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나비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20대 청년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던 나는 학비도 벌고, 카메라도 마련할 겸, 일본 아사히신문 배달 장학생에 지원했고, 일본 가나가와현 아츠기시에서 2년의 일정으로 신문 배달을 하며 공부를 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고된 생활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생활한 지 17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신문 배달소 동료들과 함께 참가했던 하나비(불꽃놀이) 축제는 내 인생의 가장 뜻깊은 축제로 남아 있다.
그때 함께 갔던 배달소의 고토씨. 북해도 출신인 고토씨는 가족들을 북해도에 남겨 두고 이곳까지 와서 신문 배달을 하며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였다. 새벽 1시에 출근해서 신문에 전단지를 넣고 한정된 새벽 시간에 배달을 마쳐야 했기에, 10평 남짓한 공간은 16명의 배달원이 서로 말을 걸 틈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곳이라 서로에 대해서 이름만 알 정도였다. 일본의 신문 보급소는 삶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일본은 여름이 되면 전 지역에서 불꽃놀이 축제들을 시작하는데 내가 있던 곳은 2,000발 정도를 쏘는 하나비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일했던 보급소도 이날만큼은 하나비 축제를 잘 볼 수 있는 옥상을 빌려 고단한 신문 배달에 지친 배달원들이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한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고토씨의 나이를 물었는데, 많아야 30대 중반이겠지 했다가 중학생 딸을 둔 40대 중후반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고토가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잠시 멍해졌다. 흔히 신문 배달부 하면 일본에서도 밑바닥 인생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배달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나 자신조차, 내심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일본인 아저씨도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30살이 좀 넘게 되면 카메라를 메고 분쟁 지역을 다닐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아저씨가 전쟁이 좋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일본이 벌였던 태평양전쟁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그건 명백히 일본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내 딸들이 컸을 때는 전쟁이란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런 직업도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맥주를 들이키셨다. 헤어질 즈음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이렇게 함께 불꽃놀이를 봤던 걸, 죽는 그날 돌이켜보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거 같다. 국적은 다르지만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오늘 밤이 참 행복하다.” 그러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불꽃을 보며 소리치셨다. 나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그날 나는 한 명의 신문 배달부와 평범한 아저씨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나는 고토의 꿈이 무엇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40대 중반 한 사나이의 꿈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불꽃들이 춤추고 그의 얼굴에는 아름다움 꿈이 스며들어 있었다.
2004년, 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온 나는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카메라를 사고 2008년 대학등록금 관련 단편 다큐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란 첫 작품을 발표했고, 퍼블릭액세스 영상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고픈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비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지금도 힘겨울 때면 그의 말을 떠올린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스무 살, 브라질에서의
나의 성인식
누구나 그렇겠지만 스무 번째 생일은 내게 무척이나 특별했다. 단순히 ‘스무 살’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처음으로 우물 밖에 나가 더 큰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환상적인 축제와 함께.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덕분에 19살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당시 나는 교복만 벗었지 여전히 철부지 십 대 여자애였다. 가족과 몇몇 또래 여자애들 품속만 맴돌았던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나 환경을 접하면 부담감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이처럼 답답한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었던 나는 모 기업의 해외 봉사 활동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새내기 파워 하나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2010년 1월 말에 약 20명의 대학생과 한 팀으로 브라질에 파견되었는데, 그중 내가 막내였다. 운 좋게 합격한 나를 제외하고 우리 팀원 모두는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 모두가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음악에 소질 있는 한 사람이 유난히 멋져 보였다. 어릴 때부터 비틀즈를 무지 좋아해서 음악에 엄청난 환상이 있었던 나는 그 오빠 한 사람을 더 눈에 담아두었다. 우리 팀은 브라질 파견 기간 동안 비교적 사물놀이에 재주가 있는 10명만이 사물놀이를 공연하기로 했는데, 그 오빠는 그중에서도 꽹과리를 맡았다. 브라질에 있는 동안, 낮에 집 짓기 봉사를 할 때는 노래를 좋아하는 그 오빠를 위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밤이면 사물놀이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 가곤 했다.
그러다 나의 스무 번째 생일이 찾아왔다. 그날 그 오빠가 “생일 선물이야” 하면서 비틀즈 앨범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은 “네 오빠가 나보고 전해주라고 줬어”라는 그 오빠의 말과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오빠에겐 미안하지만 왜 이렇게 아쉽던지. 그날 밤 심란한 마음에 잠도 못 자고 밖에 혼자 계단에서 앉아 있었다. 그때 그 오빠가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그냥 생각이 많아서”라고 대답하자 오빠는 “그럴 땐 별을 봐야 해”라고 해서 같이 별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빠 눈에는 별이 많이 보였는지 몰라도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보였다. 자꾸만 커지는 그 오빠와 너무 작아진 내 모습만 보였다. 그때 갑자기 내 입에서 “오빤 콤플렉스 같은 건 없나요?”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빠의 대답. “콤플렉스라 생각 안 하면 그런 거 없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설렘이었던지라 그 설렘 아래 열등감도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빠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내 모습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파견 기간 끝 무렵, 우리 팀은 어느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했다. 객석 앞에 앉아 다른 팀원들과 공연을 보고 있던 나는 공연 중간에 한 번 ‘얼쑤’ 외쳤는데, 그 오빠가 웃는 모습이 좋아서 계속 ‘얼쑤!’ ‘좋다!’를 남발해댔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에 우리 팀 모두가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는데 타국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국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뭉클함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처음으로 더 큰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단순히 나이의 앞자리 숫자만 1에서 2로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스무 살로 변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른으로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느끼는 설렘,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에게서 열등감을 느끼며 괴로워할 수 있음을 나는 스무 살 생일 때 브라질에서 배웠다. 진실로 감사하게도 나는 그것을 너무나 특별한 경험 속에서 배웠기 때문에 남몰래 많이 속앓이했던 순간들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집과 친한 친구들 무리 속을 벗어나 조금씩 다른 세상에 발을 디뎌 나갈 수 있었다.
2010년 1월. 나는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다. 그것도 환상적인 축제와 함께.
영화 버킷 리스트
& 삶의 마지막 축제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말기 암 환자로 등장해 의미 있는 인생의 마무리를 보여준 작품이다. 두 사람은 돈만 좇다가 내면의 공허함을 외면한 채 살아온 병원 재벌 에드워드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없다는 생각에 허탈해하는 자동차 정비공 카터를 열연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와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거 같았지만 죽음 앞에서 느끼는 절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어느 날, 카터가 종이에 ‘장엄한 것을 직접 보기’ ‘모르는 사람을 돕기’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적어 내려가다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아마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우연히 구겨진 종이에서 직감적으로 영감을 받은 듯 미소를 지으며 ‘스카이다이빙하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와 같은 자신의 희망을 추가하고 함께 여행을 떠나 하나씩 이루어 간다. 한 사람은 희망을 한 사람은 비용을 선물해 서로의 꿈을 성취했으며 그 버킷 리스트에 줄이 그어질 때마다 이들의 삶은 희망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의절한 딸을 찾아가 사과하고 외손녀를 만나면서 영화는 극에 달한다. 외손녀를 안고 뽀뽀한 뒤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에 줄을 긋던 에드워드는 죽음 앞에 절망하는 노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이었다. 카터 역시 “여행을 떠날 때는 남 같았는데 돌아왔을 땐 다시 남편이 되어 있었다”는 아내의 말처럼 마음이 편안하게 정리되어 가족에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통해 감동을 줄 수 있었다.
행복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죽음이 여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먼저 떠난 카터의 장례식에서 에드워드가 했던 추도사, “카터와 저는 함께 여행했습니다. 카터가 살아 있던 마지막 몇 개월이 저에겐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의 참된 기쁨을 찾아준 거 같아요. 언젠가 내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가 돼서 다음 생으로 가는 문 앞에 서게 되면 거기서 다시 카터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나를 도와 저세상의 희망을 보여주길 바랍니다”라는 말처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바이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말기암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일을 해온 지 24년이 되어간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과 화해해 나가는 시간을 가지며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내가 처음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겪은 누나의 죽음 때문이었다. 형제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변변히 챙기지도 못했던 누나는 스물넷 푸른 나이에, 위암 말기로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마음 한가득 차오르는 것은 허망함 같은 거였다. 가족과 차분하게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린 삶’,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의사의 길을 가리라 다짐했다.
임종의 순간 ‘삶은 참 아름다웠고 고마운 것이었다’는 미소를 보내는 환자들, 오랫동안 서먹했던 인간관계의 응어리를 풀고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가족들과 환하게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보며 우주의 순환 원리를 떠올려본다.
실존 속의 인간은 결국 죽고 사라진다. 누군가 떠나간 빈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것이고, 그 또한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루었던 수많은 원소들이 다시 우주로 환원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 다른 수많은 존재들 속에. 과거의 존재들의 내면에 깃들었던 본질은 지금도 내 속에, 나의 존재는 또 다른 인연 속에 남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내게 할 것이며, 하루하루의 삶을 아름다운 축제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죽음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축제의 순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행복했다, 아름다웠다, 고마웠다.” 우리의 마지막 말이 이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