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스티벌은 언제였나요? 우리 삶은 늘 축제입니다.

일본 하나비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

안창규 37세.

다큐멘터리 <청춘유예> 감독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20대 청년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던 나는 학비도 벌고, 카메라도 마련할 겸, 일본 아사히신문 배달 장학생에 지원했고, 일본 가나가와현 아츠기시에서 2년의 일정으로 신문 배달을 하며 공부를 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고된 생활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생활한 지 17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신문 배달소 동료들과 함께 참가했던 하나비(불꽃놀이) 축제는 내 인생의 가장 뜻깊은 축제로 남아 있다.

그때 함께 갔던 배달소의 고토씨. 북해도 출신인 고토씨는 가족들을 북해도에 남겨 두고 이곳까지 와서 신문 배달을 하며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였다. 새벽 1시에 출근해서 신문에 전단지를 넣고 한정된 새벽 시간에 배달을 마쳐야 했기에, 10평 남짓한 공간은 16명의 배달원이 서로 말을 걸 틈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곳이라 서로에 대해서 이름만 알 정도였다. 일본의 신문 보급소는 삶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일본은 여름이 되면 전 지역에서 불꽃놀이 축제들을 시작하는데 내가 있던 곳은 2,000발 정도를 쏘는 하나비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일했던 보급소도 이날만큼은 하나비 축제를 잘 볼 수 있는 옥상을 빌려 고단한 신문 배달에 지친 배달원들이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한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고토씨의 나이를 물었는데, 많아야 30대 중반이겠지 했다가 중학생 딸을 둔 40대 중후반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고토가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잠시 멍해졌다. 흔히 신문 배달부 하면 일본에서도 밑바닥 인생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배달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나 자신조차, 내심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일본인 아저씨도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30살이 좀 넘게 되면 카메라를 메고 분쟁 지역을 다닐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아저씨가 전쟁이 좋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일본이 벌였던 태평양전쟁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그건 명백히 일본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내 딸들이 컸을 때는 전쟁이란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런 직업도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맥주를 들이키셨다. 헤어질 즈음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이렇게 함께 불꽃놀이를 봤던 걸, 죽는 그날 돌이켜보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거 같다. 국적은 다르지만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오늘 밤이 참 행복하다.” 그러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불꽃을 보며 소리치셨다. 나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그날 나는 한 명의 신문 배달부와 평범한 아저씨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나는 고토의 꿈이 무엇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40대 중반 한 사나이의 꿈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불꽃들이 춤추고 그의 얼굴에는 아름다움 꿈이 스며들어 있었다.

2004년, 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온 나는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카메라를 사고 2008년 대학등록금 관련 단편 다큐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란 첫 작품을 발표했고, 퍼블릭액세스 영상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고픈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비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지금도 힘겨울 때면 그의 말을 떠올린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스무 살, 브라질에서의

나의 성인식

김채현 23세. 대학생.

전북 익산시 모현동

누구나 그렇겠지만 스무 번째 생일은 내게 무척이나 특별했다. 단순히 ‘스무 살’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처음으로 우물 밖에 나가 더 큰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환상적인 축제와 함께.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덕분에 19살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당시 나는 교복만 벗었지 여전히 철부지 십 대 여자애였다. 가족과 몇몇 또래 여자애들 품속만 맴돌았던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나 환경을 접하면 부담감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이처럼 답답한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었던 나는 모 기업의 해외 봉사 활동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새내기 파워 하나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2010년 1월 말에 약 20명의 대학생과 한 팀으로 브라질에 파견되었는데, 그중 내가 막내였다. 운 좋게 합격한 나를 제외하고 우리 팀원 모두는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 모두가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음악에 소질 있는 한 사람이 유난히 멋져 보였다. 어릴 때부터 비틀즈를 무지 좋아해서 음악에 엄청난 환상이 있었던 나는 그 오빠 한 사람을 더 눈에 담아두었다. 우리 팀은 브라질 파견 기간 동안 비교적 사물놀이에 재주가 있는 10명만이 사물놀이를 공연하기로 했는데, 그 오빠는 그중에서도 꽹과리를 맡았다. 브라질에 있는 동안, 낮에 집 짓기 봉사를 할 때는 노래를 좋아하는 그 오빠를 위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밤이면 사물놀이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 가곤 했다.

그러다 나의 스무 번째 생일이 찾아왔다. 그날 그 오빠가 “생일 선물이야” 하면서 비틀즈 앨범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은 “네 오빠가 나보고 전해주라고 줬어”라는 그 오빠의 말과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오빠에겐 미안하지만 왜 이렇게 아쉽던지. 그날 밤 심란한 마음에 잠도 못 자고 밖에 혼자 계단에서 앉아 있었다. 그때 그 오빠가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그냥 생각이 많아서”라고 대답하자 오빠는 “그럴 땐 별을 봐야 해”라고 해서 같이 별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빠 눈에는 별이 많이 보였는지 몰라도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보였다. 자꾸만 커지는 그 오빠와 너무 작아진 내 모습만 보였다. 그때 갑자기 내 입에서 “오빤 콤플렉스 같은 건 없나요?”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빠의 대답. “콤플렉스라 생각 안 하면 그런 거 없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설렘이었던지라 그 설렘 아래 열등감도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빠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내 모습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파견 기간 끝 무렵, 우리 팀은 어느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했다. 객석 앞에 앉아 다른 팀원들과 공연을 보고 있던 나는 공연 중간에 한 번 ‘얼쑤’ 외쳤는데, 그 오빠가 웃는 모습이 좋아서 계속 ‘얼쑤!’ ‘좋다!’를 남발해댔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에 우리 팀 모두가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는데 타국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국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뭉클함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처음으로 더 큰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단순히 나이의 앞자리 숫자만 1에서 2로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스무 살로 변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른으로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느끼는 설렘,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에게서 열등감을 느끼며 괴로워할 수 있음을 나는 스무 살 생일 때 브라질에서 배웠다. 진실로 감사하게도 나는 그것을 너무나 특별한 경험 속에서 배웠기 때문에 남몰래 많이 속앓이했던 순간들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집과 친한 친구들 무리 속을 벗어나 조금씩 다른 세상에 발을 디뎌 나갈 수 있었다.

2010년 1월. 나는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다. 그것도 환상적인 축제와 함께.

영화 버킷 리스트

& 삶의 마지막 축제

윤영호 가정의학과 전문의,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 저자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말기 암 환자로 등장해 의미 있는 인생의 마무리를 보여준 작품이다. 두 사람은 돈만 좇다가 내면의 공허함을 외면한 채 살아온 병원 재벌 에드워드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없다는 생각에 허탈해하는 자동차 정비공 카터를 열연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와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거 같았지만 죽음 앞에서 느끼는 절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어느 날, 카터가 종이에 ‘장엄한 것을 직접 보기’ ‘모르는 사람을 돕기’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적어 내려가다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아마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우연히 구겨진 종이에서 직감적으로 영감을 받은 듯 미소를 지으며 ‘스카이다이빙하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와 같은 자신의 희망을 추가하고 함께 여행을 떠나 하나씩 이루어 간다. 한 사람은 희망을 한 사람은 비용을 선물해 서로의 꿈을 성취했으며 그 버킷 리스트에 줄이 그어질 때마다 이들의 삶은 희망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의절한 딸을 찾아가 사과하고 외손녀를 만나면서 영화는 극에 달한다. 외손녀를 안고 뽀뽀한 뒤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에 줄을 긋던 에드워드는 죽음 앞에 절망하는 노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이었다. 카터 역시 “여행을 떠날 때는 남 같았는데 돌아왔을 땐 다시 남편이 되어 있었다”는 아내의 말처럼 마음이 편안하게 정리되어 가족에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통해 감동을 줄 수 있었다.

행복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죽음이 여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먼저 떠난 카터의 장례식에서 에드워드가 했던 추도사, “카터와 저는 함께 여행했습니다. 카터가 살아 있던 마지막 몇 개월이 저에겐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의 참된 기쁨을 찾아준 거 같아요. 언젠가 내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가 돼서 다음 생으로 가는 문 앞에 서게 되면 거기서 다시 카터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나를 도와 저세상의 희망을 보여주길 바랍니다”라는 말처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바이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말기암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일을 해온 지 24년이 되어간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과 화해해 나가는 시간을 가지며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내가 처음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겪은 누나의 죽음 때문이었다. 형제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변변히 챙기지도 못했던 누나는 스물넷 푸른 나이에, 위암 말기로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마음 한가득 차오르는 것은 허망함 같은 거였다. 가족과 차분하게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린 삶’,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의사의 길을 가리라 다짐했다.

임종의 순간 ‘삶은 참 아름다웠고 고마운 것이었다’는 미소를 보내는 환자들, 오랫동안 서먹했던 인간관계의 응어리를 풀고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가족들과 환하게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보며 우주의 순환 원리를 떠올려본다.

실존 속의 인간은 결국 죽고 사라진다. 누군가 떠나간 빈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것이고, 그 또한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루었던 수많은 원소들이 다시 우주로 환원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 다른 수많은 존재들 속에. 과거의 존재들의 내면에 깃들었던 본질은 지금도 내 속에, 나의 존재는 또 다른 인연 속에 남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내게 할 것이며, 하루하루의 삶을 아름다운 축제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죽음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축제의 순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행복했다, 아름다웠다, 고마웠다.” 우리의 마지막 말이 이러하기를 바란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스티벌은 언제였나요? 우리 삶은 늘 축제입니다.

작은 드로잉 수첩이

가져다준 기적

이은경 47세. 경기도 과천

역경은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된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늘 똑같이 평온한 삶이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날들이 얼마나 행복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삶의 역경이 시작되었다. 경제적 무능력, 알코올 중독, 권위적인 분위기, 지인의 자살, 치매…. 결혼과 동시에 내가 감내해야 했던 여러 가지 상황들로 어두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속내를 털어놓곤 했지만, 어느 순간 나에게 다시 돌아와 비수로 꽂혔고, 자존감은 더욱더 낮아져갔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하며 불평불만은 늘어갔다.

미술 교육을 전공한 나는 일반인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일을 20여 년간 해오고 있었다. 회원들에게는 밝은 척 그림을 가르쳤지만, 하루하루 괴로운 시간들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내 인생에 변화를 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봄 그림 가르치는 곳의 한 회원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선생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육십 평생 남편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는데, 드로잉 수첩에 자신이 그린 걸 본 남편이 그게 뭔지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듣는 순간 행복 바이러스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드로잉 수첩은 화가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간단한 스케치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작은 손바닥 스케치북인데, 회원들에게도 가지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나부터도 그림을 가르치는 자세가 달라졌던 거 같다. 아~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겠구나. 그다음부터는 각자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감싸 안아주고 격려해주는 시간이 늘어났다. 몰랐던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가면서,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너도 그랬구나.’ 서로 치유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나 역시 드로잉 수첩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그림일기처럼 내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화가 나도, 기쁠 때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우울할 때도, 여행을 가고 싶을 때도, 흔들리는 버스에도 몸을 맡기고 쓱싹쓱싹… 그렸다.

그리면서 예전엔 몰랐던 걸 깨닫게 되었다. 말은 예쁘게 포장할 수 있지만 그림은 자기도 모르는 심연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 언어이면서 본능적인 언어라는 걸.

그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면서 그동안 이 소중한 걸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사랑받지 못했다며 서운해했던 것이 부끄러워졌고, 원망해 왔던 것들 또한 남 아닌 나의 탓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과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행복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마치 순례자가 순례의 길을 기도하며 가듯이 천천히 내 안의 아이와 대화를 하며 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작은 드로잉 수첩은 내 인생의 역경들이 하나하나 경력으로 쌓이면서 재창작으로 이어졌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렇게 내 마음의 문이 점차 열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다가가게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을 보다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어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드로잉 수첩의 그림과 사연들을 올리기도 하고, 코끼리 커피 그림을 프로필 창에 올리기도 했다. 코끼리를 그린 이유는 통통한 걸 좋아하기도 했고, 따뜻하고 귀여운 동물인 코끼리가 우리 아이의 태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커피 역시 소통의 도구가 된다고 생각해 좋아하는 것들을 접목해 보았다.

코끼리를 그리며 코끼리가 또 다른 나인 양 말을 걸며 ‘괜찮아 괜찮아’ 토닥토닥 위로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올해 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코끼리 그림이 전시 기획자의 눈에 띄어 전시회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전시를 하면서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어엿한 작가로서 그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를 이겨내지 못했다면 역경이 경력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시는 분들에게 조금만 더 이겨보라고 응원하고 싶다. 조금만 더 가보면 인생의 멋진 페스티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의 10분 축제

윤은노 39세. 젠나무민북스 편집장.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남편은 오늘도 터키식으로 아침을 차렸다. 터키 차, 소금에 절여 짭짤한 까만색 올리브, 오이와 토마토, 참치(팩), 내가 만든 빵. 때로는 삶은 달걀이 추가된 이 식단이 남편이 365일 먹는 아침 식사다. 반면 나의 아침 식사는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도 나와 남편 그리고 사랑스런 우리의 아이들 두 명은 식탁 앞에 앉았다.

사건은 7살 딸이 갑자기 터키 차가 담겨 있는 뜨거운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자기도 어른처럼 뜨거운 주전자로 직접 차를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딸의 이름을 외쳤다. 딸은 남편의 저지에 더욱 손잡이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나설 때이다. 하지만 나도 오늘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다. 물론 딸이 다칠까 봐 얼른 상황을 정리하려는 남편의 마음은 알지만 어린 딸에게 차근히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그 행위를 저지하려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결국 왜 아이에게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주지 않느냐고 남편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참고로 남편은 터키와 한국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 생활 17년이 넘어가는 한국말을 매우 잘하는 터키 사람이다.

어찌 됐건 딸아이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주전자에서 무사히 차를 따랐다. 하지만 난 이미 더 이상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르짖는 나이지만 오늘은 내 마음이 긍정적인 에너지가 바닥났으니 충전해 달라고 신호음을 보내고 있었다.

잠깐 발코니 쪽을 보았다. 햇빛은 찬란하고 날씨는 매우 좋았다.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숲 속을 걸으며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바람을 포기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그리고 사춘기 때 하던 행동을 아직도 하는 39살의 나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잠깐 잤나 보다. 3살인 아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미 오후 3시. 일어났다. 커피를 타려고 가스 불을 켜는데 남편이 다가와 “잘 잤어?”라고 묻는다. 내 기분이 나아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잠으로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야!”라고 야멸차게 답해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답변에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말을 건넨다. “엄마, 기분 괜찮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내가 키우는 식물 친구에게 물을 줘야 하거든.” 하면서 작은 통에 물을 담아가지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왔다.

커피를 타고 갑자기 딸아이가 키운다는 식물 친구가 보고 싶어져 다시 물을 받아 들고 나가는 아이를 따라가 보았다. 빌라에 사는 누군가가 심어놓은 걸 딸아이는 자신의 식물 친구라고 정한 것이다. 밖에서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속으로 “Why Not?”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면서 용기가 생겼다. 대문을 열자마자 마치 높은 탑에 갇혀 있던 라푼젤이 처음 밖에 나온 것처럼 자유를 느꼈다.

7살, 3살 아이들을 둔 엄마에게 대문 밖을 자유롭게 나서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아는 분들은 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100% 햇볕이 내리쬐는 건너편 담에 몸을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떴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신선한 바깥 공기가 몸 안을 정화하자 어느새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지중해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햇빛이 찬란한 하얀색 집들 중 한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파란색 머그컵에 담겨 있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그 순간을 만끽했다. 더 이상 햇빛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햇빛을 만끽한 나는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서 3초도 안 되는 거리로, 단 10분 만에 햇빛과 행복을 내 몸과 영혼에 충전하는 방법을 알게 된 나는 환호했다. 집으로 들어온 후 딸아이를 껴안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사랑스런 표정으로 “뭐가, 엄마?”라고 물으며 나를 쳐다보는 딸아이에게도 나의 행복이 전해진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밥을 먹다 갑자기 나는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사랑해”라고 말했고, 남편도 “나도 사랑해”라고 답했다. 우리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나는 오늘 노력하고 시도한다면 삶을 매 순간 축제같이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오늘을 축제로 만들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오늘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인생의 전환점 돼준

고마운 친구, 축제

안국현 43세. 축제닷컴 대표.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어떤 일이든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해야만 하는 일에서 하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로의 전환. 나에게 그런 계기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2008년 4월, 당시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하고 있던 내게 한 분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축제를 잘 홍보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라며 조언을 구해왔다.

인천의 인천중구문화축제를 기획하시던 분이었다. 축제? 소프트웨어 개발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나에게 축제는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도움을 드리기 위해 찾다 보니 우리나라에만 1년에 1,300개가량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렇게 축제가 많다니, 깜짝 놀랐다.

태백산눈축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진안군마을축제, 함평나비대축제, 담양대나무축제, 춘천마임축제, 고창청보리밭축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는 축제, 각 시나 군에서 기획하는 축제, 지역 문화제, 마을 단위 축제 등등 매주 전국적으로 20개씩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된 농사일에 앞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풍류를 즐기는 풍류 사회였는데 그러한 전통이 그렇게 발전해온 것 같았다.

이런 좋은 축제들을 한눈에 보기 좋게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어떨까, 나처럼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5개월간 준비를 해서 2008년 10월에 축제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오픈했고, 사이트를 홍보하기 위해서 ‘축제 이야기’라는 계간지도 발행하게 되었는데, 반응이 좋아 2010년 1월부터는 월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봄에는 특히 축제가 많은데 요즘 같은 때는 매주 지방 축제에 참석한다. 하루에 1,000km를 달려본 적도 있다. 여수국제청소년축제,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김해분청도자기축제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축제를 찾아다니다 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곳이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이렇게 살 수 있는 나의 삶이 참 감사하기도 하다.

축제를 다니며,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취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충북 옥천에 농수산물축제를 운영하는 군 관계자 분이다. 사실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축제를 즐길 수 없다. 제대로 된 축제를 만들기 위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티는 안 나는 일이라, 기피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분은 “꼭 이 축제를 발전시켜서 지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도 감동을 받아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고, 옥천 포도축제에서 농수산물축제로, 그리고 지금은 옥천의 대표적인 축제로 변모했다. 담당자의 열정 하나로 그렇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는 재작년 봄에 참석했던 청산도슬로우걷기축제이다. 6시간 30분을 차로 달려, 다시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해 참석한 축제. 바다와 산의 조화, 여유롭고, 정겨운 마을 주민들, 참가하는 사람들의 온화한 표정…. 그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축제가 될 수 있구나, 알려준 축제.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포기할까, 할 수 있을까 조급했던 나. 뭐든지 빨리 해야 하고, 빨리 결론을 내야 마음이 편했던 삶. 그런데 그곳에서 느리게 걸으면서, 인생을 그렇게 빨리 안 살아도 되겠구나, 이렇게 느리게 사는 것이 인생을 축제로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축제는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선물해준 고마운 친구다. 매달 한두 번씩은 아이들과 같이 축제를 찾아다닌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해진다.

5월에는 정말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가족과 함께 좋은 축제를 찾아서 떠나보면 좋을 것 같다. 그곳에는 또 다른 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어른이 되면 안 보이는 게 보여. 많이 알면 좋은 거 같지만 그럴 때는 겁쟁이가 돼서 아무것도 못해. 딱 한 번이야. 인생에서.” 영화 <늑대소년>(2012)의 주인공 순이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손녀에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웃음을 잃고 더 계산적이고 딱딱해지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마냥 부러워지지요.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화창한 봄날, 천진한 아이들의 지혜를 배워봅니다. – 편집자 주

모든 아이는 예술가이다.
– 피카소

어린이를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 방정환

조그마한 어린이처럼 진실 앞에 앉아라. 그리고는 기존의 관념을 모두 던져버릴 준비를 하라.
– 토마스 H. 헉슬리

순진함과 모든 완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으로 변했을까.
– 존 러스킨

물오리가 날 적부터 헤엄을 치듯 어린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들을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물오리가 헤엄치는 것을 막는 것과 같다. 어린이들의 천성을 돕는 것이 교육이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1박 2일의 여행
MBC 일밤 ‘아빠! 어디 가?’에서 건져 올린 동심들

“저는 마술로 민국이 형 집을 훨씬 더 크게 했으면 좋겠어요.”(5회)

– 춘천호에서의 얼음 캠핑 시간. 가장 작은 텐트 때문에 결국 민국이 형이 울어버리자, 윤후(8세, 가수 윤민수의 아들)가 한 말.

“하나님 비 안 오게 해주면 안 돼요? 그러면 이 감자를 던져서 하느님한테 줄게요. 제발 제발 제발.”(8회)

– 강원도 원덕천 마을.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나가서 놀 수는 없게 되자 간식으로 나온 감자를 먹다 말고 준수(7세, 연기자 이종혁 아들)가 한 천진한 기도.

“아빠! 우리 얘기 좀 하자. 지금은 대화할 시간. 오늘 기분 어땠는지 그 대화를 해보자.”(9회)

– 이날따라 낮부터 다툼도 많았던 날, 잠자기 전, 아빠에게 대화를 청하는 윤후.

“왜 맛있는지 알아 나는? 아빠가 주니까. 아빠가 주는 건 다 훨~씬 맛있어.”(10회)

– 제주도 면수동 마을에서 감자를 먹여주는 아빠에게 지아(7세, 축구 선수 송종국의 딸)가 한 말.

“힘들면 쉬다 가고 쉬다 가고 하면 되잖아.”(16회)

– 역사 속 위인의 흔적을 찾아 우리나라 산악현수교 중 가장 높다는 청량산 하늘다리까지 오르는 길, 중도에 힘에 겨웠던 아빠가 그만 포기하자고 하자 준(8세. 연기자 성동일 아들)이가 한 말. 결국 준이 덕분에 하늘과 산이 맞닿은 하늘다리의 수려한 전경을 맛볼 수 있었던 아빠.

“준비가 다 되었으면 그냥 아무 바람 없이 기다려”(17회)

– 오랜 기다림 끝에 여수 섬에서 전문가도 잡기 힘들다는 숭어를 잡아 올린 민국(10세. 아나운서 김성주 아들)이, 아빠가 낚시 노하우 좀 알려달라고 하자 의젓하게 해준 철학적인 말씀.^^



자신을 때린 친구도 포용하는 열 살 딸아이에게 배우는 용서 – 박선아

학교에 다녀온 딸아이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우격다짐으로 아이에게 들은 ‘사건’의 자초지종은 대략 이러했다. 영어 수업 시간에 반 친구들끼리 율동을 하는데, 딸아이가 한 남자아이에게 “너는 정말 율동을 잘한다. 와~”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딸아이의 뺨을 때린 것이다. 놀란 선생님이 이유를 물으니 “야! 너는 그것밖에 못해? 진짜 웃긴다야~” 하며 놀렸기 때문에 때렸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 아이들이 보고 있었기에, 그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담임 선생님은 친구의 뺨을 때리고도 거짓말한 것에 대해 몹시 화가 나 아이를 꾸중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딸아이는 “선생님, 제 잘못도 있어요. 저는 칭찬이라고 한 말에 친구는 자기를 놀리는 말로 오해를 했으니까요”라며 친구를 감싸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아이는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어 선생님도 아이들도 다 당혹스러워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금쪽같은 딸’의 뺨을 때린 ‘놈’을 가만 안 두겠다며 화를 냈고, 이를 본 딸아이는 나에게 불만스럽게 말을 했다. “아빠한테까지 말한 거예요? 엄마, 안 된다고요. 그 친구, 선생님께 정말 많이 혼났어요. 정말로 그 친구 엄마에게는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알죠? 그 친구도 반성하고 있을 테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1학년 때 ○○도 기억나죠? 엄마와 내가 그 친구에게 기회를 줘서 그 친구는 완전 착한 애가 되었다니까요.”

하지만 그날 하루 종일 어찌나 속상하던지 나는 결국 딸아이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그렇게 묵묵히 엄마를 받아주던 아이는 잠자기 전, 나를 꼭 안으며 말한다. “엄마, 미안해요. 마음 풀고 잘 자요. 그리고 많이 사랑해. 하늘만큼.”

부끄러워진다. 열 살 딸아이에게 배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는’ 마음이고,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사랑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서라는 것을.


아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는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려는 호기심 어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실패를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어리석게 보이거나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소한 삶의 비애와 좌절은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우리의 능력을 좀먹는다.

–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마이클 린버그 지음, 한언)에서


어린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 양경만 / 직장인. 제주도 제주시 외도1동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앞이 막혀 있는 욕실 슬리퍼 때문에 아내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물에 젖은 슬리퍼를 세워두지 않고, 무심결에 그냥 나와 버리는 아내의 습관 때문이었다. 무심코 물이 고인 슬리퍼를 신는 느낌이란. 이러기를 수차례, 며칠 전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슬리퍼 좀 세워두라 했잖아~!” 부부 싸움 일보 직전까지 가기 전, 마침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초등생 딸애의 한마디.

“아빠~! 그만 싸우고, 슬리퍼 바닥을 뚫어~!”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바닥을 뚫으면 슬리퍼에 물이 고이지 않고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난 뒤 슬리퍼 바닥을 새끼손가락 정도의 홈을 내어 잘라내었다. 그 이후로는 신기할 정도로 물이 잘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아빠, 이젠 물 안 고이지? 그니깐 이젠 아무것도 아닌 것 갖고 싸우지 마~! 알았지?” 어린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일이 참 많을 것이다.


“제 소원은 산타할아버지를 안아주는 거예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딸아이의 대답 – 김요한 / <어린아이처럼>(바이북스) 저자

나는 교회의 목사로서 늘 설교에 대한 부담이 있다. 한번은 아이디어가 궁핍해 그냥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 네 살의 막내에게 물어보았다. “예진아, 아빠가 설교해야 되는데, 어떤 내용을 할까?” 그런데 뜻밖에도 딸 예진이의 반응이 즉각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물론 처음 해준 말은 내가 찾는 대답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서로 인형을 만들어주라고 해.”

그래서 질문을 약간 바꾸어 “그런데 있잖아, 아빠는 설교를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한테 해야 되거든. 그것 말고, 또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러자 이 아이가 연달아 말해준 내용이 그럴듯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해.” “서로 책을 읽어주라고 해.” “서로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해.” “서로 선물을 주라고 해.” 결국 나는 막내의 도움으로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 큰아이에게 물었다. “혜진아,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한테 제일로 받고 싶은 선물이 뭐야?” 그때 내가 들은 의외의 대답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산타할아버지를 꼬~옥 안아주고 싶어. 나는 산타할아버지를 안아주는 게 소원이야.”

성경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것을 나눌 때 하늘이 기뻐하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배울 수만 있다면, 날마다 목격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기적들이 얼마나 많을까?

습관, 생각이 아닌 실천으로 바꾼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는 행복한 삶을 위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꿈을 머릿속에 그리면 인생이 바뀐다’ 등 사고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릿속에 굳어진 고정관념만큼이나 몸에도 고정된 습관들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꾸겠다는 마음만으로는 효과를 보기가 어렵고, 그것은 이미 다양한 실험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은 ‘생각을 바꾸라’는 기존 이론에 맞서서 마음가짐보다 행동을 먼저 바꿔보라 제안했다. 사실 이 이론은 백 년도 훨씬 전, 윌리엄 제임스라는 철학자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는데 최근 여러 실험으로 그 가능성이 증명되었다.

발꿈치를 들거나 주먹을 불끈 쥐면 자신감이 생기고, 과자를 싫어하는 척 밀쳐내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등 바뀌고자 하는 성향의 사람처럼 행동하다 보면 몸과 마음 모두에 변화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키지 않는 말도 계속 반복하면 마음 깊이 인정이 되고, 익숙지 않은 일일지라도 조금씩 실천하다 보면 어느새 습관은 바뀌어 있는 것이다.

지금 입꼬리를 올리고 바른 자세로 앉는 것, 잘못했다, 고맙다는 표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열 번 생각하고 다짐하는 것보다 빠른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생각이 아닌 사소한 행동으로 삶의 변화는 시작된다.

정리 문진정 & 참조 도서 <립잇업(Rip it up)>(리처드 와이즈먼 | 웅진지식하우스)

연필을 물고만 있어도 행복감을 느낀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관찰함으로 인해 특정한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즉 행복하기 때문에 웃기도 하지만, 웃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두려워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도망가는 자신의 행동을 보면서 두려움을 더욱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한 연구팀에서는 A그룹의 사람들에게 입으로 연필을 물고 있도록 하고(웃는 표정), B그룹에게는 입술을 ‘우’ 모양으로 오므려 연필을 물고 있도록 했다(찡그린 표정). 그 결과 웃는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더 높은 행복감을 느낀 것으로 드러났다. 특정한 표정을 짓고 그것을 스스로 관찰한 것이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모니터 높이로 집중력 조절하기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좀 더 강력한 동기부여를 하고 싶다면, 모니터의 중심을 시선보다 살짝 높이 두자. 1980년에 미국 텍사스 A&M 대학의 존 리스킨드는 사람들을 모아 절반에게는 등을 구부리고 고개는 아래로 향하는 자세를, 나머지 절반에게는 똑바로 앉아서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든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3분 뒤 각각 다른 방으로 가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내주었는데, 똑바른 자세를 취한 사람들이 구부정한 자세의 사람들보다 두 배나 더 오래 문제를 붙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 다른 집단에서 컴퓨터로 문제를 풀게 했을 때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미운 사람에게 엄지를 들어라

미국 미시간 대학의 제시 첸들러는, 한 사람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중지(욕설을 나타내는 부정적 의미)를 들고 읽는 경우와 엄지를 들고 읽는 경우를 비교해서 각각 호감도를 평가하도록 했다. 그 결과 중지를 들고 읽었을 때에는 그가 공격적이라고 평가한 반면, 엄지를 들었을 때는 그를 호감 가는 인물로 평가했다. 마음에 안 드는 동료가 있다면 그를 향해 자주 엄지를 들어 보이자.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한 척’ 행동하면 실제 그렇게 바뀐다

최근 BBC는 나이 많은 여섯 명의 유명 인사들을 모아 1970년대 그들이 전성기로 활약했던  당시의 사진들을 꺼내두고, 다양한 과거의 물건들로 방을 꾸몄다. 그리고 한 주 동안 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다시 한 번 맛볼 기회를 주었다. 불과 하루 이틀 만에 그들은 기억력, 근력, 활력에서 뚜렷한 개선을 보였고 중풍을 세 차례나 겪었던 여든여덟 살의 여배우 리즈 스미스는 지팡이 없이도 돌아다녔다. 생물학적 나이도 두 명의 경우 두뇌 연령이 무려 20년이나 젊어진 것으로 나타났고, 모든 사람이 전반적으로 기억력과 지능에서 뚜렷한 호전을 보여주었다. 젊었을 때처럼 행동한 것만으로도 신체 나이가 변화한 것이다.

지하철 기관사 하태영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

“뭐가 그렇게 항상 즐거워요?” 분당선 지하철 기관사 하태영(45)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터널을 밝히는 지하철 불빛처럼 만면에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만년 소년 같은 사람. 하지만 그 역시 30대 중반까지는 해결되지 않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로 인한 공허함, 그리고 지하철 사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늘 긴장했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다. 정작 지하보다 더 어두운 건 자기 마음이었던 것. 그 지하 터널에서 벗어나 이제 환한 행복을 찾았다는 하태영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

왕십리행 분당선 첫차는 새벽 5시에 운행을 시작해요.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해.” 핸들을 쓰다듬으며 차에게 인사를 하고 운행에 들어가지요. 일용 노동직 근로자, 경비원 아저씨, 청소 아주머니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첫차를 기다리고 계세요. 우리 사회의 아침을 여는 분들과 이렇게 같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죠. 죽전역을 시작으로 오리역, 미금역, 강남까지 가는 신분당선역으로 갈아탈 수 있는 정자역을 거쳐 종점인 왕십리역까지 가는 동안 수많은 분들이 타고 내리고를 반복해요. 오늘도 고객분들을 제 시간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렸구나 생각할 때면 기관사로서의 보람을 느낍니다.

저는 20대 후반부터 열차 기관차 승무 생활을 시작했어요. 8년 정도 여객열차와 화물열차 승무 생활을 하다, 2005년 3월부터 분당선 지하철을 운행하기 시작했죠. 탁 트인 자연 경관을 벗 삼아서 일하다가, 지하로 들어오니 처음엔 무척 답답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비록 몸은 지하에 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을 보면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죠. 날씨에 따라, 또 경기가 어떠냐에 따라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에도 차이가 있어요. 경기가 어려울수록 표정도, 옷차림도 어두운데 안타까운 건 요즘 많은 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거예요. 사실 저도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경북 풍기에서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 3남 1녀 중에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조숙한 편이어서 중학생 때부터 고민이 “마음이 주인인데 왜 늘 몸에 끄달려 살까”였어요. 점점 커가면서는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살지? 그런 고민까지 따라왔고요. 이왕 태어난 거 내 자신에 대해서 1%라도 알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를 알기 위해, 내 몸을 이기기 위해 산도 타고, 극한 운동도 하고, 여기저기 많이 찾으러 다녀봤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죠.

지하철을 몰면서는 늘 사상 사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많았어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기는 하지만 문득문득 밀려오는 공허함, 답답함과 불안함…. 지하보다 더 어두운 내 마음속의 터널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그러다 2006년에 객실에 놓인 마음수련 안내 책자를 보게 되었어요. ‘마음수련’ 네 글자를 보는 순간, 아 여기에 내가 궁금해하는 답이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바로 수련을 해서, 제가 살아오며 쌓아놨던 마음들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운행 중에 차량 고장이 난 적이 있었어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차가 지연되니까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기관실 문을 두드리는데, 빨리 고쳐지지는 않고, 식은땀이 막 흐르면서 많이 두려웠었죠. 큰 사고를 겪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일들이 제 마음에 큰 불안으로 자리하고 있었더라고요. 선로에 누군가가 뛰어들어 자살을 했다는 뉴스, 끔찍한 지하철 사고, 주변 동료들한테 들었던 크고 작은 사고 이야기들…. 제가 실제로 겪지 않았다 해도 제 마음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런 마음들로 인해 혼자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긴장하고 있었구나. 그런 걱정, 불안들을 열심히 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버리고 버리는데 어느 순간 딱 깨침이 오더라고요. 아, 나는 원래 없었구나, 나는 원래 우주에서 왔구나, 이 우주가 나였구나, 그냥 이 우주의 마음이 되어 살면 되는 거로구나…. 그동안의 답답함들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렇게 찾아 헤맸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도 얻었지요. 그 후련함과 희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행복했죠. 그러면서 참회도 되었어요.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공기가 있어서 내가 숨 쉬며 살 수 있고, 이 차가 있어서 내가 열차를 운행할 수 있고, 지하철을 타주는 고객들이 있어서 나와 내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데 나는 내 안에만 갇혀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구나.’ 얼마나 죄송하던지. 그런 참회의 시간을 갖고 나니, 마음 자세도 달라지더라고요. 더 크게 세상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 뒤로는 고객 한 분 한 분이 더욱 감사하고 소중해졌습니다.

승강장에서 위험한 장난을 치는 손님, 문이 닫히려는 순간 손발이나 가방을 넣어 억지로 문을 열려는 손님, 술에 취해 시비 거는 손님…. 지하철을 운행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분들을 만나요. 예전엔 그런 모습 보면 짜증이 나고,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바쁘면 그럴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럴까….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하며 밝은 웃음으로 태워갈 여유가 생겼어요. 휠체어 타시는 분들이나, 시각장애인분들을 보면 좀 더 여유 있게 출발한다거나, 그분들이 내리실 때면 안내 직원을 불러준다거나, 예전보다 훨씬 섬세하게 고객을 챙기게 되었지요.

그 뒤로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즐거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어요. 온갖 마음의 사진들이 있을 때는, 하루에도 죽 끓듯이 마음이 변하고 잡념도 많았는데, 그런 사진을 다 버리고 보니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고 최선을 다할 수가 있더라고요. 이게 바로 몸 마음이 하나 되어 사는 것이구나 매일매일 깨닫습니다. 우주의 마음은 서로가 도와주고 서로를 살리는 마음이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장 감사하고 행복한 건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사고를 경험한 기관사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하 터널 속, 늘 좁은 기관실 안에서 생활하다 보니 폐소공포증이나 공황장애로 고생하는 분들도 있고요. 공황장애로 기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제 꿈이 기관사들을 위한 마음수련 동호회를 만들어서, 많은 기관사분들이 마음 빼기를 하며 일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거예요. 어두운 마음의 터널에서 벗어나면 정말 환하고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함께 누렸으면 합니다.

정리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신의 질문을 받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망자의 영혼이 하늘에 가면
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신이 인간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그대는 인생에서 행복을 찾았는가?”
두 번째 질문은,
“그대는 살면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었는가?”라고 합니다.
 
인생의 행복을 찾는 일,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신은 이미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며 ‘예’ ‘아니오’를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인간의 마음

인간의 마음이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눈, 코, 귀, 입, 몸에 의하여 사진을 찍는 하나의 도구이고

세상의 것을 사진을 찍어 간직하는 것이 그 마음이다.

우리가 죄다, 업이다 하는 것은 세상과 하나가 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세상의 것을 사진 찍어 자기 마음의 사진 속에 사니

인간은 세상인 근원을 배신하여 제 세상을 만들어 사니 죄인이고 업을 쌓은 자다.

인간이 허상인, 세상에는 없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죽고 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 죄를 다 사하고 진리에 난 자는 영생불사신이다.

사람의 마음은 세상과 겹쳐져 있기에 사람은 이 자체를 모르고 세상 사는 줄 아나

자기 마음속에 자기가 만든 허상세계에 살고 있으니 이것이 인간의 죄인 것이다.

또 부질없는 인생이고 부평초 인생이고 뜬구름 인생이고 물거품 인생이고

없고 없는 것일 것이다.

자기의 마음이 허인 인간은 허기가 져서 무엇을 자꾸 집어먹고,

집어먹는 데에서 찾고 얻으려고 하나

그것은 허에 허를 더할 뿐이고 무거운 짐에 고통만 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짐을 다 버리는 길만이 진정으로 참이 될 수가 있다.

미완성의 시대는 더하기의 시대였고 완성의 시대는 빼기의 시대다.

허를 다 없애면 진짜가 남을 것이다.

인간이 가짜이기에 진짜가 되는 것은 가짜인 인간을 없애면 되는 것인데

가짜를 두고 진짜를 얻으려는 자는 얻지도 못하고 얻어도 가짜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사진 찍고 가진 감정인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감각을 느낀 것을

그 마음에 새기어 가진 자기의 세계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진인 허상의 마음밖에 없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등 다수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 <Stop Living In This Land, Go To The Everlasting World Of Happiness, Live There Forever>는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닷컴’에서 명상, 행복, 건강, 철학, 자기 계발 등 10개 분야 1위에 이어, 주간 전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전 세계에 마음과 비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Three siblings of Han family

This is a family photo from his childhood. From the left, my father, Chi-gyu Han; my uncle who escaped the North with my father; my aunt in North Korea who met with my father briefly in Jangbaek, China in 2009.

Written by Han Seung-won and Photo by Han Chi-gyu

In my childhood, my father took pictures of our family traveling places during weekends. Because of this, three siblings of us were able to accumulate happy memories a bit by bit.

The records of last 50 years with my father’s love.

I reminisced and was touched by my father’s love. Not wanting to wait too long, I published <Three siblings of Han family>, a memoir of photographs last May on Parents’ Day, to repay him. This was dedicated to his love and was our show of respect.

▲ My sister, Han Jung-won. Choon-chun, Kang-won, May 1962

▶ My brother sitting on a yo-gang. Naesoo-dong, Seoul, August 1967

▼ The best delicacy, jja-jangmyun, dad took a photo of us after mixing our jja-jangmyuns first. Naesoo-dong, Seoul, April 1969

My family consists of five: father, mother, sister, brother and me. My father was displaced from his family in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and we were all he had in his life, with work and family being the only sources of pleasure.

When thinking of my father, there is one interesting story. My father in his youth, had attended a Japanese school in Houng-nam; and he had to get up two in the morning to take a train that left at two-thirty. He rode the train sitting next to the conductor for about 13 miles and switched to another train to which he had to run 20 minutes to get to, going another 17 miles. Traveling thusly for a total of about 30 miles each way, he always managed to rank first or second place in the school. Even a midst of hardships of life, one dream he had was to study hard and earn a lot of money to help his parents.  But since the separat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this dream became impossible to achieve.

Through the pictures, he helped us understand the importance of a family.  Even when he carried all three of us on his back, he laughed; during summer, he made a pool for us by blocking the drain.

▲ “You guys, my back is breaking. Hahaha.” Kyung-bok palace, Seoul, September 1967

He took warm pictures of his family as well as those of relatives and neighbors.  And recorded landscapes and progresses within society, all these were my father’s legacy. Since last few years, after two major surgeries, he became very weak and aged. When we take him out at times, he loves it so much like a child.

I can’t forget when we presented him with the photobook to give him at least a speck of joy, he seemed exceptionally happy.

▶ A pool in a front yard of my house. Naesoo-dong, Seoul, July 1971

 

▼ I now have become a full-fledged middle school student. Three siblings of Han family. From the left are: a son Han Seung-hyuk; daughters Han Seung-won and Han Jung-won. Naesoo-dong, Seoul, April 1976.

In 1929, Han Chi-gyu was born in Jung-pyung, Hamkyung nam-do and escaped to South Korea during January 4th retreat. For 30 years he served as a full-time solder, until he was transferred to the reserves as a colonel. In 1959, he bought his first camera to learn photography on his own; the photobook <Three siblings of Han family> include warm pictures of his family and neighborhood children through 1960-1970. Photo provided by Noon-bit.

The Story Of Choi Choon-bo

Brooks Automation, a first-ranking robot making company in the United States, is famous for producing precise and comprehensive robots. Choi Choon-bo(61) was a senior managing director and also worked as a research scientist to develop a robot’s brain. The robot software development team she managed became the world-best development team and known as ‘a small United Nations.’ Starting to study engineering at 40 years of age, she entered Brooks Automation to rise to the position of senior managing director as an Asian woman in 4 years. She received salary that was equal to highest income earners (upper 5%) in America; and was recognized for her superb performances. She started Maum Meditation when she was searching for answers to unsolvable fundamental questions of life.

“There will be less days to live than days I had lived.” In 2002, at 50 years of age, I thought this all of sudden.  I thought that I should live a life of service following God’s will with the life I had left.  I wanted to start, but I did not know where to begin.  Most of all, my mind was not ready to start at all. I should humble myself to serve others, but I wasn’t ready.  I read good books and sought out good lectures, but it didn’t work.

After 7 years of searching, I read a book about the Maum meditation.  “Subtract the mind” left impression on my mind and in July of 2010, I took a break from work to go to the Maum meditation main center in Korea.

I always thought I had lived a good life. It was tough when I had gotten divorced with two marriages, but since finding my path with engineering at forty years old, things were relatively easy.

At forty, I majored in engineering a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nd graduated in 3 years to work as an entry employee at Brooks Automation at forty-three. I worked day and night because my research work with robot was so much fun.  It was a rare event for this company to promote an entry-level employee to a managing director in 4 years.

But all things in my life were about endorsing me and I was working hard only for me; as soon as I knew this, I was ashamed. I prayed, please let me throw away this ‘self-conceit,’ as I meditated.  Superiority, inferiority, worries about aging….as I threw those minds away, at one point, my mind was so much at ease. Ah, this is freedom and happiness….and I was enlightened to my original self.  Ah, I did not exist originally, the Universe is me. In that original place, there were no pain, no worries, no superiority, no inferiority…I was so thankful that I could live as one with the original self.

◀◀ As a robot receives command through its brain and nerve connections, in a human being, it is similar. Choon-bo Choi drew simple pictures of its structures to illustrate. If the robot continues to accumulate its memory within its controller, it stops working due to overload and for the human being it is the same.

◀ Choon-bo Choi in front of an automated system at work 17 years ago. It was a photo from her company’s newletter.

After I returned to America, I continued my meditation. Meditating diligently, my health was better. I stopped taking my stomach medication I was taking for last 15 years and paralysis of my left side of body was gone.

Maybe this was because I was a scientist. I was happy but was wondering about connection between body and mind, how the body gets better when throwing out the mind; I also got to understand this while I was meditating.

A ‘memory leak’ is the most severe bug a robot can have. Simply explained, a robot must clean a ‘random access memory’ of a previous job in order to do next job well; but with the memory leak, it cannot erase them all and leaves a bit at a time. Then later on, the robot’s brain gets filled and it stops working. In order to reset robots, the companies such as Brooks will lose millions of dollars; and many companies invest incredible amount of money to fix such memory leak.  At my company, through a meticulous research, we completely fixed this bug.  So our robots are the world-best.

And human beings are also similar. Without throwing out the mind and continuing to accumulate, the brain cannot function properly.  Within the human brain, there are billions of brain cells and each has an axon and dendrites; each dendrite receives information from axons through synapses.  Alzheimer’s patients are shown to have garbled dendrites upon brain analyses. Synapses are all disconnected from dendrites and axons, so there is no communication of any commands.

If the memory leak is the greatest bug in the robot, the human being’s greatest bug is ‘taking and accumulating of one’s own mind-pictures.’  Since birth, through eyes, nose, ears, mouth and body, we live taking self-centered pictures and as it fills out, the bug happens in our body and mind. But when those pictures are taken out, one returns to the original self, and can live healthy according to God’s programming and the nature’s flow.

Once I understood the logic, I felt the Maum meditation’s subtraction method was really great. Since the history of mankind, this is the first place where such mind-subtraction method was clearly and explicitly taught. The most joyful was that through the Maum meditation, I met the real God. I found that I had my own images about even God in my mind; it was the way I wanted to visualize God. But only when I threw away all of my ideas and habits, I was able to meet God. In Bible, there is a saying ‘one who sees God, dies’; I was so happy when I was enlightened to its meaning – it means once I throw away the ‘self,’ then I am reborn as a God’s child.

I am very happy. It does not compare to any other joy or happiness I had felt before. Now I am ready to serve others. Because we are one, I do not have to be ‘humble’; naturally I can live knowing how precious others are.  I was so excited after I quit my job. Now I can live in a new world beyond my life as a woman, and a scientist. I am delighted when I could see clearly how to live and for what (laugh). I want to live helping others find out and practice this method, scientists and other people.  I want to live sharing love; watching someone get brighter and more at ease.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