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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청강,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우승자

작년 11월에 시작한 MBC ‘위대한 탄생’은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이 서바이벌 형식으로 노래 실력을 겨루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를 꿈꾸던 연변 청년 백청강(23). 탁월한 가창력의 소유자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 눈을 가리는 앞머리와 왠지 위축된 듯한 모습….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며 자신에게 지적된 단점을 고쳐나가던 그는, 7개월 후 최종 우승자가 된다. 아무도 예상 못 했던 반전, 그의 우승은 묵묵히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가수로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백청강씨를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우승했을 때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행복했어요. 괜히 우쭐해하고 그러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오디션에서 우승했을 뿐이지 그야말로 진짜 신인이잖아요. 지금부터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수의 길이 열리느냐 끝이냐가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진짜 큰 스타가 된다 해도 그땐 그게 또 시작이라고 생각할 거 같아요. 그냥 항상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많은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결국 부활엔터테인먼트를 선택했지요.

이름을 밝히기는 그렇지만 큰 소속사에서는 다 연락이 왔었어요. 처음에는 고민을 조금 했어요. 제가 댄스를 좋아하잖아요. 부활은 댄스는 아닌데, 어떡해야 하지…. 그런 고민이요. 그런데 제가 계속 생각해왔던 게 일단 노래보다 인간성이거든요. 가수든 뭐든, 우선 사람 됨됨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김태원 선생님한테 가면 인간성은 무조건 배울 수 있을 거고, 또 저를 여태까지 끌어주신 고마운 분이니까 바로 결정했죠.(웃음)

상금 중 상당한 액수를 보육원 등에 기부했잖아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한국 분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한국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백청강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기 좋아하는 아이었다. 9살 때부터 한국으로 돈 벌러 가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외로움에 홀로 우는 시간도 많았지만 노래할 때만큼은 행복했다 한다. 그런 시간들 덕분에 마음을 담아 노래할 줄 알게 되고 다른 이의 어려움을 생각할 줄 아는 속 깊은 배려도 생긴 듯 보였다.

가수를 꿈꾸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음악 학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운다. 록가수 김경호를 너무 좋아해 로커를 꿈꾸던 그에게 댄스그룹 HOT는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어떻게 춤추면서 노래할 수 있지? 그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춤과 노래를 연습한다. 클럽에서 노래하며 생활비를 벌며, 각종 오디션에도 참가했다. 연변가요무대 1등, 연변TV 전국청소년오디션 1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대부분 1등을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중국이 워낙 크다 보니 지방 대회에서 1등 하는 것만으론 이름을 알릴 수 없었고, 또 소수민족이기에 그 기회도 적었다. 점차 자신감이 떨어져갈 무렵 ‘위대한 탄생’ 중국 오디션 소식이 들려왔다. ‘노래’만이 전부였지만, 출구를 찾기 힘들었던 청년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었다.

오디션이 열리는 중국 청도는 기차를 타고도 꼬박 하루, 그리고 반 이상 더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한국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가냐”며 만류하는 엄마를 설득해,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오디션 날, “가장 쉽게 노래하는 사람 중 한 명을 만났다”며 그의 가창력은 높이 평가되었지만, 콧소리로 인한 부정확한 발음, 모창에 대한 지적이 쏟아졌다. 하지만 결과는 합격.

“좋습니다. 기쁘고요, 어머니 아버지 열심히 해서 좋은 가수가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한국 입성, 1차 예선에 통과한 100여 명이 경합을 벌인 후, 다섯 명의 멘토가 각각 제자로 맞을 4명의 참가자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마지막 멘토 결정의 순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백청강의 멘토를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순간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손을 든 이는 바로 김태원씨였다. 그의 안에 담긴 누구보다도 강한 노래에 대한 열정과 끼를 알아본 것이다.

김태원을 멘토로 만난 백청강은 마치 날개를 단 듯 그만의 강점을 살려나간다. 매 경합마다 콧소리, 음정 불안 등에 대한 지적은 계속되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단점을 고쳐나갔다. 아이돌의 댄스 음악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무대에서는 지난 시절, 그가 얼마큼 가수가 되기 위해 땀을 흘렸는지도 느끼게 해주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간절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 맑고 깨끗한 음색, 체구는 작아도 무대를 감싸는 파워, 약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모습과 순수함…. 그 안에 감춰진 보석 같은 매력들이 점차 드러났고 팬 층도 두텁게 형성되었다. ‘상처받은 어린 야수’ 같았던 처음의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치유되고 변화해 갔다.

방송이 진행되면서 점점 청강씨를 좋아하고 아끼는 팬들이 많아졌어요.

처음 중국 오디션 방송이 나간 다음 팬 카페가 생겼어요. 그전까지는 데이비드 오 팬 카페가 유일하게 있었거든요. 그때 솔직히 부러웠어요. 얘는 역시 다 되니까, 잘되는구나 했는데, 저도 생긴 거예요.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나고 저를 좋아해주니까 고맙고 한마디로 진짜 좋았어요. 팬 여러분들, 항상 저를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짜 너무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를 좋아해주시는 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바로 앞에서 콧소리, 음정 불안, 모창 등을 지적받으면 굉장히 위축됐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맨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럽고 놀랐어요. 근데 점점 그걸 받아들여 고쳐나갈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사실 모두 저 잘되라고 해주신 말씀이잖아요. 특히 콧소리에 대한 지적은 힘들었어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콧소리가 원래 있었거든요. 아, 유전인데 어떻게 고치지 싶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유전이라도 고칠 수는 있을 거다 생각하고 계속 연습하다 보니까 조금씩 되더라고요. 지금도 무대에 설 때는 해주셨던 조언을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이은미 선생님께서 ‘반주 따로, 목소리 따로 분리되어 있다며, 노래할 때 음악에 젖어서 같이 하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지금도 항상 생각해요. 그리고 음정이 불안하다고 조금씩 계속 낮아진다고 하셔서, 모니터를 해봤는데 진짜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도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또 제스처를 하려면 제대로 하고 어설프게 하려면 아예 하지 말라는 신승훈 선생님 말씀도 항상 생각해요.

멘토들의 말씀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셨군요.
특히 김태원 선생님과의 인연이 정말 특별한 것 같아요.

저한테 김태원 선생님은 진짜 은인이에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만큼. 너무 감사하죠. 특히 저한테 ‘초심을 잃지 마라’ ‘자만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막말로 조금 크면 자기가 잘났다고 그러다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초심이 진짜 중요한 거 같아요. 초심 때는 어떤 일도 다 하다가 이젠 가수니까, 니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김태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많이 새겨요. 저는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가수가 돼야 한다는 계약을 저 친구와 저는 마음으로 했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바랍니다.” 백청강의 우승 발표 후 김태원씨는 그렇게 축하의 말을 대신한다.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조선족 청년의 우승은 그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조용하던 연변 사회는 들썩였다. ‘앙까’라는 연변 말까지 유행시킨 그는 단순히 가수를 꿈꾸는 청년 이전에 연변 우리 조선족들의 자부심이었고, 또한 한국 사람에게는 조선족을 이해하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연변에선 백청강씨가 롤모델이 됐다고 해요.
중국에 있는 친구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위대한 탄생2 참가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힘들어도 꼭 이겨내고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 꿈을 이룰 때까지 피땀을 흘리면서 노력하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이건 또 저한테 하는 말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제 곧 ‘위탄2’를 하는데, 많이 떨리겠지만 그걸 극복해서 침착하게 한 순간 한 순간 하면 좋겠어요. 오늘은 내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무대 위에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거죠. 저도 그랬거든요.

백청강씨에게 노래란 무슨 의미인가요?

저에게 노래란 길이에요. 제가 선택한 길이 노래고, 또 제가 걸어야 할 길이 노래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꿈을 잃지 않게, 용기를 주고 싶어요. 노래를 통해서.

백청강은 최근 MBC 드라마 <계백>의 메인 테마곡을 부르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많은 좌절도 경험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는 백청강. 오직 노래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청년, 이제 그는 가수 백청강으로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바람대로 진정 초심을 잃지 않는 가수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 그의 미래가 상상되었다. ‘톱스타 백청강’의 콘서트장, 무대에 선 그가 특유의 선한 미소를 띠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 제가 위대한 탄생 우승자였던 거 앙까?”

백청강님은 1989년 생으로 중국 연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를 꿈꾸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음악학원에 입학하여 하루 10시간 이상씩 노래와 춤을 연습합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연변TV 전국 청소년 오디션 1등, 제1회 청소년신인가요제 대상 등을 타며 그 실력을 인정받던 그는 2010년 말부터 시작된 MBC 스타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 참가하여, 7개월간의 경합 끝에 최종 우승자가 됩니다.

한 번쯤 그 입장에서 생각해준다면,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서로를 알게 되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도로 위의 무법자 ‘김여사’가

내 아내일 줄이야

이대영 42세. 직장인. 충남 아산시 배방읍

몇 개월 전 퇴근 후 집에 오니, 아내가 조용히 나에게 말을 한다. “당신, 며칠 차 타지 마.” “왜? 사고 났어?” “아니, 주차장에서 차 빼다 기둥을 박아서 문짝이 찌그러졌어. 좀 심해. 펴올 테니까 다음에 타.” “끙~~”

그리고 고친다 고친다 하더니 바쁘다며 안 고친 지 3일째. 둘째를 학교에 태워다 줄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주차장에 내려갔다. 순간 허걱! 오마이 갓뜨! 어찌 이럴 수가!

운전석 문짝 부분이 푸~욱, 조금 찌그러졌겠지 했는데 이건 상상 초월이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갔는지 물어보니, 차를 빼는데 재채기가 나왔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보고 말로만 들었던 김여사가 내 아내일 줄, 진정 난 몰랐다. 결혼 후 운전면허를 딴 아내는 그렇게 잊을 만하면 한 건씩 터트리며 ‘김여사’를 떠올리게 했다.

결혼 전에는 장점이, 결혼 후에는 단점이 보이며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단다. 나 또한 그러했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아픔을 겪었던 나는 신용을 목숨처럼 중요시한다. 은행의 대출금은 물론이고 공과금 회비 등 금전적인 거래는 절대로 연체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납기가 지나 가스가 끊어진다고 연락이 와야 부랴부랴 가스 요금을 내고 한두 달 연체는 기본으로 아는 대범(?)한 여자다. 일과 가사 육아 등 다른 일에는 똑 부러지는 아내인데 왜 유독 그 부분에만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주리 작. <안경에 관한 명상> 안경 위에 아크릴릭. 2004.

하지만 아이를 기를 때 보면 엄마는 역시 다르구나, 느낄 때가 많다.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은 올 초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하고,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약할 정도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런 큰아이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2학년 초 바이올린이 하기 싫다며 엄마에게 짜증을 낸 것이다. 난 “하기 싫으면 때려쳐”라고 야단을 쳤지만 아내는 달랐다. 큰아이를 작은방으로 데려가 왜 하기 싫은지 들어보고는 문제점을 찾았다. 레슨 선생님이 내주는 너무나 많은 숙제에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그것이 폭발을 하고 만 것이었다. 숙제를 반으로 줄이자 아이는 더 이상 짜증을 내지 않았고 점점 실력이 향상되어갔다.

아내와 처음 만난 건 1996년 제주도에서였다. 5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금전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다. 아내는 내가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나를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해주었다. 힘들어할 때마다 “함께 헤쳐 나가자”며 용기를 준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내 가족이 누리는 행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남녀의 차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부부는 서로의 반쪽이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만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불완전한 관계인 것이다. 남녀가 가치관과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경할 때 하나의 부부로서 완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여보, 연체를 해도, 주차장 기둥을 박아도 괜찮다,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난 행복한 남편이니까.

 

진정 갈대 같았던 건

여자 아닌 내 마음이었어라

이진석 34세.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고3 때 나는 익산에 사는 한 여자아이와 펜팔을 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고, 친구들과 함께 3:3으로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여자아이들이 나왔다. 내 펜팔 친구는 작은 키의 귀여운 아이, 정말 맘에 쏙 들었다. 이후 펜팔은 계속되었고, 전화 통화도 했다.

그러던 중 대학 문제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며칠간은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펜팔 친구에게 전화해 대학 진학 문제로 당분간 연락을 못 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 다시 연락을 했는데, 반응이 쎄~ 하면서 “내가 보낸 편지 못 받았어? 편지로 이야기 다 했으니 그만 연락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띵~.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거지? 난 정말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대학 문제를 마무리하고 멋지게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그게 서운했던 걸까? 내가 자기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고 생각한 걸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하지?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대학 진학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던 중 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도 왠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대학교 축제 때 동아리를 대표하여 댄스 대회에 나갔다. 그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더욱 열심히 연습했다. 아~ 하늘이 그걸 알았나, 대상까지 타 버렸다.

축제가 끝난 후 뒤풀이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운명처럼 그 친구 옆에 앉게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친구 왈 “나 결혼 안 할 거야. 우리 동기잖아.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무튼 이 반응은 거절, 그러면 그동안 나에게 했던 행동들은 뭐지?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황주리 작. <식물학>

캔버스에 아크릴릭. 91x117cm. 2009.

2학년이 되었다. 신입생 중 정말 맘에 드는 여자 후배가 한 명 있었다. 그 후배는 군대 갈 때 입대 장소까지 따라와 주고 편지도 전해주었다. 훈련 중에 편지도 주고받고 정말 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첫 휴가를 받고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친구들 말이 그 후배가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하더란다. 더 망설일 게 없었다.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만났는데 후배가 먼저, “생각해 봤는데… 전 그냥 선후배 사이였으면 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띵~. 나는 한마디도 못 했는데. 그 뒤 더욱 황당했던 한마디. “선배와 전 같은 성이잖아요.”

이건 또 뭔 소리? 나한테 그동안 그렇게 예쁘게 편지를 보낸 건 뭐지?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면서? 내가 군대에 있었던 게 문제인가? 좋아한다면 나라면 기다릴 텐데.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제대 후에도 그렇게 또 많은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 다른 사람은 잘만 사귀는 것 같은데, 나는 번번이 연애 초입에서 이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여자 문제로 힘들면 혼자 이겨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자전거 여행도 가고, 노래방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남녀의 차이에 대해 다룬 책도 보고, 선배들에게 상담도 많이 했다. 외모를 멋있게 하기 위해 술도 안 마시고 다이어트에 돌입해 보기도 했다. 때론 이러면 여자들이 안 좋아했잖아, 이래야 여자들이 좋아하잖아, 하고 얽매이는 마음 때문에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아, 결국 나는 더 이상 여자에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이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그렇게 마음에서 여자를 놓는 한순간 불현듯 깨침이 왔다. 내가 정말 몰랐던 건 진정 여자였을까? 정작 갈대와 같았던 건 내 마음이 아니던가?

나부터 알아야겠다, 나부터 알아야 참사랑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남자는 하늘이 되고픈 어린아이,

사랑해주고 기다려주면 돼

김정숙 68세.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나는 7남매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한학자셨는데 남자와 여자의 도리에 대한 교육을 항상 시키셨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여자는 결혼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늘 들으며 자랐다. 그런 문화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새 남자들을 어려워하고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결혼해서도 그런 생활은 이어졌다. 연애 시절 포근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는데, 결혼해 보니 완전히 달랐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가정은 그냥 하숙집이었다. 매일 밥상 차려놓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일이 반복되니까 속상하고, 가정을 꾸렸으면 가정에 충실해야지 남자들은 왜 그러나 싶고 참 힘든 시절이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저 순종하며 사는 게 도리인 줄 알았다.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한테 기대했던 것이 어긋나니까 자식한테 내 모든 바람이 갔다. 사랑이라 생각하며 이런저런 간섭을 하니 아들들도 힘들어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내가 불쌍하고, 외롭고 고독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남편이 육십이 넘으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내가 몸이 아파서 수술도 하고 그러면서 부인의 소중함이나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한 많은 여자의 일생으로 남을 뻔했던 나의 기구한 인생, 그즈음 아들 소개로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마음을 버리며 남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미움이 한꺼번에 확 올라와 힘들기도 했지만 버리고 버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던 즈음 남편도 수련을 시작했다.

남편이 수련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정말 나 만나서 고생 많았다.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생애 이렇게 울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후회를 많이 했다”며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자존심이 강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나도 너무 놀랐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참 많이 변했다.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60x80cm. 2000.

매사에 내 의견을 물으며 인격적으로 대해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공사 때문에 더운물이 안 나왔는데, 내가 샤워를 한다니까 물을 데워서 갖다주었다. 너무 놀라 “내가 먼저 죽었으면 이런 호강을 다른 사람이 할 뻔했네” 하며 웃었다.

이제 와 보면 젊었을 때 왜 그렇게 잠 못 자고 신경 쓰며 들들 볶고 난리를 치며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때 되니까 가정으로 돌아오건만 조금만 남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기다려줬으면 어땠을까.

우리 시대야 남자, 여자가 달랐지만 지금은 여자든 남자든 똑같이 공부하고 사회생활도 똑같이 한다. 여자는 자기 없이 살아온 세월이 있어 시대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데 권위주의적인 습관이 밴 남자들은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맞벌이를 하는데도 아직도 가사는 여자 몫인 가정도 많은 것 같고, 어디 모임에서도 보면 아직까지도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남자들도 많이 본다. 그렇게 권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가 더디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설령 남자가 변화하지 않더라도 여자는 남자가 빨리 이 시대에 따라올 수 있게끔 좋은 얘기로 설득을 하며 기다려주는 게 필요하다.

남자는 어린애 같아서 잔소리하기보다 칭찬해주면서 “힘드니까 좀 거들어줘” 하고 부탁하면 잘 들어준다. 아무리 여자 남자가 다르더라도, 서로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아껴주면 누구나 재미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쯤 그 입장에서 생각해준다면,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서로를 알게 되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지윤’이와

‘윤식’이 사이

윤지윤 30세. 선박검사관.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나는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는 말에 유감이 많다. 여성은 여성이고, 남성은 남성이지, ‘스럽다’라는 표현은 왜 필요했을까?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는 남자 같은 아이었다.

갓난아기 때 나의 어머니는 “아드님이 참 잘생기셨어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사촌들도 모두 남자였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오빠들의 옷을 물려 입고, 권총 장난감을 들고 뛰어다니며 오빠들이 노는 대로 놀면서 컸다.

그러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모두 여자들만 있는 학교로 갔다. 나는 여전히 외모도 성격도 ‘남자 같은’ 아이였다. 교복이 아니면 거의 체육복을 입고 다녔다. 내가 여자였지만, 오히려 여자 아이들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사소한 것에 삐치고, 질투하고, 뭔가 한 단계를 더 거친 후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이과 계열 쪽에 흥미를 느낀 나는 공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자 동기들도 선배들도 후배들도, 여자애들에게 느끼는 불편함 없이 나를 대해주었다. 짧은 머리에 바지만 입고 다니며 남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나는 거의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공강이 생길 때면 인문대학 앞에서 선배들과 앉아 지나가는 여자들의 외모에 점수를 같이 매기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여자 분들께 참 미안하다.

결국 나는 선배로부터 남자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바로 ‘윤식’이다. 2학년 때 그 이름을 받았으니, 3년간 윤식이라 불렸다. 여학생은 항상 첫 줄에 앉아야 한다는 궤변을 펼치던 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만은 그 첫 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공식적으로 윤식이로 명(!) 받던 때가 그때였다.^^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62cm. 2010.

졸업 후 나는 역시나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조선(造船) 쪽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불편한 건 없었지만, 간혹 여자라서 받는 편견도 있었다. 선박 설계 감리를 한 후, 검사자의 이름을 찍는데, 내가 여자라는 걸 알고 나면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설계한 것을 감리한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배 잘 알아요?” “몇 년 일했어요?” 하며 대놓고 무시한 분도 있었다.

그럴 때면 ‘왜 남자들은 여자를 무시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내 안에도 그런 마음이 똑같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마음수련을 하면서였다.

자라면서 ‘남자 같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그럴 때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나보다 더 크고 더 힘이 세고 더 빠르게 달리는 오빠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강인한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생겼던 것이다. 예쁜 것에 관심 많은 여자들의 취향에 나는 아닌 척하면서 남성성을 동경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치며 살았구나 하는 반성도 되었다.

수련을 하며 그런 마음들을 덜어내고 나니 예전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구두나 여성스러운 옷들도 예뻐 보였다. 좀 꾸미고 다니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지금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사람 됐다고 한다. 여성스러워졌다는 말일 것이다. 굳이 ‘여성스러워져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남자 같아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여성과 남성이 있고, 어느 사람에게나 여성성과 남성성은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잘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아내의 잔소리가

4절까지 이어질지라도

백일성 41세. 직장인.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며칠 전 중학생 아들 녀석 학원 문제로 아내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종합반으로 옮기게 되면서 부담스러워진 학원비 걱정에 아내의 푸념이 이어졌습니다. 남자인 저로서는 이왕 옮기기로 결정한 거 더 이상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막고자 아내에게 넌지시 한마디 했습니다.

정말 맹세코 좋은 뜻에서 내뱉은 한마디였습니다. 제 좌뇌의 중추 신경을 따라 측두엽을 거쳐 구강 구조의 세 치 혀를 통해 무심코 흘러나온 그 한마디는 다름 아닌 “아껴 써…” 딱 이 세 음절이었습니다. 이 세 음절이 아내의 달팽이관을 거쳐 아내의 전두엽 감각 중추를 자극하였는지 아내의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짧은 순간에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아내의 말은 느낌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아껴 쓰라고?… 내가 언제 흥청망청… 요즘 물가 생각이나 해봤… 우리 살림에 더 이상 뭐… 15년 동안 허리띠 졸라… 남들 다 한다는….”

1절이 끝난 듯 잠시 숨을 몰아쉬고 애국가 2절에 들어갑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하물며 철갑을 두르는데 내 몸에 걸칠 옷 한 벌 사려고 해도 몇 번을 들었다 놨다, 결국 애들 옷 사들고 오는 심정을….”

그 이후 3절, 4절도 이어졌습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아내의 말에 문득 네덜란드의 구멍 뚫린 둑을 주먹으로 막았다던 소년에게 지금 제 아내의 입도 한번 막아 달라는 부탁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결혼 15년 차 남편인 제가 오른 학원비만큼 좀 더 절약하자고 그냥 무심코 던진 ‘아껴 써’라는 세 음절이 아내에게는 애국가 4절의 한숨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긴 한숨 소리 앞에 입을 꼭 다문 저에게 아내의 눈빛이 뭐라고 대꾸 좀 하라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딱 한마디 하고 애국가 4절을 들었는데 주어, 동사, 목적어로 구성된 3형식 문장이라도 한마디 했다가는 아내는 팔만대장경이라도 낭독할 기세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 부부는 화성 남자 금성 여자처럼 멀리 갈 것도 없이 거실 남자 안방 여자가 되어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불편한 몸을 소파에서 뒤척이다 안방 문을 살며시 열었습니다. 어두운 방 TV 불빛에 얼굴만 환히 비추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황주리 작. <돌에 관한 명상>

돌 위에 아크릴릭. 2004.

“형우 엄마 맥주 한잔 하러 갈까?”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습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집 앞 호프집으로 향하는 저의 팔짱을 끼고 아내가 방향을 바꾼 곳은 편의점 앞이었습니다.

“아껴 쓰라며? 캔 두 개만 사와.” 뽀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내를 뒤로하고 캔 맥주 두 개를 사와서 아파트 분수대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캔을 따달라며 내미는 아내. 15년 동안 아직도 맥주 캔을 못 따고 항상 저에게 맡깁니다. ‘치~익’ 소리를 내며 약간의 거품이 올라오자 제 손에서 캔을 낚아채 거품을 빨아 먹는 것도 15년 동안 한결같습니다. 입술에 거품을 묻힌 채로 아내가 입을 엽니다.

“자기야~ 내가 당신한테 무슨 해결책을 듣겠다고 돈 타령한 건 아니야. 난 그냥 부부간에 서로 말하고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 달라는 거야.”

분수대에 흩날리는 물방울 때문인지 아내의 눈망울이 촉촉합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의 미안함을 전하며 아내에게 건배를 제안했습니다. 아내는 맥주 한 캔을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넘깁니다. 그 모습에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여보… 아… 껴~~~~~ 먹어~” ㅎㅎㅎ

남녀로 만나서 연인이 되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15년을 살았는데도 아직도 의사소통에 미흡한 점이 많아 이렇게 다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바라보고 있는 분수대처럼 같은 공간에서 끝없이 순환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늘도 아내의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으로 닦아줍니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아이돌 스타’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화경 고등학교 3학년.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나는 언니만 두 명 있고, 여중을 나와서 남자들하고 지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을 가게 되었다. 앞으로 한 반에서 남자아이들이랑 함께 생활하겠구나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나는 FT아일랜드라는 그룹을 좋아한다. FT아일랜드는 밥을 먹을 때도 잠에서 막 깼을 때도 멋있고 생활 하나하나가 화보처럼 아름다울 것 같고 나한테도 언제나 너그러울 것 같았다. 그렇게 막연히 아이돌 스타를 보면서 동경해 마지않던 남자들. 하지만 환상은 와르르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다가 일어날 때면 반쯤 풀린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질 않나. 점심시간엔 반찬 하나도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무장한 채 초스피드로 밥을 먹고, 다 먹은 후에는 엄청난 트림으로 소화됐음을 알려준다. 스스럼없이 방귀를 뀌어대며 오늘 뭐 먹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남자애들. 도대체 남자애들은 왜 이러는지,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학교에서 빵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여자 후배들은 “빵이 이 정도로 부풀어 오르면 되는 건가요? 앞으로 어떡해요?”라며 세세하게 물어본다면, 남자 후배들은 “누나, 이거 다 됐어요?” 하며 딱 필요한 것만 묻는다.

동아리에서 봉사 활동도 많이 가는데, 그럴 때도 남녀의 차이를 많이 느낀다. 봉사 활동을 가면 적적했던 어르신들이 반갑다고 맞아주시는데 남자아이들은 쑥스러운지 선뜻 다가가서 “감사합니다”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뒤로 숨는 것이다. 반면 여자애들은 뭐든 도와드리려고 하고 말도 싹싹하게 한다.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도와드릴 때 어르신과 말 한마디 안 하고 묵묵히 일만 하는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으이구, 봉사 활동까지 와서 꼭 이런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쑥스러움을 많이 타던 남자아이들도 공연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르신들이 신청하는 노래도 멋지게 불러드리고 더욱더 오버해서 춤도 추며 즐겁게 해드린다. 결국 끝나고 돌아갈 때쯤에는 남자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어르신들께 많은 도움을 드리고 가는구나 싶다.

말을 안 할 뿐 남자아이들은 마음속으로 미리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행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낄 때면, 칠칠치 못하게 보이던 애들이 아이돌 스타처럼 멋있어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솔직히 사실이다.ㅋㅋ

여자들끼리 있으면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다 할 수 있어서 좋고, 남자와 같이 있으면 재밌게 놀 수 있어서 좋다. 남자아이들이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쉽게 들지 못하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곳까지 가져다주고 고맙다고 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넘어가줄 때, 집까지 가는 길이 많이 어두우면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 남자들의 묵묵함이 왠지 감사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TV 속의 화려한 스타보다, 든든하게 옆에 있어준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더 멋있을 때도 꽤 있었다.ㅋㅋ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62cm. 2010.

 

 

-완전한 나라 -가짜와 진짜

 

없구나 없구나 아무것도 없구나

없는 가운데 정신만 있구나

천지 만물만상의 근원이고 천지의 주인이라

창조주이시라

사람의 마음에 이 존재가 없어

사람은 창조주를 모른다

창조주로부터 다시 나야

세상이 완전한 참으로 화하여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일체가 없는 것이 근원이나

형상의 있음의 일체도 또한 하나이라

세상은 나가 완전하니 다 깨쳐 있구나

거짓의 나가 죽고 죽으니 참이신 주님만 남구나

그 주님의 몸 마음으로 다시 나니

완전한 나라에 죽음이 없구나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물질인 이 몸은 유한하여

완전한 나라에 살기 위함이라

물질로 나타난 이유가

그 형상이 세상에 나타나야

그 형상이 하늘나라에 그 형상으로 살 것이라

있음이 있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난 것도 인연이요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인연이요

이 세상에 살다 죽는 것도 인연이요

참 나라 난 자는 그 영혼이 영원히 살 것이다

가짜와 진짜

사람들이 가진 종교에서는 서로가 자기 것이 맞다고 하고 다른 것은 다 이단이고 사이비라고 한다.

가짜는 진짜와 비슷해도 가짜요, 진짜를 이야기해도 가짜다.

진짜는 진짜가 되어 있어야 진짜다.

해외 각지에 다니다 보면 같은 종교끼리의 싸움이 너무 많다. 각 종교인들은 지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진짜인가. 자기가 진짜인 참인 진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다 가짜가 아닌가.

자기가 완성이 되어 있는가.

완성이 안 되어 있으면 가짜가 아닌가.

가짜가 진짜가 되려면 가짜인 자기의 몸 마음을 다 버리는 것이 진짜가 되는 방법이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를 다 없앤 자만이 진짜가 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대반열반 무여열반 구경열반

크게 남음이 없도록 허인 자기를 다 없애면

죄를 또 업을 다 없애어 거듭날 수가 있다.

구원이란 가짜가 진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진짜가 되지 못하고

또 지금까지 진짜가 안 된 곳은 다 가짜가 아닌가.

진짜가 되는 방법은 가짜인 자기를 버리면

진짜만 남을 것이고 진짜로 다시 날 것이다.

진짜를 이야기하고 진짜같이 해도

진짜가 되지 않으면 다 가짜일 것이다.

지금 내가 완성이 안 되어 있으면 가짜가 아닌가.

정신 차려 생각해 볼 문제다.

사람이 불경 성경 코란 베다 등 세상에 있는 경전을

다 외워도 그 외우는 속에는 참이 없고 오로지 자기의 죄업을 사해야 참이 나와 참의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글, 그림 우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2)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2)

옛날 옛날 어느 봄날 임금님께서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눠주었습니다.

“이 꽃씨들을 화분에 심어 잘 가꾸기 바란다.

가을에 가장 아름답게 꽃을 가꾼 백성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

마침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약속대로 광장으로 나와,

백성들이 들고 온 꽃 화분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붉고 노란 갖가지 탐스러운 꽃들….

하지만 임금님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모든 꽃들을 본 후 너무나 침통한 얼굴로 돌아서던 임금님은,

골목길에서 흐느끼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였습니다.

소년은 열심히 물을 주고 보살폈는데 싹조차 트지 않았다며,

빈 화분을 든 채 울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그제야 비로소 껄껄껄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봄에 내가 준 씨는 모두 죽은 씨앗들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꽃이 필 수 있겠느냐?

우리 성 안에 단 한 사람의 정직하고 착한 소년이 있구나.

진정 가장 아름다운 꽃을 키운 나의 백성이로다.

내 이 아이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다.”

 

착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아주 모범적인(^^) 동화입니다.

임금님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웠노라며,

소년의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을 칭찬하지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마음밭이 있다고 합니다.

내 마음밭에는 어떤 꽃이 피고 있을까,

거짓의 꽃, 욕심의 꽃, 허영의 꽃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봅니다.

혹여 그렇게 잘못 심어진 꽃들이 있다 한들,

까짓것 깨끗이 뽑아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소년처럼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면,

하늘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겠지요.

사랑의 꽃, 행복의 꽃, 가장 아름다운 꽃들만 피어나게 말입니다.

마음의 독, 스트레스

우리 몸 위협하는 독소 빼내기(3)

정리 문진정

최근 명문대 대학생부터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에 이르기까지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과 돌연사 소식이 종종 들려오고 있다. 또한 직장인의 스트레스 보유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열 명 중 여섯 명이 ‘회사 우울증’을 호소한다는 설문 조사도 발표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심리학 관련 서적, 스트레스 센터 등이 큰 인기를 끌면서 ‘마음’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건강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마음의 행복과 안정이 신체의 건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의학계의 발표가 이어지면서 단순히 식단과 운동보다는 명상이나 마음의 변화로 질병을 예방·치료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실제로 충북대에서 실시한 토끼 실험 결과에서도 5주 동안 스트레스를 준 토끼들은 눈이 튀어나오고 혈관 내 콜레스테롤이 증가한 반면, 애정을 준 토끼들은 혈관이 상대적으로 깨끗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가 건강 상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운전 중 무심결에 욕이 튀어나올 때,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예민해질 때 무심코 넘기지 말고 내 속에 잠재된 스트레스 요소를 점검해 보자. 그리고 매일 몸의 독소와 때를 빼내듯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비워나가자.

부지불식간에 들어와 있는 마음의 독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독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의 몸은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물질이 분비되면서 혈압이 높아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혈관 내벽이 손상된다. 그리고 지방이 많이 분비되어 혈중 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게 나타난다. 게다가 마음이 불안할 때는 과음, 흡연 등 다른 위험 인자까지 가세하는 효과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은 뇌에도 영향을 주는데 특히 화를 낼 때는 100여 개의 뇌세포가 죽는다고 하니, 사소한 일에 화를 내는 사람은 이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분노는 사람을 죽인다

미국 엘머 게이츠 박사는 사람이 뿜어내는 숨을 액화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색깔의 침전물이 생겼는데 특히 화를 낼 때 생기는 밤색의 물질에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소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 물질을 실험용 쥐에게 투여하자 몇 분 만에 죽어버린 것이다. 만약 한 시간 동안 화를 낸다면 80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심한 독소가 배출된다고 한다. 흔히 ‘독기를 품고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실제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그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해치고 있는 셈이 된다.

화가 날 때는 이렇게 하라

<분노가 죽인다Anger Kills>의 저자 레드포드 윌리엄스 교수가 개발한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소개한다. 화가 날 때는 상황의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한 다음, 네 가지 질문을 해보면 경솔한 행동을 막을 수 있다.

①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 일인가? 사소한 문제라면 그냥 흘려버린다. ②‘내 분노와 생각과 느낌들이 적절한 것인가?’ 이성적으로 내 반응이 정당한지 자문한다. ③‘지금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것인가?’ 교통 체증의 경우는 바꿀 수 없으므로 상황을 수용하기 쉽다. ④‘행동을 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가치가 있다면 폭력이 아닌 대화로 상대를 설득한다.

참고 도서 <데톡스 당신의 삶을 해독하라> 고영리, 홍종희 / 동아일보사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마음> 이영돈 / 예담

협심증 소녀, 강심장 되다

박은미 29세, 스웨덴 스톡홀름 거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협심증처럼 심장이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부모님의 직업 때문에 한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한국으로 이사를 다녔는데, 어린 나이에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되고 말도 안 통하다 보니, 그 스트레스가 심장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영국에서 6년간 영국인의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나는 한국 아이들과는 별개의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한국의 문화를 이해 못 하는 나를 놀려댈 때면 마치 외계인이 된 것 같았고 나 역시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어 자주 싸웠다.

중학교로 진학하면서는 심장이 더 자주 경직되었다. 심할 때는 일주일에 몇 번씩 심장이 죄어들었다.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고 심장이 뛰지 않는 1분 남짓이 일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경직된 가슴을 부여잡고 어서 풀려나기를 바라야만 했다. 그 순간은 내가 꼭 죽은 것 같았다.

목욕탕, 놀이공원, 수영장도 못 갔고 달리기, 등산도 할 수 없었다. 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좋아하는 일은 자제했고 남들처럼 서로 경쟁하며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포기했다. 몸이 마음대로 안 따라주니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했다. 다시 영국에 가면 잃어버린 추억도 만들고 안정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에서도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한국적인 사고와 문화에 이미 익숙해진 나는 영국의 낯선 문화에 또 한 번 실망해야 했다. 점점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며 살이 쪘고 건강은 더 나빠졌다. ‘나는 이제 갈 곳이 없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런던에도 마음수련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수련을 한 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세상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어느 프랑스 입양아의 경험담. 나도 희망을 가지고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을 하며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나의 정체성과 성격, 건강까지 좌우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낯선 환경, 언어 장벽, 문화 차이…. 남들과 다른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관념들. 그러한 피해 의식에 가득 차 있었기에 나는 나를 알 수도 없고 늘 불안했다. 거기에 아픈 심장 때문에 시도조차 못 해본 많은 일들은 상처가 되어 쌓이고 있었다.

하나씩 그런 마음을 버려나가자 열등감, 두려움, 불안감이 조금씩 내려놓아졌다. 그러면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도 정확히 보였다. 예전에는 무엇이든 붙잡아 두고 싶어 했다. 부모님의 관심, 남자친구의 사랑, 학업과 경력도 항상 내 기준대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한 것들이 나를 만들어주고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조차 마음에서 놓으니 있는 그대로의 내가 보였다.

진심으로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내게 맞는 속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아, 심장이 조이는 증상이 없어졌구나….

나는 더 이상 내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등산이나, 뜀뛰기를 해도 심장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다. 덕분에 내 몸 추스르기에 전전긍긍하기보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책임을 지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그럼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던 내가, 뭐든지 열심히 하는 아이, 웃음소리가 참 씩씩한 아이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理の者が?理の生を生きる -?で永遠に生きるのか、心で永遠に生きるのか


?理の者が?理の生を生きる

生とは、存在していることであり

生とは、自らの役割を果たすことにある

人の役割とは、?理の人となり

本?の世界で?と光になることである

本?の世界のために生きる者が役割を全うする者だ

だから自己中心的な生活を

?理を中心とする生活に?えるべきなのだ

その?に福を積み

その?に?を蓄えるべきなのだ

そうした生き方のみが「存在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り

そうした生き方のみが?理の生だ

人を生かすことが福の中の福である

多くの人が、あらゆる人が生きられるようになることほど素晴らしいことはないではないか

人間の人生と人間が抱えている一切が?像であるのを悟った者だけがそのように生きるだろう

?理となった者はそのように生きるだろう

?で永遠に生きるのか

心で永遠に生きるのか

この世に存在するあらゆる物質の中で、永遠なものは一つもない。現に今この瞬間にも宇宙では星が消滅したり、また誕生したりしている。最も長い?命を持つとされる星でも、その?命は50億年から140億年だという。この地球も星であり、月も太陽も同じである。

つまり、いつかは無くなるものである。

人が永遠に生きるのを確認した者はいるのだろうか。動物が永遠に生きるのを確認した者はいるのか。万象も山川草木もみな移ろい、いつかは無くなることが?理ではないか。

この世に生まれた万象万物がその姿形のままで永遠に生きる方法。それは、?理である大宇宙の心と?に生まれ?わることである。そうしてのみ、その?と魂が、宇宙本?の存在の?で永遠に生きられるようになる。この?が無くなることは?理であり、永遠に生きられるのは?理となった宇宙の心と?だけなのだ。

非物質的??である創造主の?と魂に生まれ?わった者のみが永遠に生きられるだろう。

非物質的??である本?の?で本?とひとつになった者のみが?理だ。だから永遠に生きられることだろう。

本?の?魂のみが永遠に生きられるのである。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この世界に生きずに、永遠なる幸福の?へ行って生きよう」「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청년 소셜 벤처 여행사 ‘공감만세’ 고두환 대표

렌터카보다는 현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박 업체를 이용한다, 현지 음식을 먹으며 여행 경비의 대부분을 그 지역에 돌려준다. ‘나’만의 세계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

일곱 명의 20대 청년들로 구성된 ‘공감만세(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가 진행하는 공정한 여행 프로그램의 기본이다.

공감만세 대표인 고두환(28)씨가 ‘공정여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제대 후였다. 태국과 필리핀에서 해외 통신원, 시민단체 활동 등의 경험을 쌓는 동안 관광에 경제의 큰 부분을 의지하는 나라들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게 된 것. 또 관광객들은 대자본이 만들어낸 시설 속에서 즐기다 돌아가니, 지역 경제에 크게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2009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공정여행을 기획하고 꾸리는 ‘공감만세’를 시작했다. 공정여행의 첫 장소로 필리핀 이푸가오주의 작은 마을 바타드를 선택했다. 그곳에는 세계 8대 불가사의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계단식 논이 있었고, 그 절경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곳 역시 개발과 관광화로 인한 폐해가 심각했다. 고두환씨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다.

“‘관광객이 여러분의 논을 밟아 무너뜨릴 때가 있으니, 그것만큼은 복원하고 가겠다’ ‘외부인의 산장 대신 당신들의 집에서 지내고 숙박비를 마을에 기부하겠다’… 그런 이야기를 했죠. 처음엔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사기꾼’인 줄 알았다는 분들도 있었다더라고요.”

2010년 1월, 마침내 공정여행의 첫 발을 내딛었다.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산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라는 주제 아래 7박 8일간 16명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이푸가오족에게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듣고, 발루이(baluy)라 불리는 전통 가옥에서 머물며, 이푸가오족의 먹을거리로 식사를 했다. 경치를 보고 즐기느라 파괴된 계단식 논의 복원 작업에도 참가하고, 도와주고 안내해준 주민들과 바타드식 전통 축제도 벌였다.

그렇게 모든 여행 일정이 끝났을 때였다. 마을의 토박이 한 분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네가 처음 이곳에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고 했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공정여행이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 테지, 친구?”

이후 그해 필리핀은 물론, 서울 북촌과 충남 공주 등 국내까지 모두 26차례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또한 한국 사람 10명이 떠날 때 현지인 1명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나눔여행’도 기획했다. 빈민촌 지역을 배회하던 필리핀 소녀 조나는 나눔여행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여행을 다녀온 후, 빈민촌 공부방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주민들의 추천으로 장학생이 되어 대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여행이 그녀에게 꿈을 심어준 것이다. 이렇게 여행 수익금의 일부로 정서 치유와 더불어 여행의 기회를 준 그 지역 사람이 2010년 한 해만 26명에 이른다.

‘공감만세’를 이끌어오는 일년 반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고두환씨.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공정여행을 향해 ‘go~’ 할 계획이다.

취재 최창원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미향, 고두환, 이영민, 이선희, 이성용, 조수희, 이후성씨.

‘공감만세’는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2010 고용노동부 소셜벤처 경연대회 우수상,

2010 한국청년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http://cafe.naver.com/riceterrace

한 번쯤 쉬어가 보세요,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이희택 35세. 중도일보 기자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높은 곳만 바라보며 달려왔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 저렇다, 이런 소린 절대 듣지 말아라!”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입니다. 그 말들은 열등감과 욕심의 뿌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하게, 더욱 강하게, 나를 담금질하며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약해 보이면 안 되기에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무엇이든지 잘할 것 같은 사람이 되어갔지만 남는 건 ‘지독한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쌓여온 열등감은 자만심과 오만함, 독선의 탈을 쓰고 나를 뒤덮기 시작했고, 친구들조차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하고 있어도 허무하고 공허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웃지 못하지?’ 탁 트인 하늘, 멀리 보이는 산자락, 솔 향을 맑게 풍기는 소나무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즈음 누나가 마음수련을 이야기했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수용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내 모습. ‘욕심’ 때문에 스스로 괴롭혀왔던 내 삶을 돌아봤습니다. 굳이 가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채워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배우며, 철옹성 같은 나의 벽들도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던 시간, 처음으로 가졌던 그 휴식은,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주었습니다.

시무룩하거나, 굳어 있거나, 혹은 비판하고 있던 내가, ‘분위기 메이커’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발굴해야 하고, 마감시간에 맞춰야 하는 기자생활.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주일간의 마음 비우기는, 진짜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너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배우고 싶다” 는 동료들. 결국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얻음과 높음’이 아니라 ‘버림과 낮음’이었던 겁니다. 자신을 버릴 줄 알고, 낮은 곳에 설 줄 알 때, 세상은 저절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가파른 인생길에서 한 번쯤 쉬어가기 그리고 비워보기, 그 진정한 휴식은 우리 삶을 새롭게 바꿔줍니다.

쉼, 신이 주신 축복의 시간

글, 사진 김민수 50세. 들꽃교회 목사

그 어디에도 ‘달려가자!’라는 구호만 있지 ‘쉼’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가던 길 멈추고 하루에 한 번씩 하늘을 봅시다.” 혹은 “봄이 오면 꽃님들과 눈맞춤합시다.” 이런 이야기는 없고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니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뛰어갑시다” 하는 유의 이야기들만 넘쳐납니다. 그런 이야기에 벌써 숨이 찹니다.

우리는 ‘쉼’의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인식되어 쉼의 시간조차도 남들이 먼저 자기를 앞질러 갈까 봐 불안해하면서 온전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쉬지 않고 날아가는 새가 없고, 쉼 없이 날아다니는 나비가 없습니다. 쉼의 시간을 통해서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또 다른 하늘을 날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햇볕 따가운 여름날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맥문동, 그들도 오랜 쉼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어느 해의 여름날처럼 보랏빛 꽃밭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기들이 곤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부쩍 자라듯이, 자연은 겨울이라는 쉼의 계절이 있어 더욱 풍성해집니다.

직장인들이 ‘강박증’처럼 자기 계발을 하고 있어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쉴 때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습니다. 쉼의 시간에도 오로지 일 생각뿐인 사람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쉼을 통해서 떠밀려 살아가는 삶에서 나 스스로 걸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 안에서 혁명전야와도 같은 꿈틀거림이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쉼’이란 부담이 없어야 합니다. 천천히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이라면 더 좋고, 먼 길을 가더라도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나서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그 쉼의 장소가 때로는 재래시장일 수도 있고, 도심 한복판일 수도 있습니다.

‘쉼’은 자연인인 자신과 하나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할 것’을 강요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잃어버린 지금 여기에서의 삶, 쉼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쉬는 날만 되면 흙을 만지러 시골로 갑니다. 가끔은 그야말로 뼈 빠지게 일을 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일주일 내내 사무실에 앉아 머리로만 살아갔으니 몸을 움직여주는 것이 쉬는 것입니다. 육체노동을 통해서 흘린 땀방울 속에 나를 위협하는 독소들이 하나 둘 땀방울과 함께 빠져나감을 느낍니다.

남들이 보기에 편안한 쉼보다는 자신이 가장 편안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쉼입니다.

삶이란 여행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배편을 이용하는 것이 볼거리가 많고, 차편을 이용할 때보다는 도보로 여행할 때 더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천천히 도보로 여행하려고 작정을 하면 많은 짐을 가지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여행길이 가벼워진다는 것이지요. 삶이라는 여행길에서도 이러한 법칙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느릿느릿 가면 다 빼앗길 것만 같고, 낙오될 것 같지만, 빨리빨리 가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휴가 계획이 아닌 쉼의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하루에 한 번쯤은 자신을 위해 쉬는 시간을 계획표에 넣어 보십시오. 그러면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쉼의 시간,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시간입니다.

진짜 쉰다는 것은

마음 비우며 위암의 고통 이겨낸 대검찰청 수사관 송기현

2006년 나에게는 절실히 휴식이 필요했다. 당시 나는 큰 사건 하나를 맡아 몇 개월간을 밤낮으로 수사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지쳐 있었다. 사건이 해결되고, 잠시의 휴식. 하지만 또다시 사건은 밀려왔다.

스물아홉, 처음으로 수사관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치밀하고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서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은 흥미로운 것이었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고소인과 피고소인 모두 자신들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최선을 다해 수사한 결과, 진실을 밝혀냈고, 양쪽의 누구도 승복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10년 이상 수사관으로 일하며 회의가 들 때가 많았다. 보는 것이라고는 인간의 흉한 모습들. 화가 나고 짜증 날 때도 많았고 이게 인간으로서 할 일인가, 이게 내 인생의 전부인가, 이게 과연 행복한 삶인가, 고민이 많았다. 집에서나마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지만 퇴근 후에도 미해결된 수사에 대한 압박은 이어졌다. 특히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있을 땐 더욱 심했다. 제대로 한번 쉴 새 없이 곧 또 다른 사건이 이어졌고, 하루 24시간, 일주일, 한 달…. 오직 범죄 수사라는 생활 속에 빠진 삶이었다.

그러던 작년 중순이었다. 몸의 상태가 이상했다. 먹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속이 아프면서 토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보니 위암 말기였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이다 보니 위암으로 발전했던 거였다. 결국 나는 위의 7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어리석게도 이렇게 되기까지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이다.

수술을 하며 두려움보다는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쉬고 싶었는데 이제야말로 정말 쉴 수 있겠구나 하는. 내가 만약 마음수련을 몰랐더라면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고통의 와중에 나에게 떠오른 것은, 10년 전 친구 소개로 경험했던 마음수련이었다. 마음을 비우며 경험했던 더없는 편안함과 행복, 그리고 감사함. 일에 쫓겨 오랫동안 잊고 살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의 마음을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위암이라는 병도 오랫동안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생긴 병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알 수 있었고, 내 마음을 비우면 이 병의 뿌리도 사라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병가를 내고 바로 마음수련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마음을 비워보자고 결심했다. 내 삶의 필름을 돌리며 사진 한 장 한 장을 버렸다. 버리면서 보니 세상에 나처럼 자존심이 센 사람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어떤 수사도 완벽하게 해내야 했고, 더 높은 직위에 올라야 했고, 나보다 더 잘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 더 열심히 하려 했다. 그것은 열등감이었다. 초라해 보이는 내 자신을 잘나 보이게 하고 싶어, 지키고 싶어 그토록 자존심을 부렸던 거였다. 열등감, 자존심, 자만심, 비교하는 마음, 일 걱정, 집안 걱정이 나의 숨구멍을 막아가고 있었다. 나보다 높아 보이는 사람과 늘 비교하고, 움츠러들었던 거짓된 나의 삶, 꾸며진 나의 삶, 포장된 나의 삶….

내 스스로 갑옷을 입었고 무겁다고 생각하면서도 벗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잘 보여야 된다, 잘해야 된다…. 그렇게 내가 만들어놓았던 기준, 규범, 관념, 관습의 틀들을 놓으면 놓을수록 마음이 너무 가벼워졌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 정말 숨 쉬는 거구나, 그게 너무 감사해서 또 눈물이 났다.

어느 순간 내 병의 뿌리까지도 싹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픈 사람들은 다 아픈 이유가 있다. 속이 아픈 사람은 속이 아픈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산다. 내가 살아왔던 과정들이 모두 다 병을 만든 뿌리였다. 내가 집착으로 만들어놓은 병은 그 집착을 놓는 순간 후루룩 빠져나가버렸다.

수사관으로서 항상 진실을 찾아 헤맸건만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버려도 버려도 남아 있는 것, 영원히 변치 않는 것, 그것이 진리였다. 그것은 내 스스로 비빔밥처럼 만들어놓은 그 복잡한 마음을 비웠을 때라야 나타나는 생명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 가니 정말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냥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보는 사람마다 사랑스러워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미소가 나왔다. 나에게는 너무 큰 변화였다.

근접하기 힘든 사람, 그것이 수사관으로서 어느새 만들어진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 내가 잘 웃으니 사람들은 “바람이 쌩쌩 불더니, 정말 너무 많이 바뀌었다”며 놀라워했다. 갑옷을 벗어버린 나의 모습은 내가 봐도 참 좋아 보였다. 환골탈태한 듯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바뀌었다는 것도 느껴졌다. 참 놀라운 변화였다.

9개월간의 긴 휴식을 마치고 지난 5월 다시 복직했다. 예상대로 병원에서도 이제 더 이상 걱정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휴식이란 내 몸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에 달려 있는 거였다. 내 마음이 근본에 가 있을 때, 내가 쌓아온 마음에서 벗어나 그 본래의 마음에서라면 똑같은 생활 속에서도 저절로 쉬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지금은 머리를 쓰는 시대가 아니라 마음을 여는 시대다. 산을 가든 바다를 가든 복잡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절대로 쉴 수 없다. 진짜 쉬는 것이 무엇인지 그 환희와 평화를 맛보고 싶다면 꼭 한번 마음을 비워보시라 권하고 싶다. 진정한 휴식이란 ‘수고하고 짐 진’ 나에게 해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송기현님은 현재 대검찰청 검찰방송팀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검찰 직원, 가족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진실을 알리는 방송인데, 그 취지가 좋아 검찰청 직원들 대상으로 직원을 모집했을 때 지원하여 일하게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