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보다 현재의 삶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흔에는 미처 몰랐네, 사랑하면 보인다는 걸

허두영 52세. 출판인.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의 저자

“아빠, 저 나무가 무슨 나무예요?”

마흔도 훌쩍 중반에 들어선 나른한 봄날, 함께 목욕 갔다 돌아오는데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우리 아파트 현관 바로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을 때, 멀뚱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뒤, 아들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른 것은 나무 이름이었을까, 아들과 대화하는 법이었을까?

“아들을 위해 나무 이름 하나 알아봐줄 시간도 없나요?” 하는 아내의 추궁에 이튿날부터 집 주변에 무심하게 서 있던 나무들의 정체를 밝혀내야 했다.

산수유와 생강나무, 느티나무와 느릅나무, 매화나무와 살구나무,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화살나무와 작살나무, 낙엽송과 낙우송, 노간주나무와 모감주나무, 측백과 편백과 화백…. 이름이나 모습이 비슷한 나무가 왜 그리 많은지.

전설의 계수나무는 달이 아니라 화단에 우뚝 서 있고, 동화 속의 개암나무는 우리 집 바로 뒷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호젓한 매화나무는 옛 시조가 아니라 나의 술잔 속에서 꽃을 피우고, 높다란 벽오동은 혹시나 하며 봉황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앵두와 살구가 바로 옆에서 앙글앙글 피고 지고 다람다람 열매를 맺었는데, 그동안 왜 한 번도 내 눈에 띄지 않았을까?

‘접시꽃 당신’을 사랑한 도종환 시인은 ‘배롱나무’에게 배운다고 했다.

‘늘 다니던 길에 오래전부터 피어 있어도 / 보이지 않다가…(중략)… /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나무를 하나씩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서 나무들이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목은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었고, 아내와 산책하던 길에는 마로니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과 즐겨 오르던 산길에는 개암나무가 반갑게 나를 맞아주고 있었고, 딸이 그네를 뛰던 놀이터에 명자나무가 울타리를 두르고 있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내 주변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왜 그동안 한 번도 내 눈에 띄지 않았을까? 평소에 이름조차 모른 채 무심코 지나쳐 눈에 띄지도 않던 나무도 관심을 갖고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존재가 드러나면서 정말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떠올랐다.

당장 내 가족부터 그랬다. ‘가족’이라는 틀에서 10년이 넘도록 그냥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들을 시작으로 딸과 아내가 차례차례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를 아들과 함께 8년에 걸쳐 쓰는 동안 ‘같이 놀자’는 딸의 재롱과 투정을 수시로 달래야 했다. 주말을 주로 아들과 지내다 보니 심통이 난 딸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오빠와 같이 하는 집필 작업이 끝나면 ‘사랑하면 보이는 풀’을 시작하기로 약속했다. 딸과 약속하고 나니, 나무와 풀 말고도 새, 벌레, 물고기, 별, 돌처럼 사랑하면 보일 만한 것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면 보이는 새’ ‘사랑하면 보이는 벌레’ ‘사랑하면 보이는 물고기’ ‘사랑하면 보이는 별’… 등등. ‘사보(사랑하면 보이는) 시리즈’가 생각났다. 근데 이걸 다 누구랑 쓰지?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두고 있는데, 책을 쓰자고 아이를 더 낳을 수도 없고^^; 아내에게 ‘사보당’(사랑하면 보이는 당신)이나 같이 쓰자고 해 볼까?ㅎㅎ 그러면 당신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전갑배 작. <생동-2> 오일파스텔, 콘테, 연필. 600×409cm. 2011.

 

그것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성희 61세. 주부.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

얼마 전, 남편을 도와서 밤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남편은 대형 마트 안의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매출은 거의 적자다. 시내의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에 납품을 하며 현상 유지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음 날 오전 중으로 시내 어린이도서관에 납품을 맞추느라 밤을 새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평소에는 서점에 거의 가지 않았는데 이날은 나도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남편은 12시간을 한자리에 서서 계속 일을 했다. 나는 새벽 3시쯤에 남편에게 커피를 타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 일에 집중하면 밥 먹을 생각도 잊는 거였구나!

남편이 매일 바빠서 점심 식사도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밤을 꼬박 새며 알게 됐다. 적은 직원으로 서점을 운영하려니 서점 개점 후 4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근무했던 것이다.

그날 오랜만에 복어 전문점에서 외식을 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 살이 쏙 빠진 남편을 보며 마음이 애잔해졌다. 참 성실하고 한없이 선량한 저 사람이 남편인 게 행복했다.

“여보! 어제 일하면서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당신뿐이란 걸 깨달았어.” “그거 깨닫느라고 수고했어” 하며 남편이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왜 콩나물만 그렇게 먹어. 콩나물은 집에서도 자주 먹는 건데. 다른 거 먹어요.” “어! 그러네. 잘못했어” 하며 남편은 복 튀김을 집어 먹었다. 주거니 받거니 먹여주고 아껴주고…. 서로의 목소리에는 신뢰와 믿음이 섞여 있었다.

남편은 62세, 나는 61세이다. 남편은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싫은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남편이 불편해할 말은 안 한다. 살면서 서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게 무엇인지 터득한 것이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요즈음에야 우리 부부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몰랐다. 남편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우리 부부는 중매로 만나서 결혼한 지 35년이 됐다. 결혼 후 13년은 단 한 번의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꿈결 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남편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던 40대부터 전쟁 같은 사랑이 시작되었다.

늘 실패하는 남편을 말리다 다투는 생활을 근 10년을 했다. 그동안 전업주부로만 있던 내가 사회로 나가 가장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남편은 하는 일마다 안됐고 나는 상점에 갇혀서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나는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힘이 들어서 피폐해졌다. 늘 상냥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던 나는 점점 거칠어져갔다. 우리는 그때 각자의 고민과 우울증과 갈등을 이해 못 한 채 서로 미워했다. 내가 더 오래 길게 남편을 신뢰 못 하고 미워했다.

남편은 큰 손해를 본 후 사업을 접고 서점 체인본부에 취업이 됐다. 50대였다.

이때부터 서로 화해의 시간이 시작됐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남편에게 끝없이 내가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공치사를 하고 지난 세월을 원망했는데, 그런 나를 남편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 나는 당신이 좋으면 좋아!” 하며 내가 편한 것이라면 다 하게 했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불신의 찌꺼기가 없어지도록 기다려준 것이다. 그런 배려와 사랑으로 나는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게 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 극단의 선택으로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조용히 곁에서 나의 화풀이를 다 받아준 남편이 정말 고맙다.

이제야 알겠다. 한 사람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미운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용서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힘들더라도 그 사람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사람을 위해 믿고 참고 견디는 세월 뒤에야 진짜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갑배 작. <구례곡전재> 오일파스텔, 콘테. 600×409cm. 2011.

 

그때는‘기쁨’을 몰랐다

김준범 46세. 만화가. 천문해석 연구가

어린 시절부터 나는 좀 시니컬하고 반항적이었다. 중학교 때는 학생들을 억압하고 툭하면 구타하는 학교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이런 환경을 고칠 수 없다면,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17살의 나이에 집을 나와 한 변압기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턱없이 적은 임금, 엄청난 노동 착취에 지쳐갔지만,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9개월이라는 시간을 버텼다. 하지만 결국 공장을 그만두었다. 역시 세상은 잿빛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발소 그림’을 그릴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유명한 유화를 베끼는 등의 단순 작업이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에 그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1985년 무렵 만화가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면 할수록 만화의 매력에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4년 후 <기계전사 109>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기계 같은 인간과 인간 같은 기계를 통해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재조명한 내용이었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만화가 데뷔, 1993년 신인만화가상 수상…. 만화가로서 꽤 주목받으며, 나는 더욱더 나의 만화를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몸 상태가 안 좋아 건강검진을 받아보았더니 폐병이 있다고 했다. 더욱 어이없었던 건 그것이 2차 발병이라는 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폐병이 생겼다 아문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병원을 박차고 나왔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온 것일까.

폐병으로 한동안 독한 약을 수도 없이 삼켜야만 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자리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그렇게 누워 있던 한순간,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나 사회를,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매 순간순간들이 지긋지긋했다. 마음이 그러니 젊은 나이에 폐병이 걸렸구나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예전에 내가 그렸던 만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회 부적응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어둡고 시니컬한 내용이었는데, 책장을 넘기다 마치 예언처럼 폐병에 걸린 내 폐와 똑같은 그림을 이미 거기에 그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엄청 놀랐다.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폐병, 치료, 또다시 발병….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겪으며 이 시련은 하늘이 내린 또 다른 지침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거나, 만화를 그리는 매 순간순간들에서 오는 기쁨을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 작은 경험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 그것은 결코 연습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내 작품들은 조금 더 경쾌하고 밝아져갔다. <필승아 놀자>라는 작품을 본 한 분은 “네 만화를 보면 행복해진다”라고 하셨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제야 기쁨이라는 걸 정말 알게 된 것 같았다. 내 안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2002년쯤 천문학을 알게 되면서 더욱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천체 물리학적인 관점으로는 빅뱅 때부터 이어져온 태초의 우주가 내 안에 다 있고, 나는  땅의 어머니 지구가 낳은 흙의 자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은 조금 더 깊어지고 따듯해지고 여유로워졌다. 오늘도 나와 함께 원을 그리며 이야기하는 태양과 달, 다정한 친구 같은 행성들,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어 본다.

 

전갑배 작. <나무-2> 오일파스텔. 600×409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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