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버지’… 가슴 깊이 불러봅니다.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우리 시대 아버지 이야기.

 

어느 추운 겨울 아침 청승

김수련 38세. 직장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박수근 작 <아기 보는 소녀>

Oil on Hardboard.

48.2×22.2cm. 1960년대.

날이 차다. 그래서 하늘이 더 시리다. 기러기 두 마리 날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 “기~러~기 울어에~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서늘도 하여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너도 가하고 나도 가한다”

한 맺힌 울 아버지의 18번이다. 울 아버지는 음량 좋은 음치다. 목소리는 되게 크고 울림이 좋은데 음이나 박자가 제멋대로다. 노래를 좋아하는 울 엄마가 강요해서 노래방에 가게 되면 얼큰히 취하신 음성으로 꼭 저 노래를 부른다. 정말 박자도 음정도 하나도 안 맞게 느리고 굵은 목소리로. 외로운 당신의 인생처럼.

아버지는 열두 살에 전쟁을 겪으셨다. 5남 2녀의 어린 가장이었던 내 아버지는 그 나이에 동생 셋의 죽음을 겪었다. 홀어머니와 남은 2남 2녀의 가족들은 함께 살 수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외할머니의 손에 키워지던 아버지는 그마저도 어려워 보육원에 보내졌다.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 아버지. 사람들은 아버지를 ‘한쪽 다리를 저는 침놓는 사람’이라 했다. 당신이 건강에 불편함이 많았기 때문에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셨는가 보다.

아버지랑 같이 일한 지 15년째가 되어간다. 난 아버지를 매일 보아왔다. 아버지의 삶을, 일하는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 속의 어린 아버지를.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 섞이지 못하셨다. 운동회, 졸업식, 입학식장에 아버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버지가 항상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며칠을 치통 때문에 앓았다. 어제는 약을 한 보따리 주셨다. 소금에 송진과 유향을 넣어 볶아서 물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 때문인지 이상하게 콧물이 줄줄 흐른다. 근데 아침엔 눈물이 그런다. 그 소금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신 그 소금.

금요일 아침부터 주책이다. 내가. 근데 이 마음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이, 내가 외로워서, 아버지의 무게 다른 걸음 소리가 가슴 아파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아버지께 사랑한다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빠! 제가 아버지의 딸이라서 자랑스럽고 또 사랑합니다!”

산타가 되신 나의 아버지

최상진 27세. 유니온프레스 기자

박수근 작 <골목 안>

Oil on Canvas. 80.3×53cm. 1950년대.

매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아버지 생각이 가슴에 가득해집니다. 유치원도 다니기 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머리맡에 놓아 있던 케이크 하나. 산타가 없는지조차 모르던 꼬마는 로봇 대신 케이크를 놓고 가던 산타를 원망했지요.

아버지께서는 “산타 할아버지는 못된 일을 많이 하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고, 조금만 착한 아이에게는 과자나 로봇을, 가장 착한 아이에게만 온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주는 거야” 말씀하시며 매년 저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던 여섯 살 무렵의 크리스마스, 속셈 학원 원장님과 나타난 산타 아저씨는 제게 이순신 전기 한 권만을 주고 가버렸습니다. 위인전을 손에 쥔 어린아이는 ‘내가 그동안 착한 일을 덜 해서 아버지도 아프시고 케이크도 안 주나 보다’ 하며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산타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물을 나눠줄 산타가 부족했는지, 아버지까지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저는 새벽에 케이크를 선물해주던 이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께서 동생 세진이의 머리맡에 장난감과 책을 놓고 잠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세진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세진이가 물었습니다.

“형, 착한 일 많이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다 주는 거야?” “그럼. 너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봐.” “아빠 만나는 거.”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랑 선물 나눠주러 다니느라 바빠. 다른 거 말해.” “없어, 그럼.”

세진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동생의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동생이 너무 안타까워 다음 날 어머니랑 세진이 몰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써놓으신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아버지가 홀연히 가족을 떠나간 지도 이제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아들은 어느새 군대를 제대하고, 기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4살배기였던 둘째도 예비역 복학생이 됐을 만큼 훌쩍 자랐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아버지의 몫까지 해내야 한다고 다짐하며, 야간학교 교사 생활도 하고, 심리학을 전공하며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했습니다. 주변에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앞장서 달려가고, 사회의 불의를 놓치지 않고 취재해왔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산타가 되어 무료 공부방 아이들을 찾아가기도 했지요. 아버지처럼 케이크를 사들고 말이지요. ‘너희들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들이구나’라는 멘트도 잊지 않고 써넣었습니다. 7천 원짜리 귤 한 박스를 내려놓기 무섭게 몰려들던 아이들. 단지 귤 3개를 받았을 뿐인데도 더없이 행복해하던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이 울컥 났습니다.

내가 겪은 과정을 이 아이들도 그대로 감내해내야 할 것임을 알기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지만,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내가 그들의 산타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나의 영원한 산타이신 아버지…. 어느덧 장가갈 나이가 되어버렸건만 아직도 아버지의 손길이 그립기만 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목소리

박도 67세.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저자

아들아, 오늘은 몇 년 전 함께 망가진 화단을 손질하던 순간이 떠오르는구나. 뒷산 기슭에서 너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흙을 퍼다 날랐지. 나는 네가 흙을 담아 재빠르게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의 성장에 뿌듯함과 함께 나도 이제 늙어 내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는 서글픈 두 마음이 교차했었다.

아버지도 군 복무 때는 완전군장을 하고 밤새 행군을 해도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양동이로 흙을 나르며 한두 번은 쉬어야 되는 체력의 노쇠함에 숙연해졌다.

30년 넘게 중고교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을 이야기한다. 나 또한 너희에게 “세대 차이가 난다” “나는 아빠처럼 안 살 거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섭섭했으나 곧 그것이 인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긍정으로 이해하였다. 집안이 잘되려면 자식이 부모보다 나아야 되고, 나라가 융성하려면 자라나는 세대가 구세대보다 나아야 한다. 어차피 다음 세상은 너희 것이기에.

박수근 작 <맷돌질하는 여인>

Oil on Hardboard. 21.5×27cm. 1940년대.

너희의 예리한 눈으로 볼 때 아버지를 비롯한 기성세대의 삶이 못마땅하고 모순덩어리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를 건전하게 비판은 하되 부정하지는 말아라. 아버지와 대화가 안 된다고 피하지만 말고 한 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아버지에게 접근해 봐라.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고 다가가면 아버지도 반갑게 너희를 맞을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때, 아버지는 가장 삶의 보람을 느낀다. 아버지는 누구냐? 아버지는 너희에게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다. 너희가 나무라면 아버지는 뿌리다.

“아버지는 백 사람의 스승보다 낫다”고 한다. 이는 자녀에 관한 한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세대가 다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동안 나는 무슨 일이 그리도 바빴는지 너희에게 밥만 갖다 주는 아버지에 지나지 않았구나.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우선 너희에게 풍족하게 해주려고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한 점을 솔직히 사과한다. 아이들은 밥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데 너희에게는 밥만 있었지 진지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 같다. 뒤늦게나마 너희 남매에게,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구나.

아버지는 고교 시절, 집안이 어려워 타지에서 홀로 신문 배달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었다. 그때 아버지는 객지에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자주 편지를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편지글에는 늘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 사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글귀가 아버지로서 책임을 회피한 말로 들려 무척 짜증스러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매번 빠짐없이 그 글귀를 써 보내셨다. 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그 글귀가 적힌 편지를 수십 번은 더 받았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내게 그런 글을 보내주시던 아버지가 이승을 뜨신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내가 새삼 지난 얘기를 들추는 것은, 앞으로 너희에게 부닥칠지 모를 ‘젊음의 뒤안길’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다.

젊음의 뒤안길이란 ‘인종(忍從, 묵묵히 참고 따름)의 인생길’로 젊은 날의 방황과 시련, 고뇌를 말한다. 어느 분야든지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대부분 젊음의 뒤안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또 그런 길을 거쳐 온 사람들은 웬만한 역경에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단다. 그분들이 정상에 오른 것은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딸들아, 아들들아, 내일을 준비하는 젊은이가 되라. 어차피 다음 세상은 너희 것이다. 이 세상은 네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네 운명이 달라진다. 이런 세상에서 네 꿈을 한번 멋지게 펼쳐라. 너를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에 참으로 위대하다. 그렇기에 아무렇게 살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 삶이기에.

 

아빠와의 추억, 다시 만들어가려고요

장희지 25세. 직장인. 대구시 북구 고성동3가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저녁이 지나도 밤이 되어도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여쭤보니 모르겠다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신다.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엄마는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 1주일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글썽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동생과 아빠랑 산에 올라 산책을 자주 했다. 무슨 이름 모를 꽃도 보고, 운동도 했다. 산에서 내려올 땐 100원짜리 요구르트를 나와 동생에게 사주시고 아빠는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항상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갔다.

가끔은 자전거로 등교도 시켜주셨다. 충분히 걸어서 가도 된다 해도 아빠는 자전거 뒤에 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은 어릴 때가 전부였다. 늘 함께 있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어느 순간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10월 17일 토요일.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아빠는 손가락 하나를 못 쓰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다며 내게 양말을 신겨 달라고 했다. 아빠에게 양말을 신겨 드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순간 내가 그동안 아빠께 해드린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안경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항상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셨고, 야근도 자주하셨다. 그렇게 일해서 삼 남매를 키우셨다.

박수근 작 <모란>

Oil on Canvas. 40.9×53cm. 1960년대.

하지만 나는 항상 아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른 가족이 재밌게 TV를 보고 있는데도 아빠가 보고 싶은 것으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아빠, 가족들의 의견에는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 아빠.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생각했다.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아빠를 보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고 있는 피붙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지금껏 버텨왔을 아빠가 보였다.

가족을 위해 아끼기만 했던 아빠. 아빠의 작고, 초라해진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아빠의 헌신과 희생으로 나는 자랄 수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었다. 아빠의 입원을 계기로 아빠를 보려고 찾으려고 노력하는 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퇴원 후 아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장녀로서 나도 그렇게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지만, 아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았다. 휴대전화 문자 쓰기, 컴퓨터 타자, 인터넷 검색하는 것도 가르쳐 드렸다.

그 후 2년이 지났다. 이제는 퇴근 후에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간혹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셔도 우리 아빠만의 특징이라 생각하며 가벼이 웃고 지낸다.

어느새 아빠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마음의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아빠가 오래오래 사셔서 못 해본 것 많이 해보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열심히 돈도 모아서,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많이 시켜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