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점자 스캐너 반지, 아이링

이름은?
아이링. Eye+ring. 점자 스캐너다. 시각 장애인들의 눈이 되어줄 수 있는 반지이기 때문에 아이링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나(정용)도 적록색약이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몇몇 색이 약간 헷갈리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는지 평소 장애인들이나 우리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개선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아이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품의 원리는?
평소에는 반지로 끼고 다니다 책을 읽을 때 반지를 돌려 손가락 첫 마디에 끼우고 사용한다. 반지 윗부분에 달린 스캐너를 아래로 향하면 책에 적힌 글자가 스캔되고 반지 안쪽에 점자 돌기가 글자에 맞게 차례로 튀어나와 손가락으로 점자를 인식할 수 있다. 음성 지원도 가능하다. 눈이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점자 스캐너도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사용하고, 휴대가 쉬우면서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구동 원리나 사용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평소 콘셉트 디자인뿐만 아니라 가구, 조명, 소품 등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디자인들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디자인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을 제품에 부여하는 마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라이프’지에 근무하면서 잡지에 실릴 사진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월터는 상당히 소심한 인물입니다. 같은 회사의 좋아하는 여직원 ‘셰릴’에게 직접 고백은커녕 인터넷 만남 사이트를 통해 ‘윙크’를 보내는 것으로 호감을 표시하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니까요. 게다가 어머니의 부양비를 비롯해서 동생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하루하루 꼼꼼하게 가계부를 작성해야 함은 물론, 다른 ‘특별한 일’을 할 여유도, 엄두도 못 내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무엇 하나 특별한 점, 특별한 경험도 없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월터에게 유일한 특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상상의 나래 속에서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로맨틱한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영화는 이런 월터의 상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특히 직장 상사와 벌이는 상상 속의 결투는 마치 슈퍼 히어로물을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칩니다.

그렇게 오직 상상으로만 위로받던 월터에게 더 이상 상상만 하고 있을 수 없는 현실 속의 위기가 닥칩니다. ‘라이프’지의 갑작스런 폐간 결정! 회사는 급변의 시기를 맞게 되고,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이 분실되면서 월터는 ‘구조조정 1순위’가 되어버립니다.

월터는 결국 분실된 그 사진을 찾기 위해 작가를 직접 찾아 나서게 되고, 상상으로 시작해서 그 상상이 조금씩 현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평범했던 한 남자의 성장기처럼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성장기는 월터가 갖고 다니던 물건을 통해 형상화됩니다.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된 날 누이동생으로부터 받았던 ‘생일 케이크’에서 시작된 특별한 경험은 역시 누이동생에게 받은 ‘고무 인형’을 거쳐 아이슬란드에서 ‘고무 인형’과 교환한 ‘스케이트보드’로 넘어가 음식점 ‘파파존스’를 지나 스케이트보드를 셰릴의 아들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꼭 닮아 있었던 그 며칠간의 행보는 소심했던 월터를 누군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남자로 변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보 가운데는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들기, 바다에서 상어와 싸우기 등이 포함되어 있지요. 이런 월터의 경험들은, 하루하루 정해진 틀에 맞춰 살아가느라 다른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현실 속의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며, 유쾌한 웃음을 선사합니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그리고 히말라야까지 향했던 월터의 뜻밖의 여정은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장에 직접 가서 촬영했다는 로케이션 선정 또한 아주 인상적이라, 월터처럼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아질 정도이지요. 게다가 장면 장면에 어우러지는 음악 역시 좋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매트릭스> 패러디 역시 재미를 더해줍니다.

감독이자 주인공 월터 역을 맡은 벤 스틸러는 기분 좋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들을 통해 ‘한 번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합니다.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라’고 권유하면서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이 가장 아름답다’고도 말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유쾌한 웃음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기분 좋은 여운까지 남겨줬던 영화. 새해 첫 영화로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형택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보관돼 있던 화첩은 2005년 영구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고, 8년 만에 그 전모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전시회와 함께 화첩을 최대한 재현한 영인복제본, 화첩의 환수 과정과 학술적 의미 등을 담은 단행본이 출간되는 등 관련 자료 및 연구가 집대성된 것도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겸재 정선(1676~1759). 어떻게 그의 화첩은 독일로 가게 되었을까?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 편집자 주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월 2일까지 열린다. 엮어진 화첩 특성상 한 번에 펼칠 수 없어 매주 화요일 한 면씩 교체돼 선보인다.

한국 문화를 사랑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1973년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는 논문을 준비하던 중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1927년에 발간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책에 3폭의 겸재 그림이 실린 걸 보고 놀란다. 1975년 그 실물을 찾아 독일 오틸리엔수도원까지 간 그는 무려 21폭이 담긴 <겸재정선화첩>을 발견하고 숨이 멎는 듯했다고 전한다. 어떻게 겸재의 그림들이 독일 한 수도원에 있게 된 것일까.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는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의 초대 총아빠스(대원장)였다. 그는 선교를 위해 1911년,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 하에 있었고, 그는 한국의 아름다운 미적 감성들이 말살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등 두 권의 책과 두 편의 기록 영화까지 만들며 한국 문화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성직자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특히 금강산에 매료되었다. 1925년 6월 금강산을 여행한 베버는 일본인 화가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들을 접한다. 그리고 일본인 화가의 ‘만물상도’와 겸재의 ‘금강내산전도’에 대한 비교를 책에 싣기도 했다.

‘일본인 화가가 다만 자신의 정신 속에 각인된 이 거대한 파노라마를 비단 폭 위에 모방하려는 의도만 있는 데 반해 한국인 화가는 계곡과 깊은 골짜기에 감추어진 산벼랑과 봉우리들에서 바라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사찰들과 암자들까지 빼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금강산의 한국적 조형 방식은 ‘금강산의 전체적 특성을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금강산에서> 중에서

<겸재정선화첩>의 내용을 보면 주제와 분야, 작품의 격조, 제작 연대 등에 차이가 있다. 즉 출처가 다른 그림들을 베버 신부가 수집해 한국의 화첩 방식으로 성첩하여 독일로 가져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재는 일본, 미국, 중국 등 20여 개국에 대략 15만 점 이상이 유출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에 환수된 것은 9,760점에 불과하다.(2013년 10월 기준) 많은 문화재 반환 사례 중에<겸재정선화첩>의 반환은 독일과 한국 가톨릭 수도원 간의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오랜 세월 동안 세 번의 전쟁, 두 번의 화마 속에서도 살아남은 화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고 있다.

숨 막힐 듯한 걸작 <겸재정선화첩>의 의의

<겸재정선화첩>은 진경산수화뿐 아니라 사의산수화, 고사인물화 등 다양한 화제(畵題)와 화풍을 담고 있어, 정선의 예술 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화첩이다. 겸재는 중국풍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산하를 우리만의 기법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라는 크나큰 성취를 이루어낸 ‘화성畵聖’이었다.

특히 겸재가 평생 가장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은 금강산이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어우러져 계절 따라 다른 절경을 연출하는 금강산은 조선의 긍지와 주체성의 상징이었다. 한눈에 보이지 않는 금강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겸재가 그린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겸재 화첩의 존재가 영미 미술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9년. 케이 E. 블랙(전 미국 덴버미술관 동양미술부 연구원)과 에카르트 데게가 함께 쓴 논문이 <오리엔탈 아트>라는 미술 전문지에 실리면서다. 케이 E. 블랙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숨 막힐 듯한 걸작’이라 감탄했다. 이후 화첩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경매 회사들이 수도원을 찾았고, 뉴욕의 크리스티는 예상 경매가 ‘50억 원대’라는 말을 흘리며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돈으로 거래한다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긴 수도원에선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화첩의 귀환,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돌아오는 것

2005년,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틸리엔수도원은 한국의 형제 수도원인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화첩을 돌려줄 것을 결정한다.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 등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반환 결정 당시 제6대 대원장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의 ‘담화문’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나의 선임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문화에 심취한 분입니다. <겸재정선화첩>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 선교 활동을 통해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처음부터 한국 문화에 대해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정으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사랑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화첩이 한국에서 더 많이 사랑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략) 저는 화첩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미술사학자인 이정희 박사는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 무척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화첩 반환이 보도된 후 한국인으로부터 감사의 이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와 기쁩니다. (중략) 화첩이 고향에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랍니다.’

몽골의 야생마


2014년 갑오년(甲午年) 새해는 말띠 해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이고 활달한 청말띠의 해다. 예로부터 “하늘을 다니기는 용과 같은 것이 없고, 땅을 다니기는 말과 같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말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우리 문화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이자 하늘의 사신, 중요한 인물 탄생을 알려주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천년 왕국이었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말이 전해준 알에서 태어났고, 고구려 시조 주몽은 기린말을 타고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힘찬 질주, 강한 생동감’을 상징하며 인류의 벗으로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는 말들. 그중 중국 리강 작가의 몽골말들을 소개한다. – 편집자주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인간과의 깊은 정서를 교감하고 있는 말은 오래전부터 농사, 사냥, 전쟁, 오락에 이용되면서 인간과 매우 독특한 동반 관계를 유지해왔다.
내가 찍은 말의 대다수는 중국 경내에 있는 것으로, 토종말, 몽골말, 이리말, 산단말, 삼하말 등이 있다. 이 사진들은 내몽골 오란포통에서 찍은 몽골말들로 대개가 마방에서 개량했다.
그곳은 위도가 높고 해발고도가 2,000미터에 달한다. 일 년의 절반은 눈에 덮여 있고, 겨울철에는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에 달하며 바람이 세게 분다. 몽골말은 대개 몸체가 크지 않고 달리는 속도도 그다지 빠르지 않지만,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겨울의 설경 속에서 뛰어노는 몽골의 야생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신비감이 느껴진다. 겨울의 설원, 새하얀 벌판, 백지처럼 드문드문 떨어지는 백양나무 잎과 하늘 아래 연한 하늘색을 띤 그림자, 그리고 눈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말들…. 침착하고 조화로운 만리설경에서 말들은 자유롭게 경주한다. 달리고 또 달린다.

사진 & 글 리강 (李剛·Li Gang)

사진가 리강 님은 1948년 하남성 중국 신양 출생으로 오랜 기간 동안 말[馬]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수년간 끈질기게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촬영해 왔습니다. 2009년 <馬>라는 작품으로 중국 촬영제에서 금상을 수상했으며, 대자연 속에서 무언가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말을 통해 말 사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정리 김혜진 & 자료 제공

<나 자신과의 대화>
(넬슨 만델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2013년 12월 5일,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서거했다. 한평생 아프리카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해온 넬슨 만델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했던 그는 훗날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이 된다. 취임식 날 자신을 투옥했던 백인 교도관들을 특별 귀빈으로 초청하며 자신의 평소 가치관을 몸소 보여줬던 그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인종을 떠나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화해와 용서’의 상징 넬슨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을 되새겨 본다. – 편집자 주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서로를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이 투표장에 들어오는 모습은 내 기억에 깊숙이 남아 있다. 길에 늘어선 사람들의 거대한 행렬, 생애 첫 번째 투표를 반세기 동안 기다려온 할머니들, 마침내 자유국가에 살게 되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백인 남녀들….
선거 기간 동안 전국엔 활기가 넘쳤다. 마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 것 같았다. 이것은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희생과 나보다 앞서 사라져간 모든 아프리카의 애국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감사할 수 없다는 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나의 사명은 나라의 상처를 한데 묶고 화해와 신뢰,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특히 소수 인종인 백인들과 혼혈인, 인도인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걸 알기에 그들을 안도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와 싸운 것이지 백인과 싸운 것이 아님을, 그리고 이제 모든 남아공인들은 하나 되어 서로 손잡고, 우리가 ‘한 나라 한 국민’임을 깨닫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했다.


영국 런던에 간 넬슨 만델라

아래 자신의 통행증을 태우는 넬슨 만델라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

1918년 나는 트란스케이 음베조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공동체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아버지 말씀과 우리 부족의 풍습을 따르며 생활했기에 적어도 인간이 만든 법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가끔 마을 회의가 열리면 템부족 모두가 참석하여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곤 했다. 그것은 내가 본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1948년 남아공의 백인들은 이 땅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를 수립했다. 백인이 흑인들을 격리하며 지배하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가 그것이다. 국민의 92%가 흑인이고 백인은 단지 8%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의 권리는 백인들이 독점한 상태였다. 흑인에게는 투표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고 토지 소유권마저도 없었다.

더 나아가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 시설, 거주지 등 일상의 세세한 구역까지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통행할 땐 반드시 통행증을 휴대해야 했고, 이를 어기면 즉각 체포되었다. 우리는 이 부당한 법에 대해 비폭력 운동으로 저항했다.

1960년 샤프빌에서 대규모 총격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면서 나는 비폭력 저항의 한계를 느꼈다. 이 사건은 비폭력 저항에서 무장 투쟁으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1962년 무장 투쟁 혐의가 발각되면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억압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

감옥 생활은 여러모로 큰 고통을 주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볼 수 없고, 고통받는 그들을 지켜낼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한편으론 감옥은 날마다 자신의 행동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난 내가 정말 오만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론 내가 힘들 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들에게 과연 충분히 고마움을 표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 너머엔 백인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내 의식을 억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나는 억압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 또한 증오의 포로이며, 편견과 편협함의 감옥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비와 관용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태어나면서 피부색이나 출신 배경, 종교 등을 이유로 타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듯이, 미움이 배워서 알게 된 것이라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감옥은 비록 내 육신을 가두었지만, 정신에는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었다.

세월이 흘러 전 세계에서 나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 1990년 2월 11일, 27년 만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1993년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의 끈질긴 대화와 협상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공식 선언하게 된다.

로벤 섬의 철조망

아래 로벤섬 감방 책상

“나는 선각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종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다.”

대통령 취임 후 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과거 인권 침해 사실에 대해 잘못한 점을 진실로 고백하되,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는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즉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실과 화해, 용서를 통해 과거를 알린다는 것이니까.

우리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함께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듯이, 나는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증오와 복수 대신 평화적 해결을 선택했다. 나는 나를 감옥에 집어넣고 아내를 핍박하고 내 아이들을 괴롭혔던 바로 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나갔다.

내 소망은 모든 남아공 국민들이 이 땅을 우리가 꿈꾸는 땅으로 바꾸는 데 다시 전념했으면 하는 것이다. 증오와 차별이 없는 곳, 집 없는 설움과 굶주림이 사라진 곳, 우리 아이들이 미래 지도자로 자랄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가 인간의 유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기본적인 인생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넬슨 만델라(1918~2013)는 1918년 남아공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났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며 흑인 인권 보호에 힘썼다. 1943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들어가 1962년 8월 체포될 때까지 집권당인 국민당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했다. 1993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첫 흑인 대통령이 된다. UN 총회는 그의 생일인 7월 18일을 ‘세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선포함으로써, 세계 자유를 위해 헌신한 그의 공을 치하했다. 이 글은 <나 자신과의 대화> <넬슨 만델라 어록>(넬슨 만델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등을 토대로 정리했다.

소설가 조정래

문학을 통해 잊혀져가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려온 한국 문학의 거장 조정래(71) 작가.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역사의 현장 속에 있는 듯 수많은 인물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들이 펼치는 삶의 희로애락에 함께 울고 웃으며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을 기억하게 된다. 독자들로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 있다는 소설가 조정래. 그가 이번엔 중국 땅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상사원들의 이야기 <정글만리>로 돌아왔다. 칠순의 나이에도 오직 ‘노력’이란 말을 금과옥조처럼 삼는다는 대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조정래 작가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거울 비추듯 글로 써내려왔다. 아름답든 혹은 추하든 꼭 봐야 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애환을 구성지게 때론 구슬프게 전해주었던 소설가 조정래. 그가 지난해 중국을 소재로 한 신작 <정글만리>를 발표했다. 중국 땅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를 격려하듯 경제 불황으로 지친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전해졌고, 이내 100만 부 이상이 팔리며 화제가 되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메울 때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가도, 촌철살인의 말을 건넬 때면 매의 눈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조정래 작가. 작가의 혜안은 늘 그렇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과 마주하게 했다.

<정글만리>를 읽고 나면 중국을 다시 보게 된다고들 말합니다.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요?

중국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데 정작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짝퉁 천국이다, 게으르다, 더럽다… 그런 편견도 있고. 하지만 그건 중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예요. 14억의 중국은 지금 세계 소비 시장으로 바뀌고 있어요. 중국의 중대함을 빨리 자각할수록 우리한테 이익이다, 우리가 가진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고, 그들과 올바른 친교를 해서 제2의 경제 도약을 중국에서 이루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20, 30대 젊은 층이 많이 읽어서 앞으로 우리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미 20년 전에 구상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의 변화를 예상하신 건가요?

1990년이에요. 소설 <아리랑>을 쓰기 위해 취재차 중국에 있었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왜 사회주의 소련은 몰락했는데 중국은 건재한 것인가?’ 그것은 저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지식인들,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질문이었어요. 소련은 달걀 하나를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는 반면, 중국은 쌀은 물론 가게마다 샴푸 등 생필품도 넘쳐났거든요. 하지만 며칠간의 취재를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14억 인구의 배고픔을 해결했어요. 그때 중국의 엄청난 힘을 직감했죠.


예상은 적중했다. 2010년 그는 중국이 G2(세계 경제 2위)가 되던 시점에 맞춰,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20년간 고시 공부하듯 모은 중국에 관련한 자료 스크랩만 90여 권, 16번 중국 방문을 하면서 모은 취재 수첩만도 20여 권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정글만리>를 보면 중국의 경제, 문화, 역사, 기질 등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소설 속의 인물 중 액세서리 사업을 하는 하경만이란 인물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실존 인물인가요?

네. 하경만은 사실 중요한 인물이에요.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하사장처럼만 하면 중국에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중국에서 표창장, 감사장도 줄 정도니까. 원래 이름은 하덕만인데 지금도 거기 있어요. 그 사람 이야기 중 80%는 있는 그대로예요.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중국 사람을 위해 쓰고, 공장이 있는 마을의 노인들까지 극진히 모시니까 동네 사람들, 영감님들이 다 그 공장을 지켜줘요. 경제인들이 잘 새겼으면 좋겠어요.

<정글만리>의 인기에 대해 혹자들은 조정래 작가가, 경제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준다는 점이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간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래 하면 우리의 험난했던 역사를 가장 날카로운 필체로 써내려간 대표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1943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인 시조 시인 조종현 선생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여왔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고뇌하던 문학청년에게 비추어진 우리나라는 분단으로 인해 역사는 왜곡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역사의 진실을 쓰겠노라 다짐한다. 하지만 수많은 장벽에 부딪쳐야 했다. 서슬 퍼런 분단국가에서 법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글을 쓰다 보니 작품의 완성도가 낮았던 것. 이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는 결단을 내린다.
‘이 땅의 작가로서 험난한 역사의 아픔과 질곡을 알면서도 소설을 안 쓴다면 비겁이다. 내가 태어나서 후회 없이 눈을 감으려면 최소한 이 세 이야기는 써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소설이 바로 장편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원고 기둥 옆에서
첫 손자 재면이와 함께. 저자 제공.

당시 분단으로 인한 우리나라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나요?

가령, 일본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겼다고 하는 청산리 전투. 우리는 김좌진만 쓰고, 북한에선 홍범도만 써요. 그걸 역사학자들은 모르냐, 다 알아요. 근데 얘기하면 불리하니까 피하는 거지. 그러다 내가 <아리랑>에서 협공했다고 쓰니까 그다음부터 역사 연구자들도 그렇게 쓰는 거예요. 그때는 남북한이 서로 다른 이념 때문에 원수가 되면서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역사 기록을 삭제하고 그랬으니까. 심지어 서로 인간이 아니다, 악마라고 가르쳤잖아요. 그래서는 통일이 영원히 안 되죠. 제가 태백산맥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란 걸 인정하자는 거예요. 태백산맥을 보면 남로당 간부 정하섭이 소화와 연애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들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 결국, 문학을 통해 악마라고 생각한 대상이 사람으로 바뀌는 거죠.

한때는 유서를 써놓고 글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쓴 채 글을 쓰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요?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말이 있죠.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앞서간 사람들이 있어요. 김구, 신채호, 한용운, 윤동주까지 수없이 많잖아요. 그때보다 지금 상황은 훨씬 나은데 못 하는 게 말이 되는가 하고 결심한 거죠. 문학은 진실만을 쓴다, 문학은 인간다운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가는 거예요. 당시 집사람에게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견딜 수 있겠느냐고 확답도 받았어요. 그만큼 각오를 하고 가는 거죠.

1983년 태백산맥 집필 이후, 그는 10여 년간 수많은 공갈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뒤 2005년 5월, 11년 1개월 만에 무혐의 판정을 받게 된다.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근거자료들은 태백산맥에 수록된 사실이 진실임을 입증했고, ‘이미 350만 부 이상 팔린 책’이라는 점도 주요했다. 수많은 독자들은 위기에 처한 작가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독자의 힘을 실감했던 당시가 작가로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럼요. 최고로 복된 작가지. 더군다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까지 총 32권을 다 읽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아껴가며 읽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보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면 작가로서 사는 보람을 느껴요. 세계의 문학관이 수없이 많아도 독자들이 필사한 원고를 전시한 문학관은 태백산맥 문학관밖에 없어요. 열 권짜리 책을 원고지에다 손으로 일일이 베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렇게 독자들한테 사랑을 받으니 작가로서 큰 보람이고 고맙죠.(웃음)

<태백산맥> 16,500장, <아리랑> 20,000장, <한강> 15,000장. 무려 51,500장의 원고. 20년간 글감옥에서 1,200명의 인물을 낳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지어주며, 먹여 살리고 키우느라 세월은 흘러 마흔에 시작한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는 나이 예순이 되어 끝을 맺게 된다.
그는 글쓰기에 대해 ‘황홀한 글감옥’이라 비유한다. 분명 과정은 고통스러우나 원하는 대로 성취되는 순간의 황홀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온몸이 조각조각 깨지고 가루가 돼서, 땅속으로 들어가거나 어디로 흩어져버리는 듯한 고통을 수백 번씩 겪어도 할 이야기는 꼭 쓰게 된다”는 그이다.

조정래 작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아내 시인 김초혜씨다. 아내 역시 연작시 <사랑굿>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동국대 국문과 동기로 만나 47년을 한결같은 부부애로 살아왔다. “힘든 상황에서 나를 지켜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그는 “김초혜는 나에게 날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다”라며 예찬한다.

평균 하루에 16시간씩 집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일해요. 평균 8시간 일하면서 지친 영혼들을 흔들어 감동케 하려면 그들의 두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내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에요. 그래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쓸 때 하루에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술도 안 마셨어요. 더구나 현대인들 머릿속엔 영화 들어 있지, 드라마 들어 있지, 스마트폰까지 있잖아요. 그들에게 이거 참 좋은 소설이야, 읽어봐, 하려면 작가도 그만큼 노력해야죠. 글을 쓰다 보면 긴장감 때문에 하루에 3~4시간밖에 못 자요. 자면서도 쓴다는 말이 그 말인데, 명료하게 떠올라서 뇌가 쉬지를 못하죠. 그러니 자기 관리도 잘해야 해서 저는 소식, 채식, 맨손체조를 해요. 젊었을 때는 하루에 맨손체조 3~4번이면 풀렸는데 이번엔 매수를 35매에서 25매로 줄였는데도 두어 시간 지나면 허리 아프고 옆구리가 당기고 그래서 하루에 7~8번 심할 땐 열 번도 했어요. 체조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구상을 하니까 소설은 계속 쓰여지고 있는 거죠.

선생님은 따로 구상노트가 없다면서요? 그 얘기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웃음) 몰두하지 않아서 그렇지 치열하게 하면 다 돼요. 그걸 보여주는 게 SBS <생활의 달인>이야. 제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인데 그걸 보면 한 가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전부 감동이에요. 인간의 존엄, 인간의 발견,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재 이유를 그렇게 극명하게 보여줄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들은 한 가지씩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은 숭엄하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세차하는 사람, 신문 배달하는 사람… 그중 하나가 소설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다만, 그들은 감동을 지속적으로 주지 못하지만, 작가는 글을 통해서 오랜 세월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내 소설 절반은 아내가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하셨는데요, 선생님의 문학 인생에서 김초혜 선생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집사람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독자고, 내가 쓴 소설의 최초 독자고, 열독자고, 내 작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조언자고…. 그 역할이 수없이 많아요. 집사람은 나한테 정말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예요. 좋은 작품이 되도록 나와 비슷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김초혜 선생이 지적한 걸 전부 다 고쳐요. 객관적으로 맞거든. 집사람도 시인이다 보니 시를 쓰고 나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여보 이거 이상한데 말이야…” 해도 절대 안 고쳐. 이유는 분명해요. “시는 소설보다 더 윗질인 고급 문학이다” 이거지(웃음). 그 말이 맞아요. 나도 시 쓰다가 안돼서 소설 쓴 거니까.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죽어 다시 태어나도 김초혜 선생과 결혼하겠다고 한단 말이야, 이 바보가.(웃음)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노력해라’입니다. 나 역시 작가로서 내 재능을 믿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내 노력만 믿어요. 사람들은 노력해라 하면 지겨워해요, 흔한 말이고. 근데 가장 중요한 거예요. 천재라고 이름 남긴 사람은 전부 철저하게 노력한 사람들이에요. 작가들도 될 때보다 안될 때가 더 많아요. 안되면 99%가 돌아앉아 술 마시고 여행하는데, 전 한 번도 안 그랬어요. 한 번도. 안될수록 더 책상 앞에 다가앉았어요. 결국 자기가 하는 거예요. 손자들한테도 그래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죽음이 보일 때까지 해라, 그러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우리 시대 어른으로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으면서도, 아직도 주변에서 노력하는 사람을 보며 삶의 자세를 배운다는 조정래 작가. 때문인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노력해라’라는 그 흔한 말조차도 전율처럼 다가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왔기에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훗날 “우리 민족을 가장 사랑한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는 소설가 조정래. 그는 그렇게 사랑하는 만큼 세상을 그리고, 역사를 말하고, 인간을 바라보았으며,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해주었다. 그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조정래 작가는 1943년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대표작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1천 3백만 부 돌파라는 한국 출판 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으며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단재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신은 어느 곳이나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 ‘제일 안전한 피난처는 어머니의 품속이다’….

엄마 생각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나로 말하면 눈이 내리는 겨울, 산과 들이 하얗게 소복단장을 하는 세밑이 오면 엄마 생각에 깊이 잠기곤 한다. 그것은 바로 눈이 백포처럼 하얗게 덮인 섣달에 엄마가 하얀 옷을 입으시고 하늘나라로 가셨기 때문이다.

자식치고 어느 누가 아니 그러하랴만 나도 울 엄마 생각을 하면 콧등이 찡해나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엄마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것은 팔순이 넘은 로모의 왜소하고 수척한 모습이다. 성성한 백발과 밭고랑 같은 주름살, 기역 자로 굽은 허리와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진 손발…. 그려보기조차 안쓰러운 엄마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평생을 가난과 싸우면서 살아오신 엄마는 당신 한 몸을 운신하기도 힘든 꼬부랑 할머니로 되었음에도 다 큰 자식을 두고 내내 시름을 놓지 못하시었다.

내가 밖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마치 물가에 나간 어린것을 기다리듯이 잠을 이루지 못하신 엄마, 내가 출장 가는 날이면 4층 베란다에 나오시어 백발을 날리시며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시던 엄마, 손녀가 사다준 보건품을 며느리 모르게 가만히 나를 먹으라고 주시던 엄마.

엄마는 이처럼 아무런 대가도 바람이 없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었다.

엄마는 ‘엄마’라는 숙명적인 이름으로 나에게 생명의 피와 살과 뼈를 주시었고, 엄마는 ‘엄마’라는 특정적인 이름으로 나에게 사랑의 빛과 열과 향을 주시었다.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나가는 그날까지 평생을 누구하고 큰소리 한 번 친 적이 없고 남보다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 적이 없고 남에게 해코지한 적이 없이 그토록 선량하고 깨끗한 마음과 불 땐 가마목처럼 따뜻한 가슴 그리고 사슴의 눈처럼 어진 눈으로 고달픈 세상을 조용히 사시다 가신 나의 엄마!

엄마를 보내고 나서 나는 껍데기만 남은 채 처마끝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를 보면서 엄마 생각을 하였고 논코물에 떠내려가는 속이 텅 빈 우렁이를 보면서 울 엄마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올해도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고 세밑이 다가오니 코끝이 찡하게 눈물이 핑 돌게 엄마 생각이 난다.

아, 나를 울리는, 못 견디게 슬픈 ‘엄마’라는 이름이여!

이혜민 작.

<그리움>

보리차 아줌마, 김종임 여사

고욱향 68세. 주부. 전남 구례군 구례읍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울 엄마 하면 따순밥, 따뜻한 보리차가 생각난다. 우리 엄마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셨다. 울 엄마는 부엌에서 항상 된장국을 끓여서 부뚜막에 따듯하게 올려놓았고 따순밥은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따땃하게 넣어두었다. 어릴 적에 크면서 바라본 엄마의 모습은 항상 밝고 고우셨다. 언제나 고운 한복 차림이셨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지나가는 거지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1964년도 국민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울 엄마는 거지 아저씨, 거지 아줌마 5명을 집으로 데려오셔서 부엌에서 따뜻한 국물, 따뜻한 보리밥을 해서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 그분들을 모셔놓고 따순밥을 해주셨다. 엄마는 그렇게 사랑을 퍼주시면서 살아오셨다.

우리 동네에는 5일장이 열렸다. 장날이면 엄마는 큰 가마솥에다 보리차를 끓여서 시장 상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셨다. 엄마의 별명은 보리차 아줌마. 나는 보리차 딸로 통했다. 시장에 내가 짜안 나타나면 “어서 오그라~ 어서 와~” 상인들이 나를 반겨주셨다.

그래서 나는 5일장을 기다리면서 엄마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손은 거칠어지고 불을 때느라 나무 연기, 나무 재에 얼굴을 시꺼멓게 그을려도 어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보리차를 끓이셨다.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셨던 울 엄마. 그런 장한 김종임 어머님은 2000년도에 사랑하는 가족들 품을 떠나셨다. 엄마 크게 한 번 불러본다.

어머니~ 김종임 엄마~!
그곳에서도 따순밥, 보리차 사랑을 실천하시나요? 하하~ 호호~
엄마의 딸 막둥이 딸 엄마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엄마가 하늘 속에서 막둥아~ 막둥아~ 하면서 꼭 나를 부르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움’
저녁노을 바라보면서 논둑길을 걸어보았다
풀 내음, 흙냄새, 엄마 냄새
코끝으로 다가와서 하늘빛이 더욱더 빨갛다
저 붉은 노을빛 속에 엄마의 웃는 모습 보이는 것 같아
지나간 시간 못내 아쉬워
오늘따라 바람결이 어머님의 따뜻한 품속 같아라

이혜민 작.

<그리움>

엄마는 왜 이렇게 소심해?

김하정 콜롬비아 보고타 거주

울 엄마를 장장 17년(이제 18년 다 되어간다) 동안 보아온 나의 감상문(?)을 쓰자면 꼭 처음은 이렇게 시작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울 엄마는 딸내미인 내가 봐도, 킹왕짱 소심쟁이가 틀림없다. 항상 스마일 페이스에, 착한 성격 그 이름도 착할 선(善)! 심지어 일명, 빡센 아빠와(아빠 미안!) 같이 알콩달콩 애정스러운 말다툼을 자주 하곤 한다.

어느 날은 정말 두 분이 싸우시는 줄 알고 지나가던 오빠가 물었더랬다.
“둘이 진짜 싸워요?” 그러자 우리 아빠, 비실 웃으며, “아니야, 우리 같이 노는 건데, 그렇지?” 그리고는 엄마를 응시한다. 눈치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마주치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아빠의 눈빛에 약간 삐친 것 같았던 엄마도 어느새 밝게 웃으며 답해준다.
“당연하지!!”

어쩜 두 분께선 지금까지도 유치하게 잘 노시는지,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착한 이미지 때문인지, 아니면 엄청 소심한 건지 우리 엄마는 집 밖에서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이다. 아무리 화나도,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티 안 내고 이름처럼 착하게 사느라 노력하는 그 모습이 어찌 보면 참, 엄마에게는 기립박수를 수여하고 싶다. 하지만 가끔 정말 그런 착한 엄마가 너무 답답해서 어느 날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렇게 말했더랬다.

“울 엄마는… 너무 착한 게 문제예요!”
뒤이어 터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니 당돌한 딸내미의 멱살을 잡지 아니하고 같이 웃어주신 엄마는, 진짜 착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이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우리 엄마가 가끔은 어쩜 그리 귀여운지 모른다.

한날은 내가 “엄마는 왜 이렇게 귀여워?” 하고 물으니, “야… 무슨 엄마보고 귀엽다고 그러냐…”라며 작게 투정 부리는, 울 엄마는 왜 저렇게 소심하고도 귀여운지! 아니 소심해서 귀엽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런 엄마가 좋아서 항상 우리 남매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엄마 무릎을 가지고 쟁탈전을 벌이고는 했었다. 다 자랐다면 자란 자식들이 그러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쟁탈전은 참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만약 아빠가 있었더라면 아마 “내 거야!” 하며 같이 쟁탈전에 참여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하며 피식 웃어본다.

한때(여기서 한때란, 그 이름도 유명한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 시절 되시겠다)는, 그런 엄마에게 거짓말도 밥 먹듯 하고, 속도 어지간히 썩이던 그때의 나, 그 시절의 하정이와 할 수만 있다면 주먹의 대화를 나누고도 싶다.

물론 엄마가 항상 소심한 것은 아니다. 자식들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해주기 위해서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를 꾸짖으셨다.

한때는 미웠던 당신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보다도 응원하고 계셨던 그 엄마의 모습을.

지금은 비록 지구 반대편에서 열심히 언어 공부를 하고 있는 터라, 직접 엄마를 볼 수 없지만, 이따금씩 영상 통화로 연락할 때 비치는 엄마의 얼굴은 항상 대한민국 아줌마일 것 같았던 그 모습이 아닌, 많이 늙어버린 모습에 왜 진작 잘해주지 못했을까 싶어, 살짝 울컥한다. 가끔은 어렸을 적 엄마 냄새가 좋답시고 엄마의 치마에 얼굴을 묻고 하루 종일 냄새를 맡던 그 순간도, 그리고 엄마의 소심한 애교도, 한겨울 “하정아, 추워! 같이 가자!” 하며 펭귄처럼 통통 튀어오던 그 엄마의 추억이 아직 내 가슴 한켠에 남아 반짝인다.

나도 엄마 딸이라 그런 건지. 어째 그렇게 맘에 안 들던(?) 엄마의 소심한 모습은, 이제 훌쩍 커버린 나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유전의 법칙인 걸까…?

그래도 이젠 그 ‘소심’이라는 단어가 그리 싫게 들리지는 않는다. 지금 나에게 소심이라는 단어는 그리운 엄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운 그 냄새도, 얼굴도, 그리고 소심한 성격일지라도 반듯한 신념으로 자식들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신 엄마가, 나는 좋다.
마지막으로, 매달 이 ‘월간 마음수련’ 책을 보시는 엄마에게 외친다!

“엄마, 이 글이 거의 다 끝나가니까 하나만 물어봐도 돼? 엄마는 왜 이렇게 소심해? 사랑스럽게…!”

이혜민 작.

<그리움>

‘신은 어느 곳이나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 ‘제일 안전한 피난처는 어머니의 품속이다’….

울 엄마가 가장 행복했던 때

조이연 37세.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엄마, 엄마는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예요?”

정확한 날짜는 생각나지 않지만 행복이 무엇일까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엄마에게는 그 순간이 도대체 언제였을지 궁금해 물었다. “너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그때가 26살이네. 어떻게 생각하면 바보 같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삶에 대해 아무 걱정도 없고 행복하기만 했어. 우리 집이라는 것도 있고 직장도 다니고 남편도 잘해주고 거기다 주위에서 모두 내 불룩한 배를 보고 아들 배라고 말해대는 통에 철석같이 아들인 줄 알고 그냥 믿었거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했었으니까. 아들 하나 떡 낳아서 잘 키워봐야지 했었어. 어떻게 생겼을까, 잘생겼을까, 발가락 다섯 개 손가락 다섯 개 모두 다 있을까 하는, 다른 엄마들이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당연히 건강할 거라 여겼으니까. 바보 같지?”

그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사진으로 담아 둔 엄마. 7개월쯤 자란 나를 배에 담고서 며칠 친정에 놀러간 엄마가 외할머니 집 마당에 핀 예쁜 꽃나무 옆에서 양손으로 허리춤을 살짝 짚고서 당당하게 배를 내밀고서. 약간은 수줍지만 사진 찍으려고 웃는 것이 아닌 정말 행복해서 웃고 있는 엄마. 엄마의 무릎까지 찍은 사진과 얼굴만 한 장 가득 찍은 사진 두 장을 나는 앨범에서 꺼내어 그중에 배를 내밀고 찍은 사진을 내 지갑을 열면 바로 볼 수 있게 넣어 두었다.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 사진은 액자에 넣어 책상에 두었다.

그리고 세상 태어난 이상 살다 보면 진실되지도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들을 만나 용기를 끄집어내야 할 때, 대수롭지 않은 일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려 할 때, 그 사진을 본다. 나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한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 그래 나는 그런 존재. 그렇게 태어난 존재.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기억하며 다시 입꼬리 올리고 웃기 위해.

“너를 가졌을 때는 다들 한다던 입덧은 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좋아하지도 않던 자장면이랑 순대만 먹고 싶더라구. 정말 많이도 먹었네. 그래서 네가 까무잡잡하게 나왔나 봐. 그때는 아기를 병원에서 낳아 봐야 딸인지 아들인지 알 때이니까. 병원에서 기를 쓰고 새벽까지 진통하고 있었는데 까무러쳐 버렸어.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 통증을 정신이 이겨내지 못해 그랬는지, 기운이 달려서 그랬는지 하여튼 기절을 해버려서 네가 어떻게 나왔는지도 몰라. 겨우 내 몸에서 비집고 나온 네 머리 윗부분을 의사가 집게 비수무리(의료 도구겠지만)한 걸로 끄집어냈다지 아마. 미안해. 미안해.”

엄마는 그렇게 가장 행복했던 때를 말하면서도 나에게 미안해했고,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도,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방실방실 웃느라 화장이 들뜬 나의 결혼식 날에도 미안해했다. 또 당신이 죽음과 삶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짧은 의식만 잠깐 돌아와도 병 수발하게 해서, 걱정시켜서 힘들게 만들었다며 미안해란 말만 했다.

엄마는 얼마나 나를 사랑했을까.

“네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야”라는 그 말을 수천 수만 번 들으며 자란 사람은 알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의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가더라도 무의식 안에서 바람처럼 스스로 불어대고 햇살처럼 따스하게 비추는 그 목소리의 울림의 힘을.

이혜민 작.

<그리움>

아줌마, 새엄마 그리고 어머니

이진32세. 강원도 춘천시 후평1동

엄마의 생신이 다가옵니다. 무얼 해드리면 기뻐하실까, 선물 고민이 한창입니다. 엄마. 나의 어머니….

아줌마. 내 나이 19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예전부터 늘 먹어오던 냉동식품이 아닌, 맛있는 카레와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무침이 한 상 가득 차려져 나를 기다립니다. 전래 동화에 나오는 우렁각시님인가요? 아빠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그분을 ‘엄마가 될 사람’으로 소개하시네요.

“안녕, 네가 진이구나? 너희들 얘기 아빠 통해서 많이 들었어” 하고 아줌마가 처음 인사를 건네십니다. 첫인상이 참 따뜻해 보이시네요. 미인이세요.

대학에 가게 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남동생, 운수업을 하시는 아빠를 두고 어떻게 떠나올까 걱정했을 때 아줌마가 이야기하시네요. 이제 우리와 같이 살면서 어린 남동생을 키워주시겠다고.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겠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대학생이 될 준비를 잘하라고요. 15살 때부터 어린 남동생을 지켜내느라,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못했었는데 아줌마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너무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네요. 내게도 이런 날이 오네요.

새엄마. 아빠와 아줌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셨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아줌마의 재혼식이 있는 날이에요. 내 나이 15살,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5년이란 시간 동안 자식 셋을 홀로 키워 오신 아빠. 찰칵! 아빠와 아줌마, 언니와 남동생, 그리고 저는 처음으로 ‘가족’이란 이름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갈 때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줌마?’ ‘새엄마?’ 한참을 고민하다가 호칭을 그냥 생략한 채 말을 시작합니다.

아직 차마 엄마라는 말은 나오질 않습니다.

아빠와 크게 다투신 어느 날, 안방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래전, 이혼을 하시기 전에 배 아파 낳은 소중한 두 아들의 사진을 보고 계시네요. 지금은 딱 저와 언니의 나이가 되어 있을 자식들 생각에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요. 왜 그렇게 제 마음이 아픈 걸까요. 새엄마가 자식들을 가슴에 묻으려는 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자주 만날 수도 없는 삶이란 걸 체념이라도 하듯이 말이에요.

제 남동생은 초등학교 시절, 밤늦게까지 혼자 집을 지켜야만 했어요. 그래서 두려움과 상처가 많아요. 친구들에게 엄마 없는 애라며 놀림을 받아 학교에 가기 싫어했던 적도 있었죠. 그럴 땐 내가 엄마이지 못한 것이 너무 화가 났고, 17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가 너무 서러웠어요. 그런 동생이 이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밝게 웃고 있네요.

새엄마, 덕분이에요.

대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 감당할 수조차 없는 빚더미에 새엄마는 가계에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며 하루 종일 식품 공장에 나가십니다. 냉난방 시설조차 없는 공장에서 두 손이 얼도록, 탈진할 것처럼 땀에 흠뻑 젖도록, 무거운 짐을 종일 날라서 두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도록 일하십니다. 새엄마의 또 다른 시작이 너무도 버거워 보여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리 집 때문에 제가 더 죄송해져옵니다.

그럼에도 새엄마는 친엄마의 제삿날이면 새벽 일찍부터 제사상을 정성스럽게 차리시느라 분주합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으려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시며 언니와 제게도 제사상을 차리는 법을 열심히 가르쳐주시네요. 그리고 외할머니 댁에 전화를 드리는 일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엄마. 대학을 졸업하고, 정신없이 직장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갑작스레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신경이 마비되어 신체의 오른쪽에 전혀 감각을 느낄 수가 없고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실명될 수 있었던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하네요. 그 와중에도 병실로 올라가면 입원비가 많이 비싸진다는 이유로 응급실에서 일주일씩이나 누워 계신 어머니. 또다시 엄마란 이름을 아프게 기억하게 될까 봐 겁이 납니다.

퇴원 후, 유난히 아빠와 엄마의 싸움은 잦아지네요. 엄마와 아빠는 서로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결국 남동생이 울면서 부모님께 이야기하네요. “서로 한 발짝씩만 뒤로 물러나면 되는데 왜 서로 상처만 주느냐”고. 덩달아 내 마음도 찢어집니다. 혼자서 그동안 많이 아팠나 봅니다. 어느덧 동생은 엄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애교스런 아들이 되어 있습니다. 20대 후반, 한창 직장 생활 하느라 집에 자주 못 가는 두 명의 누나를 대신해서 엄마 옆을 지켜주었던 남동생은 이제 제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엄마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참 많았어요. 엄마 팔짱 끼고 함께 미용실 가기, 영화 보러 가기, 단둘이 1박 2일 여행 떠나기, 남자 친구 소개시켜드리기…. 어느덧 30대가 되어 이제는 친구처럼 어머니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재미있게 수다를 떨 수 있어서, 힘을 주는 둘째 딸에게 늘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엄마.

집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엄마표 떡볶이를 해달라며 어리광을 부려도, 싫은 소리 없이 늘 한가득 해 오셔서 딸과 함께 먹어야 재미가 있다며 두런두런 지나온 세월들을 추억하는 오늘. 이젠 제가 한 여자로서 당신의 인생에 힘을 주고 싶습니다. 이제 그 사랑, 제가 갚아드릴 차례니까요. 저도 곧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겠지요? 이제는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그 이름, 나의 어머니.

엄마, 가족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나의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혜민 작.

<그리움>

엄마의 소원

익명 (필자께서 익명을 요청하셨습니다.
어머니가 학교 못 다닌 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따님의 마음입니다.)

어머니, 입에 담기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차오르게 만드는 그 이름. 전 유난히 엄마 얘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못난 딸입니다.

2014년이면 33살인데 아직 결혼은커녕 남자 친구조차 없는 쓸쓸한 모태 솔로라고 할 수 있죠. 저희는 여동생과 엄마, 저 이렇게 세 여자가 한집에 살고 있어요. 엄만 올해 58살인데 건강이 좋지가 못하세요. 고혈압과 혈소판 감소증이라고 하는 생소한 병까지 앓고 계세요. 젊었을 적엔 누구보다 커 보이고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 분이셨는데 이젠 뒷모습이 왜 그렇게나 작아 보이시는지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제가 이렇게 사연을 보내는 이유는 엄마의 작은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희 엄마는 책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누구보다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분이신데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공부는커녕 학교조차 다녀본 적이 없으시대요. 옛날 분들 특히 남자들은 여자가 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저희 외할아버지도 그렇게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는 저희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죠. 그래도 저희 엄마는 외삼촌들 책이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오면 포장지를 대신하는 신문 조각 그리고 어릴 때 시골에 자원봉사하러 온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배우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글을 깨치셨어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분이었기에 엄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드셔야 했고 저희 3남매는 엄마의 노력으로 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한결같은 아빠의 행동에 엄마는 저희를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아빠와 헤어져 저희들 자매와 같이 살고 계십니다. 엄마의 소원을 얘기하지 않고 구구절절한 사연만 들려드리고 있네요.

저희 엄마의 소원은 다름이 아닌 책을 정말 죽을 때까지 실컷 보는 게 소원이시래요. 저희가 책을 사드린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책값도 참 비싸더라고요. 마음만은 많이 사드리고 싶지만 경제 형편이 좋지 못해서 그 소원을 못 들어드리고 있네요. 오죽하시면 농담으로 서점 하는 사람과 결혼해라, 이런 말씀까지 하시거든요. 헤헤. 저희 엄마 참 유머러스하시죠.

아마 제가 이 글을 써서 감격스럽게 책에 실리기까지 한다면 아마 정말 기뻐하실 텐데…. 정말 나중에 엄마를 위해서 서점을 차리는 게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엄마, 책을 많이 읽으셔서 저보다 더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 우리 엄마.
책 보는 것도 좋지만 건강 좀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어. 책 보느라 약도 잊어버리고 안 드시잖아. 약도 잘 챙겨 먹고 책 보는 거 조금만 줄여. 알았지? 엄마 사랑해.

이혜민 작.

<그리움>

나는 정말 뚱뚱한 걸까?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는 뚱뚱하지 않은데도 스스로를 뚱뚱하다 여긴다고 합니다. 날씬하다 못해 말라 보여야 아름답다 불리는 현대 사회, 여성들은 다이어트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줄 돌파구인 양 그것에 몰두하고, 뚱뚱한 것은 게으른 것이라 단정 짓습니다. 자신의 체형과 상관없이 획일화된 몸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현실. 나는 정말 뚱뚱한 걸까요? 나의 가치를 단순히 몸무게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거품처럼 생겨난 가짜 기준들에서 벗어날 때 진정 아름다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모나리자> 페르난도 보테로 작. 1978. 살찐 모나리자, 뚱뚱한 모나리자, 다이어트하기 전 모나리자, 다이어트에 실패한 모나리자 등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처음 전시되며 유명해졌다. 다빈치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가 콜롬비아 작가 보테로의 붓을 거치면서 보테로식의 신비함으로 거듭났다.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이동섭) 중에서

<얼굴> 페르난도 보테로 작. 2006.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법처럼 어제와 다른 내 모습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접어두세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할리우드의 많은 여배우가 완벽해 보이는 까닭은 그들이 트레이너를 고용하고, 다이어트를 하며, 미용을 위해 수술하는 데 큰돈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우리 여배우들이 완벽하게 보이는 이유예요.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은 진짜 모습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이에요.

어맨다 사이프리드 <셀러브리티 다이어트 심리학>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이 스스로를 혐오하고 자책의 급류에 휘말리게 만든다.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느낌, 끊임없는 자기 관찰, 나이 먹는 데 대한 두려움, 통제력 상실의 쳇바퀴를 돌게 만든다.

실비아 슈나이더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에서

“제가 닮고 싶은 여자들을 찾아봐요. 매일 보는 광고 속 모델, 연예인들 말고요. 세상의 기준에서 ‘못생기고’ ‘뚱뚱하다’고 하는 여성들도 얼마나 멋진지 주변에 알려주고 싶어요.”

멋진 언니 <뚱뚱해서 죄송합니까> 중에서

나에게 입력된 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빼고 자신감 찾기

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출발은 상당 부분 부모에게 있다

사람은 유년기의 어느 ‘결정적 시기’에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을 정립한다. 그때 거짓된 몸 이미지가 형성되면 그 여파가 평생 지속되면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부모다. 부모가 스스로의 몸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품고, 그 인식을 암암리에 아이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엄마가 늘 다이어트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요즘 10대는 몸에 대한 인식이 어려서부터 왜곡될 수밖에 없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유디트 로딘은 거식증을 앓고 있는 9~12세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이 소녀들의 어머니들이 대부분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머니들은 체중에 대한 불만족 정도가 높았고, 또한 딸의 실제 체중과 상관없이 자신의 딸이 더 날씬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신체 접촉을 많이 하고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일수록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라는 것도 여러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남태평양 피지에 텔레비전이 보급된 후

날씬한 모델들, 배우들…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몸의 이미지들이 널려 있다. 한 사람이 하루에 보는 몸의 이미지만도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 이미지들은 무의식중에 몸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킨다. 1995년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피지에 텔레비전이 도입됐다. 그 후 여자 청소년들에게 텔레비전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 전통적으로 피지 사람들은 왕성한 식욕과 풍만한 몸매를 선호했다. 그런데 3년 만에, 피지 10대 소녀들의 11% 이상이 체중을 줄이기 위해 음식을 토하게 되었다. 또한 70% 정도가 자신이 너무 크거나 뚱뚱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체중 감량을 위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집에 텔레비전을 갖춘 집단은 섭식 태도 검사에서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3배의 ‘이상 소견’을 보였다. 아이들은 제 몸을 텔레비전 속의 서양 인물들과 닮게 만들려 애쓰게 된 것이다.

정상 체형의 바비 인형을 만들라

1950년대 말 탄생되어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던 바비 인형.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외모가 어린이들에게 왜곡된 관념을 심어준다 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바비 인형에 노출된 여자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자존감이 낮았고, 마른 체형이 되길 더욱 바라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예술가 니콜라이 램은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지낸 바비 인형의 몸매를 동경하며 식이 장애 등 부정적인 영향에 시달릴 소녀들을 걱정하며 ‘정상적인 바비 인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미국 19세 여성의 평균 체형 자료를 토대로 현실적인 몸매를 지닌 바비 인형을 제작한 것. 그를 통해 바비 인형의 체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줬다.

참고 도서_ <힐링 루키즘 심리학 외모를 부탁해>(이정현)
<몸에 갇힌 사람들>(수지 오바크) <뚱뚱해서 죄송합니까&(한국여성민우회)

우리는 실제보다 더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정상 체중 여중고생 3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질병관리본부의 2013 청소년건강행태 조사 결과. 조사 대상 7만여 명 가운데 80%는 정상 체중으로 나왔는데, 이 가운데 29%는 본인이 살찐 상태라고 응답했다. 특히 여중생과 여고생은 36%나 되어 ‘신체 이미지 왜곡’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여학생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최근 한 달 동안 살을 빼기 위해 노력했으며,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여학생 5명 가운데 1명꼴로 단식이나, 살 빼는 약, 이뇨제 등 부적절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 충격을 주었다.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 영국에서도 2,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정상 체중의 여성 17명 중 1명만 스스로 날씬하다고 생각했고, 정상 체중 여성 중 17%는 스스로를 ‘뚱뚱하다’ 거울을 볼 때 기분이 ‘우울하다’고 응답했다. 도가 지나친 다이어트 강박은 폭식과 거식을 반복하는 섭식 장애까지 불러온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의료 기관을 찾은 10대~30대 여성의 수는 93만8천여 명. 그리고 섭식 장애로 진료를 받은 이가 2012년 1만3천2명으로 5년 사이 18.8%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더 많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생전 처음 다이어트를 하면서

30살 후반까지 살이 쪄본 적이 없었다. 늘 날씬한 몸매에 나름 자신도 있었다. 그러다 일 관계상 동남아로 장기 출장을 갔다. 음식이 바뀌고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급속도로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왜 그렇게 살이 쪘냐며 물어왔다. 자꾸 그런 소리를 듣는 내가 너무나 미웠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요가도 하고, 이런저런 운동도 해보았지만 모두 지속적으로 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마음도 너무 힘들었기에 마음수련도 함께 했다. 역시나 나에겐 마음의 다이어트도 필요했었다. 대인 관계, 열등감 등등 감당할 수 없이 쌓아놓고 있던 거품 같은 마음들을 빼냈다.

그런 마음들이 빠져나가는 만큼 음식도 조정이 되었다. 정말 몸이 원해서 먹고 싶은 건지, 아니면 스트레스로 인해 당기는 건지 구분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적절한 소식(小食)을 할 수 있었고 필요 없는 살들도 빠져나갔다.

이후 누군가 다이어트를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물어오면, 먼저 내면에 내재된 불만족한 상황들을 빼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본인이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보라고 한다. 건강상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막연히 살만 빼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착각이다. 온갖 스트레스들로 너무나 뚱뚱해져 있는 내 마음부터 돌아보자. 황순정 직장인.

“다르니까 아름답다” 세계의 움직임들

2009년, ‘델타델타델타 바디이미지 이니셔티브’는 ‘살에 대해 말하지 않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는 체중을 평가하는 문화가 사람들에게 몸에 대한 이미지를 마른 몸으로 한정 짓도록 하고, 다이어트와 식이 장애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캠페인이다. 현재는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대학건강센터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3년 말, <뚱뚱해서 죄송합니까>라는 책을 펴낸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다르니까 아름답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살에 대해 말하지 않기’ 스티커를 제작했다. 단 하루라도 살(체중)에 대해 말하지 않는 실천을 하는 캠페인. 왜냐하면 사소하고 일상적인 말이 누군가에는 ‘심각한 다이어트’를 부추기거나 자신의 몸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http://womenlink1987.tistory.com/539 에서 모바일 채팅용 이미지를 다운받을 수 있다.

영국의 NGO ‘다양한 모델들(Models of Diversity)’은 모델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단체로, 패션업계에 인종, 나이, 몸매, 사이즈, 신체 능력(장애) 등이 제각각인 몸의 아름다움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패션 및 모델 산업이 좀 더 ‘다양하게, 현실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미를 반영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그녀의 미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 아름다움은 어느 사이즈나 몸무게, 키, 신체 능력을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으면 행복해질 거예요. 건강한 생활을 하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즐기면 돼요.”

이스라엘 정부는 2013년 1월부터 체질량지수가 18.5 이하인 패션모델이나 광고 모델은 자격을 잃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울러 모델이 더 날씬해 보이도록 사진을 수정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런 수정 사실을 사진에 명기하도록 했다.

누군가 내 외모를 가지고 뭐라고 하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봐요. 존재 자체로 예쁘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던 그 시절을 기억해내면 ‘너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요.

인숙 <뚱뚱해서 죄송합니까>(한국여성민우회 저 | 후마니타스) 중에서

‘몸매 불문 나 되기’는 “당신의 무대는 체중계가 아닙니다. 세계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몸무게, 사이즈라는 수치화된 평가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과 아름다움, 자아 존중감을 되찾자는 캠페인이다. 9년간의 식이 장애를 극복하고 진정한 그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가고 있는 대학생 김민지씨가 시작한 캠페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다이어트법이나 평가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관심과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임을 공유한다.
hoperecov.blog.me

시누와 올케 사이, 마음수련하며 그 숙제를 풀다

시누와 올케 사이, 그 숙제를 풀다

‘나는 한때 올케를 올킬시키고 싶었다!’ 헐~ 얼마 전 이런 어마무시한 사연이 접수되었습니다. 올케와 시누 사이라는 게 좀 그렇다는 거야 알았지만, 올케가 없는 저 최기자로서는 실로 당혹스러웠지요. 당장에 찾아가 리얼 토크에 들어갔습니다. 천사 같은 시누이가 되고 싶었으나 살다 보니 원수가 되더라는 올케. 하지만 마음수련을 함으로써 이제는 올케 입장에서 올케를 이해하게까지 되었다는 시누이. 정말 그게 가능할까? 의문 의심을 품었던 최기자, 하지만 둥글둥글 환한 인상의 시누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서히 동화되고 말았답니다.ㅋ

ㅁ 올케하고는 왜 그렇게 사이가 나빴나요? 한마디로 본인밖에 몰라요. 단적으로 자기 생일 안 챙겨주면 섭섭하다며 난리 치는데, 자기는 제 생일이 언제인 줄도 몰라요. 매사가 이래요. 예를 들어 시집에 와서도 늦게 일어나 차려준 밥 먹고. 그런데 작은올케가 들어오고 나서는 그 동서가 조금이라도 안 하면 난리가 나는 거예요. 올케 눈엔 시댁 일 모든 게 시비거리였죠.

ㅁ 정말 분노유발자네요. 근데 그렇게 심하면 솔직히 얘기하지 그랬어요? 했죠. 올케는 이런 부분이 있으니 좀 고치면 좋겠다. 제 딴에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오는 건 ‘제가 올케를 욕했다’는 소리뿐이었어요. 조금이라도 섭섭한 게 있으면 이 사람한테 욕하고, 저 사람한테 욕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한테 걸리면 다시 저한테 쪼르르 전화하고. 자기가 조금이라도 한 거 있음 엄청 생색내고. 큰일 한번 치르고 나면 온 집안이 시끄러워요. 한마디로 집안의 트러블메이커였죠. 그러니 뭔 말을 하겠어요? 그냥 속만 끓이는 거지.

ㅁ 원래 시누이와 올케 사이는 좋지 않다면서요? 요즘엔 그렇지만도 않아요.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친 거죠. 사실 제가 결혼하고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어요.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배부른 여자들만 보면 눈에서 불이 튀었어요. 그런데 올케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된 겁니다. 저는 사실 천사 같은 시누이가 될 거다, 그랬거든요. 근데 임신한 걸 보는 순간 부럽고 질투가 났어요. 물론 저의 성격상 내색하지는 않았죠. 오히려 배려한다고 올케는 애들이 있으니까 일이 있으면 제가 나서서 했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올케 성격하고 딱 겹치면서 원수가 된 거죠. 그러다가 작년에, 오랫동안 편찮으시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상을 치르면서 완전히 확 틀어져버렸죠.

ㅁ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상을 치르는데 올케가 그동안 시댁에 쌓였던 감정을 풀어내는 거예요. 듣다가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 또 그 말을 오해해서 뒤로 이상하게 퍼뜨리고. 당시 저는 정말 힘들었거든요. 허무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친정에 희생했다는 마음도 저를 힘들게 했어요. 남들은 다 아들 딸 낳고 잘 사는데 나만 애도 없이 맡아야 하는 일만 많고. 근데 올케가 결정타를 날린 거죠. 내가 가장 힘들 때 나를 더욱 힘들게 한 애. 올케랑 끝이다. 죽을 때까지 용서 못 한다.

ㅁ 그 정도로요? 그랬는데 어떻게 풀린 거죠?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친척분이 마음수련을 해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수련 중에 올케와 연관된 일들을 떠올리는데 진짜 눈알이 튀어나올 거 같데요. 며칠을 계속 올케와 관련된 마음의 사진들을 없애고, 없애고, 계속 버렸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에 탁 하고 기가 뚫리는 느낌이 들더니, 온몸에 기운이 순환되면서 몸이 솜털같이 가벼워지는 거예요. 그때 이렇게 나쁜 사진들을 갖고 있어서 그동안 몸이 아팠구나, 사진 한 장 빼는 게 보약 한 재 먹는 것보다 낫다더니, 그게 이 말이구나 알겠더라고요.

ㅁ 빼기의 힘을 실감한 거네요. 사진이 저장된다는 게 어떤 건지 좀 더 얘기해주세요.
올케하고 있었던 일들, 그때의 상황, 느꼈던 감정들을 마치 사진처럼 찍어서 제 뇌 속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았다는 거죠. 똑같은 사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듯이, 저는 저 혼자만의 사진들을 찍어놓고 그 속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반드시 올케와 싸워 이기리라 다짐하면서.(웃음) 그걸 자꾸자꾸 빼면 그 사진세계에서 벗어나지는 거죠. 벗어난 만큼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심지어 나중엔 올케 생각하면 안됐다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ㅁ 와~ 그러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대단한 경지인데요? 마음을 빼기 하다 보니 제 마음이 여실히 보이더라고요. 여태까지 올케 욕만 했지, 한 번도 올케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던 거예요. 가족인데 맨날 이건 잘했고 이건 못했고 그렇게 시비만 하고 있었으니. 저도 천생 시누였던 거죠. 멋진 시누라는 말은 듣고 싶어서 겉으로는 쿨한 척했지만, 바라는 것도 많았고요. 그 기대치를 못 채워주니까 더 밉고 못마땅했던 거고. 올케가 늘 자기는 외롭게 자랐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좀 더 사랑해줄 걸 싶더라고요.

ㅁ 지금은 시누 올케 사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요. 조금 아까도 올케가 문자 보냈어요. ‘형님 사랑해요. 저는 형님밖에 없어요.’(웃음) 우리 올케가 정이 많고 싸우고 나도 화해를 잘해요. 올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니까 진심으로 대하게 되고, 그러니까 올케도 달라요. 이제 올케랑 행복한 소통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아요. 같이 잘 살아야죠.

ㅁ 대단하네요. 정말 과거의 감정들은 하나도 안 남아 있는 건가요? 네, 지금은 정말 편안하고 가벼워요. 마음수련 하면서 사진을 빼고 나니까 진짜 미운 감정, 원망이 없어지더라고요. 신기할 정도로. 올케랑 안 좋은 거 다 알았던 신랑도 신기해해요.

ㅁ 각자 미운 사람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그분들에게 한말씀 해주세요.
저한텐 올케가 원수였어요. 근데 수련을 하다 보니 올케만 원수가 아니었더라고요. 다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남 잘되는 거 배 아프고 나만 잘됐으면 좋겠고. 그런 마음이 있는 한 누구나 원수가 될 수 있고, 결국 원수가 날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내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겁니다. 그 마음 빨리 안 빼내면 원수는 더 많아지고 커지게 되어 있어요. 매일매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봐요. 정말 끔찍하죠. 하루라도 빨리 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마음 빼기하면서 보너스처럼 얻은 게 바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됐다는 겁니다. 늘 허무하고 막연한 미래가 많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감사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되었어요. 올케 덕분에 이걸 알게 됐으니 저 올케 잘 둔 거 맞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