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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니면 안 돼’ 가족 집착을 내려놓다

‘나 아니면 안 돼’ 가족 집착을 내려놓다

지난 9월 27일, 수술대에 올랐다.
4년 전부터 앓아온 뇌혈관 수술이었다.
후유증으로 인해 의사조차 수술을 권유하는 게 쉽지 않았던, 7시간에 걸친 대수술. 가족들은 수술 동의서를 쓰면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 흘렸지만,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편안히 그 순간을 맞이했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그냥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조명희 55세.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완벽한 주부’ 30년, 병이 찾아왔다

결혼 후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을 키우고 살아왔는데 남는 것은 지독히도 아픈 내 몸뚱이뿐이었다. 오랜 불면증으로 몸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잠 못 자는 것도 서러웠고, 몸이 아플 때마다 늘어가는 건 짜증밖에 없었다. 이곳저곳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의사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2008년.

오직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삶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남편과 아이들이 무얼 하는지 꼬치꼬치 묻고 간섭하고, 하루 종일 걸레 들고 치우며 다니고, 밀린 집안일들로 짜증 내고…. 빨래를 해놓지 않으면 자면서도 꿈속에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설거지를 해놓지 않으면 꿈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못한 일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못마땅해했기에 가족들은 집안일 하는 것조차 감히 엄두를 못 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하게 했다.

가족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왔던 30년, 내 모습이 비로소 보였다. 남편, 자식이 잘되는 것, 그것이 내 명예인 양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 커서 내 품을 떠나는 자식들과 회사 일로 바쁜 남편을 보면서 결국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것, 그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인해 참 많이 힘들었다. 가족을 위해 살고 가족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건 그만큼의 미움과 원망뿐이었다.

결국 몸이 아픈 것도 마음을 잘못 먹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 순간 가족을 내 틀에 묶어두려 했구나, 그로 인해 참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겠구나….’ 수련을 통해 평생 움켜쥐려 했던 가족들을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모든 걸 해야 한다는 마음조차도…. 특히 지독히도 아픈 몸이 원망스러워, 남편에게 모질게 쏟아냈던 말들이 떠올라 울기도 많이 울었다.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동네를 배회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야, 여보” 무릎을 꿇고 남편에게 참회했을 때 아니라고, 오히려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던 남편…. 그 마음이 고마워 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병이란 것도 쳇바퀴 도는 듯한 인생을 한번 놓아보라고, 쉬어가라고,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제야 비로소 집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일주일간 논산에 있는 마음수련 본원에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전엔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내가 없으면 밥은, 빨래는 누가 하고, 강아지 밥은 누가 주고, 똥은 누가 치울까’ 하며….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살아온 내가 우스웠다.

낙엽처럼 다 내려놓는 기쁨

집을 비운 동안 집안일은 오히려 더 잘 돌아가기만 했다. 빨래, 설거지를 잘 도와주는 남편은 이제 주부가 다 됐다며 웃는다. 내가 해야 한다는 마음을 놓으니 가족들이 이미 하고 있었고, 서로가 편안해졌다. 10년 동안 앓아온 불면증도 사라지고,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내려놓으니 세상은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병이라는 ‘조건’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좋았고, 가족들도 너무나 평온하고 침착한 내 모습에 놀라워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 이젠 석양의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외로움은 더 이상 없다. 밖에서 친구를 만날 때나, 어떤 일을 하든 항상 집안일 걱정으로 불편했던 마음, 그토록 팽팽하게 잡아끌었던 긴장의 끈이 놓아졌을 때의 자유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어디에 있든, 그 순간 내 마음도 함께 머문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

요즘은 내가 안 한 건 다 좋다. 전엔 밖에서 밥 먹는 걸 싫어하던 내가 병원 밥을 너무 맛있게 먹으니, 남편이 “병원 밥이 그렇게 맛있나?” 하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남이 해준 밥이 더 맛있더라고.”

오늘도 산책을 나선다. 예전엔 그냥 스쳐 지나갔던 나무 한 그루, 나뭇잎 하나하나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순리에 따라 꽃이 피고 지듯이, 죽음은 두려움이 아닌 자연이기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예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다 내려놓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오늘도 마음으로 되뇐다.

면역력 높이는 굴 크림수프

 

우유로 끓인 부드러운 수프로, 자양강장에 좋은 굴, 면역력을 높여주는 당근과 시금치가 들어 있어
과음으로 인한 숙취 해소에도 좋은 아침 수프이다. 물을 넣어도 되지만, 다시마 국물을 넣어야 깊은 맛이 난다.

재료 준비(2인분)
굴 1컵, 양파 1/2개, 당근 1/3개, 감자 2개, 시금치 3~4대, 베이컨 3장, 다시마 국물 1.5컵, 우유 1컵, 올리브유·소금·후춧가루 조금씩, 바게트 적량(또는 생략)

만들기
① 굴은 소금을 뿌려 비벼서 서너 차례 물에 헹구어 씻어 물기를 뺀다.
② 양파와 당근, 감자를 작게 썬다. 시금치는 1cm 길이로 썰고, 베이컨은 5cm 너비로 썬다.
③ 냄비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베이컨을 넣어 볶다가 기름이 배어나오면 양파를 넣고 연한 갈색이 돌도록 중약 불에서 볶고 당근도 넣어 숨이 죽도록 볶는다.
④ ③에 감자를 넣고 다시마 국물을 부어 30분 정도 끓인다. 도중에 거품이 올라오면 걷어낸다.
⑤ ④에 우유를 넣고 한소끔 끓으면 굴을 넣는다. 굴이 익으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맞춘 다음 불에서 내리고 바게트를 먹기 좋게 뜯어 넣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をすべてなくせば、?理だけが?る -新しい世界で?き、福を積もう


?をすべてなくせば、?理だけが?る

韓?には、あきれた時に使う感嘆詞で「???(ホホチャム)」という言葉がある。

「???(ホホチャム)」とは、?の一切をなくせば?理が?るという意味である。 私たちは、?像の世界であるこの世の中に生きながら、何かを自分に付け足す勉?ばかりをしてきた。 見たり、聞いたり、話したり、?いを嗅いだり、そうして生きながらあらゆるものとこの世そのものを、握れるだけの心を握って生きてきた。 その結果が今の自分である。

足すことには際限がなく、足せば足すほど、?像である??が?えるばかりで、苦痛と荷物が?えるだけだ。 ?を無くし?ければ、最後には?理だけが?るであろう。 ?は?であるゆえに消し?ければ無くなるが、?理は?理であるゆえにどれほど消そうとしても?わらずにある。

最後の最後まで存在するものが?理である。

?の一切をなくし?くした者が?の人だ。

文と? ウ?ミョン

新しい世界で?き、を積もう

行けども行けども終わりがない 無意味な人生には良い??いがあるが まともなものはこの世の中には一つもないなあ 無?に忙しさを重ねるばかりで やっても?るものはなく、行っても行き着く所がない 音もなく流れる?月の中であがいては ?しい人生ばかりを切り?りしながら暮らしているが 人間が何かを成そうとするのは、?である自分を守り ?である自分の名?と安?を手にせんがためなのだ ただ己一人のために自分の夢の中の世界であがいてきたが 光の?に生まれたら目が開き、天地の理が分かるのだ 人生では手にできるものも持って行けるものも何一つないが ?理の?に福という?を蓄える者は本?の?に?まれることだろう 生きている時に人間がすべきこととは 光そのものである?理の?に生まれ、?理の世界で?き たくさんの福を蓄えることであり、そうする者が賢人なのだ ?月は?って過ぎ去り なすべきことをなせなかった者は重荷を背負って喘ぐだろう 多くの者がそうして生きるが それを知る者もこの世の中にいないから 人間の苦?から?け出るすべは 自分が死にきってこそ分かるだろう 自分を手放し、第三者になってみてこそ自分の立場から離れられるように 自分が死に、この世である宇宙の立場になってみれば この世を正しく見て正しく理解できる この世に生まれたのは生きるためであり ?理であるこの世に?を積むためなのだ

?しい人生に生きるのではなく 光ある?に生まれ出て みなで新しい世界に?き 豊かな新世界を作り上げよう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안경 하나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어요

취재, 사진 정하나

“아프리카에서는 석달치 월급을 모아야 안경 하나를 살 수 있대요. 제가 일년에 안경을 두세 번 바꿨었어요. 그런데 단지 안경이 없어서 공부도 일도 못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안경 하나도 너무 소중한 거예요.”

동두천외고 동아리 ‘안아주세요’는 ‘안경을 아프리카의 이웃들에게 주세요’의 준말이다. 말 그대로 아프리카에 보내주기 위해 헌 안경을 모은 것이다. 2기 대표인 2학년 문주영 학생은 “동아리 애들이 대부분 안경을 썼는데, 그래서인지 아프리카 아이들의 현실에 더 공감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안아주세요’에서 헌 안경을 모아, 안과의료 봉사 단체인 비전케어서비스에 보내면 그곳에서 수리를 하여 아프리카, 몽골, 스리랑카 등의 개발 도상국에 보내는 것이다. 지난여름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으로 에티오피아에 파견된 안과 전문의로부터 “안경은 아이들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는 협조 요청 메일을 받고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2008년 9월부터 최근까지 이 학생들이 보낸 안경의 개수는 무려 5,654개.

‘안아주세요’는 3학년 장경진 학생이 처음 만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캐나다인 영어 선생님이 들려준 ‘안경 기부’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안경을 갖다 줄 데가 없어서 안타깝다 하시면서 네가 이런 일을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전 세계 약 1억3천5백만 명이 단지 안경이 없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경진양이 주축이 되어 포스터를 만들어 학교 곳곳에 붙이고, 안경 수집함도 만들어놓았다. 3개월 뒤, 안경 백여 개가 모였다. 이게 될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예상 외로 놀라운 결과였다. 처음에는 단짝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진행하다가, 작년 말에는 아예 후배들을 선발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자기 동네에 수집함 설치하기, 거리 홍보하기, 사진 만화 만들기 같은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렇게 하면서 언론에 소개가 되었고, 점차 안경을 기부받는 일도 많아졌다.

이들이 제일 기쁠 때는 당연히 각지에서 모아진 안경이 학교로 배달되어 올 때다. 하나하나 일일이 포장해서 보내준 초등학생, 친지들에게까지 연락해 가득 모아서 보내주신 아저씨, 안경점을 닫게 되었다면서 많은 안경알을 보내주신 분까지 감동이 밀려온단다. 특히 함께 온 격려의 메시지들을 읽을 때면 뿌듯하면서도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에 따스한 사람들이 많구나 싶고요. 시험을 못 봤다거나,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해 있을 때 내가 왜 이런 걸로 속상해하고 있나 반성하게 돼요. 그리고 더 열심히 하자고 서로 격려하고 다짐하게 돼요.”

“예전엔 사고 자체가 부정적이고 혼란기였다”는 경진양은 처음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하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단 실천하다 보면, 무언가 이루어지는 희망의 이치도 알게 되었다 한다. 새해에 대학생이 되는 경진양은 ‘안아주세요 동아리’ 대학부도 만들어 그 희망을 더 널리 알려나가고 싶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아랫줄 왼쪽부터. 김은하, 명효신, 문주영, 최우리 학생. 뒷줄 왼쪽부터. 송효진, 박현경, 장경진, 이유정 학생.

점차 호응도 커져 부산국제외고, 이화외고  등 참여 학교가 10여 개로 늘어났다. www.projecthug.ba.ro


‘그 나무’에게서 내려놓음을 배웠습니다

‘그 나무’에게서 내려놓음을 배웠습니다

글, 사진 이기완 사진가

그 나무를 처음 만난 건 2004년 겨울이었습니다. 예당저수지 물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왕버들 나무. 나무는 30년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넓은 저수지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꼭 ‘나’ 같았습니다. 모두들 외지로 떠나고, 친구도 없이 외로워하던 내 모습….

힘들고 답답할 때 그 나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온전히 그 자리에 있는 나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칠게 쳐도 나무는 늘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고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다시 또 꽃이 피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무는 조금씩 커 나갔습니다.

2009년,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이었습니다. 눈이 안개처럼 세상을 가리고, 그 나무만이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사진을 찍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사진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수지에 20cm가량의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 하지만 나무는 주변에 동그란 작은 연못 하나를 만들어놓고 있었습니다. 한겨울 나무의 겉모습은 차가웠지만, 나무는 따스한 온기로 얼음을 녹이고 있었던 겁니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새들한테도 온전히 기다리고 품어주는 사람, 사람들의 언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외로움이 참 많았습니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외로움으로 표현된 거였습니다. 나무가 나를 위안해주는 만큼 외로움을 내려놓으면서 점차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내가 아닌 나 자체로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상대가 상처를 주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바로 나였습니다. 상처받기 싫어 너무나 가늘고 얄팍하고 치졸하게 살아온 나, 그런 마음이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건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내가 내 틀로 만들어놓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만든 틀에 안 맞으면, 충돌하고 아픔을 주고받기 마련이었습니다. 나만 그 틀을 내려놓으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 나무가 편안했던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도 주장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누군가에게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점차 내가 느낀 그 나무의 본질을 찍고 싶었습니다. 학벌이나 경제력 같은, 그 사람을 치장했던 배경을 빼버리면 그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이 나무도 온전하게 나무만으로 찍어보고 싶어 안개가 많이 끼는 겨울을 선택해 사진을 찍어나갔습니다.

점차 사람들을 볼 때도 조금 더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를 치장하는 것들을 버리고 버려도 남아 있는 그 본질에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최대한 나의 틀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대하면 그 사람 또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더욱 당당하고 자유로운 그 나무를 닮고 싶습니다.

이기완님은 198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며 작은 사진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4세 때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아, 예당저수지의 나무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10월에는 6년간의 작업을 담은 ‘나무를 전시하다’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나이를 내려놓고 나잇값을 하게 되다

나이를 내려놓고 나잇값을 하게 되다

김주완 44세. 개인사업 운영.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몇 학번이세요?”

사람을 만날 때면 이름 다음으로 묻는 게 바로 나이였다. 동창회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몇 기세요?” 선배일 경우 바로 존칭을 쓰고, 어린 사람은 하대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진지한 상담을 청해오던 후배들은 나와 대화를 하면 한풀 꺾이곤 했다. “나도 그런 거 경험해 봐서 아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며 아랫사람의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친구들이 술을 먹고 실수를 하면 “객기로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실수하면 “나잇값 못 하네” 하며 혀를 찼다.

나이는 내 삶의 기준이었다. 20대엔 결혼해서 20평 정도엔 살아야 하고, 30대엔 30평, 40대엔 40평 정도에는 살아야 하지 않나, 하며 그 목표에 도달하려 애썼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직함이자, 먹고사는 방법, 생활 수단까지 포함된 개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나 내가 정해놓은 기준이지만 그 나이에 맞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했다.

그러다가 아주 재미난 일을 경험했다. 내가 다니는 동호회에서 MT를 갔는데, 이름표를 살펴보니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나이 먹은 사람이 혼자 뻘쭘히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괜히 왔다는 생각에, 영 가시방석이었다. 야외에서 술 한잔 할 분위기인데, 점점 어두워지면서 서로 얼굴도 잘 안 보이던 상황, 순간 나는 과감히 내 이름표에 써 있던 나이 42를 24로 바꾸었다.

‘에라~ 모르겠다. 젊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데, 나잇값 못 한다고 할 거 아니야…. 그럴 바엔 이왕 온 거 나이를 한번 확 놓아보자.’ 나도 모르게 오늘 하루만은 나이를 놓고 지내보자는 용기가 생긴 거였다.

서로 골고루 얼굴도 익히고 친해지기 시작하자, 젊은 친구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근데, 넌 왜 이렇게 늙었니?” “왜 이렇게 삭았어?” 농담이되 농담만은 아닌, 걱정스런 인사말들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되어 갔다. 모처럼 젊은이들과 어울린 자리는 다양한 얘깃거리로 즐거움을 주었고, 그때 느낀 자유와 해방감이란~!

당시의 경험은 나에게 나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얼마나 나이란 틀에 갇혀 살고 있었던가. 그로 인해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그 후론, 의식적으로 나이를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을 만나면 나이보단 안부부터 물었고, 나잇값 하느라 무게만 잡던 나를 내려놓고 후배들에게 농담도 걸고, 직원들에게 커피도 돌렸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대화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사무실 분위기도 좋아졌고, 훨씬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가장 큰 변화라면 사람을 만나는 폭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이다. 스무 살 젊은이와도 나보다 한참 많은 어르신과도 금세 친구가 되고 말이 통하는 기분이란 정말 근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동안 왜 그렇게 나이, 나이, 하며 살았는지 픽 하고 웃음이 나온다.

결국 나이를 정말 잘 먹는다는 건 자기의 틀을 잘 없애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온 날만큼 쌓이는 관념과 관습, 그 딱딱하게 굳어진 성벽을 허물 줄 알 때, 정말 상대를 배려하고 잘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나잇값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직위도, 권위도 내려놓으신 우리 부사장님

직위도, 권위도 내려놓으신 우리 부사장님을 소개합니다

류희전 40세. 회사원.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

IMF 당시, 회사가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다른 회사에 인수 합병되었다. 그리고 2004년, 아직은 어수선한 가운데 새로 부사장님이 부임해 오셨다. 금융 계통에서만 근무했었다는 부사장님은 인쇄 쪽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직원들은 겉으로는 예, 예, 했지만 은근히 무시하고 경계했다.

그럼에도 당시 부사장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인상 깊었다. 전혀 동요하지 않고, 직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대화를 나누셨다. 한 번도 부사장님 방으로 오라 가라 부른 적이 없었다. 무엇이 어려운지, 고충은 무엇인지를 늘 물었고 인쇄 분야도 열심히 공부하셨다. 바쁘다 싶으면 직접 기계 앞에 서서 일을 도우셨다.

한번은 회사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부사장님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힘든 것도,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물론 그것도 좋겠지만, 좀 더 노력해서 우리 회사를 안정된 직장으로 만드는 것도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매사 솔선수범하시는 우리 부사장님. 그렇게 직원들 마음을 다독여주시는 사이 어느덧 회사도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부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직원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신다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을 것처럼 편안하고, 권위주의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부사장님을 보면서, 언제 어디에서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융화된다는 건 저런 거구나 싶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부사장님께서 하셨다는 마음수련에 자꾸만 관심이 간다.

사진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다

홍성훈 34세. 사진작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나는 대학에선 순수미술을 공부했다. 학과 과목 중 하나였던 사진 수업을 듣게 되었고, 유명한 사진가들의 사진을 보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과 사진이 가진 힘에 매료되었다. 원래 그림을 공부한 덕인지 나는 기존의 사진과는 다른 나만의 느낌을 낼 수 있었고, 친구들과 교수님들의 칭찬에 자신감이 나날이 커졌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점점 더 ‘나는 남과 달라야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사진을 담아내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세상과의 소통이라 생각했던  사진 작업은 오히려 세상과 단절에 이르게 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채, 집념을 넘어 집착에 이른 사진에 대한 욕심, 그렇게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나에게 다가올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가족도 친구도 멀어져만 갔다.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상황을 직시했다. 그림이다, 사진이다, 창작이다, 하며 쌓아올린 그 세계가 오히려 나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있고, 나를 가둬놓은 무덤임을 알게 되었다. 그 무덤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내가 사진을 통해 가지려 했고,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나는 그 방법으로 마음수련을 택했다.

카메라도 놓고 스튜디오도 놓고, 그렇게 일년을 마음공부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너무도 나만의 멋진 이미지라는 것에 속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마음들을 버린 만큼 나의 시각과 의식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카메라를 놓고 다시 마주한 세상은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을 참으로 많이 알려주었다. 이 세상 무엇 하나 아름답고 귀하지 않는 게 없었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생각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즐거웠다.

나는 다시 사진을 찍고 있다. 세상에 찍을 것들은 넘쳐났고, 촬영 순간 또한 그지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다시 카메라를 잡은 지금, 욕심 없이 세상을 담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찰칵~!


실내식물의 겨울나기는 이렇게

온도계 준비 하루 중 제일 추울 때는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

이때의 온도를 체크한다.

식물이 월동 가능한 최저 온도 실내 화초의 최저 월동 온도는 평균 5℃쯤.

골드크레스트, 아이비, 제라늄, 철쭉, 관음죽, 셰플레라, 시클라멘 등은 0~5℃, 다른 식물들은 10℃ 안팎으로 맞추면 된다.

물 주기와 환기 수돗물을 바로 주면 물이 너무 차서 약한 뿌리는 녹아버릴 수 있다.

따라서 꼭 실온과 비슷하게 하거나 미지근한 물을 섞어 준다. 너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은 피하는 게 좋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찬 바람에 직접 노출되는 것. 줄기와 잎이 얼어버릴 수 있다.

찬 바람 막아내기 창문과 창틀 사이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막는 게 중요하다.

문틈에 잘 붙었다 떨어지는 마스킹테이프를 붙여도 좋다. 또 커다란 비닐을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화분 위에 덮어두면 좋은데, 이때엔 식물의 몸이 비닐로 다 덮여야 한다. 신문지도 보온 효과가 있다.

알아두세요! 같은 베란다라도 바깥 창문 쪽보다

안쪽(거실 쪽) 창문 가까이에 놓아두는 게 좋다. 크게는 3℃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 들여놓은 화분은 해가 잘 비추는 곳에 두어야 한다. 햇빛이 부족한 실내에 두더라도 최대한 밝은 위치에 둔다. 겨울 채비에 앞서 누런 잎이나 너무 많이 자란 줄기는 잘라 다듬어주는 게 좋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시상식 많은 연말연시, 이런 잔치를 보고 싶다

연말이면 이런저런 시상식들이 많이 열립니다.
화려하게 잘 차려입은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잔치를 열지요.
그들의 연기에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해왔던 시청자들 역시 과연 누가 무슨 상을 탈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봅니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기분좋고 보기 좋은,
공정하고 훈훈한 시상식이 되었으면 하면서 말입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연예계의 시상식을 보며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작품과 연기력보다는 흥행작과 인기 스타 위주로 꾸려질 때입니다. 대중문화의 본질상 상업주의와 무관할 수는 없겠으나, 진정한 예술에 목마르고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열렸던 제47회 대종상 시상식은 무엇보다 감동적이었습니다. 흥행에 관계없이 정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좋은 작품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3개 영화제(대종상, 청룡영화상, 대한민국영화대상) 중에서 원로 배우들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 시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올해 85세의 전설적 여배우 최은희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여 공로상을 수상했고, 83세의 신영균이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은퇴하여 작품 활동은 쉬고 있으나, 대종상을 통해 그 건재함을 알림으로써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평생 여배우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해 왔다”는 최은희의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격동의 세월 속에 납북과 탈북이라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영화인으로서 자존심을 유지해 온 그녀의 삶이, 그 말 속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직 살아 있네요. 세월이 가도 어떡합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모든 분의 가슴속에 살아남겠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김희라는 병색이 완연한 외모와 몸짓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열정적인 수상 소감으로 그 울적함을 모두 날려주었습니다.

“어릴 때는 제가 잘해서 상 받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감독님이 나를 잘 만들어줘서 받는 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겸손한 수상 소감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몇 년 후에도 좋은 작품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있게끔 한국 영화에 많은 용기와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윤정희 역시 영화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1944년생으로 이제 겨우(?) 67세에 불과한 그녀이니 결코 헛된 소망은 아니겠지요. 다만 한국 영화가 대중에게서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 보일 뿐이었습니다.

짤막한 수상 소감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평소엔 쑥스러워서 잘 못했던 고맙다는 말도 하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도 하지요.

네 번이나 연예대상을 받은 강호동은 수상할 때마다 자신을 연예계로 데뷔시켜 준 이경규를 번쩍 안아들며 감사를 표하고, 이혼 후 재기에 성공한 고현정은 ‘선덕여왕’으로 MBC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아이들도 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열심히 일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은 연기자 고현정 이전에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엄마로서의 슬픔과 아픔이 느껴져 뭉클했다고 하지요.

2009년 SBS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탔던 반효정의 수상 소감도 아주 감동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시가 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남긴 그대의 발자국이 뒤를 따라오는 이에게는 이정표가 되리라.’ 너무 과한 상을 받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남은 배우 인생, 깨끗한 눈길 함부로 걷지 않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연기자로서의 진지함과 연륜, 삶의 깊이가 묻어나는 소감에 후배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연예인으로 평생을 바친 노장 선배와 불철주야 그 뒤를 따르는 후배들, 그리고 자신의 꿈을 먼저 이뤄낸 하늘 같은 선배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신인들이 함께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시청자로서도 참 좋습니다.

그들을 통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청년기와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황혼기를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압니다. 배우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노년에 불태우는 열정 또한 젊음의 풋풋함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의 삶 자체로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계속 그렇게 그들과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만의 잔치를 넘어서는, 그런 시상식이기를 바랍니다.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 영화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겨울새의 희망, 빨간 마가목 열매처럼

새벽 놀처럼 맑은 빛으로 털을 단장한 겨울새입니다. 마가목 나무에 앉아 아침 햇살에 빛나는 빨간 열매를 쪼아댑니다. 꼭꼭 삼키면 목이 쉬지 않는다는 보약 같은 식량. 그래서 눈 덮인 겨울날의 새소리가 그토록 고운가 봅니다. 소설 ‘닥터 지바고’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새들과 나무 사이에는 어떤 친밀한 생명의 연줄이 있는 것 같았다. 마가목 나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듯 오랫동안 새들의 무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갓난아기에게 젖꼭지를 물리듯이 새들에게 열매를 먹여주고 있었다. 그래, 그래, 할 수 없지. 먹으렴, 실컷 먹으렴. 마가목 나무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

겨울새의 희망, 빨간 마가목 열매처럼

글, 사진 김선규

눈 속에서 만난 맑은 눈

세상이 온통 하얗다. 공원 길에서 마주친 눈이 맑은 사슴 두 마리.

잠시 꿈이라도 꾸는 듯, 가슴속에 묻어둔 시인의 사슴을 떠올린다.

도심 한복판에서 만난 사슴의 두 눈에는 깊은 숲이 들어 있다.

서울숲에서. 2010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