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보다 현재의 삶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8살 땐 미처 몰랐던 것들

장유진 18세. 학생 시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저는 아나운서와 시인 그리고 교수를 꿈꾸는 18살 소녀입니다. 음. 좀 더 솔직히 털어놓자면, 왼손과 팔다리가 조금 불편한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제가 거리를 지나가면 가던 걸음도 멈춰 서고, 절뚝거리는 제 걸음을 신기한 듯 쳐다봅니다. 한번은 어떤 건물 위층에서, 또래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저를 향해 “어이~ 거기 절뚝절뚝!!” 하고 소리 지른 적도 있습니다. 그런 안 좋은 시선과 일들을 당할 때면 마음이 안 좋지만, 그래도 저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아, 오늘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안 좋은 일을 당한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가 이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뛰어놀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매일 100점을 맞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2002년 7월, 저는 갑작스러운 병마로 쓰러졌습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처럼 살아났지만, 하루아침에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제게 닥쳐온 병마와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매일같이 울기만 했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 때문에 힘들어서 울었고, 무서워서 울었고, 계속 울다 보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아서 울었습니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끔은 하늘을 보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한테 이런 고통을 주시냐고 물어도 보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이란 나날이 흐른 지금. 수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수천여 편의 시를 쓴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꿈과 희망과 노력, 감사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제가 장애를 겪으며 얻게 된 것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장애인으로 살아온 제 삶에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들이 더 많다는 걸 말입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어렸을 적에 매일같이 울면서 찾아 헤매던 그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신은 제가 꿈과 마음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힘든 고통을 안겨주셨을 것입니다.

과거를 연연하며 / 살고 싶지 않아요 / ‘아 그때 내가 이렇게 했으면 지금쯤 어땠을까’ /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생각하며 / 속상해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 이미 지나간 일 /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 / 나쁜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 나 이제 / 지금 이 순간 / 하루를 열심히 살래요 / 하루가 모여 일년이 되고 / 일년이 모여 10년이 되었을 때 / 멋진 어른이 되어 뒤돌아보면 / 후회가 남지 않는 / 그런 하루를 살아갈래요 / 바쁜 하루 / 즐거운 하루 / 노력하는 하루를 보내며 / 그렇게 아름다운 내 꿈을 이뤄 갈래요 – 시 ‘하루’ (장유진)  

 

전갑배 작. <꽃-1> 오일파스텔, 콘테, 흑연. 600×409cm. 2011.

 

내가 십 대 때는 몰랐던 것들

맹지예 24세. 대학생.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른 학창 시절을 보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다른 아이들하고 뭔가 다르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일부러 공부를 잘하려고 용쓴 것도 아닌데 반에서 일등을 하고, 꽤 인기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2학년이 되면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2학년이 되고 반이 바뀌자 친구들이 웬일인지 차가워지고 멀어졌다. 새로운 친구들을 어떻게 사귀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친구들에게 말 걸기조차 어려웠다. 아이들이 모두 너무 낯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나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간혹 말을 하더라도, 의도치 않게 가시 돋친 말이 나왔다. 내 마음속에 가시가 들어 있는 것처럼, 마치 나를 보호하려는 고슴도치처럼. 그러면 친구들은 상처받고 나를 더 멀리하는 듯했다. 결국에는 아무도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성적도 많이 떨어졌고, 점점 세상을 삐뚤게 보며 작은 말에도 상처받았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은 나에게 무관심한 듯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 반항도 많이 했다. 나는 점점 우울해졌고, 급기야 대인기피증 때문에 친구들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서 2주 가까이 무단결석을 하는 상태까지 가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대체 남들과는 뭐가 다른 걸까,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걱정 없이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이것이 내가 그 무렵 생각했던 전부였다. 어떻게든 어두운 내 마음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허덕였지만, 그 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어찌어찌 대학에 들어간 후 우연히 마음수련을 하게 된 나는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언제나 잘나려고 했던 나, 언제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나, 친구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 한번, 관심 한번 준 적 없던 매정하고 이기적인 나.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났던 나. 한순간 그 잘난 나의 욕심이 충족이 안 되자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차라리 내 마음의 문을 꽁꽁 잠그고 있었던 것이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부정하고, 외롭고…. 그 모두가 내가 만든 내 마음의 세상이었다. 그런 마음들에서 점점 벗어나자 진실이 보였다. 걱정하는 부모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왔던 친구들…. 내가 그 손길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진실. 마음을 비우며 나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나도 이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중학생 때 이걸 알았더라면 그깟 자존심 따위, 좁은 내 마음에서 좀 더 일찍 빠져나와,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왠지 멀어지는 친구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친구들이 가진 장점을 인정하며 격려해주었을 것이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 좀 더 밝게, 좀 더 신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해보았을 것이다. 내 안에 갇혀 있기보다, 뭐라도 긍정적인 일을 하는 데 에너지를 썼을 것이다. 내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며,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예전의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어린 친구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빨리 그 마음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중에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과감하게 빠져나와, 소중하게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라고.

 

전갑배 작. <마실 가기> 오일파스텔, 콘테. 600×409cm. 2011.

 

저를 이 세상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성원 48세. 회사원. <직장인 울랄라> 저자

운명의 2003년 봄, 회사 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던 순간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귀가 나가버렸다. 그리고 지지직거리는 TV 소리. 돌발성 난청이었다. 8일간 입원, 간신히 퇴원을 했다. 휴식을 취했어야 하지만 난 업무 공백을 만회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협심증을 동반한 공황증. 꼬박 100일을 집에서 꼼짝 못한 채 누워 지냈다. 네 살 된 딸과 이제 갓 태어난 아들, 그러나 당장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는 몸.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 했다.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스스로 알게 된 것은, 내 마음과 몸은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거기에 어렵사리 털어놓은 어머니의 ‘빚’ 고백. 학원을 운영하는 동생의 빚이 ‘억’ 단위로 늘어나자,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억누르는 또 하나의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믿었던 나는, 마음보다 보살피기가 쉬운 몸을 먼저 적극적으로 가꿔보기로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만큼 쌓인 것이 몸무게였다. 62킬로였던 몸이 79킬로그램까지 불어 있었다. 심한 과체중이었다.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

첫째, 소식! 세 끼를 먹되 절대 배가 부르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둘째, 식사와 식사 사이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셋째, 밤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넷째, 밀가루 음식이나 탄산음료, 초콜릿, 과자 등을 끊었다.

식습관을 바꿨더니 놀랍게도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가뿐해지고 피부가 맑아졌다. 상태가 호전되자 곧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심장이 좋지 않아, 5분, 10분, 조금씩 걷는 시간을 늘렸다. 그랬더니 100일째 될 무렵에는 두세 시간까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북한산으로 갔다. 숲속을 몇 시간씩 산책하고, 어느새 등산까지 하게 되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며, 정신에도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생각이 밝아졌다.

서서히 건강을 찾아갔다. 이제 나는 마음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정작 살피고 고쳐야 할 것은 내 마음이었다. 우월감과 열등감, 조급함과 불안증, 침울함과 공격성이 가시처럼 나와 주변을 상처 내고 있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핏대를 세우는 나의 생각과 기준은 절대적으로 옳지도 않은 것이고 언제나 변함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 생각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되고 관철되어야 한다고 집착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상처받은 것일까? 마음이 편안해지자 점점 심장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의 삶도 보았다. 주인에게조차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채 울고 있었을 불쌍한 내 몸, 그리고 내 인생.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렇게 몸과 마음을 보살핀 후,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혼자 드라이브를 나갔다. 직접 운전을 하며 바라본 바깥세상은 환희 그 자체였다. 길거리를 다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보석처럼 빛났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개나리와 진달래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살아 있는 나 역시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직장 생활을, 가정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직장 생활도, 가정생활도 잘한다는 것을.

순간 시골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빚이라는 짐을 안겨주고,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나보다 더 찢어지고 부서졌을 어머니. 그런 어머니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어머니, 저를 이 세상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전갑배 작. <하회마을 아이들> 오일파스텔. 600×409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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