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를 둔 결혼 8년 차 엄마다. 하루하루가 아이들의 소소한 다툼으로 시끄럽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싸우기라도 하면 남편은 항상 울고 있는 작은아이 편을 들고, 큰아이는 서럽게 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에게서 예전의 내 모습이 비춰질 때마다, 혹시 나처럼 상처가 남을까 봐 늘 불안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부이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는 편이라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곤 하셨다. 8남매를 키우느라 돈 때문에도 자주 싸우셨다. 내가 괜히 태어나서 더 힘들게 해드리는가 싶어, 눈치 보며 꾹꾹 참으며 살았다.
부모님께 학용품 사달라는 얘기를 제대로 못 하고 등록금이 나와도 말을 못 해 맨 나중에 내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 상사들의 눈치를 많이 보다 보니 오래 일하기가 힘들었다.
결혼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참고 눈치 봤던 마음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육아에서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돈 쓸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어린 시절 불우하고 어두웠던 가정 환경이 떠올랐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아이들이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면,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감정이 격해지면 아이를 때렸다. 그리고 나서 잠든 아이를 보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아이가 놀다가 실수해서 값비싼 물건이라도 깨면 놀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기보다 소리부터 질렀다. 머리론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부분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되물림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막막했고 희망이라곤 없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마음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기에 더 끔찍했다.
그래서, 마음수련을 결심했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물질적으로 장난감 하나를 더 사주는 것보다 상처 주지 않고, 그늘 없는 밝은 마음을 물려주고 싶었다. 과거가 지금 현재의 모습이고, 현재가 미래라고 생각하니, 나부터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마음속의 짐들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다. 설움과 한숨이 눈물과 함께 빠져나갔다.
열등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상처들이 하나하나 걷어져 나갔다. 열등감과 불안함, 자책이 사라진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엄마가 다시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고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다. 얼마나 아이들다운가. 나는 더 이상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웃으며 투정을 받아주고 보듬어준다. 어깨를 짓누르던,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도 사라졌다. 아이들을 세상에 내려놓을 줄도 알고 마음 놓고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친구들과 만나며 배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짐이 아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함께 성장해가는 고마운 존재, 세상의 일부분이었다.
내가 밝아지니, 아이들의 표정도 더 밝아졌다. 아이들이 봄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인다. 딸아이는 특히 나를 닮아 예민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는데, 지금은 엄마처럼 많이 밝아지고 두리뭉실 놀기도 잘한다.
“예쁜 우리 아이들 대현이 민서야, 미안한 게 많은 부족한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맙다. 엄마가 더 많이 노력할게.”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여니 봄 햇살이 맘껏 쏟아져 들어온다. 내 마음에도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은 가고 꽃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새봄이 찾아왔다. 나에게도 희망이 보인다.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과 무표정한 얼굴…. 어느 때부터인가 거울을 마주하는 게 싫었습니다. 무뚝뚝해지고 강퍅해지는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억센 아줌마일 뿐이었습니다.
20년 전, 결혼했습니다. 독신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접게 한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시작한 결혼 생활. 자유를 포기한 만큼 가정을 일구며 더 큰 걸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내 삶은 온데간데없어진 것 같았고, 직장 일로 바쁜 남편을 볼 때면 ‘나를 잊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을 아빠한테 맡긴 채 떠난 하루 동안의 기차 여행.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발 디딘 곳만 달라졌을 뿐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니까요. 돌아가면서도 마음은 집안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욱 우울해졌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근심은 더해졌습니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생활비 없이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주는 게 미안했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까 불안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칠 때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러냐”며 아이들을 닦달했습니다. 큰아이가 “엄마, 왜 그래~” 하며 울부짖었고, 나는 멈칫했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것도 순간뿐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마치 내 마음은 촘촘한 체가 되어버린 듯 남편이나 아이들의 모습, 말 한마디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행복해” 하던 아이의 상처 어린 말들,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해서 또다시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집안은 총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교육원으로 떠났습니다. 평소에는 생각해볼 수도 없는 한 달간의 긴 여행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뭔가 해결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절박한 만큼 집중해서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한 공간에 있어도, 한순간도 같이 산 적이 없었더군요. 나는 과거에 살고, 남편은 미래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각자의 기나긴 평행선을 향해 달려갈 뿐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연애 시절 남편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달라진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반면, 남편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지나고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교차점은 없었습니다. 남편만 보면 원망스럽고 불안하고, 남편 역시 믿어주지 않는 아내를 답답해했습니다.
내게 가족은 나의 바람과 기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참으로 가족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고, 그 순간 소외된 엄마, 소외된 주부, 소외된 아내라는 우울한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내 한과 내 욕심과 내 집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꽁꽁 묶어놨던 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자, 비로소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커준 아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거센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내 마음도 점차 잔잔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도 함께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는 이제야 같이 사는 기분입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당신 덕분에 마음공부도 하고 이렇게 한마음으로 살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참 고마웠습니다. 아이가 무릎 위에 누워 살갑게 얼굴을 비비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비운 만큼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거울을 봅니다. 40대 중반의 한 아줌마가 활짝 웃습니다. 세월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는 주름도 예쁘게만 보입니다. 부족하다고 슬프지도, 넘친다고 자랑할 것도 없이 주어진 조건과 세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나는 행복한 엄마, 아내입니다.
② 청경채는 3~4cm 길이로 썰고 당근도 같은 길이의 골패 모양으로 썬다. 맛타리버섯은 가닥가닥 손으로 뜯는다. 홍고추는 얇게 어슷 썰고, 바지락은 씻어서 체에 밭친다.
③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과 홍고추, 당근을 넣어 볶다가 당근에 기름이 돌면 청경채와 맛타리버섯, 바지락을 넣어 같이 볶는다.
④ ③에 간장과 청주를 넣어주고 물을 1/4컵 정도 부어주어 촉촉하게 한 다음 메밀국수를 넣어 한데 어우러지도록 볶고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녹음이 시작되는 봄의 한가운데, 개나리가 지고 난 후 더 찬란하게 샛노란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양골담초(유통명 : 애니시다)입니다. 선명한 노란색에 잘 어울리는 시원하고 상큼한 향기~ 진정 봄이 왔구나, 와락 달려드는 봄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어요. 시원하게 뻗은 꽃줄기, 인심 좋게 피어나는 풍성한 꽃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뒤숭숭하고 우울한 기분도 말끔히 날아가 버립니다. 실내에서 키워도 예쁘지만 마당 있는 집에 울타리로 심어도 좋아요. 꽃이 지면 가지치기를 해주세요. 금세 잎이 자라나서 귀여운 관상용 화분이 된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햇빛 직사광선 또는 그에 가까운 밝은 햇빛을 좋아해요. 꽃이 피지 않는다면 햇빛이 모자란다는 증거.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꽃이 지고 나면 조금 건조하게 관리하세요.
1926년생, 올해 나이 86세가 된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의 모습을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구봉서는 후배들의 부축을 받긴 했어도 운신에 큰 어려움이 없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가 등장하자 코미디언 후배도 아닌데 저 역시 왠지 모를 고마움이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글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BC
지난 2월 3일 ‘추억이 빛나는 밤에’의 게스트는 이홍렬과 이성미였습니다. 구봉서는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방문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홍렬은 구봉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설마… 설마 어떻게 오셨겠어?”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선배의 몸을 부축해서 걸어 나오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홍렬은 일본 체류 중에 구봉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주실 거라고는 기대도 못 했었답니다.그런데 구봉서는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정성 들인 글씨로 편지지 5장을 꽉 채워서 보내주었습니다.그 편지는 이홍렬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고, 지금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다 합니다.그 편지의 내용 일부를 소개해 봅니다.
‘그러잖아도 어떻게 연락해야 되나 걱정하던 차에, 자네 편지를 받아보고 자네 얼굴을 보듯이 반가웠네. 자네의 처지와 심경을 나는 훤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네. 어쨌든 그 역경을 헤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니, 반갑고 기쁘고 고맙기도 하네.(모두 눈물이 글썽) 우리 희노회(아마도 희극인들의 모임인 듯)는 약속한 대로 매주 화요일에 꼭 모이고 있네. 박미선이는 한 번 나오더니 영 안 나오고(모두 울다가 웃음), 한무는 영 그 후로 한 번도 안 나오고(또 웃음) 나머지 식구들은 열심히 하고 있네…(중략)… 한국에 있는 코미디언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킨다는데, 자네가 귀국한다면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 이제 할 말의 오분의 일도 안 됐는데, 벌써 어깨가 결리고 여기저기 쑤시니 그만 쓸까 보네. 자네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하라고 하게. 주소가 바뀌면 바로 연락해줘.- 1991년 6월 15일 아침, 구봉서’
시원하게 터뜨리는 웃음 한 방이 얼마나 건강에 유익한지 많은 연구 결과로도 증명되었지요. 정말 좋은 코미디언은 타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네가 귀국한다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이와 같은 편지를 대선배가 보내주셨으니, 이홍렬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그날 게스트와 MC 후배들은 대선배 앞에 세배를 드렸고 구봉서의 덕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네들도 오래오래 코미디 하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하는 일에 긍지를 가져야 해요. 별 볼일 없는 선배라도, 자주 연락하고 끈끈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구봉서가 현역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풍채 좋고 표정도 유들유들하니 천생 희극인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의 유쾌한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욱 좋군요. 왠지 그 앞에 있으면 추운 날 아랫목에 발을 담근 듯 마음이 따스해지고, 인생의 모든 고통이 별것 아닌 듯 느껴지는…. 지금의 구봉서는 그렇게 신선 같은 풍채를 지녔습니다. 이러한 대선배가 생존해 계신다는 것은, 코미디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마을 들녘에서 할머니 두 분이 봄을 캐고 계십니다. 이렇게 두 분이 봄을 함께 맞은 지가 50년이 넘었습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안다는 두 할머니는 어딜 가든 이렇게 꼭 붙어 다닙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참 서러운 것도 많았던 시절, 문만 열면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속마음 내비칠 수 있는 유일한 말벗이 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남편을 여읜 지 10여 년, 그 후로 더욱 친자매처럼 지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주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반평생을 함께했습니다.
대전 동구 찬샘마을. 2009년 3월
사진, 글 김선규
불현듯 찾아온 봄이여, 천천히 가시게
충북 단양에서 오지로 손꼽히는 가곡면 보발리 성금마을. 밭이 산비탈에 있다 보니 기계를 사용할 수 없어서 여전히 소 쟁기질을 합니다. 7가구 주민들은 내 집 일, 네 집 일 구분 없이 서로 일손을 돕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하루 일을 접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갑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소나 주인이나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사월 한식 날 엄마하고 아버지 산소 벌초하는데 당신 허리처럼 굽은 호미로 잡초 매시던 우리 엄마 산소 언저리에 홀로 핀 노오란 풀꽃 언뜻 보시더니 그만 눈을 뺏겨 호미 끝으로 마른 흙 톡톡 파시기에 그 꽃 옮겨 가면 집 근처도 못 가 말라 죽을 거라고 낫으로 잡풀 베어 넘기던 내가 쓴소리 건넸더니 우리 엄마 깜짝 놀라 물러앉아 두 손으로 흙을 퍼서 풀꽃 주위 도톰하게 채워놓고 토닥토닥 다져주시더라 애비야 꽃 안 다치게 조심해서 하거라 말씀하시더라 벌초를 다 마치고 아버지께 잔 올리고 재배 드리고 나뭇등걸마냥 거친 엄마 손 잡고 산비탈을 내려오니 배꽃보다 더 하얗고 붓꽃보다 더 곱던 엄마 생각에 퇴주잔 끝에 불콰해진 나는 그냥 울고 싶더라
꽃2
어머니가 서울 친척 집에 꼭 다녀오실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시골집을 비우게 되었다. 모처럼 새 단장을 하신 어머니가 오래된 손가방에 돋보기와 성경책과 안약을 챙겨 넣고 나갈 채비를 하셨다. 하지만 당신은 선뜻 나서지 않고 거실 한 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분 앞에 앉으셨다. “할매 댕기올 때까지 잘 크고 있거라. 얼릉 댕기 와서 할매가 많이 많이 쳐다봐주께.”
눈이 깊은 사람은 꽃을 눈길로 가꾸는가 보다. 작은 화분의 앙증맞은 꽃들이 꼬마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어머니 시선은 가늘고 푸른 줄기에서 싱싱한 잎새 사이로,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나비처럼 분주하게 옮겨 다녔다.
이십여 년 전, 화단 앞에서 어머니가 하신 혼잣말을 나는 기억한다. “아무리 귀하고 예쁜 제 자식도 어떤 때는 미울 때가 있는디, 꽃은 왜 이리 볼 적마다 예쁘다냐.”
며칠 후, 어머니가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지금쯤 화분 밑에 감추어 둔 열쇠를 꺼내 집에 들어오고, 오래된 가방에서 돋보기와 성경책과 안약을 꺼내 제자리에 놓을 때다 싶어서 전화를 했다. “내 집에 옹께 너무 좋다. 세상에 어디가 편허것냐. 내 걱정 말아라.”
그래놓고는 한껏 들떠 꽃들의 안부를 전해 주었다. 그 목소리가 은초롱처럼 맑았다. “아 글쎄, 저번 장날 사놓은 쪼깐한 화분이, 나가 없는 사이 손톱만 한 꽃을 피웠더라 말이시. 그래 갖고 이짝 저짝에서 할매 나 좀 보소. 할매 나부텀 먼저 봐주소. 함시로 서로 저 쳐다봐달라고 난리더라.”
동쪽 하천 따라 긴 방죽 끝자락 외딴집, 다시 당신의 일상으로 돌아온 내 어머니는, 오늘도 개미처럼 꼬물꼬물 텃밭 일을 마치고 이제 단잠에 드셨겠다. 세상에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눈길 고운 할머니를 위해 꽃망울 펑펑 터뜨리는 꿈을 꾸시겠다.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2010년 4월 KBS스페셜로 방영된 후 9월에 영화로도 개봉한 <울지 마 톤즈>의 첫 장면에 나오는 글이다.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 20년이 넘는 내전으로 오랜 굶주림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곳, 그곳의 유일한 의사로 주민들과 함께 희망을 일구었던 고 이태석(1962~2010)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내가 이태석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케냐 나이로비 UNEP(유엔환경계획)에 파견 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신부님은 내 인생에도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주었다. 나에게도 꽃이 되어준 사람, 이태석 신부를 기리며….
글 이재현 환경부 정책관,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 사진 제공_KBS
“톤즈에 한번 와보세요.”
2003년 1월, 이태석 신부는 우리 가족에게 톤즈에 와볼 것을 제안했다. 작년에 이은 두 번째 권유였다. 당시 나는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간곡한 권유에 약속했지만 막상 가려니 막막했다. 아프리카 최고의 오지인 데다 전쟁 중인 톤즈. 폭탄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이상한 병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왔고, 주변 사람들도 적극 만류했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를 두고도 고민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하서방님(하느님) 빽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출발하세요.”
그의 말대로 오로지 하느님 빽만 믿기로 하고 2003년 3월 4일 톤즈로 향했다. 다음 날, 톤즈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섭씨 55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 톤즈강의 오염된 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려 있었다.
그날부터 신부님과 그곳의 참모습을 만나기 시작했다. 허름한 신부님의 진료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보통 2~3백 명의 환자가 오는데 그를 만나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며칠씩 걸어서 오는 이들도 많았다.
“나을 수 있지만 그저 팔자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다”는 신부님은 진심으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주는 의사였다.
매주 한 번씩은 병원에 오기 힘든 사람들을 찾아 여든 개가 넘는 유목민 마을을 직접 방문을 했다. 특히 이신부가 심혈을 기울인 곳은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이었다.
병으로 인해 손가락 발가락이 잘려나가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의 사람들, 차마 똑바로 보기조차 미안했지만 그들에게서는 너무나 따스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신부가 오고 나서 환자들도 많이 감소되었다며, 그들은 진심으로 신부님께 감사하고 있었고, 신부님 또한 “가진 건 없어도 감사할 줄 알고 기쁘게 사는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부끄러웠다. 하나를 가진 톤즈 사람들의 기쁨은 그 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아홉을 가진 나의 고통은 그 하나가 없다며 불평할 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님께서 왜 그렇게 톤즈로 오라고 하셨는지, 그 뜻도 조금씩 헤아려졌다.
이태석 신부는 알면 알수록 바보 같은 분이었다. 워낙 능력이 많아 한국에서 의사가 되었다면, 쉽게 부와 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사제가 된 후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선택했다.
“부족하지만 나의 모든 것도 하느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야지요. 저는 이곳에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살러 온 사람이에요.”
신부님은 진심으로 이들과 함께할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벽돌 한 장 없던 이곳에 톤즈강에서 모래를 퍼와 벽돌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병원을 만들고, 학교를 지었다. 20년 넘게 내전을 치르며, 상처받을 대로 받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드럼, 트럼펫, 기타…. 음악으로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어 하셨다.
“쫄리, 쫄리, 쫄리!” 어느 곳을 가더라도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외쳤다. Fr(Father) John Lee. 이신부의 영어 이름 ‘존 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쫄리가 된 것이다. 가진 자로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민과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던 이신부는 이 지역의 희망이었다.
나에게도 삶의 가치를 가르쳐준 이태석 신부님, 그분의 모습 중 가장 닮고 싶은 것은 ‘부드러움’이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신부님은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항시 유머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딱 부러지지도 않았고, 어찌 보면 하는 둥 마는 둥 보이는데도 누구보다 많은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자신이 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2008년 10월, 한국을 방문했던 신부님에게 말기 암 선고가 내려졌을 때,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신부님은 항암 치료를 받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톤즈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톤즈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라는 책을 출간했고, 2009년 12월에는 두 명의 톤즈 아이들 한국 유학을 도운 것이다.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든 다시 톤즈로 돌아가려 했던 신부님, 하지만 2010년 1월 14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선종하셨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하지만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수단 아이들의 교육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해서 후원을 해나갔다. 다행히 2010년 4월, <울지 마 톤즈>가 다큐로 또 영화로 만들어지며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인터넷 카페 회원이 19,000명까지 늘었고, 후원자도 봉사자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어떻게든 공부해서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며 한국으로 유학 온 톤즈의 아이도 더 생겼다.
우리는 신부님을 통해 저 먼 톤즈와 연결되었고, 또 그렇게 감동받은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맺었던 그 따뜻한 ‘끈’은 계속해서 이어져 널리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로 퍼져나갈 것이다.
“톤즈 하면 생각나는 두 가지 빛이 있어요. 하나는 무수한 밤하늘의 별이고, 또 하나는 유난히도 빛나 보이는 아이들의 큰 눈동자이지요.”
톤즈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맑은 미소를 띠던 이태석 신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착하고 정 많은 톤즈의 아이들은 신부님의 바람대로 톤즈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수단어린이장학회 http://cafe.daum.net/WithLeeTaeSuk
이태석 신부의 한센인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다. 아무리 치료를 해도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상처가 번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환자들의 발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그려 맞춤 신발을 만들어주었다.
이재현씨는 톤즈를 방문한 후 톤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사진은 2008년 11월 서울 상도동에서 열린 ‘수단 어린이를 돕기 위한 음악회’에서의 이태석 신부(왼쪽)와 이재현씨(오른쪽). 2005년 1월, 북수단과 남수단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에 처음으로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의 등장은 남부 수단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단숨에 유명 인사가 됐다.
매년 봄철이면 우리나라에 불어닥치는 황사의 진원지라 알려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쿠부치 사막. 그 광대한 사막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가느다란 녹색 띠가 보인다. 사막 동쪽 끝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5km에 달하는 녹색 만리장성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던 이곳에 나무를 심은 이가 있다. 1998년 당시 주중대사였던 권병현씨.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 만류했지만 그의 진정 어린 노력과 열정은 몇 년 후 푸른 녹색장성을 만들어냈다. 이제 다시 사막 이전의 푸른 초원이 펼쳐진 마을로 복원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권병현(74) ‘미래숲’ 대표, 그에게서는 녹색의 짙푸른 젊음과 활력이 넘쳐났다.
글 최창원 사진 홍성훈
‘한국 노인의 녹색 열정이 사막의 확장을 막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29일, 중국 인민일보는 ‘쿠부치 사막 식수 프로젝트 초보적 성공’이라는 기사를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사막에 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녹색장성을 만들기까지의 전 주중대사 권병현씨의 노력과 그 결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쿠부치 사막은 중국 서북부에 동서로 넓게 펼쳐 있는 거대한 사막.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초원이 남아 있었지만 급격한 사막화로 모두 자취를 감추고, 계속 동진하며 사막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권병현씨는 “이 사막의 최 동쪽에 나무를 심어 사막의 확장을 막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가능할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묵묵히 나무를 심어나가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시작된 나무 심기는 2010년 그 첫 결실을 맺었다. 최 동쪽 400만 그루의 나무로 구성된 길이 15km, 폭 0.5km의 방풍림이 조성된 것이다.
보통 사막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다 비웃었어요. 그 당시까지는 사막에 나무를 심어도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이었거든요. 사실 저도 겁이 났죠.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막을 막을 수 없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사막이 베이징 쪽으로 오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한국은 시도 때도 없이 황사에 시달릴 거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문제를 인식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사막이라는 건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산만 한 사구가 엄청나게 센 바람으로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사막이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나무를 심어놓으면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더 많은 나무를 심고 또 심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모래 바람이 방향을 틀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놀라웠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는 ‘황색룡을 길들이다(Taming the Yellow Dragon~)’라는 제목으로 취재하기도 했어요.
사막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때 느낌이 남다르시겠어요.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참 신기하죠. 몰아치는 모래 바람과 그 찌는 열기, 밤이면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은 거잖아요. 마치 나무가 말을 하는 것 같아요. ‘나 살아남았어요, 정말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내 주변을 이렇게 살렸어요'(웃음). 나무가 자라면서 죽었던 땅도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 등이 썩으면서 미생물이 생기고, 미생물을 먹고 사는 지렁이가 생기고, 그걸 먹는 새들이 오고. 옛날에는 거기도 초원이었고 마을이었잖아요. 잘못된 인간의 활동들로 사막이 만들어졌는데, 자연은 무한한 힘으로 스스로 회복하더라고요.
사막이 되려는 곳에 나무를 심어 가꾼 경우는 있지만,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곳에 나무를 심은 경우는 최초라고 들었습니다. 가장 큰 성공의 원인을 꼽는다면요.
사막 옆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도 처음에는 굉장히 냉담했어요. 사실 중국의 사막화로 빼앗긴 마을만 2만 5천 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원망뿐이었죠. 어쩔 도리 없이 살고 있는데, 생활이 참 어려워요. 강풍으로 모래들이 집안 가득 스며들고, 심할 땐 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무들이 자라면서 모래 바람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아, 나도 어릴 때 태어났던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 거죠. 나중에는 주민들이 밤낮으로 물을 주고 나무를 가꿨어요. 결국 그 주민들이 있었기에 성공을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제가 가면 웃으면서 안아줘요.(웃음) 서로 희망의 눈빛을 교환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보람인지 몰라요. 이제 사막 식수 사업은 최고의 ‘한중우호’ 상징 사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처음, 사막에 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가지게 되셨나요.
1998년 봄에 주중대사로 부임을 할 때였어요. 북경공항에 도착한 순간 처음으로 나를 맞아준 것은 지독한 황사였습니다.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고 뒤에는 사막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맨 뒤, 잿빛 문명을 본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서울에도 황사가 심하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때 뭔가 깨달음 비슷한 게 왔습니다. 아, 뭔가 굉장히 잘못돼가고 있구나 하는.
바로 대사관 직원을 시켜 조사를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전 세계적으로 이미 엄청난 사막화가 진행 중이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1997년 통계에 따르면 벌써 지구의 3분의 1이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림 벌채, 과도한 경작 및 방목, 온실가스 등 인간의 활동 때문이었다. 특히 20세기 들어 가장 심각한 사막화 지역 중 하나가 중국이었다. 중국은 해마다 서울의 4배가 넘는 지역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막화는 매년 우리나라에 황사 피해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심각한 현실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 결심한 순간부터 그의 삶은 이전과는 정반대의 삶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8월 퇴임 후, 전 외교관으로서의 보장된 편안한 노후를 뒤로한 채 그는 2001년 ‘미래숲’이라는 비정부기구(NGO)를 만들었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기업과 정부를 대상으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수도 없이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외교관이었다는 명예와 자존심도 내려놓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몸이 약한 사람은 사막에 한 번 갔다 오면 쓰러질 만큼 사막의 환경은 열악했지만, 칠십 노구에도 한 번도 쓰러져본 적이 없었다. “망가지는 땅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 염원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점차 함께하는 기업과 전문가, 후원자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에 비해 심각성이 덜 알려진 사막화에 대해 세계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래숲’은 2008년 국내 최초로 유엔환경계획(UNEP)의 환경 NGO로 등록되었고, 권대표는 2010년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에서 ‘사막화 방지에 공헌한 세계 15대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교관으로서 많은 걸 누렸던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는데요.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국익을 위해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지구가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국경, 국익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아보게 된 거예요.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인데, 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신납니다. 지나보면 힘든 순간도 많았습니다. 기존의 권위와 가치를 버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이걸 시작하고 난 뒤에 제 목뼈가 없어졌어요, 하도 구걸하고 다녀서.(웃음) 사람들이 필요성을 알도록 하는 데는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하잖아요. 사실 그동안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걸 누렸는데, 지금은 그걸 되갚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나요.
혹시 태어나서 지구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더 이상 빚을 지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넓은 우주 속에 아름다운 별, 유일하게 인간의 거주지인 지구가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어요. 지구는 정말 우리한테 좋은 어머니고 아무 대가 없이 무한정 주기만 했죠. 망가져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용서하고 포용하며 다 주려고 하고 있어요. 너무 늦기 전에 어떻게든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미래숲’에서 하고자 하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저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미안합니다. 나와 내 세대의, 내 전 세대의 욕심으로 인해 망쳐진 지구를 물려줬잖아요.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신나게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저는 뒤늦게 제 길을 찾았지만, 청년들은 지금부터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마음을 쏟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2002년부터 매년 봄이면 한국의 대학생들이, 중국의 대학생들과 같이 나무를 심어왔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기 위해 한마음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아이들도 한번 나무를 심고 나면, 가장 큰 마음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앞으로 이 사막에 전 세계의 청년들이 나무를 심으며 우정을 나누고, 우리가 만들어갈 평화로운 세상에 대해서 토의, 연구하는 녹색기지가 만들어질 겁니다. 이제는 뒤에서 조용히 청년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2009년부터는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사막에 내 나무 심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첫 나무를 기증받았고, 앞으로 많은 이들이 사막에 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자연이 우리를 아끼듯이 자연한테 돌려주고, 자연과 한마음이 돼서 같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거지요.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이 엄청난 일을 하게 만든 거잖아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바라고 진정으로 노력하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자연은 그 마음과 노력을 받아줍니다. 그 핵심이 마음이에요. 사막을 막았다는 건 인간의 진정한 뜻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실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에요. 사실 사막화도 그렇고, 마음이 흐려져서 세상이 어지러워진 거잖아요. 그러기에 우리가 얼마나 진정한 마음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느냐, 마음을 수련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연 사랑, 나무 심기 이런 것들이 본심을 찾는 지름길이 될 거예요.
그는 지난 2월 또 한 번 중국 내몽고를 방문했다. 녹색장성이라는 가느다란 띠를 동서로 확장해서 잃어버린 마을을 복원하는 ‘한중우호 녹색생태원’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올해에도 이곳에 1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을 예정이다. 이제 몇 십 년 후면 이곳에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장 친환경적인 마을이 만들어질 것이다.
거친 모래 바람, 그리고 그게 정말 가능하겠냐는 인식과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희망을 만들어가고, 그 진심을 자연이 받아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경남 하동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흙의 아들이니 흙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이상으로 품고 살았다는 권병현씨.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고 돌아, 이제야 그 꿈의 길을 걷고 있다. 나무 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사막이 푸른 숲으로 바뀌는 그 순간까지 나무를 심을 것이다.
‘미래숲’ 대표 권병현(權丙鉉)은 1938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968년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공공행정 및 국제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1962년 고등고시에 수석 합격 후 미국, 중국,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외교관을 지냈으며, 1992년 한·중 수교 실무 교섭의 한국 대표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인정받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퇴임 이후 2001년 ‘미래숲’이란 비정부단체(NGO)를 만들었고, 2006년부터 쿠부치 사막을 막는 녹색장성사업을 시작했다. 2010년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는 ‘사막화 방지에 공헌한 세계 15대 인물’에 선정했으며, 초대 ‘지속가능한 토지관리 챔피언(Sustainable Land Management Champion)’ 및 녹색대사로 임명했다. 현재 동북아 공동체 연구원 원장, 국제 아동 돕기 연합 회장 등도 맡고 있다. www.futureforest.org
초등학교 때 일이다. 나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이 뭐라 말만 해도 눈물이 나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더구나 발표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종이 울렸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일은 나부터 다시 한다는 말씀으로 끝을 내셨다.
다음 날 나는 꾀병을 부렸다.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는 나의 완강한 태도에 어머니는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담임 선생님에게 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고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마나 고마웠던지 이불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린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와 현실을 혼돈하여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말이 서투르다 보면 말이 잘못 나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올바로 키우려는 마음이 지나쳐 작은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는 어머니들을 보기도 한다. 실제로 매를 들어도 아이의 거짓말이 잦아지자,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였다는 부모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아이는 더욱 머리를 짜내고 그러다 보면 또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만다.
나는 우리 어머니를 통해서 누구를 진정으로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특효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초등학교 당시, 어디가 아프냐, 정말 학교를 못 갈 만큼 아프냐, 하고 어머니가 캐물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는 이유가 있을 테지 하며 속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셨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고, 나는 감동을 받고 스스로를 더 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무슨 얘기든 믿어주셨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로는 사실 거짓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니 오히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삶 속에는 어려운 일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항상 믿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든든하다. 그럴 때 모든 일을 좀 더 자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나 싶다.
나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잘못했다고 따지기보다는 믿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장차 언어치료사가 될 학생들에게, "언어장애를 먼저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그 사람의 고통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생활에서도 혹시 상대가 나를 속이는 것 아닐까,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 그냥 믿어버리면 내 마음도 편하고 세상도 믿음으로 다가온다.
모두 어머니한테 배운 지혜이리라. 그런 지혜를 가르쳐주신 어머니께서는 63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올해 아흔한 살이 되셨다. 새해 초부터 호흡이 급격히 안 좋아지셔서 병원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한 달여를 지내다 이제야 힘들게 집으로 모셔 왔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한마음으로 30년 가까이 되는 긴 시간 동안 어머니를 정성으로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사랑과 믿음으로 키워주신 덕분이다.
어머니! 어머니의 귀한 가르침,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잘 전하고 있어요. 올 것 같지 않던 생명의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너무나 사랑합니다.
김주호 작. <사랑해요>
질구이 재벌. 65×31×18cm. 2006.
거짓말쟁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영애 60세.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김주호 작. <사랑스런>
질구이 재벌. 68.5×21×19.5cm. 2009.
그해를 굳이 기억해보면 결혼 25주년 기념일, 큰딸 대학원 졸업, 막내 대학교 졸업! 곁눈질할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연구원이었는데 며칠째 늦게까지 근무하느라 과로를 했고, 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가볍게 어지럼증이 생겨 병원에 들러 진료를 했다. 그리고 담도암인 듯하니 입원 절차를 밟으라는 병원 측 통보에 눈앞이 캄캄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오진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그럴 리가 없다며 남편도 황당해했다. 그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6개월의 투병 생활 끝에 남편은 마른 장작 같은 처절한 모습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슴속 죄멍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었으나 자식들을 생각하니 차마 속단할 수가 없었다. 불면증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일시적으로 끊게 된 인연도 회복시키며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마음 비우고 버리기를 생활화했다.
이제 남편이 떠난 지 10년.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아깝고 가슴 시리게 안타깝다.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활할 시기였는데 너무 가엾다. 인간이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때를 모르고 살아가지만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새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나눴던 우리 부부였는데, 이제 세월이 흘러 두 손자들로부터 나 홀로 듣는다. 남편 몫까지 심장이 뚫리도록 사랑을 담으며 귀한 인생 겸허하게 살 것이다.
여보! 죽을 때도 함께 죽자고 했던 말 지키지 못하여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거짓말쟁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해요.
세상은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김조영 대전대 한의학과 본과 3학년
어린 시절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열등감 때문인지 친구들이 조금만 농담 하거나 장난치면 화만 냈다. 늘 친구들에게 외면당했고, 문제아로 찍힐 정도였다.
그러다 점차 수학에 흥미를 들이게 되었다. 수학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친구들도 나를 달리 보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못해도 공부만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중학교 입학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전교 4등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평이 돌자 모두 나를 좋게 보았다. 하지만 중학교 공부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영어, 수학, 과학 경시 대비 학원, 특목고 대비 학원 등을 보내셨지만, 그 모든 공부를 소화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리고 노력할 끈기도, 인내심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거짓말은 시작되었다. 내 실력보다 시험 성적을 훨씬 부풀려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은 나를 좋게 보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 그룹에 끼어 있는 것이 좋았다.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메웠다. 점점 더 높게, 더 좋게 점수를 포장했다.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을, 남을, 세상 전체를 속여 갔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지원했던 경시대회에서 별다른 상을 타지 못했고, 특목고 입시도 고배를 마셔야 했다. 결과가 나의 실력을 말해주었다. 친구들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나의 말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괴로웠다. 내 자신과 세상을 그렇게 속이며 살았다는 것 또한 너무나 괴로웠다. 나의 모든 행동이 정말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그놈의 공부 잘한다는 칭찬이 뭐기에, 그 칭찬을 듣기 위해 세상을 속여야 되나.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세상을 속이지 않으리라.
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좋아하던 게임, 싸이월드 등은 아예 접었다. 잠이 와도 놀고 싶어도 참으면서 오직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갔다.
나는 세상을 향해 수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세상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내가 꿈꾸던 한의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중학교 때 했던 그 수많은 거짓말이 그 당시에는 나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완전 바뀌게 만들었고, 새롭게 성장하게 했다. 뭔가를 진정으로 얻고 싶은 게 있다면 그만큼 움직이고 부딪치고 노력해야 한다는, 세상의 답을 알게 된 것이다.
김주호 작. <와하하>
질구이 재벌. 67×21×18cm.
2009.
엄마는 다 알고 있었단다
권지예 52세. 소설가. <4월의 물고기> 저
거짓말,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동생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집 골목 앞에는 늘 ‘뽑기’니 ‘달고나’니 하는 군것질 장사가 있었다.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 만든 납작한 설탕 과자에 여러 가지 모양의 틀을 찍어 그 틀대로 과자를 다듬어 오면 몇 가지 상품을 뽑을 수 있거나 덤으로 설탕 과자를 더 먹을 수 있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처럼 나 또한 그 재미에 한없이 빠져 있었다.
그날도 어머니 지갑에서 동전을 슬쩍 해가지고 나서는데 세 살배기 남동생이 같이 가자고 쫓아 나왔다. 귀찮았지만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저만치 ‘뽑기 판’ 주위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어린 동생을 옆에 앉히고 나도 설탕 과자 하나를 쥐고 앉아 ‘쪼기’ 시작했다. 동생도 좋아라 궁둥일 들썩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그 일에 매달렸는지 허리가 아파 기지개를 켜며 둘러보니 동생이 안 보였다.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 녀석이 집에 갔나, 하며 집으로 달려가 보니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와 같이 있는 줄 알고 계셨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온 건 거짓말이었다. 어머니가 금지하는 ‘뽑기’를 했고, 무엇보다 그것을 하기 위해 지갑에 손댄 것부터 불어야 하니 애초에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난 친구네 집에 숙제하러 갔었는데…." "아니, 그럼 얘가 어디 갔다니?"
어머니는 사색이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이웃들 또한 모두 모른다고 했다. 아무도 내가 동생과 함께 ‘뽑기 판’에 있었던 사실을 몰랐다. 나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지만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동생이 큰길가를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누군가 동생을 유괴해갔다면? 차 사고라도 났다면? 나 때문에, 내가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동생이 사라지고 이틀이나 지났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버지는 파출소에 들락거리고 어머니는 드디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숨 막힐 것 같은 며칠이 지났다. 여덟 살의 나는 거짓말의 올가미와 그로 인한 죄책감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질식할 것 같았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뛰어나갔다. 한참이 지나고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오셨다. 동생은 살아 있었다. 게다가 뽀얗게 살까지 올라 있었다.
사연인즉, 우리 옆 동네에 사는, 너무나 아이를 키워보고 싶었던 늙은 과부가 골목을 헤매는 동생을 보자 욕심이 나서 데려다 키웠고, 그걸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파출소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대통령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울 자신 있었다며 동생과 떨어질 때는 통곡을 하더란다. 어머니는 그 후 정성스럽게 떡을 만들어 동생과 함께 아주머니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곤 했다.
순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한 철없는 거짓말이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죄책감에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은 조숙한 아이가 되어간 것 같다. 거짓말과 진실, 그리고 참된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동생을 찾지 못했다면 어린 가슴에 감당하기 힘든 비밀을 간직하며 어두운 터널 같은 인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몇 년 전에야 어머니께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자식을 둘이나 죽일 수 있기에 모르는 척했어. 없어진 애도 애지만 멀쩡한 눈앞의 자식도 살려야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나 또한 아이를 둔 엄마이기에 더 절절히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렇다. 거짓말조차 감싸준 엄마의 사랑이 나를 키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