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밤섬은 성장기 청소년! 왜?

안녕, 난 밤섬이라고 해. 난 서울 살아. 서울하고도 한강, 그중에서도 서강대교와 마포대교 사이에 길게 누워 있는 섬을 본 적 있지? 그게 나야. 근데 내가 밤같이 생겼어? 옛날 지도에는 율도(栗島)라고 적혀 있다는군. 내가 보기엔 오징어처럼 생긴 것 같아. 그렇다고 오징어섬이라고 부르지는 말아줘. 근데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섬이니까 몇 백만 살일 거라구? 아니야 틀렸어. 나 마흔여섯 살이야. 깜짝 놀랐지? 섬치고는 젊다구? 아니 난 사춘기 청소년 섬이야. 그 사연을 지금부터 말해줄게.

옛날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에 나는 한강과 더불어 생겨났지.

나는 원래 돌로 만들어진 섬이었어. 돌섬이니까 무인도였냐구? 아니야. 사람들도 많이 살았어. 고려 시대에 나라에서 죄인들을 나의 섬으로 귀양 보낸 적이 있었어. 그리고 예전부터 물 건너 마포에 큰 나루터가 있었어. 덕분에 남북으로 한강을 따라 중국과 제주도까지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과 배를 만드는 목수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살았지. 세종과 성종 시대에는 나라에서 약초와 뽕나무를 심어서 키웠어. 갖가지 아름다운 나무가 늘어진 언덕에 으리으리한 기와집도 여러 채 있고, 양과 염소가 유유히 풀을 뜯어 먹으며 놀고 있어. 그리고 이태리 베네치아처럼 집과 포구가 붙어 있어서 안방에서 나오면 바로 배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근사한 풍경을 그려봐. 그게 나였어. 겨울에 한강이 꽁꽁 얼면 마포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이쪽으로 건너와 놀기도 했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17대에 걸친 500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지.

근데 1960년대 당시 한국 정부에서는 왠지 내가 눈에 거슬렸나 봐. 수억 년을 한강과 더불어 잘 살아왔는데 공연히 내가 한강 물의 흐름을 거스른다고 트집을 잡은 거야.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결국 엄청난 양의 폭약을 터뜨려서 나를 산산조각 냈어. 그리고 폭파 뒤에 채취된 11만4000m2의 돌과 자갈을 한강 윤중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만드는 데 가져다 썼지. 그때 난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어.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 거야. 내가 다시 생겨났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내가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거지. 지금의 나는 한강의 물살이 실어다준 모래와 자갈들이 모이고 뭉쳐서 만들어진 퇴적섬이야. 재미있는 건 내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생겨났다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지금 있는 곳이 내가 원래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라구!! 지금 내 몸은 두 개로 나뉘어 윗밤섬, 아랫밤섬으로 불리고 있고, 행정상으로는 각각 마포구 상수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관할지가 달라.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나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거야. 일 년에 평균 440m2씩이나! 그래서 1966년에 45,684m2였는데 2013년에는 279,531m2로 6배나 커졌어. 지금의 나는 서울 시청 앞 광장 21개를 합친 것과 같은 면적이야. 계속 자란다니 놀랍지? 즉, 46살은 섬의 나이로 치면 아직 청소년이라고!!

끝으로 나 이런 얘기 해볼게.

근데… 나, 1999년 8월 생태 경관 보전 지역으로, 또 2012년엔 도심 내 물새 서식지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서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어. 겨울이 되면 수많은 철새들이 나에게 찾아와. 그래서 아무 때나 놀러 오라고 초대할 수가 없어서 미안해.

아, 맞다! 나한테 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1960년대까지 밤섬에 주민들이 살았다고 했잖아. 그때 78가구 443명의 밤섬 주민들은 폭파 직전에 창전동으로 이주를 했어.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야. 이분들은 그날 이후로 실향민 아닌 실향민이 되었지. 그래서 그들이 1년에 두 번씩 나한테 돌아오는 날이 있어. 1월과 추석 무렵 두 차례 방문이 이루어지는데, 그때는 일반인도 방문 신청을 하면 배를 타고 같이 올 수가 있는 거야.

지금 나 밤섬에는 버드나무와 갈풀, 갈대, 물억새가 숲을 이루고 있어. 그리고 얘네들 포함해서 138종의 풀과 나무가 같이 살고 있고, 해오라기, 청둥오리, 꿩, 붉은머리오목눈이 등등 49종류의 새들이 살고 있거나 겨울철이면 찾아오기도 하지. 강변 양쪽으로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빽빽한 대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물새들이 찾아와 사는 섬은 전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아. 사실 그동안 생태 보전 지역으로 묶어놓고 사람들 출입을 금지한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긴 해. 그 말은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회복된다는 이야기야.

필요 없다고 없애버렸지만 나는 그 자리에 다시 생겨났고 또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에서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있어. ‘자연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다’는 얘기야. 너무 짧게, 가깝게만 보지 말아줘. 인간들 판단으로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 정하려 들지 말고 어머니에게 맡겨줘. 자연이 어머니야.

밤섬 귀향제 행사와 더불어 일반인도 밤섬 방문의 기회가 있습니다. 추석 전주에 진행하며 마포문화원에서 홈페이지(www.mapocc.or.kr)를 통해 공고합니다. 제한 인원 150명이며, 밤섬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햇살, 세상을 품는 어머니의 따스한 미소

전남 순천시 순천만 생태공원 2012년 10월

순천만은 생태 관광 1번지이다. 갈대밭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갯벌 너머로 드리우는 노을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들판의 풀숲이나 산자락에 피어나는 안개는 세상의 어머니인 대지의 손길인 듯 보드랍고 아늑하다. 아침 안개와 이슬은 자연이 주는 변치 않는 모성애 같은 선물인 듯 아침 햇살이 산등성을 오르면 잘게 빛나고 황금빛으로 물들다 스러진다.

경남 창녕군 우포늪 2013년 8월
우포늪은 네 개의 작은 늪이 모여 하나의 늪으로 불리는데 이 사진은 사지포로 불리는 가장 동쪽의 늪이다. 이른 아침 태양이 비치면서 온갖 생물이 깨어난다.

물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고랑이 되고 짐승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길이 되었다. 그 길에 스며든 안개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 길 풀잎을 따서 들여다보면 어느새 이슬은 흙으로 스며들어 흔적을 지운다. 흙으로 스며든 이슬은 다시 풀뿌리에 매달리고 거기에 태초의 그리움이 맺힌다. 안개와 이슬이 스며든 대지 위로 뿌려지는 햇살은 안개와 이슬로 세상을 품었던 어머니의 미소다.

경남 함안군 창녕군 낙동강 2013년 5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다. 남지철교로 유명한 남지 부근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강은 더욱 넓어져 큰 강의 모습을 이룬다. 아침 황금빛에 강도 금빛이 되었다.

세상 구석구석 들판이거나 산길이거나 갯고랑이거나, 저 멀리 외로운 섬까지 품고 있는 잔잔한 파도이거나, 햇살은 가리지 않고 펼쳐진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길은 사물과 대상을 가리지 않듯 햇살은 그렇게 멀고 넓게 펼쳐진다. 폭풍우가 일고 눈보라가 쳐도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까닭이다.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달콤한 까닭이다.

사진 신병문 & 글 이민

사진가 신병문님은 개인 비행 장비를 타고 하늘에서 직접 찍은 우리 땅 풍경을 통해 이 땅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소명 의식을 갖고 있으며, 현재 하늘과 땅에서 대한민국을 기록하는 5년간의 국토대장정 사진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저서로는 <비상-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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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민님은 여행수필가, 카페인테리어 작가로 2009년 가을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 여행 후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 여행>을 시작으로 여행길에서 느낀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으며 저서로는 <소울로드>(공저) <하늘을 보며 천천히 걷다> 등이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

2014년 4월, 식구 모두의 숙원이었던 장욱진미술관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야트막한 야산 아래 아름답게 자리 잡고 문을 열었다. 많은 시간을 아버지의 미술관 건립에 마음을 집중했기에, 내게는 정말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시간만 되면 발걸음이 미술관으로 옮겨지곤 한다. 어린아이 같은 소박한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면 마치 아버지를 뵙는 듯 가슴이 뭉클하다.
장경수  사진 제공 장욱진미술문화재단

“나는 심플하다”

전시장 첫머리, 나무 아래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계신 아버지, ‘수하(樹下 1954)’를 뵈니 철저한 자유인의 경지에 이른 듯해, 일생을 통해 ‘심플’을 보여주신, 언행이 일치되는 아버지의 모습에 눈앞이 찡해 온다.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아버지의 단골 말 중 하나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어 했던 아버지께서는 ‘심플[純眞無垢]’을 화두로 삼고 일생을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셨던 분이다. 두어 번(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등)의 길지 않은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구도의 길을 가듯 시골로 다니시며 자기 일에 몰두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였다. 자연 가장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것에 대해 식구들한테 늘 미안해했다. 그러나 당신 일에는 늘 철저했던 분이다. 그림 그리는 일이 천대받던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한국동란 등 어렵고 힘든 세월 동안 아버지께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뒤로한 적이 없으시다. “나는 6·25 사변 때를 빼놓고는 평생 붓을 놓은 적이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심 없이 그림을 주셨고, 아무리 큰돈을 주어도 못 갖는 이도 있었다. 식구에게는 전시회가 끝날 때 또는 이름 있는 좋은 날에 한 점씩 주심으로 즐거움을 주셨고, 어려웠던 시절 딸들에게는 혼수 대신 그림을 몇 점 걸어 주고 가셨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 사랑이기에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의 그림을 몹시 아낀다.

장욱진 작.
<진진묘(眞眞妙)>
33×24cm. 캔버스에 유채. 1970.

<가족도(A family Portrait)>
7.5×14.8cm. 캔버스에 유채. 1972.

“나는 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평소 도회지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마흔넷 되시던 해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사직하고, 남양주시 덕소의 한강 변에 작은 화실을 짓고 가족과는 떨어져 혼자 작업하는 전업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는 숙고를 해 오신 일종의 정신적인 도정이기도 했다. 실제로 식구들에게는 가장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은 있었으나, 어머니를 비롯한 온 식구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유독 많은 ‘가족도’(1972, 1978)를 그리셨는데 아마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사회생활이 거의 없던 아버지께는 가족이 유일한 울타리였고, 한편 식구들은 아버지를 보호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에 대한 화답이 ‘가족도’로 보여지는데, 온 가족 뒤에 모습을 반쯤 숨긴 그림 속의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무엇보다도 온 식구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은 늘 죄인의 마음으로 따라다녔을 것이고, 그 화답이 어머니의 초상인 ‘진진묘(眞眞妙 1970)’다.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덕소 아틀리에에서 서울 집으로 들고 와 어머니께 드리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신 일이 있다. 얼마나 애틋한 일인가. 이렇게 “나는 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형형한 아버지의 눈빛을 작품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나, 다시 시작하겠다”

‘자화상’(1951)을 보면서 한국동란으로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을 때, 연미복을 입고 풍요로운 논밭 사이를 유유히 걸어오시며 “나,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를 뵙는다. 이렇게 아버지는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늘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만년에 아버지는 용인 마북동 고옥(현재 등록문화재로 ‘장욱진 고가’)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셨다. 작품 중에는 당신 자신을 도인으로 표현한 작품(도인(道人) 1988)이 많다. 모든 잡스러움을 걷어낸 순수했던 아버지의 내면을 본다. 작품 속에서 도인으로 유유자적, 또는 홀로 좌정하시며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의지를 나는 본다.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밤과 노인’(1990)은 돌아가시기 2개월 전에 그리신 그림이다. 그때는 건강하셨고 누구도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때이다. 그림을 보았을 때 어머니와 나는 좀 이상한 느낌이어서 그림을 곧바로 싸서 장롱에 넣어 두었었다. 1990년 12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나는 바로 그 그림을 꺼내 보았다. 동시에 말은 안 했었지만 돌아가실 걸 예감하고 그리신 건가 하는 생각에 미치니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젠가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쓰고 가겠다. 나의 기능이 다하면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해 그림도 괜찮게 된다며 많이 그리셨고 건강도 좋아 보이셔서 우리 모두를 안심시켜 놓고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셨다. 새해에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주변 정리도 해놓으셔서 정말 깨끗하게 떠나셨다. 마지막 그림 속의 유유히 떠나는 도인의 모습으로. ‘아버지, 그곳에서 무엇을 다시 시작하고 계신가요?’

<수하(樹下, Under the Tree>
33×24t.7cm. 캔버스에 유채. 1954.

<도인(An Immortal)>
53×49cm. 캔버스에 유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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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노인
(The Night and an Old Man)>
41×32cm. 캔버스에 유채. 1990.

화가 장욱진(1917~1990)님은 1918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양정고보를 거쳐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제2세대 서양화가로, 가족, 나무, 아이, 새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사실을 새롭게 보자’란 의미로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자연 사물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사물 안에 내재해 있는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하였습니다. ‘동화적이고 심플한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사용, 동양화적인 화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던 그는 옛 양주군이던 덕소(1963~1974), 명륜동(1975~1979), 수안보(1980~1985)를 거쳐 용인 신갈 마북리(1986~1990)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생을 마쳤습니다. 지난 4월 개관한 양주 시립 장욱진미술관에서는 미술관 개관을 기념한 <장욱진> 전이 오는 8월 31일까지 열립니다.

천체사진가 권오철

미 항공우주국(NASA)과 유명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인정한 천체사진가 권오철(41). 그가 천체사진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지난해 여름 방영된 <SBS 스페셜 – 오로라 헌터>에 소개된 후부터였다. 한 번뿐인 인생,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했던 그는 5년 전 14년간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국내 유일의 천체사진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사람은 꿈과 진로가 일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많은 청소년들에게 진짜 꿈에 대해 전하고 있는 천상 별바라기 권오철, 그가 전하는 별과 꿈에 관한 이야기.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작가님의 천체사진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동시에 어떻게 저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천체사진가란 밤하늘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행복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망원경으로 찍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시각으로 본 사진이라는 거죠. 별을 볼 때 받은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흔히 천체사진은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가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의 때를 기다리고 하늘이 허락해야만 가능하다는데, 그 과정에서 힘든 점은 없으신가요?

천체사진은 그때의 현장 상황, 날씨가 좌우해요. 자연이 만들어주는 좋은 순간을 포착하는 건데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린 만큼이죠. 그건 제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좋은 순간을 만나지 못하면 한 장소만 10년 넘게 가기도 해요. 최선을 다해도 날씨가 안 좋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보다 화나는 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 때예요. 체력이 떨어져서 중요한 순간을 놓칠 때가 그렇죠. 사실 사막에선 체력이 떨어지면 헤매기도 해요. 방향 감각이 떨어져서 같은 자리를 뱅뱅 돌고 있을 때도 있고. 장비도 무겁고, 밤도 새야 하고, 정신을 잘 차려야 하죠. 천체사진을 20년 넘게 찍으면서도 아직도 제일 힘든 게 밤새는 거예요.

은하수가 흐르던 밤. 2013년 독도.

2010년 킬리만자로에서 촬영한 일주 사진들.

그에게 별이 가슴 깊이 다가온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야간 자습 쉬는 시간, 우연히 친구와 창턱에 기대어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친구가 갑자기 “우와, 북두칠성이다!” 외친 것. 순간, 그저 밝은 점일 뿐이었던 별이 그냥 별이 아닌, 불빛처럼 마음 한구석을 환하게 밝혀주는 기분이 들더란다. 이후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책을 통해 별자리를 알게 되면서 별 보는 재미에 빠져든 그는 밤마다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고, 때론 새벽까지 별을 관찰하곤 했다.

 

대학 입학 후 천문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천체사진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하면서 고민했다. ‘어떤 사진이 좋은 천체사진일까?’ 천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보다는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일반 렌즈와 카메라로 밤하늘을 찍으면서, 당시 망원경으로 찍어야 천체사진으로 여겼던 시절, 그의 사진은 독창성으로 주목받게 된다.  

 

그 후 그는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사진가로서 꾸준히 살아간다. 그렇게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을 때였다. 2009년 12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가는 ‘오로라 원정대’에 천체 강사로 초청되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캐나다 옐로나이프는 오로라를 관측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세계적으로 ‘오로라의 수도’라 불리는 곳. 그동안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오로라에 대한 로망을 간직했던 그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오로라보다 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늘 마음 깊이 별과 사진을 꿈꿔왔지만 안정된 생활을 위해 대기업에 취직했던 그였기에, 자신의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면서 사는 원정대 사람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자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천체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전업 사진가로 살겠다고 결정하기까지 가장 두려운 게 무엇이었나요?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죠. 사실 그것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못했는데 그때 만난 만화가, 블로거들이 굉장히 자유로운 거예요.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처음 만난 거죠. 저렇게 해도 먹고사는데 나라고 못 먹고살겠나…. 그걸 확인한 순간 사람이 바뀐 거죠. “회사 그만둡니다.”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선언해 버렸어요. 불안감이 증폭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선언하는 순간 없어지더군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죽기 전에 보아야 할 천문 현상 3가지로 오로라, 대유성우, 개기일식을 꼽는데, 오로라를 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오로라는 태양 에너지와 지구의 자기장이 반응해서 빛을 내는 건데, 사진을 보면 정적이지만 무척 동적이거든요. 빛이 춤을 춥니다. 밝을수록 빨리 움직여요. 이를 오로라 댄싱이라고 하는데 오로라의 결이 마치 피아노 건반 치는 모양, 속도로 물결을 칩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 오로라 폭풍이 되면 밤하늘 전체를 가득 채우면서 빛이 휘몰아쳐요. 초록색, 핑크빛 색깔이 하늘을 덮는다는 거예요. 특히 핑크빛은 가장 강한 오로라에서 도는데, 밤하늘 전체에 핑크빛이 쫙 쏟아지는 상황이 되면 반쯤 넋이 나가요. 뭘 할 수가 없어요. 정말 카타르시스가 확 오는 거예요. 오로라는 인간이 자연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상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꿈에 도전하셨지요.

오로라가 보고 싶다는 작은 꿈을 이루고 나니 다음 꿈이 보이는 거예요. 10년 전부터 킬리만자로에 가고 싶었거든요. 그곳이 딱 적도여서 북쪽 밤하늘, 남쪽 밤하늘이 다 보이고, 재밌는 게 적도는 별이 수직으로 떠요. 그 궤적이 재미있는 곳이에요. 킬리만자로에서 별을 보고 나니까 남반구 쪽으로 가고 싶더군요. 그래서 호주로 가고. 그렇게 당장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꿈에 한발 한발 다가갔죠.

△△ 지난 7월 14일, 미 항공우주국(NA SA)이 운영하는 오늘의 천체사진으로 선정된, 2013년 캐나다 옐로나이프에서 촬영한 오로라 사진.
△ 2002년 학암포에서 촬영한 일주 사진으로 이듬해 천체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천체사진을 찍으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고생담을 들려주신다면?

사실 찍힌 풍경은 천국같이 멋있지만, 촬영자는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 오는 거예요. 저는 가는 데가 비행기 3번이 항상 기본이거든요. 게다가 40kg이 넘는 장비를 메고 다녀야 하죠. 이번에 미국 유타주 사막에서 촬영할 일이 있었는데 차가 못 들어가요. 그늘이 한 점도 없는, 모래 온도가 40~50도가 넘는 곳을 장비를 혼자 짊어지고 사막을 횡단한 적이 있었어요. 그날 마신 물만도 7리터. 물도 지고 가야 하니 그 무게도 만만치 않죠. 또 서호주에서는 카메라 3개를 이곳저곳에 설치하느라 40시간 동안 잠도 못 자고 찍은 적도 있고요.

수입은 절반 이하로 줄었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에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권오철 작가. 그런 그의 꿈에 날개를 달아준 게 있었으니 바로 타임랩스(time-lapse) 기법이다. 타임랩스란 수천 수만 장의 사진을 연속으로 찍어 동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사진만 해온 그가 영상 분야까지 손을 뻗을 수 있게 된 것. 그 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별무리의 이동, 해와 달의 움직임까지 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터 타임랩스 촬영 기법을 연구해 오신 건가요?

2000년대 초반인데 디지털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성능이 어느 정도 좋아지면 일주를 안 찍어도 되겠구나, 사진을 여러 컷 찍어서 영상으로 만들 수 있겠구나 예상했거든요. 제 사진들을 보면 처음엔 일주 사진이잖아요. 그 이유가 어두운 밤에 촬영을 하다 보니 필름은 감도(빛을 느끼는 정도)가 약해서 빛을 조금이라도 더 주기 위해 노출을 길게 해서 찍다 보니 궤적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디지털카메라가 성능이 급격히 좋아지고, 2008년인가 그 모든 성능을 충족하는 카메라가 나오면서 비로소 촬영이 가능하게 됐죠.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면서 누구나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장비로 촬영하면 비슷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보니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한 진정성이란 무엇인가요?

꾸준함과 관계되는 거죠. 아마추어들이 배병우 선생님이 소나무 사진 찍는 곳에서 똑같이 찍어요. 그 사람들 사진과 대가들 사진 중 잘 찍은 사진 한 장씩만 뽑아서 비교하면 거의 비슷할 거예요. 근데 100장을 갖고 와라 해서, 100장을 갖고 보면 거기서부터 얘기가 달라지는 거죠. 진정성이란 거기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꾸준하게 나만의 사진을 찍었나, 안 찍었나. 사진 한 장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인생을 흉내낼 수는 없거든요.

천체사진을 통해 우주와 별을 대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요?

사실 우주의 크기는 상대적인 거예요. 천 억 개의 별이 있고 천 억 개의 은하가 있지만, 거꾸로 말하면 내 눈에 비치는 게 전부죠. 그것은 내가 인지하는 범위 안에 있다는 거고요. 사실 우주 입장에서 보면 인류 역사, 지구, 개인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모든 게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 중 하나니까.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지 않다는 거죠. 생명체 입장에서는 내가 죽으면 우주가 끝나는 것이니까 의미 있는 거죠. 인간의 평균 수명 80년을 날짜로 계산하면 3만 일이 되거든요. 근데 어릴 때 1만 일 날아가고, 늙어서 힘없으면 1만 일 날아가고 그럼 1만 일 남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근데 그마저 돈 버는 데 소모하고 있는 거죠. 자신의 존재에 감사해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에도 시간은 너무 짧아요.

요즘은 천체사진가에서 나아가 꿈 멘토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요즘은 꿈 고문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아요. “꿈을 찾아라, 꿈이 뭐니?” 사실 학생들이 사회 경험도 없고 내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찾아가는 단계인데 어떻게 알겠어요. 꿈은 지금 현재가 행복해야 된다는 것, 지금 하고 싶고 당장 하고 싶은 것 있으면 그거 하라는 거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자리에서 발돋움하면 손에 닿을 정도, 그게 꿈이라는 거예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경험치가 넓어지다 보면 정말 잘하는 걸 찾게 되고, 좋아하는 걸 찾을 수 있게 되니까요.

나에게 별이란?

사진 소재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죠. 꽃이나 동물은 좋으면 꺾어다가 혹은 데려가 키우고 싶잖아요. 하지만 별은 딸 수가 없으니, 그게 정말 다행이구나 싶어요. 너무 멀리 있어서 사진으로밖에 못 담으니까요. 그렇게 좋은 사진들을 찍어서 갤러리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제 사진뿐만 아니라 세계의 천체사진가들이 자신의 사진을 전시하는 걸 최고의 영예로 여길 정도로 좋은 천체사진 박물관을 만드는 거죠. 그러면 죽은 뒤에도 별과 함께 영원히 사는 거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 큰 꿈으로 가는 작은 점들을 이어가야겠지요.

2012년 8월, 태백에서 촬영. 달이 멀리 있는 천체인 금성을 가리는 현상을 담아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이 있는 사람’이라는 권오철 작가. 일곱 개의 별들이 이어져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을 이루듯, 그는 작은 꿈들을 차례대로 이루어가면서 마침내 천체사진가라는 큰 꿈을 이루었다. “사람들이 꿈을 못 이루며 사는 이유는 너무 멀고 큰 꿈만 꾸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이 순간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천체사진가 권오철님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를 졸업했으며, 세계적인 천체사진가로 활동 중입니다. 매거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 제공 및 초·중·고 과학 교과서에 다수의 천체사진을 수록하였으며, NASA ‘오늘의 천체사진’에 한국인 최초로 선정되었습니다. 저서로 <별이 흐르는 하늘> <신의 영혼 오로라> <진짜 너의 꿈을 꿔라>가 있습니다.

꽤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취미 하나 쯤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느질, 제2의 직업이 되다

김윤주 42세. ‘네모의 꿈’ 공방 운영. blog.naver.com/beaver55

나의 취미는 바느질이다. 그것은 어느새 나의 제2의 직업이 되었다. 17년 전 너무나 즐겁게 다니던 첫 직장을 육아 문제로 그만두게 되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첫째 아이의 육아까지 모두 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런 육아 스트레스로 산전 우울증 같은 증상이 왔다.

그때 친한 언니가 잠깐이라도 태교 겸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배우게 된 게 퀼트라는 바느질이었다. 그전에야 워낙 바쁘게 살았기에, 취미 생활이라는 걸 딱히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바느질을 배우니, 워낙 만들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새로 태어날 둘째를 기다리며 조각조각 원단을 잇고, 수를 놓고, 누벼서 아기 이불도 만드는 사이 우울감은 사라졌다.

둘째를 출산한 후에도 계속 바느질을 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옷이나 가방을 만들어주고, 소품을 만들어 주위에 나눠주는 기쁨도 컸다. 이 일을 또 다른 나의 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직장을 그만두면서 생겼던 상실감, 포기했던 꿈을 다시 바느질을 통해서 만들어가고 싶었다. 바느질을 전문적으로 해볼까 고민하던 시기에 신기하게도 배우고 싶었던 퀼트 선생님이 문화센터 강사 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그 과정을 들을지 말지 어찌나 고민을 하고 또 했는지. 수업을 듣는 동안 아이 둘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수업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퀼트는 돈이 많이 든다던데, 맞벌이도 아니면서 감당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해보기로 선택을 했다. 2년 동안 강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그만둘까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끝까지 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강사증을 딴 후, 퀼트 강사가 되어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만든 것들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아예 ‘네모의 꿈’이라는 바느질 공방을 공동 창업하게 되었다. ‘네모의 꿈’이란 네모난 조각 원단을 연결해서 가방, 장난감, 이불 등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듯이, 여기서 꿈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지었다. 보통 손으로 만드는 홈패션과는 다르게 우리 공방은 재봉틀을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속도도 빠르고 원단도 상당히 예쁘게 나온다.

우리 공방에는 다양한 분들이 바느질을 배우러 온다. 스트레스 많은 직장인이 바느질로 힐링의 시간을 보낼 때, 그리고 17년 전의 나처럼 육아 문제로 고민하다가 바느질을 알게 되어 좀 더 행복해지고 자기 자신을 예쁘게 꿰매는 사람을 만날 때, 나도 행복해진다.

혹시 과거 나처럼 힘들어하는 주부가 있다면, 우선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자기 안에 숨겨진 재능도 발견하고 새로운 꿈을 찾게 될 것이다.

육아 문제를 고민하게 했던 두 아이는 너무 잘 자라서 여전히 일하는 엄마를 이해하며 응원하는 지원군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의 유일한 취미인 바느질은 무생물이지만 17년 이상을 함께하며 즐겁고 힘들 때 바로 옆에서 나를 세워준 죽마고우 같은 존재다. 때로는 재봉틀로 스피드하게, 때로는 작은 바늘로 천천히, 내 인생을 예쁘게 꿰매고 있다.

바느질하는 사람은 심심하거나 우울할 시간이 없다. 뭔가를 늘 새롭게 만들고 꿰매고 바느질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곳적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바쁜 현대까지 바느질이 여인네들의 사랑을 받나 보다. 우리 바느질 한번 할까요?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Oil on canvas. 1909.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글을 써~

고욱향 58세. 주부. 전남 구례군 구례읍

취미도 참 많았다. 어릴 적 나의 취미는 쑥, 나물 캐는 거였다. 초등학교 때 학교 갔다 돌아오면 숙제는 하지 않고 내 키보다 더 큰 소쿠리를 들고서 들판으로 나갔다. 해가 질 때까지 쑥을 뜯었다. 그때 당시에는 쑥버무리를 많이 해서 먹었다.

중학교 때 취미는? 등산을 자주 다녔다. 일요일이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산행을 하였다. 고등학교 때 취미는? 자전거 하이킹이었다.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서 산들바람 맞으면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페달을 밟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울 할머니께서는 ‘가스나’가 겁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회초리로 때리시고 혼내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기를 그만둔 후에는 기차 여행을 좋아했다.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해서 열차 기관사한테 시집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린 마음에. 호호~.

세월은 흘러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글 쓰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너무나 사랑했던 친정엄마가 2000년도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세상이 없어진 것 같았다. 병원에도 입원하고 악몽에도 시달렸다. 3년 동안 아팠다. 그러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에 대한 시를 쓰고, 엄마하고의 추억을 썼다. 시골에서 같이 나물 캤던 것,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갔던 것…. 엄마하고의 추억을 글로 쓰다 보니까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다.

그 후에는 매일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겁나게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쓰고, 지나가다 풀하고 대화한 것도 쓰고, 버스를 타며 느낀 것,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도 글로 썼다. 어린 시절 취미 생활을 하며 겪었던 많은 추억들도 글로 써내려갔다. 글을 쓰고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고 잡생각이 사라졌다.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주었다.

글을 쓴다는 게 참 쉽고도 어렵지만 슬퍼도 글을 쓰고 즐거워도 글을 쓰고 그냥 생각이 나는 대로 쓸 수가 있어서 참 좋은 취미인 것 같다. 글로 인해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한번은 여고 졸업할 때 할머니가 싸온 퉁퉁 불어버린 짜장면을 먹던 추억 등을 써서 라디오 프로그램에 기고를 했다. 그랬더니 라디오에 방송되고 선물도 받았다. 엊그저께는 36년 만에 고등학교 후배를 만났다. 나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인터넷에 내가 기고하는 글을 보고 찾게 된 것이다.

그냥 쓰고 싶을 때 쓰고 나서 읽어보면 서툴고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편지글을 써서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딱 붙여서 우체통에 쏘~옥 집어넣는 재미도 있다. 글 쓰는 취미 땜에 지금도 월간<마음수련>에 보낼 글을 쓰고 있으니, 룰루랄라~.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한 일상의 행복인가 싶다. 서투른 글이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잊고서 욕심 없이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기쁨. 요즘 말로 ‘짱’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내가 교통을 사랑하는 이유

박장식 17세. 학생. trainholic.kr.pe

나의 취미는 대중교통을 타고 곳곳을 다니는 것이다. 한강을 두 번 건너는 버스 463번을 타면 서울 여행도 한 방에 할 수 있다. 양재를 출발해, 도심을 거쳐 여의도로 가는 463번은 역삼동 테헤란로, 신사동 가로수길, 세로수길, 서울숲, 신당동 떡볶이타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손기정기념공원, 국회의사당… 등 시티 투어 버스보다 더 많은 관광지를 거쳐 간다. 그래서 463번의 별명은 1,050원짜리 서울 시티 투어 버스다.

이 더운 여름, 에어컨 ‘빵빵한’ 시내버스를 타고, 많은 걸 경험할 수 있으니 학생인 나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이다.

이런 취미를 갖게 된 데는 아주 멋진 계기가 있었다.

중1 때 가족과 함께 정동진으로 밤 기차 여행을 갔다.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서 있던 한 열차. 그 열차 기관사님의 “타볼래?”라는 한마디에 들어가 본 기관실. 중1의 눈에 비친 기관실은 환상이었고 나중에 교통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 틈만 나면 환승을 이용해 하루 종일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놀았다.

취미는 취미를 넘어 진로가 되었다. 교통에 푹 빠진 한 ‘중딩’은 좋은 고등학교를 뒤로하고 교통 특성화고에 진학하게 되었고, 교통학도가 되어 미래의 교통 현업에 종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ITS니 아프라 막스니 하는 전문적인 교통 단어도 사용하게 되었고 말이다.

점차 발을 넓혀 철도 동호회도 가입하고, 주제를 정한 테마 교통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 우리 집에서 대전까지 시내버스만 타고 이동해보기, 서울에서 가까운 간이역들 탐방하기, 지방 곳곳에 폐선된 열차역들 탐사하기, 지방 어딘가로 나간 다음 그 인근 교통 관련 포인트들 답사하기 등등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간이역들을 다니다 보면, 후세에 전할 수 없을 이 아담하고 멋진 역들의 풍경을 내 눈 속 뷰파인더에 오래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작년 말에는 폐선된 부산 송정역에서 해운대역까지 탐방을 다녀왔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점점 느린 교통은 버림받고 빠른 것만이 사랑받는 시대가 되어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봇짐 메고 2주 넘게 오가던 길은 하루 안에, 반나절에, 그리고 네 시간 만에, 드디어 시속 300km의 속도로 두 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의 발달이란 빠르게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반면 교통의 미학은 빠른 길 사이에 느린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길,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길, 아니면 KTX를 타고 가는 길 사이에 쏙쏙 껴드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가는 길. 철도라는 두 가닥의 좁은 길을 쭉 직선으로 만들어 빠르게 오가는 열차도 있고, 굽이굽이 좌우로 허리를 틀며 느리게 오가는 열차도 있다.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가 하면, 구불구불하니 자갈이 가득한 비포장도로가 있기도 하다.

이 길은 모두 연결된다. 고속도로는 어느새 국도가 되고, 국도는 어느새 지방도가 된다. 그 지방도는 다시 돌고 돌아 고속도로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버스를 타든 외제차를 몰든 모두 한길을 지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혀 만날 일 없어 보였던 많은 사람과 만나고, 나이를 넘어선 친구가 된다. 이것이 내가 교통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이다.

또한 교통이라는 취미를 통해서 나의 재능들도 하나하나 발견됐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나의 여행기를 올리고 개인적으로 팟캐스트에서 교통 라디오도 하고 있다. 짧은 17년 인생이지만 교통으로 배운 인생의 진리는 크다. 그것이 내가 교통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유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Road with Flowering Almond Trees>
54×77cm. Oil on canvas.

술과 음식, 두 마리 토끼 전문 사냥꾼의 자화자찬

홍경석 56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계족로

장마가 실종되어 더 무더운 즈음이다. 때문에 퇴근하여 귀가하자마자 나름의 여름나기 ‘비방’을 세웠다. 우선 동네 초입의 과일 가게에서 사온 자두를 안주 삼아 냉장고에서 꺼낸 소주에 얼음을 타서 마셨다. 이름하여 이열치열(以熱治熱), 아니 ‘이냉치냉(以冷治冷)’! 평소 나의 ‘취미’는 이처럼 일주일에 1~2회 음주하는 것과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다만 음주와 음식 만들기의 ‘참여 수준’은 고작 ‘취미스런’ 아마추어 수준이란 걸 먼저 강조코자 한다.

아무튼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볼일이 있어 친정에 갔던 아내가 들어섰다. 그러면서 아니나 다를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웬수야, 저녁도 안 먹고 또 빈속에 술 마시는 겨?” “응, 소주는 빈속에 채워야 더 맛나는 겨. 그나저나 저녁은 먹고 온 겨?”

구시렁거리는 아내를 치지도외하며 소주를 한 병 더 마셨다. 그러자 아내의 지청구는 더했다. 순간 얼마 전 일독한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에서 본 세조와 정인지의 끈끈한 ‘주당 의리’가 떠올라 미소가 양미간에 걸렸다.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는 술에 취하여 임금인 세조에게 감히 “너”라고 부르는 불경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술을 마시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라며 용서했다고 한다.

물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일정 기간 귀양을 보내긴 했다지만. 이 책에 따르면 또한 반대로 술에 취했는데도 실수가 없었던 어효첨을 기특하게 본 세조는 그를 이조판서에 임명했다고 하니 역시나 술은 과유불급이 최선이지 싶었다.

여하튼 세조가 정인지를 용서한 걸 보면 그가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히 극악무도한 인물은 아니라 때론 대장부이기도 했다는 셈법이 슬며시 엿보인다.

그랬거늘 아내는 왜 늘 내가 술을 마실 때면 잔소리를 그리도 그치지 않는 것일까? 각설하고 술을 꽤 마셨음에도 안주가 달랑 과일인 자두뿐이었는지라 밥배(밥을 먹거나 들어가야만 양이 찰 배)는 고프기에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곤 아침에 내가 만든 꽁치 열무찌개를 데워서 약간의 밥과 함께 먹었다.

오늘 아침, 건강이 안 좋은 아내의 조반상 차리기 역시 내가 할 일이었다. “여보, 꽁치 열무찌개 먹을 텨, 아님 호박잎에 감자와 호박까지 들어간 걸쭉한 된장찌개 먹을 텨?” 아내는 아침부터 생선 비린내는 싫다며 후자의 음식을 원했다. “잠깐만 기다려, 곧 데워서 대령할 테니까.” 삶은 호박잎과 감자 호박 된장찌개 또한 나의 ‘작품’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이사한다. 그래서 아들과 딸도 그에 맞춰 이사하는 집으로 온댔다. 그래서 말인데 아이들도 인정하는 나의 음식 솜씨는 수십 년 간 축적한 내공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생후 백일 즈음에, 너무도 일찍 어머니를 잃었다. 홀아버지께선 늘 술만 드셨고 공부 잘했던 나를 중학교조차 보내주지 않으셨다. 대신 소년 가장이 되어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를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오로지(!) 먹고살아야 했기에 식당서 밥을 사먹으면서도 주방 아줌마의 음식과 반찬 조리 노하우를 나름 머릿속에 저장하는 걸 습관화했다.

세월은 여류하여 나는 50대 후반이 되었고 두 아이는 당장에 결혼을 하여도 전혀 하자가 없는 낙낙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올 초부터 아내가 더욱 건강을 잃으면서 나는 지금도 주부가 해야 하는 일을 모두 하고 있다. 밥이야 전기밥솥이 짓지만 반찬 만들기와 설거지, 빨래와 청소 역시도 내 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상, 술도 잘 마시고 음식도 잘 만드는 이른바 ‘두 마리 토끼 전문 사냥꾼’의 자화자찬이었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녀석들도 좋아하는 치즈 얹은 떡볶이를 모처럼 또 멋들어지게, 아니 ‘맛들어지게’ 만들 요량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꽤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취미 하나 쯤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버려진 껌딱지 위에 그림을 그리며

김형철 33세. 직장인, 껌 그림 캠페이너
www.facebook.com/gumpainting, cafe.naver.com/gumpainting

남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특별했던 유년 시절을 보낸 내게 있어 그림은 잠시라도 슬픈 생각을 멈추게 해주는 도구였다. 줄곧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그 후 군대를 다녀와 복학했고, 그때 마침 듣게 된 강의가 있었는데 오늘까지도 나의 가치관과 생각들에 많은 영향을 준 ‘타자성’이라는 주제의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주체성의 반대로, 주체로 인정받기보다는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는 수업이었다. 그 수업 속에서 나는 ‘버려진 이기심’이라는 주제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때 관심을 가졌던 것 중 하나가 길바닥에 덕지덕지 붙은 껌딱지였다.

사람들이 무심코 씹다가 길에 뱉고 간 껌, 밟히고 더러워져 도시의 보도블록 위에 거뭇거뭇 흉물이 되어버린 껌딱지들. 매년 버려지는 껌딱지의 양은 엄청나다고 한다. 껌딱지를 제거하는 비용만 한 도시 기준으로 180억. 이는 2000명가량의 인원이 일 년 내내 떼어내도 전부 제거 불가능할 정도의 양이라고 한다. 결국 껌을 떼어내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껌딱지를 통해 ‘사람들이 껌을 씹거나 뱉을 때 경각심을 갖게 될 수 있을까?’ ‘우리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소비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고, 결국 나는 붓을 들고 나가 길바닥에 엎드려 버려진 껌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껌 그림’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그려 넣다가 동물에 관심이 많아 유기 동물, 반려 동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려 넣게 된다. 많은 분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신기하다는 듯 말을 걸어오신다.

그때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바닥에 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몰랐다”는 거였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다.

길 위에 엎드려 껌 위에 그림을 그리는 나를 보고 나서야 사람들은 버려진 껌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껌딱지에 그려진 그림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지만 버려진 것을 새로이 하는 ‘껌 그림’ 활동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껌 그림’ 활동은 어느새 나의 가장 소중한 취미이자 대표적인 미술 활동이 되어버렸다. 201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껌 그림 캠페인’이라 하여,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껌 그림’을 그리는 미술 캠페인 활동으로 키워나가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 과정에서 여러 미디어를 통해 소개가 되었다.

어렸을 때 내가 꿈꿔왔던 것처럼 미술을 계속하며 살아가고 싶다. 초심으로 돌아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내가 행복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이 ‘껌 그림’들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조금씩 변화돼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먹을 수 있는 정원’ 가꾸기

최오균 작가. <사랑할 때 떠나라> 저자

“여보, 요즈음은 마트에 가도 야채나 과일 쪽으로는 눈이 전혀 가지 않아요.” “흐음, 그게 무슨 소리지요?”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턱밑에 야채와 과일이 널려 있으니까 그렇지요.”

요즈음 우리 집 텃밭에서는 철 따라 야채와 과일이 우리 식구가 먹을 만큼 생산된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제때에 밥상에 올라오게 되니 아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더욱이 하얀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싱싱한 무공해 야채를 무시로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이곳 최전방인 연천군 임진강변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임진강변으로 이사를 온 후 나는 주변에 버려진 자갈밭과 모래땅을 삽 한 자루로 손수 일구어 200여 평의 텃밭을 야금야금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취미 삼아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농약이나 제초제는 물론 화학비료도 일체 주지 않고 퇴비와 물로만 농사를 짓고 있다.

여전히 왕초보 농사꾼인 우리 부부는 봄부터 가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리 넓지 않은 텃밭이지만 무려 30여 가지가 넘는 채소와 과일류 등을 심다 보니 서투른 농사꾼은 바쁠 수밖에 없다. 상추, 쑥갓, 부추, 배추, 무, 당근, 감자, 고구마, 호박, 토마토, 오이, 가지, 참외를 비롯해서 검은 콩, 대두 콩, 땅콩, 들깨…. 텃밭은 마치 야채 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와 나는 제일 먼저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달려간다.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라나는 야채들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흐뭇해지고 만다. 농약이나 제초제를 일체 살포하지 않다 보니 텃밭에는 철 따라 각종 야생화가 피어난다.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청개구리가 거실까지 들어온다. 밤에는 반딧불이 등불을 켜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잡초 우거졌던 자갈밭이 어느덧 ‘먹을 수 있는 정원’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먹을 수 있는 정원으로 변한 텃밭에서 매일 풀을 뽑고, 물을 주며 지극정성으로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 마치 모든 농작물을 자식을 돌보듯 하다 보니 작물 하나하나의 상태를 언제나 소상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가꾸고 정성을 들인 농작물들이 우리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다. 아내는 오랫동안 난치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급기야 몇 해 전에는 심장 이식까지 하게 되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 같았던 아내가 텃밭을 함께 가꾸면서부터 건강도 점점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흙을 만지며 자연의 품에 안기다 보니 욕심이 덜어지고,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운동이 된다. 조용한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도심에서처럼 보고 듣는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된다. 거기에다가 공기 맑고 공해 없는 곳에서 손수 지은 싱싱한 무공해 채소를 먹다 보니 자연히 심신의 건강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지난주에 여름 당근 씨를 파종했는데 비가 오자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다. 당근 밭에는 쇠비름이나 바랭이 풀 등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있다. 이들 잡초를 뽑을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한다. 잡초는 잔뿌리가 많고 깊어서 조심해서 뽑아내지 않으면 당근 모종까지 통째로 뽑히고 만다.

텃밭을 가꾸는 것은 마치 내 마음의 밭을 가꾸는 것이나 다름없다. 종자를 파종을 하여, 모종을 솎아내고, 잡초를 일일이 뽑아내는 일은 어지간한 인내심과 집중력이 없으면 해내기가 쉽지 않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아티샤는 “돌이켜 보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지켜보아, 항상 모든 감각의 문을 지키라”라고 말했다. 사물을 주의 깊게 돌이켜 보고, 기억하는 마음의 기능을 아티샤는 마치 쇠갈퀴와 같다고 말했다. 마음이 온전치 못하는 곳으로 방황할 때에는 이 쇠갈퀴가 떠도는 마음을 낚아채서 온전한 자리로 다시 끌어온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가 텃밭에서 작물을 가꾸는 일도 마치 이 쇠갈퀴의 작용과 같다.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작물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이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마음을 반성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의 텃밭에서 매일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Étude de Chrysanthèmes I>
61×61cm. Oil on Panel.

웬만한다 고친다

원성룡 72세. 전남 광양시 광양읍

나의 어릴 적 취미는 뜯고 부수고 고치는 것이었다. 집에 있는 커다란 라디오 속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서 너무나 신기해서 라디오를 뜯었다. 그것 참. 작은 부속품들이 참으로 복잡하였다. 뜯어서 또다시 똑같이 조립을 했더니? 노래도 잘 나오고.

야호~ 신난다 하면서 그 후로 집에 있는 전자 제품을 뜯어서 부수고 고치고~.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여러 개의 라디오를 뜯고 고쳤다. 공부는 하지 않고 고치는 것이 재미있어서.

고치고 부수고 딱딱 뚝뚝 집에서는 망치 소리가 요란하였다. 옆집 아줌마~ “와 그리 뜯어? 취미도 별나네그려.” 어떤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쪼깐한 게 기특하단 말이여” 하면서 칭찬을 해주셨다. 뚝딱 딱딱 망치 소리가 좋아서 건축 일을 시작하였다. 건축 현장에 다니면서 하늘 높이 치솟는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취미 생활은 계속하였다.

내 손만 닿으면 모든 게 척척 착착이다. 만능 박사처럼 손으로 만드는 것은 다 고친다. 재활용을 참 잘하는 장점이 있다. 거리를 지날 때 쓰레기통에 꽉 처박혀 있는 돌아가지 않는 선풍기를 보았다. 내 손이 척척 착착 버려진 선풍기를 고쳤다. 이후 버려진 선풍기를 주워서 고쳐서 쓴다. 또 친척들께 골고루 나누어준다. 선풍기를 고쳐서 쓰면 정말 새것처럼 윙윙윙 잘도 돌아간다. 하하하.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우리 집 수도가 고장 났어요” 하면 수도도 고치고 보일러도 고치고 냉장고도 고쳐 드리고. 나는야 재활용을 잘도 하는 아주 좋은 사람이다. 세탁기도 고쳐 주면 “고맙슈다~ 고마워요~” 한다. 내 손으로 할 수 있어서 내 취미가 아주 자랑스럽다.

남들이 못 쓴다고 버린 물건을 보면 정말 아깝다. 고쳐서 쓰면 될 건데 왜 버릴까? 버리지 말고 재활용합시데이. 옛날에는 라디오가 집집마다 있었는데 요즈음은 드물다. 라디오 없으신 분들 거리를 지나다가 버려진 라디오 있으면 주워서 고쳐서 씁시다. 소형 라디오는 자전거 하이킹할 때 듣고 대형 라디오는 밭에서 일할 때 휴식 시간에 틀어놓고 일석이조 아닌가요? 물건을 버릴 때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립시데이.

필요 없다고 버린 물건들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엉엉엉엉 울고 있으면 모두~ 다~ 나에게로 오면 보물단지가 된다. 어때요? 저의 취미 자랑할 만한가요? 어떤 사람들은 저런, 저런 못 쓰는 선풍기를? 하다가도 다 고치고 나면 서로 달라고 난리다. 나의 취미 생활에 만족한다.

무더운 여름날. 윙윙윙~ 시원하게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시원하게 돌아가는 선풍기처럼 시간도 엄청 빠르게 지나간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나는 강철멘탈일까? 유리멘탈일까?

멘탈(정신)이 튼튼하여 아무리 지독한 위기 상황에서도 멘탈 붕괴(줄여서 ‘멘붕’)는커녕 위기를 거뜬히 헤쳐 나가는 사람을 ‘강철멘탈’ 또는 ‘멘탈갑’이라고 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대인 관계, 육아에서까지 이제 실력만큼이나, 어쩌면 실력보다 더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멘탈, 정신력이지요. 실직, 이혼, 사고….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멘붕 상황은 일어납니다. 쓰나미 같은 역경도 의연히 감싸 안을 수 있는 멘탈갑이야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진정한 능력자가 아닐까요? 이 세상의 모든 ‘두부멘탈’ ‘유리멘탈’ ‘쿠크다스멘탈’에게 희망을 주는 멘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멘붕을 이겨내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간단한 질문 같지만, 사실은 매우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나의 멘탈은 더 약해질 수도, 강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직업(회사원, 운전기사, 변호사)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아내, 어머니, 친한 친구)를 말한다. 하지만 자신을 직업이나 관계로 한정시키면 위기 상황에서 ‘나’라고 믿었던 그 모습은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한 남자의 아내라고 정의한 사람은 결혼 생활이 끝나버리면 자신의 삶도 끝나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으로 정의한 여성이라면 직장을 잃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의 개념을 더 크고 다양하게 바꾼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뛰어넘을 수 있고 더 즐겁고 창조적이며 성취감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을 좁게 정의하고 그 틀에 갇히는 한, 우리는 여러 번 위기를 맞게 되고 인생의 큰 변화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도 중요한 질문이다. 나의 믿음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이 멀리 떠날 수도 있다.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내가 겪는 현실이 신념을 흔들고, 믿음을 포기하게 몰고 간다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위기 상황이 내 믿음을 깨뜨릴 때, 질문을 던지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좁은 틀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 질문에 답해보자. 앞으로 자신이 얼마나 유익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 참조 도서 <위기의 심리학>(로라 데이 | 허원미디어)


스포츠계의 강철멘탈 3인

영원한 캡틴, 박지성
평발과 왜소한 체격. 축구 선수로서는 너무나 불리한 신체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그라운드의 구석구석을 쉴 새 없이 누비며 ‘두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박지성 선수. 히딩크 감독은 그의 성실함을 알아보고 2002 월드컵 국가대표로 발탁했고 박지성은 보란 듯이 데뷔 골을 터트렸다. 그 후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며 슬럼프도 겪었지만, 비판과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으며,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기록됐다.
“쓰러질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
“우연은 그저 자연발생적인 것이지만, 행운은 직접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왜 골을 넣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당신은 왜 꾸준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한국 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최초의 한국 선수로 첫해 11경기 만에 완봉승을 거두며 ‘괴물’ 투수로 등극했다. 이긴 경기는 몇 시간씩 보고 또 보고, 뉴스 기사에 댓글까지 꼬박꼬박 챙겨 보지만, 공을 못 던진 날은 ‘그냥 밥 먹고 잔다’는 초긍정 멘탈의 소유자. 경기장에서는 두둑한 배짱과 포커페이스로 타자를 따돌리고, 경기장 밖에서는 밝은 인사와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LA 다저스의 분위기 메이커로 통한다.
“항상 자신감 있게 던진다. 볼넷 줄 때도 자신감 있게 던지는데 볼넷이 나오는 거고, 홈런 줄 때도 자신감 있게 던지는데 홈런이 나오는 거다. 그건 결과인 거 같다.”
“류현진은 자신감이 있고 공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던질 줄도 안다. 그러면서도 마운드에서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침착하다.” – 돈 매팅리 LA 다저스 감독

피겨 퀸 김연아
어릴 적부터 은퇴하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부상, 열악한 훈련 환경과 온갖 방해 공작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강철멘탈의 대표 주자. 점프의 교과서로 불리며 전 세계 피겨 팬들과 피겨 꿈나무들에게 감동을 선사해준 김연아 선수. 4년 전 여자 싱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정상에 우뚝 섰다가 1년 8개월의 공백기를 가진 후 2012년 12월 독일 NRW 트로피와 2013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우승을 거머쥐는 등 어떤 악조건도 그녀의 멘탈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피겨는 기록으로 성적이 나는 스포츠가 아니다. 선수가 매번 잘할 수도 없고, 매번 똑같은 기준으로 심사받을 수도 없다. 심판 판정 부분은 내가 생각할 문제도 노력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나는 그저 만족스러운 경기를 하고,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경기를 보여주느냐다. 그 후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 인정하고 털어버리고 기분 좋게 끝내겠다.”


나는 멘탈갑일까? 자가 진단 테스트

1. 남들이 뜯어말리는 선택을 한 적이 있다.
2. 내 삶에는 감사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3. 정기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4.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등 취향이 확실하다.
5. 시간과 돈을 투자해 몰두하는 취미 활동이 있다.
6.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7. 지금 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다.
8.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다.
9. 유머 감각이 뛰어난 편이다.
10. 옳지 않은 것에 맞서 대항한 적이 있다.
11. 다시 태어나도 나로 살고 싶다.
12.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부모님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다.
13.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
14. 한 달에 한 번 이상의 실패 경험이 있다.
15.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16. 다니는 학교나 직장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17. 계획은 꼭 행동으로 실천한다.
18. 내키지 않는 결혼식이나 돌잔치는 욕을 먹어도 가지 않는다.
19. 작년의 나보다 올해의 내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20. 지금 행복하다.

● 15개 이상: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당신! 당신을 이 시대의 멘탈 갑으로 임명합니다.
● 10개 이상~14개 이하: 아직은 멘탈 ‘을’인 당신! 조금 더 삶에서 주인 의식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 9개 이하: 멘탈 붕괴에 취약한 유리멘탈인 당신. 몸짱, 얼짱도 좋지만 강한 멘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보세요!
● 출처: 멘탈갑연구소(labmental.tistory.com)


나를 아는 것이 강철멘탈의 시작

나는 오랫동안 세상에 마음을 닫고 살아왔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줄도 몰랐고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당연히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어려웠다. 직업 군인으로 20여 년간 근무를 하면서도 이런 성격은 큰 장애물이었다. 군대에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일들도 꽤 많았는데 발표만 시작하면 말더듬 증상이 심해지고 머리는 하얘지고 온몸이 얼어버렸다. 발표를 제대로 끝낸 적이 없었다. 괴롭고 외로워서 술도 많이 마셨다.
나를 바꿔보려고 노력도 많이 해봤다. 마라톤도 하고 극기 단체에도 가고,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이미지 트레이닝, 담력 테스트도 했다. 그런데도 다시 남 앞에 서면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김없이 실수를 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고 ‘나를 찾는 공부’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와 수련을 시작했다.
내 삶을 돌아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매일 곡식을 빌리러 다니셨고 어린 나의 기억 속에 부모님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내면에서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생겼다. 나의 어릴 적 기억부터 말을 더듬고, 얼굴이 빨개지고, 자신감 없었던 내 모습들을 모두 버려나갔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더듬던 증상이 사라지고, 일상에서 의욕도 생겼다. 얼마 전부터는 군 생활을 그만두고 병원 물리치료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친엄마처럼 느껴지고 엄마 앞에서처럼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 모습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니 환자분들도 그 마음을 봐주시고 좋아해주신다.
나를 아는 것부터가 강철멘탈의 시작인 것 같다. 항상 반성하고 잘못을 인정하기,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기, 그런 실천이 모여서 나를 바꾸고 그것이 강한 정신력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 홍의현 44세. 병원 근무


멘탈갑연구소 김미진 소장의 ‘멘붕 이겨내는 노하우 3’

나는 꿈을 찾는답시고 백수 생활을 1년 넘도록 지속했었다. 알게 모르게 기죽고 우울해하며 자존감이 점점 무너져갈 무렵, 스스로에게 새로운 직업을 주고 싶어 ‘멘탈갑연구소’라는 블로그를 만들고 연구소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시작했지만 이왕 연구소까지 열었으니 멘붕 탈출을 위한 콘텐츠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긍정심리학 책, 좋은 강연, 다큐멘터리 등을 찾아 블로그에 올렸고, 곤경에 처한 주인공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내용의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캐릭터 분석에도 들어갔다.
‘멘탈갑’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20대 때 방황의 시기가 있었고 그것이 현재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몸이 약해서 좋은 건 없듯이 정신이 나약하다고 해서 좋은 점도 없다. 4년간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터득한 ‘멘붕 상황을 이겨내는 노하우’를 공유해본다.

① 인터넷 검색 : 멘붕 치료의 핵심은 이 세상에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상사한테 혼이 났다면 ‘상사한테 혼남’으로 검색을 해보자. 그러면 무수히 많은 직장인들의 한과 설움의 글들이 검색된다. 그 순간 ‘나만 특별한 게 아니구나, 신입 사원 때는 다들 이렇게 혼나고 사는구나’를 확인하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 페이스북처럼 이미지 중심의 SNS들은 과장된 행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아서 추천하지는 않는다.

② 꾸준한 멘탈 트레이닝 : 멘탈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세뇌’가 필요하다. 멘탈갑연구소에 자주 들러서 멘탈 트레이닝을 해보자. 주변에 밝은 사람만 있으면 따라하게 되듯이 좋은 이야기, 의지를 주는 글을 계속 읽다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③ 하고 싶은 일 하기 : 멘붕 상황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고 해야 되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럴 때 잠깐씩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일상의 원동력이 된다. 내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자아를 탐색해 나가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

마음을 빼면 ‘예술감’도 다 사라지는 걸까?

객원기자 이기자입니다. 저는 훈훈한 인상의 한 중년 사진가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완벽주의 때문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고, 잘나가고 싶고 각광받고 싶어서 몸살을 앓던 사진가였다며 자신의 과거를 ‘셀프 디스’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작가님하고 일하는 게 편해요”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며 ‘깨알자랑’도 빠뜨리지 않더군요. 그의 말대로라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리얼하게 들어봤습니다.

원래 사진가가 되는 게 꿈이었나?

사진을 전공하고 작은 잡지사에서 사진 기자 노릇을 했어요. 그러면서 일간지로 가고 싶어서 노력 많이 했죠. 그쪽 사람들 만나서 짜웅도 하고 설레발도 많이 치고. 근데 기회가 안 왔어요. 아니, 그들이 기회를 안 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때려치우고 웨딩 스튜디오를 열었어요. 예식장과 거래하면서 찍고 또 찍었죠. 금액은 쌌지만 그래도 많이 해서 돈을 벌었어요. 그러다 보니 나도 비싼 거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코엑스 웨딩 박람회에 참가했고, 그 이후 원하는 대로 비싼 손님들이 들게 되었죠. 그 과정에서 스튜디오 직원들을 엄청 힘들게 했어요.

직원들을 어떤 식으로 힘들게 했다는 건가?

제가 완벽주의자였거든요. 제 기준에 안 맞으면 엄청 갈구고 닦달한 거죠. 그렇지만 비싼 손님들 많이 해서 돈을 버니까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웨딩 손님들이 자꾸 묻는 거예요. 사진작가 누구 아시냐고. 누구누구 아시냐고. 자꾸 그러니까 ‘아, 나는 그냥 사진 찍는 기사 아저씨구나.’ 이런 자괴감이 드는 거예요. 점점 사진 찍기 싫었어요. 사람들도 만나기 싫고. 지금 생각해보면 웨딩이나 찍고 있는 나를 스스로 비하하고 있었던 거예요. 힘들었어요. 사는 맛도 안 나고. 그러다 우연히 마음수련을 시작했어요. 수련을 하니, 점점 내 모습이 보이더라구요. 잘난 척하고 과시하고 싶고, 그런 마음 뒤편에는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거.

어느 날 딸을 데리고 워싱톤과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그러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문득 외국 사진을 찍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돌아와서 그때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고 잡지사마다 전화했죠. 나 이런 사람인데 사진 찍게 해달라고. 그 후 모 항공사 기내지에 내 사진이 팔리고 그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수련하고 뭐가 달라진 것 같나?

전에는 말이 엄청 많았죠. 나 드러내기 바쁘고 나는 이렇다 저렇다, 척하느라고. 예전에는 누가 나한테 싫은 소리하고 간섭하면 백번 천번 삐쳤어요. 수련을 하면서는 말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애요. 상대가 뭐라고 말하건 ‘아~ 그렇구나~’ 하고 들어요. 해외 나가고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 대하는 게 달라졌어요. 마이클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했구나, 그걸 금방 인지할 수 있게 된 거지. 그러니까 사람들하고 관계가 좋아지고, 편안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애요. 수련하고 객관적으로 늘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덕분이죠. 전에는 일거리 달라고 엄청 쫓아다녔는데 요새는 촬영 의뢰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아요. 없으면 없는 대로 내 시간 가지면서 연구도 하고, 마음수련도 더 집중해서 할 수 있으니까 좋잖아요.

마음을 빼면 예술감도 사라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솔직히 사진은 틀이 많아요. 이럴 땐 역광이니까 안 되고 중앙을 분할하는 구도니까 안 되고.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게 없어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내가 없으니까 그냥 찍고 싶은 대로 찍어요. 어떻게 찍어도 다 예술인 거예요. 상대가 원하는 건 또 그렇게 찍어줘요. 그런데 내 사진은 내가 찍고 싶은 대로 찍어요. 내가 찍을 때 행복하고 보는 사람이 편안한 사진들이 나와요. 나만의 세계에 빠져서 나 혼자 이게 멋진 거라고 외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래오래 좋아해주는 게 진짜 예술 아닐까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바라보는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누가 사진을 찍었는데 되게 어둡고 칙칙해요. 그러면 예전에는 엄청 시시비비를 했는데, 지금은 ‘어, 이 사람은 그렇게 보는구나~’ 하지 그런 마음이 없어요.

뭔가를 뺀다고 하면 내 거 다 빼가는 거 아냐?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련하고 제가 확실히 깨달은 건, 내 틀과 관념들을 빼낸 만큼 더 큰 마음과 지혜로 채워진다는 겁니다. 세상과 하나 되기 위해 사진도 찍어야지, 이 세상과 등지고 있으면서 나 혼자 아무리 유명해지고 잘나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멋지다, 예술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더욱 멋진 사람이 된 거 같다.

3과정 수련하며 느낀 건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나 하나 이렇게 만들려고 그랬구나, 싶어요. 일간지 안 간 것도, 웨딩 사진 찍게 된 것도, 뉴욕 갔던 것도. 수련하고 나의 본래가 우주라는 걸 알게 되니까 모든 게 우주 관점이 돼요. 우주는 자기 드러내려고 하고, 눈치 보고, 잘난 척하고 그러지 않잖아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작가님하고 일하는 게 편해요”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전에는 어떤 자리에 가도 남음이 있었어요. 잘못해도 그 마음이 남고 잘해도 남고, 그래서 항상 찜찜했는데, 그런 게 없어서 좋아요. 지금은 그냥 다들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지금 학교에선 ‘마음수련’ 명상 교육 열풍

폭력, 왕따, 게임 중독…. 학교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위기인 상황.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그 대안으로 마음수련의 ‘마음 빼기’ 방법을 접목시키는 선생님들이 있다. ‘하루 5분 빼기 교실’, 새로운 꿈을 찾아주는 ‘대안 교실’, ‘마음수련반’ 동아리 활동, ‘인성 특강’ 등, 2014년 1학기에만도 많은 학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100개 이상의 ‘마음 빼기’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스스로 마음수련을 한 후 내면의 변화를 경험한 선생님들이, 학교 교육과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빼기한 만큼 마음이 넓어지면서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인성 함양이 된다는 것을, 일선의 많은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정리 & 사진 최창원


임은숙 선생은 마음 빼기 덕분에 인생을 알고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다며 제자들이 보내온 카네이션과 편지에 마음이 뭉클했다고 전한다.

‘은따’ 두려움 버리고 스스로 세상에 나오다

임은숙 선생님 이야기

2012년 고2생들을 대상으로 ‘마음 빼기를 통한 집중력 향상반’을 개설했을 때였다. 친구하고 얽힌 사연들, 열등감, 무기력한 감정들, 사랑, 미래, 시험과 관련된 기억 등 집중을 방해하는 마음들을 빼기하자는 거였다. 매주 한 번씩 100분 동안 나의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려주고, 그 마음을 빼기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그런데 그중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남자아이치고는 왜소한 체형에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였다.

그리고 10회로 예정된 ‘집중력 향상반’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아이가 ‘지난 1년 동안, 셔틀, 심부름 등 어떻게 은따를 당해왔는지를 자세히 기록한 노트’를 자신의 엄마에게 준 것이다. “마음 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게 되었어요. 말하고 싶었는데 애들에게 더 왕따당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계속 두려움도 버리고 위축되는 마음들도 버리다 보니, 더 이상 이렇게 있지 말고 말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적기 시작했어요.”

괴롭힘에 가담했던 아이들 모두 징계를 받아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징계를 받으면 그 애들의 앞날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엄마들이 나서서 사과했지만, 아이는 용서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며칠째 학교에 못 나오고 있었다. 겨우 설득해 학교에 나왔을 때 계속 마음 빼기를 해보라고 했다. 더 깊이 버리다 보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보일 거라고. 며칠 후 아이가 친구들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했다.

“계속 수련하면서 내 마음을 보니, 친구들을 벌주어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었더라고요. 그냥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결국 친구들은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였고, 아이는 그들을 용서했다.

이 이야기는 임은숙 교사(현 구일고)가 전임교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아이는 그 후 다시 학교에 나와, 반 아이들하고 잘 어울리게 되었다고 한다. 임교사가 마음 빼기를 수업에 접목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스스로 마음수련의 효과를 경험하고부터다. 실제로 위의 사례처럼 마음 빼기만 시켰을 뿐인데 학생 스스로 열등감, 무기력감, 불면증 등을 해결하게 된 사례 또한 수없이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기쁜 건, 마음 빼기만으로 자신이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알고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경기여고 ‘마음 빼기 특강반’ 개설, 진정한 인성 교육의 길을 찾다

유안기 선생님 이야기

“요즘 아이들 누구나 힘든 마음이 있어요. 특히 공부, 입시 때문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자책감, 결과에 대한 불안, 두려움, 초조함도 많고요. 경쟁 스트레스에 지치다 보니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니 친구 관계에서도 너그럽지 못해요. 그런 마음들을 버리게 하면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고 여유가 생기면서, 친구들도 배려하게 되고, 학교생활도 훨씬 더 잘하게 되지요. 마음 빼기를 하며 자기 성찰을 조금만 하더라도 확연히 바뀌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경기여고에서는 올해 7월, 2주 동안 ‘마음 빼기를 통한 자아 성찰 및 집중력 향상 학생 인성 특강’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는 경기여고 연구부 부장 유안기 교사. 유교사가 처음 마음 빼기를 교육에 접목한 것은 8년 전 고3 담임을 할 때였다. 아이들을 위해 하루에 5분씩 ‘스트레스받았던 마음들’을 빼기하게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마음이 편해지며 집중력은 높아졌고, 대학 입시 결과도 좋았다. 몇 년째 그런 경험을 한 후 이번에는 아예 특별 인성 특강반을 개설한 것이다.

학기 중간, 모집 공고를 냈을 때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였다. ‘항상 마음이 복잡하고 답답해서 편안한 마음을 갖고 싶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부쩍 생각이 많아져 고민이다’ ‘집중력이 부족해 공부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아 맨날 후회하게 된다’ 등 참가하고 싶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집중을 요하는 프로그램이라, 자기소개서를 쓰게 해서 꼭 필요한 학생 20명을 뽑았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마음이 편해지고 비워진다는 걸 느낀다. 더 재밌게 공부하게 되었고, 수업 시간에 바로 질문을 못 했는데 이제 집중해서 들으니 다 하게 된다.’ ‘부모님의 기대가 크다 보니까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압박감, 스트레스, 시험을 볼 때마다 실수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답답한 마음이 치유되고, 이제는 후련한 기분이다. 앞으로도 집중에는 자신 있을 거 같다.’ ‘어떠한 일에 대해 내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2주 후 아이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집중을 방해하는 마음들을 버리면서 집중력이 확연히 늘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봄으로써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친구들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힘까지도 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2학기는 아무 걱정 없을 거 같아요.” 인성교육 특강에 함께한 아이들이 유안기 선생님과 함께 포즈를 취해주었다. 한수림, 류희재, 김은서 학생.(왼쪽 위부터)


경기여고 설문 조사 결과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별로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수업시간에 나도 모르게 멍해질 때가 있다
공부 때문에 짜증이 난다

저동중학교의 ‘마음 비움터’. 학생들뿐 아니라 학부모들을 위한 연수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1학기 동안 1기와 2기를 마쳤고, 2학기에도 진행될 예정이다. 저동중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좋아 벌써 30명이 대기 중이다. 그동안 김해능동초, 문성중, 태장고, 안양양지초, 경기여고 등 20여 학교에서도 학부모 대상 ‘마음 빼기’ 특강과 연수가 진행되었다.

학교에 마련된 ‘마음 비움터’

정연희 선생님 이야기

2012년 학교 폭력 예방 우수 사례로 교육부 표창을 받으며, 폭력 없는 학교로 알려지게 된 경기도 고양시 저동중학교. 이 학교의 2층에는 ‘마음 비움터’가 마련돼 있다. 방처럼 편한 바닥에 수련 의자가 놓여 있어, 누구라도 언제든지 와서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곳이다. 2012년부터 아이들을 위해 열었던 ‘마음 빼기’ 수업이 아이들의 폭력 성향을 줄이는 등의 긍정적인 성과로 드러나면서 학교에서 아예 빈 교실을 활용해 마음 비움터를 만든 것이다.

‘마음 비움터’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대안 교실’, 학부모들을 위한 ‘원활한 소통을 위한 마음 빼기 반’(5주간 10회, 20시간)도 열렸다. 대안 교실이란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교실. 승마, 조소, 도예 외에도 특별히 ‘마음 빼기’ 프로그램을 넣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며 앞으로의 꿈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정연희 교사는 2학기에도 빼기와 접목시킨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이 외에도 학교 특색 사업으로 실시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마음수련(홍성 서부초), 스마트폰 중독 학생을 위한 마음수련 프로그램(진해 중앙초), 1학년 학생을 위한 인성교육 캠프(예산고), 학생들의 꿈을 찾을 수 있는 대안 교실(선사고, 서초고) 등 2014년 상반기만 해도 다양한 주제,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 빼기 교육이 진행되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도록 해줄 수 있을까?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아이들이 밝게 성장해나가는 것을 볼 때면 더없이 기쁘다”는 선생님들의 마음만큼 ‘마음 빼기’ 교육 열풍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 먹어라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마음을 바꾸어 먹으라고 이야기를 한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개체인 자기의 입장에서
전체인 마음이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라는 이야기다.
 
개체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자기의 관점이지만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큰마음이라
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라.

– ‘마음을 바꾸어 먹어라’
<세상 너머의 세상>(우명 저)에서

인생의 어떤 전환점을 앞에 뒀을 때
그간의 틀을 다 털어내야 할 때도
사람들은 흔히 마음을 크게 먹으라고 합니다.
더 멋진 내일을 위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한순간 한순간이
우리에겐 바로 그때가 아닐까요.
 
마음을 바꾸어 먹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마음부터 비워내야 합니다.
나를 바꾸기 위한 1단계…
마음 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