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의 고백, 어머니를 보내고
공민호 38세. 미용사. 충남 논산시 상월면
누나와 형들이 다 커서 객지로 나가자,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묵 장사를 하셨고, 집안 형편이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항상 늦둥이 아들이 필요한 것, 먹고 싶은 것을 사주셨다. 하지만 이런 고마운 어머니도 그때뿐, 난 항상 뭔가 부족해했고 어머니의 행동들이 불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형 누나들처럼 어머니 품을 떠나 객지에 나가 돈을 벌고 미용 기술을 배운다고 한창 열심히 일을 했다. 그때쯤 어머니는 한평생 하시던 장사를 그만두고 홀로 시골집에서 지내셨다. 갑자기 시간은 많아지고, 자식들의 빈자리도 커서였을까.
어머니는 기운도 없어 보이고, 삶의 의욕도 점점 떨어지면서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러려니, 좋아지려니 하고 어머니를 잘 살펴드리지 못했다. 그저 내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지켜보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난 뭐가 뭔지를 몰랐다. 막상 나의 곁에서 죽음이라는 게 일어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만 흘러내렸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어머니 모습이 이상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내 앞에서 숨 쉬지 않고 계신 어머니가 정말 나의 어머니란 말인가? 이젠 싸늘하게 누워서 아무런 대답도 없고 어머니는 정말 어디에 계신 건가?
세상은 야속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없는 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지낸 시간이 많고 애증이 많았던 탓일까, 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 말고 화장실에 가서 30분 넘게 눈물을 흘리는 등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어머니의 죽음을 자책했던 나는 점점 몸까지 약해져 의욕도 없고, 허무해졌다. 날 괴롭히는 복잡한 생각들로부터 돌파구를 찾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그러다 ‘마음을 지우개처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수련 본원을 찾았다. 내 마음속에만 있던, 내가 사진처럼 찍어두었던 어머니와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우동 한 그릇 사드시지 못하고 아끼고 아껴 용돈을 주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형식적인 전화 한 통 하고 용돈 조금 드리는 걸로 자식 역할 다했다 여긴 나, 나이 많고 배움이 부족한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나. 내가 내 미래를 위해 쏟아부은 열정의 반만이라도 어머니에게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옛날 조상들은 부모가 죽으면 그 무덤 옆에 빈소를 차리고 삼년상을 치렀다는데 나도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다는 마음으로 수련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죄책감이 어머니를 편안히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어머니는 나를 용서해주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진들이 가득 차서, 공허한 마음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죄책감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으로 변했다.
막내의 욕심이자 마지막 바람은 우리 누나와 형들도 마음속에 묻어둔 수많은 어머니에 대한 자기만의 사진 속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실로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한 적도, 형제들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번 한 적이 없는 듯하다. 이제라도 고백하고 싶다.
“어머니, 저 늦둥이 막내예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며 애지중지 키워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이 헛되지 않게 더 많이 내 주변 사람들, 세상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형들, 누나들, 철딱서니 없는 막내 때문에 항상 걱정하는 것 잘 알아. 형들, 누나들에게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도록 열심히 살게. 사랑해, 고마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를 떠나보낸 여행길
신혜 29세. <먼지의 여행> 저자. blog.naver.com/nanyanya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재산의 잃음, 이런 상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뭘 할지도 몰랐다. ‘나’라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때쯤인가 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돈 없이 전 세계를 여행하는 독일 순례자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3개월 정도 서울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삶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신에게 영감을 받으며 실천하려 했고, 사람들과 항상 이야기하고, 그걸 통해 자기 안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만들어갔다.
언제나 돈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배워온 나에게,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자는 게 매일매일 어떻게든 해결됐던 그들의 삶은 매우 새롭고 매력적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집, 가족, 재산, 학력, 지위, 인맥 등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을 뒤로하고, 온전히 나를 내 마음 안의 영감에 맡긴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행히도 난 새롭게 살고 싶었다. 남들이 바라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다. 온전히 내 안의 영감에 귀 기울이고, 그걸 통해 배우는 삶을….
그렇게 시작된 여행. 24살의 나는 돈 없이 1년 동안 인도, 네팔, 태국, 중국을 돌아다니며 고요하고 느린 시간을 즐기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무엇이든 해야만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듣고 배워왔다면, 그 반대의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나무에 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물웅덩이의 잔물결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편안해지는 걸 느끼는 것.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냥, 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즐기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졌고, 그들과 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이 여행은 그저 돈 없이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놓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그때그때 사는 것을 연습해야 가능한 여행이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배우고 성장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여행 중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나눠주는 것을 받으면 정말 고마웠다. 빵 한 조각이라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은 축복이고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그날그날 채워졌다. 내가 가지고 떠났던 것들은 무거워서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어서 사라졌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준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가 입던 바지는 두 친구가 준 것이고, 기타는 순례자 친구가 준 것이고, 손목엔 여러 친구들이 만들어준 팔찌가 있고, 내가 덮던 담요는 다즐링에서 만난 친구가 준 거고…. 그들의 마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고 따듯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내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무언가가 생기면 필요한 이들과 나눠 썼다. 이렇게 ‘내가 사라지는’ 경험들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순례자들과 여행을 하다가 헤어져 혼자서 인도 콜카타의 마더하우스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의 고아원에 있는 수녀님이 벽화를 그려줄 수 있겠냐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정말 즐거워서 스스로 열정을 내어 했다. 6개월 동안 작업하며, 그곳의 자원봉사자 친구들이 생활비를 조금씩 나눠주어 살아갈 수 있었다. 밤에 기도를 하고 자면 아침에 영감이 떠오르고, 그것을 스케치해서 벽에다 그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가장 큰 힘은 먼지와 같던 나의 정체성 대신 과감히 선택한 여행 덕분이다.
엄마, 이제는 후회 없도록 살게요
하순화 44세. 유기농숍 운영.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119로 응급실에 가는 중입니다. 보호자분 빨리 오세요.” 불길한 예감은 했지만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잠자던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응급실로 가고 있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별의별 생각과 함께 5분이 500분 같았다.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딸이 힘들까 봐 요양원으로 가신 지 딱 11달째 되는 날이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사롭지 않게 보이셨다. 엄마 얼굴을 보니 그래도 좀 위안이 됐다. 배가 아프시다고 했다. 그게 나하고의 마지막 대화였다. 응급 상황이 늘 있던 터라 또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괜찮아지시겠지, 스스로 위로를 했다. 엄마한테도 “엄마! 의사 선생님이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금방 괜찮아진대”라고 말씀드렸더니 편안히 주무셨다. 그렇게 엄마의 모습이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낸 지 일년이 다 됐지만 아직도 내 기억엔 엄마가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다. 그렇게 쉽게 가실 줄 알았다면 엄마 손이라도 꼭 잡고 못다 한 얘기라도 실컷 할 걸. 사랑한다고,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했었다고. 같은 하늘 아래 엄마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났었다고.
보고 싶으면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 달려갔었다. 추운 날 엄마가 보고 싶어서 출근길에 들렀더니 내 손을 만지면서 꽁꽁 얼었다며 당신 이불 속으로 내 손을 당겨 녹여주시던 우리 엄마. 유난히 쌈 싸먹는 걸 좋아하셨던 우리 엄마! 매주 일요일이면 엄마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서 우리 가족이 전부 맛있는 고기랑 쌈을 준비해서 갔었다. 이것저것 손자에게 먹이시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고 또 그립다.
요전 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연극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기고 싶고. 왜 이제야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는 걸까? 후회와 죄책감만 남았는데. 엄마에게 해줄 게 너무 많이 남았는데.
엄마, 늦었지만 잘해 드리지 못한 거 용서하세요. 앞으론 더 열심히 살게. 여태껏 나를 가장 사랑해주고, 내가 잘됐을 때 젤 기뻐해준 사람이 엄마였는데. 지금껏 철부지로 살았나 봐. 엄마는 내 곁에 오래오래 계실 줄 알았어! 다들 후회 없는 삶은 없다고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너무 많은 교훈을 남겨주셨어. 소중한 게 뭔지. 사람 보는 눈도 생겼어. 진심을 담아서 사람을 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거.
엄마 나 많이 철들었지! 아껴준 만큼 사랑한 만큼 나도 엄마 뜻 잘 이어받아서 우리 아이들 지혜롭고 바르게 잘 키울 거고,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성규 아빠, 임서방 잘 섬기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 지켜봐줘!
엄마 영원토록 기억할게요. 사랑합니다.- 막내딸 순화 올림.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합니다. 이별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큰딸을 시집보내고
추창연 59세. 농부. 전남 장흥군 안양면
미란아, 네가 시집을 간 지 벌써 1년여가 되어가는구나! 물가에 놔둔 어린 사슴처럼 항상 걱정이었는데 이십여 성상을 훌쩍 넘어 이제는 한 가정을 꾸리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구나! 너를 시집보내는 날, 참 많은 감회가 교차했었단다.
네가 태어난 첫해,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엄마 품에 안겨 교회에 다녀오는 너를 보듬고, 하얀 눈을 맞으며 덩실덩실 춤을 췄었지. 너를 낳는 것도 무리라 할 정도로 엄마 몸이 약했는데, 두 사람 다 건강하니 하늘을 얻은 것 같았단다.
네가 두 살 되던 해, 동생 두리가 태어나던 날 아침에 설거지한다고 꼬막 같은 그 작은 손으로 퐁퐁 대신 콩기름 한 병을 다 부어 할머니에게 칭찬과 꾸중을 한꺼번에 들었었지.
그 작은 것이 어느새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또 학교에서 무슨 상이라도 타 올 때면 말할 수 없이 기뻤단다. 너도 어리면서 꼬물꼬물 더 어린 동생들을 챙겨주던 너를 보면 언제나 기특했지. 네가 자라가는 그 자체가 아빠에게는 보람이고, 힘이었단다.
항상 걱정과 미안함도 많았다! 외국에서 소가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소를 키우던 일들도 엄청난 손해를 보고 접어야 했고, 어떻게든 재기해 보려고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도 지어봤지만, 연이은 실패를 맛봐야 했지. 어떻게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더구나. 네가 때로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면, 못 먹여서 그러나, 없는 형편에 병원 한번 데려가지 못하고 이 못난 아빠를 탓해야 했지. 쓸 만한 학용품, 좋은 옷 한 벌 사주지도 못했구나. 그래도 너는 누구보다 명랑하고, 항상 이해하고 따라주었지! 어디 가든지 “아빠같이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해줄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단다.
처음 너를 떠나보낼 때가 고등학교 때구나. 작은 자취방 하나 겨우 마련해, 40리 떨어진 읍내 학교로 너를 보낼 때, 수많은 걱정이 앞섰지. 하지만 너는 정말 꿋꿋이 생활했잖아. 그러면서 일요일에 집에라도 오면 논, 밭에 나와 일손을 거들어주었지!
미대에 간다고 했을 때, 참 많이 걱정하고 반대도 했지. 하지만 아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계속 반대할 수만은 없었단다. 아빠도 미술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공부할 수 없었거든. 너까지 한으로 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에 나와 미술 교사를 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오직 일에만 매진하며 열심히 뛰었던 너. 네가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싶다며 데려왔을 때, 내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술렁거렸다. 품 안의 어린애로만 보였던 네가 벌써 결혼을 한다고 하다니.
사랑하는 예쁜 딸 미란아!
인생에는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따른단다. 이제는 모든 것을 너희 둘이서 슬기롭게 헤쳐가야 하지. 첫째, 마음을 넉넉하게 가지고 사물을 보고, 항상 둘이서 의논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를 이해하며 즐거움으로 생활하면 모든 게 잘 풀려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간에 한 번 맺어진 운명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너희 가는 길이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하길 아빠는 늘 기도할게.
세상은 언제나 봄날
김진정 37세. 교사. 경남 창원시 의창구
그는 오늘도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운동장에서 농구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사회생활 4년 차의 건실한 여성, 그는 임용을 기다리는 청년. 다른 청춘들이 하고 있는 고민을 지나왔고 해결했으며 그와 나의 현재와 앞날은 온통 분홍빛이다.
그와 헤어졌다 다시 만난 지 6개월이 지나고 있다. 거의 매일을 만났다. 퇴근하면 그와 만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가로수 길을 걷고 유명한 맥주집도 갔다. 그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며 진보적인 사회 의식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도 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잘 들어주었고 5살이나 어리지만 말도 잘 통한다며 좋아했다. 물론 싸운 날도 있었지만 소원한 기간은 이틀을 지나지 않았고 싸우기 전보다 더 사이가 좋아지고는 했다.
올 장마는 유난히 길고 비가 많나 보다. 연일 궂은 날씨다. 한국에서 제일간다는 이 종합병원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는 부스스한 머리에 피곤하고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속에 병원에서 처음 뵙게 된 그의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그리고 나도 있다. 옆방에선 그가 호흡기에 의지한 채 죽음과 싸우고 있다. 아니 죽음의 편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그의 병은 너무나 갑자기 찾아왔다. 올 들어 가장 덥다는 날, 그가 우리 집에 왔다. 열이 난다 했다. 더워서 그런가 했다. 좀 있으니 춥다고 했다. 두꺼운 이불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구급차를 타며 그는 이참에 건강검진 다 받고 건강해져 나오마 했다.
입원하고 이틀 뒤 나도 그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악성 림프종이란 병명을 받았다. 의식이 없다. 그러나 목으로 무언가 빼내는 치료를 할 때면 고통스러워 몸을 움직인다. 의사는 그가 완치된다 하더라도 장애가 남을 거라 한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의사는 우리를 단념시키는 듯하다. 집으로 내려오고 나서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 다녀왔다. 두 번째 전화를 받고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침대에 반듯이 누운 그는 몸에 붙이고 있던 거추장스런 것들을 모두 떼어버려서 그런지 편안해 보였다. 가슴도 아직 따뜻한 것 같았다. 혹시 그가 살아 있는 건 아닐까….
그를 보낸 후 나에게 세상은 더 이상 화창한 봄날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전의 냉소적인 내가 되어 있었다. 난 원래 사랑에 관심도 없고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나를 위로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혼자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영화에 음악에 빠지기도 했다. 마음속에 있는 그에 대한 마음을 쏟아버리고 싶었다. 반대로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지만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슬픔이 가득 찬 것 같았다. 누가 살짝 건들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항상 받기만 하고,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기를, 나의 즐거운 일상이 되어주기만을 바랐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내가 흘린 눈물은 이제는 그런 그가 없는 나를 위해 울어준 것에 불과했다.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수련을 계속하면서 마음으로 빌었다.
그를 보낸 지 9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담담하게 그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된 지금 그가 아팠던 몸을 벗어버리고 편안하게 있음을 알기에…. 그도 나도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아이들을 믿습니다
이정원 32세. <대광여자청소년의 집> 근무
나는 광주의 한 청소년 쉼터에서, 소위 말하는 비행 청소년들을 지도하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주로 형사처분 및 보호관찰을 받거나 소년원에서 퇴원한 여자 청소년들이 오는데, 거의 학업이 중단된 상태라, 처음에 오면 가정환경을 파악하고 진로 상담부터 한다. 그 후 학교나, 검정고시 학원, 미용, 제과제빵 같은 전문 직업 학원 등 아이들에게 맞는 곳을 찾아 다니도록 해준다.
하지만 한참 예민하고 민감한 여자 청소년들인 만큼 바람 잘 날이 없다. 학교에 지각 안 하게 보내는 것부터, 학교에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는 전화, 학원을 땡땡이 쳤다는 전화, 때로 재범을 저지르거나 쉼터를 가출했다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이야기, 그런 것들을 수습하고 다니다 보면 하루가 바쁘다.
이 일을 한 지 어느새 6년,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날마다 전쟁 같았던 날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마음이 울컥해진다. 보통 아이들은 6개월에서 1년을 이곳에 머물다 간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 학교를 졸업할 때, 자격증을 딸 때, 강해 보이던 인상이 앳된 얼굴로 돌아갔을 때, 편지를 써서 줄 때, 재범하지 않고 무사히 쉼터를 떠나보낼 때의 감동들. 때로 아주 큰 변화를 보여 놀라게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번은 절도 행위 재판 후 우리 기관으로 온 여고생이 있었다. 어디서 맞았는지 얼굴엔 피멍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무기력하고 초점 없는 눈빛에, 말도 없고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일부러 농담도 걸고 장난도 치면서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끝에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그 아이가 계부의 잦은 폭행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는 것,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리다 절도까지 하게 됐다는 것, 이곳에 오기 전 다른 청소년 쉼터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모든 의지를 상실한 채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관심 가져주고, 들어주고, 웃어주는 사람들 곁에서 생활하면서 아이는 점차 말수도 늘고, 또래들과 장난도 치며, 표정과 성격이 밝게 변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검정고시도 준비했다. 우리는 아이가 대학생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대학 및 독지가의 후원을 받도록 도움을 주었고 드디어 진학에 성공했다. 대학 시절 내내 전체 평점 4.4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며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던 그 아이는 현재 유학을 준비 중이다.
그렇게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내가 더 기쁘다. 아이들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사회의 편견처럼 나도 처음엔 이런 아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아이들은 정말 순수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너무 상처받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아이들을 사회로 보낼 때 항상 믿음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이 세상에 자기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은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그 믿음이 이 아이들 어엿한 한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리라는 것, 그 또한 믿는다.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21)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가수 방실이가 부른 ‘서울탱고’의 가사입니다.
불현듯 가사 한 줄 한 줄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우리네 인생사가 잘 담겨진 것 같습니다.
노랫말처럼 세상사에서 벗어나 그냥 쉬면 좋겠습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인연도, 열등감도, 미움도….
온갖 시름 다 잊고 술이나 한잔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크게 웃고 크게 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빼기가 대안이다
“지금 내 마음… 그림으로 다 말해요”
그림으로 보는 마음수련 전후의 심리 변화
미술치료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아이들도 그림에서 나타난 상징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깊이 있게 알 수 있고 심리 진단과 상담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리는 작업을 통해 창조적인 신체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지난겨울 제25기 마음수련 청소년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 중 초등학생과 중학생 14명을 뽑아 수련 전과 후에 HTP 테스트를 통해 심리 상태를 진단해보았다. HTP 테스트는 집과 나무, 사람 그림으로 가족 관계에 대한 태도와 심리적인 집의 환경, 대인 관계 능력, 의지력, 적응 능력, 성격과 지능, 행동 양식 등 비교적 다양한 분야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는 실험이다. 보통 미술치료는 4~5개월을 해야만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는 진단과 치료를 하지 않는데 단 20여 일간 마음수련을 실시한 아이들에게서는 많게는 3가지 분야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이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로, 마음수련이 아이들의 심리 상태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며 이를 꾸준히 할 경우에는 훨씬 큰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 김○○ 초4 여자
캠프 참가 전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커서 에너지 조절이 힘들어 보인다. 그림이 아래쪽으로 치우쳐 있다.
캠프 참가 후
집(부모)에 대한 생각이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자신에 대한 개념을 긍정적으로 갖게 되고. 정서적 안정감이 엿보인다.
★ 문○○ 중1 남자
캠프 참가 전
집의 물리적 환경은 비교적 괜찮아 보이나 생각이 많고 답답해하는 내향적인 경향도 보인다. 부드러우면서도 대인 관계에 불안감이 있고 화분의 화초처럼 부모의 틀 속에서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캠프 참가 후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개방성이 보인다. 부모에 의존하는 마음도 적절해지고 친구 관계의 원만함도 보인다.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내보이며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찾은 것 같다.
빼기가 나를 바꾼다
틱 장애가 사라졌어요
학교에서 스쳐 지나갔던 아이들의 눈빛, 말투가 하루 종일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점점 소심해졌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외모에 더 신경을 썼다. 어디 살찐 거 같애? 어떤 옷이 더 어울려? 등등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오만 생각을 하면서 사니 위장이 콕콕 찌르는 듯이 아팠고 집에만 오면 잠이 쏟아졌다.
어느 날 아침밥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이렇게 손이 떨리지?’ 아빠는 마음에 안 좋은 일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셨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맞는 말씀이었다. 그때 난 최고 스트레스 덩어리, 예민 덩어리였으니까.
그 후로 뭔가 신경 쓸 일이 있을 때 목으로 틱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신호등을 기다릴 때, 버스에서 내리기 전 서 있을 때, 학교에서 급식 줄을 서 있을 때, 사람들이 나만 쳐다본다고 느껴지고, 안 그러려고 해도 목이 저절로 움직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신경을 쓰니 더 떨렸다. 힘든 마음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엄마가 예전에 알려주셨던 마음수련을 스스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련을 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초등학교 때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친구들끼리 비밀 이야기를 했는데 눈치 없이 비밀을 안 지키고 발설을 해버린 뒤로 친한 친구들에게 소외당해야 했다. 그때의 기억은 아주 강렬했고 그 후로 대인기피증이 생긴 거였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일도 떠올랐다. 나를 괴롭힌 친구를 패주고 싶을 정도로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들도 다 버렸다.
버리다 보니 그게 가짜마음인 걸 알았다. 내게 틱이 있었던 것도 너무 예민하게 굴고 남 신경만 쓰면서 피곤하게 살아서 그렇구나, 그 마음만 버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중에 틈틈이 수련을 하다가 방학 때는 청소년 캠프에 다녀왔다. 그리고 다시 개학을 했을 때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먼저 여드름이 없어지고 얼굴도 하얘졌을 뿐 아니라, 틱 증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만 아는 변화 때문에 나 스스로도 계속 놀랐다. 밥 먹을 때마다 힘들었는데 어느새 위에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소화도 잘되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너무나 담담해진 것이다. 급식을 받을 때도 조금 낯설고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려고 하면 ‘이게 없는 건데’ 하면서 버리면 금세 괜찮아진다. 이제는 신호등도 버스 정류장도 피해 다니지 않는다. 본래의 마음에는 그런 불안함이 없기에, 불안해하는 나와 맞서 그 마음을 바로 버리고 당당하게 걸어간다.
요즘에는 학교 폭력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주변에 도움도 요청하고, 그 마음도 빨리 버려서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인생이 힘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
최주현 17세. 경기도 광명시 광명3동
진짜가 되어 사는 삶
글, 그림 우명
마음속 가지고 있던 수많은 사연 사연이
모두가 세상에는 없는 나가 만든 허상이었구나
세상의 일체를 나 속에 다 가지고 그 속에 살다
그 세계가 없고 나가 없으니
실상이고 있음인 근원이고 본래만 남아
나는 본래로부터 다시 나니
나의 영혼은 본래의 화신이구나
나가 없으니 자유이고
나가 없으니 해탈이고 대휴하구나
창조주의 나라에 창조주의 인간이
모두가 자식으로 거듭나고
이 세상을 창조주가 창조했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그 창조주가 인간으로 세상에 와야
이 천지와 사람을 실상세계인
세상에 나게 할 수가 있는 것이 기적 중 기적이구나
생시인가 꿈인가
인간이 완성되어 영원히 사는 것이 한없는 기적이나
허상의 인간은 참을 모르니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를 모르누나
본래에 감사하고 본래의 뜻에 하나가 되어
세상인을 구원하고
세상을 불국토로 천국으로 모두가 거듭나게 하여
내가 참된 것을
만의 하나의 은혜를 세상을 구원하는 데
인생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다 버리고 나가 없으니
이 세상은 살아 있는 천극락 그 자체에서 영생복락이구나
가도 갈 곳이 없고 또 구하려고 하던 마음이 참이 되니
다 가지니 부족함이 없고
번뇌망상의 일체가 없고
탐진치 칠정오욕이 없구나
나는 한 것이 하나도 없고 진짜만이 다 해주셨구나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구나
대가도 바람도 없이 해주셨듯
나도 나가 한 바가 없이 세상을 구원하고 살 것이다
뜻도 의미도 없는 인생사를 던지고
참의 나라에 복락을 쌓는 것이
현자가 또 참인 지혜자가 하는 일이라
나의 복을 영원한 하늘나라에 짓고 쌓아서
권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어리석은 자는 없는 땅에다 재물 쌓고
지혜로운 자 있는 하늘에 재물을 쌓는다는 말이다
나가 없어 대자유이고
나가 없어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나라 죽음이 없는 나라
그 나라에 든 자만 인간의 의의와 가치를 알고
생의 의미를 알 것이다
죽고 살고의 기로에 선 사람은 주저치 말고
참인 세상 나야 하지 않겠는가
뒤돌아보니 어리석음만 있었던 인생사에
또 허상의 귀신인 나가 없어졌으나
미련도 아쉬움도 하나도 없고
그렇게도 잘 없어지지 않던 없어진 나가
정말로 신기하고 속이 후련하구나
뒤돌아보기도 싫구나
아쉬움 한숨도 달아나고
일체의 고통 짐이 없어졌구나
나를 두고 얻으려던 참이
나가 없어지니 참이 되어 그 영혼이 참으로 다시 났구나
공중에 나는 새처럼 천지만물처럼
그 마음을 다 놓고 살 수가 있고 그냥 살구나
자연심이 되어 살구나
너무 좋아 이 나라 못 간 사람 위해
한세상 이 나라 가게 하는 데
이 몸 바치리라
Mrs. Joonok Park on finding the Complete Self
Edited by Choi Chang Won
"Many times I wanted to give up and just die. My children were the only reason that I kept living all these years." said Mrs. Joonok Park in a recent interview. The eighty four year old Mrs. Park was married at 16, and had two sons and two daughters. Her life had been a great struggle, with a lot of stress and hardship. So she often asked, "Why are we born into this world and live with so much pain and suffering?" and "Where do we go when we die?" She yearned for the answers to these questions. She finally found the answers when, at the age of 72, she was introduced to Maum Meditation.
Mrs. Park said, "The more I emptied my mind, the lighter and freer I felt. All of my questions were answered and all the heartaches disappeared. I was truly amazed at these great changes. I felt so grateful that I meditated every day." Mrs. Park has reached the final stage of Maum Meditation. She says that when she got rid of her false mind, she could live without worries and concerns. Here, we present her joyful story.
I was born in the city of Uisung in Kyongbook Province. My parents believed that women were not supposed to be educated so I was never able to go to school, no matter how much I wanted to. I helped out my mother with the housekeeping chores at home until I got married at 16. My daily routine as a married woman was quite demanding. I got up early to prepare breakfast for my family and in-laws and after breakfast I went to work in the rice fields. When I returned home in the evening I did more chores until late at night. In spite of my small physique, I always worked harder so that other people wouldn’t have to work as hard.
All the physical work was very tiring but I could manage pretty well. However, dealing with my husband’s attitudes and behaviors was extremely difficult. My husband believed that people who were born in the upper class did not have to do any physical labor. So he never worked. Not only did he not work, but he also took the money that we women had earned by our hard work. And he would return home after he wasted all of the money just to take more. Nevertheless, I could not make any complaints because he would get angry and throw anything and everything at us.
In the meantime, my children were growing up. I really wanted them to go to school so that they would have a better life than mine. So I started a small embroidery business. I would have some of my neighbors make the products and I would travel to many cities to sell them. Sometimes I felt like I was going to collapse on the road from exhaustion, but I always made it through by sheer determination. Quite often on my selling trips, I suffered humiliation from people’s disrespect and ridicule. It was unbearable, but I had to endure the pain for my children.
All my life I had never expressed my anger towards anyone nor refused any favor asked of me because I always believed that I was an insignificant person. This belief caused a lot of unnecessary stress in my life. I often wondered about the reason why I was born, and the reasons why I had to suffer so much in life.
So I constantly sought the "Truth" (the answers).
In the year 2000, I was introduced to Maum Meditation. I asked a teacher, "Can an ignorant person like me do this meditation?" She answered, "Anyone can do this meditation because all of the answers are within us." Her answer was very encouraging and touched my heart so I decided to meditate diligently, trusting Maum Meditation’s method.
During the first level, I was told to discard my whole life memories that were stored as pictures in my mind. I meditated 14 hours because I was so happy and excited that I could throw away myself and my life, which I thought were disgusting. I was especially happy about discarding myself (my false-self) because many times I had contemplated on ending my life and disappearing from this world. I progressed steadily and one day, during meditation, I completely disappeared. Then I realized that I never existed, and that the Universe was me. My whole life was just a dream. It was so amazing that I could realize this truth.
At every level, I meditated until I completely disappeared. It is hard for me to describe this experience since I am uneducated. During the third level, my consciousness expanded suddenly and enclosed the whole universe within me. I said to myself "Aha! The universe is within me!" I was in total bliss. In another session, I was instructed to try, using my mind, to go up as high as I could, and go down as far as I could in the universe. Then I realized that the Universe is infinite and has no boundaries.
I continued to meditate and one day, I became one with the Universe and I disappeared without a trace. At that moment, I realized that ‘I’ would be reborn as the body and mind of the Universe and live forever. "Wow!" This was unbelievable. I could never express well enough the feeling I had experienced at that moment. I was so overwhelmed by gratitude and I could not stop crying.
I now believe that I am responsible for everything that happens in my life. I realized that it was my karma that had brought, out of all the men in the world, my husband to me. And it was my own fault that I had so much anger and hatred towards him.
On rare occasions, such as my children’s graduations, marriages, and childbirth their lives had brought happiness to me; but that happiness always turned into concerns and worries. Now, thanks to this meditation, having let go of all attachments to my children, I am free of worries and concerns and feel relieved.
And I constantly feel happiness and gratitude and have a smile on my face. It is only natural that I feel happy all the time now that I live in the everlasting world as a totally free and enlightened being.
I can tell you that this meditation takes you to a place no words can describe. You will only know when you experience it yourself.
Wisdom of life through throwing away (20)
Subtraction Changes Me
A Patient with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is Now Completely Recovered
I had been making up these rules since elementary school. No one taught me to do this and I do not remember exactly how it started. I think somehow, since childhood I believed that the whole world was contaminated and people lacked the cleanliness. I was so nervous that I must have decided to do things to protect myself. Despite all the inconveniences, I religiously observed the rules I made.
Such as, when I came home I put my coat and gloves on the balcony because I wanted to keep my room clean and free of germs.
Even at school, I observed the same rules. I said to myself "All humans are basically selfish. In order to survive in this rough world, taking care of my body should be the primary concern." But I did not care what happened to other people.
Only when I was with my friends, I pretended to be ‘normal’ out of fear of being alienated. Sometimes, I had to force myself to eat hamburgers, when I came home I ate vegetables twice as much as hamburgers. Back then, I was very unhappy and stressed out about everything, but I thought what I believed was all correct.
When I turned 20, my sister recommended that I try to do Maum meditation.
So I went to Nonsan Center, Maum meditation’s headquarter in South Korea, thinking that I would have one week of vacation there. That one week became a turning point in my life.
During meditation, I could clearly see the 20 selfish years of my life. I was always on guard to protect myself, and I tried very hard to become successful in my career. But nothing went as I hoped. My life was a great struggle, so I blamed the world and other people.
It seemed so ludicrous thinking that I was the most precious person in the world, I constantly judged and criticized the world and people with my distorted standards. I realized I was trapped in my false-mind world all this time, and I tried to clear my mind as much as possible.
In one session, I (false self) who always struggled to become more successful than others suddenly disappeared. Then, I realized that the infinite universe was myself. At that moment, I felt totally free, and I was determined to see my false mind completely discarded.
My perspective of the world has changed a lot since I started this meditation and my relationship with people, eating and clothing habits, etc. has improved as well. Now, I feel so relaxed and comfortable. I can decide whether or not to eat hamburger or drink soda, depending on the situation. I can talk on a subway train or walk on the sidewalk freely and I maintain the basic cleanliness.
Having been an obsessive-compulsive person, I now feel grateful that I’m free from all of those self-imposed restrictions. I would sincerely like to apologize to anyone to whom I might have caused inconveniences in the past. I’m really really sorry.
Minsup Kim, University Student
My Father Got His Smile Back!
Yonhee Hong, 23, University Student
It must have been during my middle school years when our family’s life suddenly turned upside down. My father had guaranteed a loan for his friend, and the loan went bad. He lost a fortune when he had to pay off the loan. We barely escaped becoming homeless, and we had to move to a considerably smaller house. Also, my father moved away for a few years in order to make money. I was never close to my father, who did not know how to be affectionate. After this incident, I started hating him.
Occasionally my father would visit us, and my parents would often start arguing and we were all so miserable. I blamed my father for everything and I ignored him completely. It seemed that my father also blamed himself for everything. He was gradually becoming emaciated and he always looked worried and sad. But I was too busy worrying about my own prideful issues since I was quite immature and selfish. I used to be embarrassed to bring friends over to our house or to talk about our family situation. I was angry at my father, and I talked to him without respect or affection.
When I was a high school student one of my father’s relatives introduced him to Maum Meditation. After about six months of meditation he looked definitely happier. And he started doing housekeeping chores, and paid great attention to taking care of us. He did not say much; however, his quiet and relaxed demeanor brought stability to all of us.
Since then we have all tried Maum Meditation. All of us had been very stressed and frustrated. My mother had to endure tremendous suffering, watching my father going through so many problems so suddenly. My older sister also suffered, feeling a heavy burden on her to earn the bread. After doing the meditation for a while, we all felt the changes within us. The walls between us started to crumble and I began to see more clearly what my father had gone through during those tough times.
It must have been extremely painful and frustrating to carry the guilt and financial burden all by himself. He must have tried to bear the difficulties by himself lest he inadvertently hurt us even more. I deeply regretted my conduct and attitude towards him. And I cried a lot because instead of supporting him, I had only piled more stress on him by acting like an immature, selfish, spoiled brat. And I felt so ashamed that I had never listened to him because I was embarrassed by his situation at that time.
At present my father is a taxi driver. In spite of his back problems he works for 24 hours, from 6am to 6am the next morning. He works constantly for us. Even when he stops by home to take his meals, he jokes around and helps out with the dishwashing, cleaning the floors, and other chores, all without showing any sign of exhaustion. I realize now how great my father is. My mother is amazed at his determination. She said "Your father, who used to work only in the office, would have never thought of taking such a physically demanding job if he had not done the meditation."
My father accepts and supports all my endeavors saying, "Yes, that’s good." I respect him a lot and I’m very grateful to him.
I said, "Father, our family is truly blessed because we came across Maum Meditation. Right?" Thank you dad, for always working so hard for us and showing us your smiles, not frowns. Let us continue living happily like this. I love you.
He Who Has Become A Proper Person Will Teach Properly And Live Properly
Drawings and writings by Woo Myung
The world is already enlightened,
and the world is one of light, as bright as day.
However, man cannot see this bright world because his consciousness is trapped inside his mind world. People who are ignorant of the world of light live in suffering because they do not know what true light is. They live inside their dark minds according to what is scripted there; they live within their sufferings and their burdens, oblivious of where they must go. Man blames life and the events of life, but he does not know he is the one to blame. Man, who lives inside his mind, within endless time, does not know his mind itself is an illusion and a ghost.
All people, whether they be kind or unsatisfied, whether they be family, friends, or enemies are illusions and ghosts from the viewpoint of the world of light. They are all illusions and entities that do not exist. People have not been able to live how they wish – according to their wills that are their greed – and they have many regrets and sorrows because they live with non-existent entities, speak with non-existent entities, and live out their various lives with non-existent entities. Although much time has passed, and is still passing by, this problem cannot and will not be solved from within man’s mind. There will come a day when man becomes righteous and stands tall – a time when everyone lives in the land of light – and only then will this problem of man be solved. Moreover, the resolution of all suspicions and doubts will come about when man knows they arise from his delusions, and that these delusions, and his self, are false. Only when one comes out into the light that is Truth, does he know life is an illusion and that it happens inside a dream.
Only he who has been born in the world of light has wisdom,
and does not live foolishly; and therefore does not have darkness within him. Great nature that is silent lives in the land of light without anxieties, but it is deeply unfortunate that man who speaks too much is dead, trapped in the world of darkness. Man being reborn as Truth and as a complete person, and living an eternal life as an immortal, is something we have only heard and read in scriptures, but it is truly happening – it is becoming fulfilled. It is difficult to know whether this is a dream or reality. A miracle is falseness becoming Truth, and that which is non-existent becoming existent, so is it not a miracle of miracles, that the whole world is being created to become truly existent?
Religions wait for a Savior, Maitreya or Jung-do-ryung, but these refer to the existence of Truth, and man does not know Truth. He must become Truth in order to know the Savior, Maitreya, and Jung-do-ryung.
Making man who is false become real is salvation
and such is the work of the Savior. The world is alive, but this world can only be saved into a true and real world by the Savior, and only Truth can make man become Truth. Even at this moment, there are people all over the world trying to become Truth, by searching everywhere and trying all kinds of things, but man can become Truth, only when his body and mind are resurrected as the world that is Truth. The countless trials and tribulations, the events and stories, of the world happen within the mind man made; there are no worries in the land of light that is Truth and one just lives with the mind of nature. Laying down the affairs of life that do not exist, and escaping from one’s conceptions and habits, so that one can live in the world that is true, is what all people must urgently do. This is the only way to receive salvation and the only way to be born and live in the world with wisdom. It is then that mankind can become one and everyone can live with laughter. If the people of the world cleanse their minds and are born as Truth, there will be never-ending laughter because they are Truth, and everyone can live happily.
It is for one’s own sake, in order to live a good life, that wars arise, and it is for one’s own prosperity and success, that he preys on others. However when one does not have any human minds, he will live for other people. Government and politics should be run by those who have done Maum Meditation, as religions, philosophy, ideology and learning should also be, for they will be done and led in the right way only when they are taken over by those who have cleansed their minds and become Truth. Only he who has discarded all and has been resurrected as Truth is a proper person,
and only he knows the way to live as Truth.
Truth and falseness may seem as though they are the same, but there is a world of difference from one whose consciousness is trapped inside himself to one who has become the consciousness of the world ? it is the difference between heaven and earth.
동네 노는 아저씨의 친절한 고민 상담소
저는 20대 후반 여성 직장인인데요,
점점 갈수록 일이 많아집니다. 일이 자가 번식을 하는 것 같아요.
출퇴근 시간은 1시간 30분. 운동도 하고, 자기 계발 시간도 갖고 싶은데,
퇴근하고 집에 가면 뻗어버리고 맙니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항상 제자리인 것 같고,
아니 갈수록 퇴보하는 것 같아 우울합니다.
어떻게 해야 운동도 하고 자기 계발도 할 수 있을까요?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리의 예쁜 캔디 여주인공은 악녀 등쌀에 못 이겨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철을 들고 복도 코너를 돌다 남자 주인공과 부딪칩니다. 알고 보면 회장 아들이나 손자죠. 얼마 후 남자 주인공은 밤샘 작업에 지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캔디를 위해 초밥을 사들고 옵니다. 족발도 있고 순대도 있는데 꼭 일식집 봉투의 초밥입니다.^^
그럼 이제 현실로 돌아오죠. 일은 많고 자기 계발 시간은 없으시군요. 한마디로 현실에 초밥 사들고 올 회장 아들이나 손자 없으면 회사 일 많은 거 참 피곤합니다. 직장 생활 20여 년 가까이 한 선배로서 감히 말씀 드리면 점점 늘어나는 일에 치일 때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가 아닌 ‘미룰 일은 최대한 미루라’는 겁니다. 일의 경중을 따져야 됩니다. 지금 고민녀님 나이 때가 직장에서 일이 가장 많을 시기입니다. 지금부터 업무의 우선순위를 항상 따지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남의 할 일까지 하고 쓸데없는 업무까지 하며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일에 치여도 주먹 쥐고 파이팅을 외치며 혼자 중얼거리는 캔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갸는 그러다 지쳐 쓰러지면 안아줄 회장 손자가 있지만, 현실의 나는 피곤한 몸을 의지할 데라곤 출퇴근 버스 안의 손잡이밖에 없으니까요.
82세 되신 저희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화투장 패 뜨기를 하십니다. 치매 예방에 좋다면서. 어떻게 보면 자기 계발을 하고 계신 거겠죠. 자신도 알게 모르게, 크든 작든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게 자기 계발입니다. 지금 당장은 남들에 비해 또는 스스로 처지는 느낌이 드실지 몰라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는 시간에 뭔가를 하려고 하면 힘듭니다. 세상에 남는 시간은 없습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꼭 만드셔서 작은 계획부터 실천해 보세요. 그리고 세상일 모든 기본은 건강한 몸에서부터 시작입니다. 꼭 짧게라도 운동하세요.
‘메디피스Medipeace’ 베트남 현지 코디네이터 박연출씨
취재 문진정
베트남 중부의 광찌(Quang Tri)성 여린(Gio Linh)현. 이곳은 과거 군사분계선이 위치하던 곳이자 베트남전쟁 때 고엽제가 가장 많이 뿌려진 지역이기도 합니다. 고엽제 속 다이옥신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암과 백혈병을 유발하고, 기형아를 출산하게 하여 그 피해가 2, 3세대까지 이어지는 무서운 물질이지요.
여린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인구 2만 명의 지역에 천 명이 넘는 장애인이 있다고 하니 한 집 걸러 한 집에 장애인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의 키다리아저씨를 자청하고 나선 한국인이 있습니다. 보건의료 전문 봉사 단체인 ‘메디피스’에서 베트남 현지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는 박연출(53)씨입니다. 번듯한 대기업 직원이었던 그가 베트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2년 전, 베트남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이 멸시당하는 모습을 보고서입니다.
‘베트남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피는 붉은색이다’는 어느 이주 노동자의 한마디가 마음 깊이 와 닿았다는 그는 한국인들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베트남어를 배우고,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이들의 고충을 함께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딸아이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며 눈물짓는 베트남 친구의 말을 듣고, 마침 집에 있던 캠코더로 수십 명의 이주 노동자들의 영상 편지를 찍어 베트남으로 날아갔습니다.
몇 년 만에 영상으로 소식을 접한 일가친척들은 밤새 비디오를 보며 눈물을 쏟았고 그 후로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그들의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50대로 접어들며 그는 베트남과 자신과의 십 년간의 우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동안 알게 된 수백여 명의 노동자들, 결혼 이주 여성들, 밤낮으로 베트남어 통역을 도와준 유학생까지…. 더 나이가 들어 삶에 안주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습니다. 그렇게 승진을 얼마 앞둔 2010년,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베트남으로 떠나게 됩니다.
“돌아보니 직장 생활도 전부 돈을 위해서 했더라고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구나, 나 하나 채우기 위해 살았던 50년의 삶보다 내가 가진 걸 나누는 삶이 훨씬 소중하고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메디피스의 단원으로 일하게 된 박연출씨는 매달 한번 비행기와 기차, 택시를 갈아타고 여린현을 방문합니다. 마을을 돌아보며 장애 아동들을 메디피스 재활 치료사와 연결시켜주고, 화장실과 부엌 등은 편리하게 개조하고, 장애 아동의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꾸리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 간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는 도움을 줬던 모든 가정을 매달 잊지 않고 찾아갑니다. 여린현 아이들 역시 웃고 고함을 지르며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지요. 처음에는 냉랭했던 부모들도 아이들의 치료와 성장에 더 관심을 갖고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때에 느끼는 행복 바이러스는 아무리 널리 퍼트려도 부족하다는 박연출씨. 십 년 후쯤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이주 여성들의 ‘친정 부모’가 되어 고민 상담을 해주는 것이 그의 최종 꿈입니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에 있을 동안 더 많이 느끼고 배우고 반성하고자 합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의 입장에서, 좀 더 다가가서, 진짜 원하는 부분을 도와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