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김주원(34)씨는 매해 연말이면 늘 무대 위에 있다. 캐럴이 들려오고 거리도 들뜨는 연말, 그녀는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가 되고, ‘호두까기 인형’의 마리가 된다. 국립발레단에서만 벌써 11년째. 공연 전, 시연에서는 종종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초청되어 가장 먼저 관객이 되어준다. 여기엔 사회복지에 관심이 깊은 발레리나 김주원의 배려가 담겨 있다. 김주원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이 되는 발레,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발레를 하고 싶단다.
볼쇼이극장에서 러시아가 아닌 다른 국적 무용수가 주역으로 참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역대 가장 많은 수는 한 무대에 4명. 이번엔 김주원을 비롯하여 8명이 이틀간 무대에 섰고, 볼쇼이 무대가 익숙한 주역 무용수 김주원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보다도 한국 발레가 세계 무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는 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귀국 때였다. 공항에서 어느 할머니가 다가와 그녀를 꼭 껴안더란다. 제일 앞줄에서 봤다는 그 스페인 할머니는 줄리엣이 죽는 장면에서 같이 울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선을 다한 춤의 진심이 전해졌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는 그녀다.
98년 주역 무용수로 데뷔한 이래 늘 최고의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들어오셨지요.
저는 주역일 뿐, 최고는 아니에요. 제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더 이상 노력을 안 할 것 같아요. 항상 제가 표현하고 싶은 어떤 느낌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발레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 써서 연기를 해야 돼요. 정말 어깨 하나로 슬픔을 표현해야 하고 발끝으로 눈물을 표현할 때도 있어요. 근데 저는 타고난 무용수는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나의 긴 목과 팔이 장점이라 얘기하는데 처음엔 오히려 단점이었어요. 제 팔은 많이 휜 데다 관절 부분에 각이 지고 도드라져 부드러운 곡선이 만들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매일같이 목과 팔 단련 운동을 하고 있어요. 무용하면서 알게 된 건 장점이나 단점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어떻게 노력해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녀는 기본이 탄탄한 발레리나로 알려져 있다. 부산 배정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김주원은 92년 여름, 당시 선화예중 3학년에 재학 중 볼쇼이 발레학교 선생님들이 국내에서 연 발레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발탁되어 홀로 유학을 결심한다. 92년부터 6년간의 유학 생활. 철저하기로 유명한 볼쇼이 발레학교의 우등생이 된다.
하루 평균 12시간. 한 달에 15켤레의 토슈즈를 바꿔 신는 그녀는 일년이면 크고 작은 공연을 백 회 이상 해야 한다. 발레를 계속해온 19년 동안 부상은 일상이었다.
목디스크뿐 아니라 허리디스크, 발바닥 근육을 지나치게 혹사시켜 근육에 염증이 생기는 ‘족저근막염’을 수술하지 않고 재활훈련으로 이겨낸 5개월간, 슬럼프가 없었다는 그녀도 차라리 발레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한다. “치료도, 아픔도 공백이 아니라, 또 다른 공부”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큰 힘이 됐다. 결국 김주원은 6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기한 그녀에게 그해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이 주어졌다.
수석 무용수는 단원들을 아우르고 작품을 이끌어가야 하니 쉬운 자리는 아닐 듯합니다.
발레는 절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백 명의 단원들과 소통해야 되니 힘든 건 당연해요. 어릴 때는 제 춤만 신경 썼다면 한 3~4년 전부터는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내가 아픈 채로 무대에 서야 할 때는 무용수들이 더 걱정을 해주고, 템포를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님이 맞춰주시는 것도 알았고요. 스탭분들도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세요. 제가 잘나서 혼자 추거나 나의 춤이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정말 함께라는 게 느껴지니까 진짜 제가 춤을 춘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발레를 시작하고 정말 일편단심이셨는데 답답할 때는 없었나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똑같은 일상이에요.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늘 발레만 생각해왔구요. 저희 아버지가 어느 날 “난 내 딸이 참 존경스럽다” 이러시는 거예요. 니가 최고가 된다거나 어떤 상을 받는다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난 내 딸이 14년 동안 그렇게 똑같은 생활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게 너무나 대단하대요. 너무나 감사했죠. 그때 아 내가 그랬구나, 생각을 해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거의 전 항상 발레단-집-공연이더라구요. 춤출 수 있어서 행복하니까요.
그런 그녀의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 발레로 하는 사회봉사였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김주원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영아원같은 복지 시설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김주원씨의 언니와 여동생은 사회 복지를 전공했다. 2년 전, 국립발레단이 김주원씨의 제안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게 발레스쿨을 연 적이 있었다. 결손가정 소년 소녀 60명은 이렇게 생애 처음으로 발레를 만났다. 그 일은 발레만 생각해온 그녀에게 자신이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일을 만나게 해주었다. 서울사이버대학에 재학 중인 그녀는 “제대로 공부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싶다”고 한다.
돕고 있는 아이들이 열 명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결손가정 아이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나요.
처음 볼 때 그 눈빛이 참 가슴 아팠어요. 제가 그 또래의 조카가 있고 아이들도 참 좋아하는데, 그 아이들 눈빛이 어른인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 아세요? 근데 땀을 흘리고 움직이니까 변화되는 게 보이더라구요. 나중엔 가기 싫어할 정도로 울어요.(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게 참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힘든 아이들이 변화되는 과정을 본 거잖아요. 발레는 부유한 아이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가능한 거예요. 시간을 더 내서라도 해야겠다 생각을 했죠. 사회복지에 대해 더 잘 알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예술의 힘을 느낀, 관객과의 교감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십여 년 전 한창 IMF가 심할 때였어요. 두께가 두툼한 팬레터가 온 거예요. 아이 셋을 둔 주부였는데 사업 부도로 빚더미에 올라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애들은 키워야 하고 눈앞이 캄캄해서 죽을 생각을 했었대요. 근데 이웃 아주머니가 힘내라면서 공짜 티켓인데 발레 공연 보러 가자 한 거예요. 이게 웬 사치인가 하면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 거예요. 그때 공연이 ‘지젤’이었어요. 그게 참 슬픈 내용이에요. 끝날 때까지 너무너무 많이 울었대요. 억눌렀던 아픔을 쏟아내신 것 같아요. 주원씨의 춤을 보면서 열심히 살기로 맘을 먹었대요. 이제 돈도 벌고 아이들도 잘 키우겠다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한 열 줄 정도 쓰셨어요. 그걸 읽고는 저도 펑펑 울었어요.(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늘 진심을 담아 춤을 춰야 한다고 하신 건, 아마 그때 영향도 크셨을 것 같아요.
어릴 때인데도 아, 예술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어요. 어떤 이에게는 휴식이지만 크게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게 예술이구나, 내 만족을 위해서만 춤을 추는 게 아니구나, 제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지칠 때 많이 힘들 때 가끔 생각이 나죠. 내가 게을러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발레리나에게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좋은 춤을 추려면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항상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네가 춤을 출 거라면, 아름다운 생각 많이 하라고요. 나쁜 생각하고 스트레스 받고 무대에 서면 그게 다 보인다고요. 춤을 통해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아름다운 마음을 갖자가 제 좌우명이 되었죠.
그녀는 아침에 눈떠 몸이 가벼우면 이상하다고 한다. 열심히 안 했나 싶어서. 보통은 땅에 발을 못 디딜 정도로 아프지만 웬만한 건 견딘다. 무대에 서면 아픈 게 신기하게 낫는다는 그녀는 천상 춤꾼이다. 춤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삶이 감사하다는 그녀가 이젠 그 행복을 아이들과 나누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