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단호박크림파스타

싱글들은 생선을 잘 요리하게 되지 않지요. 손질도 귀찮고 집안에 생선 냄새가 배니까요. 하지만 대구전은 손질이 간편하고 냄새가 적어서 조리도 편리하고, 냉동해두었다가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어 좋습니다. 한 덩이씩 크게 파는 단호박도 작게 잘라서 익힌 다음 냉동해두면 여러 가지 요리에 응용하기 좋아서, 이 두 가지 재료로는 언제든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답니다.

{ 재료 }

스파게티 70g, 단호박 1/8개, 양파 1/4개, 파 5cm, 대구전 6개, 허브솔트 약간, 밀가루 약간, 올리브오일 약간, 우유 1컵

{ 만들기 }

① 스파게티는 봉지에 적힌 시간대로 소금물에 넣어 삶는다. 삶은 물은 1컵 정도 남겨둔다.   ② 단호박은 껍질을 벗겨 한입 크기로 썬다. 양파는 도톰하게 채 썰고, 파는 어슷 썬다.   ③ 대구전은 키친타월에 올려 수분을 제거한 후 허브솔트를 뿌리고 겉면에 밀가루 옷을 한 번 입힌다.   ④ 팬을 달궈 올리브오일을 두른 후 밀가루 옷을 입힌 대구전을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⑤ 대구전을 익힌 팬에 약한 불에서 양파와 단호박을 넣고 5분 정도 볶다가 양파가 노릇해지면 파스타 삶은 물을 넣고 단호박이 익을 때까지 끓인다.   ⑥ 단호박이 익으면 우유를 넣고 한소끔 끓인 후 삶은 스파게티와 파, 대구전을 넣고 한 번 더 골고루 섞은 후 허브솔트로 간한다.

파스타를 삶은 물로 단호박을 삶으면 농도도 짙어지고 단호박의 단맛이 우러나와 더욱 고소해요. 단호박은 취향에 따라 양을 늘려도 되지만 단맛이 강하니 조심하세요!

문인영님은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현재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다양한 잡지와 방송매체를 통해서 메뉴 개발과 스타일링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싱글만찬> <다이어트 야식> <메뉴 고민 없는 매일 저녁밥>이 있습니다.

자동으로 표시해주는 똑똑한 책갈피 ‘알바트로스’

이름은?

알바트로스 책갈피(Albatros Bookmark). 책갈피의 모양이 알바트로스라는 바다 새의 큰 날개를 연상시켜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프랑스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라는 시가 연관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책갈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종잇조각을 갖고 놀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만들게 되었다.

제품의 원리는?

책갈피로서의 제 기능만 잘하도록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려고 했다. 아주 얇은 폴리에스테르 조각에다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접착제를 이용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사용해도 책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순식간에 책갈피가 이동해서 페이지를 표시해주기 때문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올 때, 버스를 타야 할 때도 그냥 책을 덮어 가방에 넣으면 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책갈피를 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대로 두거나, 접착성이 남아 있는 한 다른 책에 재사용할 수 있다. 700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 아니라면 수첩, 스케치북, 일기장 등 다양한 형태의 책에 사용할 수 있다.

주변의 반응은?

“왜 이걸 진작 생각 못 했을까?”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책갈피를 실제 판매하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선주문 후 배송 형식으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4만5천 달러가 모였고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배송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믿고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만든 사람 오스카 레르미트(Oscar Lhermitte) 26세. 디자이너. 영국 런던 거주

언터처블, 1%의 우정

정말 오랜만에 억지스럽지 않은 웃음을 내내 머금게 만든 영화를 만났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내 곁에도 드리스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제멋대로이고, 깐족거려도 저렇게 유쾌한 사람이 옆에 있다면 나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 같다. 1%의 우정이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상위 1% 귀족남 필립과 하위 1% 무일푼 드리스의 우정을 그리면서 인종차별과 소통에 대한 화두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백만장자 필립(프랑수아 클루제)은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후, 하루 종일 그를 돌보아줄 도우미를 찾는 중이다. 면접 자리에 방금 막 출소한, 가진 거라곤 건강한 몸밖에 없는 하위 1%의 드리스(오마 사이)가 나타난다. 단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서류에 도장만 찍으러 왔던 드리스는 거침없고 자유분방하다. 그런 드리스에게 필립은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드리스는 필립의 화려한 집과 넓은 욕실에 반해 버린다.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부터 시종일관 유쾌하게 흘러간다. 상위 1%와 하위 1%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필립과 드리스는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서로의 삶의 방식이 달랐던 이들이 관계를 맺어 가는 과정도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좋고 싫음의 내색도 거침없고, 매사가 제멋대로인 드리스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고용주로서 적절히 통제하려 드는 필립을 드리스는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필립을 돌보아준다.

필립과 드리스의 문화적 충돌 상황은 영화를 더욱 유쾌하게 한다. 고가의 미술품을 가지고 이야기하던 장면도, 오페라를 보러 간 장면도, 가족들이 필립의 생일을 맞아 오케스트라를 집으로 불러 클래식 연주를 하던 장면도 그렇다. 상대방의 취미를 존중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로도 웃음을 자아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젠틀하고 항상 바른 생활만 했을 것 같던 필립에게 드리스는 지겹고 답답한 집안에서의 생활 대신 일탈의 짜릿함을 안겨주고, 건강한 몸 말고는 잘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던 드리스에게 필립은 물질적 도움은 물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음을 인정받게 해준다. 장애와 비장애, 빈과 부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었던 둘은 어느새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가 된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할 것 같았던 드리스에게선 어설프지만 늘 최선을 다해 필립을 도와주려 했던 따뜻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고, 깐깐하고 딱딱하기만 할 것 같았던 필립에게선 천진난만하고 개구쟁이 같은 미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란 그런 건가 보다. 내게 없는 것들을 통해, 나를 비춰보게 하는 존재. 때문에 친구와 손잡고 가서 보면 더없이 괜찮을 것 같다. 억지스러움도, 신파도, 블랙 코미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과 따뜻함을 담은 <언터처블: 1%의 우정>은 그렇게 따뜻한 봄날 같은 영화다.

정지희 문화칼럼니스트

봄이여 봄이여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
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과 고통과 곤란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 이양하 <신록예찬> 중에서

사진, 글 김선규

신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 땅 곳곳에서, 아기 같은 손 내밀며 엄마 같은 봄 햇살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모든 약속 포기하더라도 이들과 그 기쁨 함께하기 위해 하루쯤은 비워두시길….

2007년 4월. 선운산에서

나무에 피는 연꽃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며 봄을 알리는 목련은 도시에서도 흔합니다. 혹자들은 피어 있을 때는 그리 화려하다가 너무 일찍 너무 처절하게 떨어지는 꽃잎이 가슴 아프다 말하지요. 하지만 사라질 때는 확실하게 사라지는 것이 바로 목련의 이치인 듯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우면,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 불리겠습니까.

2007년 4월. 일산 호수공원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윤미네 집

사진 전몽각  글 전윤미

아버지께서는 늘 카메라를 놓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싸울 때도, 울고 있을 때도, 산 정상에서 무서워 고개도 못 들고 어지러워할 때도, 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웃을 때도 우리를 찍고 계셨지요. 언제나 차고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 밑에서 매일 토닥댔지만 우애 깊은 삼 남매가 정말 행복하고 웃음 넘치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20여 년 전, 남편을 만나 결혼한 제게 아버지는 <윤미네 집>이란 사진집을 엮어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낯선 미국 땅에서 생활하던 딸에게 보내시는 응원과 사랑이었습니다. 사진집을 받았을 때 부모님께 감사하며 많은 힘을 얻었지만, 사진을 찍으시고 또 사진집으로 엮으신 그 절절한 부모님의 마음까지는 깊이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사진 속 어머니와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사랑 하나하나가 너무나 또렷이 느껴집니다. 사진에 등장하진 않지만 아버지는 항상 렌즈 너머에서 사랑의 시선으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매 순간 우리를 거두고 계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셨던, 가족의 순간순간을 일기 쓰듯 기록하신 아버지와 한없는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이젠 알 것 같아요.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윤미네 집>은 사진가 전몽각(1931~2006)님이 큰딸 윤미가 태어나 결혼할 때까지(1964~1989) 약 26년간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진집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보편적인 삶의 모습으로 우리네 가족 풍경을 정겹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0년 시집간 딸 윤미를 비롯한 가족, 지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출간했으며, 20여 년 만에 복간되었습니다.

자장면 세 그릇

 

중학생 2학년 때였다.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점심때가 되어서 부산역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역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경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탄다고 하셨다. 아! 자장면!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중화반점을 향해 조랑말처럼 달렸다. 빨간 차양이 드리워진 입구를 통과하자 뚱뚱한 반점 주인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는 속속 도착하는 들뜬 조랑말들을 2층 내실 안쪽 자리부터 착착 배치하였다. 선착순에 강한 나는 제일 먼저 자장면을 받아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해치웠다. 양이 너무 적었다. 간에 기별도 오지 않았다. 아쉽기 짝이 없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굶은 사람처럼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늦게 좁은 계단을 우르르 올라오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밀리다시피 하여 뒷걸음질을 쳤고, 어쩌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 빈자리에 다시 앉게 되었다. 친구 녀석들은 모두 자장 그릇에 코를 박고 있는지라 이런 상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바쁜 종업원도 내 앞에 또 한 그릇의 자장면을 내려놓았다.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뚝딱 두 그릇을 비우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미련 없이 일층으로 뚜벅뚜벅 내려오는데, 아래층에 계시던 선생님이 나를 보고 꽥 고함을 질렀다.

“야, 임마! 넌 왜 또 내려오는 것이야?”

아이들 지도하시느라 가뜩이나 시장하실 선생님에게 나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우물쭈물하였다. 그런 내 모습이 당신이 보시기에 힘없고 배고파 보였는지 선생님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여기 자장면 한 그릇 더 빨리 갖다 주소!”

선생님은 당신 자리를 옆으로 비켜 공간을 만들고 나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내 귀를 잡아당기며 ‘짜식, 멍청하게 제 자리도 못 잡고 말이야’라고 속삭였다. 내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왕재수! 나는 선생님 옆에 다소곳이 앉아 나무젓가락으로 마침내 세 그릇째 자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호박이 넝쿨째 무려 세 덩이나 떨어졌는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한때 가난한 것이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이 역전에 집결해서 완행열차를 기다리던 그 시간, 가정 형편상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아이들은 강둑에 모여 새마을 청소를 하였다. 우리는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긴 강둑을 쓸었다. 하필 그 시간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 열차가 강둑 위 철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강둑에서 비질을 하던 아이 한 명이 갑자기 기차를 향해 큰 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저 멀리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드는 아이가 보였다. 손나발을 만들어 이쪽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었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글 최형식

카투니스트 지현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내 방문을 열면 베란다에서 시작하여 방문 틀로 솟구쳐 올라가는 달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달을 보는 것이다. 이스터섬에 들어앉아 변함없는 세월을 보내는
모아이 석상처럼 살아가는 나에게는, 뜨고 짐을, 그리고 차고 기움을 거듭하는 저 달의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자 내 마음을 투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달처럼 높이 솟아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반복하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면….   지현곤 카투니스트

내 작은 방에서는 왼쪽 방문을 통해서야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그걸 담고 싶어 오른팔로 상체를 의지하고 보다 보니, 자연스레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옆의 작품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한순간 세상으로 나온 나의 모습이다. 작은 기계에 의지하여 자유로이 넘나드는 꿈. 동그라미들은 달이자 온전함의 상징.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갑자기 허리에 신경마비가 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힘이 없어져 버렸다. 척추결핵이라는 병. 그 이후 나는 이 작은 방에서 바위처럼 머물며 살아왔다. 내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된 내가 그 분노를 삭이는 유일한 방법은 만화였다.

처음엔 동생이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허구의 세계가 상상의 나래로 날아 제 의지를 자유분방하게 펼쳐내는 만화가 좋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책장을 넘기며 동경하던 세계, 휠체어를 타고 전망 좋은 곳으로 가보기, 바닷가에서 사진 몇 장 찍어보기…. 마음속 소망들을 자유롭게 한 장의 사각 틀 안에 채워나갔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장 안에 모든 내용을 담는 카툰 형식은 나에게 딱 맞는 것이었다.

<나> 처음으로 나의 상황을 표현한, 나를 위해 그려낸 진실된 한 점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인파의 물결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과 외따로이 떨어진 내가 아니라,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나. 휠체어로 대변되는 장애에서 벗어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시도이자 용기였다.

한 장, 한 장 그림이 쌓여가자, 사보나 만화 잡지의 독자란에 그림을 보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이삼 년가량 독자란에 꾸준히 실리기도 했다. 나도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구나! 기뻤다. 그러다 1991년, 서른 즈음에 <주간만화> 신인만화공모전 카툰 부문에 도전, 가작으로 입선을 하면서 나에게도 카툰작가라는 호칭이 붙었다.

나는 매일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연습장에 그 소재를 가득 채워놓고서, 다시 보면서 좋다, 안 좋다, 일일이 표시했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풍자적인 표현에 긍정적인 그림, 극한 상황에서의 마지막 유머나 상황 반전’이었다.

어떻게 완성도 있게 작품을 마무리할 것인가. 원숙함이나 노련함의 부족함이라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꼼꼼하게 채워 넣는 방법이었다. 면을 한 색으로 덮는다 치면 잉크로 채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나는 잔선을 끊임없이 겹치고 덧대면서 채워 음영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내 그림은 원본 크기로 보는 게 가장 좋은 작품이 되었다. 세밀히 관찰하면 실수로 떨어뜨린 잉크 방울까지도 다 드러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주제도 좀 더 넓어져야 되지 않나 싶었다. 그중 눈을 주게 된 것이 전쟁, 그리고 테러였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크든 작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 남은 자들은 모두 죽어가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 폐허 속에서, 빨래를 널고, 비닐 속에서라도 자식을 키우고,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이어가는, 그런 생명력을, 삶에 대한 의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 작은 것에서 희망을 찾고 기뻐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음, 행복한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고 싶었다.

점차 내 작품을 사랑해주는 분들이 생겼다. 2007년에는 처음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주최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그다음 해 3월에는 한국 카툰작가로는 처음, 미국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 초청으로 전시를 열었다. 내 그림이 뉴욕에서 전시되다니! 이게 정말로 나에게 벌어진 일이 맞나 싶었다. 작품도 팔리고 실질적인 수익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번 것이다.

<탱크와 포신에 빨래 너는 아낙1>

완전 무장한 탱크의 포신에 태연히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낙네들. 그 소박한 행동에 군인들이 망연자실하다. 전쟁보다 삶이 더 소중하다.

나는 내 스스로를 ‘무인도에 사는 허수아비’로 생각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소멸되기 전까지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그래서 어느 순간 불리는 이름과 따스함을 전하는 눈빛들이 낯설고 어색했다.

나는 나의 이름 부르기를 꺼려왔었다. 매순간마다 서러움과 유아적인 미움, 그리고 혼자 있음을 느끼고는 말할 길 없는 초라한 서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정작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공주대학교 만화학부의 임청산 교수님, 그분을 빼고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교수님은 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준 분이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힘겨움에 비틀거리는 순간에 나를 잡아주신 분도 바로 그분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폐렴에 가까운 증상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괴로움을 겪었을 때, 몇 번이고 찾아와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방문 간호사님. 그리고 내 작품을 인연으로 몇 년 이상을 꾸준히 연락을 해주시는 안민수라는 분도 있다. 한 번은 그분에게 어렸을 적 존경한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에서 일지매가 멋지게 산줄기를 타고 넘는 장면을 보며, 나도 그 산 능선을 따라 오르고 싶었다는 말을 메일로 전한 적이 있다. 그 후 취미가 등산이었던 이분이 자신의 산행 기록들을 내게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 산속을 훑어보는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니었고,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 이어지고, 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장애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왜 그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장애가 있는 나도 장애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 나름의 역할을 품어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장애로 인해 내 자신이 고통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으니 좀 더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더 솔직해지고, 나를 옥죄던 어리석었던 생각들과 내 삶을 속박하는 틀에서 자유로워지기로. 그런 마음으로 그린 것이 <나>라는 작품이다.

온전한 자의라고도, 철저히 타의라고도 할 수 없는 내 삶의 여건은 본의 아니게 면벽 수련이나 다름없는 인생을 내게 내밀어주었다. 내 인생 기록에는 서서히 고조되는 갈등도, 커다란 클라이맥스도, 드라마틱한 결말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지현곤(52)씨는 1991년 <주간만화>에 카툰으로 데뷔했다. 그 후 문화체육부장관상 수상, 대전국제만화영상전 대상, 국제서울만화전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8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의 초청으로 단독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그림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운 경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후 그의 작품은 교과서에도 게재되었다.

김보경, 공개 오디션 ‘슈퍼스타K2’에 도전, 가수의 꿈 이루다

몇 해 전부터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다. 가수가 되고 싶은 지망생들에게는 좋은 기회이고, 시청자들에게는 과연 누가 합격할지 흥미진진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제법 인기 스타들도 나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디션 하면 떠올리는 한 사람으로 김보경씨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2010년 슈퍼스타K2에 참가했으나 본선 진출에는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한번 참 잘했던’ 그녀가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던 것이다. 가녀리고 평범해 보이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노래, 그것은 진심이었고 간절함이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그녀의 개인사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뚜벅뚜벅 원래의 목표를 향해 묵묵히 달려왔고, 어느덧 가수로 데뷔한 지 1년이 되었다. 최근 ‘뭐해’란 신곡을 발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인 가수 김보경씨를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어느새 가수 데뷔한 지 1년이네요, 어땠어요?

데뷔할 때는 어안이 벙벙했는데, 그 뒤로는 많이 즐겁고 행복했어요. 작년 생일 때는 팬들이 형형색색 꾸며놓은 파티장에서 생일 파티도 열어주시고, 장기도 보여주시고…. 이런 날이 있기 위해서 그렇게 ‘중2병’을 앓아가면서 학창 시절이 힘들었었나 싶기도 하고요, 너무 감사했어요.

학창 시절을 힘들게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이 세상에서 나만 제일 고독한 거 같은 ‘중2병’도 앓았고 반항심도 있었어요. 원래 되게 밝고 장난도 잘 치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때는 항상 이어폰 꽂고 노래만 듣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접근을 못 했어요. 고1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셨거든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안 좋게 되는 걸 보니까 사람들이 사랑해도 미워질 수 있는 거구나, 그런 걸 깊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입시, 남자 친구 얘기할 때 저는 공감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항상 가족 생각에, 우리가 서로 미워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늘 노심초사하고 다른 친구들이 공부할 때도 수업에 집중이 안 돼, 떠오르는 가사나 쓰면서 학교생활을 보냈죠.

그 힘든 마음들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궁금해요.

저는 진짜 음악밖에 없었어요. 음악이 어떨 때는 독처럼 작용할 때도 있어요. 마음이 슬픈데 슬픈 음악을 들으면 더 빠지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참고 참았던 걸 음악을 들으며 울고 해소할 때는 후련하잖아요. 제겐 음악이 비상구이자 돌파구이자 유일한 통로였어요. 바보같이 꽁하다가도 내가 왜 이렇지 하며 오히려 더 나가게 되고…. 친구한테 힘들다고 말하면 동정하는 거 같고, 또 약해 보이는 게 싫으니까 얘길 잘 안 했거든요. 그러니까 노래로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했던 거 같아요. 특히 동아리 밴드 활동하면서 해소가 많이 됐어요. 그때는 나한테만 닥치는 불행이라 생각해 원망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때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엄마랑 얘기할 수 있게 됐죠.

어린 시절부터 꼭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예요. 장기 자랑 시간에 노래를 부르게 됐는데, 떨려서 못 하니까 선생님께서 부끄러우면 뒤돌아서서 하라고 하셔서 칠판을 보면서 조성모의 ‘To Heaven’이란 노랠 불렀거든요. 근데 담임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거예요. 그 순간 끓어오르는 벅참이란! 기분이 진짜 좋았고,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 이후 선생님이 제 일기장에 ‘보경이는 커서 가수나 뮤지컬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써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썼던 일기를 보면, ‘오늘 노래를 만들어봤다. 원래 있던 곡에 가사만 바꿔서 불렀을 뿐인데 이렇게 좋다니… 나중엔 난치병 환자나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고 적었더라고요. 어,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저도 놀랐어요.

그녀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건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2였다. 자신의 체구보다 커 보이는 통기타를 들고 나와서 호소력 있는 보컬로 주목을 받았던 것. 당시 최종 본선인 TOP11에는 들지 못했지만, “나와 가족을 위해 노래한다”던 그녀의 고백과 가수에 대한 간절한 꿈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예선 대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켈리 클락슨의 ‘Because of you’를 불렀을 땐, 엄정화, 박진영 심사 위원조차 “감동받았다”며 호평을 했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Top4인 허각, 존박, 장재인, 강승윤보다도 가장 먼저 음반사와 전속 계약을 하고 앨범을 내게 된다. 예선 탈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녀가 가수가 된 데에는 켈리 클락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켈리 클락슨은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의 초대 우승자로, 그녀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도 켈리 클락슨이 3차 예선의 심사 위원으로 참가한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한다. 아쉽게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훗날 켈리 클락슨이 그녀에게 보낸 격려의 영상 편지는 큰 화제가 되었다. 그녀의 첫 공식 데뷔곡도 ‘Because of you’다.

슈퍼스타K2 출신이라는 게 가수 생활에 약이 될까요, 독이 될까요?

분명 약이라고 생각해요. 심사 위원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혹독한 말을 듣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비공개면 남들이 보지 않으니까 털어버리고 또 오디션을 보면 그만인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점이 드러나고 그게 남잖아요. 수많은 경쟁자들 앞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으며 당당하게 이만큼 올라왔다는 건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오랜 기간 연습하면서 배울 걸 저는 우당탕탕 모아서 한 번에 배운 기분이랄까요. 박진영 선배님이 “눈빛이 좋다, 근데 그 눈빛밖에 없다”(웃음) 하신 거, 엄정화 선배님이 “감동이야” 그랬던 거, 인순이 선배님께서 “고음을 안 하는 게 나을 뻔했다. 윤기가 없어서 목소리가 망가질 거다”라고 혹독하게 말씀하셨는데, 처음에 들어갈 때 “어, 포스!”라고 하신 말도 기억에 남아요.

‘목소리가 망가질 거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창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겠어요.

그렇죠. 누가 옆에서 조언을 해준 적도 없었고, 그렇게 부르는 것밖에 몰랐는데, 어떻게 보면 제 머리를 깨주는 망치가 됐어요. 그 이후로는 지금은 어리니까 힘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정말 나이 먹고 나면 노래를 오래 부르기 힘들겠구나 싶어서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부를 수 있을까 많이 연구하고, 장점은 살리면서 최대한 목을 아끼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연습 시간을 정해놓기보다는 언제든 발동이 걸리면 하는 스타일이라서 아침, 낮, 밤, 새벽, 아무 때나 장소도 가리지 않고 연습실에서, 차 안에서, 스쿠터를 타면서, 화장실에서도, 운동하면서도 불러요. 모든 게 그렇듯이 노래도 저절로 실력이 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노력과 연습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어요. 즐겁게 하고, 매일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노래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정화시켜주고 싶다고 했지요.

노래 부를 때 관객분 중에는 팔짱 끼고 하품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럼 맥이 푹 빠져나가요. 모든 관객이 열광을 하고 있어도 단 한 사람 때문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내가 네 노래 듣고 있어’라고 눈으로 얘기해주실 때면 너무 좋아서 에너지가 차올라요. 그것 때문에 노래하는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남을 위로한다는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제가 더 위로를 받죠. 그분들도 동시에 위로를 받는다면 감사한 일이고요. 예전에 가야금 병창을 했을 때 선생님께서 “노래를 할 때 너 혼자 감동하면 삼류다. 관객들만 감동을 느끼면 이류, 너도 관객도 같이 감동하면 일류 가수가 되는 거다. 관객들의 심장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어야지 진짜 노래하는 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그 뜻을 잘 몰랐는데 데뷔한 후 관객들 눈을 쳐다보면서 노래하다 보니까 느껴져요.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먼저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잖아요.

맞아요. 내가 움츠러들어 노래하면 관객들도 얼어붙고 저를 안 봐요. 그래서 전엔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 김보경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여러분~ 안녕하세요?↗” 크게, 자신감 있게 하게 되고. 조금씩 진짜를 배워간다는 걸 느껴요. 첫 무대에선 정말 많이 긴장하고 떨었어요. 실수를 연거푸할 때도 있었어요. 근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감동을 주기도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제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려주신 분들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순수한 마음 잃지 않고, 멋진 음악으로 보답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M.net 음악 프로그램

엠 카운트다운(M COUNTDOWN)에 출연,

노래 부르는 김보경씨.

 

가수가 되기까지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있다면요?

가족이에요.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스스로 메우고 빨리 성공해서 나처럼 상처받은 동생이나 엄마를 돌봐주고 싶었어요. 가족이 평탄하고 부족한 게 없었다면 저는 그냥 살았을 거예요. 간절히 원하는 게 없었을 테니까요. 또 대학 때 성윤용 교수님의 격려도 큰 힘이 됐어요. 교수님 말씀이 네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너를 다시 봤다. 이전엔 그냥 수많은 여자 제자들 중 한 명이었고 열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혼자 나가서 저렇게까지 선전한 걸 보고 뭔가 깨닫게 됐다. 내가 너한테 빚을 졌다고 하시면서, 뒤에서 지켜봐줄 테니까 열심히 하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지금 소속사도 연결시켜주시고, 앨범 제작에도 도움을 주셨어요.

김보경씨는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큰 힘이 되실 듯합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요. 제 홈피에 저도 가수가 되고 싶은데, 누나 보면서 힘이 많이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이런 글이 많이 올라와요.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한번 해봐라, 여기저기 의식하지 말고, 남 신경 쓰면 네가 사라진다고 말해줘요. 저도 가수를 꿈꾸었을 때, 화장실에서 기타 들고 거울 보면서 노래하니까 엄마가 커서 뭐가 되려고,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별나다 하셨거든요. 그래도 엄마한테 “엄마, 기분이 너무 좋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나 진짜 잘될 거 같애.” 그랬거든요. 그런 마음이 긍정적인 걸 불러오는 거 같아요.

노래로 진심을 전하고 싶다고 했는데요.

저 자신을 잃지 않고 노래하면 관객들한테도 전달되는 거 같아요. 노래할 때 기교를 많이 넣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냥 부르는 걸 좋아해요. 별로 꾸밈은 없는데 마음을 울리는 가수분들이 있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할까 싶은데 그렇게 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인간적인 면이 많이 느껴지시는 분들인 거 같아요. 오랫동안 가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에게 많이 질문을 던지는데, 제가 꼽는 인생의 좌우명 중에 하나가 ‘록커로 살자’예요. 노래하는 록커도 있지만 록(rock)의 의미가 ‘감동시키다’라는 뜻도 있거든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노래를 통해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제가 봐도 데뷔하고 1년 동안 사람으로서도 성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제 목소리를 들어준 모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웃음)

인터뷰를 끝내며 노래 한 소절 불러달라는 부탁에 그녀는 선뜻 데뷔곡인 ‘Because of you’를 불러주었다.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 나를 붙잡아주었던 특별한 곡이다’라고 말했던 만큼 그녀가 바로 눈앞에서 진심을 담아 들려주는 목소리에 금세 빠져들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녀가 켈리 클락슨의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꿨듯이, 그녀 역시 곧 누군가의 꿈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라고. 나와 가족을 위해 도전했다던 가수로서의 길, 이젠 그녀의 노래가 어떤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희망을 주고 치유를 해줄 차례가 오고 있었다.

가수 김보경씨는 1990년 생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여주대학 실용음악과를 졸업했습니다. 2010년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2’에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진심이 담긴 노래로 화제가 되었으며, 2010년 디지털 싱글앨범 <Because of You>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그 후 미니앨범 <더 퍼스트 데이(the FIRST DAY)>와 <그로잉(GroWing)>, 디지털 싱글앨범 ‘뭐해’를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히트곡으로 ‘하루하루’ ‘Suddenly’가 있으며, 2012년 가온차트 K-POP 어워드 솔로 부문 여자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문득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보다 현재의 삶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8살 땐 미처 몰랐던 것들

장유진 18세. 학생 시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저는 아나운서와 시인 그리고 교수를 꿈꾸는 18살 소녀입니다. 음. 좀 더 솔직히 털어놓자면, 왼손과 팔다리가 조금 불편한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제가 거리를 지나가면 가던 걸음도 멈춰 서고, 절뚝거리는 제 걸음을 신기한 듯 쳐다봅니다. 한번은 어떤 건물 위층에서, 또래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저를 향해 “어이~ 거기 절뚝절뚝!!” 하고 소리 지른 적도 있습니다. 그런 안 좋은 시선과 일들을 당할 때면 마음이 안 좋지만, 그래도 저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아, 오늘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안 좋은 일을 당한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가 이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뛰어놀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매일 100점을 맞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2002년 7월, 저는 갑작스러운 병마로 쓰러졌습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처럼 살아났지만, 하루아침에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제게 닥쳐온 병마와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매일같이 울기만 했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 때문에 힘들어서 울었고, 무서워서 울었고, 계속 울다 보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아서 울었습니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끔은 하늘을 보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한테 이런 고통을 주시냐고 물어도 보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이란 나날이 흐른 지금. 수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수천여 편의 시를 쓴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꿈과 희망과 노력, 감사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제가 장애를 겪으며 얻게 된 것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장애인으로 살아온 제 삶에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들이 더 많다는 걸 말입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어렸을 적에 매일같이 울면서 찾아 헤매던 그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신은 제가 꿈과 마음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힘든 고통을 안겨주셨을 것입니다.

과거를 연연하며 / 살고 싶지 않아요 / ‘아 그때 내가 이렇게 했으면 지금쯤 어땠을까’ /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생각하며 / 속상해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 이미 지나간 일 /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 / 나쁜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 나 이제 / 지금 이 순간 / 하루를 열심히 살래요 / 하루가 모여 일년이 되고 / 일년이 모여 10년이 되었을 때 / 멋진 어른이 되어 뒤돌아보면 / 후회가 남지 않는 / 그런 하루를 살아갈래요 / 바쁜 하루 / 즐거운 하루 / 노력하는 하루를 보내며 / 그렇게 아름다운 내 꿈을 이뤄 갈래요 – 시 ‘하루’ (장유진)  

 

전갑배 작. <꽃-1> 오일파스텔, 콘테, 흑연. 600×409cm. 2011.

 

내가 십 대 때는 몰랐던 것들

맹지예 24세. 대학생.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른 학창 시절을 보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다른 아이들하고 뭔가 다르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일부러 공부를 잘하려고 용쓴 것도 아닌데 반에서 일등을 하고, 꽤 인기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2학년이 되면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2학년이 되고 반이 바뀌자 친구들이 웬일인지 차가워지고 멀어졌다. 새로운 친구들을 어떻게 사귀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친구들에게 말 걸기조차 어려웠다. 아이들이 모두 너무 낯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나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간혹 말을 하더라도, 의도치 않게 가시 돋친 말이 나왔다. 내 마음속에 가시가 들어 있는 것처럼, 마치 나를 보호하려는 고슴도치처럼. 그러면 친구들은 상처받고 나를 더 멀리하는 듯했다. 결국에는 아무도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성적도 많이 떨어졌고, 점점 세상을 삐뚤게 보며 작은 말에도 상처받았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은 나에게 무관심한 듯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 반항도 많이 했다. 나는 점점 우울해졌고, 급기야 대인기피증 때문에 친구들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서 2주 가까이 무단결석을 하는 상태까지 가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대체 남들과는 뭐가 다른 걸까,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걱정 없이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이것이 내가 그 무렵 생각했던 전부였다. 어떻게든 어두운 내 마음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허덕였지만, 그 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어찌어찌 대학에 들어간 후 우연히 마음수련을 하게 된 나는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언제나 잘나려고 했던 나, 언제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나, 친구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 한번, 관심 한번 준 적 없던 매정하고 이기적인 나.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났던 나. 한순간 그 잘난 나의 욕심이 충족이 안 되자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차라리 내 마음의 문을 꽁꽁 잠그고 있었던 것이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부정하고, 외롭고…. 그 모두가 내가 만든 내 마음의 세상이었다. 그런 마음들에서 점점 벗어나자 진실이 보였다. 걱정하는 부모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왔던 친구들…. 내가 그 손길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진실. 마음을 비우며 나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나도 이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중학생 때 이걸 알았더라면 그깟 자존심 따위, 좁은 내 마음에서 좀 더 일찍 빠져나와,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왠지 멀어지는 친구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친구들이 가진 장점을 인정하며 격려해주었을 것이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 좀 더 밝게, 좀 더 신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해보았을 것이다. 내 안에 갇혀 있기보다, 뭐라도 긍정적인 일을 하는 데 에너지를 썼을 것이다. 내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며,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예전의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어린 친구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빨리 그 마음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중에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과감하게 빠져나와, 소중하게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라고.

 

전갑배 작. <마실 가기> 오일파스텔, 콘테. 600×409cm. 2011.

 

저를 이 세상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성원 48세. 회사원. <직장인 울랄라> 저자

운명의 2003년 봄, 회사 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던 순간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귀가 나가버렸다. 그리고 지지직거리는 TV 소리. 돌발성 난청이었다. 8일간 입원, 간신히 퇴원을 했다. 휴식을 취했어야 하지만 난 업무 공백을 만회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협심증을 동반한 공황증. 꼬박 100일을 집에서 꼼짝 못한 채 누워 지냈다. 네 살 된 딸과 이제 갓 태어난 아들, 그러나 당장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는 몸.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 했다.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스스로 알게 된 것은, 내 마음과 몸은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거기에 어렵사리 털어놓은 어머니의 ‘빚’ 고백. 학원을 운영하는 동생의 빚이 ‘억’ 단위로 늘어나자,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억누르는 또 하나의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믿었던 나는, 마음보다 보살피기가 쉬운 몸을 먼저 적극적으로 가꿔보기로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만큼 쌓인 것이 몸무게였다. 62킬로였던 몸이 79킬로그램까지 불어 있었다. 심한 과체중이었다.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

첫째, 소식! 세 끼를 먹되 절대 배가 부르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둘째, 식사와 식사 사이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셋째, 밤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넷째, 밀가루 음식이나 탄산음료, 초콜릿, 과자 등을 끊었다.

식습관을 바꿨더니 놀랍게도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가뿐해지고 피부가 맑아졌다. 상태가 호전되자 곧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심장이 좋지 않아, 5분, 10분, 조금씩 걷는 시간을 늘렸다. 그랬더니 100일째 될 무렵에는 두세 시간까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북한산으로 갔다. 숲속을 몇 시간씩 산책하고, 어느새 등산까지 하게 되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며, 정신에도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생각이 밝아졌다.

서서히 건강을 찾아갔다. 이제 나는 마음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정작 살피고 고쳐야 할 것은 내 마음이었다. 우월감과 열등감, 조급함과 불안증, 침울함과 공격성이 가시처럼 나와 주변을 상처 내고 있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핏대를 세우는 나의 생각과 기준은 절대적으로 옳지도 않은 것이고 언제나 변함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 생각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되고 관철되어야 한다고 집착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상처받은 것일까? 마음이 편안해지자 점점 심장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의 삶도 보았다. 주인에게조차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채 울고 있었을 불쌍한 내 몸, 그리고 내 인생.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렇게 몸과 마음을 보살핀 후,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혼자 드라이브를 나갔다. 직접 운전을 하며 바라본 바깥세상은 환희 그 자체였다. 길거리를 다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보석처럼 빛났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개나리와 진달래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살아 있는 나 역시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직장 생활을, 가정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직장 생활도, 가정생활도 잘한다는 것을.

순간 시골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빚이라는 짐을 안겨주고,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나보다 더 찢어지고 부서졌을 어머니. 그런 어머니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어머니, 저를 이 세상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전갑배 작. <하회마을 아이들> 오일파스텔. 600×409cm. 2011.

문득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보다 현재의 삶을 가꾸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흔에는 미처 몰랐네, 사랑하면 보인다는 걸

허두영 52세. 출판인.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의 저자

“아빠, 저 나무가 무슨 나무예요?”

마흔도 훌쩍 중반에 들어선 나른한 봄날, 함께 목욕 갔다 돌아오는데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우리 아파트 현관 바로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을 때, 멀뚱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뒤, 아들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른 것은 나무 이름이었을까, 아들과 대화하는 법이었을까?

“아들을 위해 나무 이름 하나 알아봐줄 시간도 없나요?” 하는 아내의 추궁에 이튿날부터 집 주변에 무심하게 서 있던 나무들의 정체를 밝혀내야 했다.

산수유와 생강나무, 느티나무와 느릅나무, 매화나무와 살구나무,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화살나무와 작살나무, 낙엽송과 낙우송, 노간주나무와 모감주나무, 측백과 편백과 화백…. 이름이나 모습이 비슷한 나무가 왜 그리 많은지.

전설의 계수나무는 달이 아니라 화단에 우뚝 서 있고, 동화 속의 개암나무는 우리 집 바로 뒷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호젓한 매화나무는 옛 시조가 아니라 나의 술잔 속에서 꽃을 피우고, 높다란 벽오동은 혹시나 하며 봉황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앵두와 살구가 바로 옆에서 앙글앙글 피고 지고 다람다람 열매를 맺었는데, 그동안 왜 한 번도 내 눈에 띄지 않았을까?

‘접시꽃 당신’을 사랑한 도종환 시인은 ‘배롱나무’에게 배운다고 했다.

‘늘 다니던 길에 오래전부터 피어 있어도 / 보이지 않다가…(중략)… /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나무를 하나씩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서 나무들이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목은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었고, 아내와 산책하던 길에는 마로니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과 즐겨 오르던 산길에는 개암나무가 반갑게 나를 맞아주고 있었고, 딸이 그네를 뛰던 놀이터에 명자나무가 울타리를 두르고 있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내 주변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왜 그동안 한 번도 내 눈에 띄지 않았을까? 평소에 이름조차 모른 채 무심코 지나쳐 눈에 띄지도 않던 나무도 관심을 갖고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존재가 드러나면서 정말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떠올랐다.

당장 내 가족부터 그랬다. ‘가족’이라는 틀에서 10년이 넘도록 그냥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들을 시작으로 딸과 아내가 차례차례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를 아들과 함께 8년에 걸쳐 쓰는 동안 ‘같이 놀자’는 딸의 재롱과 투정을 수시로 달래야 했다. 주말을 주로 아들과 지내다 보니 심통이 난 딸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오빠와 같이 하는 집필 작업이 끝나면 ‘사랑하면 보이는 풀’을 시작하기로 약속했다. 딸과 약속하고 나니, 나무와 풀 말고도 새, 벌레, 물고기, 별, 돌처럼 사랑하면 보일 만한 것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면 보이는 새’ ‘사랑하면 보이는 벌레’ ‘사랑하면 보이는 물고기’ ‘사랑하면 보이는 별’… 등등. ‘사보(사랑하면 보이는) 시리즈’가 생각났다. 근데 이걸 다 누구랑 쓰지?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두고 있는데, 책을 쓰자고 아이를 더 낳을 수도 없고^^; 아내에게 ‘사보당’(사랑하면 보이는 당신)이나 같이 쓰자고 해 볼까?ㅎㅎ 그러면 당신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전갑배 작. <생동-2> 오일파스텔, 콘테, 연필. 600×409cm. 2011.

 

그것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성희 61세. 주부. 대전시 유성구 원내동

얼마 전, 남편을 도와서 밤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남편은 대형 마트 안의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매출은 거의 적자다. 시내의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에 납품을 하며 현상 유지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음 날 오전 중으로 시내 어린이도서관에 납품을 맞추느라 밤을 새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평소에는 서점에 거의 가지 않았는데 이날은 나도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남편은 12시간을 한자리에 서서 계속 일을 했다. 나는 새벽 3시쯤에 남편에게 커피를 타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 일에 집중하면 밥 먹을 생각도 잊는 거였구나!

남편이 매일 바빠서 점심 식사도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밤을 꼬박 새며 알게 됐다. 적은 직원으로 서점을 운영하려니 서점 개점 후 4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근무했던 것이다.

그날 오랜만에 복어 전문점에서 외식을 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 살이 쏙 빠진 남편을 보며 마음이 애잔해졌다. 참 성실하고 한없이 선량한 저 사람이 남편인 게 행복했다.

“여보! 어제 일하면서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당신뿐이란 걸 깨달았어.” “그거 깨닫느라고 수고했어” 하며 남편이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왜 콩나물만 그렇게 먹어. 콩나물은 집에서도 자주 먹는 건데. 다른 거 먹어요.” “어! 그러네. 잘못했어” 하며 남편은 복 튀김을 집어 먹었다. 주거니 받거니 먹여주고 아껴주고…. 서로의 목소리에는 신뢰와 믿음이 섞여 있었다.

남편은 62세, 나는 61세이다. 남편은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싫은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남편이 불편해할 말은 안 한다. 살면서 서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게 무엇인지 터득한 것이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요즈음에야 우리 부부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몰랐다. 남편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우리 부부는 중매로 만나서 결혼한 지 35년이 됐다. 결혼 후 13년은 단 한 번의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꿈결 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남편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던 40대부터 전쟁 같은 사랑이 시작되었다.

늘 실패하는 남편을 말리다 다투는 생활을 근 10년을 했다. 그동안 전업주부로만 있던 내가 사회로 나가 가장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남편은 하는 일마다 안됐고 나는 상점에 갇혀서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나는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힘이 들어서 피폐해졌다. 늘 상냥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던 나는 점점 거칠어져갔다. 우리는 그때 각자의 고민과 우울증과 갈등을 이해 못 한 채 서로 미워했다. 내가 더 오래 길게 남편을 신뢰 못 하고 미워했다.

남편은 큰 손해를 본 후 사업을 접고 서점 체인본부에 취업이 됐다. 50대였다.

이때부터 서로 화해의 시간이 시작됐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남편에게 끝없이 내가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공치사를 하고 지난 세월을 원망했는데, 그런 나를 남편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 나는 당신이 좋으면 좋아!” 하며 내가 편한 것이라면 다 하게 했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불신의 찌꺼기가 없어지도록 기다려준 것이다. 그런 배려와 사랑으로 나는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게 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 극단의 선택으로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조용히 곁에서 나의 화풀이를 다 받아준 남편이 정말 고맙다.

이제야 알겠다. 한 사람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미운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용서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힘들더라도 그 사람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사람을 위해 믿고 참고 견디는 세월 뒤에야 진짜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갑배 작. <구례곡전재> 오일파스텔, 콘테. 600×409cm. 2011.

 

그때는‘기쁨’을 몰랐다

김준범 46세. 만화가. 천문해석 연구가

어린 시절부터 나는 좀 시니컬하고 반항적이었다. 중학교 때는 학생들을 억압하고 툭하면 구타하는 학교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이런 환경을 고칠 수 없다면,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17살의 나이에 집을 나와 한 변압기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턱없이 적은 임금, 엄청난 노동 착취에 지쳐갔지만,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9개월이라는 시간을 버텼다. 하지만 결국 공장을 그만두었다. 역시 세상은 잿빛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발소 그림’을 그릴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유명한 유화를 베끼는 등의 단순 작업이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에 그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1985년 무렵 만화가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면 할수록 만화의 매력에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4년 후 <기계전사 109>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기계 같은 인간과 인간 같은 기계를 통해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재조명한 내용이었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만화가 데뷔, 1993년 신인만화가상 수상…. 만화가로서 꽤 주목받으며, 나는 더욱더 나의 만화를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몸 상태가 안 좋아 건강검진을 받아보았더니 폐병이 있다고 했다. 더욱 어이없었던 건 그것이 2차 발병이라는 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폐병이 생겼다 아문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병원을 박차고 나왔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온 것일까.

폐병으로 한동안 독한 약을 수도 없이 삼켜야만 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자리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그렇게 누워 있던 한순간,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나 사회를,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매 순간순간들이 지긋지긋했다. 마음이 그러니 젊은 나이에 폐병이 걸렸구나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예전에 내가 그렸던 만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회 부적응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어둡고 시니컬한 내용이었는데, 책장을 넘기다 마치 예언처럼 폐병에 걸린 내 폐와 똑같은 그림을 이미 거기에 그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엄청 놀랐다.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폐병, 치료, 또다시 발병….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겪으며 이 시련은 하늘이 내린 또 다른 지침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거나, 만화를 그리는 매 순간순간들에서 오는 기쁨을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 작은 경험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 그것은 결코 연습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내 작품들은 조금 더 경쾌하고 밝아져갔다. <필승아 놀자>라는 작품을 본 한 분은 “네 만화를 보면 행복해진다”라고 하셨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제야 기쁨이라는 걸 정말 알게 된 것 같았다. 내 안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2002년쯤 천문학을 알게 되면서 더욱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천체 물리학적인 관점으로는 빅뱅 때부터 이어져온 태초의 우주가 내 안에 다 있고, 나는  땅의 어머니 지구가 낳은 흙의 자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은 조금 더 깊어지고 따듯해지고 여유로워졌다. 오늘도 나와 함께 원을 그리며 이야기하는 태양과 달, 다정한 친구 같은 행성들,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지어 본다.

 

전갑배 작. <나무-2> 오일파스텔. 600×409cm.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