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 ‘까마중’을 다시 만나다
유연동 47세. 직장인.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몇 년 전부터 산에 가면 꽃과 신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이러한 식물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보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사실은 내가 말한 것이다) 산에 가서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인생이 꺾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내 나이 벌써 40대 중반을 넘어버렸으니 꺾인 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뒤편으로는 학의천이 흐른다. 그 옆 산책길은 나설 때마다 심심치 않게 나를 반겨준다. 봄이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기다리고 있고, 여름, 가을, 겨울도 제각기 다른 계절 색으로 나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팔월 말, 더위가 꺾여가고 있을 무렵, 나는 또다시 주말에 학의천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두 가지 식물, 그것은 늦게 올라오고 있는 들깨와 까마중이었다. 들깨는 깻잎으로 흔히 보는 것이었지만 까마중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기르고 보살피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뽑아 아파트로 가지고 왔다. 새 화분에 하나씩 심었다. 다음 날 아침 물을 주고 출근했다. 퇴근해서도 화분부터 살피게 되었다. 근데 들깨는 없어졌고 까마중만 남아 있었다. 아내는 들깻잎에 벌레가 너무 많아 할 수 없이 버렸다고 했다.
사실 집사람은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원예니 농사니 하는 것에는 원래 깡통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 주기뿐이었다. 물도 성의 없이 줬다. 가끔 생각나면 주고 물주는 양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나도 화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새 둥지를 튼 까마중은 기대 이상으로 씩씩하게 자라났다. 자슥이 물만 주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쑥쑥 커 나갔다. 특유의 굴광성으로 해를 쫓아다니느라 줄기는 구부러졌고, 가을로 들어서자 벌써 첫 열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까만 열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초엽이 되자 나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 까마중은 일년생 풀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은 죽지 않았다. 겨우내 베란다에 뿌려지는 햇빛과 나와 집사람의 물 주기로 겨울을 버텨냈고 봄을 맞았다. 당연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일년생이 다년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박남철 작. <Walk 45-한낮>
116.7×80.3cm, 목천에 수간채색, 아크릴릭
2011
새봄이 되자 화분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집사람은 큰 화분을 준비해 주면서 나더러 학의천에 가서 흙을 퍼 오라고 했다. 내 친구 까마중을 만났던 또 하나의 내 친구 학의천으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갔다. 흙을 캐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 눈도 의식이 되고. 다리 밑으로 가서 공사 현장에서 쓰는 질 낮은 모래를 싸들고 집으로 왔다. 분갈이를 하는 내 맘속에 걱정이 앞섰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이 흙은 영양가가 거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생각보다 굵고 단단해져 있는 뿌리만이 위안이었다.
역시나 흙이 바뀌었건만 물만 주면 또 무럭무럭 자랐다. “고놈 참 신기한 녀석이야.” 아내는 까마중이 뭐에 좋다나 어쨌대나 하며 열심히 따 먹는다.
하지만 여름이 올 무렵 내 친구 까마중은 새로 들어온 이름 모를 화초에 집을 내주게 되었다. 나는 뽑혀진 까마중을 학의천에 갖다 버렸다. 시들어가는 까마중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 들판에 널려 있는 까마중은 실제로 노랑 까마중이었다. 노랑 까마중은 검정 까마중보다 더 달고 껍질도 부드러웠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까마중밭에 숨으면, 숨기 위해 까마중밭에 온 건지 까마중을 먹기 위해 온 것인지 망각하고는 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은 어느새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고, 이제는 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어버렸다. 무공해 까마중의 힘으로.
오늘은 비가 왔다. 회사 옆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던 나는 도시의 시멘트 틈 사이로 꿋꿋이 잎을 드러내고 있는 내 친구, 까마중을 발견하게 되었다. 갈등이다. 이 친구를 차에 모셔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아버지가 주신 매직박스
에드워드 김(김희중)
73세. 사진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인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금고에서 보자기로 싼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끼시는 바람에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졌다.
“카메라는 사진만 만들 수 있는 박스가 아니라 매직박스이니, 방학 숙제로 카메라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알아내 보거라.”
그리고는 거리 맞추는 방법, 노출을 조정하는 요령 등 간단한 카메라 작동법을 설명하시고는 필름 몇 통을 주셨다.
카메라가 무슨 마술을 부린다는 것인가? 싶었지만, 카메라를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카메라가 여간 귀한 게 아니던 시절이라 아이들도 마냥 좋아라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찍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뭐 찍을 만한 것 없나,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항상 눈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한번은 동네에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댁이, 언제 낳았는지 갓난아이를 안고 나와 있었다. 아이가 칭얼대며 보채자 그녀는 저고리 앞섶을 풀더니 보름달처럼 둥근 젖가슴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리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쌕쌕이며 젖을 빠는 모습과 젖을 물린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부터 나는 익숙하던 것들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새롭게 사물을 바라보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이 카메라라는 것이 사람을 보게 만드는 기계로구나!”
방학이 끝날 무렵 아버지와 마주 앉아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선 매우 기뻐하셨다.
박남철 작. <Walk>
53×53cm, 목천에 수간채색
2011
“희중아, 사람들은 항상 눈을 뜨고 살지만 눈앞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라는 것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니 이게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때부터 아버지의 매직박스와 함께 내 삶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시간만 나면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 길에서 우리 농부를 다시 만나고, 우리 고향을 다시 만나고, 무심한 일상의 풍경들을 다시 만났다.
그렇게 새로 만나는 세상은 가슴 벅차리만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점차 내가 느낀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을 처음 접하면서 발견한 1950년대 우리의 모습들을 주제로, 학창 시절 두 번에 걸친 개인전을 열었다.
그 이후 사진의 매력에 이끌려 60년이 가까이 되도록, 사진과 함께 살아왔다.
아빠의 마당
이유진 34세. 플로리스트.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 보지 않았습니다. 6살 이후론 줄곧 한집에 살았으니 아파트에 살 기회도 없었지요. 제가 자란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은, 소위 ‘집 장사’들이 지은 것으로 이렇다 할 멋도 매력도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 자식들에게 보여주시던 날 부모님의 흥분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집은 다 지어지지 않고 골조뿐이었고, 마당에는 전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심어져 있었지요.
“지금은 여기 나무가 하나밖에 없는데, 봄 되면 나무를 많이 심을 거다. 이쪽에는 목련을 심고, 집에는 대추나무가 있어야 되니까, 그것도 심고.”
그 집, 그 마당에서 아빠는 오래 바쁘셨습니다.
봄이 되면 마당에는 제일 먼저 목련이 꽃을 피웁니다. 그 후 진달래가 피고, 철쭉이 피고, 모란도 피고 장미도 피고 졌습니다. 가을이면 감이 영글고 대추가 익었지요. 겨울에는 전나무에 전구를 감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렀습니다. 어느 날이라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흙 삽을 들고, 또는 호스를 들고 있는 아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마당이 어린 제게는 얼마나 거대한 공원이었는지요. 작은 오솔길에서 언니, 오빠와 고무줄놀이를 하고 소꿉장난을 했습니다. 철쭉 피는 봄이면 돌에 올라앉아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미 철에는 큰 종이에 장미 축제라 써 붙이고 가족끼리 파티를 벌이기도 했지요. 아빠는 어린 딸이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새장을 걸고 닭도 키우고, 강아지도 키우셨습니다. 그 마당에서 대추를 따 먹고, 감을 따 먹는 동안 저는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오빠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언니가 결혼을 해 아이를 둘 낳았습니다.
박남철 작. < Walk 45-16>
53×53cm, 목천에 아크릴릭
2012
어른이 되어 대학 다닌다고, 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 본 아빠의 마당은 얼마나 좁던지. 두세 걸음이면 성큼 현관에 닿을 만큼 좁디좁은 곳이었지요. 어린 저에게는 그토록 드넓은 마당이었지만, 아마 아빠에게는 처음부터 이렇게 손바닥만 한 마당이었던 걸까요? 아빠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마법을 보여주신 걸까요?
오래 살던 집을 떠나, 지금은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전망도 좋고, 고층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잘 가꿔진 아파트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일은 어쩐지 쓸쓸합니다.
온갖 벌레들이 윙윙대고 거미줄과 길고양이들이 활개 치던 아빠의 마당이 그립습니다. 내가 자란 곳은 그 마당이었음을, 그 시절이 내 삶의 씨앗이 되어, 오늘을 열매 맺게 해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62
우리 공장 ‘토토’ 이야기
박소연 37세. 자영업. 충남 논산시 상월면
작년 겨울, 도시에서 시골로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올라온 나는 자연의 신선함을 느끼면서 이 땅에서 동물을 키워봤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다 우연히 강아지를 주겠다는 이웃 언니 집에 가게 되었다. 반가운 맘에 날아갈 듯 찾아간 집 마당에서는 어미 개가 새끼들에게 젖을 주고 있었다. 통통한 어린 새끼들이 눈에 띄어 만져보며 귀여워하는데, 저쪽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새끼 한 마리가 보였다. 거짓말 안 보태고 내 주먹보다 작은 아이였다. “쟤는 왜 저렇게 작냐?”고 물어보자, 언니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 개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엄마가 몸이 약해서 젖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미는 본능적으로 가장 약한 두 마리를 빼고 나머지 네 마리에게만 젖을 먹이더란다. 결국 한 마리는 얼마 못 가 죽었고, 그 강아지는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랬구나, 하며 통통한 강아지를 안고 뒤돌아 나오는데, 자꾸 그 강아지가 눈에 밟혔다. 그렇게 뒀다가는 얼마 못 가 죽을 텐테…. 결국 고민 끝에 그 강아지를 데려와 키워보자고 결심했다. 우선 이 아이를 살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자 언니는 흔쾌히 강아지를 내주었다.
우선 공장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장에 데리고 갔다. 직원들도 모두 좋아했다. 제일 먼저 우리는 ‘토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토토를 향한 우리의 지극정성은 시작되었다.
우유, 이유식 사료 등 새끼 강아지에게 좋은 음식들을 수소문해 주고, 안아주고, 재워주고, 목욕시켜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토토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걷지도 못하고, 눈에 초점도 없이 웅크리고만 있던 아이가 멍멍 짖기도 하고, 공장 사람들을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점점 몰라볼 만큼 빠르게 커가기 시작했다.
박남철 작. <Walk 45-한낮2>
91×65cm, 목천에 수간채색, 아크릴릭
2011
이렇게 죽어갈 뻔한 아이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는 게 경이로웠다. 아무리 죽어가는 것도 이렇게 사랑과 정성을 주면 살릴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토토를 보면서 배우는 것도 참 많았다. 항상 한마음이라고 할까. 우리는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좀 싫은 소리를 한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거리감을 두는데 토토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어찌나 장난꾸러기인지 말썽을 피울 때마다 아무리 세게 야단을 쳐도, 금세 꼬리를 흔들며 다시 다가온다. 그런 한결같은 토토를 보며 내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토토만도 못하구나, 반성하게 될 때도 많았다.
한번은 안 좋은 일이 생겨 밤에 공장에 간 적이 있었다. 얌전히 자던 토토가 반갑다며 쫓아 나왔다. 그런데 나의 심각한 표정에 이내 얌전해지더니, 가만히 옆에 있는 게 아닌가. 꼭 자기도 고민하는 듯했다. 그 몇 개월을 함께했다고 주인의 마음까지도 느낀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런 토토가 얼마 전 임신을 했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많이 크기도 컸고, 아이까지 생긴 토토를 공장에서 키우는 게 어려울 것 같아 곧 개를 좋아하는 분께 입양을 시킬 예정이다.
“토토야, 네가 이제 엄마가 되다니, 감개무량이다. 아이 잘 키워. 그동안 너에게 많이 배웠어. 고마워.^^”
힘들 때면 너를 생각한다,
나의 첫 제자 상용아
박현성 34세. 김해능동초등학교 교사
2004년 7월 처음으로 교단에 섰을 때였다. 잠시 음악 전담 선생을 맡게 되어 5학년 아이들 노래를 가르치는데, 한 아이가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야 아이의 이름은 ‘김상용’이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안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너무 안타까워 상용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꾸준히 말을 걸어도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2학기 때 다른 반의 담임을 맡게 되면서 차츰 상용이도 잊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걸까. 다음 해 담임을 맡게 된 6학년 우리 반에서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용이를 발견한 것이다. 놀라움은 곧 반가움과 미안함으로 교차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용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자’는 목표를 다시금 세웠다.
하지만 이 방법 저 방법 시도해 봐도, 상용이는 여전했다. 왜 말을 안 하는 걸까?
한 선생님이 상용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나 먼저 교원합창단에 들어가 보라 권유했다.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합창인데도 순간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본 것이다. 상용이는 5년 이상 말 한마디 안 했으니,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 그 두려움을 해소시켜주면 되지 않을까. 다시 시작이었다.
나는 먼저 집에서는 어떤지 궁금해 부모님과 통화를 시도해봤다. 놀랍게도 집에서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부모님은 학교에서 상용이의 상태에 무척 충격을 받으셨다. 역시 두려움이 문제였다면, 학교를 집처럼 편한 곳으로 만들어주면 어떨까.
그러려면 친구가 중요했다. 우선 사교성 좋은 아이들과 상용이가 같은 조가 되도록 하여, 조원들끼리 친해질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고맙게도 다른 조원들 모두, 알아서 상용이를 열심히 챙겼지만, 상용이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다음 생각한 것이 수화였다. 반 아이들 모두에게 수화를 가르쳤더니, 아이들은 수화를 재밌어하면서 서로서로 자연스럽게 수화를 사용했다. 상용이도 수화를 통해 ‘예’나 ‘아니오’ 같은 간단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상용이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 밝은 표정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계속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난타였다. 난타에는 중간중간 후! 하! 하는 간단한 후렴이 들어가니, 그것은 상용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후렴을 많이 넣었건만 그래도 좀체 입을 열지 않았던 상용이가, 어느 날 멋지게 ‘하!’ 하고 후렴을 넣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감격이란!
박남철 작. <Walk 45-13>
53×53cm, 목천에 수간채색
2012
그리고 어느새 9월이 되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계속 고민하던 중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분명 상용이가 집에서는 말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시도한 것이 전화 통화였다. 처음 아주 간단한 통화를 성공한 후, 그때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상용이와 전화 데이트를 했고, 어느 정도 전화 통화가 익숙해지자, 이제는 학교에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도 상용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곧 중학생이 될 텐데, 영원히 말을 잃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다시 나를 추스르고 상용이의 자신감 키우는 방법을 연구했다. 여태껏 상용이는 수업 시간에 한 번도 책을 읽거나 발표를 한 적이 없다. 말이 없다 보니, 친구들도 없었고, 점점 자신감도 잃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말이 없이 행해지는 무성극. 상용이는 서툴지만 적절한 행동을 취함으로, 나와 친구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어렴풋이 상용이가 아직 말은 못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상용이를 위한 작은 행동들이 서서히 결실을 거둬갈 즈음, 불행히도 나는 늑막염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출장 간 것으로 숨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입원 소식을 알아내고 말았다. 수술을 받은 날, 저녁 6시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그날 우리 반 아이들 5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3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그때 남아 있던 아이 중 유일한 남자아이가 상용이었다. 고마움에 일일이 아이들 손을 잡아주는데, 내가 손을 잡자마자 상용이가 글썽이는 눈으로 어렵게 “선생님! 괜찮아요?” 묻는 것이었다.
이런 기적이 있을까? 상용이가 스스로 말을 하다니. 눈시울이 차올라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상용이는 알았을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의 관심, 선생님의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졸업식 날, 아이들 모두 졸업가를 부르던 그 순간 상용이 또한 입을 열어 함께 노래했다. 상용이가 말하기를 잃어버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길고 길었던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5년 동안 말을 안 했으니, 그렇겠거니 단정 짓고 그대로 두었다면 지금쯤 상용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도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상용이가 나를 믿고 나를 걱정해 처음 입을 열었던 순간을.
산다는 건 죽는 날까지
씨앗을 심는 것
최복인 42세.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6년 전, 도시에 살다 시골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만난 친한 친구는 바로 건너에 사시는 할머니. 올해 아흔다섯이지만 우리 밭 한 켠에 콩 농사도 지으신다.
할머니는 시골로 이사까지 와 농사를 지어 보려는 젊은이가 신기한지 종종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신다. 말동무하러 오시기도 하고, 밭이 어떻게 되어가나 보러 오시기도 하고, 커피 한잔 하러 오시기도 하고, 가끔은 일을 도와주려고 오시기도 한다.
“이쯤엔 이런 씨를 넣을 때지.” “옛날엔 이렇게 농사했어.” “이번엔 이 농사 해볼까?”
이런저런 도움도 주고 말벗이 되어주시니 초보 농사꾼인 나로서는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늘 도움만 받다가 며칠 전엔 내가 가지고 있던 씨앗을 나눠드리게 되었다.
“겨우내 두었던 호박씨, 고추씨가 다 부실해. 호박씨는 쥐가 갉아 먹고 고추씨는 누렇게 떠서 심어봤는데 싹이 하나도 나지 않아. 혹시 씨 남은 거 있어?”
어머나, 나도 농부라고 나에게서 씨앗을 다 찾으시다니! 나는 신이 나서 보관하고 있던 호박씨, 고추씨, 오이씨를 드렸다.
“아이고, 바로 여기부터 올 걸 그랬구나. 그럼 진즉에 심었을 텐데.” 할머니가 몹시 좋아하며 씨를 받아 가셨다. 가시며, “농부는 죽을 때도 씨는 베고 죽는 건데 아무래도 내가 죽을 때가 됐는가, 원. 이제껏 한 번도 씨앗 관리를 이렇게 못하질 않았는데…” 하신다.
할머니께 씨앗을 나눠드리고 나니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을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씨앗을 선물로 받으면 참 기분이 좋았는데, 씨앗을 나누는 기쁨도 참 크구나 싶었다. 지금껏 내가 받은 씨앗들을 다 떠올려 봤다.
내가 처음 받은 씨앗 선물은 봉화에 사는 명지네서 받은 뚱딴지(돼지감자). 그 후 친구네 집에서 받은 고추, 야콘, 오이, 대파, 검은 찰옥수수, 남편 친구 어머님께 받은 찰옥수수, 친정에서 가져온 메주콩, 검은콩, 들깨, 토란, 삼백초, 호박, 부추, 마늘, 쪽파, 깨, 팥… 등등 쓰고 보니 참 많다. 씨앗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가. 씨앗 안에 한 해의 희망이 다 들어 있지 않았나.
박남철 작. <Walk 45-2>
112×162cm, 목천에 수간채색
2012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은 땅에 풀을 매고 씨앗을 심고 나면 오며 가며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싹을 보게 되면, 그날은 마구마구 가슴이 뛴다. ‘아, 살아 있었구나. 그래, 살아 있었어!’ 하며 씨앗이 살아 있는 생명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할머니 역시 한 줌 씨앗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너무나 좋아하셨다. 할머니에게 씨앗은 바로 그 ‘생명’이 아니었을까?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먹고, 이웃과 나누고, 팔아서 자식을 키우고 생활을 하게 하니 씨앗이야말로 할머니에겐 ‘참 생명’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늙으니 기력이 떨어지고 예전만큼 잘할 수는 없어도 자꾸만 일이 하고 싶어진다고 하신다. 그렇게 콩을 심고 팥을 심으며 말씀하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거 심으면 먹을 수나 있을는지. 그전에 죽을지 몰라도 사는 동안은 심어야지. 농사짓는 사람은 죽는 날도 씨를 베고 죽는다고 하니….”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다 보면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 두고 함께 지내고 계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하지만 또 아흔다섯이란 연세이심에도 하루하루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성실하게 사신다. 그런 할머니를 보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산다는 건 아마도 죽는 날까지 씨앗을 심는 것이리라.
도보 여행, 인생 3막의 씨앗이 되다
김효선 57세. 도보 여행가, 여행 작가
누구나 한 번쯤 혼자 떠나는 여행을 꿈꾼다. 나 역시 그랬다. 여행에 대한 나의 꿈은 어린 시절 읽었던 독일, 영국, 러시아 문학 전집에서 시작되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과 작가들은 대부분 생각이나 마음의 정리 정돈을 위해 산책과 여행을 즐겼다는 점이다. 어찌나 낭만적이던지…. 나도 이들처럼 산책은 즐길 수 있었지만 부모님의 엄한 단속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기는 힘들었다.
결혼을 해 독립을 하면 맘껏 내 삶을 살 것 같아 일찍 결혼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부이자 워킹맘으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동안 홀로 떠나는 여행의 꿈은 사라져갔다. 하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여행에 대한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한 15년 후쯤이면 아이들도 자립할 때이니, 홀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꿈은 이루어지기 힘들기에, 그때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우선 매달 3만 원씩 불입하는 적금을 시작했다. 목표는 1억 원. 정기적금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나의 비자금 통장들은 곧 희망이었다. 15년이 지나자 목표액에 가깝게 도달했다. 세계 여행을 하려면 영어가 필수이기에, 영어 공부를 할 생각으로 스스로 공부하면서 딸들의 영어 교습도 직접 했다.
드디어!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꿈을 펼칠 때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이해를 구하며 격려해주길 원한다고 했다. 모두 서운한 기색 없이 나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오십을 바라보며 혼자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 후 나는 괴테의 작품 속 배경을 따라서, 한겨울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로만로드를 따라서, 세계 전쟁사를 따라서, 음악과 문학 속의 무대를 찾아가며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두 달간 미국과 캐나다를 기차 타고 둘러보는 여행도 했다. 나는 무엇보다 걷기 여행을 좋아한다. 내게 걷기는 여행 수단이자 여행의 목표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걷기 여행은 2006년, 산티아고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이른 새벽 산 정상에 떠오른 태양이 만월을 밀어내던 장관이 생생하다. 내가 날마다 온몸으로 걷듯, 대자연도 매일 큰 몸짓으로 나의 세계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박남철 작. <Walk 45-봄 밤>
116.7×80.3cm, 목천에 수간채색
2012
나는 오지랖 넓게도 여기저기에 말을 붙여가며 35개국의 친구들을 만났다. 집에서 책이나 보다가 어쩌다 찾아오는 가족을 그리며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겠다며, 생애 마지막 긴 여행을 하던 사라예보의 철학자 할머니 두 분이 떠오른다. 그 길은 바로 유쾌한 사교장이자 배움의 장이었다.
그 후 일본 시코쿠의 88개 사찰을 순례하고, 20일간 스웨덴 쿵스레덴의 260km도 두 발로 횡단했다. 오랫동안 걷다 보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정리 정돈 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더 귀한 결과물도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고단한 발걸음으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은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용기와,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희망으로 가슴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여행을 한 지 9년이 되어간다. 나의 호흡과 같은 리듬으로 천천히 길을 걸으며 여행을 즐기는 지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음을 느낀다. 인생이 3막이라면 1, 2막 동안 난 늘 조연으로 살았다. 부모에 의한 삶과 엄마와 아내로 사는 삶이었다. 나머지 3막! 마지막 무대다. 이제 난 나를 위해 산다. 이제 나는 아이들에게 멋지게 늙어가는 삶을 보여줄 것이다.
몸이 아프기도 하지만 아픈 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살 다독여 회복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아내와 남편이 있다면, 서로에게 격려를 해주면 좋겠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 인생 3막을 잘 시작할 수 있도록, 젊은 시절 잃어버린 꿈을 찾아 잘 해볼 수 있도록 말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하다 보면 빙빙 돌려 말하거나 과장하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말이 말을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갈등은 쌓이고 오해가 점점 커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진솔하게’ ‘거품 없이’ 말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우리 모두 좀 어렵더라도 나 자신에게부터 솔직해지고 진심으로 말하기로 약속하면 어떨까요. 그것이 바로 소중한 인간관계의 첫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희 편집진 솔직하게 말씀드려봅니다.^^ – 편집진 올림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순 있지만 누구나 솔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실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무엇과도 비길 수가 없다. 솔직함은 겸손이고 두려움 없는 용기다. 잘못으로 부서진 것을 솔직함으로 재건한다면 그 어떤 폭풍에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것이 되리라. 가장 연약한 사람이 솔직할 수 있으며,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 테클라 매룰로 ‘고요히 머물러 사랑하기’
진실이 있는 말은 결코 장식되지 않고,
화려하게 장식된 말에 진실은 없는 법이다. – 노자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완전히 솔직해지려면 모든 것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려면 먼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음지와 양지’ 모두를 알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엘프리다 뮐러 카인츠
추하든 아름답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이 이상 든든한 출발이 어디 있으랴
– 칼릴 지브란
상대에게 바람 없이 말하기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말하기 상대를 귀히 여기며 말하기 가식 없이 말하기 내가 먼저 잘못했다 말하기 가르치려고 하지 않기 나를 위한 신세타령이나 헛말은 하지 않기 허황되지 않는, 지킬 수 있는 말하기 감사하며 말하기 등불을 밝히는 말하기 상대에게 유익하게 말하기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말하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하기 밝고 명랑하게 천진하게 말하기 살아 있는 말하기 살리는 말하기 따듯한 정으로 말하기 형제의 눈에 눈물 흘리지 않게 말하기 자신부터 먼저 돌아보고 하심이 되어 말하기 우주마음이 되어 말하기– 말하기를 떠올리며
뇌를 잘 쓰려면 정직해야 한다
세계적인 뇌과학자이자 가천의대 석좌교수 조장희 박사는 “두뇌를 계발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쓰고 싶다면 무엇보다 정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의 뇌를 촬영해 보면 뇌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뇌가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하면 다음 질문에는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그냥 말을 하면 되죠. 정직하게 살아서 정말 필요할 때 진짜 머리를 쓰는 게 중요합니다. 정도(正道)를 가면 정말 필요할 때 뇌가 에너지를 쓸 수 있습니다.”
묵은 마음 털어놓는 가족회의를 제안합니다
우리 가족은 설 명절을 앞둔 음력 섣달 그믐날 밤 11시에 온 가족이 모이면 가족회의를 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서로한테 섭섭하고 서운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겁니다. 부모, 자식, 며느리들도 마음에 쌓인 게 있는데 할 말 못 하면 갈등이 생겨 안 되겠구나 싶어 제안해서 시작한 게 올해로 벌써 18년째가 되었지요.
이 자리에선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말을 귀담아 들으며 질문을 던지는 등 중간자 역할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서운하고 힘들었던 당사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풀리고, 그 말을 듣는 상대방 역시 자초지종을 말함으로써 오해가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 이런 점은 고쳐나가야겠구나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가족회의를 통해 묵은 마음을 털어내고 새 마음으로 기분 좋게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은 더 화목해졌기에, 다른 분들께도 이런 가족회의를 제안합니다. – 김삼식. 70세. 경북 문경시 농암면
솔직한 대화,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첫걸음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심심치 않게 부딪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속마음을 얘기하면 ‘속 좁아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감정이 상하면 두고두고 불편해하며, 어느 순간 응어리진 감정이 시한폭탄처럼 나를 압도할 때가 있다. 그런 마음에 휘둘려 사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배려한다며 돌려 말했지만, 오해는 더 커졌다. 좀 무뚝뚝해 보여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오해 없이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 엔지니어로서 개발자와 일할 때였다. 근데 그 사람의 말투나 표정에 감정이 상해 같이 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 자리를 피했다. 그 순간 내 마음엔 ‘회사를 그만두던가, 아니면 직접 대면하지 말고 모든 것을 문서와 메일로만 하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문득 그 개발자와 얘기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솔직히 내 마음을 밝히고 상대방의 심정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님, 아까는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같이 일하다 보니 문득 제가 하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님과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방도만 생각하게 되더군요. 왜 서로가 얼굴을 붉히면서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말하자 그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겉도는 얘기를 했지만, 피하거나 핵심을 먼저 꺼내지 않고 계속 듣기만 했다. 그랬더니 그 역시 잠시 후 지금까지 한 얘기는 모두 핑계였다며 회사 생활의 힘든 점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매일 출근하면서 짜증 내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잘되지 않는다며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글썽거려 참느라 힘들었다.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순간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 거기서 비롯된 분노…. 아마도 그의 감정에서 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나 보다. 그는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 역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우리는 서로 진심을 담은 악수를 나눴다.
– 왕지상. 38세. 회사원. 서울시 강남구 일원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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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스마트폰 가입자 수가 3천만 명을 넘어섰다. 급속도로 확산된 스마트폰과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 접속이 가능한 환경 덕분에 우리는 24시간 통화는 물론 무료 채팅, SNS, 웹 서핑 같은 다양한 방식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사람 간에 직접 만나거나 통화를 하는 일은 점점 줄고, 설사 만나더라도 각자 손바닥만 한 기계를 들여다보느라 대화가 뚝 끊어지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눈앞에 대면하고 있는 가족보다는 스마트폰이 우선이 되어버린 것.
이러한 ‘스마트폰의 부작용’ ‘스마트폰의 문제’를 인식하고 잠시 스마트폰과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엔 약간의 불안함, 고립감을 느끼지만, 점점 눈앞에 있는 현실과 사람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스마트폰의 문제를 스스로 인정한 적이 있다면 잠시 ‘온라인 피로’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과의 진짜 친밀함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봄이 어떨까.
스마트폰의 폐해, 집중력 저하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는 100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비슷한 분야의 업무일 경우,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국 뇌가 끊임없이 두 가지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일 뿐이었다. TV를 보며 라디오를 들었을 때 두 가지 내용 중 하나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SBS 스페셜> 제작 팀은 종이와 스마트폰, 컴퓨터 모니터상의 문서를 놓고 어떤 것이 더 기억에 잘 남는지를 실험해 보았는데, 종이에 비해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읽었을 때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내용 이해력과 기억력도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크린을 통한 정보는 종이에 비해 시선이 훨씬 분산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끊고 살기’가 가져온 변화
‘스마트폰은 여자 친구이자, 엄마이자, 보물’이라는 신인 연기자 김주혁(27)씨는 연기 연습을 할 때 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대본도, 영상도 모두 스마트폰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습하다가도 메시지나 알림이 오면 답장하랴,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도무지 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마트폰 없이 2주일간 살아보기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허전함, 지루함, 불안감이 컸지만 곧 아날로그 생활에 적응하게 되면서, 친구, 부모님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졌으며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고 소통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연기 지도 교사는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연기에 대한 집중력과 감정 몰입 등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거리 두기 생활 백서
① 스마트폰도 일종의 기계일 뿐
정보 검색, 게임, 심심풀이 웹 서핑 등 기계(스마트폰)를 사용할 때마다 용도를 객관적으로 따져보고 TV나 라디오를 켜고 끄듯이 사용 시간을 조절해 본다.
② 무료 채팅, SNS 알람 꺼두기
정말 급한 용건은 전화가 오기 마련이다. 알람을 꺼놓고 몇 시간 동안 지내보면 별일 아닌 것에 조급증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 이걸 계속 목매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성공이다.
③ 일반 알람시계 사용하기
스마트폰을 머리맡에 두고 자면 건강에도 안 좋을 뿐더러 웹 서핑, 게임 등으로 취침 시간이 늦춰진다. 스마트폰 대신 알람시계를 활용하거나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 본다.
④ 일주일에 반나절 스마트폰과 이별하기
일주일에 반나절 정도 스마트폰을 꺼놓는 시간을 정해보자. 아예 전화기로 무언가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좋다. 학생들은 평일, 직장인은 주말 오후 정도는 스마트폰 없이 지내보면 집중력, 업무의 효율성이 올라갈 뿐 아니라 가족 간의 소통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강의실 전체, 회사 부서 전체가 함께 실천하면 더욱 좋다.
정리 문진정 & 도움말 허강일 <SBS 스페셜> PD
참조 ‘달콤한 로그아웃, 아날로그 날다’ <SBS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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