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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남자

 

 

 

 

 

 

가을이 석류의 계절인 이유는, 석류알 같은 선홍빛 추억이 가을 속에 송송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날 시내 다방에서 독서회 정기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토론을 벌이다가 늦은 밤 헤어졌다. 나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음을 바꾸어 혼자 걸었다. 무심하게 스치는 차량 불빛을 바라보며 최백호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를 흥얼거렸다.

‘♪…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그 대목에서 노래가 끊겼다. 명색이 내 십팔번인데도 불구하고 다음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미 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뜻 고개를 들어보니 초량삼거리 정발 장군 동상이 보였다. 장군님 무엇이 진실입니까. 문학과 진실은 어떤 사이입니까. 나는 집요하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정발장군은 들은 척 만 척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어느 가게 앞에 비어 있는 평상에서 쉬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총각! 쫌 일어나 보소!”

누군가 흔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떤 아줌마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줌마 얼굴 뒤로 환하게 밝은 하늘이 보였다. 행인이 오가는 시장 골목 근처였고 나는 평상 위에 곱게 누워 있었다. 아줌마는 빗자루로 가게 앞을 쓱쓱 쓸며 ‘자기 집 안방처럼 잘도 주무시더라’고 말했다.

어쩐지 누운 자리가 편안하더니, 나는 평상에 누워 별을 보다가 잠에 똑 떨어진 것이다. 이 남우세스러운 상황을 어쩌나. 일단 거처를 빌어주신 주인아줌마에게 넙죽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데 아줌마가 내 소매를 잡았다. “용기 잃지 말고….”

가게 아줌마가 무슨 봉투 같은 것을 호주머니에 찔러주었다. ‘뭘 이런 걸 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앉으니 밤새 놓아버린 정신이 슬금슬금 돌아왔다. 한숨을 돌리고 아까 받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초대장이었다. 초대장 앞면에 후광이 빛나는 하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교회 성령대부흥회.

졸지에 동정을 받게 된 내가 한심했다. 심호흡을 하고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 아! 나는 온데간데없고 웬 굴뚝 청소부 아저씨가 비춰졌다.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니 시커먼 검정이 묻어나왔다. 밤새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을 온몸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 모습은 분명 사랑의 실패자 아니면 인생의 낙오자, 아무리 좋게 봐도 꾀죄죄한 노숙인에 지나지 않았다.

석류 빛깔처럼 부끄러운 추억이다. 하지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또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밤늦게 혼자 술 마실 일도, 무작정 어디론가 걷는 일도 없어졌다. 허겁지겁 바쁘고 고단한 일상일 뿐이다. 아주 가끔씩은 나그네처럼 막연한 쓸쓸함도 괜찮은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하다. 예전에 노숙인의 쓴맛을 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게 아니다.

가을이라서, 남자의 계절이라서 그런 거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캠퍼스 농사꾼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황윤지 25세. <청춘액션플랜>의 저자

‘스펙’과 ‘취업 전략’이 난무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나는 2년 전부터, 그것도 대학 캠퍼스에서 친구 몇 명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름 하여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줄여서 ‘씨앗들’이다. 처음엔 ‘깨작깨작 호미질을 하고 싶다, 내가 키운 것을 맛보고 싶다, 학교 땅을 맘대로 쓰고 싶다.’ 뭐 이런 단순한 호기심과 무모한 당돌함에서 시작했던 이 소소한 일들이 결국 지금까지 왔다.

2010년 봄 시작된 우리의 첫 텃밭은 고려대 캠퍼스 한구석의 손바닥만 한, 한가운데 언제 잘렸는지 모를 나무 그루터기가 있는 버려진 땅이었다. 철사부터 화염병 조각들까지 한 무더기의 폐기물 골라내기를 수차례 거듭한 뒤에야 드디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한 삽 한 삽 땅을 파내 두둑과 고랑을 만들고, 씨감자를 나란히 심는 그 순간, 얼마나 신기하고 거룩했는지 너무나 신이 났다. 그다음 주에는 다시 모여 상추와 청경채, 당근 씨앗을 뿌렸다. ‘설마 진짜 여기서 감자, 당근이 생길까?’ 의심하면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올라온 싹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은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와 기쁨으로 다가왔고 이 텃밭의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처음으로 밭에 말라 있는 작물들 걱정에 비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처음으로 오이와 호박이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처음으로 물 조리개를 들고 여러 시간 밭에다 물을 주었다. 처음으로 땅콩 잎이 그림처럼 예쁘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으로 퇴비가 더럽지 않다는 것을, 씨앗이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처음, 처음. 모든 게 다 처음이었으니, 어느 하나 가치 있지 않고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창 재미를 붙여가는 와중에 힘들게 경작한 땅을 빼앗기는 일도 많았다. 대학은 빈 땅에 농사를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발각되어 땅을 빼앗겨 버리면 또 다른 땅을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

황윤지(25)씨는 2010년부터 친구들과 함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캠퍼스 한쪽에 작은 텃밭 가꾸기’ 프로젝트를 해오고 있다. ‘레알텃밭학교’라는 텃밭 강좌도 만들어 5학기째를 맞고 있으며, 현재 고려대, 이화여대, 충남대 등 모두 7개 대학에서 텃밭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우왕좌왕한 시도 속에서도 젊은 패기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았나 보다. ‘이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동기가 밭에 심은 씨앗들처럼 무럭무럭 자라났다. 부족한 농사 자금은 우리 스스로 모았다. 아기자기한 공모전, 상자텃밭경진대회에 나가 상금도 타고 생방송 출연으로 출연료도 얻어냈다.

그리고 2010년 가을, 초보 농사꾼인 우리들은 ‘레알텃밭학교’라는 대학 텃밭 강좌를 만들기에 이른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고,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쉬운 이유에서였다. 점점 다른 대학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주로 대학생들이었지만 씩씩한 초등학생들, 겸손하신 선생님들, 바쁜 직장인들도 찾아왔다.

텃밭 일의 가장 큰 장점은 몸을 쓴다는 것이다. 조그만 밭에서 수백 차례 단순 노동을 반복하고 나면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머리를 썼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뿌듯함이 느껴진다. 항상 쥐고 있던 휴대폰 대신 낫과 호미를 휘두르다 보면 무념무상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지만 마음을 수련하는 느낌도 든다. 우리는 직접 키운 잎채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김장을 하기도 하고, 이웃들과 나누기도 하며, 고된 몸과는 반대로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갔다.

텃밭은 숨기고 허풍 치기가 불가능한 장소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딱 맞다. 잡초를 뽑고 물을 성실히 준 텃밭은 보기도 좋고 수확량도 많은 반면, 그렇지 못한 땅은 일주일만 내버려둬도 금세 정글이 된다. 마트에 가면 손쉽게 살 수 있는 배추 한 포기를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던지, 벌레도 일일이 손으로 다 잡아주고 농약 대신 오줌을 모아 천연 액비를 만들고 음식물 쓰레기와 낙엽으로 퇴비도 만드는데 이 퇴비를 만드는 데는 6개월이 걸린다. 정직하게 일한 만큼 얻을 수 있는 텃밭의 시간은, 우리를 수확에 대한 작은 욕심도 기대도 다 내려놓고 소중한 과정에 의미를 두게 한다.

그래서 ‘스펙’ 한 줄 늘려보려는 친구들보다 ‘아빠와 친해지고 싶어서’ ‘돈을 추구하지 않으니까’ ‘그냥 재밌어서’ 텃밭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 친구들이 오래 남고 나 또한 순수하고 성실한 그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다.

고려대 ‘레알텃밭학교’의 운영진

이지은, 황윤지, 이동근, 박지아씨(왼쪽부터)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시장에서 야채를 사다 보면 너무 싼 농산물 가격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식당에서 친구들이 으레 반찬을 남길 때도 그렇다. 가지 한 다발 오이 하나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농부의 피와 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농산물뿐 아니라 다른 어떤 물건도 내 손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니, 버려지는 모든 것이 아깝다. 그래서 뭐든 소중해진다. 텃밭학교를 운영하면서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남학생도 있고 채식을 하게 된 친구, 아예 도시농업 분야로 취업을 한 친구도 있다. 처음에는 수강생으로 참여했다가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잘 해내려 하기보다는, 즐겁고 재미있게 하고 있다.

며칠 사이에 가을이 왔다. 얼마 전 다섯 번째 ‘레알텃밭학교’도 문을 열어 배추랑 무랑 쑥갓이 옹기종기 싹이 올라왔다. 세 번째 짓는 가을 농사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어 책을 뒤적거린다. 많이 성장한 것 같지만, 여전히 처음과 같은 자리다. 아직도 ‘레알텃밭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노련하게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아직도 밭일이 어렵고 낯선 상황들이 태반이다. 동시에 처음 겪는 소중한 순간도 태반이다. 작은 수확물에서 느끼는 감동도 여전하다. 이제 겨우 3년 차 하수 농부라, 열심히 가꾼 작물이 보잘것없이 망해버리기도 하고, 날아오는 곤충들에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뒤쫓아 오는 이, 보채는 이 하나 없어, 욕심내지 않아도 좋다. 형편없는 실력에도 포기 안 하고, 손가락만 하게 매달린 가지를 보고도 귀엽다며 웃는다. 10년 되고 20년 돼도 그럴듯한 농사를 지어낼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처음일 것이 많고, 기쁜 일이 많을 것이란 건 잘 알고 있다.

‘바람이 차네. 처서가 왔으니 이제 가을 농사를 준비하자’고 생각하게 된 내 모습이 뿌듯하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못난이 작물들처럼, 우리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매 학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배우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 같다.

▼ 2012년 가을학기에 경작을 시작한 고려대 텃밭과 레알텃밭학교 5기 친구들.

캠퍼스 텃밭은 학교 측의 허가를 받기도 하고 학교 사정에 따라 크기가 줄거나 이동되기도 한다.

▶ 박시현(12)군은 레알텃밭학교 4기 때부터 함께해오고 있다.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농사 지식과 실력을 겸비해 형, 누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가수 윤하

가수 윤하. 17살, 오직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이듬해 ‘혜성’이란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그 뒤 성공적인 일본 활동을 발판 삼아 2007년 국내에서 1집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대중 앞에 선 그녀는 아이돌 대세인 가요계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또래 가수들 중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하며 직접 작사,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그녀, 최근 1년 6개월의 공백을 깨고 4집 앨범 <슈퍼소닉>으로 다시 돌아온, 올해로 데뷔 9년째를 맞는 가수 윤하(25)를 만나보았다.

MBC ‘나는 가수다Ⅱ’ 무대에 가수 윤하가 섰다. 그녀가 부를 곡은 <빛과 소금>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모든 관객이 숨죽인 가운데 그녀는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에 집중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저 나이의 가수가 어떻게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가장 섬세한 <빛과 소금>의 노래를 저렇게 참 정결하게 다시 재해석해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 음악평론가 강헌

“또래 여가수 중에서 톱클래스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는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 음악평론가 김작가

평론가들의 극찬을 떠나 그녀가 또래 가수들에서도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기존의 아이돌 가수들이 걸어온 방식과 그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오직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17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싱글 앨범 <유비키리>로 데뷔, 이후 ‘혜성’이란 곡으로 일본 오리콘(일본의 인기 음악 차트) 순위에 진입하면서 주목받으며, 2006년 한국에 돌아와 1집 앨범 <고백하기 좋은 날>을 발표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전 소속사와의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그녀는 또 한 번의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다시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그렇게 1년 6개월이란 시간을 견뎌낸 그녀는 결국 너무나 바랐던 무대로 돌아왔다. 그 어느 때보다 한결 편안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이번 4집 앨범을 준비하며
그 마음가짐이 남달랐을 거 같아요.

전엔 작업할 때 어떻게 하면 대중들한테 어필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잘 팔리겠지 하면서 무언가를 겨냥해서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그게 참 경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그걸 다 내려놓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뭐지? 하고 싶은 게 뭐지?’ 생각하면서 저의 솔직한 모습을 담으려고 했죠. 진심을 담으면 통하지 않을까 해서요.

최근 MBC <나는 가수다Ⅱ>
최연소 참가자로 화제를 모았는데요,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가수들을 위한, 제대로 갖춰진 무대가 많지는 않잖아요. 그게 참 아쉬운데 ‘나가수’는 음향, 밴드 등 최고의 환경이 갖춰져 있어요. 그래서 몹시 긴장은 되지만 가수라면 느껴야 할 올바른 긴장감이란 생각이 들고, 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무대라는 생각에 하게 됐어요. 특히 ‘나가수’ 방청객들은 6개월에서 1년 이상을 기다렸다가 오신 분들이라 다른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감동과 절실함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가수로서 욕심이 나는 무대이고, 한편으론 관객들한테 잘 돌려드렸을까 걱정도 돼요. 그러다가 합이 딱 떨어질 때 느끼는 쾌감이 있는데, 그때가 ‘먼 훗날에’란 노래를 다 부르고 난 뒤였어요. 연인으로 치면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했는데, 상대가 받아줬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게 참 좋았던 거 같아요.

어린 나이에 가수가 되기 위해
일본까지 가셨는데,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뭘 모르니까 했던 거 같아요. 사실 가수의 꿈을 꾼 건 H.O.T 오빠들을 너무 좋아해서였어요. 가수가 되면 오빠들을 직접 볼 수 있지 않을까.(웃음) 또 마침 보아 선배가 만 13살의 나이로 데뷔를 한 거예요.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죠. 부모님 몰래 오디션도 여러 번 봤고 번번이 떨어졌어요. 그땐 빨리 가수가 돼야 한다는 생각만 있어서 무서운 게 없었던 거 같아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운이 좋았죠.

마침내 일본에서 먼저 가수 제안이 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그녀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 학교 친구들도 못내 그리웠지만, 가수의 꿈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선택한 길이었다.

이후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피아노 연주를 겸비한 ‘피아노록’이란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일본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5살 때부터 치기 시작한 피아노 실력은 그녀의 가창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러다 2005년 애니메이션 <블리치>의 엔딩 테마곡으로 쓰인 ‘호우키보시(혜성)’란 노래가 오리콘 차트 20위권에 진입하면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그녀를 사람들은 ‘오리콘의 혜성’이라 부르며 주목했다. 국내에선 인지도조차 없던 ‘초짜 가수’가 해낸 믿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와 피나게 갈고 닦은 가창력, 독학으로 공부한 일본어 실력 등 그녀의 엄청난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한창 활동 중이던 윤하는 2006년 <인간극장>이란 다큐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2007년 1집 앨범을 내고 한국에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에 나선다. ‘비밀번호 486’ ‘기다리다’ ‘내 남자 친구를 부탁해’ 등의 히트곡을 내며 많은 팬들의 사랑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갑작스레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전 소속사를 상대로 불공정 수익 배분에 따른 전속 계약 무효 소송을 제기하면서 무대가 아닌 법정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1년 6개월이란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나왔기 때문일까. 다시 돌아온 무대는 이전과는 달랐다. 가수로서, 노래할 수 있는 이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기에, 모든 조건에도 감사하다는 그녀다.

가수가 무대 대신 법정에 서야 했는데,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나요?

사실 이성 간의 이별도 충격이 크잖아요. 근데 함께 일해 온 사람들과 이별을 그렇게 겪은 거니까 큰 쇼크인 건 사실이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원망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들을 겪었지요. 서로가 다르다는 것도 인정해야 했고요. 다행히도 잘 마무리됐고, 이젠 사람 귀한 줄도 알고요.(웃음) 지금은 예전부터 오랫동안 같이하면서 마음이 잘 맞았던 분들과 일하고 있는데, 제가 가장 힘들 때 넌 다시 할 수 있어, 하고 응원해준 분들이에요. 그런 말들이 큰 힘이 됐고,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어려움을 겪으며
가장 크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요?

완전 긍정적인 예스(Yes)걸이 됐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일하면서도 내가 피해 본다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배제했거든요.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에 당돌한 모습도 많이 보이고 내가 잘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굳이 하지 않겠다, 그게 프로다, 생각했는데, 가치관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무대에서건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볼까?’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음향 시설이 낙후된 곳이든 관객이 몇 명이 있든 가리지 말고 한번 해보자, 그렇게 된 거죠. 그동안 많이 깨지고 부서지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같아요.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로
해석해도 될까요?

맞아요. 사실 그전까진 남의 시선에 의존을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이런 모습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계속 이렇게 있어야 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뭔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개척자 느낌이었잖아요. 일종의 승부 근성으로 음악을 해서 그런지 ‘전부 다 이겨야지’란 생각이 컸어요. 그러다 보니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근데 이젠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고 남한테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지하게 됐어요. 내 생각이 전부 정답이 아니란 걸 알게 됐으니까요. 내가 아는 나보다 남들이 아는 내가 훨씬 정확할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많이 생긴 거 같아요.

시련은 그녀를 성숙하게 했다. 그녀는 무대를 떠나야 했을 당시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집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누군가의 전화 한 통도 받기 힘들었던 시절, 그녀는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된다. 지난해부터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녀 스스로 “별밤DJ는 천운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라디오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통의 장이 되어주었다.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DJ도
윤하씨에겐 큰 부분이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저는 그래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가령 ‘남자 친구가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란 사연이 오면, 그럼 제 생각은 ‘그냥 헤어져요. 왜 만나?’인데, 그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거잖아요. 그러다 3개월쯤 지나니까 귀가 열리면서, 자기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는데 굳이 제게 사연을 보낸 이유는 내가 뭔가 줄 수 있기 때문 아닌가, 하고 별밤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연을 하나씩 읽어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혼자 안타까워했다가 좋아도 했다가 그런 감정들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라디오를 통해서 참 받은 게 많아요. 일단 저란 사람도 누군가의 얘기를 잘 들어줄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고, 남한테 관심이 생긴 것도 처음이고요. 지금은 제일 잘한 일인 거 같아요.

주변을 이해하고
살펴볼 수 있게 된 거네요.

라디오 DJ를 하면서 사람들을 지켜보게 됐어요. 러시아워에 시달리고 상사에게 혼나고, 다들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청취자 사연 중엔 제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 것도 있었고요. 그전까지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힘든 줄 알았거든요. 피해 의식에다 대인 기피 증상도 있어서 힘들면 스스로를 가두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예전의 제 모습을 생각하면 ‘독불장군’이었구나 싶어요. 그렇게 계속 살아갔을 걸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죠. 라디오를 하면서 ‘내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잘 안 듣고 살아왔구나’ 반성이 많이 됐어요. 이제 좀 사람이 돼가는 거 같아요.(웃음)

윤하씨가 생각하는 좋은 가수란
어떤 가수인가요?

좋은 가수가 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대에서 속일 수는 없거든요. 그 시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느냐는 제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는 거지요. 근데 정말 무서운 것은 관객분들이 다 느끼신다는 거예요. 언제나 무대에 오를 때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가고, 뭔가 재미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당당한 모습을 보이면 저분들이 좋아하시겠지?’ 혹은 ‘나를 보면서 조금 힘을 얻으시겠지?’라는 생각으로. 늘 내가 인간다움을 잃고 있진 않은지 점검하면서 무대에 오르고자 합니다.

문득 그녀의 초창기 데뷔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절 검정 재킷과 바지를 입고 록 음악을 하는 윤하는 마치 전사 같았다. 하지만 한때의 터널을 지나 한줄기 빛과 마주하는 사이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나의 노래가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상처를 지울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녀.

“DJ를 하면서 마지막 멘트는 항상 이렇게 해요. ‘내일도 곁에 있겠습니다’라고. 생각이 나실 때 찾아주시면 항상 그 자리에 있겠다는 마음으로….”

노래를 참 잘했던 한 어린 소녀가 부단한 노력 끝에 정말 가수가 되었다. 가수가 된 소녀는 이제 언제나 관객 곁에 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우리 시대는 또 한 명의 참 좋은 가수를 두게 되었다. 인간적으로도 가수로도 한층 성장한 그녀의 음악이 앞으로 더 기대되는 이유다.

김혜진 & 사진 홍성훈

때론 아름답게, 때론 따듯하게, 때론 아프게 다가왔던, 그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들.

잊지 못할 두 뒷모습,

아버지 그리고 준하 형

최종훈 34세. 연기자.

tvN <롤러코스터2> ‘푸른거탑’ 말년병장 역

나는 내 인생 가장 기억에 남는 두 뒷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의 옷에는 항상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 일을 하셔도 좀 깔끔하게 입고 하세요”라고 말이라도 하면, “야, 사람이 깨끗하면 됐지, 옷이 깨끗해서 뭐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도 못 나오셨지만 아버지는 정말 지혜로운 분이셨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13살 때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품삯으로 돈을 받을래, 소를 받을래 했더니 소를 받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는 그 어린 나이에 직접 나무를 해와 축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한평생을 정직하게 지혜롭게 사신, 그런 아버지를 나는 존경했다.

20대 초반, 나는 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떠난다는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그래, 조심해서 가라. 항상 어디 가서, 삽질을 하든, 시멘트를 바르든, 남들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그러시면서 그 흙 묻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쥐어주셨다. 그러고는 얼른 돌아서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 그 뒷모습이 너무 따듯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저런 뒷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5년 전,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 묘소에 가면 얼굴이 아니라, 그때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너무나도 따듯했던….

또 하나는 정준하 선배님의 뒷모습이다. 연기자의 꿈을 갖고 서울에 왔지만 녹록지 않을 때 우연히 같은 기획사였던 정준하 선배님의 매니저 일을 하게 되었다. 힘들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형은 6년이나 나를 곁에 두었다. 그 덕에 <무한도전>을 통해 ‘최코디’로 알려지고, 형이 출연했던 뮤지컬 <라디오 스타>에 강원도 출신 엔지니어로 출연도 할 수 있었다.

홍찬석 작. <Village in Dream>

160×130cm, Mixed media

2011

 

준하 형은 간혹 일에서 실수를 하거나 하면, 꾸중을 하셨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모든 촬영 스케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차에서 내려 꾸중을 하셨다. “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중에 네가 꿈꾸는 거 어떻게 해낼 거야.” “죄송합니다”라는 말에 “가봐. 다음부터 그러지 마” 하고는 돌아서서 가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는 참 서러웠는데, 돌아서는 준하 형의 뒷모습이 참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나를 잘되게 하려고 일부러 쓴소리를 했다는 것, 촬영하고 힘들 텐데도 그렇게 마음을 내어 충고해주었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고, 고맙고 감사했다.

재작년 나는 나의 꿈을 찾아 매니저 생활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너무 싫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던 중 올해 초 <롤러코스터>의 말년병장 역으로 출연 제의가 왔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준하 형의 충고가 더 다가올 때가 많다.

항상 형은 재능의 크기가 아니라 연기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항상 겸손하고 너를 낮춰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라. 모든 것에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한다. 예의 발라야 한다. 그래야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좋은 인상을 보여줘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너나 나나 좋은 인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웃어야 된다.”

나는 이제 아버지처럼, 준하 형처럼, 그런 뒷모습을 갖고 싶다. 따듯한 진심이 느껴지는 뒤태를 가진 배우이자, 가장이자, 남편이자, 자식이자, 아빠이기를 꿈꿔본다.

꼬부랑 할머니의 사랑, 뜨개질

최영주 47세. 조경가.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잘 보거라. 양손에 하나씩 대바늘을 잡고, 왼손 오른손 번갈아 가며 구멍을 따라 바늘을 넣었다 뺐다 하면 이런 모양이 떠진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 옆에 찰떡같이 붙어 앉아 할머니의 뜨개질하는 모습을 즐겨 보곤 했다. 특히 할머니의 손놀림이 빨라지면 질수록 그 즐거움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북슬북슬한 털실이 할머니의 손을 만나면 갖가지 모양의 보물로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해 보이는 벙어리장갑, 목을 몇 번이나 두르고도 남는 긴 목도리, 손등까지 푹 덮어주는 털스웨터, 두툼한 고무줄로 허리춤을 마무리한 털바지, 양말 위에 덧신을 수 있는 털양말까지. 그것들을 모두 갖춰 입는 날에는, 마치 할머니의 품에라도 안긴 듯 따뜻하고 포근하여, 한겨울의 추운 날씨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뜨개질이 끝나면 할머니는 으레 그것들을 비닐봉투에 담아 들고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 손주들 집을 방문하셨다. 그걸 입고 좋아라 할 손주들을 보는 게 할머니에게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 어려워 걷는 내내 할머니의 뒤만 쫓아 걸어야 했지만, 씩씩하고 행복해 보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나 역시 씩씩하고 행복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내가 한 여덟 살 때부터인가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면서 잠깐씩 멈추는 일이 잦아지셨다. 뜨개질하던 손에서 대바늘을 내려놓고 눈을 비빈 후 다시 뜨개질을 하고, 그러다가 조금 후 다시 눈을 비비시고. 날이 갈수록 뜨개질하는 시간보다 눈을 비비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이상 뜨개바늘을 잡지 못하게 되셨다.

‘할머니는 내가 입고 있는 이 털옷들과 시력을 맞바꾸신 거다’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그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할머니가 오래도록 내 얼굴을 볼 수 있고, 맛난 음식을 눈으로 보면서 드실 수 있으며, 언제든 불편 없이 화장실을 가실 수 있는 거였다. 할머니의 행복을 빼앗아갔다는 죄책감에 우울해 있는 나를 어느 날 할머니께서 부르셨다.

“아가, 털실과 뜨개바늘을 가져다주렴. 아마 장롱 서랍 어딘가 전에 쓰다 남은 실뭉치가 있을 게다.” 나는 혹시 말씀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가, 너 거기 있는 거니? 있으면 실타래와 뜨개바늘을 가져다주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실타래는 왜 찾으시는 거지?’ 나는 재빨리 장롱으로 달려가 서랍을 열었다. 진홍빛 실타래가 그 안에서 오래도록 주인님이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나를 맞이했다.

“할머니, 여기요!” 나는 벅찬 가슴으로 뜨개질 꾸러미를 할머니께 건네 드렸다. “그래, 고맙구나.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사십 년이 흐른 지금, 할머니의 몸은 심하게 구부러져 예전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지팡이 없이는 걸음조차 힘들지만, 완전히 잃은 시력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여전히 뜨개질을 하신다. 할머니가 평생 사랑해왔던 뜨개질을 눈이 아닌 손으로 보면서…. 할머니는 이제 실을 직접 고를 수도, 화려한 문양을 마음껏 넣을 수도, 빠른 손놀림으로 갖가지 것들을 완벽하게 짤 수도 없지만 할머니의 뜨개옷은 여전히 포근하고 곱다.

“실 색깔이 아무래도 좀 어두워 보이는데 괜찮겠냐?”

홍찬석 작. <Dream>

30×40cm, Mixed media

2010

 

환하디 밝기만 한 털실을 만지면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어, 그래요? 그럼 다른 색으로 할까요?”

실을 전혀 볼 수 없으면서 능청스럽게 말씀하시는 할머니께 이제는 나도 넉살스럽게 응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할머니를 통해 ‘앞을 볼 수 없음’이 ‘삶의 기쁨마저 볼 수 없게 만들진 않는다’는 걸 배웠으니까.

“그럼 지팡이를 좀 가져다주렴. 이 할미랑 실타래 사러 가자.”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 발씩 조심스레 내딛는 할머니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힘에 겹다. 더 이상 힘차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심지어 심하게 꼬부라져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꼬부라진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찌 흉해 보일 수 있으랴. 거기에는 지나온 약 백 년의 삶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이번엔 내가 할머니의 구부러진 등이 시리지 않게 따뜻한 등덮개를 하나 짜드릴 차례이다.

자꾸만 커져가는 그 걸인의 뒷모습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2008년 문천 지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온 나라가 재해 지구에 뜨거운 사랑의 손길을 보내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거리에서는 적십자 회원들이 모금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하루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거리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걸인이 나타났습니다. 삼검불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어깨에는 볼모양 없이 더러운 가방을 메고 한손에는 깡통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 걸인이었습니다.

땟국이 줄줄 흘러내리는 걸인이 나타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보기 싫은 비렁뱅이라고 한쪽으로 피하는데 그 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룩거리며 모금함으로 다가오더니 깡통에 담긴 얼마 안되는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모조리 모금함에 쏟아 넣는 것이었습니다.

돈이라고 해야 구겨진 1원짜리 서너 장 그리고 50전짜리, 10전짜리 각전이 여남은 개, 모두 합해야 10원도 안 되는 부스럭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결코 적거나 가벼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억만 부자가 내놓은 거액의 돈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구걸로 연명하는 걸인, 더구나 장애인 걸인에게는 그 보잘것없는 푼전이 주린 배를 달래여 목숨을 이어주는 소중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구걸한 푼돈을 모금함에 쏟아 넣는 걸인의 모습, 그것은 걸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인간 사랑이 강력한 빛을 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은, 평시에 걸인을 깔보았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걸인은 비록 빌어먹고 사는 가련한 몸이지만 나라에서 당한 재난을 알고 그것을 관심하는 국민의 한 조각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걸인의 뒷모습은 마치 노신 선생이 <사소한 사건>에서 먼지투성이의 인력거꾼을 찬미한 것처럼 ‘찰나에 우뚝 솟아 보이더니 그가 걸어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홍찬석 작. <In Dream>

160×130cm, Mixed media

2011

 

그 뒷모습은 나의 양복 속에 숨어 있는 남을 경시하는 글쟁이의 못된 버릇을 꼬집으면서 나의 마음을 비춰보는 커다란 거울로 안겨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불행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이런 사랑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그 걸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동네를 훈훈하게 만드는 열과 빛이 어떤 것인가를 무언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이 꽤나 지나간 오늘도 자꾸만 커지는 그 걸인의 뒷모습을 이렇게 그려보고 있답니다.

때론 아름답게, 때론 따듯하게, 때론 아프게 다가왔던, 그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들.

우리 가족의 뒷모습은

김은선 14세. 학생. 부산시 북구 만덕3동

안녕하세요. 저는 14살의 여학생입니다. 태어날 땐 정상이었는데 6살 때부터 다리가 굳어가는 근육병에 걸렸어요. 그때부터 치료를 받았으면 지금쯤 걸어 다녔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3년 늦게 들어가 중학생 1학년일 나이에, 지금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학교생활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지금 2~3년째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근육병의 진행성이 멈춰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힘들 때도 많았지만, 제가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가족 덕분입니다. 엄마, 아빠, 언니. 저는 늘 가족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저 때문에 힘든 일도 많이 겪으시고, 고생하시고. 그래서 우리 가족의 뒷모습을 보면 왠지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하나뿐인 언니는 저랑 7살 차이가 납니다. 언니가 동생을 갖고 싶어 해서 제가 태어났을 때 되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언니는 학교 갔다 오면 제일 먼저 저한테 달려와서 안아주고, 젖병 물려주고 놀아주었다고 해요. 커가면서 제 고민도 다 들어주었지요. 힘내라고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오답노트도 만들어주었어요. 간혹 친구들이 놀리고 하면, 항상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근데 언니가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안에 도움을 주겠다며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구하는 중입니다. 많이 속상하지만, 나중에는 언니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니, 종종 언니한테 대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언니를 좋아하는 거 알지. 늘 도와줘서 고마워. 이제 나도 14살이니까 언니도 고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잘 들어줄 자신은 있으니까. 언니의 뒷모습은 어색하지 않고 언제나 이름 불러보고 싶은 뒷모습입니다.

엄마도 오래전의 사고로 몸이 좀 불편하십니다. 하지만 요리도 잘하시고, 늘 가족들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십니다. 늘 부족한 저를 지켜봐주시고 잘되라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가끔 공부해라, 그런 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한마디가 제 미래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홍찬석 작. <The Windows>

116.8×91cm, Mixed media

2008

 

엄마, 엄마가 잔소리할 때 가끔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엄마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잘 알아. 엄마의 뒷모습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고 싶은 뒷모습입니다.

아빠는 우리 집에서 혼자 돈을 버십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10년 넘게 다니는 회사에 한 번도 결석 안 하시고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차에 치여서, 많이 다치셨어요. 그래도 일할 거라면서 병원도 안 가고 회사에 가셨습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회사 가겠다고 신발 신고 나서시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도 무릎이 아프신데도 그냥 보호대만 착용하시고 일을 하십니다. 주간, 야간으로 일하시면서 언제나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아빠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아빠, 우리 가족을 위해 힘들어도 아파도 일해 주셔서 감사해요. 가끔 상 타오는 저에게 오천 원씩 주시고, 아직 공부 실력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할게요. 아빠의 뒷모습은 어깨가 무거워 보이지만 힘을 내는 뒷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의 뒷모습은 떨어져도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밝게 사는 뒷모습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크면 언니, 엄마, 아빠에게,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노총각, 그의 뒷모습에 감동하여

결혼 결심하다

김종수 38세. 인쇄기획사 운영. 전북 김제시 요촌동

난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평가받는 종족(?)에 포함된 이른바 노총각이다. 노총각은 힘들다. 외로운 건 둘째 치고 어딜 가든 “장가 언제 가?”라는 식상하면서도 언제 들어도 거슬리는 질문부터, 미혼이라는 이유로 각종 혜택에서 배제되는 상황까지, 노총각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불이익은 제법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결혼을 안(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좀처럼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티격태격하는 부부들이 태반이고, 친구들 역시 퇴근 후의 시간을 아내와 보내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늦게 들어가려고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휴,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는데, 차라리 서로 최대한 안 보는 게 상수다”라면서. 뭐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이 왠지 씁쓸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나에게 ‘나도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전 친구와 삼겹살집을 갔을 때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손님들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손님이 있었다. 체크무늬 남방 하나를 걸친 채 혼자 테이블에 앉아 고기를 굽는 중년 남성이었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신기하게도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정성스럽게 고기를 구웠다.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잘 구워서 줄까지 맞춰서 불판 구석에 고기를 세워놓는 모습과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주병을 번갈아 보노라니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냥 대충 먹지, 혼자 먹으면서….’ 친구랑 고기를 먹으면서도 자꾸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 뭐랄까 외로워 보였다.

‘저분은 뭐 때문에 이런 시간에 혼자 저렇게 고기를 먹고 있을까? 얼마나 심심하면 고기를 구우면서도 먹지도 않고 줄 맞추기를 하고 있을까?’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반전이 일어났다. 고기를 굽던 그 아저씨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어떤 중년 여성을 조심스레 모시고 들어오는데 임신을 하고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한눈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중년 남성은 임신한 아내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해 고기를 예쁘게 굽고 있던 것이었다.

“어머! 미리 구워놓은 거야?” 여성은 감동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보더니 이내 고기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남성은 그런 여성을 사랑스러운 듯 지그시 바라보면서 옆에 놓인 소주를 한 잔씩 따라서 마실 뿐이었다. 고기와 밑반찬이 떨어질세라 틈틈이 챙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제야 보이는 행복해 죽겠다는 듯한 아저씨의 뒷모습.

홍찬석 작. <Three Vases>

116.8×91cm, Mixed media

2008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친구가 “왜 혼자 실실 웃냐?”고 면박을 줬지만 이상하게 비실비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본다고, 결국 나는 아내를 기다리며 신나게 고기를 굽는 아저씨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본 게 아닌가. 결국 나는 오늘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내 마음 상태를 보고야 만 것이다.

아내는 고기를 먹으며 무슨 얘기인가를 끊임없이 하고, 남편은 미소 띤 얼굴로 아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고기를 다 먹은 후 팔짱을 꼭 끼고 나갔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솔직히 친구나 선배들로부터 결혼하면 다 똑같다는 말을 내내 듣던 나로서는 그 중년부부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맞아. 뭐든지 자기 하기 나름이지”라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내 용기 없음을 남들 사는 모습에 핑계 대지 말아야겠다. 이제 정말 용기를 내고 싶다. 한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용기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