷은 용포(龍袍),

임금이 타는 수레는 용거(龍車)라 했으며 임금이 흘리는 눈물은 용루(龍淚)라 불렀지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용은 본래 큰 못이나 깊은 물에 살지 개천이나 흙탕물에는 살지 않으며,

여의주와 물, 비, 바람, 구름을 만나고

뿔이 나야만 승천할 수 있으므로,

빈천한 환경에서도 걸출한 인물이 난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또한 ‘등용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용은 신분 상승의 상징이기도 하며,

예전보다 훌륭한 모습으로 변했을 때 ‘용 됐다’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되어보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관념과 내 관습이 바뀔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내 속에 갇힌 작은 의식일랑 깨부수고,

내 몸에 묶인 안 좋은 습관일랑 깨버리고,

더 크고 더 귀하고 더 자유로운 ‘나’와 만나시기 바랍니다.

모두 모두 ‘용’ 되시기 바랍니다.

 

 

빼기가 대안이다

공격성은 감소되고 자신감은 길러지고

<마음수련 명상 프로그램이 중고등학생의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영향> 2011. 2. 24.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중에서.

최근 잇달아 일어난 중학생의 학교 폭력과 그로 인한 자살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현 시대 청소년의 공격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폭력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있는지 드러내며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성 회복과 전인교육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학생들에게 정서적 불안감, 열등감 및 자아존중감 상실을 가져다준다. 특히 자아존중감과 공격성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자아존중감이 낮은 학생의 경우 적의성, 분노감 같은 공격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며 이를 폭력적인 언어와 행위로 나타낸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된 바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공격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그동안 쌓아놓은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은 곧 자아존중감 향상과 연결된다.

실제로 지난 2010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참여해 20여 일간 중고생 한 조와 일과를 함께하며 관찰한 결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14~18살 10명이 마음 빼기를 통해 부정적인 마음과 폭력성 등을 버리면서 이삼 일 만에 소통이 잘되고 공격성은 감소되며 자아존중감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중 공격적 성향이 강했던 중학생 2명의 변화 사례를 소개한다.

9살 때 부모가 이혼한 윤○○군 이야기

윤○○군이 9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부모와 사이가 안 좋고 말수도 적은 윤군은 중국 유학 중 장기 결석으로 학교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친구와 다투어 책걸상을 부수는 등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말투에 늘 화와 신경질이 있고 평소에도 ‘XX, 왜 쳐다봐’ 등의 말이 자주 나왔다.

캠프 초반,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있어, 학생들에게 “우리 방도 노래할 생각이 있니?” 하니 윤군은 “싫어요, 선생님부터 그 마음 버리세요” 한다.

캠프 중반, 화와 짜증을 많이 버렸다는 윤군이 선생님이 청소를 하려고 하자 ‘제가 할게요’ 하며 자진해서 청소를 하는 등 중반부터는 친구들, 선생님들과의 대화가 편안해지고 웃는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캠프 후반, 장기자랑 시간에 노래를 부르기로 자청했다. 긍정적 자신감이 길러진 것이다.

윤○○ 군이 직접 작성한 마음수련 이야기

버려진 마음 3가지 안면 홍조, 피부, 감정

캠프 후 좋아진 것 3가지 인간관계, 명확한 목표 정하기, 인간 본분

캠프 참가 소감 마음수련이라는 것을 인생을 걸고 한다면 크게 성공하고 어린 나이에 한다면 인간 본분,

그리고 전체적으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마음수련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면 세상의 범죄와 경찰 등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말레이시아 유학 중 생활 부적응으로 힘들었던 이○○군 이야기

말레이시아에 갔다가 생활 부적응으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던 이군은 무엇을 하자 해도 ‘아니요’ 등 반대로만 얘기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캠프 초기에는 수련에 집중이 잘 안되고 가정에 대한 불평불만과 ‘XX놈’ 등의 욕설이 여러 번 나왔으며 무서운 영화와 사건을 많이 이야기했다. 캠프 중반, 수련에 조금씩 집중하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부모님과 친구, 동생에게 한 행동에 대해 반성을 많이 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버렸다고 했다.

이○○ 군이 직접 작성한 마음수련 이야기

버려진 마음 3가지 시험 못 본 것, 수련하기 싫었던 것, 소극적인 마음

캠프 후 좋아진 것 3가지 마음이 편해짐, 친구들을 많이 사귐, 감사함을 알게 됨

캠프 참가 소감 캠프에 와서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캠프 오기 전엔 저는 엄마와 다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마음을 버리면서 나는 항상 다른 사람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했었고 뭐든지 비아냥거리면서 어른들을 무시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마음을 버리다 보니까 제가 그동안 너무 막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캠프를 마치고 가면 부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해야겠다고.

이석기 57세. 부산시교육청 학교정책과 사무관

 

 

빼기가 나를 바꾼다

가슴 한가득 튤립 안고

친구들에게 전한 내 마음

“미안해, 고마워

 

내 나이 13살! 여름 방학을 시작했을 때 나는 서울로 상경했다. 경기도에 있는 할머니 댁에 잠시 짐을 풀고 당시 이름도 들어본 적 없었던 예술중학교 입시를 치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강남에 있는 미술 학원으로 통학했다.

시골에서는 선생님들의 기대를 받으며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탔던 나는, 서울에 보내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기에, 또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매일 지하철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꾸벅꾸벅 졸며 화실에 다녔다.

서울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낯설게 다가왔다.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화려했다. 성격도 활발했고 씀씀이도 컸다. 내 한 달 용돈에 가까운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척척 사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점점 열등감이 커졌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릴 때도, 소풍이나 여행을 갈 때도 친구들 앞에서는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활달한 척했다. 하지만 무심결에 하는 친구들의 말이 내게는 상처로 다가왔고 아이들과 한번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웠다. 대신 나는 필사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에 관한 한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전날에도 제일 마지막까지 화실에 남아 그림을 그렸고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다.

장학금까지 받으며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내 안의 문드러진 마음은 곪아갔다.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쏟기 일쑤였고 나오지도 않은 성적을 두고 지하철역에서, 화장실에서 엄마와 전화를 하며 한없이 울었다. 제대로 등교도 하지 못했고 학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결국 나는 그해 겨울, 학교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어느 날 교사인 아버지께서 마음수련을 권하셨다. 사람들 모두가 하나 되는 공부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돌아보니 친구들에게 모질게 대했던 행동들이 후회가 되고 미안했다. 처음엔 남과 벽을 두는 내 마음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열등감, 비교하는 마음들이 버려지면서 편안해지고 활기가 생겼다. 웃음이 많아지고 나이가 많건 적건 모두와 웃고 떠들고 인사하며 포옹도 할 수 있었다.

‘더 나아진 내가 되어야지’ 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나’마저도 털어 버렸다.

서울로 다시 돌아와 나는 검정고시를 본 뒤, 친구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곤 예술고등학교 졸업식 날, 가슴 한가득 튤립을 사서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나누어 주었다.

내 열등감으로 인해 고생했었을 친구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의 전달이었고 화해였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고 요즘은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 상대를 시비하는 마음을 버리면 버릴수록 상대를 편하게 대할 수 있다. 나를 괴롭혀왔던 마음들을 버리고 이제 누구든 포용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고 즐겁다.^^

고아라 24세. 충남 홍성군 홍성읍

-이 세상의 쓸 말 -구원이란 무엇인가, 허가 참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말이 많은 세상이라

수많은 말이 있어도 쓸 말은 하나도 없는 것이라

쓸 말이란 참의 말이고 사람을 살리고

쓸 말이란 산 말이어야 쓸 말이라

산 말이란 생명이 있어야 하고

산 말이란 생명의 말이라

결론적으로 쓸 말이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이 쓸 말이라

쓸 말이란 산 자의 말이고 산 말이고

쓸 말이란 진리의 말이고

쓸 말이란 생명의 말이라

기독교에서는 재림 예수님이 하늘에서 천사들과 함께 나팔을 불면서 하늘구름을 타고 구세주가

오신다고 했고, 불교에서는 미륵이 사바세계 중생세계에 와서 중생을 구원해 준다고 했고, 증산 선생은

대두목이 온다고 했고, 소태산 선생도 미륵이 온다고 했다.

서로가 말의 표현은 달라도 똑같은 예언이다.

이것은 빈 허공이, 이 세상의 본래의 주인이 사람으로 온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란 천지 만물만상을 지은 주인이고 참인 진리의 존재다.

이 존재인, 이 우주의 근원인 정과 신의 존재가 세상에 와야

이 정과 신의 존재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천지 만물만상이 나오기 이전의 자리이고 천지 만물만상이 이곳으로부터 나왔기에 이 존재가

창조주이신 살아 있는 진리고 참의 존재다.

이때까지 수많은 이가 노력하였지만 사람이 노력하여 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참이 아니기에 참을

모르고 참이 되는 방법이 없어서이다.

사람이 자기가 이루었다면 이루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깨친 자와 성인이 많이 있었는 줄 아나 깨친 성인이 있었다면 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미완성이기에 종교와, 다른 어디에서 완성이 되기 위하여 찾고 또 구하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란, 각 종교에서 부르는 존재는 참이기에 그 존재처럼 허인 인간이 참이 되는 것이다.

글, 그림 우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My mom’s love is like a beneficent virus

by Wha Ik Cho Seoul

The hide and seek game between my mother and I started when I was in the fifth grade and continued until my freshman year of high school. Out of the blue she would register me at private academies for extracurricular English and math classes, not even considering how distasteful academics were to me. I did not attend even one of them for more than a month before I would slip out like a slimy eel. My mother would pressure me, burden me and have huge expectations towards me about things she wanted to accomplish; and when it came to my academic studies she was especially strict and fearsome.

Even if I got to see my busy mother only once a day her greeting to me would be “How are your studies going?” or “Did you go to the academy today?” I started disliking my mother more and more, finally getting to the point where I would get angry just by looking at her.

Then one day, when I was a sophomore in high school, my mother suddenly decided to stay at the Maum Meditation Main Center in Nonsan for a week. Yes! I felt liberated; felt that I could breathe now. I was really grateful that she had left.

After a while my mother returned from Nonsan and we noticed a subtle change in her. But I was doubtful; in fact everyone in the family was skeptical. There was no way she could have changed so much so quickly. But a day later, and then a month later, we realized that she had really changed. We were astonished that she was not angry all the time. On top of that I began to feel a genuine understanding of me through her words and looks. For example, in the past she was only concerned about whether or not I had attended class, or she would only ask how my studies were progressing. But now she would only ask questions that showed genuine concern for me; like “Are you feeling ok? Can I get you something to eat?”

The way my mother began joking around with my father was also surprising. My father would make jokes just as he always did, but because he had a vulgar sense of humor his jokes would, in the past, offend my mother. However, now she would just accept what he said and laugh with him leaving the entire family speechless. Before she did Maum Meditation their relationship had not been bad, but it was not a close, friendly one. But thanks to my mother’s abundance of positivity and warmth, and always being readily able to say “I’m sorry,” or take the initiative and say “I’ll do it, don’t worry,” in any situation, our home had suddenly turned into a harmonious place to be.

I began to wonder what this Maum Meditation was that could make such a positive change in my mother. I began to have a small expectation, a hope and desire that even I might be able to break free from the shadow of my present self.

I had always been very unfocused and indecisive, and never had the backbone to stick with things to the end, not even when I learned something new. When people would ask me about my skills or achievements I would say that I was good at a lot of things, like licking a watermelon rind. I was never confident enough in what I had done to consider myself accomplished at anything.

But I was sick and tired just talking about how I wanted to change, when in fact I would not follow through with anything and so I never made any progress. After seeing the change in my mother I decided to begin doing Maum Meditation. I knew that this was something I wanted to do completely.

As I meditated I came to realize how meaningless it is to live blaming the world and blaming others. During this time of introspection I came to see the real value in this meditation. At that time in my life I was drowning in the pain of failing an exam for a degree. But Maum Meditation gave me a way to overcome myself. Because of the meditation my concentration level had improved substantially and it was my great fortune to pass the exam for my degree.

Nowadays I brag about my mother to my friends. To me she is a friend that I will always cherish. Even now she tells me “If there is anything you want to do in life I will stand behind you and support you; and I know you will never regret anything you do.” My mother’s love and embraces are like a beneficent virus that spreads illumination and goodness throughout, not just in my family, but it shines on everyone, everywhere.

 

-Heaven, which is Truth

Heaven, which is Truth, is freedom, liberation, and endless peace, because in heaven there is no self. The various things from human life? good and bad, interesting and boring, judgment and discrimination, right and wrong, hot and cold, suffering and happiness- do not exist there. Aging, sickness, birth and death do not exist there; it is just freedom and liberation. There, one’s mind is the mind of the emptiness itself, and one just lives. His mind is the mind of Truth itself – the eternal and never-changing heaven. His self of the past is a picture and a very illusion. In heaven, everything from human life is gone, and there is nothing but Truth. In heaven, one has as much happiness and joy as the blessings he has amassed. It is paradise. This land of existence is the real land? the world of reality. The land that has been resurrected as Truth has no death, and one lives as an eternal immortal. A person born in this worldis true; he is Truth; he is existence; he does not die; he lives forever. The world is complete but the human mind does not exist, because in the world of his mind, man takes pictures of the world like the footage of a video.

The mind of Truth- of God and the origin- is the true nature that is metaphysical; it is existence; time and space do not exist in it; and it exists of and by itself. It exists everywhere and within all things; it existed from the beginning and before the beginning, and it is the immortal that will exist for an eternity after. It is the Creator- this existence itself is the great Soul and Spirit; it is the source of the infinite Universe, the origin itself; it is the mother and father of all creation. When this existence comes to the world as a person, man and everything in heaven and earth can be saved, which is the reason it is called the Savior and Maitreya. Having been born in the world, the only thing that man really needs to do is to truly live- he needs to become this existence of Truth. Only when everything has died can all creations be resurrected as Truth and live, for only then can they be reborn. The land of Truth is the land that is alive, which man cannot see or know because he does not have the mind of Truth. Human completion means to become Truth, and when man becomes Truth, he can live eternally. Truth is the place we must get to; it is the place where we must be reborn; the place where we must live.

Casting everything off means one departs from all human matters- money, love, fame, family and your illusionary self- for only then can you go to the land of Truth and be reborn as Truth. Truth itself must come to the world in order for man to become Truth and complete. Man’s mind only contains the minds of pictures taken of the world; it does not have any Truth within it. Therefore the existence of Truth must come as a person of the world, and give new birth to man and all creations of heaven and earth. This is heaven and it is salvation. Only Truth can take us to the land of Truth

and give us new birth as Truth.

Heaven is the place that exists after the complete death of your false self. While you are living you must be reborn; reborn with the body and mind of Truth and completion and live in the complete land. Only those who have gone to this land while they are alive can live in heaven. It is illogical to believethat you can go to heaven after death if you are not real and true now. What is false does not exist – it will die, it will completely disappear, because it is an illusion. Heaven is a place where only those that are true and real live; it is a place of completion, far from human matters. A place of freedom and liberation because it is endlessly peaceful; a place where there is no time and space or any delusions; a place where one’s mind is always at rest and there is only endless peace.

Drawings and writings of Woo Myung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in 2002.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including World Beyond World an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which have been published in English. His other books, Where You Become True Is The Place Of Truth, Heaven’s Formula For Saving The World, The Living Eternal World, The Book Of Wisdom, Mind, Universal Order and The Enlightened World are in the process of being translated into English as well as Chinese, French, German, Italian, Japanese, Portuguese, Spanish and Swedish.

동네 노는 아저씨의 친절한 고민 상담소

30대 초반의 직장인 남성입니다.
연말연시엔 회사에서 행사를 참 많이 하는데요, 저는 끼가 없어서 노래도 못 부르고
춤도 못 추고, 우스갯소리도 못하고, 장기 자랑하라 해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잘하는 동료들이나 후배들을 보면, 부럽고 괜히 위축이 됩니다.
뭔가 장기 하나는 계발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성격상 쉽지가 않네요.
무슨 행사나 엠티, 모임이 있을 때면 항상 하게 되는 고민입니다.

제가 사회 초년생일 땐 개인기 시키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노래를 할 때 저는 성대모사를 했는데, 그것에 다들 관심을 보였습니다. “진군하라~” 이 한마디에 회식 자리는 조용해졌고 저는 을지문덕 성대모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틈을 주지 않고 비명을 연달아 다섯 번 정도 질렀습니다. 3천 궁녀 낙화암 성대모사를 한 겁니다. 부장님이 조용히 술 한잔 드시더니 “너 3천 궁녀 끝까지 해보라”는 말에 몇 번 더 소리 지르다, 다시는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끼라는 것은 타고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차지합니다. 고민남님의 나이로 봐서 30평생을 남 앞에 나서지 않았던 끼가 지금 와서 남들이 부럽고 왠지 위축된다는 이유로 어떤 거라도 배워서 남들 앞에 서고 싶으시다는 건데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찾아오는 행사나 모임에서 기죽어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고민남님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치입니다. 바닥에서 시작하니 밑져야 본전이고 좀만 잘하면 대박입니다. 두 번째 고민남님이 가지고 있는 열정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신다는 자체와 고치려고 노력까지 하셨다는 자세가 이미 가슴 한구석에 열정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그 자그마한 열정에 불씨를 지필 수 있는 부싯돌은 딱 한 가지 열심히 하는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달인 코너의 개그맨 김병만씨를 보면 외줄 타기를 하고 방송 내내 철봉에 매달립니다. 관객은 그의 재능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걸 하기까지의 인내심과 노력을 알기에 환한 미소를 보내는 겁니다. 저도 그날 3천 궁녀를 열심히 끝까지 한번 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ㅎㅎ

동네 노는 아저씨 백일성. 올해 나이 41세,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초딩 남매 그리고 1930년대생 부모님과 함께 한집에서 박 터지게 살고 있음. 3년 전 우연히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박 터지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됨. 2년 전에는 <나야나 가족 만만세>라는 수필집도 발간했음. 좌우명이라고 할 거는 없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 “지랄도 많이 하면 는다~”를 한 가지 일에 꾸준히 하라는 말로 새기고 살아오고 있음.

안과 의사 김동해씨, 24개국 가난한 안과 질환자들에게 빛을!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아직도 크고 작은 총격전이 끊이지 않는 파키스탄의 라호르. 불안한 사회 분위기만큼이나 의료 시설도 열악한 이곳에서 병원에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생명에 큰 지장이 없는 안과 질환의 경우에는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길이지요. 한국이라면 단 한 번의 수술로 완치될 수 있는 백내장 질환도 가난 때문에 방치됐다가 실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곳 사람들에게도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일년에 두 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로 개안수술을 해주는 캠프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캠프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한국인 안과 의사 비전케어서비스의 김동해(48) 대표입니다.

대학 졸업 후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에서 3년간 보건의로 생활하면서 ‘남을 위하는 일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김대표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며 무료 수술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2001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9?11테러 그리고 계속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회의 충돌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외치던 종교 단체들이 서로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과연 나는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방법을 찾다가 파키스탄에 안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대표는 곧바로 현지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수술 장비와 약품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의사와 간호사, 봉사자들과 함께 파키스탄에서 처음으로 무료 개안수술 캠프를 열게 됩니다.

이후로 수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때마다 지역을 하나씩 늘려나갔고, 어느새 24개국에서 무료 수술 캠프를 진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꾸준히, 상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다 보니 저절로 길은 넓어지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김동해 대표. 그가 단체를 운영하는 데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한 번 간 곳은 매년 방문하는, 책임지는 원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한쪽 눈씩,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수술을 해주고 나머지 한쪽 눈은 6개월 후를 기약합니다.

각 나라를 생각하면 선하게 떠오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2012년 새해에도 그의 해외 일정은 빼곡히 채워졌습니다. 캠프에 다녀올 때마다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는 김대표는 ‘해외 봉사 덕분에 다양한 수술 경험에다 실력까지 늘었으니 봉사 활동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20분 남짓한 짧은 수술만으로 십 년간 잊었던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할머니,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게 된 아버지,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아이들….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자 이 일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말은 안 통해도 표정만 봐도 느껴지죠. 아, 이 사람이 보이는구나! 빛을 찾았구나! 환한 웃음, 밝은 표정을 보는 그때가 가장 기분 좋죠.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한 곳에 쓰인다는 거, 그게 가장 큰 기쁨 아니겠습니까?”

비전케어서비스 대표 김동해님은 가톨릭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91년부터 3년간 꽃동네에서 공중보건의로 생활했습니다. 2002년 파키스탄 무료 개안수술 봉사를 시작으로 비영리단체 비전케어서비스를 설립하여 10년간 100여 차례, 24개국 9천여 명의 안과 질환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왔으며 그 외에도 실명 예방운동, 병원 건립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www.vcs2020.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