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미쳐야 그곳에 미칠 수 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향해 남음 없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사람들의 이야기

비빔밥집 아저씨,‘비빔’에 미쳐 이름도 ‘비빔’으로

유비빔 49세. 전주 비빔소리 운영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비빔에 미쳤다고 한다. 단지 비빔이 좋은 것뿐인데 너무 많이 좋아하다 보니 미쳐 보이나 보다. 내가 비빔에 미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원래 나는 비빔이 아니라 소리에 미쳐 있었다. 소리가 좋아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부 활동을 하며 드럼을 연주했다. 그런데 귀에 물이 들어가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아무리 연습을 해도 정확한 연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때마침 연주의 꿈을 포기하며 힘들어하는 나에게 위대한 스승님이 나타나셨다. 바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드러머이자 타악기 솔리스트 고 김대환 선생이다. 선생님은 “앞으로는 소리의 시대가 올 것이다. 소리를 찾아라”는 말씀을 주셨다.

소리를 찾는다는 게 뭐지? 도대체 소리의 정체가 뭐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세계소리축제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소리문화의 전당 앞에서 음식점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늦둥이 유소리도 낳고, 내가 좋아하는 소리에 미쳐 연구를 하다 보니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소리는 비빔이 아닐까? 무슨 소리든 나려면 비벼야 했다. 성대와 공기가 비벼야 목소리가 나고, 장구 가죽과 장구채를 비벼야 장구 소리가 난다. 바이올린도 비벼야 소리가 난다. 모든 소리는 비빔(마찰)이 있어야 생성이 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찾아낸 소리의 정체였다. 이렇게 해서 ‘비비지 않고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비빌 수 없다’는 비빔소리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빔과 소리는 동시에 발생한다는 원리도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비빔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비빔을 연구하니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비빔이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다 비빔하고 연관시켜서 보게 되었다. 음식점의 메뉴도 각종 비빔밥으로 통일하였다. 지역감정도 비벼야 나라가 화합이 되고, 남북도 비벼야 통일이 되고, 공부도 책을 열심히 비벼야 하고. 무슨 말끝마다 비빔, 비빔, 비빔을 달고 사니,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급기야 “그렇게 비빔이 좋으면 이름도 비빔으로 바꾸라”고 권유하였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비빔문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는 사유로 개명 신청서를 냈는데, 3개월 후 개명이 승낙됐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2007년에 결국 나의 이름은 유인섭에서 유비빔이 되었고, 그때부터 ‘비빔’에 대한 나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 후로 영어와 한글을 조합한 비빔문자를 완성시켰고(전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 비빔세계지도 등 비빔AR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비빔 전시회를 열고, ‘세계를 비벼라’라는 주제로 강의도 하였다.

그동안 모아놓은 비빔 관련 파일이 약 1만 장, 비빔 관련 특허만도 벌써 40여 개가 넘어 전주 기네스에도 신청된 상태다. 그리고 지금은 자칭 비빔대학에 재학 중이다. 비빔대학은 바로 특강, 포럼, 세미나, 워크숍 등을 하면서, 비빔철학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직업도 비빔 재료처럼 많았던 것 같다. 보신탕집 신발 정리, 미용사, 클럽 연주자 등등. 그런 경험들이 비벼져, 지금의 비빔형 인간인 유비빔이 탄생한 것 같다. 길을 걸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잠이 들기 전에도, 화장실에서도 늘 비빔만을 생각한다. 누구나 이렇게 무언가에 미쳐 생각하고 연구하고 행하다 보면, 비빔문화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열심히 디자인을 비비고 생각을 비비고 스토리를 비비고 여야, 종교, 경제, 양극화도 비벼서 상생 화합 통합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봅시다! 비빔!

곽수연 작. <서중자유천종속Ⅰ> 110×70cm. 장지에 채색. 2008.

‘우리말’에 미치다

강상철 40세. 회사원.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3동

예전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크게 글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그날 있던 일을 끄적거리는 게 좋았다. 그러던 몇 년 전,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어느 잡지에 글을 기고했는데, 채택이 돼서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을 했다. 순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일반인의 글을 받아 소개하는 잡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이런 데 글을 보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일들, 재미난 일에 대해 써서 여러 군데 기고했지만 채택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생각지도 않게 어느 잡지에 당선됐을 때의 기쁨이란. 생전 처음 원고료도 받고 내 글이 실린 책도 받으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 이후로 더 열심히 쓰고, 더 다양한 잡지에 글을 보냈다. 한마디로 ‘원고 기고하기’에 미쳤다고 할까.

처음에는 선물 받는 재미가 컸다. 그런데 점점 이왕 보내는 거 제대로 써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도 많이 읽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제대로 하고 싶어, 국어대사전 등 우리말 관련 서적을 많이 찾아보았다. 제대로 된 표현인지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쳤다. 우리말의 세계는 어려웠지만, 오묘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생기자, 점차 무심히 지나친 거리의 수많은 문구들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맞춤법은 맞는지, 표현은 올바른지 등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신문을 읽을 때나 TV를 볼 때에도 이상한 건 고쳐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스스로 내 말버릇을 점검하기도 했고, 친구들이 잘못 말을 하면 즉석에서 고쳐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건강식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 가게 벽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중탕 일절, 한약 다려 드립니다.’ 매일 보는 이 문구도 내 신경을 건드렸다. ‘일절’은 결코, 전혀의 뜻으로 부정하거나 금지하는 말과 어울려 부사로 쓰인다. 그리고 ‘다리다’는 ‘구김살을 펴거나 줄을 세우려고 인두나 다리미로 문지르다’는 뜻이다. 고로 위의 문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 된다. 바른 표현은 ‘중탕 일체, 한약 달여 드립니다’다. ‘일체’는 모든 것, 온갖 것의 뜻이고 ‘달이다’는 약초 따위를 끓여 우러나게 하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는 잘못 쓰인 우리말들이 정말 많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이 쓰는 ‘피로 회복제’도 잘못된 말이다. 회복이란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인데 피로를 회복시킨다는 말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쓰려면 피로 해소제 혹은, 원기 회복제가 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우리말들이 무의식중에 잘못 쓰이고 있었다.

“참 유별나다”는 소리도 듣지만 그렇게 잘못 쓰이는 우리말을 보면 한국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아프다. 특히 요즘에는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바르지 못한 우리말을 알려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어찌 됐건 우리들이 바른 우리말을 위해 조금씩만 더 관심과 애정을 갖는다면 우리말 본연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예전에는 무관심했던 주변 사람이나 일들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관심을 가지면 더 잘 보이고, 더 사랑하게 된다는 걸 체득한 덕분이다. 이래저래 나는 우리말과 글쓰기가 참 좋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말에 미쳐볼까 한다.

곽수연 작. <도원경Ⅰ> 91×116.7cm. 장지에 채색. 2010.

‘멋진 요리사’ 되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할 거예요

김재현 18세. 고등학교 2학년. 한국조리예술학원

나는 중학교 때는 잘하는 것 하나 없는 그냥 그런 학생이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늘 놀기에 바빴고 부모님과의 다툼도 많았다. 공부도 해보려고 해봤지만, 잘 안되니까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친구들하고 오토바이도 타고 담배도 피고, 부모님이 잔소리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당연히 성적도 하위권이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부모님 말씀처럼 ‘정말 나중에 뭐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때 영양사였던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공부는 못할지라도, 요리라면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요리사’라는 꿈이 생겼고, 한국조리과학고를 목표로 공부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장 열심히 했던 때였다.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해 여름 방학 때 엄청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일어나자마자 공부, 밥 먹자마자 공부, 계속 공부였다. 결과는 2학기 중간고사 때 바로 나타났다. 30명 중에서 12등, 반 이상이 오른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전 내신성적이 안 좋았기에, 조리고등학교는 떨어지고 말았다. 실망도 많이 했지만 이렇게 끝낼 수 없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요리 학원에 등록했다. 거기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철호 원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냈다. 정말 ‘요리사’라는 꿈에 미친 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한식 자격증을 준비했다. 채썰기 등등 칼질의 기본을 배운 후, 비빔밥, 무생채, 화전 굽기 등을 배웠다. 학원에서 배우면 집에 와서 또 연습을 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때로 밤새워 연습을 하고는 곧장 학교로 가기도 했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초반에 한식·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전주비빔밥축제에 나갔다. 콩자반, 죽순찜 등의 한식 반찬을 했는데, 뜻밖에 은메달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나간 향토식문화대전에선 단체전 대상을 받았다. 나는 늘 아무것도 못하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더 요리에 몰두했다. 생전 처음 부모님께 요리도 해드리고, 친구들을 초대해 파스타를 해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반대도 많이 하셨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하라고 격려해주실 때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 약 5개월의 맹연습 끝에, 올해 4월에는 싱가포르 국제요리 대회에 나가서 브런치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세계대회 최연소 수상자였다. 3일 뒤에는 국내 요리 대회에서 한식 뷔페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정말 신났다. 정말 하면 되는구나!

요즘 나의 뇌는 요리로만 채워져 있다. 목표가 생기니 다른 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영어도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한다. 요즘은 개인적으로 디저트에 관심이 많아서 제과 제빵 공부도 하고 있다.

나의 꿈은 프랑스 파리에 한식 레스토랑을 차려 외국인들이 한식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친구들도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요리를 하며 내가 느낀 것 중 하나가,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되고, 꿈을 이루기가 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곽수연 작. <부귀도Ⅰ> 143×75cm. 장지에 채색. 2010.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23)

그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도 세웠습니다.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매에 쫓겨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비둘기를 쫓던 매가 나뭇가지에 앉아 왕에게 말했습니다.

“그 비둘기를 내게 돌려주시오. 그건 내 저녁거리입니다.”

“이 비둘기는 돌려줄 수 없다. 나는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때 모든 중생을 다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속에 나는 들지 않는단 말이오?

나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내 먹이마저 빼앗겠다는 겁니까?”

매의 말에 왕은 난처했습니다.

하지만 차마 살아 있는 목숨을 죽일 수 없었던 왕은

선뜻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매는 비둘기와 똑같은 무게의 살덩이를 요구했습니다.

왕은 저울을 가져다가 베어낸 살덩이와 비둘기를 달아 보았습니다.

비둘기의 몸이 훨씬 무거웠습니다.

왕은 다른 쪽 다리의 살마저 베어 두 덩이를 합쳐 달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가벼웠습니다.

양쪽 발꿈치, 양쪽 엉덩이, 양쪽 가슴….

이상하게도 무게는 계속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온몸을 저울에 올려놓자 그제야 무게가 맞았습니다.

그러나 왕은 매를 원망하거나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을 베어내고 피를 흘려도 괴로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내 몸은 본래대로 회복되리라.”

이와 같이 맹세하자 왕의 몸은 순식간에 본래대로 회복되었습니다.

불경의 주석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왕은 곧 비둘기이기도 하고 매이기도 합니다. 부처가 되겠다 서원을 세운 왕은 몸을 내놓는 수행 과정을 겪지요. 결국 자신을, 욕심 덩어리들을 완전히 다 내놓자, 왕은 본래(부처)를 회복합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내 몸은 본래대로 회복되리라.” 진실이라 함은 남음이 없이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일 겁니다. 왕이 온몸을 올려놨을 때 그제야 비둘기의 무게와 맞았듯이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도 감동하는 것이겠지요.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 너머로 내 모습을 비춰봅니다.

 

 

빼기가 대안이다

생각이 우리 행동에 미치는 영향 흥미로운 실험들 (2)

정리 편집부 출처 <마음의 시계>(엘렌 랭어 | 사이언스북스)

생각을 바꿈으로써 몸에 다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엘렌 랭어는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생각보다 광대한 범위에서 ‘우리의 마음이 몸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흔히 운동을 하려고 나서면, 실제로 몸을 움직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더 건강해진 느낌을 받는다. 바로 ‘운동이 이롭다’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엘렌 랭어는 우리 몸에 불가피해 보이는 많은 질병들조차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실험들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운동’ 청소원의 의식 변화가 가져온 놀라운 변화

많은 신체 활동을 해야 하는 직업이 있다. 가령 호텔 객실 청소원의 경우, 각 방의 청소를 완료하는 데 20~30분이 소요되며 밀기, 팔다리 뻗기, 굽히기, 들어 올리기와 같은 움직임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들은 건강한 생활을 위하여 의사가 권하는 운동량을 충족하거나 초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본인들의 일을 운동으로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이들의 혈압, 체질량 지수, 체지방 비율 등 건강 지표는 지극히 열악하다. 필요한 양의 신체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운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객실 청소원들의 생각을 바꾼다면? 그래서 실험해 보았다. 먼저 실험군의 참가자들에게는 운동의 이득을 설명하고 그들이 매일 하는 업무가, 어떻게 헬스클럽에서 하는 것처럼 훌륭한 운동이 되는지 설명해주었다. 반면 대조군 참가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4주 뒤, 그들을 다시 찾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군의 경우 건강이 현저하게 향상된 것이다. 본인들의 업무가 훌륭한 운동임을 알게 된 지 불과 4주 만에 이들은 평균 1킬로그램의 체중이 줄고 두드러진 체지방 비율 감소를 보였다. 일 이외에 추가로 하는 운동은 없다고 했다. 반면 대조군은 그렇지 못했고, 체중과 체지방 또한 더 늘어났다.

나이와 연관성이 적은 ‘유니폼’이 미치는 영향

사회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대개는 그들이 속해 있는 맥락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도서관에 있을 때 축구 경기장에 갔을 때와는 다르게 행동한다. 맥락이 사전 자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을 의복으로 검토해보았다. 우리는 나이에 걸맞은지 생각하며 의복을 고른다. 예를 들어, 60세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으려 한다면, 대부분 입지 말라고 하나, 16세 소녀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유니폼은 일상적인 의복과 비교할 때 나이와 연관성이 적다. 따라서 직장에서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입는 사람들에 비해 나이에 관련된 신호에 노출되지 않을 것이고, 그 때문에 더 건강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이러한 가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1986년~1994년에 걸쳐 206개 직업의 질병 자료를 검토했다. 그 결과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질병이나 부상, 병원 진료로 인한 결근 일수가 적고, 더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곤하다’는 것도 학습된 것일 수 있다

심리학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피로의 정도를 생각해보자. 맥락상의 신호가 ‘틀림없이’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낸다면, 우리는 더욱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각자 친구들에게 팔다리 벌려 높이뛰기를 100회 또는 200회 실시한 뒤 언제 피곤해졌는지를 말해 달라고 했다. 그 결과 두 집단 모두 운동을 3분의 2쯤 진행했을 때 피로를 느꼈다고 응답했다. 즉 첫 번째 집단은 65~70개 정도 한 뒤에, 두 번째 집단은 130~140개 정도 한 뒤에 피곤해졌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가 시작과 중간, 끝의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주어진 과제에 체계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피로를 심리학적인 양상으로 관찰한 일상의 본보기는 수두룩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에너지가 전부 바닥이 나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오후 3시에 커피와 함께 즐기는 휴식 시간은 이 같은 ‘3분의 2 효과’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육체적인 한계로 여기는 상당수가

 

빼기가 나를 바꾼다

공황장애를 넘어서다

 

공황장애는 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병이다. 갑자기 어지럽고 모든 열이 머리 쪽으로 올라가 곧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상태에서 극도의 공포심을 느낀다.

그런 상태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축구장에서 함성 소리를 들을 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멈추거나 터널에 들어갔을 때 ‘이 차 안에 있으면 죽겠구나. 내려서 뛰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 내 몸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실제로는 전혀 쓰러지지도 죽지도 않는데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증상을 느끼게 된 건 십 년 전쯤이다. 너무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평소에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공황장애라는 병이 흔하지 않을 때라 감기 때문이다, 술 때문이다, 오진도 많았는데 계속 증세가 반복되자 정밀 검사를 받았더니 공황장애로 판명이 났다.

그때부터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증세가 호전된다기보다는 발작 순간을 모면하고 가라앉히는 것에 불과했다. 4~5개월간 계속 약을 먹으니 졸리고 멍한 상태가 지속되어 회사 업무도 절반밖에 처리를 못 하고 사회생활도 어려웠다.

결국 2009년 가족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마음을 버리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가장으로서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압박을 이겨내려고 술을 많이도 마셨다. 그것이 공황장애를 키워주고 있었다.

특정 상황이 되면 나타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 자체가 스트레스였기에 살면서 쌓아왔던 모든 것을 계속해서 버렸다. 공황상태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힘들었던 경험, 불안 초조도 다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원래 없는 것임을 100퍼센트 확신하는 순간 어떤 인지치료보다도 쉽게 공황상태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버리면 버릴수록 증세가 나아져 약도 끊고 그렇게 좋아했던 술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회계사무실을 운영하면서 항상 적대심을 갖고 대하거나 매사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것이 많이 없어지고 째려보는 것 같던 내 인상도, 까탈스럽고 예민했던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혹여라도 공황상태 조짐이라도 보이는 듯하면 아예 미리 그런 스트레스와 마음들을 없애서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 묶여 있던 마음에서 벗어나 그 끔찍했던 공황장애를 넘어서게 된 것이 꿈만 같고 너무나 감사하다.

요즘 중년의 가장들에게 특히 공황장애가 많은 것 같다. 그 고통을 겪어봤던 한 사람으로서, 그것이 마음의 병임을 아는 한 사람으로서 기도한다.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이 하루빨리 그 원인을 알고 버려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옥영수 53세. 회계사무실 운영. 부산시 남구 용당동

-깨침이란-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글, 그림 우명

가짜인 마음의 세계에

가짜가 버려진 만큼 참으로 화할 때

알아지는 것이 깨침이다

자기의 죄업을 사한 만큼 진짜가 드러나니

이것이구나 하며 아는 것이 깨침이다

성경에 보면 마음이 믿어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도

깨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가

참이 되어질 때까지는

많은 것을 깨치고 알아진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세속은 혼탁하나

자연의 소리만

나의 심신을 쉬게 하구나

사는 자는 세파에 고달파 하나

정녕 자기의 마음속에 살아

고달픈 이유인 줄 모르고 있구나

가도 가도 갈 길이 없는 자가

바쁘기만 한없이 바쁘구나

이루려던 수만 가지의

마음 따라 가고 또 가도

정처 없지만

참인 세상 가는 것이

정녕 가야 할 곳인 줄 모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구나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 영역본 등 다수가 있습니다.

I finally live in the same world

Husband: Seong-jun Moon Wife: Yeong-hee Jeon

Yeong-hee

Jeon’s

story

I never got angry with anyone. I smiled all the time, didn’t say no to others and just listened to whatever they said. My husband wanted to be a teacher, so from the day of our wedding we gave up the sweetness of a honeymoon. For six years we have lived separated, and I was alone with my two children. I was expecting to have a happy life after he passed his examinations and so I sacrificed myself for our future.

But strangely enough, when I heard the news that he had passed his examination I was not happy at all. I was having meaningless days just like always. What could be the problem? This was the moment I had been waiting for, in spite of all the hardships I had been through. One of my colleagues suggested that I try Maum Meditation. So I began practicing it, trying to get away from my agony.

My life was nothing but “pretending to be nice.” I kept saying yes, but actually I was accumulating all the complaints about things in my mind. If anything went wrong, then it would explode in my face and those feelings would last for a long, long time. Because I was expecting more than I had sacrificed I couldn’t be happy with anything nice my husband did for me.

It must have been so hard for him to live with a wife who could never be satisfied. I was torturing him because I had the thoughts that I had sacrificed myself for him.

With Maum Meditation I was able to take out from my mind the resentment I felt, and also the expectation that I wanted to be recognized, even if I hadn’t said anything.

Now, I can appreciate the fact that I have a person right at my side who always silently keeps me safe.

 

Seong-jun

Moon‘s

Story

From the first time I met her at the university, I liked my wife, what with her warm heartedness and obedient attitude. I proposed to her saying “Be on my side forever.” We were able to get married two years later. I used to be a fitness trainer, but I wanted to be a responsible husband and provider for my family. I thought it would be better for me to study to pass an exam to become a teacher.

But at that time the cruellest part of my life began. While living separate from my wife and children I studied for my examination. But the results were not what I expected. I was losing my honour and dignity and had spent money for nothing because for two years I kept failing the examination.

I finally succeeded in my examination and became a middle school physical education teacher. I thought since my biggest goal had been accomplished everything would go fine from then on. But I was always tired, and this made it hard to communicate with my wife.

One day I realised that even though we lived together, we lived in different worlds. I couldn’t stand the fact that even though we lived together we kept telling different stories about our lives. I wanted to do something, anything with her. So I followed my wife into Maum Meditation.

To be honest, since she had met me, my wife had not had her own life. She gave up her dream of studying abroad, and lived on a tight budget while raising the children and supporting me. All she wanted was some attention from me, some recognition that she was carrying a big burden by herself. But I didn’t realize this. I selfishly insisted that “it is the husband’s job to make the money, and the wife’s to raise the children.” With Maum Meditation I was able to discard myself who had that mind and the thought that I had to do this well. Then, I became light hearted and happy.

Was it because I became more flexible, more accepting? Now I can feel the same way she does, and I pay more attention to her. We are living in the same world now, wherever we are.  

“Sweetheart, we were blind to each other. We couldn’t really know each other even though we lived together under the same roof. Now, thanks to you, I feel so happy to have the same mind as yours. Thanks for being with me. I love you!”

 

Yigee Kim ? Realization of the Complete Self

Yigee Kim, a lawyer has accomplished almost all of her goals: graduated from KAIST, she had the highest score on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South Korea’s best University) law school entrance exam, passed the Bar exam, and completed internship and became a lawyer in January. In spite of all the great achievements she never felt happy. Instead, she suffered from constant anxiety and dissatisfaction. She believed that a lawyer’s work requires sincere care and deep concern about the clients. But she did not even feel comfortable around people. So the issue of dealing with people became her biggest problem. Doing Maum Meditation, she has experienced a great change in her outlook: she has realized that people are the most precious beings in the world and she feels grateful that she has become a lawyer, now that she can truly help people. We will hear Ms. Kim’s story about how she found happiness in her life.

Since childhood, I have always liked reading books by myself. My school grades were good and my favorite subjects were mathematics and science. So I went science high school and chose KAIST for my university. Soon after beginning KAIST, my long journey of confusion began. Near my graduation from KAIST I wanted to change my major from engineering to languages because I wanted to leave a legacy in the world like some of the scholars who were my childhood heroes. So I entered Seoul National University. However, even that idea had to be given up due to some conflicts in methodology.

Finally, I decided to study law since it seemed logical and practical, and also I could contribute a lot to our society as a lawyer. So at 30, I began my law study at Seoul University.

It must have been about the time I began my law study when I became more sensitive. My relationship with people was getting more difficult: it was hard for me to respond appropriately during conversation with other people, and I could not flow with conversation with people. Often, people ended up misunderstanding me, and it was very frustrating. At nights I had insomnia thinking about how I could have responded differently during meetings. Even when I tried to study, I could hardly read one line without any association of the unpleasant memories. That one association continued on to the next on and so on, gradually creating sizzling anger towards people involved in each situation. I became a senior and had to prepare for the Bar exam, but I could not concentrate on studying. I felt that I desperately needed something to change my condition but I did not know what it was or how to find it.

One day, I ran into Maum Meditation monthly magazine. It said we could empty our minds, and I wondered if that was true. I thought I found something that I really needed. I wanted to change who I was ? never energetic in mind or body, too sensitive, I only knew how to study well, but not how to handle real life situations. I wished I could deal with people as other ordinary people did, work diligently, and love life with a lot of energy and enthusiasm.

In the beginning, it was not easy to do the Maum Meditation. I did not understand quite well what it means to do meditation with mind. But I continued doing the meditation according to the instructions given to me by the teachers. Slowly, I began to understand the process. I could see that everything that I have experienced ? what I read, my conflicts with people, my pains from being misunderstood, etc. ? all these different pictures in my mind combined into all sorts of useless, meaningless thoughts.

At first, during Maum Meditation, all the pictures were so vivid that it was painful to relive the moments. But I found the more times I threw away the same pictures, the more faded the pictures became, and I felt lighter and lighter. Then I realized that all the emotional upset caused by my own thoughts was not real. Thanks to the meditation, I was able to concentrate on my studies. I passed the final Bar exam in the fall of 2008, and I could focus on Maum Meditation again.

I seriously reflected on my life. Up to then, my life involved school; high school valedictorian, highest score on the Seoul University Law School entrance exam, getting scholarship, passing the Bar exam, etc. Although I accomplished my goals, I did not really feel happy. I thought it was only the expected results from my brains and hard work. I took academics for granted and was not even grateful for all that success. And I was frustrated from constant dissatisfaction and anxiety.

Once, one of my schoolmates told me “Sister, you seem like a person who just came out to the world after having been cooped up in an isolated research lab for a long time.”

Looking back, I could see that I lived in the world of books rather than in the real world. I had no knowledge of the real world and did not have any experience dealing with other people, so I did not learn how to understand people.

When I reflected on my mind during meditation, I was really shocked to see how messed up my mind was. I made my own mind world to live in, and I believed that everything I thought and did was right. I judged other people wrongly and looked down on them with my own standards and values. It was a natural consequence that I could not feel comfortable around people. I think I did not even have any interest in other people.

When I looked deeper into my mind, I found the foundation which I built myself on; “I was not loved.” This feeling developed into an inferiority complex. When my younger brother was born, I believed my parents’ love was taken from me and given to my younger siblings. I feared that no one would love me even if I wanted to be loved. I think this situation might have created my own high expectation of myself. Certainly it became the basis for my problems in life. Isn’t it really true that only I exist in my mind world? In that mind world, I could be the best and smartest; I could be loved the most. Reality, however, was not like that, so I was lonely, frustrated, and unhappy, and I really wanted to run away from myself.

As I meditated throwing all the negative mind, I could see more and more clearly with my spiritual eyes that when my false self disappears only True mind exists and that is god. And I realized everything is god.

I learned what true love is. My life only exists because god loves me, and every moment he continues to love me dearly. With this realization, I could throw away the belief that I was not loved. I also clearly realized that when I throw away the false mind completely I could live forever with the universe mind (True mind), which existed from the beginning.

The biggest change in me was that I became more interested in people. I could even say “How have you been?” with real interest. Now, I am truly glad to see anyone, and everyone feels precious. I sincerely care about them. Everyone is loved dearly by God; therefore everyone is precious.

Only now, I think I understand what happiness really is. We are one! I am not just one individual and alone. Instead, I can live for the whole, which is myself as well, so how can I not be happy? I feel so lucky. I would have been a terrible lawyer who does not care about people (smile). I truly feel that I can live for the world, now. I would like to thank everyone who helped me change so much.

 

Wisdom of life through throwing away (22)


 

Subtraction Changes Me

Shattering

the perception of food

 

In my early thirty’s I met a man who I thought would be my guiding light. He was an expert on yoga and meditation, and he appeared to have an extraordinary appearance. One day he suggested that I begin a vegetarian. So I began eating vegetables only, trying to mimic his mind world.

From that time on I hadn’t eaten any meat or fish, or even eggs. I used to have vegetables and bean-paste for breakfast, and would bring my own special lunch to work. Also I stopped drinking any alcohol. I thought I could find peace of mind and maybe even contribute a little bit to the world by not taking lives to eat. I read many books trying to justify, in theory, the correctness of my behaviour.

I never paid any attention to the complaints from my friends when they would say things like “Are you going to live alone forever?” I just kept saying to myself that I was different from those who always pursued the pleasure of food, and that I was not an animal living just to satisfy my appetite. I kept that promise to myself for more than a decade. I felt inferior about being overweight. Therefore, I would do almost every sport I could find; like hiking, gym workouts, scuba diving, and more. I was trying to prove that I was not a person who lived just for food. I thought “I am different than you. I pursue the spiritual world.” And I lived more than ten years filling my mind with superiority, and I became stereotypical and stubborn.

But in 2010, out of curiosity, I began practicing Maum Meditation. My thinking about peace of mind and food changed dramatically. Looking back at my life I could not hold my head up when I realised that everything I did, including the vegetarian diet and quitting drinking, was to hide my inferiority. I never thought I had done anything wrong to my wife and children, but yet I couldn’t recall having a pleasant family dinner together with them. I was ashamed of myself for being a person who took even the small pleasure from my children of having a meal out with their father.

I also realised deeply that the Truth is not about what you eat. I was far away from the Truth when I was living my life separating myself from others as if I was superior to them because I was a vegetarian.

I gave up the vegetarian diet, the conceptions and the stereotypes I had learned throughout my life, and even discarded myself, by discarding all the memories of these things. Since then I haven’t complained to anyone about what to eat. It was a comfort being freed from myself. I began to understand people around me with all my heart. I could accept whatever they ate, and realised again that I had been wrong with my complaints and discrimination towards them and food.

As I got to know who I am and where I come from, I quite naturally came to the conclusion that I had to live for the world, not just for myself. I am thankful to know that the real peace of mind comes from repenting of one’s own self, rather than from the pursuit of any lofty idea or mind world.

Chul-gi Kim, 45

– The Reason Man Is False – God

  

Drawings and writings by Woo Myung

In the world, there is that which is true and that which is false. The world is true and man is false. He is false because he does not live in the world but inside his mind. This overlaps the world which leads him to believe he is living in the real world but actually, he is living inside a world of his mind – an illusionary world. Therefore, the world he lives in and he himself living in that world are both false. The world just exists but your mind world is false because it does not exist. The thought that you are alive is the thought of a false ghost, and you are in a non-existent world. You do not exist either. The true world does not disappear no matter how much you get rid of it, but falseness does. Therefore, from the perspective of Truth, it does not exist. In order to not disappear, you must be reborn from Truth.

God is the origin: the metaphysical real substance without form. The source of the Universe consists of Jung and Shin. This existence is not material, but it is a self-existing existence. Man only knows that which is already in his mind, so he can know this existence only when it exists in him; and only to the extent it exists in him.

Completion is a person who has been born as this existence itself,

and only such a person can properly know this existence. Although this existence is alive, it does not have the mind of being alive; it is the place of mind that has transcended everything: it has transcended all knowledge, and it is beyond everything of the human world. What exists in the world is man’s mind, his conceptions and habits; and what exists in the human mind are all illusions. The place of God where man’s mind, his conceptions and habits have departed, is a complete and perfect place. God does not dwell in existence, though the things of the world may exist, and it is completely free and liberated because even the mind of existence does not exist. It lives, and yet, it is not within life, it is an existence that just exists – an eternally living immortal.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in 2002.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including World Beyond World an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which have been published in English. His other books, Where You Become True Is The Place Of Truth, Heaven’s Formula For Saving The World, The Living Eternal World, The Book Of Wisdom, Mind, Nature’s Flow and The Enlightened World are in the process of being translated into English as well as Chinese, French, German, Italian, Japanese, Portuguese, Spanish and Swedish.

동네 노는 아저씨의 친절한 고민 상담소

 

저는 30대 초반의 주부이자, 직장 여성입니다. 근데 항상 예민하고 걱정이 많습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

아이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걱정, 밤에 도둑이라도 들까 봐 걱정,

나이 들어 아프면 어떡하나 걱정…. 매사 걱정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이런 내가 싫지만, 자꾸만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 모 보험회사 광고에서 5~6살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잠자리에서 뒤척일 때 할머니가 선물한 걱정 인형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걱정은 우리가 할게요~ 당신은 행복하기만 하세요.” 언뜻 보면 어른들도 갖고 싶은 참 행복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아이 한 명의 걱정을 대신해주는데 손바닥만 한 인형 6개가 밤새 분주합니다. 아이가 아침 출근길 걱정을 하나, 부장한테 올릴 보고서 걱정을 하나, 대출금 상환 걱정을 하나, 열이 안 떨어지는 자식 걱정을 하나. 이런 어른들 걱정을 대신해줄 인형이라면 적어도 최홍만만 한 인형 6개가 밤새도록 우리 머리맡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야 될 겁니다.

주부님은 걱정이 많아서 고민이군요. 한마디로 걱정이 많아서 또 걱정인 건데요, 누구나 대동소이한 걱정들을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같은 고민이라도 기준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기준점이 높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걱정을 기준점이 낮은 사람 입장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되는 거겠죠. 이 기준점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걱정을 나눠 가지는 겁니다. 상대를 믿고 말을 하시고, 동료를 믿고 일을 하고, 작은 병이라도 스스로 이기며 커가는 아이를 믿으시고, 가정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남편을 믿으시고, 나이 먹어서도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믿으세요. 단언컨대 지금 주부님이 하고 있는 걱정 중에 실제로 일어날 일은 10가지 중에 한 가지도 채 안 될 겁니다. 주부님 말씀대로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거죠. 걱정은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에게 전염이 됩니다. 그리고 행복도 전염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염시키고 싶으세요?

분명 주부님도 누군가의 걱정을 덜어줄 최홍만입니다.^^ 그리고 주부님 주위에도 분명 주부님의 걱정을 덜어줄 최홍만이 있다는 거 믿으시고 ‘돈 워리 비 해피’ 하세요.^^

동네 노는 아저씨 백일성. 올해 나이 42세.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남매 그리고 1930년대생 부모님과 함께 한집에서 박 터지게 살고 있음. 3년 전 우연히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박 터지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됨. 2009년에는 <나야나 가족 만만세>라는 수필집도 발간했음.

중국 청도 ‘사랑의 집’ 장영진 원장

취재 문진정 사진 제공 아창

중국 청도에서 버스로 세 시간을 달리면 지머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 나옵니다. 이곳에 부모를 잃은 고아와 장애아들이 살아가는 ‘사랑의 집’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엄마’ 혹은 ‘할머니’로 불리며 10년째 사랑의 집을 지켜온 사람은 미국계 한국인 장영진(64) 원장입니다.

1978년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했던 장영진씨는, 2003년 중국의 한 어린이공원 안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 봉사를 하기 위해 들렀습니다. 변변한 난방시설도 없이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보며 돌아서는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는 그녀는 그 길로 중국 고아들의 엄마로 살겠노라 결심을 합니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어요. 그때 이다음에 꼭 고아원을 하자고 형제들과 약속했었죠. 바쁘게 살다 보니 잊고 있다가, 뒤늦게라도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으니 감사하지요.”

사업도, 가족도 다 내려놓고 무작정 청도로 온 그녀는 지머마을에 ‘사랑의 집’을 지었습니다. 일년 내내 꽃이 피도록 꽃밭을 만들고, 비단잉어가 노는 연못도 만들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이 예쁜 자연을 보며 치유되었으면 하는 뜻에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소개로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게 되자 장영진씨는 빨래, 청소 등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친자식처럼 사랑으로 대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아이들은 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너무 좋아했지만 점점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모질게 마음을 바꾸어 먹고 모든 생활을 스스로 하도록 했습니다. 낙각 공예실과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도 지어 미래에 자립할 수 있는 기반도 만들고 “지에찐 츄엔리~(최선을 다하자)” 등 일년에 한 가지씩 인사를 정해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외치며 자신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그녀가 며칠 자리를 비워도 될 정도로 아이들은 자립심이 생겼습니다.

아이들만큼이나 장영진씨의 삶도 달라졌습니다. ‘원래 애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그녀가 이제는 아이들의 손짓만 봐도 피로가 싹 풀리고 아이들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난생처음 채소밭을 일구고, 고추장, 된장을 담그며 고운 손은 거칠어지고 주름은 깊어졌지만 어느 때보다 기쁘고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40명의 아이들 못지않게 소중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사랑의 집을 지키고 있는 손나(29)씨입니다. 유학차 지머마을에 왔다가 9년째 함께하고 있는 이 중국인 아가씨는 먼 훗날 장영진씨의 뒤를 이어 아이들을 보살필 ‘예비 엄마’이기도 하지요. 친딸처럼 든든한 그녀 덕분에 장영진씨는 한 가지 소망이 또 생겼습니다. 중국 어느 지역이든 제2의 ‘사랑의 집’을 만들어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아직도 고아나 장애 아이들이 많이 있어요. 아주 어려운 곳 한 군데만 더 만들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게 저에게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사랑의 집’ 안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오늘도 아이들이 언제 어디에서든 꿈을 잃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장영진님은 10년 전부터 청도 지머마을에 ‘사랑의 집’을 만들어 중국의 고아와 장애 아이들을 보살펴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준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지금의 삶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그녀는 여생을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진심 어린 믿음과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는 이가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믿음, 그 두 번째 이야기.


‘어떤 것을 보려면 먼저 믿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안에 부정이 가득하면 제대로 보일 리가 없겠지요. 믿음은 가장 용기 있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안 될 거라는 부정과 불신, 아니겠지, 하는 의심을 넘어설 때라야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심 어린 믿음이 있을 때,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는 이가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믿음, 그 두 번째 이야기. <편집자 주>

나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었고 이미 충분한 능력과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분이 그 사실을 내게 일깨워준 것이다. 그분은 말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이제는 네가 너 자신을 믿을 차례다.”

– 엘리자베스 스털링. 방송인. <내 안의 빛나는 1%를 믿어준 사람>(푸른숲)에서

경험보다는 믿음이 진리를 더 빨리 파악한다.

믿음이란 마음속의 앎이요, 증거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앎이다.

– 칼릴 지브란

나는 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나는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 특별한 선생님이 당신이 내게 마음을 쓰고 계시다는 걸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나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 엘린 켈리. 교사. <고맙습니다, 선생님>(다산책방)에서

내 안에 있는 참과 하나 되는 것

훌쩍 나를 넘어설 수 있는 것 지금이 참 좋은 때임을 잊지 않는 것 심장이 터지도록 뛰어보는 것 상대를 항상 기쁘게 하는 것 참의 마음으로 하는 것 마구 퍼주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언제라도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것 하염없이 즐겁고 행복한 것 무게와 가치를 아는 것 등불을 밝히는 것 주위 사람들 눈에 눈물 흘리지 않게 하는 것

– 믿음을 떠올리며

믿음이란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며,

과감한 모험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봉사할 수 있는 힘이다.

– 사무엘 E. 키서

태양이 햇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믿으며,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

– 미상

♬ 나에겐 너무나 큰 의미, 아.버.지.

초등학교 시절의 아토피, 사춘기의 방황, 실명 위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아버지는 나를 믿음으로 끌어주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갑자기, 온 얼굴과 목에 발진이 생기고 붉게 달아오르는 심한 아토피 증상이 생겼다. 몇 년간 먹고 바른 피부과 약도 내성이 생겨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피부와 온몸의 장기들이 더 심하게 손상되어버렸다. 나는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셨고, 몸속의 나쁜 노폐물을 뽑아내는 ‘배독 요법’이라는 새로운 치료법을 찾아내셨다. 이걸 하기 위해서는 찜질방엘 매일 가야 했는데,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내가 학교를 마치는 시간에 학교에 오셔서, 찜질방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리고 치료를 마치면, 다시 데리러 오기를, 하루, 이틀, 삼 일…. 그렇게 3년 동안을 꾸준히 해주신 아버지 덕분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대인기피증을 벗어던지고 원래의 활발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토피를 심하게 앓으면서 나도 모르게 쌓인 게 많았던 걸까. 남들보다 조금 늦게 찾아온 사춘기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중2 무렵 사람들 만나는 게 즐거워진 나는 여러 핑계를 대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놀러 가곤 했다. 한번은 독서실에서 늦겠다는 핑계 전화를 했을 때였다. 공부 잘하는 애 이름을 대며 걔랑 같이 공부하고 있는데 좀 늦을 것 같다고 하자 어머니가 “그럼 그 친구 좀 바꿔봐라” 하시는 거였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가 공부하고 오겠다면 그런 거지, 뭘 친구를 바꿔달라고 하냐”는 말씀이셨다.

변함없는 아버지의 믿음과 관심 덕분에 다시 맘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차에 또다시 일이 터졌다. 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지금도 생생한 2008년 8월 15일 아침이었다. 일어나 눈을 떴는데 세상이 뿌옇고 노랗게 보였다. 병원에 가서 들은 얘기는 충격이었다. 오른쪽 눈은 이미 실명 직전이라 손을 쓸 수 없고, 왼쪽 눈 상태도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상태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서 더 이상 의사가 손쓸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너무나 괴로웠고 절망했었다.

하지만 나마저도 내 눈을 포기하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분은 역시 아버지셨다. “부산에서 안 되면 서울 가자, 거기서도 안 되면, 다른 나라라도 가자.” 그러시면서 내일은 눈이 영영 안 보이면 어떡하지, 겁먹고 잠도 못 자던 내게, “희망을 잃지 말자, 치료 주체인 네가 포기하면 안 된다”고 힘을 주셨다. 당신은 가슴으로 우시면서.

아버지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8시간 가까운 수술 두 차례, 그리고 여러 차례의 시술을 받은 끝에야, 왼쪽 눈을 살릴 수 있었다.

내 스스로 포기했을 때조차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될 수 있다고 믿어준 아버지 덕분에 나는 지금 왼쪽 눈이나마 세상을 보며 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한 약속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었던 아버지. 당신 스스로 믿음과 신뢰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던 아버지. 신뢰할 줄 아는 사람이 신뢰받을 수도 있다고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처럼 나 또한 사람들을 믿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고 싶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강백구 / 24세. 대학생. 부산시 동래구 안락1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