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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리, 평화와 환경을 이야기하는 14살 소년

‘재생 에너지만 쓰는 아름다운 초록마을에 공해박사 일당이 침투한다.
그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그린맨(GoGreenMan)이 나타나 싸운다.’
겨우 열 살의 한국계 미국인 소년이 인터넷에 올린 이 이야기는 미국 전역에 알려지며 화제가 되었다.
이후 소년은 미국 의회, 한국, 필리핀, 몽골 등 전 세계를 다니며, ‘고그린맨’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다.
“나무를 심어요” “재활용을 해요” 작고 귀여운 아이의 순수하고 간절한 메시지는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으며,
2010년 8월 비무장지대(DMZ)에 남북한 ‘어린이평화숲’을 만들자는 편지를 전하기 위해 북한에 방문했을 때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어느덧 14살 청소년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은, ‘환경 운동가’ 조너선 리(Jonathan Lee)를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우리는 자연의 큰 변화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초래하는 파괴는 막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막화를 방치해선 안 됩니다. 지구를 도와주세요!”

2011년 10월, 경남 창원시에서 열린 제10회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총회의 홍보대사로, 한국을 찾은 조너선 리. 그는 총회에 맞춰 195개국 전 세계 정상들에게 ‘사막화 방지’를 위한 협력을 부탁하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특히 조너선이 강조한 것은 사막화의 위험에 처한 북한에 대한 산림 지원이었다.

지금 조너선이 제일 크게 준비하고 있는 것은, ‘DMZ어린이평화숲’을 만드는 것이다. 나무를 심어 북한의 사막화를 막고, 밤나무 같은 유실수에서 나온 열매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더불어 남북한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 시작으로 2012년 3월 21일, 판문점에서 남북한 어린이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평화의 날’ 행사를 준비 중이다. 나아가 매년 3월 21일을 ‘세계어린이평화의날’로 만들자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DMZ어린이평화숲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요.

남쪽과 북쪽의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평화의 장소를 만들자는 거예요.
60년 동안 갈라져 있어서 남북의 어린이는 만날 수도, 함께 놀 수도 없었잖아요.
우선 3월 21일에 남북한 어린이들이 만나고 이날, 함께 ‘어린이평화숲’도 조성했으면 좋겠어요. 그날은 새봄이 시작되는 ‘춘분’이고 둘(2)이 하나(1)가 되는 통일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로 정했어요.

2010년 8월에는 북한에도 다녀왔잖아요.

조금 긴장도 됐지만 용기를 내서 평화숲을 제안하고 싶었어요. 북한 고위층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이 문제를 상의했어요. 어른들은 남북한의 다른 점을 말하지만 제 눈에는 같은 것만 보였어요. 말, 춤, 음식 같은 거요. 이렇게 같은데도 60년 넘게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슬펐어요. 북한에 다녀온 후, 한반도와 한국 전쟁에 관해 더 많이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어요.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 왜 평화가 찾아오지 않고 있을까? 천만의 이산가족이 있다는데, 어떻게 60년이 지나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끼리 떨어져 살 수 있었을까? 이산가족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만나는 게 제 소망이에요.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통일이 되고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어요.

그해 11월에는 중국 천안문에서 1인 시위도 했는데, 무섭지 않았어요?

그곳에 걸어가기 전까지 무서웠는데 일단 그 장소에 서니까 용기가 났어요. 남북한 문제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용기가 났어요. 북한에 다녀온 후 중국이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큰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한국, 미국 대통령에게는 같은 뜻을 담은 편지를 전달했는데, 중국 대사관의 거절로 후진타오 주석에게는 편지를 전달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후진타오 주석에게 평화숲의 뜻을 전하고, 또 한반도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환경 운동을 하다가 남북의 평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07년 6.15공동선언 7주년 기념식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어요. 그분은 남북한 사이가 평화롭기를 무척 바라셨는데, 거기서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남북한의 갈등을 해결하는 동시에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길을 생각하다 어린이평화숲을 떠올리게 됐어요. 그리고 그때 전쟁이야말로 지구와 환경을 파괴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라는 걸 알았어요. 환경을 위해서는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세계 어린이 평화 운동을 하게 됐어요. 이제는 더 이상 어린이들이 어른들이 만든 전쟁과 분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너선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0살 때 환경다큐를 보면서였다. ‘빙하가 녹고 원시림이 파괴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각국의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한다’는 내용의 다큐였다.

조너선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지구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고그린맨(GoGreenMan)이었다.

친환경 에너지 무기를 사용해 공해박사 무리들과 싸우는 환경 슈퍼 영웅 고그린맨. 2007년 초,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기 시작하자 두 달 만에 방문자 수 10만 명이 넘을 만큼 미국 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CNN 등 각종 언론에서 고그린맨을 소개했고, 조너선은 ‘고그린맨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어요, 너무 많은 쓰레기가 지구를 오염시키니 재활용을 해요, 숲과 야생동물을 보호해요….”

아이의 시선으로 본 너무도 쉽고 간단한 해결책. 그리고 소년은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본 미국 남부 지역에 가서 수백 그루의 나무를 심고, 미국은 물론 한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학교를 찾아다니며 환경 강연과 캠페인을 한다. 각국 정상들에게 편지를 쓰고, 1인 시위도 하고, 유엔, 환경 단체, 세계 환경 회의가 열리는 곳 등등 메시지를 알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이런 활동을 하며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 수많은 세계 각국의 인사도 만난다. 작은 아이의 순수하고 간절한 목소리는 어른들을 돌아보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소년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워싱턴타임즈는 소년을 ‘세계어린이환경대사’라 명명했고,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3월, “자기 힘으로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아는 젊은이들이 있다. 너와 같은 청소년이 내게 영감을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격려의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조너선이 그린 고그린맨 동화. 바람 에너지나 태양 에너지처럼 재생 에너지만 쓰는 초록마을. 이곳엔 정원 가꾸는 걸 좋아하는 물의여인, 마음씨 고운 예쁜이 하나, 재활용로저 등이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산다. 그런데 이들의 행복을 질투하는 무리가 있다. 바로 공해박사 일당들. 순간순간 벌어지는 악당들의 음모에 고그린맨과 초록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싸운다.

어린이 ‘1인당 1년에 나무 1그루 심기’ 운동, 패스트푸드점 재활용 캠페인 등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죠.
어떻게 그런 활동을 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전 세계 모든 어린이가 일년에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10억 그루가 늘어나요. 어린이들 한 명 한 명은 큰 힘이 없지만 작은 움직임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어요. 그리고 2009년에 빨리 밥을 먹으려고 패스트푸드점에 갔는데, 다 먹고 나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쓰레기를 보고 경악을 했어요.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매일 땅속으로 들어갈지. 그 쓰레기들을 재활용만 해도 얼마나 많은 연료를 후대를 위해서 아끼게 될지. 그래서 시작했어요. 맥도널드 앞에서 재활용을 하자고 제안하는 피켓을 들고 평화 시위도 하고, 패스트푸드 회사에 편지도 쓰고, 비디오도 만들었어요. 한국은 미국과 달리 어디서나 재활용이 잘되고 있어서 미국에 한국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식당이 재활용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어요.

조너선처럼 모든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지는 않지요.

그건 당연한 거 같아요. 그렇지만 지구를 위해 어린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요. 어린이들이 환경을 배울 때 진심으로 즐거웠으면 좋겠고, ‘고그린맨’ 이야기를 쓴 것도 그래서였어요. 그동안 많은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예전보다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는 이메일을 전 세계 아이들에게서 받고 있어요.

조너선의 어릴 적 가족사진. 어머니 멜리사 리, 여동생, 아버지 이경태씨와 함께. 조너선이 전 세계를 다닐 때면 아버지가 늘 함께한다. 부모님은 언제나 조너선의 생각을 존중해주지만, 때로 해롭다고 판단한 것은 엄격하게 금지한다고.

누구든지 환경 보호를 위해 작게나마 실천했으면 하는 게 있다면요.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나 환경을 지킬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안 쓰는 전등이나 컴퓨터 끄기, 양치할 때 수도 잠그기, 재활용하기 같은 것들요. 저도 되도록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요. 재활용 철저히 하기 등 자잘한 일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동안 참 많은 활동들을 했어요. 힘들거나 지친 적은 없나요?

힘든 거라면 비행기 타는 시간이 힘들고, TV 출연할 때 메이크업하는 것도 좀 힘들어요. 그런데 저의 메시지를 알릴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지구의 손상을 방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적대요. 전에는 제가 비디오게임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환경의 중요성을 알면서 그만두었어요. 전기를 쓰는 대신, 환경을 돕기 위해서요. 그때 든 생각이, ‘나는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공해박사에게 지구가 파괴된다면, 밖에서 놀 수가 없잖아’였어요. 세상이 오염되면, 모든 동물과 식물과 저희 인간들 또한 파괴될 거고요. 환경을 지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지키는 거더라고요.  다 함께 지구를 지켜 나가요.

조너선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홈스쿨링과 학교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한다. 고그린맨의 이야기는 20편까지로 끝을 맺고, 청소년이 되어가면서 ‘세계청소년환경연대(I.C.E.Y)’를 만들었다. 지금은 2012년 3월 21일 행사를 준비하며, 한국의 어린이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국어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한다.

조너선이 이런 활동을 할 수 있기까지는 부모님의 도움이 많이 있었지요.

부모님은 언제나 자유롭게 관심 있는 것을 할 수 있게끔 해주셨고, 의사를 존중해주셨어요. 북한 입국, 천안문 광장 1인 시위 등 때로 위험해 보일 때는 걱정하셨지만 결국지지해주셨어요. “네가 어떤 것에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항상 너를 지지한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평화로운 일이라면 말이다” 하면서요. 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계획, 또래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계속 환경 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고. 우리도 조만간 어른이 되잖아요. 우리들이 미래가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변화를 만들 수 있어요. 우리들부터 환경 보호에 나선다면 20년 후의 세계는 아주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을 거예요. 평화롭고 전쟁이 없고, 모두가 서로 돕고 행복한 세상으로.

2011년 11월, 미국으로 돌아간 조너선은 또 한 번 미국 유엔 본부 앞에서 ‘한국전쟁 종식’ ‘3월 21일 세계어린이평화의날’ 지정, ‘DMZ어린이평화숲’ 조성 등을 주장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온통 지구를 지킬 생각으로 바쁜 소년, 생각을 하면 거침없이 실천에 옮기는 소년, 하지만 의외로 부끄럼도 많이 타는 소년, 조너선.

인터뷰 내내 실제로 이 소년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우주가 보낸 ‘고그린맨’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의 말처럼 한 명 한 명의 마음속에 ‘환경 사랑과 평화’가 새겨진다면 곧 이 지구가, 이 세상이, 모든 어린이들이 행복한 날들이 다가오지 않을까.

조너선, 지구에 와줘서 정말 고맙다. 지구를 잘 부탁한다, 고그린맨.

조너선 리(Jonathan Lee, 한국명 이승민)는 1997년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열 살 때 환경 다큐를 보고 충격을 받은 후, ‘고그린맨’이라는 과학판타지동화를 쓰며 환경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세계청소년환경연대 대표이며, 저서로 <고그린맨 VS 심술통 떼돈 공갈 팍팍써(판타지 과학환경동화)>(삼성출판사)가 있다. www.gogreenman.com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도전해 본다면….

 

‘난 약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마음부터 무조건 버려보겠습니다

정진미 33세. 인천시 계양구 작전동

정신없이 살다 보니, 2012년도 이제 바로 코앞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2012년 1월 주제, ‘무조건 무조건’ 꼭 지키고 싶은 것을 편지글로 써봅니다. 이렇게 다짐이라도 하면, 약한 제 자신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남편 없이 세 살 된 딸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결혼 전 사무직 일을 하며,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사는 그런 여성이었던 저는 결혼해서 아이 키우며 그렇게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 후 생각지도 못했던 고비가 찾아왔어요. 시댁의 무리한 요구, 작은 스트레스조차 견디지 못하는 남편, 그런 여러 일들이 맞물리며 아이가 돌도 되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맞춰서 살려고 했던 저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요.

그때부터 아이를 키우며 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우선 학원에서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 올해 4월, 언니와 함께 가게를 차렸어요. 한부모 가정이어서 받을 수 있는 대출 등등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하여 차린 거지요. 숫기도 없고,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성격도 아닌 제게 주변에서 절대 장사는 못 할 거라고 했지만, 먹고살아야 하기에 힘을 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던 저는, 가게를 하며 몸살도 많이 났어요. 물을 많이 만지다 보니, 손가락에 물혹이 생겨서 수술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이렇게 약한지. 하지만 몸이 아파도 가게 문은 열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게 문을 엽니다. 청소를 하고, 웃으며 손님을 맞습니다. 물혹 수술 후 손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붕대를 풀고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데, 아이한테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꾹 참습니다.

아프면 쉬고, 눈물 나면 그냥 울던 저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이제는 의지할 곳도 없고, 아이와 살아가는 것은 온전히 저의 몫이 되었으니, 그렇게 뒤늦게나마 철들게 만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신세를 생각하면 온갖 걱정이 올라올 때가 많습니다. ‘슬프다. 맘이 너무 아프다. 죽고 싶다. 그럼 아기는 어쩌지. 참자.’ 또 어떻게든 해보려 하지만, 늘 나의 하루는 ‘할 일이 많다. 나 혼자 어떻게 하지. 왜 나 혼자 해야 해! 몸만 건강했어도 견뎌냈을 텐데. 슬프다’로 결론이 날 때가 많았어요. 이런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내 문제가 뭘까 곰곰이 돌아보니, 늘 ‘몸이 약하다, 아프다’라는 생각이 문제였음을 알았습니다.

2012년에는 이런 마음을 무조건 버리고 싶습니다. ‘난 몸이 약해. 늘 아프고 기운이 없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마음. 항상 엄마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엄마가 해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는, 울 아기 태희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살 수가 없어요. 때로 힘들어서 아이를 밀쳐내고, 힘들고 아픈 몸이라 겨우 안아주는 게 아니라, 온전히 태희를 사랑하는 엄마의 맘과 몸으로 안아주고 싶습니다.

예전에 마음수련을 잠깐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는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결국 못 하고, <마음수련> 책이나마 보고 있네요. 책에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버리고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도 벗어나고 싶다 생각하며 울컥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제 자신을 극복해볼게요. 나중에 아이가 크면, 아이와 함께 마음수련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이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받은 상처가 많을 것 같아서입니다. 무조건 하다 보면 할 수 있겠죠. 시작해 보겠습니다.

 

김점선 작 <닭> Oil on Canvas.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 무조건 사직서를 내다

송영대 행복경영연구원 원장, ‘배워서 남주기’ 웹진 발행인

무조건 저지르는 것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나의 인생이 바로 그러했다.

2010년 7월 31일, 나는 15년간의 직장 생활을 무조건 그만두었다. 전혀 준비된 것은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99%의 사람들이 반대했다. 그동안 쌓아온 IT 전문가로서의 경력, 그리고 대기업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희망을 전하는 스토리텔러 강사로서, 칼럼니스트로서, 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1인 기업가로서 활동을 한 지 16개월이 되었다.

이렇게 내 인생을 바꾸게 된 데에는 2009년 8월, 소설가 김홍신 선생님의 <인생사용설명서>라는 강연회를 듣게 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첫째,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것이다. 둘째, 남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셋째, 나를 위한 삶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살아라.”

김홍신 선생님의 그 말씀이 어쩐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았나? 어떻게 살았나?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나?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잦은 다툼을 보며 자랐다. 부모님의 다툼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퇴근 후, 유흥가를 배회하며 술자리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술자리를 찾는 횟수가 늘어갔다. 회사, 술집, 또 다음 날이면 회사, 술집, 당구장, 그다음 날은 또 술, 술…. 낮에는 철저히 일을 했기에 경력이 쌓이면서 IT 분야의 엔지니어로서 인정도 받았지만 날이 갈수록 내면의 갈등은 커져갔다.

김홍신 선생님의 강연은 그런 내 삶에 큰 충격을 가한 것이다.

더 이상 술로 인생을 허비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대신, 내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점차 나의 동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술집 대신 강연장이나 서점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동선을 단순화하면서 내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고민하던 중,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매주 월요일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지인들이 한 주를 활기차게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의 좋은 문구, 유머, 내가 들은 강연의 내용을 담았다. 2009년 11월부터 시작해 한 주도 빠짐없이 하여 108회를 했다. 이제는 월요일이 기다려진다, 글을 읽으며 동기 부여가 된다고 응원해주는 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이장우 박사님의 자기 계발을 위해서는 SNS(트위터, 페이스북 등)를 해야 한다는 말씀에, 트위터를 시작했다. 트위터 또한 내가 먼저 다가가고, 먼저 들어주고, 먼저 글을 인용하고 도와줄 때 오히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어느새 십만 팔로워가 넘는 파워트위터러가 되었다.

김홍신 선생님의 강의 후 1년 동안 나의 인생 사용 동선을 바꾸어보면서, 나는 나의 인생의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 새롭게 도전을 하였기에 아직 수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수익이 없기에 당연히 배고픈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 꿈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기에, 그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이 있기에 행복하다.

일전에 같이 직장에 다녔던 분들을 만나면 눈빛이 달라졌다고 한다. 활기 넘쳐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혹시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드리고 싶다.

“오늘은 내 남은 삶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늦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셨다면 지금 바로 무조건 시작하세요!”

 

김점선 작 <Spring has come> Digital printed. 49×39cm. 2004.

 

열정과 욕심 사이, ‘무조건 도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

정선아 24세. 대학생.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2012년, 이제 곧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나의 대학 4년간은 어쩌면 무모하리만치 많은 활동과 시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학창 시절 참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 눈치, 입시에 대한 압박으로 많이 참아야 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해보기로 했다.

1학년 때는 우선 신문방송학과라는 과의 특성을 살려 광고연구회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학교생활에 재미가 붙었는지 모의국무회의, 과 축구소모임, 행정고시준비반 등등 여기저기 들어오라는 대로, 재밌어 보이는 것은 무조건 무조건 들어갔다.

그러고 2학년이 되어, 1학년부터 쭉 해오던 광고연구회 활동과 함께 학교 졸업준비위원회 취업국장, 과 대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고연구회에서 광고 공모전을 나가기 위해 팀 구성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나는 팀장을 맡게 되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공모전 도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급기야 동시에 세 개를 진행할 때도 있었고, 일년 동안 열세 개의 공모전에 나가기도 했다. 덕분에 수면 시간은 2시간, 집에 들어왔다 잠시 자고 다시 나가는 게 일상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뭐 하나라도 소홀히 하긴 싫었다. 팀에서 같이 무슨 자료를 찾아오자 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100%가 아니라 200%를 찾아서 갔다. 한번은 SK에너지 공모전 준비를 할 때였는데, 인터넷만으로 조사하는 게 부족해서, 직접 시청의 담당자들을 찾아가서 실태를 조사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주유소에 서서 소비자들에게 어떤 점이 좋은지, 안 좋은지 인터뷰를 하며 기획안을 짰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그냥 그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젊을 때, 뭐든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SK에너지와 삼성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을 때는 너무 기뻤다.

물론 열심히 해도 떨어질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성공률이 5%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열정을 다해 이것저것 무조건 시도를 해보면서 나에게도 잠재된 능력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을 느껴갔다. 그저 대충 하다가 힘들면 쉬고, 그런 게 나인 줄 알았는데, 나도 ‘하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해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 왜 이렇게 바쁘게 이것저것 다 맡아서 힘들게 사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한 곳에 집중 안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얕게 있다가 사라지는 날 보며 좋아해주지 않는 선배들도 있었다. 어쩌면 처음에는 나의 이런저런 시도는 억눌렸던 것의 표출, 그리고 나를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덕분에 점차 욕심과 열정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고, 앞으로 내가 정말 집중할 수 있는 그 한 곳을 찾아가고 있었기에.

 

김점선 작 <나들이> Silkscreen. 82×65cm. 2006.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도전해 본다면….

 

2년 2개월, 짧았지만 영원할 우리의 사랑

이금자 49세. 대구시 북구 태전2동

2009년 5월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너무 심각해서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그 이후 2년 2개월이라는 짧디짧은 생을 살다 지난 7월 떠나 버렸다.

25년 전,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며 남편과 난 자주 싸웠다. IMF가 터진 후 일이 안 풀려 우리 부부 사이는 더 나빠졌고,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땐 그렇게 싸웠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수술을 받을 때 병원에서는 아예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다행히 열하루 만에 깨어났다. 남편이 쓰러지고 보니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이 모든 게 나의 부족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간호에 정성을 다했다. 처음 쓰러졌을 때는 나도 못 알아볼 정도였는데, 병원에서도 놀랄 만큼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다. 100일 정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씻겨주고, 면도해주고, 손톱 발톱 깎아주고, 밥도 떠먹여주었다. 갓난아이 걸음마 떼듯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도 가르쳐주었다. 그 덕분인지 남편은 혼자 밥도 먹고 혼자 걸어 다닐 정도가 되었다. 기특하게도 대학생인 두 아이도 아빠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고, 늦은 밤 피곤한 내색 하나 없이 집에 들어서는 아이들의 손에는 아빠가 먹고 싶다고 한 빵이나 치킨이 들려 있었다.

남편이 조금씩 좋아지자, 나 역시 잠깐씩 친척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날이 덥다 춥다 말할 시간도 없었고, 아플 시간도 없었다.

아이들도 나도 힘든 줄 모르고 남편에게 모든 정성을 다했다.

뇌 손상으로 인한 치매 때문에 대화가 조금 힘들었지만 우리 가족은 의사소통이 다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인들, 친척들이 남편과 멀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겐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남편은 하늘이었고, 25년 지기 친구였고, 막 걸음마 배우는 사랑스러운 늦둥이(?)일 만큼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남편을 보며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도 새삼 깨달았다.

2011년 초, 딸애가 졸업을 하고 자리도 잡으면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2011년 6월, 결혼 25주년 기념일엔 딸이 케이크에 선물을 사와 자그마하게 가족 파티도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괜찮아 보였는데…. 남편은 의식 불명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젊었을 때 못 해준 사랑, 내 살아생전에 무조건 쏟아 주리라 마음먹었는데…. 이제 겨우 2년 2개월이 되었을 뿐인데…. 나의 사랑이 여전히 부족했던 것일까.

돌아보면 남편은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지만 우리의 첫 데이트 날이 언제였는지, 내 생일이 언제인지, 결혼기념일이 언제인지, 기억했다가 아무리 싸우고 났어도 꼭 챙겨주었다. 설거지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는 것도 잘했다. 외식이라도 하면 항상 엄마 먼저, 애들 먼저, 그다음에 자기가 먹었다. 그게 그 사람의 사랑이었는데…. 그때는 살기가 바빠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고마워할 줄도 함께 나눌 줄도 몰랐다.

지금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이제 남편 없이 새해를 맞아야 하는구나, 그 허전함에 어쩔 줄 모르다 불현듯 알았다. 아직 내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 내 마음 깊숙이 아직도 그에 대한 사랑은 차고 넘치지 않는가. 남편은 곁에 없지만 사랑은 남았다. 남편을 향한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한다.

 

김점선 작 <물고기와 나> Digital printed. 49×39cm. 2005.

 

영어! 기다려라, 몽땅 외워버릴 테니

최윤성 43세. 직장인.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중학교 1학년 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영어였다. 영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러나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이 한 학기도 지나기 전, 학교를 관두시면서 나는 영어의 마법에서 풀려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영어책을 완전히 덮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5살 때부터 한국 무용을 시작한 덕에, 체육학과에 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깊은 회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것저것 배워보고 고민한 끝에 앞으로 세상은 글로벌해질 것이니, ‘해외 무역’ 일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이 형용사와 명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바닥 너머 더 아래 바닥이라는 거였다. 이제 영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의 진로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나는 당시 가장 유명한 영어 학원에 무작정 등록을 했다.

첫 영어 수업.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이며 그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입도 뻥끗 못 하고 일주일이 지나갔다. 너무나도 창피해서 밤마다 동생에게 하소연하며, 울고 또 울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따라가기는 했지만, 졸업 시즌이 되었을 무렵까지 내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기로 영어를 배우기는 필리핀이 괜찮다”는 엄마 친구분의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필리핀으로 가기로 했다. 대학 졸업 일주일 후 나는 필리핀에 와 있었다. 처음에는 창피하기도 하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국인이 영어 못하는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인가, 하면 되는 거야, 무조건 해보는 거야” 하며 부딪쳐보자고 결심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어학연수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4시간 동안 대학에서, 오후에는 4시간씩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는 또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나의 공부 방법은 그날 배운 것을 통으로 무조건 외우는 것이었다. 문법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냥 외우고 또 외웠다. 그렇게 해서 내가 열 단어를 알면, 그 안에서 무조건 말을 했다. 문법이 맞다 안 맞다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의 수준을 막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몰랐던 단어나, 숙어는 노트 한 권에 정리를 해갔다. 그걸 매일매일 반복해서 봤다. 집에 와서는 TV나 영화도 계속 보았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니까 점차 귀가 뚫리는 느낌이었다. 점점 자신감도 생겼다. 풍토병으로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보름 동안 앓기도 했고, 화산이 터지고, 가슴께까지 빗물이 차는 천재지변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영어’라는 하나의 목표에 몰입돼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하나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매일매일이 충만했다.

10개월간의 짧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놀랍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어느 수출 회사 해외영업부에 취업이 되었고 그 이후 대기업 해외영업부에 근무하면서 해외를 누볐다. 영어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는 등 모든 의사소통을 영어로 했지만 한 번도 영어가 달렸던 적은 없다.

정말 할 수 없는 거라도 될 때까지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임계치를 넘는 순간 폭발적으로 실력이 뛰어오르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안 돼요”라는 분들이 있다면 감히 말하고 싶다. “무조건 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안 된다는 생각이 안 되게 하는 거”라고.

 

김점선 작 <모란불멸> Digital printed. 39×49cm. 2006.

 

늘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최신호 54세. 집배원.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인천시 화수동에 ‘민들레국수집’이 있다. 7년 전쯤, 그 부근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는데 웬 사람들이 길게 서 있었다. 노숙자들이 밥을 먹으러 온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점심값 칠팔 천 원이 나왔다. 그걸로 계란을 3판 사서 반찬이라도 하라고 그 집에 들여놓아 주었다. 그 뒤로는 매주 한 번씩 점심을 거르고 계란을 사드렸다. 요즘은 그 돈을 모아 일년에 한 번씩 갖다 드리고 있다. 점심을 굶으면 배가 고프지만 참을 만하다. 그리고 내 배가 고파봐야 남의 배고픈 사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운영하는 수사님께 많은 걸 배우게 된다. 그분은 뭘 가지고 가다가, 누구하고 마주치면 그냥 준다.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곳에는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심한 실패를 겪고 노숙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꾸준한 밥 한 끼의 사랑에 다시 자립할 힘을 얻고, 취직도 하고, 다시 가정을 이뤄 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을 줘도 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는데, 수사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늘 한결같다. 그분의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을 보며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배운 것 같다.

재산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고, 욕심을 버리면 풍족해지게 돼 있다는 것도. 욕심을 내면 사람이 거기에 얽매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항상 감사해진다는 것도.

떠올려 보면 내 곁에는 늘 그렇게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분들이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애들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도시락을 모두 들고 나오라고 해서, 커다란 양푼에 비벼서 다 같이 나눠 먹게 하셨다.

할머니는 아침밥을 하시면 첫 그릇을 떠서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따듯한 온기가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후쯤 되어 어려운 사람들이 밥을 얻으러 오면, 그 밥을 내주셨다. 사람들이 자주 왔지만 한 번도 내치시는 것을 못 봤다.

한번은 중학교 때 가출한 적이 있다. 친구 한 명과 전라도 남원까지 어떻게 어떻게 갔는데, 거의 일주일간을 굶다시피 했었다. 하도 배가 고파서 남원 기차역에 주저앉아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시며 “니네 왜 여기 있냐?”고 물으셨다. 사정을 말하니, 아저씨는 곰탕을 한 그릇씩 사주시며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집에 갈 수 있게 기차표도 끊어주었다. 참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생면부지의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주셨던 그 아저씨를 생각하면 찡해진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일터에서, 내가 나이가 있어 힘겨워하면 주변 동료들이 도와준다. 아내도 항상 이렇게 저렇게 챙겨주고, 기도해준다. 아침 출근할 때 신기 좋게 신발을 놔주는 것 하나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 사랑 속에서 살아왔고 그런 사랑을 봐왔기 때문일까. 나에게도 꽤 오래전부터 가져온 꿈이 하나 있다.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아무 규제도 없이, 농사도 짓고 하며, 그냥 느슨하게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것이다. 혼자서 헤쳐 나가기 어려운 세상이라 느껴질 때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전셋집을 팔아서 꼭 그렇게 하기로 아내와도 약속했는데, 지금은 땅값이 너무 비싸서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만들고 싶다. 누구나, 무조건 와서 쉬어갈 수 있는 곳. 그런 소박한 쉼터 하나 만들고 싶다.

 

김점선 작 <휴식> Silkscreen. 47×47cm. 2006.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6)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입니다.

그가 말한 ‘다른 이들’에 나 또한 속하는 건 아닐까.

괜히 찔끔 하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며 아이가 자라고 성숙해지듯이,

세상도, 상대도 달라지는 법인데,

나에게 익숙한 세상이기만을 바랍니다.

내 관념과 내 틀에 세상 모든 이들이 맞기를 바랍니다.

맞지 않을 때의 그 불편함 또한 남 탓으로 돌리기 일쑤이지요.

 

새해에는 기존의 틀일랑 관념일랑 벗어던지고,

정말 새롭게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그렇게 새 마음으로 새 세상을 만난다면

갈등이나 미움 따윈 사라지고,

이해와 사랑, 평화와 행복만이 가득할 테니까요.

새해에는 부디….

 

 

빼기가 대안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마음수련 시켜보니…

차재화 53세 대구함지초등학교 교감

이 내용은 ‘교육에서의 긍정과 정서 안정’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1년 ‘전인학회 추계 학술대회’ 때 발표된 바 있습니다.

‘묻지마 폭력’이나 ‘집단 폭력’ 등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초등학교에서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많이 느낀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경쟁 구도, 가정불화 등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고 매체를 통해 보고 듣는 정보가 많아 정서가 불안하고 복잡하다.

2003년부터 마음수련 프로그램을 해왔던 나는 작년 겨울 제23기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의 지도 교사로 참여했다. 그러면서 분노로 가득 차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그만 일에도 주먹이 날아가 싸우던 아이가 며칠 만의 수련으로 밝게 웃음을 되찾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버리기가 학생들의 인성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5학년 각 반에서 한두 명씩 임의로 12명의 학생을 모아서 한 학기 동안 아침 시간(주 2회 30분씩)과 계발활동 시간(격주 1회, 80분)을 이용해 마음을 비우는 수업을 시행해 보았다.

스트레스 많은 12살

“자, 눈을 감고 어릴 때부터 유치원 때, 1학년부터 지금 5학년까지 한번 떠올려보자. 마음이 어떻게 변해왔니?”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나이를 먹으면서 마음이 더 무겁고 스트레스가 많아졌어요”라고 대답한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선생님께 꾸중 들었던 일, 친구와 싸웠던 일 등이 내 마음속에 사진처럼 찍혀 있기 때문에 그 생각들이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

엄마의 강요가 힘들어요

아이들이 제일 버리고 싶다고 꼽았던 스트레스 요인으로는 부모님의 강요(공부해라, 게임하지 마라), 시험과 학원 공부, 형제간의 다툼, 마음에 안 드는 담임 선생님 등이 있었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부터 가졌던 엄마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무서웠던 기억, 싫어하는 선생님 유형 등을 떠올려 버리게 했고, 중간고사 기간 전에는 집중력을 높이고 시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과목에 대한 마음, 시험 볼 때 힘들고 조마조마했던 기억, 스마트폰과 게임에 대한 마음도 찾아서 버리게 했다.

아이들의 변화와 효과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이 직접 작성한 활동 소감문을 보면 12명 중 10명이 ‘마음이 편안해지며 잡념이 없어지고 성적이 올랐다’고 답했으며 ‘가족이나 친구 사이가 좋아졌다’(8명), ‘숙제나 학원 가는 것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6명)라고 답했다. 그리고 12명의 아이들 모두가 부모님이 마음 버리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답하는 등 스스로도 마음 버리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각자 다양한 부분에서 마음 버리기의 효과를 느끼고 있었다.

하루에 6시간씩 게임을 하던 아이는 게임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아이는 회장 선거에 나가서 부끄럼을 타지 않고 연설을 잘했다고 말했다. 시험 칠 때면 떨려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데 마음수련 후에는 긴장이 안 되었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 외 아이들의 마음수련 소감 몇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