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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고 잘났던 그 녀석완전 다정다감해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알게 된 지훈이는 수더분한 외모, 부자연스러운 행동 때문에 뭘 해도 어색하고 허술한 아이였다. 그런데 시험 때만 되면 ‘반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여 반 1, 2등을 다투는 데다, 전국 수학, 과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휩쓸어 반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는 것이다. 일일이 머리로 이해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수긍하는 냉철함, 친구들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면 ‘어떻게 이런 걸 모르냐’며 염장을 지르는 아이.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래, 너 잘났다’는 소리를 듣는 그런 친구였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쯤 지훈이에게서 변화가 느껴졌다. 고등학교 때는 신경이 곤두서 있고 건강도 안 좋았는데, 왠지 편안하고 부드러워진 데다, 심지어 밥도 사주고 옷도 챙겨주는 다정함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 얘가 이렇게 따뜻한 놈이 아니었는데…?’ 가장 의아했던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만 믿고 따르던 녀석이 명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게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진지하게 털어놓는 지훈이의 마음 이야기는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그 후 나는 지훈이에게 상담하는 일이 잦아졌다. 제대 후에 뭘 할지 몰라 힘들어할 때도 지훈이를 찾아가 말했다. 어릴 적 부모님한테 심하게 혼났던 기억 때문인지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을 잘 못하는데 이런 모습을 버리고 싶다고. 그때, 확실하지 않은 건 절대 권하지 않는 김지훈이 추천한 것이 바로 마음수련이었다.

나는 당장 마음수련원에 갔다. 너무 괴로웠기에 마음을 버리는 방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그만큼 열심히 했다. 그리고 2~3일 만에 힘든 마음이 버려졌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지금까지 참 빡빡하게 살았던 인생. 어떻게든지 내 의지대로 조건 환경을 바꾸려고 했지만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이 무한한 세상 속에서 ‘나’라는 미미한 존재가 칠팔 십 인생을 자기 뜻대로 해보려고 홀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었던 거다.

수련을 하면서 주눅 들고 소심한 마음, 잡념들을 버리다 보니 세상의 상황을 수용하고 그것에 온전히 힘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갔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지훈이는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또 즐기면서 매사 집중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능력을 발휘했던 아이였는데 ‘쟤는 맨날 머리 믿고 놀기만 한다’고 시기 질투 하고 부러워하기만 했었다. 부끄럽다. 미안하다, 친구야.

원대한 계획을 마음에 담은들 그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주어진 조건에서 100% 노력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이 행복인 것 같다.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해준 마음수련과 그 마음수련을 알게 해준 내 친구 지훈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박건 31세. 직장인. 울산 남구 삼산동

걱정 많고 소심했던 나를 버리다, 김경미씨

한창 발랄해야 할 학창 시절,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늘 힘겹기만 한 마음,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김경미(31)씨는 스물세 살 마음수련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의 온갖 걱정을 다 짊어진 듯 무거운 마음으로 지냈던 그 시절의 마음은 다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밝고 환했는데, 내 마음에 갇혀 지냈을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지요. 지금은 원래의 그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김경미씨 이야기입니다.  정리 최창원 사진 홍성훈

제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발표 날을 앞두고, 무슨 일을 앞두고. 늘 걱정도 많고, 생각도 많았지요. 친구들에게조차 “니는 뭐 걱정이 그렇게 많노”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계속되자, 병원에 가서 상담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군요. 나는 너무 심각한데….

한 번이라도 제대로 웃고 싶었던 저는 마음수련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지요. 세상을 내가 살려 하니 힘들었구나. 우주가, 세상이 알아서 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고 있었는데, 나는 이미 나랑 하나인 그 우주를 못 믿고 있었구나. 그걸 알고 난 후 정말로 편안해지더군요. 이제 내가 살려고 아등거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순리대로 살면 되는 거니까요.

제가 첫째이다 보니까 부모님은 저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하셨습니다. 첫째니까 잘해야 한다, 공부도 잘해야 한다, 예의가 발라야 한다…. 그게 참 갑갑했어요. 부모님의 높은 기대치에 맞출 수도 없었고,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지요.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그것이 계기가 돼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공주님 같은 예쁜 캐릭터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사악한 캐릭터도 막 그리곤 했어요. 돌아보니 그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선함에 대한 동경, 하지만 또 그 이면에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 차 있었던 겁니다. 이제 제가 그리는 그림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스케치북 위의 그림이 아니라, 내가 내딛는 걸음걸음이 세상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길 바라지요.

제가 마음수련을 알게 된 건 대학교 때 가장 친한 언니를 통해서였습니다. 2004년 3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련을 시작했는데, 뭔지 모르게 너무 편안해지는 거예요. 여태까지 이렇게 마음이 편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불안도, 걱정도 버리니까 정말 버려지고 있었습니다. 20년 넘게 나를 지배했던 마음들인데, 실제 비워진다고 느껴지는 게 너무 고맙고 신기했습니다.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니, 제 마음을 가장 크게 조정했던 건 열등감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열등의식. 엄마가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동생이 우는 소리에 달려가 보니, 제가 애기를 잡아 뜯고 있더라고요. 어린 시절 무의식중에도 동생한테 사랑을 빼앗겼다는 게 컸던 거지요.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많으니까, 나보다 더 예쁜 애, 잘하는 애들을 늘 시기 질투 했고, 그러다 보니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 내 좁은 마음들을 남김없이 확 버려보고 싶었습니다. 열등감, 자존심, 사랑받고 싶다, 나만 잘나고 싶다… 그런 마음들을. 간절한 만큼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덕분에 그 좁은 마음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겐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항상 사람을 믿지 못했어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막연히 싫었지요. 저 사람도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뒤돌아설 것이다, 그런 불안함이 있었거든요. 내가 실수해서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런 긴장감 때문에 항상 사람과의 관계가 편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수련을 하던 중 한 가지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굉장히 친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친구들이 말도 안 하고, 뒤에서 수군대서 하루 종일 울었던 일. 그때의 충격이 내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 거였습니다.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수련을 하는데, 처음에는 잘 안 버려지더라고요. 계속 반복해서 버리다 보니 어느 순간 없어졌고, 그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미움과 원망이 있으면 미움과 원망밖에 안 보이고, 내 마음에 우주가 있으면 상대도 우주로 볼 수 있고 우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우주를 보고, 그 중심을 볼 수 있어지면서 불신도 없어지고 정말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그 좁은 틀 속에 살던 김경미라는 존재를 버리고 나니,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집도, 남편도, 주위 사람들도 예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었지요.

요즘은 낮엔 남편이 운영하는 약국을 도와주고, 저녁이면 시어머니와 함께 수련원에 갑니다. 저 또한 수련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제는 저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지요. 사실 자기만의 마음세계에서 빠져나온다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거든요. 제가 먼저 겪어온 과정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자기에게서 벗어나면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하는 분들을 뵈면, 저도 참 행복하거든요.

가래떡나물피자

명절이 지나고 남은 음식들이 있다면 가래떡나물피자를 만들어보세요. 피자 도우 대신 쫄깃한 가래떡 위에 나물을 올려 만드는 초간단 레시피! 어떤 나물이나 채소도, 가래떡과 함께라면 훌륭한 건강 간식이 됩니다.

취향에 따라 칠리소스나 굴소스를 바르고 나물을 올려도 좋아요. 불 조절을 잘해야 타지 않습니다.

{ 재료 }

떡국 떡 100g, 나물 적당량, 피자치즈 1/4컵

{ 만들기 }  

① 떡국 떡을 불린 뒤 끓는 물에 데친다. ② 프라이팬에 종이호일을 깔고 떡국 떡을 동그란 모양으로 만든다. ③ 그 위에 피자치즈와 나물을 올린 뒤 프라이팬에 뚜껑을 덮고 치즈가 녹을 때까지 약한 불에서 가열한다.

문인영님은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현재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다양한 잡지와 방송매체를 통해서 메뉴 개발과 스타일링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싱글만찬> <다이어트 야식> <메뉴 고민 없는 매일 저녁밥>이 있습니다.

신나게 놀다 보면 물이 콸콸~! 플레이펌프

이름은?

플레이펌프. 어린이들의 회전 놀이 기구(뺑뺑이)이자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광고 사업을 하던 1989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농업박람회에서 한 농부가 발명한 펌프를 보게 되었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식수난이 떠올랐고 이 펌프에 큰 저장 탱크와 광고판을 추가하고 실제 사용 가능성을 실험하여 지금의 플레이펌프를 완성하게 되었다. 1997년 재단을 만들어 전 세계인의 후원을 받고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전역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작동 원리는?

아이들이 회전 놀이 기구를 돌리면 그 힘이 펌프를 작동시켜 물을 길어 올리고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진 물탱크에 저장한다. 물탱크는 네 개의 광고판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2면은 건강과 교육에 대한 메시지를 적어 지역 사회의 소통 수단으로 사용되며 나머지 두 면은 상업 광고란으로 사용된다. 펌프 반대편에 수도꼭지가 있어 사람들이 쉽게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다.

주변의 반응은?

전 세계 사람들의 폭발적인 후원으로 현재까지 남아공, 말라위, 모잠비크 등에 1800개 이상의 플레이펌프가 설치되었다. 물을 긷기 위해 하루 종일 걸어야 했던 여성과 아이들의 노동이 줄었고, 그 대신 여자아이들의 학교 출석률이 증가하고, 전염병도 많이 줄게 되었다.

유지와 관리는?

보수 비용은 물탱크 광고판의 판매금으로 충당하며, 협력사이자 펌프 설치를 담당하고 있는 라운드어바웃 아웃도어(Roundabout Outdoor)사에서 담당하고 있다. 플레이펌프는 유지 보수 비용이 적게 드는 장비로 설계되어 있으며, 광고판에 무료 문자 메시지 번호를 표시하여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알릴 수 있도록 했다.

유지 보수 때문에 문제 된 적이 있지 않았나?

대부분의 플레이펌프는 잘 작동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말라위에서 광고 수익을 얻지 못해, 고장 난 플레이펌프가 방치되었고, 일부 언론으로부터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던 중 말라위 지역 광고판이 최근에야 판매되어 유지 보수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말라위 정부에서 유지 보수 부품의 부가세와 관세를 지급하라는 통보를 했다. 이 문제를 통해 지속적인 보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협력사는 관세와 부가세 없이 유지 보수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금, 바로 이곳이 천국입니다 ‘디센던트descendants’

배정희 문화칼럼니스트

‘당신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도 그동안 하고 싶었으되 할 수 없었고 이룰 수 없었던 것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면 혹은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죽는다면 그때는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이 바뀐다면, 적어도 ‘로또 1등 당첨이나 세계 일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죽음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코앞에 있는데, 로또 1등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기 ‘맷 킹’이라는 한 남자! 하와이 원주민인 그는 보트 사고로 졸지에 혼수상태에 놓인 아내의 침상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젠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늘 깨달음은 한발 늦게 온다. 들어줄 상대는 이미 없고, 그들 사이에 있는 딸아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이나 도통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충격적인 사건은 그뿐이 아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뿔싸! 아내에겐 다른 남자가 있었단다. 그것도 자신과 이혼하길 바라면서 그 남자를 사랑했단다. 그러니 이 남자의 인생이 어디 하와이인들 유토피아이고 파라다이스이겠는가? 그래서 그는 하와이를 지상낙원쯤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당신네들 삶과 내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디센던트(후예)’라는 제목처럼 그에게 주어진 중대하고도 골치 아픈 일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부동산을 처분할지 말아야 할지 최종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맷은 아내의 외도와 죽음을 통해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려받은 땅을 그대로 지켜나가기로 결정한다.

땅을 처분해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들, 리조트가 들어서고, 하와이가 더 이상 하와이 원주민의 것이 아니게 될 때, 진정한 하와이언의 후예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추억의 땅을 잃고 각자의 섬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면 그것이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땅을 팔아 없애려는 친척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 땅을 가졌던 것도 아닌데, 그저 물려받은 것뿐인데….” 그래서 아내의 침상 곁에서 눈물 흘리며 “당신은 나의 사랑이자 친구, 고통이자 기쁨이었다”며 나지막이 읊조리던 ‘맷’의 마지막 인사는 그가 지켜낸 것이 다름 아닌 가족들과의 추억, 그리고 가족 그 자체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청산해봤으면?’ ‘단 하루만이라도 다른 사람이랑 사랑에 빠져봤으면?’ 그럴듯한 망상의 바다를 헤매보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면 무얼 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공간이 늘 디스토피아(반이상향)인 이유는 그 누구도, 자신 혹은 가족의 삶이 어느 순간에 ‘올 스톱’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늘 유토피아 속에 살면서도 자신을 끝없이 디스토피아에 사는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그 치명적인 오류를 깨닫고 후회할 때는 안타깝게도 이미 우리 인생은 종착역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결국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파라다이스임을, 우리가 살면서 진정으로 지켜내야 할 것들은 가족, 그리고 함께해온 역사임을, 이 영화 ‘디센던트’는 알려주고 있다.

가을의 길목에서 개구리 왕자님을 만나다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의 길목에
세상 구경 나오신 진짜 개구리 왕자님을 만났습니다.
이슬을 머금은 방울토마토와
발갛게 잘 익은 사과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이 붉은 것은 무엇인고? 백성들에게 유용한 것인가?’
꼼꼼히 살펴보시는 듯했습니다.
아, 언제나 백성 생각뿐인 멋진 왕자님….
초가을 햇살처럼 싱그러운 상상 한번 해봤습니다.

2004년 9월. 경기도 화성

옛날에 엄마 말이라면 덮어놓고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가 있었다지요. 오죽하면 엄마가 죽으면서 산에 묻히려고, 자식에게는 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하였을까요. 근데 하필이면 불효를 뉘우친 청개구리는 유언대로 냇가에 묻었고, 그 뒤로 비가 올 듯하면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개굴개굴 슬프게 운다는 이야기.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전 그 개구리 아니에요. 이야기 속 그 개구리 아닌 지금의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심 감사하겠습니다. 흠….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노인이 노인에게

 

 

 

 

콩 이파리 물결치는 텃밭 속에서, 홀로 콩 이파리를 따는 저 노인처럼,
나 또한 기꺼이 세월 속에 있으리라.

바람도 노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바람이 지나가는 골목 어귀에 여름 내내 할머니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한동네에 도란도란 살고 있는 할머니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보다 지나가는 행인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어제 해거름판에 내가 그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듣지 못했지만, 할머니 한 분이 바람이 차다고 말한 모양이다. 다른 할머니가 말했다.

“춥기는 뭐가 춥단 말이고? 나는 더워 죽겠구마는.” “니는 옷을 많이 입었으니까 안 춥지!” 한 분은 덥다 하고 한 분은 춥다 했다. 골목을 돌아 나오던 가을바람이 제 이야기하는 줄 알고 서성거리다 갔다.

노인은 작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골 시외버스 주차장 대합실. 나무 의자에 앉아 차 시간을 기다리는 노인 앞으로 중절모를 쓴 노인이 다가왔다. 두 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형님뻘 되어 보이는 중절모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말했다. “가자! 한 꼬푸 하자.” “안 할랍니더. 나 술 끊었습니더.” “뭐라꼬?” “인자 술 안 묵습니더.” 중절모 노인이 걱정되는 투로 물었다. “괜찮더나?” “뭐, 잔칫집 같은 데 가면 좀 땡기지만서도….” “그래, 잘했다. 잘 가제이.” 중절모 노인은 미련 없이 작별 인사를 건네고 총총히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노인은 글보다 밥을 공경한다.

일년에 한두 번 우리 학교를 찾아오시는 노인이 계시다. 조선 시대에서 시간 여행을 온 듯 하얀 도포 차림이다. 노인은 교무실에 와서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 붓글 한 점 써 주고 싶다. 필요한 글귀 있으면 말씀하시라’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딱히 청할 문구가 없다. 교감이 ‘기왕 때가 되었으니 점심이나 드시고 가라’ 권한다.

시끌벅적한 학교 급식소에서 노인이 식사를 하신다. 아이들 속에서 학처럼 꼿꼿하게 앉아 한 끼를 해결하신다. 그리고 아이들처럼 냅킨을 뽑아 입가를 닦고, 잔반을 정리하는 일용직 할머니에게 빈 식판을 반납한다.

“감사합니다. 참 잘 먹었습니다.”  최형식

캐나다 ‘부차트 가든’의 한국인 정원사가 전합니다

꽃 이야기1 부차트 가든 정원사의 일상

부차트 가든에서는 보통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한다. 나는 어느 정원사보다 먼저 나와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그 문을 열고 바라보는 새벽의 정원이야말로 나를 가장 편안하고 상쾌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공원과 비슷한 7만 평 정도의 부지에 들어선 캐나다의 부차트 가든에는 정원사만 60여 명이다. 한 해 100만 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 명소인 이곳은, 석회암 채굴장을 일구어 만든 곳이다. 100년의 세월 동안, 수백 명의 정원사들이 대를 이어가며 땅을 갈고, 꽃의 씨를 뿌리고 보살펴, 세상의 거의 모든 꽃들이 만개한 환상적이고도 광활한 정원으로 가꾸어온 것이다.

일년 내내 문이 열리는 이 정원은 계절마다 변신을 거듭한다. 장미, 베고니아, 달리아 같은 화려한 여름 꽃이 지고 겨울 채비를 하기 전까지 한두 달 동안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는 꽃 중 하나가 국화다. 이 국화는 다른 꽃들이 여름 잔치의 주인공 자리를 다투며 뽐내는 동안, 정원 한쪽에서 묵묵히 뿌리를 뻗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주인공들이 하나 둘 무대에서 내려올 즈음, 종묘장에서 화단으로 성큼성큼 나온다. 그러고 나선 계절의 마지막까지, 그렇게 모두가 떠난 무대 위를 지켜낸다. 시샘이나 다툼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군자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싶다.

꽃들에게 계절의 변화는 인간의 운명과도 같다. 자신의 몸속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봄, 태양과 마주하며 쑥쑥 커야 하는 여름, 군식구를 떨어내며 긴 겨울잠을 준비해야 하는 가을, 눈보라를 피해 꼭꼭 숨어야 하는 겨울. 각 꽃들의 특징에 맞게 씨를 뿌리고, 꽃을 심고, 비료를 주고…. 꽃들이 숙명처럼 순환하는 계절에 순응하며 가장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도와주는 것이 정원사의 일이다.

꽃 이야기2 히말라야 수도승 같은 꽃 ‘블루포피’가 전하는 말

이곳에서 정원사 생활을 한 지 5년째다. 사십 대의 평범한 가장이자 샐러리맨이었던 내가, 가족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 섬의 도시 빅토리아에 온 때가 2007년 가을이다. 마흔의 나이를 맞으면서 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빽빽한 생활, 권위주의적인 문화…. 언제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처럼 답답했다. 나에겐 변화가 절실했고, 그렇게 짐을 쌌다. 내 스스로가 억압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우연처럼, 필연처럼 이 아름다운 정원의 첫 한국인 정원사가 됐다.

처음엔 그저 땅을 일구고 잡초를 뽑고 퇴비를 나르는 단순 작업이 반복됐다. 특히 첫해는 영문으로 된 꽃과 나무 이름을 외우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 지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틈만 나면 꽃과 나무의 이름을 외워댔다. 꽃 안내 책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보며 읽고 또 읽었다. 덕분에 점차 관광객이 무슨 꽃이나 나무를 물어오든 대부분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정도가 됐다. 그렇게 두어 해가 지나면서, 가지치기나 나무를 옮겨 심거나 새로 심을 나무를 고르는 일 등도 하나씩 배울 수 있었다.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일하며 꽃과 나무들을 새롭게 만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사로잡았던 꽃은 부차트 가든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블루포피였다. 히말라야에서 자생하던 블루포피가 대륙을 건너 영국에서 싹을 틔운 것이 1925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 작은 씨앗은 대서양을 건너 이곳으로 왔다. 이 꽃을 볼 때면, 티베트의 한 고찰에서 정진 중인 라마승을 뵙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든, 그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던 블루포피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다.

“너도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태평양을 건너 이곳에 왔잖아. 나처럼 너도 항상 좋은 기품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으면 해.”

꽃 이야기3 국화 같은 장모님, 수국 같은 나의 어머니

서로 다른 느낌의 꽃과 나무를 볼 때마다 그들과 닮은 고향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국화꽃처럼 품성이 고우신 장모님, 울타리 나무처럼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주신 장인어른, 수국의 꽃처럼 토양에 따라 그 색깔이 다양하게 변하는 나의 어머니, 내 동무들을 닮은 백합…. 특히 달리아 화단에 설 때면 할머니를 떠올린다. 달리아꽃은 자연이 부리는 조화의 극치라 해도 설명이 모자랄 정도로 화려한 꽃이다. 사실, 연꽃 모양으로 피어난 달리아를 처음 본 순간, 어렸을 적 할머니의 상여에 장식됐던 상여꽃을 기억해냈다. 그 곱고 화려한 빛깔의 꽃들을 만지작거리면서, 할머니를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슬픔보다는, 편하고 아름답게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할머니께서는, 내 삶의 금과옥조가 될 만한 얘기를 더러 해주셨다. 그중 하나가 “사내자식은 도둑질 빼곤 다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새로운 일을 앞에 두고 주저하는 나에게 대뜸 하셨던 얘기였다. 그 말씀처럼 한곳에 안주하기보다는 많은 변화를 꿈꾸고, 시도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꽃 이야기4 아름다운 조연, 데이지를 닮은 삶

이른 봄, 부차트 가든은 예쁜 단추같이 생긴 데이지 꽃의 세상이 된다. 그리고 날이 풀려 여기저기서 튤립과 수선화가 싹을 틔우고 곧이어 화려한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하면, 데이지는 화단의 주인공 자리를 이들에게 양보한다. 이즈음 정원을 찾는 모든 방문객들이 쏟아내는 탄성과 환호는 온전히 튤립과 수선화의 몫이다. 시샘도 할 법하건만, 데이지들은 마치 이 주인공들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듯, 묵묵히 꽃을 피워낸다.

겨우내 땅속에 심긴 알뿌리들을 품고 지내는 인내심, 튤립과 수선화에게 봄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는 미덕. 내 또래의 친구들은 어느새 데이지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 모두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모두가 훌륭한 주연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매 순간이 숙명처럼 다가왔던 삶이었다. 나는 어떤 향기를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종류의 울타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 가시가 뾰족한 탱자나무보다는 넉넉한 측백이나, 서걱대는 잎사귀 소리로 더위를 식혀주는 대나무이고 싶다. 자식들에게도, 내 주변에 바람막이가 필요한 그 누구에게도.

 

박상현님은 1967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시티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정책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언론 기자로 이십 대를 보낸 후, 아내와 함께 영국 유학길을 떠났지만 IMF 구제금융 사태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공기업 성격의 한 기업체에서 일했다. 2007년 캐나다로 이민, 현재 부차트 가든에서 정원사로 일하고 있으며, 가이아 컬리지에서 친환경 조경 디자인 코스를 이수했다.

건축가 승효상 ‘빈자의 미학’을 설계하다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중요하다.’
건축가 승효상. 그는 이렇게
‘빈자(貧者)의 미학’이란 철학으로 건축을 설계해왔다.
가난했지만 함께 모여 살았던 달동네처럼
이웃을 배려하며 짓는 것이 건축의 공공적 가치라는 것.
그는 또한 집을 짓는다는 건 ‘삶을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건축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최초 국가공원인
용산공원 국제 설계 공모에 당선된 건축가,
건축을 통해 치유를 꿈꾼다는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승효상(60)씨를 만나보았다.  

글, 사진 김혜진

서울 동숭동 이로재. 1만여 권의 책과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1층 사무실은 건축가 승효상씨의 작업실이다. 책상 한 켠으로는 그가 최고의 건축자재라고 말하는 다양한 책들이 눈에 띄었다. 건축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삶과 연관되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엔 책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란다. 직원들이 언제나 스스럼없이 들어와서 책을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승효상씨는 설계에 여념이 없었다. 도면에 선을 하나 긋는 것은 그렇게 지으라는 명령이자, 훗날 그 집에서 살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라는 것이기에 선 하나를 긋는 데도 굉장히 진지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그의 건축물에는 여백이 살아 숨 쉰다. 한 건물이 통째로 우뚝 서 있기보다 조금씩 부분 부분 나뉘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고, 누구나 앉아서 쉬고 싶은 열린 마당에서는 자연과 교감한다. 비움을 지키는 집이라는 수백당(守白堂)을 비롯, 공간을 나누고 비움으로써 숨 쉴 수 있는 도시를 표현한 웰컴 사옥, 퇴촌주택, 소석원 등 그가 설계한 100여 개의 건축물에는 하나같이 빈자의 미학이 담겨 있다.

최근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공원인 ‘용산공원’ 설계 국제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조경가 아드리안 구즈와 공동으로 설계한 이 작품에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제와 미군의 주둔으로 훼손된 용산기지의 생태적, 역사적 상처를 치유한다는 내용을 담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이라는, 깊이 있는 인문학적 성찰을 담았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치유의 공원’, 어떤 방식으로 그 의미를 담으려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자연, 역사, 장소 등 세 가지 복원을 통해서 치유하자는 거죠. 땅으로 보면 용산은 백두산에서 발현된 백두대간과 연결되니, 땅이 깎여 있으면 돋우고 끊어져 있으면 이어서, 백두산 다람쥐가 한강까지 내려오도록 자연과 생태를 복원하여 치유하자는 거고요, 또 하나는 외세에 의해 점령당하고 훼손된 역사들을 살려내서 다시 우리 역사로 편입 복원시키는 것, 그게 역사에 대한 치유이고요, 세 번째로 용산이 담으로 둘러싸여서 주변과는 섬처럼 분리되어 있는데 그 담을 다 걷어내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소로 복원시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건축 하나로 많은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건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땅이죠. 건축은 땅을 떠나서는 지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것은 땅의 물리적인 형상뿐만 아니라 땅에 새겨진 모든 기록들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도 땅에다가 부지런히 뭔가를 새기는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새길까 따져봐야 하는 것이고 그게 건축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 될 수 있죠. 최근 김훈씨가 쓴 소설 <흑산>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와요. ‘사람이란 모름지기 터전을 잡고 머물러야 그게 본(本)이고 거기서 이(理)가 생기고, 사람의 모든 존재는 터전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그건 정말 진실이죠. 오래 머물러 살아야 가문과 문화가 형성되니까요. 자기 집을 부동산으로만 알고 이익을 위해 빨리 팔고 딴 집 가고 한다면 도시의 유목민처럼 가벼운 삶, 터무니없는 삶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터무니없는 삶’이라 하시니, 요즘 자주 말씀하시는 ‘터무늬’가 떠오릅니다.

사람에게 각자 지문(指紋)이 있듯, 땅에도 고유한 무늬(地紋·지문)가 있습니다. 그걸 터무늬라 하는데 거기엔 인간의 삶이 남긴 기억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데 요즘은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는 등 터에 새겨진 무늬를 다 지워서 집을 지으니 말 그대로 ‘터무늬 없는 집’이고 ‘터무니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거죠. 하지만 산동네 같은 데 가면 땅이 생긴 대로 짓거든요. 그건 우리 옛 선조들의 건축물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지혜입니다. 서양은 자연을 지배하지만, 우리는 자연과 교감하며 땅에 맞는 건축을 해왔으니까요. 가령 병산서원에 가면 자연을 어떻게 건축 속에 빨아들이는가를, 부석사에 가면 철저히 건축이 자연의 한 부분이 돼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죠.

그는 부산의 난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화가나 성직자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누나가 대신 건축을 권유했다. 1971년 서울대 건축과에 입학한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김희춘 교수의 추천으로 김수근 선생이 이끄는 건축사무소 ‘공간’에 들어간다. 김수근 선생은 올림픽주경기장, 경동교회, 서울법원종합청사 등을 지어온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건축의 생명은 건물을 어떻게 예쁘게 짓느냐가 아니라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게 조직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밤을 새워가며 김수근 건축을 탐닉하던 어느 날 갑자기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한동안 방황했다. 과연 ‘승효상의 건축’이란 무엇인가?

그러다 우연히 금호동 달동네를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한국 전쟁 때 이북에서 피란 나온 여덟 가구가 마당을 함께 쓰고, 골목이 마당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창고가 되었던 곳. 옆집 담이 우리 집 벽이 되고 우리 집 벽이 앞집의 지붕이 되었던 공동체 마을. 가난했기에 오히려 나눠 쓰고 같이 살았던 달동네의 골목길이야말로 건축의 온갖 지혜가 응축된 곳이었다. 모여 사는 사람들의 아름다움,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건축과 마주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미학이란 건축 철학이 담긴 ‘빈자의 미학’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건축가로서 가장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옆집보다 크려 하지 않고, 길이 있으면 자기 땅 안으로도 길을 내어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가 오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 또한 도시민의 배경으로 있을 뿐 튀지 않는 것, 그게 선한 건축이죠. 어떤 건축주들은 건축을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 개인 돈으로 지어도 사용권만 있지 그 소유권은 시민과 사회에 있습니다” 했더니 화를 내고 가버리더군요. 그래서 굶기도 많이 굶었어요.(웃음) 건축가는 시민과 사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위해 헌신하는 하수인이 되면 그건 건축가가 아니에요.

건축주의 마인드가 굉장히 중요하네요.

네. 좋은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가 만듭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어떻게 보면 모든 시민들이 잠재적 건축주니까 건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건축주는 건축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 집을 지을 때도 절제하면서 지을 줄 알아야 하는 거죠. 그런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아는 건축주를 만나면 그지없이 반갑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는 전심전력을 다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빈자의 미학, 그 첫 번째 결과물인 수졸당(守拙堂)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겉은 보잘것없으나 정신만은 풍요로운 집이라는 그곳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잘 알려진 유홍준 교수의 집이다. 당시 가난한 학자였던 그는 승효상 대표에게 설계비 대신 현판을 하나 건넸다. 이로재(履露齋), 아침 이슬을 밟으며 청빈한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그 뜻에 반한 승대표는 자신의 건축사무소 이름으로 삼았다.

평소 빈자의 미학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건축이라는 게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설계를 못 해요. 왜냐하면 자기 집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집을 짓는 거니까 항상 제3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죠. 건축 도면이라는 게 그래요. 평면도란 위에서 쳐다보는 그림 아닙니까. 평면도를 정확히 보려면 무한히 위로 올라가야 돼요.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요. 완전하게 자기를 객관화시키는 거니까. 제도에 쉽게 휩싸이거나 주관적인 입장에 휘몰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어요. 자기를 경계 밖으로 내몰아내야 경계 안을 쳐다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건축가로 아돌프 로스를 꼽는다. 아돌프 로스는 1907년 오스트리아 빈 시내에 장식이 없는 건물인 로스 하우스를 세운 인물이다. 당시만 해도 화려한 장식이 빈의 정체성이라 믿어온 이들에게 아돌프 로스의 행보는 파격이었다. 그 이후 모더니즘이 태동하면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을 세웠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철학자 칼 크라우스는 로스 하우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아돌프 로스는 미카엘 광장에 건축이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라고. 그것은 한 사람이 건축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큰 깨달음이었다. 이처럼 그는 건축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다. 부부가 서로 닮아가는 것은 그들이 한집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했기 때문인 것처럼. 좋은 건축은 좋은 삶으로 이어지기에 그에게 건축은 삶을 짓는 것과 같다. 건축은 곧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사는 방법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가 건축을 기술이나 예술이 아닌 인문학으로 보는 이유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을 하는 게 아니라 사는 사람이 만들어 나간다고 하셨지요.

언젠가 내가 지은 건축물은 허물어질 걸 압니다. 건축물을 세우자마자 거주하는 사람이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설계한 대로 살라는 건 독재죠. 건축가는 그 바탕만 제공하는 거예요. 다만, 바라는 건 맨 처음 상태가 어떠했는지 알려주면 근사하겠죠. 건축은 공간으로 만들어지지만, 시간으로 완성되니까요. 시간이 지나며 바뀐 결을 따라 기억들이 쌓이고 그게 살아온 궤적을 나타내고…. 그것이 우리 삶을 멋지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거죠.

가장 아름다운 집이란 어떤 집일까요?

우리 삶을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집이죠. 똑같이 주어진 하루도 어떻게 보내느냐는 다르듯이, 어떤 사람은 별이 떠도 별을 못 보고, 해가 떠도 해를 못 봐요. 근데 건축이 그걸 근사하게 보여줄 수가 있어요. 떠오르는 해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배율로 창을 뚫고, 빗방울 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들리도록 처마를 낼 수 있죠. 또한 주변 집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굉장히 선하게 만들 수가 있어요. 주변 집에 군림하듯 서 있으면 자기 마음이 완악하게 되죠. 하지만 자기 분수에 맞고, 염치가 있는 집을 지으면 그게 사람을 선하게 만들죠. 그런 집은 불편해야 돼요. 그래야 사람이 생각하게 되고, 움직이고, 창조하게 되니까요. 동선도 좀 길어야 하고, 대문도 나가서 열어주고, 집이 좀 좁아야 가족끼리 지나칠 때 살결도 부딪치고 만져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불편한 집이 좋은 집이에요.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는, 손님이 오면 직접 나가서 문을 열어줘야 한다. 걸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덕에 바깥 경치도 보고 서로 소통할 수 있어 그 불편함을 즐긴단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콘크리트로 찍어내듯 우뚝 솟은 건물 못지않게 우리 마음도 시멘트처럼 차가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 버튼 하나로 눌러 끝나는 게 아니라 정겹게 문을 열어주는 우리의 따듯한 감성을 찾아내는 것, 그는 그렇게 건축을 통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삶의 공간을 일궈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마을을 하나 설계하고 싶습니다. 정말 근사한 공동체를 만들어 촌장을 하면 좋지 않을까요.
안 되면 청소부라도.”(웃음)  

건축가 승효상님은 1952년생으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15년간 김수근 문하를 거쳐 19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 개설 후 자신의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을 바탕으로 수졸당, 대전대 혜화문화관 등을 지었습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김수근 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빈자의 미학> <건축, 사유의 기호> <지문> 등이 있습니다.

우연처럼 다가와 필연이 되어버린 ‘그대’와의 운명적인 스토리

 

‘내일은 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 감사하며 살기’ 사형수들에게 배우다

양순자 73세. <어른 공부> 저자

내가 사형수들을 처음 만난 것은 서른일곱 살 때였다. 젊은 나이에 나는 겁도 없이 서울구치소 사형수 담당 종교위원을 자원했다. 내 삶이 너무 버거워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을 때였다. 사형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까, 알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을 때, 사형수들을 만났다.

사형 선고를 받고 나면 정신적으로 평안할 수가 없다. 잠을 자면서도 악몽에 시달린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집행일을 두려워하면서.

종교위원은 매주 정해진 날에 찾아가 사형수를 면담하고 신앙 상담과 함께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워 잠 못 이루는 사형수를 형제처럼 다독거리면서 한 명의 사형수와 2~3년을 함께 보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사형수를 만나 그가 죽는 그날까지 평안한 마음으로 생을 정리하도록 아주 조금 도움을 주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30년 동안 종교위원을 했다 하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냐고 묻는다. 그것은 절대 잘못된 말이다. 그 시간은 봉사가 아니라 배움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 죄인이었지만 집행장 참관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떠난 박철웅을 나는 기억한다. 1981년, 그러니까 벌써 30년이 넘은 일이다. 그를 2년 6개월간 서울구치소에서 상담했다. 한 사람을 바르게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건만, 사형수 박철웅은 구치소 안에서 동료 재소자들을 회개하게 하고 변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 사형을 면해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더는 미련 없습니다. 저만큼 세상 쾌락을 누려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철없던 때는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는 줄 알았지요. 구치소에 들어와서야 알게 됐습니다. 내가 누렸던 쾌락이 나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는 것을요. 이제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감사함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지금의 감사함을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사형수들에게서 감사함을 배웠다. 그들에게서 감사함을 배우며 ‘나’라는 사람도 변했다. 진정한 감사는 가진 것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참으로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19년 된 고물차가 시동이 걸릴 때, 예금 계좌에서 필요한 돈을 인출할 때, 좁은 수납공간에 내 물건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처럼 일상에서의 작은 감사와 마주할 때마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꼈다. 세상엔 기뻐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행복의 원동력은 바로 감사였다.

사형수들을 만나면서 무엇이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풀어서 풀릴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요, 참고 기다려서 해결되는 것이면 고통이 아닌 것이다.

사형수들과 긴 세월을 함께해서일까, 내 머릿속에는 이런 말이 박혀 있다.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러니 내 사전에 내일은 없다. 바로 지금이 언제나 전부다.’

조금 먼 길을 나설 때는 물론이고 잠깐 외출을 할 때도 나는 항상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한다. 깔끔하게 정리해놓고도 현관에 서서 한 번 더 집안을 둘러보곤 한다. 마치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12월이 되면 의식처럼 하는 일이 있다.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는 대신 나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있는지 헤아려보고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미루지 않고 바로 해결해 버린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약속은 하루에 하나만 잡는다. 바쁘다고 적당히 만나고 나면 반드시 후회가 남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칠십 평생 병원도 모르고 살만큼 건강하다 자부했던 내가, 2년 전 암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의사가 두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미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의연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수들에게 일러준 대로 나도 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살아 있으니 오늘이 있을 뿐이요, 내일은 와봐야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 이 순간이 내 생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암도 함께 안고 산다.

 

이왈종 작.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 46×38cm. 장지 위에 혼합. 2010.

 

열여섯 살 우연히 다가와 나의 전부가 된 야구

이연수 49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아주 오래전에 읽었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글이 하나 있다. 80년대 후반 경기도의 한 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던 사람이 밤이 되자 서울 쪽에서 환한 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궁금해서 선임들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잠실야구장 불빛이었다.

야구에 썩 관심이 없었던 그에게 그 야구장 불빛은 자유롭게 생활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이자 그리움이었고 다시 돌아갈 길을 밝혀주는 등대였다고 한다.

올해 마흔아홉인 나는 내 또래 중년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일상을 즐긴다. 부지런히 집안일을 마치고 저녁을 준비해 놓은 후 야구장으로 간다. 그리고 집에 오면 간단한 경기 리뷰와 후기를, 포털사이트 야구 게시판과 개인 블로그에 올린다.

그렇게 내 삶의 중심에는 ‘야구’가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연수를 따진다는 것이 좀 우습지만 야구에 푹 빠져 산 지 올해로 고작(?) 33년 정도.

내가 야구라는 것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야구장 불빛 때문이었다. 1979년 중3이던 열여섯 살, 한창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그날도 학교와 집 중간에 있던 극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버스 속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고교 야구 중계가 매우 열광적이었고 운전기사 아저씨의 표정 또한 무아지경이었다. 얼마나 재미있기에 저럴까,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는데 마침 버스가 동대문운동장을 지나갔다. 그 버스를 탈 때마다 동대문야구장의 불빛을 무수히 봤지만 그 라디오 중계 소리와 야구장 불빛에 끌려 극장이 아닌 야구장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야구는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야구에 더 빠져 살라는 신의 계시였나, 하필 뺑뺑이 추첨으로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가 잠실야구장 건너편에 있는 여고였고 1982년에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가 생겼다. 당시 고3이었던 나는 입시 공부를 하랴, 프로야구를 보랴, 바쁜 일년을 보냈다.

고교 야구를 보던 시절에는 단순히 ‘야구’라는 종목에 미쳐 살았지만 프로야구가 생긴 이후에는 ‘오비베어스’에 미쳐 살았다. 왜 여섯 개의 팀 중에서 오비베어스를 낙점(落點)했는지 그 이유는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구가 우연히 다가온 것처럼 우연히 내게 찍힌 팀이 바로 오비베어스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온 오비베어스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우승팀이 되었고, 야구장에서 직접 우승의 기쁨을 함께했던 경험은 첫사랑보다 더 의미 있는 순간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으면서 살림과 육아에 지친 내게 야구는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서 고작 이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야구장도 어느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사랑 야구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금 야구와 사랑에 빠지기로 결심했고 그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1995년, 원년 우승 이후 13년 만에 오비베어스는 두 번째 우승을 했다. 나는 그 순간 또한 야구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 또 그날의 야구는 삶에 지친 나에게 다시금 큰 힘을 불어준 내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됐다.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가장 흔하게 나오는 말이 ‘야구는 인생과도 같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진부하게 얘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은 정말 그 말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맞다! 야구는 인생과도 같고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공으로 하는 스포츠 중에서 공이 아닌 사람이 홈에 들어와야만 득점이 나는 유일한 경기이기도 하다. 나는 야구 자체를 그냥 미치도록 좋아한다. 거기서 내 인생을 본다. 어느새 야구는, 그리고 두산베어스는 그렇게 내 그림자와 같은 내 동체(同體)가 되었다.

 

이왈종 작.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 72.5×60.5cm. 장지 위에 혼합. 2012.

 

내 인생을 바꾸어주신 선생님

함은영 44세. 충남 태안군 소원면

나에게는 스승이 한 분 계시다. 약 27년의 인연이 이어져 지금까지도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 선생님을 우리 아이들은 서울할머니라 부른다.

바로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 과목 담당은 국어이고 글도 직접 쓰셨다.  나는 그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권면을 해주셔서 다음 해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가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선생님은 힘들면 언제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라고 하셨고 나는 스승의 날이면 늘 찾아뵈어 좋은 말씀도 듣고 힘을 얻어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선을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당시 나는 동생들이 넷이나 되는 터에 어머니를 도와 가장의 책임을 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이러한 힘든 생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선생님 댁으로 가니 신랑 될 사람과 부모님께서 먼저 와 계셨다. 신랑은 목소리가 조용하고 술 담배를 아니하는 건실한 청년이었고, 시부모 되실 분들의 인품이 인자하시어 나의 어머님께서도 선생님 말씀이 틀린 데가 없다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사월에 만나 유월에 결혼을 하였다.

신랑은 부모님께 순종하며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다. 인터넷이나 TV를 보면 남편과 성격이 안 맞는다고 이혼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 사람으로 짝을 지어주셨는지, 선생님께 정말 감사하다.

몸이 약해서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나는 물론이고 시어른들께서도 걱정을 하셨는데 오히려 진통도 별로 안 하고 쉽게 아들을 낳고 세 살 터울로 딸도 낳았다. 시부모님께서 직접 걷어 올린 싱싱한 생선과 정성껏 가꾸신 곡식과 채소로 훨씬 건강한 몸이 된 덕분인 것 같다.

시집을 오면서 시할머니를 모시고 십육 년을 살았는데 작년 여름에 시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힘들고 어려운 점도 있었으나 시할머니를 모시며 사는 동안 생활의 지혜도 터득하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

물론 내가 자란 곳도 아니고 시골이다 보니 친구도 없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선생님과 메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요즘은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는데, 지난 4월 말에 갑자기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여기 천리포수목원으로 친구들과 내려오고 계시다는 전화였다. 몇 해 전까지 가족 분들이 매년 두세 번씩은 오시곤 했는데 사부님 돌아가신 후에는 통 오시질 않았던 터였다. 선생님이 오신다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요양원에서 조퇴를 하고 나와 수목원으로 달려갔다. 수목원에서 만나 버스 타고 떠나실 때까지 두 손을 놓지 않고 꼭 잡고 다녔다. 너무 반가우니 눈물이 났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별명 하나를 붙여주셨다. ‘천리포의 작은 천사’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선생님의 사랑을 더더욱 느끼게 됨을. 학창 시절에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선생님들, 그중에서도 김재숙 선생님은 내 인생을 바꾸어주셨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왈종 작.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 53.5×45.5cm. 장지 위에 혼합.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