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에는 타인을 축복할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격려가 담긴 시선과 미소의 힘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
우리가 한데 섞이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인내하면서 함께 조화를 이룰 수만 있다면,
가장 큰 고리인 우리의 세상은 더 좋은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초가지붕을 보면 아름답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우리 선조들은 그 지붕을 한갓 보기에만 좋으라고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밖에서 거센 바람이 불 때에도 방 안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바람을 잘 지나가게 만든 유선형의 둥근 지붕 덕택이었다. 백두산이나 독도 등 비바람이 강한 곳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을 보면 오밀조밀 함께 모여 둥근 방석 모양의 유선형 지붕(돔)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선형 돔으로 태풍과 맞먹는 백두산의 비바람을 잘 견뎌낼 뿐 아니라 햇볕을 골고루 받아 광합성도 잘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선조들은 이 풀들에게서 거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둥근 지붕을 만드는 지혜를 배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감정의 확산이 단지 친구 간뿐만 아니라 친구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와 그 너머까지도 확산이 일어나는지 밝혀내고 싶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감정과 사회적 연결을 측정하는 자료를 모았다. 그런 다음, 행복의 소셜 네트워크를 그래프로 그렸다. 2000년에 매사추세츠주 프레이밍엄에 살던 사람 1만 2067명 중 선택한 표본 집단에서 형제와 친구, 배우자들 사이의 유대를 그들의 행복 수준과 함께 보여주었다. 네트워크 분석 결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1단계 거리)이 행복할 경우 당사자가 행복할 확률은 약 15% 더 높아진다. 2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친구의 친구)에 대한 행복 확산 효과는 10%, 3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친구의 친구의 친구)에 대한 행복 확산 효과는 약 6%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런 효과들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임금을 더 많이 받는 효과와 비교해 보면 달라진다. 1984년에 5,000달러를 추가로 더 받을 경우, 그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비율은 겨우 2% 증가하는 데 그쳤다. 결과적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가능성이 있는 3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 지갑에 들어 있는 수백 달러보다 우리의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놀라운 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꼭 슈퍼스타여야만 그런 힘이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도처로 뻗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 각자가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잘 돌볼 때,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를 잘 돌보게 된다. 우리가 가끔 친절을 베풀면, 그것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에게 전파될 수 있다.
품앗이, 두레, 향약….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문화가 발달했다. 품앗이는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돌아가며 일손을 덜어주는 것이고, 두레는 훨씬 대규모의 공동 작업이었다. 온 동네의 농민이 모두 참여하여 모심기와 김매기, 나락 베기, 타작 등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 안에 중병을 앓거나 불구자,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의 농사를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어주는 제도도 있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같이 도와주고,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으며 살았던 것이 우리 민족의 본성이었다.
아버지, 웃음을 되찾다
홍연희 23세. 대학생.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중학교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빠가 빚보증을 잘못 서게 되면서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평온했던 집안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다행히 거리로 나앉는 신세는 면했지만 좁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아빠는 몇 년간 멀리 떨어져 지내며 돈을 버셨다.
무뚝뚝한 경상도 스타일의 아빠를 예전부터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일이 있고부터는 더 미웠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힘들어지고 엄마와 아빠가 자주 싸우게 된 것도 모두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아빠가 집에 오셔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화가 없었다. 아버지 스스로도 모든 원인을 당신 탓으로 돌리셔서 그런지 얼굴은 늘 어두우셨고 비쩍 마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철이 없었던 나는 내 자존심을 신경 쓰기에 바빴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거나 우리 집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창피하고 속이 상했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같이 있을 때면 말끝마다 틱틱거렸고, 밥을 먹다가도 엄마 아빠의 말다툼에 짜증을 내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고등학교 때쯤 아빠가 친척 어른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시작했다고 했다. 6개월 정도 수련을 하고 오신 아빠는 한눈에 봐도 얼굴이 굉장히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청소며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시면서 가족을 세세하게 챙겨주셨다.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이는 아빠, 마음의 큰 고비를 넘어갔음이 느껴졌다. 말은 없으셨지만 아빠의 편안한 마음이 가족 전체에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우리 가족 모두는 수련을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아빠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엄마 역시 내색은 안 하셨어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고, 언니도 장녀로서 부담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수련을 하고부터는 서로 간에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수련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성실히 버신 돈을 빚보증으로 한순간에 잃고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드셨을 텐데 가족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그 짐을 혼자서 감당해내신 아빠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그리고 홀로 떨어져 가장 힘들게 지내셨을 때 오히려 짜증 부리고 철없이 행동했던 게 너무 죄송해서 눈물이 많이 흘렀다. 언제나 아빠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모르는 척하며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아빠를 부끄럽게 여겼던 내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지금 아빠는 택시 운전을 하신다. 허리가 안 좋으신데도 아침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24시간, 우리를 위해 쉬지 않으신다. 식사하시러 집에 잠시 들러서도 힘든 내색 한번 없이 장난도 치시고,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도 틈틈이 해주고 나가시는 걸 보면 내가 봐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도 그런 아빠를 보면서 “옛날 같았으면 회사 다니던 사람이 이렇게 힘든 택시 운전 일은 절대 못 했을 거다” 하시며 놀라워하신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언제나 “그래~”라는 대답으로 수용해주시는 아빠, 친구같이 자상하고 든든한 아빠가 너무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아빠, 우리 가족은 마음수련 만나서 참 복 받았어요, 그죠? 가족을 위해 고단한 일도 마다 않고 늘 웃으며 지켜봐주시는 아빠, 너무 고맙고 지금처럼 늘 행복하게 살아요. 사랑해~♡”
마음수련, 그 끝자리에 이르다,박준옥 할머니
정리 최창원 사진 홍성훈
‘정말 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았어요. 자식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았지.’ 열여섯에 결혼하여 2남 2녀를 둔 박준옥(84) 할머니의 삶은 고달프고 힘든 날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비록 일자무식이었지만 도대체 사람은 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 가야 하는지, 죽으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가 평생의 의문이었습니다. 그 해답이나 알고 죽으면 원이 없겠던 어느 날 할머니는 마음수련을 만났습니다. 할머니의 나이 72살 때였습니다.
마음을 버린 만큼 속이 후련해졌습니다.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고 평생의 의문들도 풀렸습니다. 그것이 그저 신기하고 감사했던 할머니는 매일매일 지극하게 수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할머니는 마음수련의 끝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나로부터 벗어나니, 이제는 참으로 걱정도 근심도 없다는 박준옥 할머니의 그 행복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지요. 학교는 한 번도 다니질 못 했어요. 어른들이 여자는 공부를 하면 안 된다고 하시니. 엄청스레 배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열심히 집안일 돕다 열여섯에 시집을 갔어요. 그 당시에 시집살이야 다 똑같았지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어른들 밥해드리고,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서 또 방아 찧고…. 그래도 일하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내가 요래 쪼만해도 쉬지 않고 움직여요. 내가 조금이라도 더 해야 다른 사람이 편하니까요.
그래도 영감님이 일할 생각을 안 하는기는 참 힘들었어요. 양반입네 하면서, 농사짓고, 소 먹이고 길쌈해서 여자들이 모아놓은 돈, 아무 데나 써 버리고. 돈 다 쓰면 들어와 옷만 갈아입고 또 나가고. 그래도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대수롭지 않은 말끝에 “아이, 그건 아닌데요.” 이 소리만 해도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다 집어던지고 하니, 그저 ‘예’ 소리밖에 못 하고 살았지요.
아그들은 크고, 내가 못 배운기 한이 맺혀서 자식들만은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야겠다 싶어서 돈을 벌러 댕기기 시작했어요. 그때 텔레비 덮거나, 전화 받침대로 쓰는 하얀 수예품 파는 걸 했어요. 천을 재단해서 동네 사람들한테 주고 만들어서 오면, 다림질을 참하게 해서 수예점에 갖다 주는 건데, 부산으로 마산으로 어데로든 갔어요. 너무 아파서 길에서 쓰러지지 싶어도, 어떻게든 가요. 내가 경상도 말로 악바리 같았거든. 장사하면서 수모도 엄청스레 당했지요. 그 고생은요, 자식 때문에 하지, 지가 쓸라고 하면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워낙이 못난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평생을 누구한테 어떻다 저렇다 화를 낸 적도 없고, 거절한 적도 없었어요. 삶이 너무 고달팠지요. 내가 뭐 하러 태어났나. 살아서 왜 이런 봉변을 당하나, 특히 영감님 때문에 괴로웠어요. 겉으로는 정성껏 모시는데, 자꾸 속으로는 미움이 쌓여서 응어리가 여기 가슴께에 뭉쳐 있었지요.
그래서 그렇게 진리를 찾아댕겼어요. 이 마음 벗어버리고 싶어서, 다음 생에는 이렇게 안 태어나고 싶어서….
그러다가 2000년에 마음수련을 하게 됐지요. 처음엔 내가 이렇게 무식한데 수련을 할 수 있겠나 싶은기, “지는 등신인데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물었어요. 그랬더니 “자기 안에 답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공부입니다” 하시대요.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대요. 마음수련의 가르침을 100% 믿고 참 열심히 했지요.
처음에는 내가 본 거, 들은 거, 살아온 삶을 다 버리라 하대요. 나를 버릴 수 있다는 게 얼매나 좋은지. 나는 맨날 죽고 싶었으니까. 없어지고 싶었으니까. 너무 좋아서 하루에 열네 시간씩 공부를 했어요. 자식들 키우던 거, 장사하면서 수모당했던 거, 영감 때문에 힘들었던 거…. 뭐 얼매나 풍덩풍덩 잘 버려지던지. 한날은 탁 내가 없어지면서, 아 나는 원래 없었구나, 이 우주가 나였구나, 그 깨침이 저절로 와요. 아이구야, 내가 그동안 꿈꾸고 있었구나. 알게 되니 어찌나 신나고 재미가 있는지요. 하하.
매 과정마다 확연히, 내가 다 없어질 때까지 했어요. 3과정을 할 때는 내 의식이 확 커지더만 우주가 확 들어오는기라. 에고, 우주가 내 안에 있구나. 배운 게 없으니 뭐라 설명은 못 해도 너무 좋은거라. 한번은 이 우주에서 마음으로 가는 데까지 한번 가봐라 하시대요. 옛날에 시골에 멍석을 펴고 누웠으면 별똥별이 뻗치는 걸 보잖아요. 그렇게 뻗치는 거같이 그날 밤에 계속 끝까지 올라가봤어요. 암만 올라가도 끝이 없어요. 반대로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어요. ‘아, 끝이 없구나. 아, 이 우주허공은 끝이 없구나’를 알겠대요.
그렇게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 날 탁 이 우주허공 자체와 하나가 되고, 나라는 것은 일체 하나도 없어요. 흔적조차 없어요. ‘아, 이 자체의 몸 마음으로 나서 영원히 사는 거구나’ 그걸 내 마음이 알대요. 와~ 좋구나. 그 마음은 말로 할 수도 없죠. 어떻게 이 보잘것없는 내가 우예 여태까지 살아서, 이 공부를 하게 됐을까. 그 감사함을 생각하니 그렇게 눈물이 쏟아져요. 내가 그 험한 세상 산 것도 이 공부를 하려고 했구나 싶은기.
영감을 미워했던 것도 다 내 잘못이라는 것도 알겠대요.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을 만난 건 내 업이거든요. 내가 자식이다 뭐다 마음에 넣고 그렇게 원망했구나, 싶어서 무척이나 잘못했다고 많이 했어요.
영감이 오래 편찮아서 대소변도 받아내고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괜찮았어요. 그래 2002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내 딴에는 한다고 했어요.
이 세상에 모든 게 내 탓이 아닌 게 전혀 없어요. 이걸 알면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어요. 내 탓이라는 걸 알고 열심히 버리기만 하면 진짜 많은 행복을 다 가질 수 있어요.
평생을 그렇게 괴롭고 괴로워서 죽고 싶다고 살았는데, 이 공부를 하니까 지금은 걱정도 없제 근심도 없제 얼마나 행복한지요. 물론 옛날에도 살면서 행복한 적이 있었지요. 자식들이 대학교 가고, 직장 나갈 때, 결혼할 때, 손자 볼 때…. 근데 그건 그때만 빤짝이라요. 조금 지나면 그 아가 커서 잘못될까 봐 걱정, 못사는 놈은 잘살아야 될 텐데 걱정, 잘사는 놈은 계속 잘살아야 할 텐데 걱정. 눈감기 전까지 걱정이라. 지금은 자식에 대한 마음을 딱 놨더니 아이고, 이렇게 편한 걸, 이렇게 좋은 걸요.
항상 속에서 웃음이, 행복함이, 감사합니다 소리가 막 나오지요. 내가 이렇게 영원한 세상에 나서 대자유로, 대해탈로 사는데, 안 행복할 수가 없잖아요.
이 공부는요, 좋다는 그 말 너머에 있는 말할 수 없이 참 좋은 자리예요. 자기가 그 자체가 되어보면 모두 알아요.
단호박크림파스타
{ 재료 }
스파게티 70g, 단호박 1/8개, 양파 1/4개, 파 5cm, 대구전 6개, 허브솔트 약간, 밀가루 약간, 올리브오일 약간, 우유 1컵
{ 만들기 }
① 스파게티는 봉지에 적힌 시간대로 소금물에 넣어 삶는다. 삶은 물은 1컵 정도 남겨둔다. ② 단호박은 껍질을 벗겨 한입 크기로 썬다. 양파는 도톰하게 채 썰고, 파는 어슷 썬다. ③ 대구전은 키친타월에 올려 수분을 제거한 후 허브솔트를 뿌리고 겉면에 밀가루 옷을 한 번 입힌다. ④ 팬을 달궈 올리브오일을 두른 후 밀가루 옷을 입힌 대구전을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⑤ 대구전을 익힌 팬에 약한 불에서 양파와 단호박을 넣고 5분 정도 볶다가 양파가 노릇해지면 파스타 삶은 물을 넣고 단호박이 익을 때까지 끓인다. ⑥ 단호박이 익으면 우유를 넣고 한소끔 끓인 후 삶은 스파게티와 파, 대구전을 넣고 한 번 더 골고루 섞은 후 허브솔트로 간한다.
파스타를 삶은 물로 단호박을 삶으면 농도도 짙어지고 단호박의 단맛이 우러나와 더욱 고소해요. 단호박은 취향에 따라 양을 늘려도 되지만 단맛이 강하니 조심하세요!
자동으로 표시해주는 똑똑한 책갈피 ‘알바트로스’
이름은?
알바트로스 책갈피(Albatros Bookmark). 책갈피의 모양이 알바트로스라는 바다 새의 큰 날개를 연상시켜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프랑스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라는 시가 연관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책갈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종잇조각을 갖고 놀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만들게 되었다.
제품의 원리는?
책갈피로서의 제 기능만 잘하도록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려고 했다. 아주 얇은 폴리에스테르 조각에다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접착제를 이용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사용해도 책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순식간에 책갈피가 이동해서 페이지를 표시해주기 때문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올 때, 버스를 타야 할 때도 그냥 책을 덮어 가방에 넣으면 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책갈피를 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대로 두거나, 접착성이 남아 있는 한 다른 책에 재사용할 수 있다. 700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 아니라면 수첩, 스케치북, 일기장 등 다양한 형태의 책에 사용할 수 있다.
주변의 반응은?
“왜 이걸 진작 생각 못 했을까?”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책갈피를 실제 판매하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선주문 후 배송 형식으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4만5천 달러가 모였고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배송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믿고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만든 사람 오스카 레르미트(Oscar Lhermitte) 26세. 디자이너. 영국 런던 거주
언터처블, 1%의 우정
정말 오랜만에 억지스럽지 않은 웃음을 내내 머금게 만든 영화를 만났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내 곁에도 드리스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제멋대로이고, 깐족거려도 저렇게 유쾌한 사람이 옆에 있다면 나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 같다. 1%의 우정이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상위 1% 귀족남 필립과 하위 1% 무일푼 드리스의 우정을 그리면서 인종차별과 소통에 대한 화두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백만장자 필립(프랑수아 클루제)은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후, 하루 종일 그를 돌보아줄 도우미를 찾는 중이다. 면접 자리에 방금 막 출소한, 가진 거라곤 건강한 몸밖에 없는 하위 1%의 드리스(오마 사이)가 나타난다. 단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서류에 도장만 찍으러 왔던 드리스는 거침없고 자유분방하다. 그런 드리스에게 필립은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드리스는 필립의 화려한 집과 넓은 욕실에 반해 버린다.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부터 시종일관 유쾌하게 흘러간다. 상위 1%와 하위 1%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필립과 드리스는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서로의 삶의 방식이 달랐던 이들이 관계를 맺어 가는 과정도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좋고 싫음의 내색도 거침없고, 매사가 제멋대로인 드리스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고용주로서 적절히 통제하려 드는 필립을 드리스는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필립을 돌보아준다.
필립과 드리스의 문화적 충돌 상황은 영화를 더욱 유쾌하게 한다. 고가의 미술품을 가지고 이야기하던 장면도, 오페라를 보러 간 장면도, 가족들이 필립의 생일을 맞아 오케스트라를 집으로 불러 클래식 연주를 하던 장면도 그렇다. 상대방의 취미를 존중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로도 웃음을 자아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젠틀하고 항상 바른 생활만 했을 것 같던 필립에게 드리스는 지겹고 답답한 집안에서의 생활 대신 일탈의 짜릿함을 안겨주고, 건강한 몸 말고는 잘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던 드리스에게 필립은 물질적 도움은 물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음을 인정받게 해준다. 장애와 비장애, 빈과 부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었던 둘은 어느새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가 된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할 것 같았던 드리스에게선 어설프지만 늘 최선을 다해 필립을 도와주려 했던 따뜻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고, 깐깐하고 딱딱하기만 할 것 같았던 필립에게선 천진난만하고 개구쟁이 같은 미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란 그런 건가 보다. 내게 없는 것들을 통해, 나를 비춰보게 하는 존재. 때문에 친구와 손잡고 가서 보면 더없이 괜찮을 것 같다. 억지스러움도, 신파도, 블랙 코미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과 따뜻함을 담은 <언터처블: 1%의 우정>은 그렇게 따뜻한 봄날 같은 영화다.
글 정지희 문화칼럼니스트
봄이여 봄이여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
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사진, 글 김선규
신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 땅 곳곳에서, 아기 같은 손 내밀며 엄마 같은 봄 햇살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모든 약속 포기하더라도 이들과 그 기쁨 함께하기 위해 하루쯤은 비워두시길….
나무에 피는 연꽃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며 봄을 알리는 목련은 도시에서도 흔합니다. 혹자들은 피어 있을 때는 그리 화려하다가 너무 일찍 너무 처절하게 떨어지는 꽃잎이 가슴 아프다 말하지요. 하지만 사라질 때는 확실하게 사라지는 것이 바로 목련의 이치인 듯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우면,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 불리겠습니까.
윤미네 집
사진 전몽각 글 전윤미
아버지께서는 늘 카메라를 놓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싸울 때도, 울고 있을 때도, 산 정상에서 무서워 고개도 못 들고 어지러워할 때도, 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웃을 때도 우리를 찍고 계셨지요. 언제나 차고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 밑에서 매일 토닥댔지만 우애 깊은 삼 남매가 정말 행복하고 웃음 넘치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20여 년 전, 남편을 만나 결혼한 제게 아버지는 <윤미네 집>이란 사진집을 엮어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낯선 미국 땅에서 생활하던 딸에게 보내시는 응원과 사랑이었습니다. 사진집을 받았을 때 부모님께 감사하며 많은 힘을 얻었지만, 사진을 찍으시고 또 사진집으로 엮으신 그 절절한 부모님의 마음까지는 깊이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사진 속 어머니와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사랑 하나하나가 너무나 또렷이 느껴집니다. 사진에 등장하진 않지만 아버지는 항상 렌즈 너머에서 사랑의 시선으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매 순간 우리를 거두고 계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셨던, 가족의 순간순간을 일기 쓰듯 기록하신 아버지와 한없는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이젠 알 것 같아요.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자장면 세 그릇
중학생 2학년 때였다.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점심때가 되어서 부산역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역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경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탄다고 하셨다. 아! 자장면!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중화반점을 향해 조랑말처럼 달렸다. 빨간 차양이 드리워진 입구를 통과하자 뚱뚱한 반점 주인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는 속속 도착하는 들뜬 조랑말들을 2층 내실 안쪽 자리부터 착착 배치하였다. 선착순에 강한 나는 제일 먼저 자장면을 받아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해치웠다. 양이 너무 적었다. 간에 기별도 오지 않았다. 아쉽기 짝이 없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굶은 사람처럼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늦게 좁은 계단을 우르르 올라오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밀리다시피 하여 뒷걸음질을 쳤고, 어쩌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 빈자리에 다시 앉게 되었다. 친구 녀석들은 모두 자장 그릇에 코를 박고 있는지라 이런 상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바쁜 종업원도 내 앞에 또 한 그릇의 자장면을 내려놓았다.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뚝딱 두 그릇을 비우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미련 없이 일층으로 뚜벅뚜벅 내려오는데, 아래층에 계시던 선생님이 나를 보고 꽥 고함을 질렀다.
“야, 임마! 넌 왜 또 내려오는 것이야?”
아이들 지도하시느라 가뜩이나 시장하실 선생님에게 나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우물쭈물하였다. 그런 내 모습이 당신이 보시기에 힘없고 배고파 보였는지 선생님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여기 자장면 한 그릇 더 빨리 갖다 주소!”
선생님은 당신 자리를 옆으로 비켜 공간을 만들고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내 귀를 잡아당기며 ‘짜식, 멍청하게 제 자리도 못 잡고 말이야’라고 속삭였다. 내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왕재수! 나는 선생님 옆에 다소곳이 앉아 나무젓가락으로 마침내 세 그릇째 자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호박이 넝쿨째 무려 세 덩이나 떨어졌는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한때 가난한 것이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이 역전에 집결해서 완행열차를 기다리던 그 시간, 가정 형편상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아이들은 강둑에 모여 새마을 청소를 하였다. 우리는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긴 강둑을 쓸었다. 하필 그 시간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 열차가 강둑 위 철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강둑에서 비질을 하던 아이 한 명이 갑자기 기차를 향해 큰 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저 멀리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드는 아이가 보였다. 손나발을 만들어 이쪽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었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글 최형식
카투니스트 지현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내 방문을 열면 베란다에서 시작하여 방문 틀로 솟구쳐 올라가는 달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달을 보는 것이다. 이스터섬에 들어앉아 변함없는 세월을 보내는
모아이 석상처럼 살아가는 나에게는, 뜨고 짐을, 그리고 차고 기움을 거듭하는 저 달의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자 내 마음을 투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달처럼 높이 솟아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반복하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면…. 글 지현곤 카투니스트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갑자기 허리에 신경마비가 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힘이 없어져 버렸다. 척추결핵이라는 병. 그 이후 나는 이 작은 방에서 바위처럼 머물며 살아왔다. 내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된 내가 그 분노를 삭이는 유일한 방법은 만화였다.
처음엔 동생이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허구의 세계가 상상의 나래로 날아 제 의지를 자유분방하게 펼쳐내는 만화가 좋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책장을 넘기며 동경하던 세계, 휠체어를 타고 전망 좋은 곳으로 가보기, 바닷가에서 사진 몇 장 찍어보기…. 마음속 소망들을 자유롭게 한 장의 사각 틀 안에 채워나갔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장 안에 모든 내용을 담는 카툰 형식은 나에게 딱 맞는 것이었다.
한 장, 한 장 그림이 쌓여가자, 사보나 만화 잡지의 독자란에 그림을 보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이삼 년가량 독자란에 꾸준히 실리기도 했다. 나도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구나! 기뻤다. 그러다 1991년, 서른 즈음에 <주간만화> 신인만화공모전 카툰 부문에 도전, 가작으로 입선을 하면서 나에게도 카툰작가라는 호칭이 붙었다.
나는 매일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연습장에 그 소재를 가득 채워놓고서, 다시 보면서 좋다, 안 좋다, 일일이 표시했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풍자적인 표현에 긍정적인 그림, 극한 상황에서의 마지막 유머나 상황 반전’이었다.
어떻게 완성도 있게 작품을 마무리할 것인가. 원숙함이나 노련함의 부족함이라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꼼꼼하게 채워 넣는 방법이었다. 면을 한 색으로 덮는다 치면 잉크로 채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나는 잔선을 끊임없이 겹치고 덧대면서 채워 음영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내 그림은 원본 크기로 보는 게 가장 좋은 작품이 되었다. 세밀히 관찰하면 실수로 떨어뜨린 잉크 방울까지도 다 드러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주제도 좀 더 넓어져야 되지 않나 싶었다. 그중 눈을 주게 된 것이 전쟁, 그리고 테러였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크든 작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 남은 자들은 모두 죽어가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 폐허 속에서, 빨래를 널고, 비닐 속에서라도 자식을 키우고,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이어가는, 그런 생명력을, 삶에 대한 의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 작은 것에서 희망을 찾고 기뻐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음, 행복한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고 싶었다.
점차 내 작품을 사랑해주는 분들이 생겼다. 2007년에는 처음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주최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그다음 해 3월에는 한국 카툰작가로는 처음, 미국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 초청으로 전시를 열었다. 내 그림이 뉴욕에서 전시되다니! 이게 정말로 나에게 벌어진 일이 맞나 싶었다. 작품도 팔리고 실질적인 수익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번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무인도에 사는 허수아비’로 생각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소멸되기 전까지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그래서 어느 순간 불리는 이름과 따스함을 전하는 눈빛들이 낯설고 어색했다.
나는 나의 이름 부르기를 꺼려왔었다. 매순간마다 서러움과 유아적인 미움, 그리고 혼자 있음을 느끼고는 말할 길 없는 초라한 서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정작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공주대학교 만화학부의 임청산 교수님, 그분을 빼고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교수님은 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준 분이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힘겨움에 비틀거리는 순간에 나를 잡아주신 분도 바로 그분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폐렴에 가까운 증상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괴로움을 겪었을 때, 몇 번이고 찾아와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방문 간호사님. 그리고 내 작품을 인연으로 몇 년 이상을 꾸준히 연락을 해주시는 안민수라는 분도 있다. 한 번은 그분에게 어렸을 적 존경한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에서 일지매가 멋지게 산줄기를 타고 넘는 장면을 보며, 나도 그 산 능선을 따라 오르고 싶었다는 말을 메일로 전한 적이 있다. 그 후 취미가 등산이었던 이분이 자신의 산행 기록들을 내게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 산속을 훑어보는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니었고,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 이어지고, 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장애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왜 그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장애가 있는 나도 장애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 나름의 역할을 품어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장애로 인해 내 자신이 고통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으니 좀 더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더 솔직해지고, 나를 옥죄던 어리석었던 생각들과 내 삶을 속박하는 틀에서 자유로워지기로. 그런 마음으로 그린 것이 <나>라는 작품이다.
온전한 자의라고도, 철저히 타의라고도 할 수 없는 내 삶의 여건은 본의 아니게 면벽 수련이나 다름없는 인생을 내게 내밀어주었다. 내 인생 기록에는 서서히 고조되는 갈등도, 커다란 클라이맥스도, 드라마틱한 결말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