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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빔밥유랑단’ 전 세계인들에게 비빔밥을 알리다

강상균 32세. 비빔밥유랑단 단장

2010년, 서른 살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직장 생활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뭔가를 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나이.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일까? 너무 늦기 전에, 무언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같은 뜻을 공유한 다섯 명의 젊은이가 모였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다. 우리의 것을 세계에 제대로 알려보면 어떨까? 고민하던 중 ‘비빔밥’이 떠올랐다.

흔히 “밥 한번 먹자”라는 이야기를 한다. 밥 먹는 자리는 곧 나눔의 자리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비빔밥은 최고의 기내식으로 꼽혀 머큐리상을 수상할 정도로, 세계적인 웰빙 트렌드에 맞는 우리 음식이었다. 음식이라는 것을 통해, 세계로 나가, 세계를 배우고 세계와 소통하고 싶었다.

우리는 비빔밥을 제대로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주비빔밥 명인 1호이신 김년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비빔밥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더욱 생겼다. 비빔밥에는 시금치, 당근, 계란… 등 건강에 좋은 재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된다. 미국 뉴트리라이트 건강연구소의 샘 렌보그 박사는 비빔밥을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음식이라며 칭송했을 정도다. 또 비빔밥은 완벽한 컬러푸드 음식이다. ‘컬러푸드 이론’에 따르면, 균형 잡힌 영양을 섭취하려면 다양한 색상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비빔밥은 그 요건을 만족한다. 게다가 비빔밥은 조화와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렇게 8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1년 4월 5일 우리는 드디어 중국 북경으로 출발했다. 아시아와 유럽, 북미와 남미의 주요 도시를 돌며 100번의 시식회를 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상세한 계획까지 세우기는 어려웠지만, 한 가지 원칙만은 정했다. 한 그릇, 한 그릇 정성껏 준비해서 외국인에게 보여주자는 것, 한 분이라도 비빔밥을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비빔밥유랑단입니다. 비빔밥이라는 한국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무료 비빔밥 시식회를 열고 있습니다.”

중국 북경의 첫 행사. 비빔밥을 중국인들에게 드리며, 어떤 음식인지 설명했다. 그렇게 중국, 태국, 인도 등 아시아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유럽으로 이동했다.

비빔밥의 인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너무 맛있어요” 하며 심지어 네 그릇까지 드시는 분도 있었다. “비빔밥 어디 가면 먹을 수 있냐?” “고추장 어디서 살 수 있냐”는 질문도 많았다. 그런 외국인들을 보면서, 기쁘고 보람도 많이 느꼈다.

물론 처음 이삼 개월은 보람보다 힘든 게 훨씬 많았다. 하지만 하나씩 이겨내고 나아가면서 탄력이 붙었다. 비빔밥을 완성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재미도 늘어났다. 그리고 우리만의 비빔밥 레시피도 점차 확정되었다.

처음엔 비빔밥의 맛이 나라마다 달라지는 것이 문제였다. 야채의 경우, 그 나라에서 직접 구입하는데, 나라마다 재료의 특성이 다 다르다 보니 맛도 다른 것이다. 구할 수 없는 재료도 있었고,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비싼 것도 있었다. 또 고사리는 외국에서는 독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생전 처음 비빔밥을 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재료가 뭔지를 궁금해하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먹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우리만의 레시피가 체계화되었다. 표고버섯 대신 현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구하기 쉬운 송이버섯과 시금치, 계란 흰지단, 노란지단, 무나물, 애호박, 당근, 소고기. 이렇게 8가지였다. 이것은 전 세계 어디나 익숙한 재료들이었다. 외국에는 채식주의자들이 많아, 소고기를 넣지 않은 것도 준비했다. 고추장은 취향에 맞게 뿌려드리고, 매운 것을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간장레몬소스를 만들었다.

스페인, 프랑스, 체코, 이탈리아, 브라질…. 우리의 시식회는 계속 이어졌다. 단체나 기관을 섭외하여 하는 행사와 게릴라식 행사, 때로 홈파티를 한 적도 있었다. 홈파티는 소수지만, 깊이 있게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한번은 L.A에서 뉴욕타임즈가 주최하는 ‘The Taste’ 푸드페스티벌에 참가를 했다. L.A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각자의 음식을 소개하고 맛도 보는 행사인데, 비빔밥이 제일 인기가 있어서 뿌듯했다. 그곳에서 비빔밥을 드신 분이 다음에 또 하자고 해서, 섭외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빔밥의 세계화 가능성’을 점점 확인해갔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은 “샐러드는 건강에는 좋지만 먹고 나면 먹은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비빔밥은 샐러드 같으면서도 식사로도 적당한 것 같아서 자주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12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99번째 행사를 하고, 드디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12월 29일 서울 홍대에서, 마지막 100번째 행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255일, 23개 도시, 100회에 걸쳐 약 8,770인분의 비빔밥을 알린, 유랑단 1기의 활동은 끝났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니, 무엇보다 우리가 내뱉은 말을 다 지킬 수 있었다는 게 뿌듯했다.

그러면서 도전은, 성공에 대한 자신감뿐 아니라, 진실로 우러나오는 마음, 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외의 다른 것은 포기하고 오직 그 일에 모든 걸 투자해야만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비빔밥유랑단을 준비하면서 일년 내내 비빔밥만 생각했다. 비빔밥을 알리는 데 나의 모든 역량과 시간을 썼다. 어떻게 비빔밥을 잘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 생각만 하고 움직이니 자연스레 지혜가 생기고 길도 열렸다. 그렇게 몰입하여 진행했기에, 가기 전의 나와 갔다 온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진짜로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2기 유랑단을 모아 떠나려 한다. 2기는 더욱 발전된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내가 느낀 비전과 희망, 도전 정신을 심어주고 싶다. 그것이 바로 비빔밥의 힘이니까.

우리는 비빔밥을 먹고 자란 대한민국의 젊은이다.

비빔밥유랑단원 왼쪽부터,

정겨운(29), 김수찬(27), 김명식(32), 강상균(32), 박현진(23)이다.

직장인 네 명이 각자 퇴직금 1,500만 원씩, 학생인 현진이는

1,000만 원을 내 초기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 문화체육관광부와 해외문화홍보원, 스페인한국대사관과

CJ그룹, 아웃도어 용품 밀레, 한인회 등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plusminers.blog.me

이규혁 선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

20여 년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단거리 500m, 1,000m 대표 주자로 달리며 수없는 신기록과 메달을 한국에 안겨주었던 이규혁(35) 선수. 최근 그에게 또 한 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최고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를 가리는 세계스프린트(단거리)선수권대회 종합 2위와 더불어 전국동계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다섯번째 올림픽 도전 실패라는 아픔을 딛고, 나이 어린 쟁쟁한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체력적 한계를 극복한 도전이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언제나 스케이트와 함께였던 그의 삶, 그의 마음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2012년 세계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 남자 500m 경기. 모태범, 이강석 등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멋진 레이스를 펼친 선수는 다름 아닌 스피드스케이팅계의 ‘맏형’ 이규혁 선수였다. 현역 선수로서 은퇴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서른다섯이란 나이에 이뤄낸 성과이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언제까지 선수로 뛸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준비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하다”는 말처럼 그는 매 시합마다 최선을 다해왔다.

1991년 13세 때 ‘빙상 신동’이라 불리며 국가대표가 된 이후 1997년 한국 빙상 사상 처음으로 1,000m, 2001년엔 1,500m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7~2008, 2010~2011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금메달,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언제나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렇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스타로서 숱한 국제 대회를 석권해왔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올림픽 메달이다.

1994년부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 5번의 올림픽 무대에 도전했지만, 유독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하지만 선수로서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2007~2008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연속 1위를 한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메달 획득 실패 후, 사람들은 그가 선수 생활을 그만두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2011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종목별 세계선수권 우승에 이어 2012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도전은 선수로서, 한 사람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2011년 2월에 열린 제92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일반부 1,000m 경기에서 이규혁이 역주하고 있다. 사진_뉴시스

최근의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셨는데요,
체력적 한계는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약간의 거품을 뺐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열 번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못 해요. 그걸 다 하면 부상 내지는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니까요. 특히 이번 시즌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시즌 초반엔 어린 선수들에 비해 좀 부족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예전 같으면 거기에 많이 연연해하고 못 견뎠을 텐데, ‘아, 이 친구들이 나보다도 열 살이 어린데 같이 간다는 건 욕심이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걸 수정했어요. 전에는 국제 대회는 물론 선발전 모든 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서 스케줄을 빡빡하게 짰을 텐데, 이제 불필요한 건 버리고 원하는 대회에 맞게 준비를 해요.

스케이트는 0.1초의 시간 차이로 순위가 결정 나기도 합니다.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스피드스케이팅이란 빨리 도는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그 안에 테크닉이나 훈련 방법, 음식 조절, 휴식 등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단거리에서는 100분의 1초, 때론 1000분의 1초로 순위가 갈리니까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엄청난 훈련을 하죠. 매일 산을 뛰어오르고, 사이클에 무거운 타이어를 달고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바벨을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그 0.1초를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게 실력이기도 하고요.

처음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님이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셨고, 어머니는 피겨 국가대표셨다 보니 자연스레 스케이팅을 접하게 됐어요. 모든 스포츠가 선의의 경쟁을 하지만, 솔직히 남이 이기면 배가 아프기도 하잖아요. 근데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경기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승을 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더라고요. 저 선수 때문에 지는 게 아니라 내가 못해서 지는 거란 공감대가 있으니까, 그런 점이 굉장히 신사적으로 보여 좋았어요.

항상 경쟁하다 보니 스케이트를 즐겁게 타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지금도 경쟁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시합이 있으면 시합 전날까지, 오직 그 생각만 하거든요.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순간에도 그게 계속 떠오르기 때문에 시합보다 준비 과정이 더 힘들어요. 그 긴장감 때문에 지친다는 게 맞을 거예요. 근데도 하는 걸 보면 제가 단순해서인 거 같아요. 힘들어서 안 해야지 하다가 또 1등 하면 그걸 싹 다 잊고, ‘이 고통을 알면서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다가 시합이 끝나면 또 잊어먹고…. 기억력이 너무 좋으면 안 돼요. 단순하면 운동선수 할 수 있어요.(웃음)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당시, 모든 언론과 국민은 그를 주목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다섯 번째 올림픽 도전. 당시 33살의 나이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스피드스케이팅계에서는 환갑이라 불리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도전했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1,000m 시합에서 1분 9초 92의 기록으로 9위. 시합이 끝난 뒤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누구와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기자회견 당시 고백처럼, 그가 선수로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결국 올림픽 메달은 후배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밴쿠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후배들은 한결같이 그 공을 이규혁 선수에게 돌렸다.

시합에선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후배들에게, 스케이팅 기술부터 정신 자세까지 자신의 노하우를 기꺼이 나눠주면서 후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모태범 선수는 “규혁이 형은 나의 우상이다.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줬고, 내가 쓰는 주법도 형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말할 정도. 그래서 지인들은 그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 ‘대인배’라 부른다. 시합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그가 있었기에 후배 선수들에게 메달의 영광이 있었다”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라며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사실 국민들은 밴쿠버 올림픽 이후로 메달을 떠나 이규혁 선수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네티즌의 투표로 국민 감동 금메달도 받으셨잖아요.

진짜 너무 감사했어요. 공항에 수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나와 계시는데 어안이 벙벙한 거예요. 올림픽 메달을 제일 중요시하는 이유가 그 대회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기억하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저는 올림픽 메달 못지않은 과분한 걸 얻었다고 생각해요. 선수는 무조건 결과로써만 평가받는다고 후배들을 독려했었는데, 노력에 박수를 쳐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동받았죠.

밴쿠버 올림픽을 위해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었죠?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할 정도였죠. 그때는 뭐, 몸을 칼로 찔러도 안 들어올 정도로 단단하게 준비했고요.(웃음) 올림픽 우승 후보란 얘기를 듣고 싶어서 4년간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올림픽이 가까이 왔을 때도 우승권에 있었어요. 그 시즌 최고 기록도 갖고 있었고, 외국에서도 제 이름이 거론됐었죠. 아, 계획대로 왔구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만 주는 메달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먹고 자고 뛰고, 어떻게 쉬고,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고,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필요한지 이런 것까지도 다 계획 안에 있었죠. 그렇게 혼신을 다했기 때문에 올림픽이 끝났을 땐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나는 여기 지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했어요. 올림픽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2011년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이규혁(가운데)이 준우승을 차지한 모태범(왼쪽), 3위를 차지한 샤니 데이비스(미국)와 함께. 사진_연합뉴스

작년에는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는데요.

어머니와 동생이 피겨 선수다 보니까 어릴 때부터 피겨가 굉장히 궁금했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동생 때문이에요. 각자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제 마음은 안 그런데, 어떻게 보면 멀어졌다고 해야 하나? 어렸을 때는 되게 친했는데 어느 순간 저는 터프한 스포츠를 하고, 동생은 섬세한 스포츠를 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섭외가 왔을 때 첫 번째 조건이 동생이 날 가르친다면 하겠다,였어요. 만만하게 보고 처음엔 연습도 안 했어요. 스케이트 선수가 연습하는 게 웃기잖아요. 근데 그렇게 못 탈 줄이야.(웃음) 그 뒤로 낮에는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고, 밤에는 피겨스케이팅을 탔어요. 시즌 때처럼 살이 쫙 빠질 만큼 되게 힘들게 했어요.

남다른 예능감이 돋보였습니다. 예능에 출연하며 느끼신 게 있다면요.

처음엔 긴장했었어요. 민망함, 쑥스러움도 있었죠. 창피하지 않게끔만 하자 했는데 나중엔 재미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졌죠. 또 얻은 게 있다면 동생하고 많이 가까워진 거예요. 피겨가 어렵다는 걸 느끼면서 ‘아, 내 동생이 대단한 피겨 선수였구나’를 알게 된 거죠. 피겨는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못 따니까, 무시하는 맘이 있었거든요. 형으로서 정말 실수를 했구나, 동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였는데, 나도 선수이면서 보이는 걸로만 판단했구나. 동생한테 미안했어요.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이 있다면요.

어릴 때는 단순하게 내가 하는 게 최고의 스포츠고 올림픽을 우승함으로써 최고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패도 하면서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제가 만약 어린 나이에 올림픽 메달을 땄다면 그런 것들을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스케이트를 통해 뭔가 얻거나 생각하기 전에 일찌감치 은퇴해서 다른 일들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고, 인격적으로 많이 무너졌을 거 같아요. 우승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게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오랜 스포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죠.

이규혁 선수에게 스케이팅이란 무엇인가요?

제 삶이죠. 기억도 못 할 어린 시절부터 탔고 지금도 타고 있고, 다른 건 모르니까요. 힘들 땐 하루에도 몇 번씩 저한테 얘기해요. ‘너 왜 이거 하고 있냐?’ 그럼 ‘왜? 좋아하잖아’ 하고 답하죠. 해마다 다른 거 같아요. 작년의 우승과 지금의 우승은 다르고. 매번 상황이 올 때마다 저는 되게 간절히 원했고, 그래서 그걸 얻었을 때 성취감이 컸던 거 같아요. 그런 순간들이 제겐 되게 행복한 시간인 거죠.

그는 현재 3월에 열리는 월드컵 파이널과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를 목표로 훈련 중이다. 똑같은 트랙을 수십 번 수백 번 돌면서 그는 생각한다. 처음 스케이트를 탔던 순간의 겸허함, 우승했던 순간의 환희와 기쁨, 세상에서 제일 빠른 선수가 되고 싶었던 열정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선수들의 노력에 아낌없이 박수를 쳐준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마음이 되어 언제나 응원해주던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그것이 그를 오늘도 달리게 한다. 그것을 잊지 않는 선수이기에,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이다.

이규혁님은 1978년생으로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인 아버지 이익환씨와 피겨 국가대표 출신 어머니 이인숙씨 사이에 태어나 스케이트를 자연스레 접했으며, 13세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현재까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해오고 있습니다. 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4회 우승, 2011년 세계선수권 우승 등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그가 세운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통산 4회 우승은 아시아에선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한 대기록으로, 그의 열정적인 스케이트 인생을 말해줍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들입니다.

 

나는 소방관이다

신동철 35세. 서산소방서 119구조대

“몸 조심해야 돼.” 출근할 때면 아내는 늘 그렇게 이야기한다. 언제나 위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 소방관의 일이다.

“그래, 알았어.” 아내를 안심시키지만, 막상 위급한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몸을 사릴 겨를이 없다. 그냥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몸이 먼저 앞선다고 우리 구조대에서는 나를 행동대장이라고 부른다. 사실 구조 현장에서 내 안전을 위해 이것저것 따지면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장에서 몸을 사리면 오히려 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성경에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우리 구조하는 데도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야겠다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구해내면, 다음에 또 같은 상황에서 나만의 노하우가 쌓이고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004년부터 그동안 1,000번이 넘는 화재 현장과 구조 현장에 출동했다. 그리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힘을 합쳐 구해냈다. 정말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몇 년 전, 부탄가스 공장에 화재가 났을 때다. 화재 진압 도중 가스통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었다. 불을 꺼야 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그것이 자동적인 소방관의 본능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년 3월, 가야산 산불 진압에 나섰을 때였다. 산불이 크게 나서 비번이던 나도 긴급 출동되었다. 그런데 진화 작업을 하던 소방 헬기가 저수지로 추락했다는 속보가 들렸다. 급하게 달려갔는데, 헬기는 이미 두 동강 나 있었고, 저수지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물속으로 바로 들어갔다. 솔직히 구명환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지만 그것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차가운 물살을 헤치고 열심히 헤엄을 쳤다. 한 명을 구조하고, 다시 동료와 함께 나머지 한 사람을 가까스로 구해왔다.

이 일을 계기로 작년 말, 최고영웅소방관으로 선정이 되었다. 민망했다. 나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공적을 세우신 분들이 많은데, 너무 과분한 상을 주신 것이다. 누구나 그 상황이었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묵묵히 맡은 역할을 다하는 대한민국 소방관 3만7400명 모두가 영웅소방관이라 생각한다.

소방관이 되고부터는 매일 운동을 한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구조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아주 위험한 상황을 경험하고 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특히 사망자가 생길 경우, 우리가 조금만 빨리 출동했다면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사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소방 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노력하는 만큼 우리 후배들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리라 믿는다.

하면 할수록 소방관은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 어렵다 하며 피하는 일을 우리가 한다. 위험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몇 배의 행복과 보람이 있다. 사람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한다는 건 정말 멋지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반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싶다. 아들에게도 한 생명을 구하는, 돈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천생 소방관이구나 싶다.

 

신철 작 <여름밤의 꿈> 캔버스 위에 아크릴. 31.8×31.8cm. 2011.

 

나는 위기의 인문학도다

윤보라 25세. 취업 준비생.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처음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을 다닐 때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든 처음 본 사람들이든, 내 전공을 듣고 나서는 백이면 백 이런 말을 했다.

“국문학 배워서 뭐 먹고살 건데? 요즘 인문학 전공해서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아?”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머릿속에 생각이 있어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 일쑤였다. 교양 수업으로 평소 관심 있었던 철학이나 종교학, 예술사 수업을 선택해 들을 때도 주위 친구들은 배부른 생각 그만하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실용적인 과목을 들으라 충고했다.

나 역시 때때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걸까? 늦기 전에 전과를 해볼까?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교양을 찾아볼까? 그러면서도 인문학 관련 수업과 인문학 서적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홀로 마운드 위에 서 있었다.

2회 초, 내 인생은 너무 일찍 홀로 감당하기 힘든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머리를 싸쥐고 쓰러지셨다. 어머니께서는 건강이 나빠져 교외의 병원에 요양차 입원 중이셨다. 남동생은 고3 수험생이었다. 나는 대학교가 있는 아산에서 집이 있는 안양까지 매일 통학하며 공부를 하고, 집안일과 가족을 돌봐야 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내적인 상황이었다. 외면하려 해도 현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 환경에 대한 열등감 등이 한 번씩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고, 그럴 때마다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있는 힘을 다해 전력투구했지만 단 하나의 공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지 않았다. 불행이라는 견고한 타자는 볼을 골라내며 조소를 흘렸다. 9회 말까지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순간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타자를 향해 데드볼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마운드 위에 서 있다. 다시 홈런을 맞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2회 말을 향해 가고 있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도, 서럽게 울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어설프게 동조하지도 않는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 위기와 상관없이 꿈꿀 수 있게 한 것은 4년의 대학 공부에서 쌓은 인문학적 정신 때문이라고. 강의 시간에 배웠던 인문학 속에는 내 고통을 후벼 파는 정직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 안에 깃들어 있었던 참다운 인문정신은 얼기설기 대충 꿰매어 놓은 내 곪은 상처를 날카로운 메스로 터뜨리고 그 내용물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진정한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이 아팠지만 참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 수업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었다. 어느 순간 머리가 서서히 차가워지면서 다시 스트라이크 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인문학 전공해서 뭐에다 쓸 수 있냐’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없는 시대, 너도나도 실용과 스펙을 외쳐대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많은 친구들이 쫓기듯 살고 있고, 작은 상처에도 크게 아파하며, 쉽게 좌절하고, 어설픈 자기 연민이나 위로 속에 빠져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잃어간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위기의 인문학도가 아님을 느낀다.

고통과 위기가 없는 삶은 없다. 내 키를 훌쩍 넘기는 불행을, 위기를, 나는 잡아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문학은 불행과 위기의 순간을 담담하고 유연하게 관찰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흔들리지 않는 마인드 컨트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삶을 살면서 위기가 서 있어도, 불행이 서 있어도, 직구를 던질 수 있는 힘을 길러준 것이다. 이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스펙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그 고통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통찰과 지혜를 겸비한 나는, 기회의 인문학도다.

 

신철 작 <기억풀이_ Be Happy>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0.

 

나는 발명가다

현태섭 19세. 충남 논산시 연산면. blog.naver.com/xotjq2006

중학교 시절, 나는 소위 ‘문제아’였다.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피웠다. 가정적으로 불우한 환경의 영향이 컸다. 어떤 것도 하기 싫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처음엔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어떤 아이와 시비가 붙어 싸웠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는 아이들과 싸우고 싶지도, 학교에 부모님이 소환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그동안 내가 힘들게 했던 나의 가족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혼자 방 안에서 울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물건 같은 것을 만들어, 아이들을 괴롭히곤 했었다. 그래서 많이 혼났지만, 선생님은 한편으로 내 창의성을 인정해주셨다. 내가 철이 든다면, 그 손기술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발명 동아리에 들어갔다. 처음 과제는 주변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개발해오라는 것이었다.

어떤 게 좋을까 생각하던 중, 우연히  바람이 가득 차 날아가고 있는 비닐 봉투를 보게 되었다. 그때 ‘아, 비닐 봉투나 바구니가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스타킹과 펀칭기, 고무 조각, 작은 갈고리 등을 이용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팽창의 정도를 정할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동아리 스승님은 극찬하셨고, 지역 공동 발명 영재에 지원해보라 하셨다. 그렇게 영재 시험에 합격한 이후, 나는 계속 발명을 해나갔다.

책상 속에 넣어둔 교과서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일반 책상을 보안 책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장치, 점선을 쉽게 그릴 수 있는 필기구 등 20여 종류의 생활 발명품을 만들었다. 가끔 코피를 쏟기도 하고 몸살에 걸리기도 했지만 ‘발명’을 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그 결과 46건의 산업재산권(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실적과 현재 아직도 대기 중인 1,400여 개의 아이디어가 있다. 발명을 한 2년 동안, 발명 대회에서 많은 수상도 했다.

나는 더 큰 세계로 진출을 시도했다. ‘마스터 현’이라는 닉네임으로 발명 블로그를 운영한 것을 시작으로, 현역 발명계 사업에 지원하여 한참 위의 선배님들과 함께 강의 등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정말 현역 발명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발명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하여 현재는 현역 발명가로써 활동 중에 있다.

나는 발명가다. 나는 열정적으로 기존의 것을 새롭게, 더 유용하게, 행복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게 발명을 할 때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발명은 ‘모두의 꿈과 희망, 행복을 만드는 창조’라고 생각한다.

발명을 함으로써,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지금은 내일을 바라보는 내가 되었다. 발명은 ‘문제아’라는 손가락질을 칭찬과 격려로 바꾸어주었다. 이제는 나의 재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발명품을 만들고자 한다.

누구나 각자의 어려운 시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이것을 역경으로부터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래전, 강의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자들이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들은 수많은 고난과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 좌절과 고난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야말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신철 작 <date> 캔버스 위에 아크릴. 70×140cm. 2011.

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들입니다.

 

나는 싱글맘이다

유인숙 52세. 보험설계사. 서울시 송파구 가락2동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진짜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속물처럼 돈 많은 것만 부자인 줄 알았다.

결혼 4년 차인 어느 날 나는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은, 모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좇아 집을 나갔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때까지 나에게 하늘은 남편이었다.

남편이 없는 빈자리는 너무나 커다란 구멍이 되어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5남매 중 막내로 귀하게 자란 말하자면 공주과였다.

내게 가장이란 무거운 짐은 고통이었다. 옆에는 6살짜리 딸과 3살 난 아들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었기에 선택을 달리할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던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네 옆에 놓인 보물을 보라.’ 거기엔 예쁜 우리 아기 둘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싱글맘이 되어 열심히 살자 다짐하고 전쟁터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보험 아줌마.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아이 키우는 데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처음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실천했더니 나에게도 나를 믿어주는 고객이 생겼다. 그때부터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결국 회사에서도 고객들한테도 인정받는 설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학원을 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그때 꿈나무학교라는 방과후학교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 아이를 맡기고, 낮에는 보험회사로 밤에는 목욕탕 청소를 했다.

처음엔 배신감에, 분노에 쌓여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상 살인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매일 매일, 순간 순간 기도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미움과 분노는 사라질 줄 모른 채 세월은 갔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을 보낸 어느 날 새벽기도 중 또 하나님은 나에게 평안을 주셨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나를 위한 것이구나 깨달았다.

그 사람이 떠나간 지 15년 정도가 흘렀다. 지금은 우리 셋을 버리고 간 그 사람이 고맙고 감사하다. 그런 상황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싱글맘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속에 잠재하고 있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해갔다.

일을 하며 틈틈이 사회 활동도 했다. 갑자기 집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무허가에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시민연대 활동을 했다. 나 같은 여건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 재우기도 한다. 지금은 지역아동센터 운영위원장, 시민연대 강동송파 대표를 맡고 있다. 이제 ‘구의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직을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에게 이런 가능성이 있는지 나도 몰랐다.

그 사람에게 또 감사한 것은 귀한 보물단지 둘을 모두 나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춘기도 무사히 넘기고 지금은 모두 20살이 넘은 성인이다. 내가 주부로만 있었으면 “엄마가 뭘 알아” 하고 지금쯤 대화도 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은 나에게 “우리 엄마 최고”라며 모든 문제를 상담한다. 그럴 때면 가슴이 뛰고 행복하다. 다른 누구보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가장 행복한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위자료를 제일 많이 받은 여자라고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유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신철 작 <기억풀이_꽃잎이 피면은> 캔버스 위에 아크릴. 80.3×130.3cm. 2012.

 

나는 라스베가스 DJ

스티븐 오버그(Steven Oberg) 33세. DJ.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 거주

붐붐붐붐. 나는 라스베가스 DJ다. 나는 내 일을 무척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듯 라스베가스는 오락과 유흥의 세상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매력적인 사람들이 인상 깊은 음향과 화려한 조명 속에서 밤마다 재미난 일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곳에서 DJ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영광이다.

내가 DJ세계에 첫발을 들인 것은, 1999년이었다. 나는 DJ들의 멋진 솜씨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대중들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 같았다. 사람들은 DJ란 이유만으로 모두 그들을 좋아해주었다. 강인하면서도 늘 자신감에 넘쳐 보이고, 삶을 즐기는 듯한 그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2년 정도 열심히 연습한 뒤에 마침내 직업으로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기술이 늘었다는 걸 느꼈다.

점차 좌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과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참 놀라운 일도 경험했다. 설명하기는 좀 힘든데, 공연을 하면서, 다음 곡이 그냥 마법처럼 내 마음속에서 튀어나온다. 난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그 음악을 튼다. 그러면 그 음악은 항상 분위기에 잘 맞는다. 정말 완벽히 맞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항상 나의 곡 선정을 칭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이론은 이런 것이었다. 클럽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의 의식을 만들고, 비언어적인 소통을 통해 내게 다음 곡을 말한다. 마음과 마음끼리의 연결, 이러한 경험은 궁극적인 마음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DJ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걸 좋아했던 나에겐 딱 맞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에겐 아주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나의 자존심과 열등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늘 고도의 긴장 상태로 DJ를 시작한다. 손은 땀으로 축축해진다. 게다가 난 최고여야 하니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주 자신감 넘치듯 보인다. 미국에서는 “긴장되더라도 그 모습을 절대 보이지 말라”는 풍토가 있다. 어쨌든 이런 극도의 긴장은 조금 지나면 사라지고, 쇼가 매끄럽게 진행된다.

진짜 문제는 밤을 벗어나면 시작되었다. 밤은 거대한 환상의 세계였다. 그 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다. 그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언제나 방황했다. 나의 자존심과 열등감은 극명히 드러나, 언제나 인정받지 못한다 여겼고, 대화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인간관계가 힘들었다. 행복하지 못했다. 언제나 즐거움을 주는 DJ. 근데 왜 현실에선 나는 행복하지 못할까? 왜? 왜? 왜?

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방황을 하던 중, 우연히 마음수련 안내 책자를 보게 되었고 쭉 읽어본 후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 모든 것의 해답이다!!”였다.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나를 감동시키고 해답을 안겨다 줬는지, 정말이지 내 심장과 내면의 자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여태껏 몸부림치고 있던 방황과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어쩌면 DJ 생활을 하며 느꼈던 묘한 마음의 현상들이 마음수련에서 이끄는 목적지인 무한대 순수 우주 의식을 알아챌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 같다.

나는 현재 1년째 마음수련을 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믿지 못할 정도로 난 많이 바뀌었다. 나도 믿기지 않는다! 나는 지금, 전에는 전혀 없었던 인생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은 하나이고 그 하나인 세상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야말로 최고다.

이제 곧 다시 라스베가스로 돌아간다. 아마 저녁과 주말엔 DJ 일을 하고 오후에는 라스베가스 수련원에서 마음수련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마음 버리기를 해서 참에게 찾아가기를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나의 이름도 DJ Steven Jaye에서 DJ Helper(도우미)로 바꿀 것이다.

“나는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행복함을 사랑한다!” 이제 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닌, 진짜 세계에서, 진짜로 행복과 즐거움, 사랑을 전하는 라스베가스의 진짜 DJ Helper다.

 

신철 작 <기억풀이_안녕하세요>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0.

 

나는 79세 직장인이다

장래원 79세. 대구시 북구 관음동

내가 일하는 곳은 대구 달서시니어클럽 한마음한손 사업장이다. 노인들이 모여 자동차부품 고무 밴드 끼우기, 식품 봉합하기 등의 일을 한다. 나는 부장을 맡고 있는데, 66세 동생부터 81살 된 형님까지 계시다.

보통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면 일을 마친다. 우리 작업장에는 항상 웃음이 그치지를 않는다. 단순한 일이지만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다들 굉장히 좋아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일할 수 있다는 것, 일터가 있다는 것,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고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만 해도 건강을 되찾곤 한다.

한번은 딱 보니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왔다. 나이도 너무 들어 보였고, 며칠 못 살 것 같은 얼굴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떻게든 일하고 싶다 하여, 일을 하게끔 해주었다. 내심 이삼 일 하다 못 나오겠지 했는데, 열흘 한 달이 넘도록 일을 하는 것이다. 점차 병색이 사라지더니 완전히 건강한 새사람으로 변하였다. 일을 하며 청춘이 되살아난 것이다. 98세이신 할머니가 오신 적도 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분이었다. 늘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면서, 자기 딸 아들 뻘 되는 선배(?)들에게 쉬는 시간이면 커피를 돌리곤 하셨다. 자기를 내세우지도 않으며 항상 웃으시니 애든 어른이든 누구나 좋아했다. 이렇게 밝게 긍정적으로 사시니까 장수를 하는구나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었다.

부장인 내가 하는 일은 전체적인 관리다. 물건 입출고, 각자의 일을 조정하고, 하루 동안 한 일들을 개개인별로 통계를 낸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을 하면서, 언제나 직원들을 격려하고 친절하게 하려고 한다. 그런 위치에 있다 보니, 더 맑은 정신을 갖게 되고 건강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 것 같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74세 때였다. 시니어클럽에서 사업장을 내기로 했을 때, 네 사람이 함께 개업을 했다. 시니어클럽은 정부에서 지원받아 작업실 운영을 해주고, 우리는 일한 만큼 월급을 가져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처음에 한 일은 커튼 고리를 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격도 싸고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자동차 부품 업계 등 연락이 오는 업체들이 늘어났다. 점차 사람을 모으고, 2호점을 냈다. 그리고 3호점, 4호점으로 늘어나 5년 사이에 17개 사업장, 1,070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7개 업체에서 물건을 대주어, 항상 일이 많다. 힘없는 노인들이라고 해도 열심히 하니, 2011년 한 해 동안에 매상 올린 게 4억9천4백만 원이다. 이렇게 우리 달서시니어클럽 일자리가 부흥되고 성장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처음에 일을 하러 오는 노인들에게 꼭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이 나이에 뭐하겠어, 그러지 말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고 일을 하자고 한다.

칠십 넘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정부 기관에도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사실 이런 일자리가 없었다면 지금껏 살지 못했을 사람도 많다. 그렇게 일이란 중요한 것이다.

전국의 노인들에게 일자리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철 작 <나의 살던 고향은>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1.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9)

옛날 어느 마을에, 이가와 최가라 불리는 이웃이 살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에 한동네에서 태어났으며 형편도 비슷했던 그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가 도와주며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이가의 집으로 한 스님이 시주 공양을 받으러 옵니다.

이가는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쌀을 한 됫박 가득 쏟아주며,

최가네도 무탈하게 잘 살도록 해주십사 서원합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며 스님이 말합니다.

“당신들의 우애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소만, 직접 보니 참으로 갸륵하오.

내 여기 오기 전에 들린 최가도 똑같이 당신을 위해 서원하더이다.

당신들의 우애에 감동하여 내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오늘 밤 자시에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하나 빌어보시오.

부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위하는 최가는 당신보다 딱 두 배를 갖게 될 것이오.”

스님은 홀연히 사라지고 이가는 고민에 빠집니다.

집 한 채를 달라 하면 최가에게는 두 채의 집이,

논 백 마지기를 달라 하면 최가에게는 이백 마지기가 생긴다니,

왠지 선뜻 소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최가가 나보다 잘살게 되면 나를 무시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는 건 죽도록 싫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왜 최가에게는 두 배를 준단 말인가,

고민하고 상상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가 결국 보름달을 향해 빈 소원은 이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내 손가락 하나를 잘라주십시오.”

헉! 소원을 내뱉는 동시에, 이가는 화들짝 놀라며 꿈에서 깨어납니다.

 

 

꿈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끼고 위하는 척했던 그 위선이 꿈이라서, 참 다행입니다.

분노와 시기와 질투, 그 욕심이 세상에는 없는 꿈이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여 지금 내게 이런 류의 감정들이 있다면

이는 모두 없애야 할 허상입니다.

허상은 가짜이기에, 꿈이기에, 없는 것이기에, 생명이 없기에,

버리면 버려지고 없애면 없어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허상의 마음 다 없애고 나면, 우리의 실상이 드러나지요.

본래 하나인 우리의 참모습.

참으로 사랑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우리의 본모습 말입니다.

 

 

빼기가 대안이다

‘내 마음 안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니!’ 나쁜 마음 싹싹 비웠어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의 마음수련 이야기 (1)

이오남 40세. 충남 홍성초등학교 교사

교육대학 시절, ‘교육이란 인간의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고, 보다 바람직하게 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바로 내가 그 일을 해낸다는 설렘에 가슴 벅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교직 생활 10년이 넘도록 ‘아이들에게 남과 비교되지 않는 자신감을 갖게 할 수는 없을까?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지행일치를 어떻게 이끌어낼까? 교사가 억지로 끌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는 자발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은 늘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거리였다.

이에 3년 전부터 아이들의 근본적인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마음 버리기’ 활동을 교과, 재량활동, 특별활동 등 학급 운영 전반에 접목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지금까지 다짐하고 반성하고 후회를 되풀이하는 삶에서 벗어났으며 마음과 몸에 배어 있는 생각이나 습관을 하나하나 버림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우선 마음수련을 학급활동에 접목시키며, ‘부정’의 마음을 버려 ‘긍정’의 마음을 갖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공부, 친구에 대한 생각’ ‘두려움, 공포, 무서움에 대한 생각’ ‘스트레스, 부모님, 선생님에 대한 생각’ 등을 버리도록 안내하고 마음 버리기 전과 후의 소감을 ‘싹싹 비워요’ 공책에 적게 하여 아이를 이해하고 상담하는 통로로 활용하였다. 아이들의 수련 내용을 적극 수용하고 상담하여 자신의 마음을 거짓으로 숨기거나 꾸미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싹싹 비워요’ 공책 엿보기

▶ 오늘 아침에 친구에 관한 사진(기억)들을 꺼내어 버렸다. 친구에 관한 욕설, 싸움, 짜증, 화 등등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상쾌하고 편안하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많은 쓰레기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오면 내 마음속에 있는 쓰레기들을 되도록 다 버리도록 노력하겠다. _주○○

▶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많은 두려움들이 있는지 몰랐다. 항상 이런 것들만 보면 ‘싫어, 무서워, 안 돼!’라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도 꺼내어 써보고 마음수련을 하는 동안 더 생각나는 것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 괜찮다. _김○○

▶ 나는 맨날 성폭력 등을 당할까 봐 많이 걱정을 했었고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누가 올지 몰라서 무서웠다. 그리고 병원, 약, 유괴, 영화 등 때문에 겁을 먹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수련을 해서 맨날 걱정도 하지 않고 집에 혼자 있어도 겁을 먹지 않는다. _박○○

우리 아이가 마음을 비우니…

▶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의 마음이 ‘엄마의 생각보다 더 힘들었던 때도 있었구나’ 하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 생각, 동생들 생각, 속 깊은 아이지만 이해를 못해 주었던 부분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스트레스 많았던 부분을 참으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힘들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안쓰러우면서 대견스럽고 예쁩니다. 마음수련을 통해 아이의 생각을 알 수 있어 교육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보고, 아이 스스로도 마음수련으로 인하여 감정 조절이 될 수 있으면서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 같아 좋습니다. _이○○의 어머니

▶ 우리 아이의 불만이 부모한테서의 욕구 충족이 안 된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맞벌이 가정에 학교 다니는 엄마까지, 어른들부터 부정적인 것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마음수련’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네요. 좋은 길잡이인 것 같습니다. _박○○의 어머니

긍정적 자신감 회복, 마음이 편해져요

6개월 후 33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마음수련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87%’ ‘마음수련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78%’

‘마음수련이 친구를 이해하고 마음을 여는 데 좋은 영향을 준다 81%’ ‘마음수련이 자신감을 갖게 한다 82%’ 등

아이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긍정적인 자아관을 확립하여 자신감을 회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이 내용은 2010년 홍성초등학교 6학년 33명의 아이들과 함께한, 1년간 마음수련을 학급 운영에 적용한 결과로

2011년 전인학회학술대회 때 발표된 바 있습니다.

 

빼기가 나를 바꾼다

생리통도 마음의 병,

마음 비우자 사라졌어요

 

몇 년 전부터 부모님의 이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겹쳤다. 그러면서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다. 기분은 우울하고 불면증은 기본에다 신경성 위장염 등 말 그대로 내 몸은 ‘종합병원’이었다. 특히 생리통이 심했는데, 생리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해 며칠 후에는 제대로 걷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하지만, 30일 중 열흘 이상 아프다는 것은 한 달 내내 나를 지치게 했다.

한약도 지어 먹고 몸에 좋다는 약초도 달여 마시는 등 여러 처방을 해보아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진통제로 버텼지만 계속해서 먹으니 위장만 더 나빠졌다.

기본 체력도 안 좋은데 열흘씩 생리통으로 고생을 하니, 나중에는 직장도 그만두게 되었다.

이런 몸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자신감도 떨어졌다. 어머니도 생리통이 심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 내력이니 어쩔 수 없이 평생 감당해야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던 재작년 겨울,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일년 만에 훨씬 밝아진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동안 마음수련을 하면서 내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힘든 삶이 네 것이 아니다”는 친구의 위로가 마음에 와 닿았고 나는 곧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변 어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어렴풋한 기억들, 남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빼앗겼다 생각한 엄마의 사랑, 그래서 엄마를 원망하고, 남녀 차별에 대해 억울해했던 일들, 집안의 장녀라는 부담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

그 모든 마음을 버렸다. 엄마도, 동생도, 엄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도 많이 버렸다. 1주일이 지나면서 마음이 버려졌다는 것이 와 닿았다. 그렇게도 힘들었던 감정들이 다 없어지다니! 이런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참 감사했다.

한 달쯤 지나서부터는 몸에 매인 마음들도 버리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 생리통이 많이 줄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이 모든 병의 근원이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수련 과정을 마친 지금은 일상생활은 물론 직장 생활에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생리통도 사라지고 우울증, 불면증도 완전히 나았다. 그러면서 ‘나는 몸이 안 좋다는 마음’까지도 사라졌다. 아픈 몸 때문에 뒤처지는 것이 서럽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웠는데 ‘이제 나의 앞날에 내 몸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설마 그게 버려질까? 하면서 계속 마음의 병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마음들은 모두 가짜이기에 버리기만 하면 마음도 몸도, 건강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글 서혜은 31세. 직장인. 전북 군산시 미룡동

산천과 자연은 살았구나

       글, 그림 우명

산천은 푸르고 산골짝에는 옥수가 흐르구나

산골짝에 다람쥐가 놀라 달아나고 꿩이 날아가구나

이름 모를 새가 날아가고

진달래와 철쭉과 나무에는 흰 꽃이 피어 있고

다래나무에는 다래나물이 한량이 없구나

또 취나물이 있구나

산불이 날까 봐 불 끄기 위하여 뚫어놓은 도로가 있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산나물을 하러 봉고차로 가는 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절경이구나

겨우 차가 갈 정도의 길 따라

굽이굽이 돌아 산 정상에 이르면

봄기운에 산천의 아름다움은 간 자만 보기가 안타깝구나

도회지에 찌든 사람들은 그저 자연과 함께

마음이 없이 산나물을 하구나

모두가 사악한 인간마음이 사라지고

그저 그 마음이 밝기만 하구나

골짜기에는 너무 가팔라서 가지 못하나

물길 따라 가고픈 생각이 나누나

누가 살았는지 집이 허물어져 있고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는 가운데

내 마음은 살았던 이의 이유를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본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기운에

이 시간만은 오래 가지고 싶구나

아랫동리에는 골짝 골짝마다 마을이 있고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 살았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임진왜란 때 산속으로 도피하여 와서

너무나 산속이라 아직까지도 자동차도 가지 못하니

지금은 도회지로 거의 다가 나갔다고 하구나

골짝 골짝마다 흐르는 물은 너무너무 깨끗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물길 따라 생긴 바위와 돌들은

깨끗하기가 그지없구나

옛 신선이 살았다는 가야산 뒤쪽 산의 아름다움이었다

신선은 마음을 닦아야 신선이 되고

인간이 사악한 죄업의 마음을 사해야 된다는 것도

닦은 자만 알 것이고 신선 된 자만 알 것이다

수많은 세월 속에 인간사의 이야기가 곳곳에 많지만

옛인이 있었던 것은 후세가 있어서이고

간 이는 말이 없고 세상에 없구나

다 덧없는 인생사였구나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세월이 없이 그냥 사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나 있었으면 아직도 살아 있었을 걸

인간이 세상에 살지 않아

세상 나이만큼 그 영혼이 살지를 못하구나

주막집 막걸리집에서 한 잔의 막걸리를 마시며

신선 만드는 신선은 세상에 없었고

부처 만드는 부처가 세상에 없었고

또 성인 만드는 성인도 학교도 없었다는 걸

혼자 생각하여 본다

사람들은 가짜인 인간의 한세상에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현자는 세상의 한세상에서

세상 나이만큼 살려고 자기를 버리누나

그것도 고마운 일이구나

그것도 기특한 일이구나

인간의 삶이 부질이 없지만

진짜로 난 자는 진짜나라에 영원히 사니

인간이 이것 하러 인간으로 나서

갈 곳이 여기고 살 곳이 여기임을 인간이기에 모르구나

허상의 삶만 살고 있구나

안타까움에 막걸리만 한 잔 더 청하여 마시누나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 영역본과 일역본, 시집 등 다수가 있습니다.

To Fly with the Mind of the World

In Jae Lee 39, squadron leader and combat pilot

When I was in middle school, I dreamed of becoming a pilot. ‘If I could always fly…’ To become a pilot and fly in the sky was a fantastic dream. I joined the Air Force Academy, completed all the courses, and finally became a pilot.

Flight suited me well, but it was not what I imagined. Though I was flying, I could not enjoy the flight. There is no chance to take a break when I am flying. During a maneuver the jets can collide in a split second. If we are on a bombing mission, we have to pay attention every second to avoid crashing into the ground. One mistake can lead to death; we must always be alert every moment during training.

When a flight ends there is no time to rest. I must prepare for the next day, and learn and practice new skills. Pressure to develop myself, eagerness to be acknowledged, fear of accidents and complex relationships among people in such a large organization caused much stress. I was always busy and did not feel the work was rewarding. Deep in my mind I wanted to change myself.

Then one day I came across a book review in a newspaper for a book from Maum Meditation. The phrase ‘to find one’s true nature in one week’ attracted me. The next night I was on duty I read the book until daybreak. It was very compellingly written that one could find one’s true nature in one week; and I was convinced that if I could do so then changing myself would be possible.

I went to the closest local center and started doing Maum Meditation right away.

As a beginner, I recalled the memorized thoughts from my past, and I remembered an incident in my fourth year at the Air Force Academy. My classmates and I wrote letters about each other, and I was shocked to read what my friends wrote about me. Personally, I believed I was thoughtful and took care of the people around me, but almost all the letters from my classmates said I was very stubborn. It was a shock to realize that other people’s point of view of me was very different from mine.

People were right. I grew with a father who was a stoic philosopher. As the eldest son of a Confusion family, the strict and unchangeable concepts and customs of Confucianism were engraved in my personality. I should never harm others, and I persisted in what I thought to be right. When I was in high school, I left home and lived by myself either in a rented room or in a dorm. I had designed my life to become successful. I believed everything was the way it was because I was good. I did not have any gratitude towards my parents, siblings, friends or coworkers. I don’t know what was so great and good about me. All I had done was insist in my own mind world that I was right.

I was so ashamed. In my meditations I continued to throw away the mind world I had built. When I felt I finally threw away all, I heard a voice from my heart: ‘everything in my mind was falseness that I had made, and this universe is me.’ Also I realized my desire to fly was my thirst to find my true self.

I changed a lot after I was enlightened of my true self. Most of all, my direction and goal of life became clear: to clean my mind and throw away all of the remaining false mind, and to live as the mind of the universe which is my true self instead of the human mind. When the direction of life became firm, the worry, anxiety and stress felt so small, and I could easily escape from them.

My appearance changed a lot as well. When I was getting a new driver’s license, a receptionist could not recognize me from the photograph on the old license. I took the photograph when I was in the Air Force Academy. My face was stiff, eyes sharp and full of complaint. My school friends used to say I look like a gang member and told me to smile. As I threw away my mind that changed, my eyes, especially, began to have warmth. These days, people say I have a gentle look.

Though my life as a pilot was busy, I tried to keep on meditating. One evening, I was on a night flight. There was a large window right above the pilot seat so I could easily see the stars when I looked up. In the past, I did not have time to relax and enjoy the beauty of the sky, but at one point there was neither the jet nor me, there was only the sky. The sky was me, and I felt myself uniting with the sky very naturally. There is nothing more exciting than flying since I have become one with the clear sky. When we practice Maum Meditation and as our consciousness expands, the world becomes me and I unite with the world. That was the moment I truly realized that with my whole heart. Pilots attempt to unite with jets as we make a flight, but I could unite not just with the jet but with the clean sky. There was nothing more exciting.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a jet pilot is an accurate judgment during the flight, since the conditions in the sky changes every second. Moreover, having control over one’s mind in an emergency situation is very important. In the air, people have a hard time making a good judgment because humans were meant to live on the land. When an urgent situation happens on top of that, pilots are forced to react unconsciously. So Maum Meditation is very important for pilots.

In Maum Meditation, people can throw away even their unconscious mind, and they have a mind like the world all the time, so whatever condition they are in, their mind stays calm. My ability to react during a sudden change in flight improved and I became more relaxed in the air after I began Maum Meditation. The improvement is not due to another attempt to achieve more or add more; but it can be found only through the unique method of subtraction in Maum Meditation.

So I go to the meditation center every evening unless there is a special occasion that I can’t avoid. Though my daily routine is similar to that in the past, I who lived the routine have changed.

The I who bore stress has disappeared, and the true I, peaceful and free, lives.

God Is Complete And Lives Forever

Drawings and writings of Woo Myung

People live agonizing, and carrying burdens in their mind. The burdens of one’s mind are the minds he himself has made; they are the minds he has possessed. When one lives with those minds, he is uselessly busy and it brings suffering, because he must live as the pictures, the illusions, order him to live. Dear people, a human lifetime has so many trials and tribulations, and one who lives within them will find life tedious. He who lives within them will live in suffering and burden. There is nowhere for him to go, no matter how far he goes, and nothing is achieved, no matter how much he tries or does achieve, because it is a futile life that does not exist. The creations of the world are born, exist, and live, according to their conditions.

They are born by the mingling

and coming together of various things, so this exists because that exists, and that exists because this exists; namely everything is born according to the harmony of heaven and earth. If you look from the viewpoint of the origin, everything is the embodiment of the origin, and all things are the children of the origin. The source of all creations is the origin; the source of all creations is the original Jung and Shin. People have no significance or meaning, because they have made stories of the origin. He who has returned to the origin, to Truth, does not die, he is freedom and liberation itself, free from all affairs of life. The place of completeness where good and bad, hot and not hot, existence and non-existence of human affairs do not exist; the place that is beyond even life and death is the place of God, where everything exists as they are eternally, of and by themselves. Man can become God, when his old self, his self that is a delusion completely dies. Then only God remains, and he can be reborn as God.

God who is complete is alive as Jung and Shin, and when we are also reborn as this Jung and Shin we can live as God in the land of God. The land of God is completely free from human conceptions and habits; it is freedom, liberation, and wisdom, because one’s self, the illusionary person, does not exist. It is thus completion and the place free from human conceptions and habits. The place of God is not a material place, but it is the true metaphysical essence. There is absolutely nothing, yet Jung and Shin exist there, and to be resurrected and reborn as this Jung and Shin, one must die completely. It is a complete death only when his mind world and self is completely dead. If one gets rid of himself completely, the consciousness that does not die remains, and if one gets rid of himself completely, he can be born as this consciousness. Then this heaven and earth is the world that has been born anew, and this heaven and earth is paradise. He will live forever without dying in this heaven and earth.

To be complete is to be without death, and it is to be free from all intrusions. The existence that exists of and by itself is the complete existence. Man must be reborn and resurrected as this existence and he must live in the land of this existence if he is to be complete. The present exists because of the past, and the future exists because of the present. The life that man lives is a human one, and it is because he lives inside a limited period of time, that within it there is a past, present and future. In the world of God, there is no past, present or future; the past does not exist there because there is no picture world of the past, and one is simply the mind of God, which just exists. It exists just as it is. This existence is always the mind of one, and it is an existence that is alive. The world of this existence has transcended time and space, and although the world of this existence is alive,

and it is not within its actions.

There is nothing lacking in this world, and it is a place free from this and that. It exists, but does not dwell in its existence, and it is God because there is only the living mind of reality, and not illusions. It is the God of wisdom.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in 2002.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including World Beyond World an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which have been published in English. His other books, Where You Become True Is The Place Of Truth, Heaven’s Formula For Saving The World, The Living Eternal World, The Book Of Wisdom, Mind, Universal Order and The Enlightened World are in the process of being translated into English as well as Chinese, French, German, Italian, Japanese, Portuguese, Spanish and Swedish.

동네 노는 아저씨의 친절한 고민 상담소

 

대학교 3학년 여학생입니다.

성격이 활달해서 동아리 활동 등을 활발히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늦을 때도 많은데 부모님은 언제나 이른 귀가를 원하셔서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장녀라서 더욱 기대하는 바가 크셔서 그런 것 같아요.

엄마가 갱년기이신지 감정의 기복이 심하신 것도 안타깝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니 맞춰드려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답답합니다.

얼마 전 우리 동네 앞에서 큰 버스 사고가 있었습니다. 뉴스 기사로 늦게 소식을 접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중학생 아들 녀석이 받아서 식구들 안부를 물었습니다. 아빠의 노파심에 아들 녀석이 한마디 하더군요. “안양에 우리만 살아요?”

사춘기 아들 녀석 특유의 툭 던지는 말투였습니다. 저도 한마디 했습니다. “그럼 안드로메다 은하의 천체 충돌 기사에 아빠가 너희 걱정돼서 전화하리?”

일단 어머니의 갱년기 증상에 대해 말씀드리면 자식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부모님의 갱년기를 싸잡아서 얘기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춘기 때 모든 일을 사춘기니까,라고 싸잡아서 말할 때의 서운한 느낌을 기억하실 겁니다. 물론 갱년기 증상이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학생인 고민녀님이 장녀라면 밑에 동생분도 계실 테니 어머님은 아직 삶의 무게가 더 남아 있으신 걸로 보입니다. 갱년기로만 치부하지 마시고 어머님 어깨에 남아 있는 무게를 한 번 더 봐주는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고민. 고민녀님은 이제 성인이 되셨고 지금 본인 생각대로 바깥에서 여러 사람과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실 준비를 하셔야 되는 게 맞습니다. 그만큼 큰 그릇으로 자라셨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릇은 커졌지만 아직 강도 면에서는 상처 나고 깨지기 쉬울 땝니다. 부모 입장이란 게 그렇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화산 폭발보다는 동네 어두운 가로등이 더 걱정되고,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는 주식 그래프보다는 자식의 체온계 온도가 더 걱정되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분명히 어려운 갈등입니다. 그러니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부모님에게 믿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안양에 우리만 살아요?”라고 말한 아들 녀석에게 오늘 다시 대답을 해줘야겠습니다. “그래, 안양에 내 소중한 사람이 다 산다”라고요.

동네 노는 아저씨 백일성. 올해 나이 41세,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초딩 남매 그리고 1930년대생 부모님과 함께 한집에서 박 터지게 살고 있음. 3년 전 우연히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박 터지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됨. 2년 전에는 <나야나 가족 만만세>라는 수필집도 발간했음. 좌우명이라고 할 거는 없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들었던 말, “지랄도 많이 하면 는다~”를 한 가지 일에 꾸준히 하라는 말로 새기고 살아오고 있음.

김용경씨, 아프리카 탄자니아 마을에 우물 만들어주는 청년 사업가


취재 문진정

가뭄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땅 아프리카 탄자니아. 이곳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물입니다. 최근엔 가뭄으로 인해 상황이 더 나빠졌습니다. 시골에서는 20분씩 걸어가서 물을 길러오거나, 동물들이 서식하는 연못 물로 설거지, 빨래, 식수로 사용하다가 기생충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탄자니아에 작은 희망을 전하고 싶은 한국인 청년이 있습니다. 개인 사업의 수익금을 모아 일년에 하나씩 우물을 만드는 김용경(27)씨입니다.

대학에서 아프리카어를 전공한 김용경씨는 2008년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수하기 위해 탄자니아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1년 잘 보내다 가자’는 생각이었지만 현지 사람들과 함께한 몇 개월 동안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곳 사람들은 나쁜 쪽을 바라보지 않아요. 부족해도 항상 즐겁게 살더라고요. 저들보다 훨씬 더 풍족한 나는 왜 이렇게 불만이 많고 항상 뭔가에 쫓기며 살았을까. 이 사람들과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어요.”

용경씨는 길거리에서, 시장에서, 그들과 부대끼며 친구가 되어갔습니다. 점점 현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준 탄자니아에 무엇으로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현지인 친구 알렉스(31)의 제안으로 중고 의류 등을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하며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이다음에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이곳 사람들을 위해 우물을 파겠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동업자 알렉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돈을 벌게 되면’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있는 돈으로 함께 우물을 파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살자.”

둘은 곧바로 알렉스의 고향인 Masasi(마사시)라는 마을에 첫 번째 우물을 만들기로 합니다. 다른 단체의 도움 없이 낯선 나라의 한복판에 우물을 판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물 팔 돈 700여 만 원을 현지 업자에게 고스란히 사기당하기도 했지요. 실망이 컸던 용경씨에게 알렉스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돈은 더 벌면 되니까 그 일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자. 우리가 잃어버린 돈은 하늘에 저축한 거야.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아실 테니까.”

2010년 여름,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우물.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소도 잡고 춤을 추며 잔치를 열었습니다. 때로는 큰 손해를 보기도 하고, 말라리아로 며칠씩 앓아눕기도 하면서도 현지와 한국을 오가며 3년간 사업을 계속해오고 있는 김용경씨. 이런 크고 작은 고생을 ‘수업료’ 삼아 ‘어려움 속에서도 즐겁게 사는 법,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운 낙천적인 마음으로 세 번째 우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게 먼저인 거 같아요. 그러면 세상이 ‘샤방샤방’해 보이고, 저 자신도 스스로 바뀌더라고요. 지금은 우물 파는 걸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학교도 짓고 도서관도 만들고 싶어요.”



 

김용경님은 2008년 교환학생으로 탄자니아를 방문하면서 현지인들의 긍정적인 삶에 감명을 받습니다. 2009년부터 무역 회사를 운영하며 그 수익금으로 탄자니아의 시골 마을에 우물을 만들어주고 있는 그는 앞으로도 세상에 희망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