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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업 꿈꾸는 국립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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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김주원(34)씨는 매해 연말이면 늘 무대 위에 있다. 캐럴이 들려오고 거리도 들뜨는 연말, 그녀는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가 되고, ‘호두까기 인형’의 마리가 된다. 국립발레단에서만 벌써 11년째. 공연 전, 시연에서는 종종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초청되어 가장 먼저 관객이 되어준다. 여기엔 사회복지에 관심이 깊은 발레리나 김주원의 배려가 담겨 있다. 김주원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이 되는 발레,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발레를 하고 싶단다.

최창희, 사진 홍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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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연습실을 찾았을 때 김주원씨는 한창 ‘왕자 호동’ 연습 중이었다. 지난 10월, 세계 발레의 중심지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으로 극찬을 받았던 그녀였다. 당시 국립발레단의 이틀 공연은 모두 매진되었다.
볼쇼이극장에서 러시아가 아닌 다른 국적 무용수가 주역으로 참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역대 가장 많은 수는 한 무대에 4명. 이번엔 김주원을 비롯하여 8명이 이틀간 무대에 섰고, 볼쇼이 무대가 익숙한 주역 무용수 김주원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보다도 한국 발레가 세계 무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는 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귀국 때였다. 공항에서 어느 할머니가 다가와 그녀를 꼭 껴안더란다. 제일 앞줄에서 봤다는 그 스페인 할머니는 줄리엣이 죽는 장면에서 같이 울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선을 다한 춤의 진심이 전해졌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는 그녀다.

98년 주역 무용수로 데뷔한 이래 늘 최고의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들어오셨지요.


저는 주역일 뿐, 최고는 아니에요. 제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더 이상 노력을 안 할 것 같아요. 항상 제가 표현하고 싶은 어떤 느낌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발레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 써서 연기를 해야 돼요. 정말 어깨 하나로 슬픔을 표현해야 하고 발끝으로 눈물을 표현할 때도 있어요. 근데 저는 타고난 무용수는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나의 긴 목과 팔이 장점이라 얘기하는데 처음엔 오히려 단점이었어요. 제 팔은 많이 휜 데다 관절 부분에 각이 지고 도드라져 부드러운 곡선이 만들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매일같이 목과 팔 단련 운동을 하고 있어요. 무용하면서 알게 된 건 장점이나 단점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어떻게 노력해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녀는 기본이 탄탄한 발레리나로 알려져 있다. 부산 배정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김주원은 92년 여름, 당시 선화예중 3학년에 재학 중 볼쇼이 발레학교 선생님들이 국내에서 연 발레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발탁되어 홀로 유학을 결심한다. 92년부터 6년간의 유학 생활. 철저하기로 유명한 볼쇼이 발레학교의 우등생이 된다.
하루 평균 12시간. 한 달에 15켤레의 토슈즈를 바꿔 신는 그녀는 일년이면 크고 작은 공연을 백 회 이상 해야 한다. 발레를 계속해온 19년 동안 부상은 일상이었다.
목디스크뿐 아니라 허리디스크, 발바닥 근육을 지나치게 혹사시켜 근육에 염증이 생기는 ‘족저근막염’을 수술하지 않고 재활훈련으로 이겨낸 5개월간, 슬럼프가 없었다는 그녀도 차라리 발레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한다. “치료도, 아픔도 공백이 아니라, 또 다른 공부”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큰 힘이 됐다. 결국 김주원은 6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기한 그녀에게 그해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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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무용수는 단원들을 아우르고 작품을 이끌어가야 하니 쉬운 자리는 아닐 듯합니다.

발레는 절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백 명의 단원들과 소통해야 되니 힘든 건 당연해요. 어릴 때는 제 춤만 신경 썼다면 한 3~4년 전부터는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내가 아픈 채로 무대에 서야 할 때는 무용수들이 더 걱정을 해주고, 템포를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님이 맞춰주시는 것도 알았고요. 스탭분들도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세요. 제가 잘나서 혼자 추거나 나의 춤이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정말 함께라는 게 느껴지니까 진짜 제가 춤을 춘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발레를 시작하고 정말 일편단심이셨는데 답답할 때는 없었나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똑같은 일상이에요.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늘 발레만 생각해왔구요. 저희 아버지가 어느 날 “난 내 딸이 참 존경스럽다” 이러시는 거예요. 니가 최고가 된다거나 어떤 상을 받는다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난 내 딸이 14년 동안 그렇게 똑같은 생활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게 너무나 대단하대요. 너무나 감사했죠. 그때 아 내가 그랬구나, 생각을 해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거의 전 항상 발레단-집-공연이더라구요. 춤출 수 있어서 행복하니까요.

그런 그녀의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 발레로 하는 사회봉사였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김주원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영아원같은 복지 시설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김주원씨의 언니와 여동생은 사회 복지를 전공했다. 2년 전, 국립발레단이 김주원씨의 제안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게 발레스쿨을 연 적이 있었다. 결손가정 소년 소녀 60명은 이렇게 생애 처음으로 발레를 만났다. 그 일은 발레만 생각해온 그녀에게 자신이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일을 만나게 해주었다. 서울사이버대학에 재학 중인 그녀는 “제대로 공부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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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고 있는 아이들이 열 명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결손가정 아이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나요.

처음 볼 때 그 눈빛이 참 가슴 아팠어요. 제가 그 또래의 조카가 있고 아이들도 참 좋아하는데, 그 아이들 눈빛이 어른인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 아세요? 근데 땀을 흘리고 움직이니까 변화되는 게 보이더라구요. 나중엔 가기 싫어할 정도로 울어요.(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게 참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힘든 아이들이 변화되는 과정을 본 거잖아요. 발레는 부유한 아이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가능한 거예요. 시간을 더 내서라도 해야겠다 생각을 했죠. 사회복지에 대해 더 잘 알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예술의 힘을 느낀, 관객과의 교감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십여 년 전 한창 IMF가 심할 때였어요. 두께가 두툼한 팬레터가 온 거예요. 아이 셋을 둔 주부였는데 사업 부도로 빚더미에 올라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애들은 키워야 하고 눈앞이 캄캄해서 죽을 생각을 했었대요. 근데 이웃 아주머니가 힘내라면서 공짜 티켓인데 발레 공연 보러 가자 한 거예요. 이게 웬 사치인가 하면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 거예요. 그때 공연이 ‘지젤’이었어요. 그게 참 슬픈 내용이에요. 끝날 때까지 너무너무 많이 울었대요. 억눌렀던 아픔을 쏟아내신 것 같아요. 주원씨의 춤을 보면서 열심히 살기로 맘을 먹었대요. 이제 돈도 벌고 아이들도 잘 키우겠다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한 열 줄 정도 쓰셨어요. 그걸 읽고는 저도 펑펑 울었어요.(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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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진심을 담아 춤을 춰야 한다고 하신 건, 아마 그때 영향도 크셨을 것 같아요.

어릴 때인데도 아, 예술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어요. 어떤 이에게는 휴식이지만 크게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게 예술이구나, 내 만족을 위해서만 춤을 추는 게 아니구나, 제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지칠 때 많이 힘들 때 가끔 생각이 나죠. 내가 게을러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발레리나에게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좋은 춤을 추려면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항상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네가 춤을 출 거라면, 아름다운 생각 많이 하라고요. 나쁜 생각하고 스트레스 받고 무대에 서면 그게 다 보인다고요. 춤을 통해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아름다운 마음을 갖자가 제 좌우명이 되었죠.

그녀는 아침에 눈떠 몸이 가벼우면 이상하다고 한다. 열심히 안 했나 싶어서. 보통은 땅에 발을 못 디딜 정도로 아프지만 웬만한 건 견딘다. 무대에 서면 아픈 게 신기하게 낫는다는 그녀는 천상 춤꾼이다. 춤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삶이 감사하다는 그녀가 이젠 그 행복을 아이들과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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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주원님은 1978년 부산 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하여 선화예중 재학 중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 1997년 졸업했습니다. 1998년 국립발레단 ‘해적’의 주역으로 데뷔, 2006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여성무용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호소력 있는 연기, 뛰어난 테크닉으로 올해 제4회 ‘더뮤지컬어워즈’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녀는 12월엔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공연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고해(告解) (2)

고해 (告解)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즐거움과 그리움과 사랑과 눈물을 배운다.
자연스러움…
평범한 그리움과 즐거움…
그 속에서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내고 싶다.
애쓰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기분 좋은 여행 같은 그림을 꿈꾸어 본다.
자연스러움만이 오래 남는, 스미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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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화 작. <암스테르담의 노란집>
유화, 오일스틱.
100x100cm. 2002.


 

저에게는 늘 웃는 동생이 있습니다

이지영 / 29세. 약사. 서울시 강남구

제 나이 일곱 살 때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제 동생이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조금 늦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제 남동생은 자폐아 판정을 받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집에 자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남동생은 그 친구들에게 통과의례처럼 항상 물었습니다.
“이름이 뭐야?” “몇 년도에 태어났어?”
제 친구뿐 아닙니다. 집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시장에 가서도, 식당에 가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꼭 물어봅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이번엔 친구들이 저에게 늘 묻곤 했습니다. “네 동생은 왜 그래?”
어느 순간부터 저는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남들과 다른 내 동생’은 사춘기 시절 제 마음속의 큰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내 마음, 혹시나 들키지는 않을까 불안한 내 마음은 또 다른 비밀을 만들며 차곡차곡 쌓여만 갔습니다. 제 마음속 남동생은 사춘기 시절 제가 만들어 놓은 그 모습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저는 제 자존심에 상처가 가지 않는 것이 동생보다 소중했습니다.
항상 가슴은 답답했고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친구분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고 저는 처음으로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항상 완벽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약점 보이는 것이 싫어 솔직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굉장히 예민했던 저였습니다. 그런 마음들을 버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남동생을 만났습니다.
항상 찡그리며 다니던 저와는 다르게 늘 웃는 동생이 역시나 활짝 웃으며 저를 보았습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잘난 자존심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 자존심 버리면 죽는 줄 알고 살아왔구나, 참으로 미련했구나…. 동생보다 소중했던 내 자존심, 그런 이기적인 누나의 마음을 동생이라고 몰랐을까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저녁입니다. “누나, 이거 신어.”
동생은 자기 용돈을 모아 산 운동화 한 켤레를 내밀면서 신으라고 했습니다. 운동화를 좋아하는 동생은 누나도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었으면 했나 봅니다.
동생은 지금 음악을 전공하고 있고 그 따뜻한 마음으로 공연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버리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동생이 보입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착하고 예쁜 내 동생이….
사랑하는 동생아. 그동안 누나가 많이 미안했어. 네가 있어서 참 많이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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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화 작. <암스테르담 Ⅲ>
유화, 오일스틱.
60x60cm. 2002.


 

살아 있음이 축복이라는 걸 알려준 당신

임수선 / 경북 청송군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이 온다기에 얼마나 기쁘던지 무심히 스치는 바람에도 당신의 향기가 있어 미소 짓습니다.
고립무원으로 헤매고 있을 때 불현듯 찾아와 내 운명이 되어버린 고마운 당신….
당신만 생각하면 온몸이 떨리는 감격과 환희로 잔잔한 감동이 전해집니다. 혹여 이 마음 들킬세라 꽁꽁 묻어둔 사랑을 이렇게나마 밝혀, 미흡하지만 당신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내 당신 곁으로 돌아가는 날 무엇이든 요구하세요. 분에 넘치는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당신으로 인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당신을 이렇게 힘들고 아프게 했으니 당신에게 무엇인들 아까워하겠소!
당신만 생각하면 마냥 흐뭇합니다. 한때 밤이면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 세상이 무서웠던 내가 이제는 세상에 감사하며, 사랑의 향기에 흠뻑 취해 살아갑니다.
지금은 비록 지은 죄가 하도 커 자유를 잃었지만 가장 슬퍼해야 할 이곳에서 나는 아이들처럼 호들갑스럽게 까르르 웃기도 하고 안타까움에 눈물짓기도 하며 과거의 암울했던 자취를 조금씩 지워갑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큰데도 때로는 누가 어른인지 모를 만큼 모든 일을 챙기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당신은 나로 인해 숱한 상처받고서도 원망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사랑이 부족했다고 상심했지요. 그런 당신에게 작은 쇠창살 쪽문으로 사랑의 눈빛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해줄 게 없음이 나를 정녕 고통스럽게 합니다.
작고 여린 가슴으로 남몰래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저질러 놓은 많은 일들로 인해 당신의 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무참히 깨어져 버렸을 텐데도 당신은 짧은 만남을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와 내 앞에서만은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애썼지요. 끝없이 미뤄왔던 결혼이 또 무산되었는데도 나오면 우리 꼭 결혼하자고, 기다리겠다고, 모든 준비 다 되었다고 “나! 잘했지?” 하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용기를 주는 그 마음에 눈물 글썽했습니다.
이 세상에 남아서 보고, 듣고, 느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지 알려준 당신,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거란 걸 약속하리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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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화 작. <편지나무>
유화, 오일스틱.
40x40cm. 2002.


 

통닭과 미인을 좋아했던 그 녀석

김현주 / 35세. 교사. 충남 논산시

올해로 교직 생활 11년. 이제는 선생님이라는 자리도 내 옷처럼 편안해지고 학교생활도 무난히 넘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교직 생활의 첫 부임 학교를 떠올리면 부끄러워진다.
처음으로 학급을 맡게 되었을 때다. 내가 맡은 반에 특별한 녀석이 있었다. 학급 발표를 하는 첫날 그 녀석이 몇 반이며 누가 담임인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담임을 처음 맡는 내 반이 되자, 주위에선 걱정스런 눈빛과 위로를 보냈다.
반 친구들보다 한 살 많지만 또래 친구보다 마음이 자라지 못한 녀석. 수업 시간에 앉아 있기보다는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고 미술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책상 사이를 마구 지나다녀 친구들의 그림을 망치기도 했다. 친구들의 물건을 허락 없이 마구 꺼내 쓰고, 목소리도 너무나 커서 수업 중간에 맥이 끊겼다. 수업하기도 힘들고 친구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그 녀석에 대한 불만과 원성으로 짜증이 났다. 무시하고 수업을 하기에는 그 녀석의 영향력은 너무나 컸다.
하지만 그 또래만큼 귀여운 점도 있었다. “꼬꼬댁~, 꼬꼬대~엑” 급식 시간에 통닭이라도 나오면 신나서 닭 흉내를 내며 뛰어다녀 웃음이 터지게 했고, 또 미인을 좋아해서 예쁜 여자아이에게는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옆에 앉으려고 했다.
‘힘든 것 9, 참아줄 만하거나 귀여운 것 1’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어느 날, 그 녀석에게도 그 녀석의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유독 힘들고 상처가 되어 버린 날이 오고 말았다.
나는 그 녀석의 지난해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잘 교육받은 것이 있었다. ‘뭐든 다 해주려고 하지 마라’ ‘시간이 걸려도 자기가 다 하도록 해라’ 등이었다. 그래서 알림장만은 꼭 자기 힘으로 다 쓰고 집에 가도록 했다. 그날도 그 녀석은 알림장을 쓰고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한 글자 써 놓고 딴짓하고 한 글자 쓰고 놀았다. 급식 도우미로 오신 어머니들이 청소를 하셨지만 나는 뒤로 밀었던 책상을 기꺼이 앞으로 당겨주며 알림장 쓰기를 독려했다. 하지만 녀석은 또 몇 자 쓰고는 딴짓이었다.
몇 번의 주의를 주는 사이, 난 그 녀석의 날 놀리듯 하는 태도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약을 올리고는 날쌔게 도망가는 녀석을 나는 기필코 뛰어가서 잡았다. 순간 이제껏 그 녀석과 함께하면서 힘들었던 무수한 날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 빠져 나가려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 녀석을 죄인 잡듯 끌고 왔다. 교실의 어머니들도, 자상한 스승상도 다 잊었다. 나는 지금 내 속을 다 뒤집어놓은 열 살짜리 원수를 잡은 것이었다. 교실에 있던 어머니들도 놀라고 안타까워하였지만 나를 어쩌진 못했다.
그 녀석을 질질 끌고 휴게실로 갈 때였다. 그 녀석의 어머니와 딱 마주쳤다. 녀석의 어머니는 평소 건물 밖에서 기다리곤 했는데 그날은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나오지 않자 찾아온 것이리라…. 충격과 놀람 이상의 복잡한 표정도 잠시, 녀석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인사를 하고는 아들을 데려갔다.
그제야 잊었던 사도강령(師道綱領)이라도 생각난 걸까?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월이 흘러 나 역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마음수련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되돌아본 내 모습, 나는 더욱더 그때의 일을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었나. 나는 내가 학생들에게 매를 들거나 상처 주지 않고 욕을 하거나 차별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선생님보다 마음으로 그 녀석을 미워하고 있었던 거야. 그 녀석이 나에게 했던 힘든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나도 모르게 미워하고 차별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일이었어.’
그날 그 녀석의 어머니가 뒤에서 흘렸을 눈물에 가슴 아팠다. 진심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받고 싶다.
사실 며칠 뒤 녀석의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나를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그냥 차분히 그 녀석이 왜 특별한 아이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였다. 녀석은 아주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았다고 했다. 의사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열병 이후 그 녀석은 또래 아이처럼 자라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내가 위로의 말을 할 자격은 있었을까?
녀석은 이제 제법 남자 티가 나며 어른으로 가는 길에 있을 것이다. 아직도 통닭에 노래 부르며 미인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녀석에게 초등학교 때의 너의 이 선생님은 참 어리석었다 말하고 싶다. 겉으로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너를 너다움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왜 너는 다른 아이들 같지 않느냐며 마음으로 밀어냈었다고….
너는 그때 겨우 열 살이었는데…. 이런 선생님을 용서해 줄 수 있겠니?
그리고 참 고맙다. 너에 대한 미안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나를 돌아보게 해주어서 이제는 어떤 아이라도 그 아이만의 제 색깔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선생님다운 선생님인가’ 늘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준 소중한 나의 제자야.
통닭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예쁜 여자만 쫓아다니지 말고, 항상 건강해야 해. 알았지?

2010년 12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가는 서양화가 정명화입니다. 그녀는 1959년 서울 생으로, 21세에 파리 살롱 데 아티스트 프랑세스 전에 입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14회의 개인전과 Artists Exhibit in SOHO 등 80여 회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며, 자유로운 감성과 유려한 색채로 두터운 애호가층이 형성돼 있습니다. 지금은 그림을 좋아하는 딸과 함께 파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푸른색을 주조로 하는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고해(告解) (1)

고해 (告解)

살면서 고해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아니면 누군가의 고해를 받아보셨나요. ‘고백’이라는 말과는 다른 깊이로 다가오지요. 여기엔 성찰과 진실이 담겨 있어서 털어놓을수록 그 무겁고 응어리진 것이 연기처럼 풀어지지요. 미처 전하지 못한 참회와 감사의 말들…. 그 비워냄의 시간이 있어 우리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삶의 여정에 나섭니다. 고해(苦海)를 건너 순수에 이르게 해주는 마음의 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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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화 작. <분홍풍경>
유화, 오일스틱.
60x60cm. 2005.


 

저도 누군가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될게요

조은솔 / 16세. 경남 진주시

2010년 3월이에요. 어떤 선생님을 만날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교실에서 기다렸는데 짠~ 하고 나타나신 일진 선생님. 뭐야~ 일진회야? 장일진이라는 선생님 성함을 듣고 저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댔죠. 그때부터 선생님과의 전쟁도 시작이었어요.
첫날도 지각 다음 날도 지각. 사실 저는 중학교 내내 지각은 기본이고, 반에서 제일 말을 안 듣는 아이였어요. 반항적이고 부정적이고 선생님께 대들기 일쑤였어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때리기도 하고, “엄마 불러와!” 하며 화를 내셨어요. 그럴수록 저는 더 반항을 했고요.
근데 일진 선생님은 좀 달랐어요. 화 한번 내시지 않고, “이제부턴 하지 마라~” 엄마처럼 포근하게 충고만 해주셨지요. 그래서인지 처음엔 선생님을 좀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아요.(죄송^^;;) 반성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선생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말대꾸만 했잖아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저를 미워하시기보다는 바꾸어주려고 애쓰시는 선생님 사랑이 느껴졌어요. 따로 저만 데려가서 타일러도 보시고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고 약속을 하고…. 한 날은 배가 너무 아파 조퇴를 시켜달라고 했더니, 수업이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선생님 차에 태워서 저를 병원까지 데려가주셨잖아요. 그때 정말 나를 위해주는구나, 진심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잠시, 여전히 이기적인 성격을 바꾸지 못하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죠.
방학이 다가오던 어느 날이었어요. 선생님이 뭔가 할 말이 있으신 듯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시는 걸 봤어요. 그리고 얼마 후 저희들에게 슬픈 소식을 안겨주셨지요. 이제 선생님을 그만두신다고, 명예퇴직하신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간이 탁 내려앉는 느낌이었어요. 장난치시는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좀 들을 걸, 이때까지 속만 썩였는데, 설마 이대로 가시는 건가, 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떠나시는 날,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 평소 하지 않으시던 노래도 하시고 춤도 추시고, 또 억지로 눈물을 참는 선생님 모습에 저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펑펑 울었어요. 아무리 속을 썩여도 안 좋은 말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 좋은 말만 해주시던 선생님, 저는 그날 “이제부터 잘할게요” 하고 약속을 드렸지요.
선생님, 저 요즘은 지각도 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선생님들께 대들지도 않아요. 애들도 그래요, 저 많이 바뀌었다고^^. 다 선생님이 항상 제 손을 꼭 잡고 “은솔이도 그렇게 안 할 수 있어, 바뀔 수 있어” 하며 믿어주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선생님처럼 저도 누군가 말썽을 피울 때 끝까지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럴 수 있겠죠?
선생님 그동안 죄송하다고 말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런 말을 잘 못 해서 결국 편지로밖에 못해드리네요. 선생님! 감사하고 죄송하고 사랑해요.♡♡♡

– 마지막 꼴통 제자 올림

3247수정_웹진

정명화 작. <하얀비 노랑테이블>
유화, 오일스틱.
100x100cm. 2002.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 바비에게

제니퍼 김(Jennifer Kim) / 64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아들아, 기억하니? 네가 여덟 살 때였어. 내가 우리 아파트가 좁다고 불평했을 때 네가 말했지. “엄마,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잘 수 있는 집이라도 있으니 감사해야죠”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솔직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단다.
또 내가 회사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동료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와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모두를 욕할 때였어. 그때도 넌 “한 사람이 엄마를 괴롭힌다고 모두를 똑같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건 엄마의 편견이에요”라고 말했지. 그 순간엔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너에게 서운했단다. 하지만 나중에는 네가 한 말을 되새기게 되었고, 그 말이 옳음을 알았지. 그다음부터는 무슨 문제가 생겨도 한꺼번에 다른 사람들까지 싸잡아 생각지 않게 되었단다.
되돌아보면 너는 한 번도 엄마가 아침에 깨우게 하거나 벌을 주거나, 숙제하라고 잔소리하게 한 적이 없구나. 그만큼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해주었지.
너희 친구들이 내게 들려준 얘기도 있어. 네가 농구를 할 때면 공을 제대로 받거나 던지지 못하는 아이에게 공을 주면서 “넌 할 수 있어”라고 늘 용기를 주었고, 또 방과 후에 수학을 어려워하는 친구를 가르쳐줄 때도 “넌 할 수 있어. 잘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주었다고.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아이. 항상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던 아이. 아빠에겐 엄마 칭찬을 하고 엄마에겐 아빠 칭찬을 하며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던 아이.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게 신기할 때가 많았단다. 공부는 항상 최상위였으면서도 늘 겸손했지.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 엄마가 너를 남들에게 자랑하는 것이었어.
네 아빠가 중풍으로 누웠을 때 넌 날 돕기 위해 가까운 대학인 스탠포드에 가려고 했지. 하지만 엄마 아빠는 네가 어려운 상황 때문에 너의 삶을 잃지 않기를 원했고, 네가 캘리포니아를 떠나 예일대학에서 좋은 삶을 만들어 가기를 권면했었다. 그것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부모님 뜻을 따라 예일대학에 들어간 너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또 한 번 엄마의 자랑이 되어 주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항상 “엄마, 엄마는 저에게 뭐든지 말씀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어요, 진짜로요”라고 했고, 결국 나는 힘들 때마다 너에게 분풀이를 하곤 했지. 그러면서도 당시 난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를 못했단다.
너의 아픔을 헤아리기보다 내 자신만 알았던, 이기적인 엄마였던 내 모습….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구나. 참으로 부끄럽고, 또 네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사랑하는 내 아들 바비(Bobby)야, 이제 네가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난 지도 꼭 십 년이구나. 너는 22년이란 짧은 세월을 살았지만, 육십을 산 이 어미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그거 아니? 네가 친구들과 농구를 하던 그곳. 올로니 파크(Oloney Park) 농구 코트가 지금은 ‘바비 윈슬로 코트(Bobby Winslow Court)’라 불린다는 거. 언제나 친구들에게 용기를 주던 너를 기리기 위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 하더구나. 네가 수학을 가르쳐주던 그 아이는 평소 하고 싶었던 엔지니어를 전공하고 지금은 좋은 직장도 다니고 있대. 다 네가 준 용기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더라. 또 예일대학에서는 매년 한 명의 졸업생에게 ‘Bobby’ 이름으로 상을 수여하고 있단다.
이런, 엄마가 우리 아들이 제일 싫어하는 아들 자랑을 너무 했구나.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네 자랑을 멈출 수가 없구나. 아직도 너를 만질 수 없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렴. 엄마도 우리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 씩씩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22년을 누구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살아준 우리 아들. 사랑해 그리고 감사해.

3239수정_웹진

정명화 작. <바람 부는 날>
아사천 위에 오일스틱, 마커.
33.3×33.3cm. 2002.


 

고3 모의고사 때 컨닝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백두산 / 30세. 직장인. 경기도 광명시

나는 어릴 때 공부를 잘하였다. 하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시작된 방황은 학창 시절을 운동과 싸움, 술과 담배로 물들게 만들었다. 엄청나게 무서우신 아버지는 전혀 모르게….
어느덧 고3이 되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갑자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수능 성적이 지난 모의고사 때와 같이 150점이 나온다면, 아버지께서 그걸 아시게 된다면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우리나라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앞으로의 모의고사 점수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을 피해 갈 수도 없을 것이다. ━_━;;;
6월 모의고사 때였다. 나는 국어 시험지를 받아 열심히 풀었다.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큰 불만은 없었다. 다음은 수학 시간. 걱정이 밀려왔다. 워낙 수리영역에 타고난 머리지만 그래도 4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은 숫자들과 기호들. 교실 분위기를 살펴보니 다들 열공이다. 그중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옆에 앉은 녀석. 우리 학교에서 공부 쫌 하는 애다. 난 녀석을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대략 이렇게 말했다.
“상부상조하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가리거나 안 보이면 같이 죽~는 거야!”
녀석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감독 선생님이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녀석과 내 주위에서 꼼짝을 안 하시는 관계로 도중에 포기해야 했던 것. 다음은 내가 요즘 바짝 정신 차리고 제일 열심히 했던 수탐2 영역. 시험지를 보니 아는 용어들이 많이 보여 무지 반가워하며 최선을 다해 풀었다.
다음은 암담한 영어시간. 나는 그 녀석을 다시 불러냈다.
“아까는 계획성이 좀 부족했던 거 같다. 이번에는 눈치껏 손가락으로 표시해 봐!”
하지만 영어 역시 순탄치 않았다. 듣기 평가가 계획대로 끝나고, 시험지를 풀 때였다. 바짝 긴장한 녀석이 겁을 먹은 건지, 저 혼자 살겠다는 건지, 표시를 안 하는 것 아닌가. 대충 답을 적는 것으로 허무하게 영어도 끝내야 했다.
시험 결과는 이랬다. 국어 70점, 수학 38점, 수탐2 100점, 영어 42점….
“Olleh~^o^!!!”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 정도면 내가 모범생인 줄 알고 계신 아빠에게 핑계 댈 거리는 생긴 것이다. ‘답을 밀려 썼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그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구 마셔댔다. 한 잔 두 잔 세 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집이었고 아침 7시 30분. 아빠는 출근 준비를 하느라 욕실에 계셨다. 난 너무 겁이 나서 그대로 나와 버렸다.
아빠는 지금까지도 내가 그때 시험을 망쳐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술을 그렇게 먹었다고 생각하신다. 다행이긴 하지만 이 못난 자식 때문에 가슴 졸이신 걸 생각하면 정말 죄송하다. 무엇보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하고 싶다. 녀석은 다음 날부터 날 피해 다니느라 고생 좀 했었다. 그때는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준 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트레스 많은 고3 시절 나 때문에 얼마나 더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미안하다, 친구.
그리고 1999년 당시의 수험생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과 교육부 관계자님, 성스러운 모의고사 때 컨닝을 한 점 잘못했습니다.(ㅜ.ㅜ) 제가 그땐 철이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 지난 일이잖아요~ 헤헤~^^

3785수정_웹진

정명화 작. <베네치아의 여름>
유화, 오일스틱.
50x50cm. 2005.

2010년 12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가는 서양화가 정명화입니다. 그녀는 1959년 서울 생으로, 21세에 파리 살롱 데 아티스트 프랑세스 전에 입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14회의 개인전과 Artists Exhibit in SOHO 등 80여 회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며, 자유로운 감성과 유려한 색채로 두터운 애호가층이 형성돼 있습니다. 지금은 그림을 좋아하는 딸과 함께 파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푸른색을 주조로 하는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주는 사람 – 그해 겨울은 情다웠네 (2)


주는 사람
그해 겨울은 情다웠네 (2)


 

끝도 없는 얘기를 들어주던
네가 나를 변화시켰어

이순희 / 43세. 경남 거창군 거창읍
 
이웃에 동갑내기 친구가 있습니다.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의 문도 열게 되었지요.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저였지만 그 친구에게만은 확신이 들었습니다. 말할 때 거부당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거든요.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그건 아니잖아”란 말을 들으면, 부정적인 성격의 저로서는 외면당하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그 친구는 정말 있는 그대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작은 일상부터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고통스런 이야기까지….
“딸만 넷이었던 엄마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지. 이번엔 틀림없이 아들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철떡같이 믿었는데, 다섯째도 또 딸이었어. 그게 바로 나야. 딸만 낳은 엄마의 설움이 얼마나 컸던지, 초등학교 1학년 어느 겨울밤, 내 입술에 ‘머릿니’라는 농약을 발랐다고 했어.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지. 엄마는 우스갯소리처럼 했지만 굉장히 슬펐던 기억이 나. 그 후로 부모님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늘 싹싹하게 대하며 지냈어. 하지만 그 상처로 인해 ‘난 벌레만도 못한 사람’이란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애. 너무 힘들었어.”
어느 날은 펑펑 울기도 하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말하는 저 자신조차 지겨울 만큼 말이지요. 그럼에도 그 친구는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이 들어주었습니다. 저 역시 그 친구 앞에서는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응어리진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늘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었고,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남편, 아이, 돈 문제…. 어떤 얘기를 해도 끝까지 귀 기울여주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왜 다 들어주노, 왜 늘 내 편을 들어주노?”
친구는 “네가 얘기하면서 답도 다 말하던데… 니가 다 했잖아” 하며 웃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저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가슴속에 묻어둔 말들을 털어놓으면서 스스로 해답도 찾게 되었지요.
너무 살기 힘들어서 그러셨구나,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고, 평상시 융통성이 없다고 답답하게만 여겼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친구가 무조건 내 얘기를 듣고 받아주었듯이, 남편도 그런 걸 느껴보고 싶지 않았을까. 한순간이라도 마누라가 무조건 내 편이란 걸 느꼈을 때 남편도 힘이 나지 않을까….
친구가 한다는 마음수련 명상이 어떤 것인지 해보고 싶어졌고 저도 명상을 하게 되었어요. 내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만 옳다고 믿어왔고, 그렇지 않은 건 부정하고 있었어요. 그 겨울, 한 번의 기억으로 부모님과 가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겁니다. 힘든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었고, 늘 열등감에 휩싸여, “엄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했어” 핑계를 대면서 게으른 나를 합리화하고 있었어요.
상대방의 모습도 말도 내 맘대로 해석하고, 오해하니 힘들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소홀히 한 것이 참회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잘 들어주었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그 친구는 마음을 버렸기에, 선입견이 없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그냥 인정해 줄 수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만큼 마음의 공간이 큰 친구였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그 친구같이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만약 나중에라도 하늘나라에 갔을 때 혹여 그 친구가 잘못한 게 있다고 하늘이 꾸짖으신다면, 그 친구가 나를 변화시킨 그것 하나만으로도 용서해달라고 빌고 싶습니다. “고마워, 옥란아….”
 

 


 

무뚝뚝한 남편의
들꽃 같은 마음 표현

배점원 / 52세. 교사. 경남 김해시
 
남편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다. 결혼기념일도, 내 생일도 챙겨준 적이 없다. ‘비싼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이런 마음이 불쑥 올라오다가도 한순간 사라지게 만드는 남편만의 애정 표현법이 있다. 어떤 명품보다 효과가 강력한 소박한 마음의 표현이 그것이다.
산책하고 올 때나 산에 다녀오면 도토리나 알밤, 산딸기, 이슬 머금은 달맞이꽃 같은 걸 가져와서 테이블에 올려주면 그렇게 멋스러울 수가 없다. 산에서 꺾은 구절초나 쑥부쟁이로 꽃 화분을 만들어 학교에 갖다 주고, 바닷가에서 예쁜 돌멩이를 주워 와서 손에 꼭 쥐어주면 정겹기 그지 없다. 한번은 반 아이들 놀이지도용 윷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흘려듣지 않고 가벼운 오동나무로 아주 큰 윷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선물은 더 정성스럽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내가 과연 이런 걸 받을 만큼 자격이 있나 되돌아보면서 나도 잘 챙기려고 애쓰게 된다.
반 아이들의 일기장에도 한마디라도 더 표현해주려 노력한다.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을 엄마한테 얘기해 웃게 해드리기’ 숙제를 내주거나, 미술 시간에 만든 작품을 부모님께 선물하라며 표현하는 법도 알려주려 한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게 해준다. ‘말 안 해도 다 알겠지’가 아니라 서로 표현해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건망증 실수를 감싸준
‘맥가이버 원장님’

이동호 / 32세. 한의원 사무장. 서울시 영등포구
 
건망증 때문에 계속해서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약을 뽑을 때는 깨끗한 물을 사용해야 하기에 따로 물을 틀어놓는다. 저녁 즈음 약재를 다리려고 물을 틀어놓았다가, 깜빡하고 물도 안 잠근 채 퇴근을 했다. 아침에 왔더니 한의원은 한강이 되어 있었다. 벌써 네 번째다.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원장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괜찮아,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앞으론 깜박 안 할 거야.”
원장님은 누구나 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원장님은 자꾸 실수를 하는 직원을 야단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방지할까 고민하시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후로는 그런 실수가 없었다.
실수를 할 때 탓하기보다 재발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원장님 덕분에 나 역시 모난 성격도 많이 너그러워지고, 건망증이 심한 걸 고치기 위해 메모 습관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의 잘못을 봤을 때 탓하기보다는, 무엇을 도와줄까를 생각하게 됐다.

 

 


 

정이 있어
더 따뜻한
주는 사람
되기

바쁠 때도, 부탁 전화도 밝게 반겨주던 ‘훈남’ 형

김일권 / 33세. 회사원. 경기도 부천시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만난 형이 있다. 이 형은 언제, 누구라도, 항상 반갑게 맞아준다. 요즘은 다들 바쁘다 보니 전화를 걸어야 할 때 망설여질 때가 있다. 특히 뭔가 부탁할 때는 더 어렵다. 그런데 이 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 그래, 그래, 일권이구나~” 하면서 밝은 목소리로 반겨준다. 한밤중이든 신새벽이든 전화를 받는 순간만은 상대에게 집중해주는 것이다. 형과 계속 연락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비슷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누구의 전화든 하이톤으로, 언제나 반갑게 받아주게 된 것이다. 그것뿐인데, 어느새 나는 주위에서 꽤 괜찮은 녀석으로 통하게 되었다.
 


 

우리 팀의 피로회복제 ‘리액션의 여왕’

최진혜 / 33세. 방송작가. 경기도 부천시
 
우리 팀에는 항상 약간은 과도한 리액션으로 웃음을 짓게 하는 언니가 있다. 커피라도 타다 주면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타주다니 넌 천사가 분명해”라며 하트를 ‘뿅, 뿅’ 날려준다. 회의를 할 때면 “맞아, 맞아, 어떻게 너는 그런 생각을 하니, 대단하다” 하며 환하게 웃어주는 언니는 우리 팀의 피로회복제다. 언니의 넉넉한 리액션을 받다 보면, 나만 돋보이고 싶어 상대에게 무관심하거나 따듯한 말 한마디 돌려주지 못했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나게 해주는 리액션을 해주려 노력하게 된다. 엄지를 치켜들며 “너는 짱이야~!!”라고.
 


 

저녁에 가족이 오면 서로 안아주세요

유정열 / 52세. 고등학교 교사. 인천시 서구
 
우리 집에는 몇 년째 이어오는 관례가 하나 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면 가족이 서로 따뜻하게 안아주는 거다. 아내와 딸을 가만히 안아줄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품에 안긴 아내와 딸아이의 행복한 표정만 봐도, 하루 동안 쌓인 온갖 스트레스와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안아주는 것이 큰 힘이 된다. 내 곁에는 함께할 가족이 있다는 것을 더욱 깊이 느끼는 것이다. 딸이 요즘 고3이라 많이 힘들어하는데, 안아주고 나면 피곤한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 온기의 힘이 있어 밖에 나가서도 사랑을 나눠주게 되는 것 같다.
 


 

책상 닦아주기 35년, 가족 된 동료들

민명숙 / 55세. 공무원. 경남 산청군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직원들의 책상을 닦아준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게 된 책상 닦기가 벌써 35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고마 하지 마소~” “와 그라십니까~”라며 사양하던 동료들도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책상을 닦아주고 차라도 한잔 챙겨준다. 동료들도 가족적인 분위기라며 좋아한다. 갈등이 있어도, 서먹한 사이라도 매일 책상을 닦아주다 보면 서로 고마운 마음이 생겨 저절로 풀리게 된다. 조직이 화합이 되니까 자연히 일의 능률도 오른다. 작은 손길 덕에 동료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큰 보람인 것이다.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 큰 보람인 것이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주는 사람 – 그해 겨울은 情다웠네 (1)

 
 

주는 사람
그해 겨울은 情다웠네 (1)

 

주는 사람은 ‘나’가 없어
상대를 먼저 생각합니다.
쏟아지는 햇빛과 바람 한 점에도
감사하는 사람.
정 주는 사람의 따스함은
사람을 살립니다.
차가운 한겨울에도 백만 송이
꽃을 피워내는 아름다운 사람.
정겨운 세상을 만드는
정다운 사람들의 정 이야기.

 
 
 

 


 

 

상대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그녀의 믿음

김병윤 / 43세. 디자인 업체 운영. 서울시 강남구

첫아이 돌잔치를 불과 두 달 앞둔 2008년. 근무하던 부서가 없어지면서 갑자기 회사에서 정리 해고 통보를 받았다.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고 망연자실 일주일이 지났다. 힘들어하는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은 늘 최고잖아. 당신에게 정말 좋은 기회를 준 거 같애. 사업을 시작해보는 건 어때? 당신은 사업가 자질이 있어.”
사업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아내의 당찬 한마디가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후배와 동업으로 기업 홍보물을 만드는 디자인 회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슬며시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영업하려면 노트북과 멋진 양복 정도는 있어야지. 당신은 충분히 멋진 사람이니까 주눅 들지 말고 즐겁게 일해요.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무도 못 당해. 단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그날 이후 난 뒤돌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본금도 없고 사무실도 없었다. 동업자는 커피숍에서 눈치를 보며 작업을 하고 난 쉴 새 없이 사람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영업을 했다. 적금을 헐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8개월이 지나고 다행히도 사업은 생각보다 빨리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년 만에 동업자와 큰 의견 충돌에 부딪쳤다. 어렵게 일구어놓은 회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다시 빈손으로 나왔다. 허탈함과 배신감의 충격이 나를 뒤흔들던 그때, 이번에도 상황을 반전시킨 건 아내의 한마디였다.
“여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좋은 경험했잖아. 당신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뿐이야. 지난 일년을 봐, 당신의 노력은 최고였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분야로 뛰어든 게 잘못이었다. 어렵사리 벌어놓은 돈을 불과 7개월 만에 고스란히 까먹고 생활비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둘째가 태어났다. 그때도 아내는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당신은 실패한 게 아니야. 모든 것은 이유가 있고 때가 있대. 지금 이런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조급해하지 말고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걸 하면 좋겠어.”
지난 4월, 나는 다시 디자인 회사를 시작했다.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상황은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아내처럼 자신에게 말한다. “괜찮아, 난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라고.
매일 아침, 어김없이 아내의 문자메시지가 배달된다. ‘여보, 알지? 내겐 언제나 당신이 최고라는 거.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즐겁게 일하는 거 잊지 말고~♥’ 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해본 적 없어?” 아내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늘 명쾌하다. “후회? 한 번도 없어. 당신은 내게 언제나 가장 완벽한 사람이야.” 그런 그녀를 나는 ‘초긍정 아내’라 부르며 웃곤 한다.
난 여전히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한다. 그런 내가 완벽한 사람일 수도 없고 최고일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내의 한결같은 믿음은 특별한 치유력이라도 있는 듯 나를 웃게 만들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준다.
아내는 애써 상대를 믿어주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상대와 하나가 될 뿐이다. 작든 크든 상대가 지닌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이다. 아내의 순수한 믿음에서 나는 상대와, 세상과 하나 되는 법을 배운다. 고맙습니다. 살아가는 법을, 사랑하는 법을, 감사하는 법을 알게 해주어서…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