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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1월 1일 아침에 세수할 때의 그 마음

최근 한 온라인 취업 사이트에서 ‘입사 때 가졌던 초심이 얼마나 유지되는지’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더니, 평균 11.6개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합니다. 재밌는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최고 1년 6개월 정도 더 초심을 유지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약 80% 정도의 사람들이 ‘초심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슬럼프 탈출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를 첫 손가락에 꼽았다고 하네요. 새봄을 맞으며 초심(初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편집자 주>

언제나 5%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부족한 5%를 채우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 최고의 진행자로 살아남은 유일한 비결이다.

– 오프라 윈프리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 시인 정채봉

언제나 초보자의 마음, 처음 시작하던 때의 초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초보자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높임을 지양한다. 나는 언제나 초보이고, 실력이 미천하기에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자. 그 안에 내가 진정 올라갈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 유영만 한양대 교수. <내려가는 연습>의 저자

초심은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는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모두 우리의 광대한 마음을 제한한다. 무엇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 그것이 진정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 <선심초심>(스즈키 순류 / 물병자리)에서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들에서 사냥을 하던 중 어떤 목동을 만나게 되었다. 왕은 첫눈에 그가 성실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서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왔다. 과연 그는 모든 일에 충성스러웠다. 왕은 그를 왕궁의 재산 관리인으로 세웠다. 그러자 신하들이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그를 책잡기 위해 살펴보았지만,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따금씩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있었다. 왕궁 꼭대기에 있는 창고에 아무도 모르게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하는 것이 아닌가. 또 그 창고의 열쇠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맡기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그가 왕의 재물을 그곳으로 빼돌리는 게 틀림없다고 여기고 왕에게 고자질을 했다. 왕의 허락을 받은 그들은 그곳을 열어보았다. 그들은 그 속에 보화가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조끼 한 벌과 장화 한 켤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왕은 그 신하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왜 그 보잘것없는 것들을 보물인 양 그 속에 감추어 두었는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제가 폐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게는 그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폐하의 은혜를 잊어 버리고 제 마음이 높아지려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폐하의 은혜를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올해는 경찰이 된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경찰 시험에 합격하던 날, 그 날의 감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대학 졸업 후 일반 직장에서 임시 계약직으로 근무하다가 도전하게 된 경찰 시험. 다행히 경찰직은 한때 여군이 되고 싶었던 내 적성에도 맞는 일이었다. 그때는 ‘여경만 된다면 오지, 아니 무인도 그 어디라도 열심히 근무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실한 꿈이었다. 2번 떨어지고 마지막 3번째 도전할 때는 정말 목숨 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22:1의 경쟁률을 뚫고 5차에 걸친 신체검사, 필기시험, 체력 검정, 적성 검사, 면접시험을 거쳐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경찰이 되어 파출소 3교대 근무를 하면서 음주 단속도 하고, 오토바이 절도범을 추적하는 등 패기 있게 활동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신임 시절 갖고 있던 꿈과 열정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임 시절을 떠올리며 책상 서랍 깊숙이 놓여 있는 당시의 일기장을 보곤 했다. 신임 첫 발령 후 근무한 지 한두 달 남짓, 마음을 다잡아본다며 끄적거렸던 일기. 지금은 내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땐 무모하리만큼 용감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각오도, 사명감도, 다짐도 대단했던 때였는데….

그렇게 마음이 나태해질 때마다 신임 경찰일 때의 다짐, 일기 내용을 떠올리며 순간순간 채찍질한 덕분일까. 운이 좋게도 올해 초 승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엔 형사들을 지원하는 내근 요원에서 경제사범을 조사하는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모두 바뀐 환경과 업무. 다시 초심이 필요한 이때, 파출소로 첫 출근했던 그 설렘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 최미옥 경사. 38세. 구리경찰서 경제범죄 수사팀

‘공주과’였던 선배 언니,‘엄마과’로 바뀌다

이영희 33세.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선배 언니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때, 애니메이션 동아리에서였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언니는 뭐랄까 욕심도 많아 보이고, 남자들과만 유독 친하게 지내는 약간 공주 스타일로 선뜻 친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 언니와 함께 게임 회사에 입사하면서 회사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청소, 설거지 등 함께 해야 하는 일을 잘 도와주지 않을 뿐더러, 모두가 일을 할 때도 혼자 일찍 퇴근해 버리곤 했다. 한번은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언니가 오랫동안 설거지를 하지 않고 그릇들을 쌓아 두어 구더기가 생긴 적이 있었다. 세상에나~! 나는 화들짝 놀라 뜨거운 물로 구더기를 씻어내고 설거지를 했고, 그런 언니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언니와의 인연은 계속됐다. 회사가 어려움에 처해 퇴사를 하고, 서울로 왔는데 혼자 방 구하기도 어렵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 언니와 자취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언니는 청소나 빨래를 나보다 덜 하는 것 같았고, 가끔 남자 친구를 새벽에 데리고 와 노래를 부르곤 해서 나를 짜증 나게 했다.

그렇게 얄미운 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마음수련을 한다고 했을 때 언니의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마음수련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니가 바뀌는 것 같더니, 청소를 하고, 밥을 차려주고, 나를 챙겨주는 게 아닌가. 이제야 비로소 ‘언니’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힘들 때 무심코 털어놓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진심으로 들어주었고, 언니의 조언은 큰 힘이 되었다.

한번은 언니가 1주일간 논산에 있는 마음수련 교육원에 다녀왔는데, 눈빛이 초롱초롱해지고 너무나 예뻐져 돌아왔다. ‘마음수련하면 저렇게 예뻐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점차 언니를 의지하고 따르게 되었다.

언니가 결혼을 하고 따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언니의 빈자리는 더 크게 다가왔었다. 힘들 땐 자주 언니를 찾았다. “언니 시간 돼요?” 하고 물으면, 언니는 언제나 내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 달려와 주었다. 자존심이 세서 다른 친구들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여 왔는데, 왠지 언니한테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도 다 이해해주고 들어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마치 엄마처럼.

어느 날 언니에게 고백했다. “언니, 저 수련해야 될 거 같아요.”

살면서 늘 바란 게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남자 친구를 생각하거나 여행을 꿈꾼다든지 한순간도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수련을 하고 복닥복닥한 마음들을 버리자 잡념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온해졌다. 수련을 하면 마음이 버려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일할 때 일에만 집중하니 일의 효율도 2~3배로 늘어났다. 오직 그 순간에 몰입해서 산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싶다.

가끔 친구들은 내게 말하곤 한다. 평소에도 해피바이러스같이 밝은 네가 뭘 버릴 게 있냐고…. 난 솔직히 말한다. 그동안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많은 잡념들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하지만 이젠 정말 행복하다고. 그렇게 되기까지 함께해준 언니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순미 언니, 언니 진짜 완전 달라진 거 알아요? 언니, 짱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하늘마음이 되어 하늘을 난다는 것

이인재 39세. 소령. 공군 전투기 조종사

중학생 시절,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조종사를 꿈꾸었다. 저렇게 하늘을 날 수 있다면.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그렇게 공군사관학교를 입학하고, 졸업 후에 무사히 비행 훈련을 이수한 나는 드디어 공군 조종사가 되었다.

비행은 적성에 잘 맞았다. 하지만 내가 꿈꾸던 그런 생활은 아니었다. 하늘을 날고 있었지만, 하늘을 즐기고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공중에서는 쉴 새가 없다. 전투기동 중에는 그 넓은 하늘에서도 아차 하는 순간 공중 충돌이 일어날 수 있고, 폭격 임무 중에는 지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한순간도 주의를 딴 데로 돌릴 수가 없다. 실수하면 바로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항상 긴장하고 훈련을 받는다.

비행을 하고 내려오자마자 다시 내일 비행에 대한 준비, 새로운 비행 기술 연구, 끊임없이 신기술을 배우고, 나를 계발해야 한다는 압박감,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 문득문득 올라오는 공중에서의 사고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조직 생활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그런 마음들 속에서 언제나 바쁘기만 하고 보람도 없었다. 내 내면 깊숙이에는 뭔가 이런 나를 바꾸고 싶다는 욕구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에 소개된 마음수련 책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일주일 만에 본성을 찾는다’는 말이 다가왔다. 당직 근무를 서는 주말,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책에는 일주일 만에 본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설득력 있게 소개돼 있었고,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나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지역수련원으로 가서, 수련을 시작했다.

나의 살아온 삶을 떠올리는데, 사관학교 4학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동기들과 롤링페이퍼를 적었는데 나에 대한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내 스스로는 배려심도 있고, 어느 정도 주변을 이해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대체적으로 ‘똥고집이다’ 등 고집이 세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변에서 느끼는 ‘나’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나를 돌아보노라니 사람들이 바라봤던 ‘나’가 맞았다. 독야청청 선비 스타일의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자라며 쌓아온 유교적인 관념, 관습의 틀. 원리 원칙적이며, 남한테 해를 끼치면 안 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끝까지 고집하는 융통성 없는 모습. 고등학교 때부터는 집을 떠나 자취와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지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만들어온 삶이었다.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있는 줄 알았다. 부모, 형제에 대한 고마움도, 선후배, 동료에 대한 고마움도 몰랐다. 뭐가 그렇게 옳고 바른지, 오직 나의 마음세계 속에서, 나만이 옳다고 똥고집을 부리며 살아온 삶이었다.

너무나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계속 내가 쌓아온 마음의 세계를 버려나갔다. 그렇게 버려나가는 순간, 다 버렸구나 느끼는 순간, ‘내 마음속 모든 것은 내가 만든 허상이었구나, 이 우주가 나였구나’라는 마음의 깨침이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하늘을 날고 싶었던 마음도, 나도 모르는 본성에 대한 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본성을 알고 난 뒤에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내 삶의 방향과 목표가 확실해졌다. 이제부터 부지런히 나를 닦아서 남은 마음을 다 버리고, 인간마음이 아닌 우주마음, 내 본성의 마음이 되어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니 여러 가지 걱정이나 불안함, 스트레스도 참 작아 보였고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외모도 많이 달라졌다. 한번은 운전면허증을 2종에서 1종으로 개종하러 간 적이 있었다. 운전면허증은 사관학교 때 찍었던 사진인데, 접수하는 분이 사진을 비교하더니, 본인이 아니라고 해 난감했던 적이 있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이 깍두기라고 할 정도로, 굳은 얼굴에 찢어진 눈, 인상이 날카롭고 불만 가득한 모습이었다. 인상 좀 펴고 다녀라 할 정도로. 그런데 마음을 버리는 과정에서 얼굴이 바뀐 것이다. 특히 눈빛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인상이 많이 온화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후 바쁜 조종사 생활 중에도, 수련은 빼놓지 않고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비행을 할 때였다. 비행기 좌석 위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고개만 들면 밤하늘의 별을 다 볼 수가 있다. 예전에는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느새 비행기도 없고, 나도 없고, 그 하늘만 있구나, 그 하늘이 나구나, 하면서 편안하게 하늘과 하나가 되는 나를 느꼈다. 수련을 통해 의식이 넓어지면 세상이 내가 되고 하나가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항공기와 하나가 되어서 조정하는 것을 ‘기인동체’라 하는데, 그것을 넘어 그 허공의 하늘과 하나가 되어 비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었다.

전투기 조종사에게 중요한 건 순간순간 변화하는 공중 상황에서의 정확한 상황 판단 능력이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 지상에서 땅을 밟고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기에 공중에서는, 간단한 덧셈 뺄셈도 어려울 정도로 지각 능력이 떨어진다. 거기에 위기 상황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이 표출이 되기 때문에 조종사들에게 마음수련은 꼭 필요하다.

마음수련을 하면 무의식의 마음까지 버려서, 항상 하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기에 어떤 상황에 처해지든 마음의 동요가 없다. 나 역시 공중에서의 상황 판단 능력이나 여유를 갖는 것이 마음수련을 하면서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것은 뭔가를 더 얻겠다는 더하기의 노력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쌓아둔 마음을 버리게 하는 마음수련만의 빼기 방법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었다.

때문에 매일 저녁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련원에 간다. 예전하고 똑같은 일상을 보내지만, 그 주체가 달라졌다. 이제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살아가던 그 녀석은 없어지고, 평온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사는 것이다.

안동식 냉이 나물 _ 보약보다 봄나물, 내 마음속 일품요리

경북 안동이 고향이신 어머니는 매년 봄이면 외할머니께서 보내주신 봄나물로 비빔밥을 해주셨습니다. 제 어린 시절을 통틀어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지요. 안동식 나물 요리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콩가루가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여러 나물을 한 냄비에 요리한다는 것입니다. 나물에 입힌 콩가루는 눈꽃처럼 붙어서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을 더해주고, 각각의 나물에서 나온 물이 어우러지면서 맛도 좋고 보기도 예쁜 한국적인 밥상이 만들어집니다.

“집에 늘 있는 거 있잖니. 콩나물, 무, 시래기랑, 냉이가 올라오면 캐놓고.
일단 넓은 냄비에 참기름, 콩나물을 넣고 달달 볶아서 한구석에 놓아.
거기다 무 채 썬 걸 넣고 달달 볶아서 또 한쪽에 놓고 물을 자박하게 부어.
한번 우르르 끓으면서 무랑 콩나물이 익겠제? 냉이랑 시래기는 물기를 싹~ 뺀 후
날콩가루를 골고루 묻혀서 그 무랑 콩나물 옆으로 살짝 넣으면 콩가루가 나물에 삭 붙는데
이때는 뚜껑을 잘 닫아야 비린내가 안 난다.
간은 국간장으로만 해주고 나서 한소끔 끓인 후 먹으면 된다.”

 

봄나물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봄이라는 계절에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겨울이 되면 몸을 웅크리고 영양분을 저장했다가, 봄을 맞아 세상으로 뻗어나갑니다. 봄나물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그 생동하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섭취하는 것이지요. 특히 봄나물 중에서도 냉이는 뿌리까지 통째로 먹는데요, 그 생김새에 걸맞게 몸 깊은 곳까지 에너지를 전해줍니다. 또 간에도 좋아서 해독과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봄철의 건강은 일년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봄나물 한 접시면 온 가족 일년치 보약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나물을 삶은 국물은 함께 보관해두었다가 촉촉한 나물 비빔밥을 만들어보세요. 청국장을 끓여 함께 비벼 먹으면 더 맛있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삽플랜트, 다 쓰인 후, 이 한 몸 자연을 위해 사라지리다

만든 사람 김장호 30세. 디자이너. 최종승 29세. 홍지수 26세

이름은?

삽플랜트(Saplant). 영어로 삽sap(수액, 영양)이란 뜻과 플랜트plant(식물, 심다)의 합성어다. 식물을 심는 데 활용한 삽을 땅에 꽂아두면 자연스럽게 녹아서 비료가 되는 ‘삽’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2008년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중국 사막에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방영한 적이 있다. 그때 심어진 나무 옆에는 또 다른 나무가 심겨졌는데 모래도 막아주고 영양분 역할을 하는 ‘사류나무’라고 했다. ‘사류나무의 역할을 삽이 대신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수명이 다하면 비료가 되는 삽플랜트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제품의 원리는?

 

고철로 만들어진 삽은 사용 기간에 비해 수명은 반영구적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쓰레기로 방치되고, 플라스틱으로 된 삽 또한 버려지면 환경을 오염시키게 된다. 그래서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비료 성분으로 된 재료를 알아보던 중 분해성 플라스틱을 만드는 특허 기술을 찾게 되었다. 이 플라스틱은 땅에서 1년 정도 지나면 서서히 없어져 비료가 된다. 그래서 수목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기업이나 NGO단체가 사막에 들고 간 삽을 버리거나 다시 들고 오는 대신, 땅에 꽂아만 두면 자연스럽게 비료화된다.

하고 싶은 말

 

처음 이 아이디어를 접한 사람들은 ‘삽은 딱딱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고철처럼 아주 단단하고 오래가는 삽이 필요하지는 않다. 사막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삽은 자연을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이니 자연에 실제적으로 이로운 디자인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덜 딱딱하고 덜 오래가더라도 식물을 위해 그런 편리함은 양보할 수 있는 인식을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최근에 개발된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강도가 세지고 분해 기간도 연장이 되었기 때문에 강도나, 사용 기간을 사용자의 요구에 맞게 개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종삽, NGO를 위한 삽 등으로 제품화되어 널리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페이스메이커, 청춘과 가장에게 던지는 격려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어느 운동회. 부모님이 없어 점심도 쫄쫄 굶어야 하는 형제에게 달리기란 어떤 의미였을까. 형은 배가 고픈 동생을 위해 달린다.

오로지 목표는 라면 한 박스. 1등이 아닌 2등을 해야 받을 수 있는 라면 한 박스를 위해 형은 1등을 할 수 있지만 2등으로 페이스를 맞춘다. 동생은 멀리서 우산으로 형의 페이스를 조절한다. 우산을 펴면 빨리 달리고 우산을 접으면 천천히 달리는 식이다. 이 장면은 ‘페이스메이커’라는 영화의 주제를 압축한다. 거기에는 꿈이나 일의 성과 혹은 주역이 되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달려야 했던 우리 시대의 모든 페이스메이커들의 삶이 담겨져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달리는 존재. ‘페이스메이커’는 그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울컥하게 만든다. 30킬로까지 주역(?)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달리고는 정작 남은 12.195킬로를 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늘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오로지 몸 하나에 의지해 결승점까지 가야 하는, 그것도 1등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로써 달려야 하는 페이스메이커의 마라톤은, 즐거움과는 상관없이 힘겨운 노동으로 집약되는, 일로서의 삶을 겪어온 가장들을 가장 잘 표현한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동생을 성공시키고는, 정작 자신은 노동에 피폐된 몸뚱어리 하나 덩그러니 안고 있으면서도, 그 잘된 동생만 보면 바보같이 웃는 가장들. 그런 형이 부담된다는 동생의 말에 질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도 모르고 동생을 힘들게 했다며 자책하는 그런 존재들. ‘페이스메이커’는 이들에게 던지는 헌사 같은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가장을 대변하는 듯한 페이스메이커 만호 옆에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듯 세워놓은 신세대 미녀새(장대높이뛰기 선수) 지원(고아라)이란 존재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만호의 질문은 그래서 이 한 시대를 겪은 가장 같은 인물이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상투적일 수 있는 이야기조차, 온몸으로 말하는 페이스메이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에 상투성을 넘어선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가장들과 청춘들이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는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 1등을 하기 위해 달릴 때, 자신은 살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는 꿈꿔보라고 아낌없이 보내는 응원.
김명민은 이 영화가 결국 대사 몇 마디가 아니라 몸으로 말해줘야 그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배우였다. 완벽하게 페이스메이커로 빙의된 김명민은 어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과 비쩍 마른 체구, 그리고 달리고 달려서 너덜너덜해진 발바닥 같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몸 자체로 이 진심을 전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김명민의 얼굴과 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슴이 찡해질 수밖에 없다.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달려 나간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처지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그 레이스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로 달리기도 한다. 이 김명민이라는 놀라운 배우에 의해 완성된 ‘페이스메이커’를 보면서 울컥했다면 당신은 어쩌면 이 사회 속에서 때때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부지불식간에 해온 장본인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 주변의 누군가가 당신의 페이스메이커였는지도.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자꾸만 자신을 또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누군가 1등을 하기 위해 달릴 때, 자신은 살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는 꿈꿔보라고 아낌없이 보내는 응원.

문화칼럼니스트 정덕현님은 대중문화평론가, 출판 편집자, 작가로도 활동 중이며, 푸른미디어상 심사위원,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심사위원이기도 합니다. 현재 문화비평 블로그 더키앙(thekian.net)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춘삼월 눈 녹듯 한다’는 말처럼

춘설이 내린 3월의 첫날 아침, 고봉산을 찾았습니다. 눈은 머리에 이었지만 생물들의 몸짓은 모두 경쾌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봄은 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춘삼월 눈 녹듯 한다’는 말처럼….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니 어느새 눈이 녹아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 봄에 다 녹아내리면 좋겠습니다.

2006년 3월. 경기도 일산 고봉산에서

사진, 글 김선규

조잘조잘 버들강아지들의 수다

“쟤는 봄이 온 줄 알고 먼저 외투를 벗었다가 동상에 걸려 눈이 삐뚤어졌대.” “정말? 하하하~, 미안해, 자꾸 웃음이 나와서~ㅋㅋ” “쳇, 햇살이 얼마나 따뜻한지, 난 정말 봄이 온 줄 알았다고.” “봄이 얼마나 장난꾸러기인데, 봄 장난에 네가 당한 거야. 하하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버들강아지들입니다. 조잘조잘~ 재잘재잘~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꼭 눈 달린 털북숭이 도깨비같이 생긴 녀석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저 여린 솜털로 누구 간질이면 참 재미있겠는데요~ㅎㅎ

2005년 3월.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에서

 

꽃잎들이여, 나비가 되어라

이른 봄, 앙상한 꽃대 위에 하얀 나비들이 어른거립니다. 가까이 가보니 지난겨울 눈보라에 용케 살아남은 산수국의 가짜 꽃잎들입니다. 여름 장마철에 꽃을 피우는 산수국은 번식을 위해 가짜 꽃잎(꽃받침)을 활짝 펴고 벌과 나비를 부르지요. 가장자리 꽃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꽃 모양인데 수정이 안 되는 가짜 꽃인 겁니다. 여름내 수수한 꽃 대신 화려한 치장을 하고 꽃과 나비를 유혹하던 꽃받침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빛바랜 가짜 꽃잎들은 이제 나비처럼 보입니다. 가짜 꽃잎으로 살던 생은 마감하고, 나비로 환생하여 훨훨 날고 싶었던 그 마음. 그 마음 그대로 전해져 우리도 함께 날아갑니다.

2006년 3월. 경기도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하늘이 태어난 땅 한반도

프랑스에서 생태전문가이자 항공사진가로 활동 중인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 4년 동안 한반도 하늘을 날면서 우리나라를 재발견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하늘에서 본 땅과 바다 그리고 다양한 자연의 오브제들은 신神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빚을 수 없는 자연의 미학美學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의 항공사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내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우리만의 시각으로 촬영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2008년 10월부터 2010년 8월까지 2년간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비행을 했다.

사진, 글 이태훈

충남 보령 _ 붉은빛을 토해내는 황토. 이 땅에서 우리는 먹을 것과 삶의 원동력 그리고 다양한 인생을 배운다.

항공사진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시각을 선사한다. 수평에서 보는 세상과 수직으로 보는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하늘에서 보면 조형적이고 입체적으로 다가와 피사체가 아주 독특하게 보인다. 하늘에서 본 한반도의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신神이 빚어놓은 자연의 소나타는 감히 인간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줬다.

우리나라 산하 특유의 선의 부드러움, 형형색색의 나무와 숲, 수백 년 동안 만들어진 논두렁, 인간의 따스한 마음을 품은 산길 등 무심코 지나쳤던 산과 들 그리고 바다는, 조형적이면서 화려한 색채가 눈을 즐겁게 하였다.

전북 전주 _ 마치 거대한 잎사귀를 햇살에 비춰 보는 것처럼 독특한 모양을 가진 전주 지역의 논 풍경이다. 모내기를 한 논은 새로운 생명을 키워낸다.

충남 대천 _ 대천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지만 내륙으로 들어오면 아름다운 논 풍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댄 논에 개구리밥이 올라와 또 다른 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한 대한민국은 색色이 굉장히 다양하고 수려하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곳, 한반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출생지 또한 무한한 우주이며, 우주의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이 땅 만물의 근원 또한 하늘이 아닌가. 우주는 그렇게 노란 꽃, 붉은 꽃, 노루와 토끼와 사슴을, 강과 산과 들이라는 형형색색의 하늘을 이 땅에 탄생시킨 것이다.

충남 태안 안면도 _ 인간의 노력으로 일궈낸 간석지는 자로 잰 듯한 논두렁이 인상적인 곳이다. 하지만 꼬불꼬불한 논두렁이 주는 아스라한 향수는 조금 부족하다.

이태훈 사진가는 1970년 강원도 태백 생으로 <스포츠서울>과 <월간조선>에서 12년간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여행 칼럼니스트, 프리랜서 사진가, 여가 문화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뷰티풀 코리아> <뷰티풀 티베트> <하늘이 내린 선물> <끌리다 거닐다 홀리다>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 100> 등이 있습니다.

순천 미인

일개미 같은 어머니입니다. 동생을 보낸 뒤부터 당신의 노동은 텃밭으로 옮겨 갔습니다.

맑은 하늘 구름에 앉아 어머니 집을 내려다봅니다. 눈 아래 아득한 성냥갑 집에서 허리 굽은 점 하나가 나옵니다. 그 점을 따라 한참 동안 눈길을 긋습니다. 어머니 발자국이 남긴 실곡선이 텃밭과 마당에 가득합니다.

부엌강아지 같은 어머니입니다. 아직도 목이 늘어진 양말을 기워 신고 밭일을 나가십니다. 내 아들이 초등학교 때 입던 낡은 내복이 제일 따습다며 한겨울을 나십니다. 온종일 바람과 흙과 먼지에 절은 당신 모습은 천상 아궁이를 나온 부엌강아지 같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요일이 되면 꽃단장을 하십니다. 새벽부터 목간을 하시고 플라스틱 퍼머롤로 머리를 말아 올리고 장롱에 아껴둔 새 옷을 꺼내 이것저것 입어봅니다. 구두도 꺼내 반짝반짝 닦아 둡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멀리 떠나보내고부터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갑니다. 당신이 더 이상 품어 돌보아줄 수 없는 자식을, 하늘에 계신 그분에게 기원하기 위함이지요.

역시 옷이 날개입니다. 그렇게 차리고 나서니 원래 인물이 나옵니다. 하긴 사람들이 북적대는 장마당 어물전에서도, 나는 인파 속에 있는 내 어머니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계절에 어울리는 예쁜 모자나 고운 머플러를 머리에 곱게 두른 이가 내 어머니입니다.

몇 해 전,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서울내기 친구들이 우리 집까지 놀러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어머니에게 옷 선물을 보냈습니다.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를 입고 미소 짓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사진에 담아, 친구들에게 답례로 보냈습니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맑고 깨끗한 얼굴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오 년 만에 그 친구들이 다시 왔습니다. 그때처럼 하룻밤을 묵고 서울로 돌아간 친구들이 또 어머니 옷을 사 보냈습니다. ‘순천 미인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주세요’라고 쓴 편지도 동봉했고요. 그래서 새 옷 입은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아! 우리 어머니가 늙으셨습니다. 허리가 한쪽으로 많이 굽고 살이 빠져 수수깡처럼 야위었습니다. 고작 오 년밖에 안 지났는데 백발이 성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지난 장날 함께 장을 보다가 당신이 문득 내게 물었습니다. “애비야, 내가 쩌그 가고 있는 저 할매만큼 허리가 굽었냐?” 나는 얼른 아니라며 가던 길을 재촉했지요. 그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늙으면 다 그런 거이다. 오그라지고 비틀어져 못쓰게 되는 거이다.”

일요일이 왔습니다. 순천 미인께서 오늘도 단아하게 차려입었습니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서울에서 보내온 새 옷을 입고 집을 나섭니다. 순천 동천 긴 방죽길이 훤합니다. 역시 사진은 믿을 게 못 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실물이 최곱니다. 오늘 교회에 가면 예수님께서 활짝 웃으시며 이렇게 말하실 것 같습니다. “서여사님, 정말 예쁩니다. 데이트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최형식

길고양이와의 만남, 그 4년의 기록

이용한 여행 사진가. <나쁜 고양이는 없다> 저자

2007년 12월 초,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내가 집 앞에서 전화를 했다. 잠깐 나와 보라고. 달빛이 파랗게 골목을 비추던 밤이었다. 버려진 은갈색 소파에 한 마리의 어미 고양이와 다섯 마리의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오들오들 떨면서 “제발 우리를 해치지 말아요!”라고 말하던 그 눈빛! 하늘에서 막 떨어진 별빛 같은, 너무 아름다워서 왠지 측은해 보이는, 그 눈빛에 나는 한없이 끌렸다.

길고양이에 대해 무관심했던 나와 고양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녀석들을 다시 만난 것은 보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집을 나서는데, 집 앞 컨테이너 공터에 어미 고양이와 다섯 마리 아기 고양이가 햇빛 속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녀석들을 위해 먹이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치던 녀석들이 처음으로 나의 접근을 허락했다. 카메라를 들고 나와 녀석들의 모습을 담은 것도 이날부터였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 삼아 녀석들을 찍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너무도 용감하게 카메라 앞으로 다가왔고, 카메라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 특히 붙임성이 좋았던 ‘희봉이’라는 고양이는 내 발밑까지 다가와 몸을 부비고, 더러는 렌즈가 더럽다며 혀로 렌즈를 닦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녀석들의 성장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기록하는 동안, 점차 더 많은 길고양이들이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도 먹이를 주고, 성장 과정을 꾸준히 지켜보며 기록했다. 어느새 내 수첩엔, 여행 대신 고양이가 적혀 있었다.

2009년 3월, 나는 도심에서 시골로 이사를 갔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도, 나는 마당 구석에 고양이 먹이 그릇을 마련하고, ‘길고양이 먹이 주기’를 시작했다.

영역을 옮긴 뒤, 나에게로 왔던 첫 번째 고양이는 ‘바람이’였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녀석의 이름을 ‘바람이’라고 지어주었다.

녀석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은 먹이를 준 지 약 3개월 만이었다. 3개월 정도 흐르자 녀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을 찾았지만, 여전히 무뚝뚝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바람이가 세 번이나 고맙다며 새 선물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종종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선물을 한다. 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힘들게 사냥한 것을 선물하곤 하는데, 그것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선물이란 것이 쥐라든가 새, 혹은 나방이나 벌레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서너 번 길고양이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았다. 7개월 정도 먹이를 주며 보살펴왔던 ‘희봉이’는 집 앞에 쥐 한 마리를 두고 갔고, 길고양이 출신인 ‘랭보’는 집으로 온 뒤 첫 사냥에 성공한 나방을 물어다 내 앞에 놓고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 만난 가장 기억에 남는 고양이는 우리 마을 최고의 꽃미냥이었던 ‘달타냥’이다. 달타냥은 파란대문 집 할머니가 키우는 고양이었는데, 거의 온종일 마당과 길에서 생활하는 길고양이나 다름없었다. 신기한 것은 이 녀석은 항상 마실 가는 할머니를 줄레줄레 따라가는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할머니는 점심 무렵이나 오후 네댓 시가 되면 경로당이 있는 마을회관으로 마실을 가시곤 한다. 이때 어김없이 할머니 뒤에는 달타냥이 동행을 한다. 녀석은 할머니가 무사히 마을회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회관 앞 차 밑에서 얌전하게 지켜본 후 다시 혼자서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온다.

파란대문 집과 마을회관의 거리는 약 50~60미터 정도. 집으로 돌아온 녀석은 이때부터 대문 밖 길가에 나앉아 회관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회관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오면 녀석은 다시 회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마중을 나간다.

“어릴 때부텀 키워서 그렁가, 사람을 잘 따라대니유.”

할머니는 당초 쥐를 잡기 위해 키웠는데, 쥐만 잡는 게 아니라 혼자 사는 할머니의 길동무까지 되어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작년 봄, 달타냥은 고양이별로 돌아갔다. 동네 사람들의, “텃밭 파헤치니 고양이 좀 묶어놓으라”는 성화에 고양이를 묶어놓았는데, 그 줄이 올무처럼 잘못 묶여 죽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는 밤나무 옆에 묻어주었노라며 눈물을 훔쳤다.

“정이 들었쥬. 3년이나 같이 살았는데유. 내가 딸네 집 가느라구 그때 열흘이나 집을 비우구 왔더니만, 저기 대문에서부터 쫓아와서는 앞에 막 드러눕구, 얼굴을 비비구. 그런 고양이가 어딨어유. 밭에 갈 때두 따라오구, 회관 갈 때두 따라오구.”

혼자 사는 독거노인인 할머니에게, 친구이자 아들이나 다름없었던 달타냥. 집으로 돌아오며 자꾸만 달타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참이나 펑펑 울고 말았다.

그동안 고양이 책을 내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길고양이에게 전해달라며 사료 후원을 받은 것만도 100여 포대 이상. 그 사료는 고스란히 길고양이의 생명을 구하고, 인간의 사랑을 전하는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고양이를 싫어하던 고깃집 아저씨가 완전히 바뀌어서, 텃밭에다 길고양이 집까지 지어주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길고양이를 쓰레기나 뒤지는 도둑고양이 취급을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길고양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길에서 태어난 고양이는 길어야 3년, 이 세상을 살다 간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흔하지만, 항변하지 않고, 토 달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고양이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고양이 사진을 통해 내가 말하려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이야기….

이 땅에 고양이로 태어나 한평생 천대받고 살다가 고양이별로 돌아가는 고양이의 삶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대부분은 콧방귀를 뀔 게 분명한 고양이 이야기를 저 바람에게라도 들려주고 싶었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고양이도 이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이고, 살아갈 권리를 갖는 동물이니 해치지만 말아달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이것뿐이다.

집냥이가 10~15년이란 수명을 사는 것에 비해 길고양이는 인간의 포획과 교통사고, 먹이를 구해야 한다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고작 평균 수명이 3~5년밖에 되지 않는다.  먹이를 주면 길고양이 개체수가 증가할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영역 생활을 하는 길고양이는 먹이를 준다고 해서 그 영역으로 우르르 모여들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먹이 급식을 받는 길고양이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뜯지 않음으로써 거리의 환경에 도움이 되고, 생존의 안정성을 느껴 새끼를 덜 낳게 된다.

2010년 가을 어미를 잃고 애타게 울던 꼬리 짧은 고양이 꼬미. 꼬미의 단짝인 재미는 꼬미의 할머니인 대모가 낳은 아기 고양이다. 꼬미와 재미가 놀다가, 꼬미 녀석이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미끄러지자, 재미가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꼬미에게 손(앞발)을 내밀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렌즈를 통해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공연히 가슴이 느꺼워졌다.

덩달이와 두 마리의 강아지도 못 말리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다. 덩달이가 사는 마당에는 본래 덩달이와 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곳에 두 마리의 강아지가 태어났고, 어느 정도 걷게 되면서 녀석들은 줄기차게 덩달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이제 많이 컸지만, 여전히 덩달이만 보면 핥아대고 올라타고 짓누르고 물어뜯고 장난을 친다. 성격 좋은 덩달이는 그런 강아지들의 장난을 다 받아내고 있다.

어디를 가든 붙어 다니는 너무 다정한 길고양이 남매.  어미냥이 떠나면서 얌이는 이제 오빠인 멍이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애교도 떤다. 멍이는 그런 얌이를 다 받아주는 든든한 오빠다.

이용한 작가는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15년간을 여행가로 살았다. 2007년 12월, 우연히 집 앞에서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를 만나게 된 인연으로, 블로그에 ‘길고양이보고서’를 꾸준히 연재해왔다. 저서로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명랑하라 고양이> <나쁜 고양이는 없다>를 출간했고, 2011년 11월에는 영화 <고양이춤>을 개봉했다. 그 외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여행에세이 <바람의 여행자>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등을 펴냈다. 블로그 gurum.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