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부랑 할머니의 사랑, 뜨개질
최영주 47세. 조경가.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잘 보거라. 양손에 하나씩 대바늘을 잡고, 왼손 오른손 번갈아 가며 구멍을 따라 바늘을 넣었다 뺐다 하면 이런 모양이 떠진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옆에 찰떡같이 붙어 앉아 할머니의 뜨개질하는 모습을 즐겨 보곤 했다. 특히 할머니의 손놀림이 빨라지면 질수록 그 즐거움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북슬북슬한 털실이 할머니의 손을 만나면 갖가지 모양의 보물로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해 보이는 벙어리장갑, 목을 몇 번이나 두르고도 남는 긴 목도리, 손등까지 푹 덮어주는 털스웨터, 두툼한 고무줄로 허리춤을 마무리한 털바지, 양말 위에 덧신을 수 있는 털양말까지. 그것들을 모두 갖춰 입는 날에는, 마치 할머니의 품에라도 안긴 듯 따뜻하고 포근하여, 한겨울의 추운 날씨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뜨개질이 끝나면 할머니는 으레 그것들을 비닐봉투에 담아 들고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 손주들 집을 방문하셨다. 그걸 입고 좋아라 할 손주들을 보는 게 할머니에게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 어려워 걷는 내내 할머니의 뒤만 쫓아 걸어야 했지만, 씩씩하고 행복해 보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나 역시 씩씩하고 행복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내가 한 여덟 살 때부터인가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면서 잠깐씩 멈추는 일이 잦아지셨다. 뜨개질하던 손에서 대바늘을 내려놓고 눈을 비빈 후 다시 뜨개질을 하고, 그러다가 조금 후 다시 눈을 비비시고. 날이 갈수록 뜨개질하는 시간보다 눈을 비비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이상 뜨개바늘을 잡지 못하게 되셨다.
‘할머니는 내가 입고 있는 이 털옷들과 시력을 맞바꾸신 거다’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그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할머니가 오래도록 내 얼굴을 볼 수 있고, 맛난 음식을 눈으로 보면서 드실 수 있으며, 언제든 불편 없이 화장실을 가실 수 있는 거였다. 할머니의 행복을 빼앗아갔다는 죄책감에 우울해 있는 나를 어느 날 할머니께서 부르셨다.
“아가, 털실과 뜨개바늘을 가져다주렴. 아마 장롱 서랍 어딘가 전에 쓰다 남은 실뭉치가 있을 게다.” 나는 혹시 말씀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가, 너 거기 있는 거니? 있으면 실타래와 뜨개바늘을 가져다주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실타래는 왜 찾으시는 거지?’ 나는 재빨리 장롱으로 달려가 서랍을 열었다. 진홍빛 실타래가 그 안에서 오래도록 주인님이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나를 맞이했다.
“할머니, 여기요!” 나는 벅찬 가슴으로 뜨개질 꾸러미를 할머니께 건네 드렸다. “그래, 고맙구나.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사십 년이 흐른 지금, 할머니의 몸은 심하게 구부러져 예전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지팡이 없이는 걸음조차 힘들지만, 완전히 잃은 시력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여전히 뜨개질을 하신다. 할머니가 평생 사랑해왔던 뜨개질을 눈이 아닌 손으로 보면서…. 할머니는 이제 실을 직접 고를 수도, 화려한 문양을 마음껏 넣을 수도, 빠른 손놀림으로 갖가지 것들을 완벽하게 짤 수도 없지만 할머니의 뜨개옷은 여전히 포근하고 곱다.
“실 색깔이 아무래도 좀 어두워 보이는데 괜찮겠냐?”
홍찬석 작. <Dream>
30×40cm, Mixed media
2010
환하디 밝기만 한 털실을 만지면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어, 그래요? 그럼 다른 색으로 할까요?”
실을 전혀 볼 수 없으면서 능청스럽게 말씀하시는 할머니께 이제는 나도 넉살스럽게 응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할머니를 통해 ‘앞을 볼 수 없음’이 ‘삶의 기쁨마저 볼 수 없게 만들진 않는다’는 걸 배웠으니까.
“그럼 지팡이를 좀 가져다주렴. 이 할미랑 실타래 사러 가자.”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 발씩 조심스레 내딛는 할머니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힘에 겹다. 더 이상 힘차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심지어 심하게 꼬부라져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꼬부라진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찌 흉해 보일 수 있으랴. 거기에는 지나온 약 백 년의 삶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이번엔 내가 할머니의 구부러진 등이 시리지 않게 따뜻한 등덮개를 하나 짜드릴 차례이다.
자꾸만 커져가는 그 걸인의 뒷모습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2008년 문천 지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온 나라가 재해 지구에 뜨거운 사랑의 손길을 보내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거리에서는 적십자 회원들이 모금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하루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거리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걸인이 나타났습니다. 삼검불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어깨에는 볼모양 없이 더러운 가방을 메고 한손에는 깡통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 걸인이었습니다.
땟국이 줄줄 흘러내리는 걸인이 나타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보기 싫은 비렁뱅이라고 한쪽으로 피하는데 그 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룩거리며 모금함으로 다가오더니 깡통에 담긴 얼마 안되는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모조리 모금함에 쏟아 넣는 것이었습니다.
돈이라고 해야 구겨진 1원짜리 서너 장 그리고 50전짜리, 10전짜리 각전이 여남은 개, 모두 합해야 10원도 안 되는 부스럭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결코 적거나 가벼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억만 부자가 내놓은 거액의 돈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구걸로 연명하는 걸인, 더구나 장애인 걸인에게는 그 보잘것없는 푼전이 주린 배를 달래여 목숨을 이어주는 소중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구걸한 푼돈을 모금함에 쏟아 넣는 걸인의 모습, 그것은 걸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인간 사랑이 강력한 빛을 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은, 평시에 걸인을 깔보았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걸인은 비록 빌어먹고 사는 가련한 몸이지만 나라에서 당한 재난을 알고 그것을 관심하는 국민의 한 조각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걸인의 뒷모습은 마치 노신 선생이 <사소한 사건>에서 먼지투성이의 인력거꾼을 찬미한 것처럼 ‘찰나에 우뚝 솟아 보이더니 그가 걸어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홍찬석 작. <In Dream>
160×130cm, Mixed media
2011
그 뒷모습은 나의 양복 속에 숨어 있는 남을 경시하는 글쟁이의 못된 버릇을 꼬집으면서 나의 마음을 비춰보는 커다란 거울로 안겨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불행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이런 사랑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그 걸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동네를 훈훈하게 만드는 열과 빛이 어떤 것인가를 무언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이 꽤나 지나간 오늘도 자꾸만 커지는 그 걸인의 뒷모습을 이렇게 그려보고 있답니다.
483
우리 가족의 뒷모습은
김은선 14세. 학생. 부산시 북구 만덕3동
안녕하세요. 저는 14살의 여학생입니다. 태어날 땐 정상이었는데 6살 때부터 다리가 굳어가는 근육병에 걸렸어요. 그때부터 치료를 받았으면 지금쯤 걸어 다녔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3년 늦게 들어가 중학생 1학년일 나이에, 지금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학교생활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지금 2~3년째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근육병의 진행성이 멈춰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힘들 때도 많았지만, 제가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가족 덕분입니다. 엄마, 아빠, 언니. 저는 늘 가족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저 때문에 힘든 일도 많이 겪으시고, 고생하시고. 그래서 우리 가족의 뒷모습을 보면 왠지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하나뿐인 언니는 저랑 7살 차이가 납니다. 언니가 동생을 갖고 싶어 해서 제가 태어났을 때 되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언니는 학교 갔다 오면 제일 먼저 저한테 달려와서 안아주고, 젖병 물려주고 놀아주었다고 해요. 커가면서 제 고민도 다 들어주었지요. 힘내라고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오답노트도 만들어주었어요. 간혹 친구들이 놀리고 하면, 항상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근데 언니가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안에 도움을 주겠다며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구하는 중입니다. 많이 속상하지만, 나중에는 언니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니, 종종 언니한테 대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언니를 좋아하는 거 알지. 늘 도와줘서 고마워. 이제 나도 14살이니까 언니도 고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잘 들어줄 자신은 있으니까. 언니의 뒷모습은 어색하지 않고 언제나 이름 불러보고 싶은 뒷모습입니다.
엄마도 오래전의 사고로 몸이 좀 불편하십니다. 하지만 요리도 잘하시고, 늘 가족들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십니다. 늘 부족한 저를 지켜봐주시고 잘되라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가끔 공부해라, 그런 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한마디가 제 미래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홍찬석 작. <The Windows>
116.8×91cm, Mixed media
2008
엄마, 엄마가 잔소리할 때 가끔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엄마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잘 알아. 엄마의 뒷모습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고 싶은 뒷모습입니다.
아빠는 우리 집에서 혼자 돈을 버십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10년 넘게 다니는 회사에 한 번도 결석 안 하시고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차에 치여서, 많이 다치셨어요. 그래도 일할 거라면서 병원도 안 가고 회사에 가셨습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회사 가겠다고 신발 신고 나서시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도 무릎이 아프신데도 그냥 보호대만 착용하시고 일을 하십니다. 주간, 야간으로 일하시면서 언제나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아빠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아빠, 우리 가족을 위해 힘들어도 아파도 일해 주셔서 감사해요. 가끔 상 타오는 저에게 오천 원씩 주시고, 아직 공부 실력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할게요. 아빠의 뒷모습은 어깨가 무거워 보이지만 힘을 내는 뒷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의 뒷모습은 떨어져도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밝게 사는 뒷모습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크면 언니, 엄마, 아빠에게,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노총각, 그의 뒷모습에 감동하여
결혼 결심하다
김종수 38세. 인쇄기획사 운영. 전북 김제시 요촌동
난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평가받는 종족(?)에 포함된 이른바 노총각이다. 노총각은 힘들다. 외로운 건 둘째 치고 어딜 가든 “장가 언제 가?”라는 식상하면서도 언제 들어도 거슬리는 질문부터, 미혼이라는 이유로 각종 혜택에서 배제되는 상황까지, 노총각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불이익은 제법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결혼을 안(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좀처럼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티격태격하는 부부들이 태반이고, 친구들 역시 퇴근 후의 시간을 아내와 보내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늦게 들어가려고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휴,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는데, 차라리 서로 최대한 안 보는 게 상수다”라면서. 뭐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이 왠지 씁쓸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나에게 ‘나도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전 친구와 삼겹살집을 갔을 때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손님들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손님이 있었다. 체크무늬 남방 하나를 걸친 채 혼자 테이블에 앉아 고기를 굽는 중년 남성이었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신기하게도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정성스럽게 고기를 구웠다.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잘 구워서 줄까지 맞춰서 불판 구석에 고기를 세워놓는 모습과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주병을 번갈아 보노라니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냥 대충 먹지, 혼자 먹으면서….’ 친구랑 고기를 먹으면서도 자꾸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 뭐랄까 외로워 보였다.
‘저분은 뭐 때문에 이런 시간에 혼자 저렇게 고기를 먹고 있을까? 얼마나 심심하면 고기를 구우면서도 먹지도 않고 줄 맞추기를 하고 있을까?’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반전이 일어났다. 고기를 굽던 그 아저씨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어떤 중년 여성을 조심스레 모시고 들어오는데 임신을 하고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한눈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중년 남성은 임신한 아내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해 고기를 예쁘게 굽고 있던 것이었다.
“어머! 미리 구워놓은 거야?” 여성은 감동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보더니 이내 고기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남성은 그런 여성을 사랑스러운 듯 지그시 바라보면서 옆에 놓인 소주를 한 잔씩 따라서 마실 뿐이었다. 고기와 밑반찬이 떨어질세라 틈틈이 챙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제야 보이는 행복해 죽겠다는 듯한 아저씨의 뒷모습.
홍찬석 작. <Three Vases>
116.8×91cm, Mixed media
2008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친구가 “왜 혼자 실실 웃냐?”고 면박을 줬지만 이상하게 비실비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본다고, 결국 나는 아내를 기다리며 신나게 고기를 굽는 아저씨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본 게 아닌가. 결국 나는 오늘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내 마음 상태를 보고야 만 것이다.
아내는 고기를 먹으며 무슨 얘기인가를 끊임없이 하고, 남편은 미소 띤 얼굴로 아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고기를 다 먹은 후 팔짱을 꼭 끼고 나갔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솔직히 친구나 선배들로부터 결혼하면 다 똑같다는 말을 내내 듣던 나로서는 그 중년부부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맞아. 뭐든지 자기 하기 나름이지”라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내 용기 없음을 남들 사는 모습에 핑계 대지 말아야겠다. 이제 정말 용기를 내고 싶다. 한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용기를.ㅎㅎ
아버지의 뒷모습
김재숙 68세. 경기도 고양시 마두2동
교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되어 가나 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중고등학교 교사직을 40년 가까이 짊어지고 있다가 내려놓고 나온 지 벌써 5년.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어찌할 수 없을 때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친정으로 발길을 옮기곤 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가기만 하면 얼씨구나 하고 반겨주셨다. 어머님은 모처럼 제 발로 걸어온 딸이 애처로워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시고, 아버님은 내가 왜 왔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일까?
“앉아라. 여기, 여기가 따뜻해” 하시며 엄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앞세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지난번에 너를 괴롭힌다던 그 ○○ 선생님은 좀 나아지셨나?”
지나가는 투로 말을 시작하시면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특히 내가 어떻게 누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를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약간 머리를 수그린 채로 조용히 듣고 계셨다.
때로 “어디 사람인데?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데?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 등의 간단한 질문을 하셨다. 한참 열변을 토하고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어머니의 밥상이 문지방을 넘는다.
“어서 밥 먹자.” 아버지 말씀이 아니더라도 배도 고프고 기운도 빠지고 허기가 진 터인데, 밥상엔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조림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과 밥이 있었다.
늘 식은 밥과 밑반찬 몇 가지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다니는 학교생활이 아닌가? 어머니께서 갓 지어주신 음식은 나의 모든 시름을 거두고도 남아서 나는 온몸에 새로이 솟는 신기한 기운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곤 하였다.
“얘, 나랑 같이 가자. 소화도 시킬 겸 역까지 갔다 와야겠다.” “아이구 아버지, 어두운데 어딜 가셔요? 그냥 들어가셔요.” “아니다. 너도 가는데 내가 왜 못 다녀? 괜찮아. 어서 가기나 혀.”
가다 보면 아버지가 앞장을 서신다. 아버지는 등산을 많이 하셔서 걷는 걸 좋아하시고 젊은이 못지않게 잘 걸으신다. 어느 핸가 우리 육 남매와 사위 며느리 손자들이 모두 도봉산에 올랐는데 아버지께서 훌훌 날다시피 산을 오르시는 것을 보고 사위들이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그때 내 기분이 엄청 좋았다.
어느새 안국역 종로경찰서 앞 6번 출구까지 다 왔다. “아버지, 이젠 돌아가셔요. 다 왔네요.” “그래, 걱정 말고 어서 내려 가.” 아버지는 손 인사를 하신다. 내려가다 뒤돌아보니 아버지께서 그대로 서 계신다. “아버지 조심해서 가셔요.” 다시 한 번 크게 인사를 한다. “어서 가기나 혀. 내 걱정 말고.”
홍찬석 작. <Village in Dream>
116.5×72.7cm, Mixed media
2012
말이 사십 년이지 그 기나긴 나의 전 생애를 학교에서 보내며 교장이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어찌 나 혼자의 힘이라 할 것인가? 나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같은 성격과 조급함을 지그시 눌러주고 감추어주면서 나의 사십 년을 지켜주신 분이 아버지시다.
말씀이 별로 없어서 학창 시절에도 일체 간섭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내게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은 늘 정면이 아닌 뒷면이었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를 위해 아들을 키워주신 정 때문인지 아버지는 우리 집에 자주 오셨다. 전철로 한 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나는 전철역으로 배웅을 나갔다. 개찰구에서 표를 넣고 내려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왜 그런지 가슴이 뭉클하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더워졌다.
이윽고 되돌아보시며 손을 흔드시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얼른 얼굴을 돌리고 돌아섰다. 층계를 내려서 홀로 돌아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왜 그리도 외롭게 느껴진 것일까?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삼대독자 외아들로 자라셔서 외로움이 몸에 밴 것일까?
사업에 성공하셨다면 성공하신 분이다. 이남사녀 육 남매를 두시고 며느리와 사위와 손자가 주렁주렁 한여름 고구마밭처럼 풍성하게 뻗어간 집안이다.
그래도 일제 강점기 때 어머니를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시고 만주로 어디로 떠돌던 아픔과 외로움이 몸에 밴 것일까?
이제 아버지는 내일모레가 구십이라고 하신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님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아버님의 뒷모습은 늘 외로움에 젖어 있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버지의 뒷모습에 내 설움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482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 듣기가 어디 쉬운가요. 상대방이 말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생각은 딴 나라(딴 세상)로 가버리기 일쑤인 걸요. 사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면, 잘 듣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이청득심(以廳得心), 귀 기울여 들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처럼, 잘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비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지혜를 모아보았습니다.
– 편집자 주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과 멀어지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과 멀어진다. – 헬렌 켈러
서로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다. – 레베카 폴즈
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 칭기즈칸
진정한 경청이란 선입견이나 신념, 가치 판단, 개인적인 흥미를 접어두고 상대의 시각과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경청은 경의의 다른 표현이다.
–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장민숙
“힘들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주위 사람이었어요. 내가 힘들다고 얘기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일 때 조용히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나에게 말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어요. 그냥 조용히 내 옆에 있어준 사람들 덕분에 힘을 냈죠.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가 돼요. 고통을 들어주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거예요.
누구나 누구에게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말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사람이 없어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뭘 하라고 시키는 사람만 있고 뭘 하고 싶은지 들어주는 사람이 없죠. 사상이 뭔지 얘기하는 사람만 있고 듣는 사람이 없어요. 난 사실 그런 역할을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들어주는 역할, 옆에 있어주는 역할이요.”
– 김제동. <당신, 이제 행복해도 됩니다>
(시드페이퍼) 중에서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 올리버 웬들 홈스
“그는 너무 많이 말한다”라는 말을 자주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이 듣는다”는 비난을 들어본 적은 없다.
– 노만 아우구스틴
흔히 설득하려면, 자기 주장을 논리적으로 잘 펼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수많은 영업의 달인들은 반대로, 먼저 고객의 이야기를 들어주라 말한다. 실제로 EBS 다큐프라임 <16인의 성공 도전 설득의 비밀> 2부(2009.5.26.)에서는 16명의 도전자들에게 재밌는 실험을 하게 한다.
도전자를 상담원과 의뢰인으로, 다시 상담원을 친절, 불친절한 상담원으로 나누어 대화하게 하는 것. 결과는 흥미로웠다. “그게 고민이라는 거예요?” 의뢰인들은 불친절한 상담원들 앞에서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잘 들어주는 친절한 상담원과의 대화에서는 마구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미션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그러한 간단한 장치 앞에서도 인간은 속수무책이라는 것. 그게 경청의 힘이라고 방송은 결론을 내린다.
데일 카네기는 ‘절대로 사람은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 했다. 이긴다 해도, 진 상대는 자존심에 상처받고, 그 의견은 바꾸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서 논쟁을 피하고, 대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말한다.
들어주기는 대인 관계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정말 온 힘을 다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내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어도, 결국 내 얘기를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선생님들은 나의 필터링되지 않은 온갖 고민과 잡념들을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셨다. 적재적소에 터져 나오는 선생님의 “맞아” “정말 그래”라는 말씀이 그렇게 맛깔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한 후 나설 때면, 나는 온전히 이해받았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고민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내가 말한 것을 누군가가 열심히 들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 김영서. 22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아내의 말을 다정하게 들어주는 남편 한번 되어볼랍니다!
부부간의 다툼은 대부분 사소한 일이나 싸울 일도 아닌 일상의 대화에서 시작하지요.
부끄러운 제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루는 아내가 친구 부부가 해외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사는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그 집 아이들이 외국 문화를 쉽게 접하며 사는 것도 좋아 보인다고 하더군요.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가 얼마나 가고 싶기에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과 가고 싶어도 갈 시간도 돈도 부족한 제 현실에 슬슬 한쪽이 꼬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아내에게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아 실천하지도 못할 말들을 내뱉습니다. “우리도 해외여행 가자! 가면 되지!” 하구요. 하지만 아내는 현실적이었습니다. 돈도 없고 휴가도 못 낼 거면서 왜 그런 말들을 하느냐고 핀잔만 돌아왔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저는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죠. 아내도 누가 해외여행 가고 싶어 그런 거냐고 화를 냈고 부부 싸움이 돼 버렸습니다.
아내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 친구 사는 모습이 부럽다고 얘기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게 그거 아니야?” “가고 싶은데 못 가서 짜증 내는 거 아니냐?”며 화를 냈습니다. 전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저의 무능력을 원망하는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뒤에 아내가 “뭘 해달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들어줄 수 없어?” 하는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습니다. 아내가 바라는 건 그저 자기 얘기에 동조해 달라는 것임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냥 “우와! 걔들 참 좋겠다. 부럽다 그치?” 하면서 호응해 주면 되는 것을, 제 자신을 무능력자로 만들고 화내면서 머릿속은 휴가 때 해외여행 계획까지 짜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듣기를 정말 못 했던 겁니다. 아내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었으니까요.
해외여행 자주 가는 친구네가 부럽지만 그래도 친구 남편보다 내 남편이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내 남편이라는 아내의 말에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와의 행복한 삶을 꿈꾸기에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같이 부러워해주며 우리의 행복한 앞날을 함께 계획했다면 싸우지 않았을 것이란 걸 싸운 뒤에야 깨달은 것이지요. 아내에게 뭐든 해줄 수 있는 슈퍼맨이고 싶은 남자의 욕심과 자존심은 빼고, 아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노라 다짐해 봅니다. 아내는 선물을 가득 안겨주는 능력 있는 남자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다정한 남편을 원할 테니까요.
– 황재범. 38세. 대구시 북구 복현동
한국의 다문화 가정이 40만 가구를 넘어섰다. 특히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가정은 출산율이 점점 줄어드는 데 반해 다문화 가정의 출산율은 급격히 높아져,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초등학생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학교에서는 새로운 ‘인종차별’ 문제를 겪고 있다. 집단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자퇴를 하거나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는 학생도 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차별방지법’을 만들거나 ‘다문화가정지원센터’의 수를 늘리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타민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차별을 얼마나 용인하고 있을까. 스스로 다문화, 인종, 학력 등의 편견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40여 년 전, 미국에서는 차별을 실제 겪음으로써 내재된 차별 의식과 선입견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깨닫게 하는 실험 수업이 있었다. 이 실험을 경험한 아이와 어른들의 인생은 크게 변화되었다.
이 실험은 ABC TV 다큐멘터리 <폭풍의 눈(Eye of the Storm)>을 통해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수업 때문에 교사 엘리어트는 실험 방식이 비윤리적이고 가혹하다, 차별하지 않는 다수에게 죄책감을 갖게 한다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을 통해 온전히 상대 입장이 되어봄으로써 차별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상처와 수치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고,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수업을 받지 않은 또래에 비해 인종차별적 태도가 덜하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차별 수업에서 느낀 경험이 나의 편견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나’가 있는 한 ‘상대 입장 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편의대로 ‘다문화 가정’ ‘이주노동자’라는 단어로 집단을 구분하고 고정관념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이 용기 있는 미국인 교사의 실험은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 마음의 낡은 습관을 한 번이라도 꺼내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차별의 날’ 수업
미국 아이오와 주 라이스빌의 교사 ‘제인 엘리어트’는 1968년, 흑인의 인권을 위해 싸웠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을 계기로, 초등학교 3학년인 자신의 학생들에게 독특한 수업을 진행했다. 눈동자 색으로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첫째 날 갈색 눈의 학생들이 푸른 눈의 학생들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하고 특혜를 주었고, 다음 날은 반대로 푸른 눈의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한 것이다.
첫째 날 특혜를 받은 갈색 눈의 아이들은 교실 앞쪽에 앉고 밥도 먼저 먹었으며 쉬는 시간도 더 길었고, 열등하다고 딱지를 붙인 푸른 눈의 아이들에게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았다.
“교실에서 뭘 배웠는지 기억이나 하고 있니?”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은 초대받지 않으면 갈색 눈을 가진 사람과 함께 놀 수 없어.”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은 쉬는 시간에 운동장의 큰 놀이 기구에서 놀면 안 돼. 그리고 작은 놀이기구도 교실 밖으로 갖고 나가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한 시간쯤 후, 푸른 눈의 아이들은 정말 열등한 사람처럼 행동했고 몇 시간 후에는 어떤 아이가 갈색 눈인지 한눈에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갈색 눈의 아이들은 행복했고, 눈이 초롱초롱했으며, 학업 능률도 전보다 크게 올랐다. 반면 푸른 눈의 아이들의 자세와 표정은 비참했고 학업 능률도 급격히 떨어졌다.
다음 날 역할은 뒤바뀌었다. 전날 신이 났던 아이들은 몇 분 사이에 불안해하고 우울해했고 화를 냈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엘리어트는 같은 실험을 반복했고 결과는 비슷했다.
차별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의 이야기
“차별이란 사람을 그가 한 일이 아닌 피부색으로 판단하는 걸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를 학교에서 배웠다.” – 캐럴 앤더슨
“나는 미칠 것 같았다. 푸른 눈을 가진 아이들을 꽁꽁 묶어버리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뭐든지 먼저 했고, 우리는 뭐든지 나중에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차별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 데비 앤더슨
“금요일에 우리는 차별을 실험했다. 갈색 눈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일을 먼저 했다. 내 눈은 푸른색이다. 나는 갈색 눈의 아이들을 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을 발로 차고 싶었다. 학교도 그만두고 싶었다. 갈색 눈을 가진 사람들은 쉬는 시간도 5분 더 받았다. 나는 차별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별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평생 화난 채로 살고 싶지 않다.” – 시어도어 페르진스키
정리 문진정
참조 도서 <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터스 지음 |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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