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집 아저씨,‘비빔’에 미쳐 이름도 ‘비빔’으로
유비빔 49세. 전주 비빔소리 운영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비빔에 미쳤다고 한다. 단지 비빔이 좋은 것뿐인데 너무 많이 좋아하다 보니 미쳐 보이나 보다. 내가 비빔에 미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원래 나는 비빔이 아니라 소리에 미쳐 있었다. 소리가 좋아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부 활동을 하며 드럼을 연주했다. 그런데 귀에 물이 들어가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아무리 연습을 해도 정확한 연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때마침 연주의 꿈을 포기하며 힘들어하는 나에게 위대한 스승님이 나타나셨다. 바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드러머이자 타악기 솔리스트 고 김대환 선생이다. 선생님은 “앞으로는 소리의 시대가 올 것이다. 소리를 찾아라”는 말씀을 주셨다.
소리를 찾는다는 게 뭐지? 도대체 소리의 정체가 뭐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세계소리축제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소리문화의 전당 앞에서 음식점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늦둥이 유소리도 낳고, 내가 좋아하는 소리에 미쳐 연구를 하다 보니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소리는 비빔이 아닐까? 무슨 소리든 나려면 비벼야 했다. 성대와 공기가 비벼야 목소리가 나고, 장구 가죽과 장구채를 비벼야 장구 소리가 난다. 바이올린도 비벼야 소리가 난다. 모든 소리는 비빔(마찰)이 있어야 생성이 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찾아낸 소리의 정체였다. 이렇게 해서 ‘비비지 않고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비빌 수 없다’는 비빔소리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빔과 소리는 동시에 발생한다는 원리도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비빔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비빔을 연구하니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비빔이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다 비빔하고 연관시켜서 보게 되었다. 음식점의 메뉴도 각종 비빔밥으로 통일하였다. 지역감정도 비벼야 나라가 화합이 되고, 남북도 비벼야 통일이 되고, 공부도 책을 열심히 비벼야 하고. 무슨 말끝마다 비빔, 비빔, 비빔을 달고 사니,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급기야 “그렇게 비빔이 좋으면 이름도 비빔으로 바꾸라”고 권유하였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비빔문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는 사유로 개명 신청서를 냈는데, 3개월 후 개명이 승낙됐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2007년에 결국 나의 이름은 유인섭에서 유비빔이 되었고, 그때부터 ‘비빔’에 대한 나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 후로 영어와 한글을 조합한 비빔문자를 완성시켰고(전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 비빔세계지도 등 비빔AR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비빔 전시회를 열고, ‘세계를 비벼라’라는 주제로 강의도 하였다.
그동안 모아놓은 비빔 관련 파일이 약 1만 장, 비빔 관련 특허만도 벌써 40여 개가 넘어 전주 기네스에도 신청된 상태다. 그리고 지금은 자칭 비빔대학에 재학 중이다. 비빔대학은 바로 특강, 포럼, 세미나, 워크숍 등을 하면서, 비빔철학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직업도 비빔 재료처럼 많았던 것 같다. 보신탕집 신발 정리, 미용사, 클럽 연주자 등등. 그런 경험들이 비벼져, 지금의 비빔형 인간인 유비빔이 탄생한 것 같다. 길을 걸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잠이 들기 전에도, 화장실에서도 늘 비빔만을 생각한다. 누구나 이렇게 무언가에 미쳐 생각하고 연구하고 행하다 보면, 비빔문화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열심히 디자인을 비비고 생각을 비비고 스토리를 비비고 여야, 종교, 경제, 양극화도 비벼서 상생 화합 통합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봅시다! 비빔!
‘우리말’에 미치다
강상철 40세. 회사원.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3동
예전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크게 글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그날 있던 일을 끄적거리는 게 좋았다. 그러던 몇 년 전,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어느 잡지에 글을 기고했는데, 채택이 돼서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을 했다. 순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일반인의 글을 받아 소개하는 잡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이런 데 글을 보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일들, 재미난 일에 대해 써서 여러 군데 기고했지만 채택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생각지도 않게 어느 잡지에 당선됐을 때의 기쁨이란. 생전 처음 원고료도 받고 내 글이 실린 책도 받으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 이후로 더 열심히 쓰고, 더 다양한 잡지에 글을 보냈다. 한마디로 ‘원고 기고하기’에 미쳤다고 할까.
처음에는 선물 받는 재미가 컸다. 그런데 점점 이왕 보내는 거 제대로 써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도 많이 읽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제대로 하고 싶어, 국어대사전 등 우리말 관련 서적을 많이 찾아보았다. 제대로 된 표현인지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쳤다. 우리말의 세계는 어려웠지만, 오묘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생기자, 점차 무심히 지나친 거리의 수많은 문구들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맞춤법은 맞는지, 표현은 올바른지 등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신문을 읽을 때나 TV를 볼 때에도 이상한 건 고쳐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스스로 내 말버릇을 점검하기도 했고, 친구들이 잘못 말을 하면 즉석에서 고쳐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건강식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 가게 벽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중탕 일절, 한약 다려 드립니다.’ 매일 보는 이 문구도 내 신경을 건드렸다. ‘일절’은 결코, 전혀의 뜻으로 부정하거나 금지하는 말과 어울려 부사로 쓰인다. 그리고 ‘다리다’는 ‘구김살을 펴거나 줄을 세우려고 인두나 다리미로 문지르다’는 뜻이다. 고로 위의 문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 된다. 바른 표현은 ‘중탕 일체, 한약 달여 드립니다’다. ‘일체’는 모든 것, 온갖 것의 뜻이고 ‘달이다’는 약초 따위를 끓여 우러나게 하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는 잘못 쓰인 우리말들이 정말 많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이 쓰는 ‘피로 회복제’도 잘못된 말이다. 회복이란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인데 피로를 회복시킨다는 말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쓰려면 피로 해소제 혹은, 원기 회복제가 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우리말들이 무의식중에 잘못 쓰이고 있었다.
“참 유별나다”는 소리도 듣지만 그렇게 잘못 쓰이는 우리말을 보면 한국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아프다. 특히 요즘에는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바르지 못한 우리말을 알려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어찌 됐건 우리들이 바른 우리말을 위해 조금씩만 더 관심과 애정을 갖는다면 우리말 본연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예전에는 무관심했던 주변 사람이나 일들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관심을 가지면 더 잘 보이고, 더 사랑하게 된다는 걸 체득한 덕분이다. 이래저래 나는 우리말과 글쓰기가 참 좋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말에 미쳐볼까 한다.
‘멋진 요리사’ 되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할 거예요
김재현 18세. 고등학교 2학년. 한국조리예술학원
나는 중학교 때는 잘하는 것 하나 없는 그냥 그런 학생이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늘 놀기에 바빴고 부모님과의 다툼도 많았다. 공부도 해보려고 해봤지만, 잘 안되니까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친구들하고 오토바이도 타고 담배도 피고, 부모님이 잔소리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당연히 성적도 하위권이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부모님 말씀처럼 ‘정말 나중에 뭐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때 영양사였던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공부는 못할지라도, 요리라면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요리사’라는 꿈이 생겼고, 한국조리과학고를 목표로 공부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장 열심히 했던 때였다.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해 여름 방학 때 엄청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일어나자마자 공부, 밥 먹자마자 공부, 계속 공부였다. 결과는 2학기 중간고사 때 바로 나타났다. 30명 중에서 12등, 반 이상이 오른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전 내신성적이 안 좋았기에, 조리고등학교는 떨어지고 말았다. 실망도 많이 했지만 이렇게 끝낼 수 없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요리 학원에 등록했다. 거기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철호 원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냈다. 정말 ‘요리사’라는 꿈에 미친 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한식 자격증을 준비했다. 채썰기 등등 칼질의 기본을 배운 후, 비빔밥, 무생채, 화전 굽기 등을 배웠다. 학원에서 배우면 집에 와서 또 연습을 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때로 밤새워 연습을 하고는 곧장 학교로 가기도 했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초반에 한식·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전주비빔밥축제에 나갔다. 콩자반, 죽순찜 등의 한식 반찬을 했는데, 뜻밖에 은메달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나간 향토식문화대전에선 단체전 대상을 받았다. 나는 늘 아무것도 못하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더 요리에 몰두했다. 생전 처음 부모님께 요리도 해드리고, 친구들을 초대해 파스타를 해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반대도 많이 하셨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하라고 격려해주실 때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 약 5개월의 맹연습 끝에, 올해 4월에는 싱가포르 국제요리 대회에 나가서 브런치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세계대회 최연소 수상자였다. 3일 뒤에는 국내 요리 대회에서 한식 뷔페 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정말 신났다. 정말 하면 되는구나!
요즘 나의 뇌는 요리로만 채워져 있다. 목표가 생기니 다른 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영어도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한다. 요즘은 개인적으로 디저트에 관심이 많아서 제과 제빵 공부도 하고 있다.
나의 꿈은 프랑스 파리에 한식 레스토랑을 차려 외국인들이 한식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친구들도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요리를 하며 내가 느낀 것 중 하나가,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되고, 꿈을 이루기가 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