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안동식 냉이 나물 _ 보약보다 봄나물, 내 마음속 일품요리

경북 안동이 고향이신 어머니는 매년 봄이면 외할머니께서 보내주신 봄나물로 비빔밥을 해주셨습니다. 제 어린 시절을 통틀어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지요. 안동식 나물 요리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콩가루가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여러 나물을 한 냄비에 요리한다는 것입니다. 나물에 입힌 콩가루는 눈꽃처럼 붙어서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을 더해주고, 각각의 나물에서 나온 물이 어우러지면서 맛도 좋고 보기도 예쁜 한국적인 밥상이 만들어집니다.

“집에 늘 있는 거 있잖니. 콩나물, 무, 시래기랑, 냉이가 올라오면 캐놓고.
일단 넓은 냄비에 참기름, 콩나물을 넣고 달달 볶아서 한구석에 놓아.
거기다 무 채 썬 걸 넣고 달달 볶아서 또 한쪽에 놓고 물을 자박하게 부어.
한번 우르르 끓으면서 무랑 콩나물이 익겠제? 냉이랑 시래기는 물기를 싹~ 뺀 후
날콩가루를 골고루 묻혀서 그 무랑 콩나물 옆으로 살짝 넣으면 콩가루가 나물에 삭 붙는데
이때는 뚜껑을 잘 닫아야 비린내가 안 난다.
간은 국간장으로만 해주고 나서 한소끔 끓인 후 먹으면 된다.”

 

봄나물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봄이라는 계절에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겨울이 되면 몸을 웅크리고 영양분을 저장했다가, 봄을 맞아 세상으로 뻗어나갑니다. 봄나물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그 생동하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섭취하는 것이지요. 특히 봄나물 중에서도 냉이는 뿌리까지 통째로 먹는데요, 그 생김새에 걸맞게 몸 깊은 곳까지 에너지를 전해줍니다. 또 간에도 좋아서 해독과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봄철의 건강은 일년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봄나물 한 접시면 온 가족 일년치 보약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나물을 삶은 국물은 함께 보관해두었다가 촉촉한 나물 비빔밥을 만들어보세요. 청국장을 끓여 함께 비벼 먹으면 더 맛있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삽플랜트, 다 쓰인 후, 이 한 몸 자연을 위해 사라지리다

만든 사람 김장호 30세. 디자이너. 최종승 29세. 홍지수 26세

이름은?

삽플랜트(Saplant). 영어로 삽sap(수액, 영양)이란 뜻과 플랜트plant(식물, 심다)의 합성어다. 식물을 심는 데 활용한 삽을 땅에 꽂아두면 자연스럽게 녹아서 비료가 되는 ‘삽’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2008년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중국 사막에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방영한 적이 있다. 그때 심어진 나무 옆에는 또 다른 나무가 심겨졌는데 모래도 막아주고 영양분 역할을 하는 ‘사류나무’라고 했다. ‘사류나무의 역할을 삽이 대신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수명이 다하면 비료가 되는 삽플랜트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제품의 원리는?

 

고철로 만들어진 삽은 사용 기간에 비해 수명은 반영구적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쓰레기로 방치되고, 플라스틱으로 된 삽 또한 버려지면 환경을 오염시키게 된다. 그래서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비료 성분으로 된 재료를 알아보던 중 분해성 플라스틱을 만드는 특허 기술을 찾게 되었다. 이 플라스틱은 땅에서 1년 정도 지나면 서서히 없어져 비료가 된다. 그래서 수목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기업이나 NGO단체가 사막에 들고 간 삽을 버리거나 다시 들고 오는 대신, 땅에 꽂아만 두면 자연스럽게 비료화된다.

하고 싶은 말

 

처음 이 아이디어를 접한 사람들은 ‘삽은 딱딱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고철처럼 아주 단단하고 오래가는 삽이 필요하지는 않다. 사막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삽은 자연을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이니 자연에 실제적으로 이로운 디자인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덜 딱딱하고 덜 오래가더라도 식물을 위해 그런 편리함은 양보할 수 있는 인식을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최근에 개발된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강도가 세지고 분해 기간도 연장이 되었기 때문에 강도나, 사용 기간을 사용자의 요구에 맞게 개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종삽, NGO를 위한 삽 등으로 제품화되어 널리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페이스메이커, 청춘과 가장에게 던지는 격려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어느 운동회. 부모님이 없어 점심도 쫄쫄 굶어야 하는 형제에게 달리기란 어떤 의미였을까. 형은 배가 고픈 동생을 위해 달린다.

오로지 목표는 라면 한 박스. 1등이 아닌 2등을 해야 받을 수 있는 라면 한 박스를 위해 형은 1등을 할 수 있지만 2등으로 페이스를 맞춘다. 동생은 멀리서 우산으로 형의 페이스를 조절한다. 우산을 펴면 빨리 달리고 우산을 접으면 천천히 달리는 식이다. 이 장면은 ‘페이스메이커’라는 영화의 주제를 압축한다. 거기에는 꿈이나 일의 성과 혹은 주역이 되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달려야 했던 우리 시대의 모든 페이스메이커들의 삶이 담겨져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달리는 존재. ‘페이스메이커’는 그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울컥하게 만든다. 30킬로까지 주역(?)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달리고는 정작 남은 12.195킬로를 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늘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오로지 몸 하나에 의지해 결승점까지 가야 하는, 그것도 1등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로써 달려야 하는 페이스메이커의 마라톤은, 즐거움과는 상관없이 힘겨운 노동으로 집약되는, 일로서의 삶을 겪어온 가장들을 가장 잘 표현한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동생을 성공시키고는, 정작 자신은 노동에 피폐된 몸뚱어리 하나 덩그러니 안고 있으면서도, 그 잘된 동생만 보면 바보같이 웃는 가장들. 그런 형이 부담된다는 동생의 말에 질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도 모르고 동생을 힘들게 했다며 자책하는 그런 존재들. ‘페이스메이커’는 이들에게 던지는 헌사 같은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가장을 대변하는 듯한 페이스메이커 만호 옆에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듯 세워놓은 신세대 미녀새(장대높이뛰기 선수) 지원(고아라)이란 존재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만호의 질문은 그래서 이 한 시대를 겪은 가장 같은 인물이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상투적일 수 있는 이야기조차, 온몸으로 말하는 페이스메이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에 상투성을 넘어선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가장들과 청춘들이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는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 1등을 하기 위해 달릴 때, 자신은 살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는 꿈꿔보라고 아낌없이 보내는 응원.
김명민은 이 영화가 결국 대사 몇 마디가 아니라 몸으로 말해줘야 그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배우였다. 완벽하게 페이스메이커로 빙의된 김명민은 어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과 비쩍 마른 체구, 그리고 달리고 달려서 너덜너덜해진 발바닥 같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몸 자체로 이 진심을 전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김명민의 얼굴과 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슴이 찡해질 수밖에 없다.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달려 나간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처지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그 레이스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로 달리기도 한다. 이 김명민이라는 놀라운 배우에 의해 완성된 ‘페이스메이커’를 보면서 울컥했다면 당신은 어쩌면 이 사회 속에서 때때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부지불식간에 해온 장본인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 주변의 누군가가 당신의 페이스메이커였는지도.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자꾸만 자신을 또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누군가 1등을 하기 위해 달릴 때, 자신은 살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는 꿈꿔보라고 아낌없이 보내는 응원.

문화칼럼니스트 정덕현님은 대중문화평론가, 출판 편집자, 작가로도 활동 중이며, 푸른미디어상 심사위원,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심사위원이기도 합니다. 현재 문화비평 블로그 더키앙(thekian.net)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춘삼월 눈 녹듯 한다’는 말처럼

춘설이 내린 3월의 첫날 아침, 고봉산을 찾았습니다. 눈은 머리에 이었지만 생물들의 몸짓은 모두 경쾌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봄은 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춘삼월 눈 녹듯 한다’는 말처럼….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니 어느새 눈이 녹아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 봄에 다 녹아내리면 좋겠습니다.

2006년 3월. 경기도 일산 고봉산에서

사진, 글 김선규

조잘조잘 버들강아지들의 수다

“쟤는 봄이 온 줄 알고 먼저 외투를 벗었다가 동상에 걸려 눈이 삐뚤어졌대.” “정말? 하하하~, 미안해, 자꾸 웃음이 나와서~ㅋㅋ” “쳇, 햇살이 얼마나 따뜻한지, 난 정말 봄이 온 줄 알았다고.” “봄이 얼마나 장난꾸러기인데, 봄 장난에 네가 당한 거야. 하하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버들강아지들입니다. 조잘조잘~ 재잘재잘~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꼭 눈 달린 털북숭이 도깨비같이 생긴 녀석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저 여린 솜털로 누구 간질이면 참 재미있겠는데요~ㅎㅎ

2005년 3월.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에서

 

꽃잎들이여, 나비가 되어라

이른 봄, 앙상한 꽃대 위에 하얀 나비들이 어른거립니다. 가까이 가보니 지난겨울 눈보라에 용케 살아남은 산수국의 가짜 꽃잎들입니다. 여름 장마철에 꽃을 피우는 산수국은 번식을 위해 가짜 꽃잎(꽃받침)을 활짝 펴고 벌과 나비를 부르지요. 가장자리 꽃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꽃 모양인데 수정이 안 되는 가짜 꽃인 겁니다. 여름내 수수한 꽃 대신 화려한 치장을 하고 꽃과 나비를 유혹하던 꽃받침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빛바랜 가짜 꽃잎들은 이제 나비처럼 보입니다. 가짜 꽃잎으로 살던 생은 마감하고, 나비로 환생하여 훨훨 날고 싶었던 그 마음. 그 마음 그대로 전해져 우리도 함께 날아갑니다.

2006년 3월. 경기도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하늘이 태어난 땅 한반도

프랑스에서 생태전문가이자 항공사진가로 활동 중인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 4년 동안 한반도 하늘을 날면서 우리나라를 재발견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하늘에서 본 땅과 바다 그리고 다양한 자연의 오브제들은 신神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빚을 수 없는 자연의 미학美學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의 항공사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내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우리만의 시각으로 촬영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2008년 10월부터 2010년 8월까지 2년간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비행을 했다.

사진, 글 이태훈

충남 보령 _ 붉은빛을 토해내는 황토. 이 땅에서 우리는 먹을 것과 삶의 원동력 그리고 다양한 인생을 배운다.

항공사진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시각을 선사한다. 수평에서 보는 세상과 수직으로 보는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하늘에서 보면 조형적이고 입체적으로 다가와 피사체가 아주 독특하게 보인다. 하늘에서 본 한반도의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신神이 빚어놓은 자연의 소나타는 감히 인간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줬다.

우리나라 산하 특유의 선의 부드러움, 형형색색의 나무와 숲, 수백 년 동안 만들어진 논두렁, 인간의 따스한 마음을 품은 산길 등 무심코 지나쳤던 산과 들 그리고 바다는, 조형적이면서 화려한 색채가 눈을 즐겁게 하였다.

전북 전주 _ 마치 거대한 잎사귀를 햇살에 비춰 보는 것처럼 독특한 모양을 가진 전주 지역의 논 풍경이다. 모내기를 한 논은 새로운 생명을 키워낸다.

충남 대천 _ 대천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지만 내륙으로 들어오면 아름다운 논 풍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댄 논에 개구리밥이 올라와 또 다른 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한 대한민국은 색色이 굉장히 다양하고 수려하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곳, 한반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출생지 또한 무한한 우주이며, 우주의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이 땅 만물의 근원 또한 하늘이 아닌가. 우주는 그렇게 노란 꽃, 붉은 꽃, 노루와 토끼와 사슴을, 강과 산과 들이라는 형형색색의 하늘을 이 땅에 탄생시킨 것이다.

충남 태안 안면도 _ 인간의 노력으로 일궈낸 간석지는 자로 잰 듯한 논두렁이 인상적인 곳이다. 하지만 꼬불꼬불한 논두렁이 주는 아스라한 향수는 조금 부족하다.

이태훈 사진가는 1970년 강원도 태백 생으로 <스포츠서울>과 <월간조선>에서 12년간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여행 칼럼니스트, 프리랜서 사진가, 여가 문화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뷰티풀 코리아> <뷰티풀 티베트> <하늘이 내린 선물> <끌리다 거닐다 홀리다>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 100> 등이 있습니다.

순천 미인

일개미 같은 어머니입니다. 동생을 보낸 뒤부터 당신의 노동은 텃밭으로 옮겨 갔습니다.

맑은 하늘 구름에 앉아 어머니 집을 내려다봅니다. 눈 아래 아득한 성냥갑 집에서 허리 굽은 점 하나가 나옵니다. 그 점을 따라 한참 동안 눈길을 긋습니다. 어머니 발자국이 남긴 실곡선이 텃밭과 마당에 가득합니다.

부엌강아지 같은 어머니입니다. 아직도 목이 늘어진 양말을 기워 신고 밭일을 나가십니다. 내 아들이 초등학교 때 입던 낡은 내복이 제일 따습다며 한겨울을 나십니다. 온종일 바람과 흙과 먼지에 절은 당신 모습은 천상 아궁이를 나온 부엌강아지 같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요일이 되면 꽃단장을 하십니다. 새벽부터 목간을 하시고 플라스틱 퍼머롤로 머리를 말아 올리고 장롱에 아껴둔 새 옷을 꺼내 이것저것 입어봅니다. 구두도 꺼내 반짝반짝 닦아 둡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멀리 떠나보내고부터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갑니다. 당신이 더 이상 품어 돌보아줄 수 없는 자식을, 하늘에 계신 그분에게 기원하기 위함이지요.

역시 옷이 날개입니다. 그렇게 차리고 나서니 원래 인물이 나옵니다. 하긴 사람들이 북적대는 장마당 어물전에서도, 나는 인파 속에 있는 내 어머니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계절에 어울리는 예쁜 모자나 고운 머플러를 머리에 곱게 두른 이가 내 어머니입니다.

몇 해 전,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서울내기 친구들이 우리 집까지 놀러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어머니에게 옷 선물을 보냈습니다.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를 입고 미소 짓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사진에 담아, 친구들에게 답례로 보냈습니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맑고 깨끗한 얼굴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오 년 만에 그 친구들이 다시 왔습니다. 그때처럼 하룻밤을 묵고 서울로 돌아간 친구들이 또 어머니 옷을 사 보냈습니다. ‘순천 미인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주세요’라고 쓴 편지도 동봉했고요. 그래서 새 옷 입은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아! 우리 어머니가 늙으셨습니다. 허리가 한쪽으로 많이 굽고 살이 빠져 수수깡처럼 야위었습니다. 고작 오 년밖에 안 지났는데 백발이 성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지난 장날 함께 장을 보다가 당신이 문득 내게 물었습니다. “애비야, 내가 쩌그 가고 있는 저 할매만큼 허리가 굽었냐?” 나는 얼른 아니라며 가던 길을 재촉했지요. 그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늙으면 다 그런 거이다. 오그라지고 비틀어져 못쓰게 되는 거이다.”

일요일이 왔습니다. 순천 미인께서 오늘도 단아하게 차려입었습니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서울에서 보내온 새 옷을 입고 집을 나섭니다. 순천 동천 긴 방죽길이 훤합니다. 역시 사진은 믿을 게 못 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실물이 최곱니다. 오늘 교회에 가면 예수님께서 활짝 웃으시며 이렇게 말하실 것 같습니다. “서여사님, 정말 예쁩니다. 데이트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최형식

길고양이와의 만남, 그 4년의 기록

이용한 여행 사진가. <나쁜 고양이는 없다> 저자

2007년 12월 초,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내가 집 앞에서 전화를 했다. 잠깐 나와 보라고. 달빛이 파랗게 골목을 비추던 밤이었다. 버려진 은갈색 소파에 한 마리의 어미 고양이와 다섯 마리의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오들오들 떨면서 “제발 우리를 해치지 말아요!”라고 말하던 그 눈빛! 하늘에서 막 떨어진 별빛 같은, 너무 아름다워서 왠지 측은해 보이는, 그 눈빛에 나는 한없이 끌렸다.

길고양이에 대해 무관심했던 나와 고양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녀석들을 다시 만난 것은 보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집을 나서는데, 집 앞 컨테이너 공터에 어미 고양이와 다섯 마리 아기 고양이가 햇빛 속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녀석들을 위해 먹이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치던 녀석들이 처음으로 나의 접근을 허락했다. 카메라를 들고 나와 녀석들의 모습을 담은 것도 이날부터였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 삼아 녀석들을 찍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너무도 용감하게 카메라 앞으로 다가왔고, 카메라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 특히 붙임성이 좋았던 ‘희봉이’라는 고양이는 내 발밑까지 다가와 몸을 부비고, 더러는 렌즈가 더럽다며 혀로 렌즈를 닦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녀석들의 성장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기록하는 동안, 점차 더 많은 길고양이들이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도 먹이를 주고, 성장 과정을 꾸준히 지켜보며 기록했다. 어느새 내 수첩엔, 여행 대신 고양이가 적혀 있었다.

2009년 3월, 나는 도심에서 시골로 이사를 갔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도, 나는 마당 구석에 고양이 먹이 그릇을 마련하고, ‘길고양이 먹이 주기’를 시작했다.

영역을 옮긴 뒤, 나에게로 왔던 첫 번째 고양이는 ‘바람이’였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녀석의 이름을 ‘바람이’라고 지어주었다.

녀석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은 먹이를 준 지 약 3개월 만이었다. 3개월 정도 흐르자 녀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을 찾았지만, 여전히 무뚝뚝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바람이가 세 번이나 고맙다며 새 선물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종종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선물을 한다. 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힘들게 사냥한 것을 선물하곤 하는데, 그것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선물이란 것이 쥐라든가 새, 혹은 나방이나 벌레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서너 번 길고양이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았다. 7개월 정도 먹이를 주며 보살펴왔던 ‘희봉이’는 집 앞에 쥐 한 마리를 두고 갔고, 길고양이 출신인 ‘랭보’는 집으로 온 뒤 첫 사냥에 성공한 나방을 물어다 내 앞에 놓고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 만난 가장 기억에 남는 고양이는 우리 마을 최고의 꽃미냥이었던 ‘달타냥’이다. 달타냥은 파란대문 집 할머니가 키우는 고양이었는데, 거의 온종일 마당과 길에서 생활하는 길고양이나 다름없었다. 신기한 것은 이 녀석은 항상 마실 가는 할머니를 줄레줄레 따라가는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할머니는 점심 무렵이나 오후 네댓 시가 되면 경로당이 있는 마을회관으로 마실을 가시곤 한다. 이때 어김없이 할머니 뒤에는 달타냥이 동행을 한다. 녀석은 할머니가 무사히 마을회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회관 앞 차 밑에서 얌전하게 지켜본 후 다시 혼자서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온다.

파란대문 집과 마을회관의 거리는 약 50~60미터 정도. 집으로 돌아온 녀석은 이때부터 대문 밖 길가에 나앉아 회관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회관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오면 녀석은 다시 회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마중을 나간다.

“어릴 때부텀 키워서 그렁가, 사람을 잘 따라대니유.”

할머니는 당초 쥐를 잡기 위해 키웠는데, 쥐만 잡는 게 아니라 혼자 사는 할머니의 길동무까지 되어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작년 봄, 달타냥은 고양이별로 돌아갔다. 동네 사람들의, “텃밭 파헤치니 고양이 좀 묶어놓으라”는 성화에 고양이를 묶어놓았는데, 그 줄이 올무처럼 잘못 묶여 죽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는 밤나무 옆에 묻어주었노라며 눈물을 훔쳤다.

“정이 들었쥬. 3년이나 같이 살았는데유. 내가 딸네 집 가느라구 그때 열흘이나 집을 비우구 왔더니만, 저기 대문에서부터 쫓아와서는 앞에 막 드러눕구, 얼굴을 비비구. 그런 고양이가 어딨어유. 밭에 갈 때두 따라오구, 회관 갈 때두 따라오구.”

혼자 사는 독거노인인 할머니에게, 친구이자 아들이나 다름없었던 달타냥. 집으로 돌아오며 자꾸만 달타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참이나 펑펑 울고 말았다.

그동안 고양이 책을 내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길고양이에게 전해달라며 사료 후원을 받은 것만도 100여 포대 이상. 그 사료는 고스란히 길고양이의 생명을 구하고, 인간의 사랑을 전하는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고양이를 싫어하던 고깃집 아저씨가 완전히 바뀌어서, 텃밭에다 길고양이 집까지 지어주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길고양이를 쓰레기나 뒤지는 도둑고양이 취급을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길고양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길에서 태어난 고양이는 길어야 3년, 이 세상을 살다 간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흔하지만, 항변하지 않고, 토 달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고양이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고양이 사진을 통해 내가 말하려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이야기….

이 땅에 고양이로 태어나 한평생 천대받고 살다가 고양이별로 돌아가는 고양이의 삶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대부분은 콧방귀를 뀔 게 분명한 고양이 이야기를 저 바람에게라도 들려주고 싶었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고양이도 이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이고, 살아갈 권리를 갖는 동물이니 해치지만 말아달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이것뿐이다.

집냥이가 10~15년이란 수명을 사는 것에 비해 길고양이는 인간의 포획과 교통사고, 먹이를 구해야 한다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고작 평균 수명이 3~5년밖에 되지 않는다.  먹이를 주면 길고양이 개체수가 증가할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영역 생활을 하는 길고양이는 먹이를 준다고 해서 그 영역으로 우르르 모여들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먹이 급식을 받는 길고양이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뜯지 않음으로써 거리의 환경에 도움이 되고, 생존의 안정성을 느껴 새끼를 덜 낳게 된다.

2010년 가을 어미를 잃고 애타게 울던 꼬리 짧은 고양이 꼬미. 꼬미의 단짝인 재미는 꼬미의 할머니인 대모가 낳은 아기 고양이다. 꼬미와 재미가 놀다가, 꼬미 녀석이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미끄러지자, 재미가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꼬미에게 손(앞발)을 내밀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렌즈를 통해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공연히 가슴이 느꺼워졌다.

덩달이와 두 마리의 강아지도 못 말리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다. 덩달이가 사는 마당에는 본래 덩달이와 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곳에 두 마리의 강아지가 태어났고, 어느 정도 걷게 되면서 녀석들은 줄기차게 덩달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이제 많이 컸지만, 여전히 덩달이만 보면 핥아대고 올라타고 짓누르고 물어뜯고 장난을 친다. 성격 좋은 덩달이는 그런 강아지들의 장난을 다 받아내고 있다.

어디를 가든 붙어 다니는 너무 다정한 길고양이 남매.  어미냥이 떠나면서 얌이는 이제 오빠인 멍이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애교도 떤다. 멍이는 그런 얌이를 다 받아주는 든든한 오빠다.

이용한 작가는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15년간을 여행가로 살았다. 2007년 12월, 우연히 집 앞에서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를 만나게 된 인연으로, 블로그에 ‘길고양이보고서’를 꾸준히 연재해왔다. 저서로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명랑하라 고양이> <나쁜 고양이는 없다>를 출간했고, 2011년 11월에는 영화 <고양이춤>을 개봉했다. 그 외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여행에세이 <바람의 여행자>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등을 펴냈다. 블로그 gurum.tistory.com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 한국 교육계의 거목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교육만큼 중요한 문제도, 또 그만큼 많은 논의가 되고 있는 문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교육부장관을 역임하며, 30년 이상 이론과 실무를 통해, 교육의 해답을 고민해온 문용린 교수. IQ 위주의 교육 풍토에, 마음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감성지수(EQ)를 알리고,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기에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게 끌어내주자는 다중지능 이론을 소개하며,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오기도 했다. 60여 권에 이르는 교육 관련 저서, 아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들에게 작은 방향타라도 던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평생 교육을 연구해온 교육학자, 문용린 교수를 만나보았다.  글 최창원 사진 홍성훈, 김혜진

지난 2008년 3월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은 ‘서울대인을 위한 24시간 상담 전화’를 개통했다. 그 후 1년 동안 걸려온 전화는 3천여 통. 대학생활문화원의 보고에 따르면 진로나 학교 적응 문제, 인간관계 등이 학생들의 고민이라 한다. 누구나 겪는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로 인해 삶의 근간이 흔들리고 자살까지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 지금의 현실.

이러한 시기에 문용린 교수가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행복 교육’이었다. 교육의 목적을 ‘성공’이 아닌 ‘행복’에 두어야 한다는 것. 모든 부모의 꿈이자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불리는 서울대 안에서도 왜 학생들은 괴로워하고 작은 일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것일까? 단지 서울대가 목표였던 아이들은 서울대에 진학한 순간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행복을 알고, 살아갈 목표와 의미를 분명히 알고,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매진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어려움을 이겨낼 내적인 힘도 키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산다는 것, 현재를 즐기고 원하는 길을 개척할 줄 아는 아이가 성공한다는 것이 ‘행복 교육’의 요지였다.

이제는 ‘행복 교육’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의미를 좀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대부분 부모들이 그러잖아요. “나중에 행복해지려면 지금 조금 더 참고 노력해야 해.” 일반적으로 행복에 대한 착각 중 하나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돌아보면, 먼저 부모부터 언젠가 찾아온다던 그 행복을 실제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현재의 즐거움 없이 성공만 추구해온 아이들의 삶을 보면 결국엔 많은 사회 문제로 나타나잖아요. 오늘 하루가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늘 연습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설혹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만의 행복을 찾을 줄 알아요.

막상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치기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죠. 돌아보면 저도 참 부족한 아버지였어요. 유년기의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 유학을 떠났거든요. 유학 중에도 유학을 마친 뒤에도, 너무 해야 할 게 많다는 핑계로 제 할일에만 전념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이들 생일이 언제인지 알기나 하냐고. 보니까 그날이 딱 아들 녀석의 생일인 겁니다. 제 잘못을 인정하고 다음 날 하루는 오로지 가족들과 함께 보내겠노라고 했어요. 그리고 집 앞에서 온 가족이 자전거를 탔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겁니다. 그때 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 나는 자전거 타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그 순간 참 아들에게 미안했죠. 그리고 그때, 행복도 연습과 훈련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어요. 만일 아이가 행복을 느낄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고 느낀다면, 하루에 한 가지씩만 아이에게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세요. 어렵다면 그저 아이를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행복 교육과 관련해 부모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부모들에게 아이가 정말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시라고 말합니다. 보통 부모가 아이를 훈육할 때는 대부분 자기 과거를 떠올리잖아요. ‘내가 그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등 후회되는 기억을 떠올리며 이를 기준으로 아이에게 이것저것 강요합니다 . ‘내가 이랬으니 너는 이러면 안 돼’ 하는 절박감을 부추기고요. 하지만 부모가 경험한 과거가 아이에게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아이들도 각자 생각이 있는데, 엄마, 아버지 마음만 안 바뀌고 있는 겁니다. 정말 아이가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아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하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세요. 이것만은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오늘 이 순간 행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아갈 어느 순간에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보통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남과의 비교나 경쟁을 전제로 한 조건들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 삶 자체를 불행하다고 인식하게 되지요. 저는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 때 느끼는 것으로 행복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타적 삶이 주는 기쁨을 완전한 행복이라고 해요. 그건 남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다가 아니라, 이 세상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행복은 너무나도 높고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남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즉 ‘도덕’의 문제는 문용린 교수가 서울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이래, 일생 동안 연구해온 주제였다.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교육을 통해 이뤄야 할 근본이라 여긴 그는, 아이들을 위한 도덕에 관한 인성 동화를 펴내고 사회 캠페인까지 확대시켜 도덕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자 했다.

‘도덕’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던 그가 결국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1990년대 우리나라에 감성지수(EQ)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다. 요즘 정서 지능(EI)이란 말로 많이 쓰는데, IQ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측면들이 인간의 삶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개념을 연구해낸 것이 감성지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심리학자 잭 블럭은, IQ가 높은 사람과 EQ가 높은 사람의 유형을 비교한 결과, IQ가 높은 사람은 지적으로는 뛰어나나 인간관계가 서투른 반면, 정서 지능이 높은 사람은 책임감과 동정심이 강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며, 자신과 타인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결국 행복한 인생을 살게 이끌어주려면, 머리보다 ‘마음의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교수는 더 나아가 인간의 다양성에 집중한 ‘다중지능이론’을 소개한다. 람은 누구나 언어지능, 음악지능, 인간친화지능 등 8가지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이중에서 누구나 강점 지능이 있는데, 똑같은 능력을 강요하지 말고, 그중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끄집어내주는’ 교육을 하자는 것.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주목했다.

IQ 테스트의 오류

TV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의 IQ를 검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출연자들은 개그맨, MC, 연기자, 음악가 등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IQ 테스트 결과 130 이상이 한 명, 100 이하가 두 명, 80 이하도 한 명 나왔다. IQ 맹신론자에 따르면 IQ 80은 대학 교육을 이수하지 못할 정도의 지적 수준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IQ가 높을수록 학업 성적이 좋고 성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많은 연구에서 머리가 똑똑하다고 출세하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IQ 테스트는 현재 100여 종에 이를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수많은 IQ 테스트를 살펴보면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으로 기억 요인, 수 요인, 지각 요인, 추리 요인 등 7가지 기본 요인을 측정한다. 언뜻 다양한 능력을 측정하는 듯하지만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숨어 있다.

첫째, IQ 테스트는 인간의 능력 중 극히 일부분의 지적 능력만 측정한다. 둘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IQ 테스트는 인간의 능력 중 지적 능력만 측정할 뿐이며, 정서적인 능력이나 사회성 등은 배제되어 있다. 셋째, IQ 테스트 자체가 부정확하다. 예전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여러 형식으로 실시한 적이 있다. 한 학생의 결과가 91~133이 나왔다. IQ 91이라면 대학교에 들어가 정규 교육을 받기 어려운 지능지수이고, 133이면 수재에 속하는 수준이다. 이렇게 편차가 심한 이유는 각기 측정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IQ테스트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단지 정상아인지 비정상아인지를 판단하는 수단으로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불확실하고 오류가 넘치는 IQ로 아이의 능력을 평가한다면 아이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장에도 걸림돌이 된다.

 

‘마음의 힘을 길러주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어릴 때 공부 하나는 잘했던 아이들이 훗날 정작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럴까?” 부모들로부터 들어온 자녀 교육에 대한 질문의 핵심이 그거였어요. 결국 행복 교육과 연관되는데, 그건 마음의 힘을 길러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요즘 귀감이 될 만한 국내외의 젊은 리더들을 보면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기쁨을 위해 고된 상황을 견뎌내고 오직 자신의 길에 집중하는 능력이 있거든요. 그게 바로 마음의 힘입니다. 아이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부모가 마음의 힘을 충분히 키워주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조그만 역경이나 곤란에 쉽게 좌절해 버리는 성향을 지니게 됩니다. 마음의 힘이란 감정과 정서와 관련된 능력이지요. 잘 참는 능력, 힘든 일을 잘 견뎌내는 능력, 흥분된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능력. 이런 마음의 힘을 최근의 심리학자들은 정서 지능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수학 능력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듯이, 이 힘 역시 오랜 시간과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기에, 이것 역시 키워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육을 연구해오셨는데, ‘교육이란 무엇이다’ 정의를 내려주신다면요.

한마디로 그 아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언지를 발견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에 비유하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교육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사람 내면의 완성이고, 자아실현이에요. 애들 속에는 각자 다른 소질, 적성, 잠재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그것이 확 드러나게 하는 교육이 중요해요. 우리 어른들이 애들 속에 잠자고 있는 지하수, 광맥을 끌어올려주는, 그런 마중물이 되어야 하지요.

선생님께도 마중물이 되어준 분이 있었나요.

제가 성당에 열심히 다녔는데, 고등학교 재수를 할 때였어요. 그때 신부님께서 ‘우주의 근본원리’라는 책을 주시면서, 이 책을 잘 읽고 저녁 모임에서 어른들 있는데 발표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주 어려운 책인데, 보니까 재미가 있어서, 죽 읽으면서 요약 발표했어요. 그때 제가 좋아하는 누나가, “너는 대학교수 같애. 진짜 잘했어”라고 했고, 누구 칭찬보다 그 칭찬이 와 닿았죠.(웃음) 그런 칭찬들이 저에겐 마중물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교육에 대해 참 말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에 희망을 느끼신 적이 있다면요.

여러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용감하게 추진해나가는 청소년들한테서 희망을 보지요. 예를 들어 서태지 같은 사람. 엄마, 아버지가 이런 걸 요구하고 사회가 이걸 요구해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용감하게 뛰어드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잖아요. 음악에서의 서태지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서태지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박태환, 김연아 선수처럼 부모님이 아이들의 소질과 적성을 밀어주는 것에서도 두 번째 희망을 보지요. 하지만 언제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풍성한 대숲을 이루기 위해 땅속에서 5년간 힘을 기르는 대나무 뿌리와 같아요. 그만큼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요. 부모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대나무를 키우는 그런 마음으로 자녀들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문용린 교수는 65년 인생길 고비마다 그때그때 만난 사람들이 자신을 이끌어주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자신도 그렇게 진심으로 사람이 가는 길에 ‘희망’이 될 수 있길 기도해왔다. 한 사람을 제대로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중요한 것인지를 알기에, 그만큼 막중한 책임감도 느꼈다. 결국 교육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문용린 교수. 그의 말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랑의 교육이 성장하길 바라본다.

문용린 님은 1947년 생으로,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미네소타 대학원 교육심리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국교육개발원 도덕교육연구실 실장,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학과장, 교육부장관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문위원,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Safe Kids, Worldwide 공동대표로 있습니다. 저서로 <행복한 성장의 조건> <부모가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 <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소리〉등이 있습니다.

주어진 조건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통해 기적 같은 감동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씩 나의 재능을 발견하는 기쁨

국지혜 27세. 병원 코디네이터.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학창 시절 나는 예체능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평소 손재주가 있다는 소리도 들었기에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은 커져갔다. 하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택한 것은 실기 시험이 없는 대학이었고, 수능 시험만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디자인을 마음껏 할 수 있기에 들뜬 마음으로 대학 생활을 했다.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실기 과제 때문에 학교에서 노숙자처럼 지내며 3일 밤샘 작업은 기본이고 매일 밀려오는 과제에 체력이 바닥날 만도 한데 공부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집중력이 쏟아져 나왔다.

매번 밤샘을 하고도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성적도 늘 상위권이어서 장학금도 받았다. 그동안 공부로 인정받지 못해 부모님 속을 썩였던 것을 대학에 와서 효도하는 기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 자신과 약속을 한 것이 있다.

“나도 이제 성인이니까 내 용돈과 과제 재료비는 내 손으로 벌어야겠다!!”

그래서 주말이면 커피숍 서빙 아르바이트를 오픈부터 마감까지 했다. 평일에는 과제를 하고 주말엔 새벽 첫차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이 이어졌다. 만성 피로에 시달렸고 주변에서도 걱정하셨지만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많았던 내 성격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에도 디자인 회사 취업을 위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원에 다녀야 했다. 내가 했던 일은 안내데스크와 비서직으로, 모두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는 서비스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디자이너를 꿈꿔왔던 나인데 어느 순간 생활비 마련을 위해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은 과 친구들은 디자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승진하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서비스직 일이 나에게 더 잘 맞는 것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 다시 나의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밤샘 작업을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기분 좋아지게 하고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그 일이 더 뿌듯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던 중 병원 코디네이터 제안을 받았다. 환자를 가족처럼 챙겨주고 병원 경영도 신경 써야 하는 직업이었다. 아픈 환자들을 대할 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한다면 환자들도 좋아할 것이다. 서툰 디자인 실력도 병원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시작하는 초보 수준이지만 꿈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면서 나만의 특별하고 소중한 능력을 발견한 것에 대해 출근할 때마다 감사함을 느낀다.

디자인 회사 취업을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원 수업과 과제를 해낼 때, 정말 최강 체력으로 주경야독에 매진했다. 지금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의 시간을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힘든 일들을 하나씩 헤쳐 나가면서 자신이 진짜 잘할 수 있는 일, 혹은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기분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기분이다. 그래서 신나고 감사하고 행복한 인생이다.

 

김옥희 작 <머물고 싶은 향기도 기억하고> Oil on Canvas. 21×49cm.

 

명불허전 막강 경비원으로 거듭나리!

홍경석 54세. 대전시 동구 성남동

인생이 박복하여 저는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생모를 잃었습니다. 초가집의 누옥(陋屋)에서 편부와 빈곤하게 살았을지언정 그래도 초등학교 때 공부는 줄곧 우등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단한 삶의 무게는 더욱 그 중압감이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래들이 까만 교복을 입고 등교할 적에 고향역 앞에서 구두를 닦는 것으로 생업 전선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저처럼 많이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가 벌어먹고 살 거라곤 고작 몸으로 부대끼는 험한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노동과 행상도 모자라 안 해 본 직업이 드물 정도입니다. 하지만 힘이 든 건 차치하고라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당최 보이지 않았기에, 학벌보다는 능력으로써 승부할 수 있다는 세일즈 업계에 입문하기에 이릅니다. 영어 교재와 테이프를 판매하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당시까지 영어라곤 고작 알파벳 정도밖에는 모르는 ‘무식쟁이’였던 관계로 저는 한동안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대들었습니다.

바로 매일 영어테이프를 들으며 교재를 깡그리 암기해 버리는 거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저는 실적이 우수한 사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엔 주임으로의 승진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소장으로 승진하여 매니저가 되자 대학을 나온 많은 사원들을 관리하는 직책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 회사가 부도가 난 것입니다. 다른 회사로 취업하여 역시도 열심히 뛴 바람에 다시금 매니저를 맡기도 했지만 그 직장에서부터는 이제 기본급은 언감생심이었고 철저한 능력급만이 제 수입의 전부였습니다. 그건 바로 ‘비정규직’이라는 원초적인 함정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나(!) 학력이었습니다.

‘정식 대학’엔 가지 못할지언정 지식만은 쌓자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주말마다 공공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수년간 엄청난 양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내공을 쌓았습니다. 그러자 깡마른 사시랑이와도 같던 내게도 지식과 지혜의 샘물이 졸졸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에 대한 ‘진정한 투자’도 시작했습니다. 물론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들과 딸이 고교를 다닐 당시 도합 6년간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웅    (등교)과 마중(하교)을 나갔습니다. 또한 가급적이면 칭찬과 격려로서 동기부여를 함에도 소홀함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학원에는 못 보냈지만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같이 다녔습니다. 그러한 ‘자양분’이 동기가 된 덕분이었을까요. 아들은 국립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닌 후 취업하였고, 딸 역시도 현재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입니다.

그러던 중 작년 가을 제가 불의의 실직을 당했습니다. 명색이 가장인지라 두문불출의 백수건달이 되고 보니 가족들 보기 면구스러워 견딜 재간이 없었습니다.

취업코자 이력서를 낸 곳에서 이윽고 연락이 온 건 작년 말이었습니다. 다행히 1월 1일부터 근무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난생처음으로 맡아서 하게 된 일은 바로 경비원입니다. 하루는 주간 근무로써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튿날은 반대로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근무하는 시스템입니다.

소식을 듣고 아들과 딸도 모처럼 집에 왔습니다. 경기도가 직장인 아들과 서울서 대학원에 다니는 딸이 이 아빠를 응원하고자 ‘작당’하여 오자 어찌나 반갑던지요! 새로운 직장 생활에 충실하느라 평소 물처럼 즐겼던 술조차 일부러 한모금도 안 마시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들이 따라주는 술은 차마 거절할 수 없더군요.

“아빠, 힘내세요! 그리고 조금만 고생하세요. 제가 승진하고, 동생이 취업까지 하게 되면 아빠의 지금 고생도 종착역에 닿으실 겁니다. 그러고 나면 평소 아빠의 소원이라는, 글만 쓰실 수 있는 환경을 꼭 만들어 드릴게요.”

아들의 그 한마디는 물질적으론 여전히 가난뱅이일망정 자식 농사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진정한 만석꾼이란 자긍심이 들게 해주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자타공인 효자가 된 아들딸은 기실 어려서부터 효심을 강조하고 더불어 많은 책을 읽도록 배려한 때문이라 믿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을 미래의 동량으로 키우겠노라는 저의 의지는 그야말로 한 땀 한 땀의 정성에서 기인했던 것이죠. 저 또한 한 땀 한 땀의 노력과 정성으로 명불허전(名不虛傳) 막강 경비원으로 거듭날 작정입니다.

 

김옥희 작 <꽃잎들이 춤출 때> Oil on Canvas. 38×38cm.

 

‘나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이 나를 바꾼다

김정환 36세. IT 디자이너. 서울시 동대문구 장안동

새벽 4시. 몇 년 전부터 내가 일반적으로 기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뜰 때마다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이 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항상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정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거 같다. 디자인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정말 끊임없는 노력을 많이 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게 노력이고,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꿈을 이루게 된다고 항상 믿어왔다. 특히 ‘나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이라는 말은 언젠가 책에서 읽었는데, 참 멋진 말로 다가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형적인 ‘올빼미족’이었다. IT쪽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상 야근, 철야는 피해갈 수 없는 당연한 생활의 일부였다. 예전에는 이런 생활 패턴 때문에, 즐기면서 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대한 회의도 많이 들었고, 슬럼프에도 자주 빠지면서, 건강까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탓하기보다 나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겼다. 나는 이전의 부족하고, 비효율적인 내 자신을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시기에, 여러 가지 책을 읽던 중 ‘새벽형 인간’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고, 나한테 꼭 필요한 거라 여겼기에 바로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수십 년간 가져온 나의 생활 문화, 패턴을 근본부터 바꿔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취침 시간을 많이 앞당겨야 하기에, 늦은 시간까지의 지인들과의 만남을 할 수도 없었고, 술도 마실 수 없었으며, 이밖에도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금욕을 해야 했다. 또 겨우겨우 새벽에 일어난다 해도, 졸 때도 많았고, 멍한 상태가 지속되기 일쑤였다. 힘들었지만 나를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고 노력했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평등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이라도 남들보다 더 많이 확보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을 버티니, 점차 몸이 적응했고, 점차 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순수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새벽 시간에는 나를 방해할 외적인 요소가 아무것도 없었고, 굉장히 집중이 잘되었다. 당연히 일의 효율과 성과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또한 올빼미족 때 가졌던, 나쁜 습관들이 상당수 고쳐지면서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남들보다 더 양질의 시간을 확보하고 시작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기 전엔 늘 기분이 좋고, 다음 날이 기다려지는 미래 지향적인 긍정적 마인드 정착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했다. 경제적으로는 대기업을 다니는 지인들보다 수입이 많으며, 일적으로도 인정받고 있고,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을 즐기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바꾸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결과들이 얼마큼 자신을 바꿀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나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을 하려면, 본인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보려는 노력, 자신의 나쁜 습관을 A부터 Z까지 고쳐보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다.

 

김옥희 작 <시간은 흐르다, 추억이 된다> Oil on Canvas. 38×38cm.

주어진 조건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통해 기적 같은 감동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시각장애인, 뉴스 앵커가 되다

이창훈 28세. KBS 프리랜서 앵커

“안녕하세요. <뉴스 12>의 생활뉴스 앵커 이창훈입니다.”

2011년 11월 7일, 뉴스 앵커로서 첫 방송을 했다. 523: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내 방송 최초로 시각장애인 앵커로 뽑혔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생후 7개월 만에 뇌수막염을 앓아 시력을 완전 잃었다. 딸만 셋이었던 집안에서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가 컸던 터라 백방으로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은 계속됐지만, 어느 순간 그것조차 당신의 욕심임을 깨달은 어머니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마음을 추스르셨다.

2006년 대학교 3학년 때, 헌법재판소의 ‘시각장애인 안마업 독점’ 위헌 판결이 내려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각장애인들의 비극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상황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우리들에 대해 알려나가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차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잘 알지 못해서란 거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2007년부터 시각장애인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면서 내가 만든 콘텐츠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PD, 작가, 엔지니어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내면서 방송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작년 6월 KBS에서 앵커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았을 때, 새로운 기회란 생각이 들었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먼저 뉴스를 많이 들었다. 뉴스 기사를 스크랩해서 점자 단말기에 넣어 점자로 읽어 내려갔다. 그다음 목소리 녹음한 걸 반복해서 듣는 등 하루 4~5시간 꾸준히 연습해 나갔다.

결국 서류 전형과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최종 면접에서 쟁쟁한 열 명을 제치고 합격했을 때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많은 분들이 방송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뉴스를 할까…’ 사실 여느 앵커와 다른 건 점자 정보 단말기로 뉴스 멘트를 읽어나간다는 것뿐이다.

올해부터는 직접 앵커 멘트까지 작성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일도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더 많은 장애인들이 다양한 분야에 도전할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역할을 하고 싶다. 더욱이 며칠 전 초등학교 아이가 사인해달라고 다가왔을 때 사람들이 허투루 보지 않는구나 싶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렇게 하면 공부가 잘되는구나’를 알고, 뉴스를 보면서 ‘아, 이런 시각이 있구나’를 배우고, 기존 앵커들의 뉴스를 들으면서 ‘아, 이렇게 하면 좀 더 전달력이 좋구나’를 익히는 등 매 순간 주변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려고 했던 마음가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김옥희 작 <스쳐 지나가는 향기도 기억하고> Oil on Canvas. 21×49cm.

 

자격증은 아이들의 꿈을 달고

윤정현 53세. 전남 장흥실업고등학교 교사

20여 년간 전남 농어촌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대부분의 농어촌 특성화 고등학교가 그러하듯이 가정환경이 열악한 아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고, 성적이 좋다 해도 의욕을 상실한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을까. 나는 자격증을 생각해냈다.

몇 년 전 보성실업고에 근무할 때였다. 고1 때부터 맡았던 한 학생이 틈만 나면 학교에서 잠만 잤다. 가정환경이 너무 곤란해서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교 3년 동안 식당, 편의점, PC방, 주유소 등에서 일을 했는데, 그중에서 온종일 허리 한번 펼 시간도 없이 설거지를 하는 식당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이 학생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소질에 맞는 자격증을 따게 해서, 사회인의 길을 잘 걷게 해주는 것이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독서반을 만들어 먼저 ‘가나다’부터 가르쳤다. 1년 해서 안 되면 2년, 2년 해서 안 되면 3년에 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전에 자격증을 따서 사회에 나가 성공한 제자들에게 강연도 부탁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학생에 맞는 자격증 일정을 체크해서 기능사 시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아이들의 취업 상담을 위해 경제 신문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구독했다. 진로 상담도 개개인의 적성은 물론 그 분야의 성장 가능성을 고려하여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짬짬이 내어 정말로 3년 동안 눈물겹게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자동차정비와 건설기계 자격증 등을 13개나 취득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생도 들어가기 어려운 부사관 시험에 합격해서 직업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부사관 시험에 응시한 학생들 중 자격증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 학생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몇 년 전 맡았던 한 여학생도 생각난다. 그 학생의 장래 희망은 할인점 판매원이었다. 단칸방에서 삼대가 살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것이, 그 학생이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꿈의 크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총명하고 열의가 넘치는 학생이었기에, 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하나하나 안내를 했다. 방과 후와 주말에, 상담과 전화 독려로 이론 공부를 시켰다. 방학에는 모자란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시켰다. 매일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관련 자료를 나눠주며 공부를 시켰다.

원서비와 시험을 보러 갈 때는 교통비를 대주고 부산, 광주, 목포 등 시험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그 결과 그 여학생은 자동차정비 기능사, 건설기계정비 기능사, 불도저, 굴삭기, 지게차 기능사 등 건설기계 분야의 거의 모든 자격증을 취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보처리기능사, 인터넷 정보 관리사 등 무려 34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결국 특별 전형으로 조선이공대 자동차과를 전액 장학생으로 다녔던 그 여학생은 현재 보험 회사 자동차 대물분야를 담당하고 있고, 자동차 분야 최고 전문가를 꿈꾸고 있다.

그 외에도 한글도 못 읽던 아이들이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8번 만에 자격증을 딴 아이도 있다. 학원비가 없어 식당 일을 하며 주경야독한 제자들, 그렇게 자격증을 따서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해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누구나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김옥희 작 <지금 스며드는 진한 향기> Oil on Canvas. 38×38cm.

 

글라디올러스와 수선화, 두 꽃이 이뤄낸 기적

강명식 83세. 경남 거제시 예구마을 공곶이 농원

‘거제 8경’ 중 하나로 불리고 ‘종려나무숲’이라는 영화의 촬영지가 되면서 더욱 유명해진 우리 농원은 해마다 봄이면 꽃의 바다가 된다. 샛노란 수선화와 글라디올러스, 붉은 동백, 새하얀 조팝나무가 쪽빛 바다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가히 절경인 이곳은 아내와 내가 40여 년간 피땀으로 일군 곳이다.

내가 공곶이에 처음 온 것은, 1957년 중매로 아내를 만나면서 처가가 있는 예구마을로 선을 보러 와서이다. 아내와 마을 뒷산을 산책하다가 ‘눈에서 불이 번쩍 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했는데, 바로 공곶이었다. 결혼 뒤 공곶이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10여 년간 마산 등 대도시에서 돈을 번 후, 1969년 마침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토록 이곳에서 살기를 바랐지만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방도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중, 우연히 옆집 화단에서 가꾸던 글라디올러스란 꽃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개의 어미 뿌리에 새끼 뿌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꽃 뿌리 하나에 콩알보다 작은 종자 15개가 붙어 있네. 뿌리 하나에 10원만 하더라도 10만 개면 100만 원… 1년, 2년 지나면 몇 만 평에 뿌리를 내리겠구나.’

이 단순하고도 간단한 계산 방식으로 몇 년이 지나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감이 생겨났다. 나는 글라디올러스를 손에 들고 외쳤다.

“이것이다. 비록 두 뿌리로 시작하지만 언젠가 이 땅 전체를 얻을 것이다!”

그 드넓은 땅에 또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길을 걷다가 한 가게에서 수선화 뿌리를 보게 되었다. 주머니를 몽땅 털어도 수선화 두 뿌리밖에 살 수 없었다. 많이 사면 그만큼 소득이 클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형편상 접을 수밖에 없었다.

꽃을 심기 위해,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때론 어두컴컴한 밤까지 일은 계속 됐다. 아내도 내가 하는 일에 묵묵히 따라와 주었다. 당시엔 농기계가 없었던 터라 일일이 호미와 삽으로 때론 손으로 척박한 산을 개간해나갔다. ‘손’을 농기구라 말할 정도로, 손끝은 닳고 닳았다. 어느덧 산은 다랑이 밭으로 층을 이루었고, 그 길이가 4km를 넘었다. 산을 개간하다 보니 걸어 다닐 때마다 미끄러워, 개간하다 나온 돌로 333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길을 중심으로 동백나무가 심어졌고, 땅에는 수선화와 글라디올러스를 비롯해 밀감나무, 유자나무, 종려나무 등이 심어졌다.

처음엔 자연 재해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69년, 1~2년간 2천 그루의 밀감나무를 심었지만, 60년 만에 한파가 오면서 밀감나무가 모두 얼어 죽어버렸다. 열대 나무인 밀감나무가 얼까 봐 가을이면 나무마다 가마니를 덮어씌우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건만, 이제 막 열매를 맺을 찰나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버렸을 땐 좌절감도 컸고, 그때 충격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렸다.

그다음 시도했던 동백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동백나무는 꺾꽂이를 해서 심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기까지 1년 내내 공을 들여야 한다. 잎을 따주고, 줄기 끝은 깎아 흙에 꽂아주고, 때에 맞게 물을 주고, 여름엔 볕을 보면 말라 죽기에 발을 쳐주는 등 애지중지 키워나갔다. 하지만 다음 해 태풍 때문에 동백나무 10만 그루가 죽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때마다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 이상으로, 이 땅을 알뜰히 가꿔서 아름답게 지켜나가자…’라고 힘든 마음을 추스르며 계속 밭을 일구고 꽃과 나무를 심어 나갔다.

그렇게 10~2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비로소 꽃과 나무를 팔며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고, 땅은 정직하게 손길이 닿은 대로 화답해주었다. 이제 해마다 봄이 되면 노란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난다. 두 뿌리로 시작했건만 땅을 가득 메운 수선화를 볼 때면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자연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 노력의 흔적으로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4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농원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선화, 동백나무, 종려나무, 조팝나무 등 많은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큰 자연 정원을 이루고 있다. 내 자신도 이 일을 해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글라디올러스와 수선화, 이 두 꽃을 일컬어 기적의 꽃이라 부른다. 이 두 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자연경관에 감동할 때마다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싶어 감사하다. 또한 이렇게 되기까지 묵묵히 따라와 준 아내와 건강하게 잘 커준 아이들에게도 고맙다. 사람들은 꽃과 나무를 보며 천혜의 자연 농원이라 칭송하지만, 그것은 부족한 내게 하느님이 허락하신 삶이었다.

 

김옥희 작 <사랑-정> Oil on Canvas. 38×38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