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5)

어떤 사람이 동굴 속에 들어앉아 버렸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완전한 마음의 고요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이었습니다. 동굴 앞에서 한 어린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는 그 소년이 내는 소리를 견딜 수 없습니다.

동굴 속에서 혼자 사는 동안 정신이 너무 약해져

작은 소음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그의 평화는 무참히 깨집니다.

 

온몸으로 노동하고, 노래하고 춤도 추고,

실패하고 혹은 성공하고, 이런저런 사람들 속에 놓아져도,

흐트러짐 없는 마음의 평화.

그것이 결국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끝일 것입니다.

올 한 해 좀 좋았으면 어떻고 좀 안 좋았으면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그 길 위에 있으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한순간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충분히 뜻깊은 한 해’를 보냈습니다.

 

 

빼기가 나를 바꾼다

공부가 재미있어지기까지,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

 

나는 학창 시절 공부 욕심이 아주 많았다. 성적이 오르면 부모님의 사랑도, 친구들의 관심도, 나의 열등감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강박증에 이르며, 시험 기간이면 책상 한쪽에 참고서를 높이 쌓아놓고 도서관에 하루 종일 앉아 공부를 했다.

그런데 투자하는 시간만큼 성적이 안 오르는 것이 문제였다. 같은 페이지를 하루 종일 반복해서 보다가 금방 조바심이 나서 이 책 저 책을 10분마다 돌려 보기도 했다.

1시간 중 50분은 시험에 대한 걱정으로 보냈기에, 정작 문제를 풀 때는 공부한 것이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매 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까지 시험의 연속인 고등학교 생활, 뇌혈관이 터져나갈 것만 같아 머리를 부여잡고 드러누워 버린 적도 있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학교에 못 다니겠구나 싶었다.

그때 엄마가 권해주신 것이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다. 수련하며 어릴 적 기억 중 엄마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엄마와 단둘이 산책을 하다가 무심코 시험 등수를 이야기 했는데 그 순간 싸늘하게 돌아서던 엄마의 뒷모습.

‘공부를 못하면 엄마의 모든 관심과 사랑이 다 없어지겠구나.’ 충격이었다.

이어서 떠오른 기억은 아빠에 관한 것이었다. 중학교 방학 때마다 아빠에게 영어 과외를 받았는데 영어에 딱히 재능이 없던 나는 매일 혼이 났고 매일 전쟁이었다. 그때부터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여 나중에는 한 공간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아빠가 미워졌다.

결국 그런 모든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공부와 등수에 집착하게 했던 거였다.

이 마음들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나만의 세계 속에 갇혀 평생 불행하게 살겠구나, 심지어 몸이 없어지고도 그 마음만큼은 똑같겠구나, 생각하니 끔찍했다. 나는 나의 그런 마음세계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열심히 마음을 버리자 열등감과 공허한 마음이 없어졌다.

차츰 부모님에게 예전의 이야기들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는 싸늘하게 돌아섰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 또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했던 아빠도 그저 자식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으셨다는 것, 나를 항상 배려해 주셨고 의외로 다정다감하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2학기. 나의 공부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다. ‘쟤보다 잘해야 되는데’ 하는 걱정들도, 비교하는 마음도,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시간을 허비했던 것도 없어졌다. 수업 시간에도 요점이 쏙쏙 들어왔다. 그 후로는 줄곧 반에서 일등을 한 것 같다. 점점 공부하는 게 편안하고 재밌어졌다.

만약 그때 마음수련을 안 했더라면 공부도 가족 관계도 엉망진창인 학창 시절을 보냈으리라.

나의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배우기에 앞서 마음을 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후배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한창 예민했던 청소년기에 이런 기회를 주셨던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허유정 24세. 간호사. 부산시 북구 화명동

빼기의 건강법

내 나이 칠십, 마음 버리니

병에서 자유로워져

 

마음수련은 여동생이 하면서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부터 여동생은 마음수련을 권했지만 나는 마음을 닦기보다는 그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믿고 살았다. 사랑 앞에는 당할 자가 없으니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봉사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행복한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부지런히,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스트레스가 많았다. 유교적 가풍을 고스란히 교육받고 자란 나는 말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다. 화도 원망도 가슴에 접어두고 겉으로는 “네”라는 대답뿐이었다.

그게 수십 년간 쌓이며 몸으로 전해진 것인지 60대에 접어들자 몸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이 이름 모를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삼 년간 약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근근이 앉아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지만 설상가상으로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몸 굳는 병을 치료하느라 갑상선 정기 검진을 소홀히 했는데 그새 암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몸에 암 딱지까지 붙이고 나니 내 인생이 왜 이런가 낙심이 컸다.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나서야 나는 마음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음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든데, 할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도 삼십 만 명이나 이 수련을 했다고 하니 꼴찌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 결심했다. 다른 사람 두 배의 시간을 수련하고 나니 그때부터 진짜 나를 볼 수 있었고 진심 어린 참회가 되었다.

‘1 더하기 1은 2’라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온 철저하고 빈틈없는 인생. 잘 살아왔고, 마음 닦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완벽하다는 자부심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너무나 미안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늦은 귀가와 잦은 술자리도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 마음속에 못마땅함이 가득해 남편을 집 밖으로 내치고 있었으니 남편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져 쉴 곳이 없었겠구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큰절을 했다.

“마음수련 안 했으면 당신 원망만 하며 평생을 살았을 텐데 그 마음 다 버리고,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니 너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몸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 꾸준히 등산을 병행하여 지금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갑상선 암 수술한 지는 이제 7년이 지났고 수술을 했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몸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부른다는데, 지금 이 마음으로만 살면 앞으로 영원히 병은 오지 않겠다는 확신이 든다.

요즘은 남편과도 너무나 재미나게 지내고 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래 걱정 몸 걱정 안 하고, 인생의 참맛을 즐기며 살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

조청자 69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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