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엄마하고 나하고’

사진 & 글 후쿠다 유키히로(Fukuda Yukihiro) 번역 오쿠토미 코우지

‘엄마하고 나하고’는 25년에 걸쳐 촬영한 것 중에서 동물 모자(母子)의 사진들을 모은 것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으로 알려진 야생동물의 세계에도 나름 행복한 순간은 있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맛있는 것을 먹고 또래들과 재밌게 놀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그런 모습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동물 사진을 찍는 이유다.

동물에게 다가가는 건 마치 놀이 같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지만 동물들은 어느새 도망가 버린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비록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하는 식으로….

▲ 치타_ 케냐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보호구역

네발 달린 짐승 가운데 지구 상에서 가장 빠른 치타. 하지만 언제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 사냥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이 흥분해서 다가가는 바람에 사냥감이 도망가 버렸다. 그래도 엄마는 묵묵히 다음 기회를 기다린다.

◀사자_ 케냐 마사이마라 야생동물 보호구역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 무렵, 내내 낮잠을 자고 있던 어미 사자가 사냥을 시작했다. 어미 사자는 꼬리를 흔들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 뒤로 아기 사자가 엄마 꼬리 잡기 장난을 치며 달려든다. 이런 놀이는 새끼 사자에게는 사냥 연습이 된다.

▼원숭이_ 일본 나가노현 지고쿠다니

봄에 태어난 아기 원숭이는 여름에 접어들면 아이들끼리 놀게 된다. 원숭이를 지켜보노라면 아기가 떨어져 놀고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엄마와 자기 옆에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는 엄마 두 부류가 있다. 어미 원숭이들에게도 방임형과 과보호형이 있는 모양이다.

동물 사진 촬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시간을 들이는 일이다.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계절이나 시간대를 바꿔가며 몇 번이고 발걸음을 옮기는 게 중요하다. 지금도 일본 나가노현 지고쿠다니의 일본원숭이는 15년, 미국 플로리다의 마나티(manatee)는 10년 이상 계속해서 촬영하고 있다.

동물들을 촬영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나가노현 지고쿠다니에서 일본원숭이와의 만남이었다. 커다란 나무에 기대서 원숭이를 촬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등을 두드려 뒤돌아보니 커다란 원숭이 한 마리가 잠이 덜 깼는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 장소를 살짝 비켜나자, 원숭이는 내가 기댔던 나무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야생동물이 이런 행동도 하나?’ 싶어 매우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해주는 ‘동물들의 행복한 순간’을 찍고 싶다. 그 순간을 담기 위해 나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후쿠다 유키히로님은 1965년생으로 일본대학(日本大學) 수의학부를 졸업했으며, 두루미에 반해서 홋카이도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동물 사진가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현재 주요 테마로 5년 넘게 일본장수도롱뇽을 촬영하고 있으며, 저서로 <아기 원숭이의 1년> <북여우의 아기> <마나티는 다정한 친구> 등이 있습니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음악 전담 시간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음악실로 가고, 나는 교실에서 일기장 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1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계단 난간을 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3층까지 올라와 통곡을 할까. 아이한테 다가가서 왜 우느냐 물었다.

“우리 선생님이… 엉엉… 막… 화내고… 엉엉… 나가라고 했어요.”

친구와 장난치다가 부딪쳤는데, 선생님이 자기만 야단치더라는 것이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교탁 옆에 앉히고, 그 반에 전화를 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너희 담임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터이니 함께 교실로 가보자고 했다. 아이는 앙앙 울며 도리질을 했다. 고집이 불통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 1학년 3반 교실로 내려갔다. 담임 선생님은 벌써 학교 한 바퀴를 돌고 와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연인즉, 개구쟁이는 애먼 친구한테 주먹질을 했고 때마침 선생님한테 걸려 혼쭐이 나자, 떼를 쓰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선생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나는 이번 시간 마칠 때까지 작은 악당을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외로우면 사람이 그리운 법. 나는 좀 까칠하게 대했다. 아이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시선을 주지 않고 턱으로 화장실 쪽을 알려주었다. 뽀르르 화장실을 다녀온 녀석이 마치 자기 교실 제 자리인 것처럼 의자에 앉아 욜랑거렸다. 그러다가 책꽂이에서 5학년 읽기 교과서를 꺼내 읽었다. 또록또록 잘 읽어 내심 놀랐지만, 나는 바쁜 척 일기장만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글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번에는 마시라고 준 우유를 제 머리 위에 올렸다 내렸다 하며 내 반응을 유발하려 하였다. 그래도 나는 꾹 참고 이따금 곁눈질만 하였다. 한참 뒤, 마침내 일기장 검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꼬마가 말을 붙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음악실에 노래 부르러 갔다.” “아, 노래!” 꼬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동요를 불렀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 나는 뜻밖의 재롱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니 개구쟁이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걸 보니 괜히 찡했다. 그래서 ‘♩학교에 갑니다. 씩씩하게 갑니다♩♬~’ 라는 마지막 구절이 끝나자 나는 아이 옆으로 가서 살짝 안아주었다. 그즈음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우리 반 짱구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얘 누구예요?” “내 아들!” 꼬마 손님의 정체를 두고 언니 오빠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우리 교실 문 앞에 낯선 꼬마들이 나타났다. 1학년 3반 아이들이었다. 수많은 남녀 개구쟁이들은 우리 교실 문밖에 선 채, 내 곁에 있는 친구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닭고기야, 빨리 가자. 선생님이 얼른 오시래.”

아이는 맹꽁이처럼 튀어 올라 친구들 속으로 사라졌다. 별명마저 생소한 ‘닭고기’라고 불리는 그 아이는 그렇게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빙빙 귓전에 맴돌았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100호 특집

“그동안 보신 기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월간<마음수련> 애독자에게 나이, 성별, 직업 상관없이 무작위로 여쭤보고 그중 베스트 10개를 뽑아봤습니다. 편집자라서일까요, 막상 소개하려니 저희 자랑 같아 민망하기도 하고, 안타깝게 순위에서 떨어진 꼭지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 내어 답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9년 2월호
마음으로 만난 사람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 주는, 옛집국수 배혜자 할머니’
이른 새벽, 서울 용산구 어두운 식당 골목의 불을 제일 먼저 밝히는 ‘옛집국수’ 배혜자(72) 할머니 이야기. 할머니가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국수 가게. 그 후 30여 년 지극하게 온 정성을 다해 국수를 만들고, 누구에게나 넉넉히 퍼주며 귀하게 대접해주셨다. 돈이 없어 국수를 먹고 도망치는 이에게 “저놈 잡아라~”가 아닌 “뛰지 말어, 다쳐~”라고 했던 일화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명’해졌지만 그전에도, 그 후에도 할머니는 늘 그 마음이었다. 우리도 늘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이순덕 독자님 3년 이상 마음수련을 보았는데 국숫집 할머니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큰아들이 죽고 나서 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다시 국숫집을 열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사람들이 바로 오랜 단골이었다는 얘기에 가슴 뭉클했던 기억….

2009년 2월호
마음으로 만난 사람

‘지구에 태어나줘서 고마운 하프물범 이야기’
보도 사진가로서 겪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마침 지인이 보내준 아기 물범 사진이 담긴 엽서 한 장 때문에 동물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오하라 레이(Ohara Rei). 영하 20도의 추위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촬영에 몰입하는 그는 23년째 매년 2월이면 세인트로렌스만의 유빙을 찾으며 지구와 환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석기 독자님 사진들이 너무 좋다. 자연의 사진들을 보면서 공존하는 아름다운 지구를 꿈꾸게 된다.

문일수 독자님 자연환경 사진, 예쁜 사진들을 너무 좋아한다. 특히 하프물범은 진짜 예뻐서 마음에 다가왔다.

2009년 8월호
테마기획

‘죽음, 지금은 죽음 앞에 다가가 삶을 배워야 할 때’
우리는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죽음이 닥쳐오지 않을 것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또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한 말과 행동이 어쩌면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 또한 죽음이 갖고 있다. 지금은 막연히 죽음을 외면할 때가 아니라, 죽음 앞에 다가가 삶을 배워야 할 때이다. 테마기획 ‘죽음’ 편은 월간<마음수련>만이 할 수 있는 기획이었다며 독자들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성금미 독자님 테마기획 죽음 편을 읽으며 부모님이 생각났었다. 나는 또 얼마만큼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했다. 죽음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거 같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평등한 관문, 죽음. 그것은 삶이 유한함을 깨닫게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게 한다.

배점옥 독자님 다른 데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기획이었다. 특히 박정희 여사가 아버님 임종에 대해 적은 임종기는 보물 같은 자료였다고 생각한다.

2008년 2월호
테마기획

‘작심삼일, 새 습관으로 밀어내기’
새해엔 누구나 한 번쯤 갖게 되는 소망, 습관 바꾸기. 하지만 이젠 작심삼일이 아예 습관이 되어버린 우리. 습관은 몸에 배어 있는 마음이기에 진정 습관을 바꾸고 싶다면 마음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제로 기획,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었다.

조아람 독자님 항상 작심삼일만 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나도 많이 실천을 해보았다. 그 책을 옆에 두고 계속 읽었다. 작심삼일 때마다 꺼내보고 하면서 도움이 많이 됐다.

2012년 11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

‘뒷모습’
누군가의 뒷모습에 감동받은 적 있는가? 표정은 꾸밀 수 있지만 뒷모습은 꾸미지 못하기에, 뒷모습이야말로 가장 정직하다 말한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뒷모습, 잊지 못할 뒷모습을 주제로 우리의 따듯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 에세이.

한일선 독자님 얼마 전에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저 앞에서 터덜터덜 힘을 빼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늘 살면서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렇게 에세이 주제로 다뤄주니까 재밌게 읽었다.

최병숙 독자님 에세이를 좋아한다. 힘들 때 불행한 걸 극복한 사연 보면서 위안을 삼게 되고, 좋았던 일 보면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아진다. 어차피 인생은 더불어 사는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공유하게 해줘서 좋은 것 같다.

2012년 8월호, 9월호
행복 토크

‘몸에 대한 예의’ 1, 2편
건강은 습관이고 생활 방식을 나타내주는 결과이다. 몸의 노화에는 유전이나 체질이 아닌 생활 방식이 70~80%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근거, 바빠서, 귀찮아서, 혹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걸 게을리하는 것에 대해 짚어봤다. 항상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몸에 대한 예의임을 2회에 걸쳐 실었다.

한서은 독자님 평소 몸에 신경 쓴다 어쩐다 해도, 실질적으로 정작 중요하게 신경 써야 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었다. 내용이 좋아서 블로그에 포스팅도 했는데, 지인들에게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2011년 10월호
~2012년 3월호

한의사가 된 손자가 직접 만들어보는 ‘외할머니 레시피’
젊은 한의사가 할머니에게 배워 직접 요리를 해보는 꼭지로, 한의사답게 건강에 대한 정보도 함께 주어 일석이조라는 평을 들었다.

윤지윤 독자님 요리 코너 좋아하는데, 특히 외할머니 레시피가 너무 좋았다. 한의사가 된 손자가 직접 만들어보며, 요리에 대한 정보도 주고 건강에 대한 이야기도 하는 것이 너무 좋았는데, 금방 끝나서 아쉬웠다. 다시 연재해줄 생각은 없으신지.^^

2006년 4월호
생활의 재발견

‘유용 미생물(EM)에 대하여’
먹고 뿌리고 치료하고. 천의 얼굴을 가진 생활 해결사 ‘유용 미생물’에 대한 소개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가정의 생활필수품으로, 친환경적인 산업 제품으로 끝도 없이 연구 개발되고 있는 EM 기사는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을 정도다.

권순애 독자님 마음수련에 나오는 생활 정보는 항상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EM 기사를 보고는 직접 사서 만들어 썼다. 샴푸랑 반반씩 섞어 쓰고, 하수구에 넣고. 잡지의 정보 코너라는 게 가볍기도 하고, 잘못된 것도 많은데 마음수련 정보는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죽염, 설탕에 대한 정보도 큰 도움이 되었다.

 

2010년 2월호
알아두면 편리한 작은 정보

불가사의한 또 하나의 선물 ‘죽염’
우리 조상은 아침저녁 소금으로 양치를 하고, 소금 녹인 침을 눈에 넣고, 평소에도 짜게 먹었다. 덕분에 건강한 치아와 눈을 가졌고, 몸에 염증이 생겨도 덧나지 않고 균이 번식할 수 없었다 한다. 특히 천일염을 왕대나무 속에 다져 넣고 1천5백도 이상 고열 처리하여 아홉 번을 구워낸 죽염은 거의 모든 질병에 효과가 있을 정도로 그 약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소금, 약인가 독인가. 죽염의 탄생과 효과 등을 꼼꼼히 짚어내 독자들로부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호응을 받았던 기획.

이근준 독자님 소금에 대한 관념을 깨준 기획이었다. 전에는 단순히 짜게 먹으면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기사를 보며 나트륨, 정제염이 나쁜 것일 뿐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고 음식 먹는 것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죽염을 먹고 있고 주변에도 많이 알려주었다.

2010년 1월호
마음기획

‘언제 어디서도 변치 않는 믿음, 자신감’
사람들은 자신감을 ‘내가 뭔가 잘할 수 있다는 믿음’쯤으로 여기고 무슨 능력이 있을 때 생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감은 특정한 능력이나 외형적인 화려한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자신감이란 자신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며 상대 또한 그러한 본성의 존재임을 믿고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열등감과 자신감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생기는 근본적인 열등감이 있는 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참된 자아를 찾고 진정한 자신감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기획되었던 마음 이야기.

이수현 독자님 마음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본다. 마음을 비워서 변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와 닿는다. 나는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글을 읽을 때마다 욕심이 너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비워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돌아보니 자신감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감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진정한 자신감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봤던 기획이다.

‘나눔 디자이너’ 배상민 교수

‘디자인은 나눔입니다’란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하는 이가 있다. 바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 교수다. 미국 뉴욕에서 성공한 디자이너였지만 ‘욕망’을 부추기는 상업 디자인에 회의를 느낀 그는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와 카이스트에서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를 운영하게 된다. 일상에서 필요한 제품에 ‘나눔과 섬김’을 담아내고, 그 정신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며, 디자인을 통해 보다 따듯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 배상민(41) 교수를 만나보았다.

배상민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자 흙을 뭉친 작은 모형들이 눈에 띄었다. 물 문제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 현지 재료인 흙으로 천연정수필터를 만드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렇듯 잘사는 상위 10%가 아닌 어렵고 소외된 이웃 90%의 사람들을 위해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를 연 배상민 교수. 7년 차인 이 연구소가 거둔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 물 주는 시기를 알려주는 롤리 폴리 화분 등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독일 ‘Red Dot’과 ‘iF’, 미국 ‘IDEA’, 일본 ‘Good Design Award’ 세계 4대 디자인 대회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무려 42개의 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9~2010년에는 한 해에 4개 대회에서 모두 수상하는 그랜드슬램을 2번이나 달성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기부 상품 디자인에서 더 나아가 판매한 수익금 전액을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를 7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언제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열정적으로 디자인의 가치를 전파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기분 좋은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졌다.

+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 이름인 ID+IM은 어떤 의미인가요?

ID+IM은 ‘I DESIGN, therefore I AM’(나는 디자인을 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약자인데요, D에는 3가지 의미(3D)가 포함돼 있어요. 꿈(Dream)을 꾸고, 그 꿈을 디자인(Design)하고, 그 디자인을 나눈다(Donate). 고로 존재한다는 거죠. 결국 디자인이라는 게 사람들과 나누었을 때 가치가 있으니까요.

+ 그동안 디자인하신 많은 제품을 보며 정말 열정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열정은 3D 과정 중 처음, 꿈꾸는 것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릿속에 수많은 답을 내보는데, 그 과정 자체가 저한테는 꿈이거든요. SF 영화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도 있고, 정말 간단하게 해결하는 것도 있어요. 현실성 없는 것도 많지만, 매 순간 꿈꿀 때마다 행복하죠. 그렇게 처음엔 자기만의 공상이었다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디자인이 나오면 미치는 거죠. 저는 디자인하면 도파민(희열, 행복 호르몬)이 나오는 거 같아요. 문제가 싹 풀리면서 그걸 손으로 옮기고 있을 때 심장이 빨리 뛰거든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입되죠. 요즘도 혼자 방에서 디자인할 때 정말 기뻐요. 가슴 뛰는 에너지가 느껴지니까요.

+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하루라도 문제를 안 일으키면 가시가 돋는 그런 아이였죠. 어릴 때 꿈이 발명가여서, 온 동네 깡통을 다 수거해서 공작, 로봇을 만들던 기억이 나요. 집 근처 인왕산이 놀이터였죠. 다람쥐 가재 잡고, 동굴 파고 자고, 친구랑 고구마 서리해서 구워 먹다가 불을 내서 부모님이 경찰서에 끌려가시고…. 사고를 너무 치니까 부모님께서 되게 엄하게 키우셨어요. 아버지는 군인 집안, 어머니는 목사님 집안인데 뭘 잘못하면 아버지는 새벽에 깨우셔서 군대식으로 혼내시고, 그다음엔 어머니가 오셔서 제 손을 잡고 회개 기도를 시키셨죠.(웃음) 하지만 남들과 다른 걸 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진 않으셨어요. 학생이니까 공부는 잘해야 했지만, 그 외에 대해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는 세계 디자인 명문인 파슨스 디자인 대학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다. “13일 밤을 새운 적도 있을 만큼 디자인이 너무 좋고 재밌어서 힘든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졸업 작품인 ‘사운드 펌프’는 전미디자인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그로 인해 27세의 나이에 동양인 최초로 파슨스 대학 교수가 되면서 실력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코닥의 디지털카메라, 3M 포스트잇 패키징 등 그가 디자인한 제품은 그야말로 대박을 치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다 한다.

접이식 MP3 플레이어 크로스 큐브. 2008년 애플사의 아이팟을 제치고 미국 IDEA 은상을 수상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 뉴욕 생활, 성공한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디자인을 할 땐 너무 좋았어요. 제가 디자인한 제품이 유명 백화점에 들어가서 이슈가 되니까요. 근데 그게 계속 반복이 되니까 별로 기쁘지 않은 거예요. 오히려 내가 했던 작업들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사게 만들고 있구나. 결국 아름다운 쓰레기만 생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사용자들이 6개월쯤 쓰고 나면 싫증이 나도록 디자인을 해서 새 디자인이 나오면 또 사고 싶게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저는 디자인이란 어떤 문제점을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근데, 실제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생각하니까 점점 회의가 드는 거예요. 내가 이런 거 하려고 뉴욕까지 와서 밤새가며 공부하고 수많은 과정을 거쳤나 질문하게 됐죠.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20여 년간 임종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봉사를 해오신 어머니의 삶은, 그로 하여금 ‘인간이 사는 이유가 뭐지? 왜 살지?’에 대해 질문하게 한 것이다. 그 질문은 디자인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召命)을 깨닫게 된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재능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 때문에 그는 생존이 걸린 문제지만, 돈이 되지 않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들, 어려운 이웃들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사회공헌디자인’을 생각하게 된다.

+ 사회공헌디자인이란 개념은 교수님의 깊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군요.

60억 인구가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피조물이잖아요. 근데 왜 배상민을 선택해서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고, 좋은 부모를 만나 미국 유학까지 보내고 교수까지 하게 했을까? 생각했어요. 전제 조건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부모 밑에서 태어나기 위해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어요. 그건 그냥 받은 거예요. 전 세계에서 대학 교육 받은 사람은 1%,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혜택을 받은 거라는 것. 그때부터 정확히 보이는 거예요. ‘아, 이런 기회를 주신 건 내가 축복을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나머지 99%, 그런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주신 거였구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죽어가는 건 그 나라 정치가 잘못돼서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안해서 죽는다는 거. 그걸 안 이상 그 순간부턴 해야 하는 거죠.

그는 첫 강의 때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좋은 혜택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일까?” 영재로 자라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성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아이들로 돼가는 게 안타까웠던 그는 학생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어진 조건을 당연시하거나,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했던 학생들도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화려한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꿈꿨던 제자들의 생각도 점차 달라졌다.

“교수님은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 범위를 넓혀주셨어요. 처음엔 예쁘고 재밌는 것만 생각했는데, 정말 의미 있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어요.” 심지은(ID+IM 연구원)씨의 말이다.

+ 디자인을 통해 사랑을 전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디자이너입니다. 그분의 기본 사상이 섬길 서(恕). 서의 사상이에요. <목민심서>를 보면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져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단군 사상이죠.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라. 제가 외국 나가서 그래요. 전 세계에서 사회 공헌을 제일 잘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건국 이념 자체가 사람을 돕는 거였으니까요. 조금만 생각을 넓히면 우리는 되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디자인은 모두 남을 위한 것이지 자기를 위한 디자인은 없거든요. 주부, 아이들을 위한 것 등 다 사용자가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대상을 정확히 이해해야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상대를 섬겼을 때 정말 좋은 물건이 나옵니다.

특히 그가 만든 모기 잡는 친환경 초음파 ‘사운드 스프레이’는 매년 50만 명의 어린이가 말라리아로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디자인은 나눔’이란 철학이 가장 잘 담긴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통을 1분간 흔들면 8시간 자가 충전이 되는데, 전력 공급이 어려운 제3세계에서는 말라리아의 원인인 모기를 쫓는 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가 돈으로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와 더불어 추진하는 또 하나의 사업이 있다. 바로 ‘시드(seed) 프로젝트’다. 그는 지난 7년간 기아에 허덕이는 케냐, 탄자니아 등 제3세계 사람들을 만나왔다. 현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그 지역의 재료와 기술로 만들어서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오는 1월이면 집을 짓고, 물도 정화시키고, 태양열을 설치해주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다.

+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마사이족과 스스럼없이 생활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엔 경계했지만 아이들도 씻겨주고 놀아주니까 할아버지도 다가오고 장정들도 점차 함께하더라고요. 잠도 같이 자니까 완전 가까워졌죠. 추장 어머니가 예쁘다고 막내아들 삼고 이름도 ‘올로 세리안’이라 지어주셨어요.(웃음) 그다음부터는 다 알려주시는 거예요. 사실 먹는 게 제일 고통스러운데 물이 흙물이거나 완전 똥물이거든요. 그 물로 차를 끓여줘요. 먹다 보면 모래가 이 사이에 끼고…. 그런데 거절하거나 더럽다 생각하면 동질화되기 어렵죠.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마사이족에 대해 알 수가 있거든요. 현장에 답이 있으니까요.

+ 시드 프로젝트가 갖는 특성은 무엇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시드 프로젝트는 우리가 떠난 다음에도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거예요. 씨앗을 뿌리는 거죠. 안타까운 건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 가서 좋은 뜻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냥 좋은 걸 가져다주니까 받는 것에 익숙해지거든요. 그럼 계속 못살죠. 저희는 그 사람들의 전통과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마사이족 마을에 갔을 때예요. 사람들이 비영리단체가 지어준 슬레이트집을 비워두고, 본래 있던 소똥으로 지은 집에서 잠을 자더라고요. 한 소녀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안 예뻐요’라고 답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사이 문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고, 되게 소중한 거예요. 그들의 순수함과 문화를 지켜주면서 돕고 싶습니다.

+ 한창 꿈을 꾸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꿈을 꿀 때 차별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기만의 꿈을 찾되 그다음엔 치열해야죠. 차례대로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해야 돼요. 꿈꾼 다음에 공부하고 그다음에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지금 꿈꾸고 지금 공부하고 지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지금 내 주변에서 나눌 수 있는 걸 찾아야 해요. 그랬을 때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우리 사회가 따듯해지니까요.

그에겐 늘 화려한 이력과 수상 경력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14년간 뉴욕 최고의 클라이언트와 최고의 디자이너와 일했을 때도 2번밖에 받지 못했던 상을, 사회공헌디자인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42개의 상이나 수상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그는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는 것을 긁어주니까 상을 받는 거 같아요”라며 겸허해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왜 그런 상을 주는지 그 뜻을 계속해서 묻고 또 깨달아가는 듯했다. 그것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그의 삶에 대한 격려라는 것을. 디자인을 통해 내가 아닌 남이 행복해지길 꿈꾸고(Dream), 사람들이 본래 갖고 있는 따듯한 마음을 일깨워서(Discover), 세상을 보다 따듯한 곳으로 만들고(Design) 싶은 사람. 그래서인가 그와의 만남은 3D 영화처럼(^^) 신나고 행복했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배상민 교수는 나눔 제품인 러브팟과 사운드 스프레이를 들고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해주었다.

“연구소 이름을 제 이름이 아닌, ID+IM이라고 한 이유는 자기보다 세상을 위해 디자인 하는 마음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서예요.”

세상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최고의 회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죽고 나면 10년을 못 버티고 없어지는 게 현실이다. 배상민 교수는 ‘나누고 섬길 줄 아는 한국인의 마음을 잘 계승해서 한국적인 디자인을 만들고, 그 정신을 후대에 남기는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사회공헌디자인을 가장 잘하는 연구소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www.nanumproduct.or.kr

그 어떤 평가도 높고 낮음도 의미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재미에 관한 이야기들

유럽의 강남스타일 열풍

그리고 민간외교관 스타일

손수아 24세. 영국 서식스(Sussex)대 영문학과 교육학 전공

나는 얼마 전 남자 친구 마크의 어머니 헤다의 50세 생신 잔치에 초대받아 네덜란드에 다녀왔다. 남자 친구는 네덜란드 서쪽의 아주 작은 마을 오멘 출신이다.

7개월 전 한국 덴마크 대사관과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우리는 강남에서 처음 데이트를 했다. 한국에 있을 당시 우린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유럽에서 다시 듣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마크가 공항으로 픽업을 나왔다. 암스테르담에서 마크가 사는 오멘까지 차로 약 2시간. 차 안에서 마크는 자연스레 라디오를 켰고, 동시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왔다.

정말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이 노래, 그래도 네덜란드에서 다시 들으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크의 어머니는 몇 달 전부터 이 파티를 계획해 왔다고 한다.

70명 가까이 초대를 했고, 초대받은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의상’을 입어야만 파티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아이를 둔 중년 남편들은 모두 부인 옷을 입고 나타났고, 많은 중년 부인들은 70년대 로큰롤을 연상시키는 디스코 의상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나는 마크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바에서 파티에 온 사람들에게 음료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졌다. 마크의 어머니가 무대로 올라가 감사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잠깐, 중요한 걸 잊었네요. 내 아들 마크가 한국에서 인턴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기념품과 함께요. 사랑스러운 딸! 수아를 소개해요!”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수아를 위해서 준비한 노래가 있어요! 싸이의 강남스타일! 자, 모두 함께 춤춰요!”

마크의 사촌 동생들이 내 손을 잡고 무대로 올라갔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함께 말춤을 췄다. 남자 친구의 가족을 처음 만나는 날, 예뻐 보이고 싶었는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내 이미지를 다 망가트렸다. 하지만 평상시 유쾌한 성격에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나는, 사람들과 함께 강남스타일 노래가 끝나는 순간까지 100% 즐겼다. 한국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오빤 강남스타일” 함성과 함께. 결코 예뻐 보이기는 힘든 춤이지만, 한국을 조금 더 친숙하게 만들어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이날만큼은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정기호 작.

<Avec Dieu>

130×160cm, Oil on canvas / 2008

나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이후 영국 그리고 스웨덴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맞는지,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고 기회가 날 때면 틈틈이 그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호러물과는 색다른 감정을 자극해내는 ‘빈집’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괴물’ 같은 한국 영화는 북유럽 친구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다. 한국어로 ‘Hello’를 어떻게 말하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어니언(양파)’과 발음이 비슷한 ‘안녕’을 가르쳐 주곤 한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친구들이 반기며 말한다. ‘어니언!’

한번은 아리랑 방송국의 한 피디님께서 ‘민간외교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별명 때문일까? 그 이후, 민간외교관 스타일에 맞도록 더욱더 열심히 한국을 홍보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른 아침 수업이 있는 오늘, 런던의 2층 버스에 앉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듣는다. 이제 졸업을 앞둔 나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을 세계로 빠르게 배출시키고, 외국 스타들이 한국 무대를 ‘꿈의 무대’라고 부르는 날이 오게끔 다양한 국제 문화 정책 활동에 힘을 쏟고 싶다.

싸이 같은 국제 스타와 함께 한국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부정 스타일에서 긍정 스타일로

윤규동 16세. 중학교 3학년. 대구시 북구 동천동

우리 가족은 삼 형제와 엄마 아빠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첫째인데 삼 형제여서 그런지 조용할 날이 없고, 마찰이 생기지 않은 날도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더 많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특히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가 가장 심했던 거 같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늘 또 학교 가야 하나? 싫어하는 과학 수업은 왜 매일 있는 거야, 아, 오늘 체육 시간이 있어? 옷 갈아입기 귀찮은데…. 학교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왜 이렇게 늦게 끝나는 거야, 이 공부를 왜 해야 하지, 다른 사람 만 원짜리 밥 먹을 때 이만 원짜리 먹겠다고 공부를 해야 하나. 저 선생님은 왜 저렇게 센 척을 하지, 이런 쓸데없는 과목은 왜 배우냐…. 누구를 보든 무엇을 보든 부정적으로 삐뚤게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그때의 나의 모습은 완전 짜증 불만 부정 스타일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남들한테는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겉으로는 밝은 척을 했다. 그렇게 부글부글 마음속 짜증을 집에 와서 첫째 동생에게 화풀이를 했다. 중1인 첫째 동생이 초1인 막내에게 막 대하고 장난치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다. “막내한테 왜 그러냐, 그건 옳지 못하다.”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다가,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동생을 때리기도 했다.

그해 3학년 여름 방학 때 엄마가 마음수련을 해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수련을 하며 동생한테 많이 미안했다. 첫째 동생이 막내에게 한 행동은 내가 첫째 동생에게 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선생님들께도 죄송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는 욕하고. 내가 왜 이런 마음들을 갖고 살았지, 하면서 막 마음을 버렸다.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7살 때부터 어깨가 조금 삐뚤어서, 항상 한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점점 어깨까지 발라지는 것이었다.

세포 하나하나의 부정적인 마음을 빼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만날 들었던 “너 어깨가 삐뚤다, 어깨가 바로 되어야 할 텐데” 하는 말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정말로 내 어깨는 삐뚤다는 마음이 있으니, 더욱 삐뚤어졌던 거 같다. 그 마음들도 많이 버렸다. 그러면서 정말 뭔가 마음이 시원하고 탁 빠진다는 느낌이었다.

방학 때 마음 빼기를 하고 오니 내가 변해 있는 점이 너무 많았다. 우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게 됐다. 예전엔 오만 부정적인 생각들만 하다가 겨우 일어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없으니 그런 거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청소도 했는데, 엄마가 깜짝 놀라셨다. 전에는 첫째 동생한테 윤기동, 윤기동 하면서 늘 성까지 붙여서 불렀다. 막내 동생한텐 친절하게 이름만 불렀는데. 미안해서 그다음부터는 기동아, 기동아 한다.

정기호 작.

<무제> 34×24cm

Oil on canvas / 2008

생각해 보니까 나도 차별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잘해주면, 첫째 동생도 막내를 대하는 게 바뀔 거 같다.

공부할 때도 엄청 집중력이 생겼다. 학교에서도 정말로 마음속이 조용해졌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올라오더라도, 어느 순간 이런 생각해서 뭐하냐 버리고, 현재가 선물이다, 현재가 중요하다,면서 집중하게 된다.

한날은 친구가 “전에는 이상한 말만 하더니, 수련하고 온 뒤로 완전 편해 보인다”고 했다. 예전에도 안 그런 척한다고 했는데도 나의 부정 스타일을 친구는 눈치를 챘었나 보다.ㅋㅋ

예전엔 긍정적인 척을 했는데 지금은 진짜로 긍정적으로 된 거 같아 좋다. 나는 이제 곧 아르헨티나로 유학을 간다. 다른 나라에서 지내는 게 힘들 수 있겠지만 가족들과 한 지구에 있는 거니까 괜찮고, 또 재밌을 거 같다. 내가 유학을 간다고 가족끼리 사이판 여행도 갔다 왔는데 참 좋았다.

커서 다시 한 번 가자, 기동아, 형욱아. 엄마, 아빠. 보고 싶을 거예요. 그리고 규동아, 혜성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항상 나눌 줄 알고 남에게 지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긍정적으로 변한 거 축하하고, 건투를 빈다.ㅎㅎ

상큼발랄 나만의 스타일을 갖기까지

김아라 24세. 직장인. 전북 남원시 내척동

나는 이제 갓 결혼한, 신혼의 달콤함에 푹 빠져 있는 24살 새댁이자 직장인이다.

직장 동료들은 나에게 정말 귀엽다고들 한다. 스타일만 그런 게 아니라 늘 생글생글 잘 웃고 웃기는 말도 잘한다면서 넌 개그맨 스타일이라고도 한다.ㅋㅋ

사실 나는 학교 다닐 땐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는 그저 지극히도 평범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19살 다른 친구들이 다 대학에 갈 때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어떠한 과를 가고 싶다는 확고한 신념이 없는 한은 대학보다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였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점 나의 모습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패션과 스타일에 눈이 떠지고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작고 평범한 편인 나에게 맞는 스타일은 어떤 걸까? TV도 많이 보고 잡지도 많이 보았다. 그러면서 옷 스타일도 바꾸어봤다. 그리고 항상 머리를 묶는 당고 머리 아니면 땋은 머리였는데, 머리 스타일에도 변화를 줘보았다. 단발머리에 볼륨 매직도 해보고, 웨이브도 주고, 노랗게 염색도 해보았다.

점점 “예쁘네” “귀엽다” 말해주는 사람들도 생기고,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성격도 밝아졌다. 옛날에는 정말 조용했는데, 사람들에게 장난도 치게 되고 웃기는 말도 한 번씩 하고, 내 안에 숨겨져 있던 개그 본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할까. 그렇게 겉모습과 내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는 점차 상큼발랄 스타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기호 작.

<무제> 72×60cm

Oil on canvas / 2009

물론 스타일을 찾아가기까지 시행착오도 있었다. 괜찮겠다 싶어 산 옷을 입고 갔는데 나이가 들어 보인다, 전혀 안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내겐 밝은 색상들의 옷과 헤어스타일이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니 바빠서 요즘엔 머리를 손질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질끈 동여맨 당고 스타일을 많이 하고 다니지만 그래도 발랄귀염을 추구한다. 날씨가 쌀쌀해진 요즘엔 니트 재질의 옷을 많이 입는다. 은행잎 색깔 스웨터나 분홍색 스웨터 그리고 블랙이나 녹색 야상 아니면 갈색 재킷을 주로 입는다. 그리고 스카프나 조금 얇은 소재의 목도리를 믹스매치해서 포인트를 준다. 그리고 이 계절에 빠질 수 없는 롱부츠~!를 잘 매치해주면 나름 멋스럽게 보인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자기 스타일을 찾기에 따라 매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션 전문가들은, 연예인 같은 이들을 무작정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개성을 잘 살려서 옷을 입으면 그게 더 매력적이라 말한다. 정말 그런 거 같다.

지금 내 스타일에 완전 자신 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고 싶다. 외모뿐 아니라 내면도 모두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밝음을 전해주는 스타일을 갖고 싶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품격 있는 여자이고도 싶다. 때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혼자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툭툭 털어내버릴 줄 아는 쏘~쿨한 여자이고 싶다.

그렇게 소신 있게 내 삶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 어떤 평가도 높고 낮음도 의미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재미에 관한 이야기들

진정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나는 ‘낭만 스타일’

강영순 70세. 직장인.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2동

나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한다.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새벽 5시 50분이면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집에서 지하철, 그리고 또 지하철에서 직장까지 40분을 걸어서 출근을 한다. 그렇게 매일 걷는 것만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다.

노후를 대비해 자동차 운전 기능강사 자격증을 준비했는데, 두 번의 고배 끝에 1, 2차 모두를 합격했다. 그리고 요즘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파트타임으로 운전연수를 해준다. 이 나이에 건강히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칠십 인생을 돌아보면 인생살이가 참 쉽지는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쉬는 날 없이 근면하게 일을 해왔지만, 재밌게 잘 산다는 게 어려웠다. 인생살이 긴 거 같아도 벌써 왔구나 후회하는 때가 많다. 나머지 인생은 정말 잘하고 재밌게 살아야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요새 시라고 할까, 하나 지어놓고 노래 비슷하게 부르는 게 있다. ‘참자송’과 ‘웃자송’이라고 할까. 그냥 트로트 가락을 붙여서 매일 흥얼거린다.

‘참자 참자 참자 참아야 한다 / 참다 보면 행복이 온단다 화가 나도 참고 억울해도 참고 참으면 웃음 온단다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참아야 한다 / 참아야 행복 온단다 웃자 웃자 웃자 웃자 웃어야 한다 웃다 보면은 행복이 온다…’

출퇴근할 때, 그리고 화날 일이 있을 때도 계속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하루가 그냥 즐겁다. 집을 나설 때면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까’ 생각하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강영순,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까? 그러면서 차를 타고 가면서 나보다 나이가 적든 많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리도 양보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 있으면 들어주고 버스 기사와 인사도 주고받고. 그래서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모르는 사람하고 인사를 주고받으니 더 삶이 즐거워지는 거 같다.

작년에는 집사람과 2박 3일 강원도 고향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인생을 만들어가고 싶다.

이제 결혼하여 가정을 잘 꾸려가고 있는 아들딸들도 이렇게 인생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얼마 전 아들딸에게 ‘서로서로 도우면서 재밌게 살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준 적이 있다. 지금부터 55년 전, 나의 고향 문경새재 고개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기호 작.

<무제> 53×45cm

Oil on canvas / 2008

‘아들딸아 55년 된 이야기 하나 하마. 문경새재 99고비를 넘을 때 이야기다. 그때는 포장도 되지 않는 도로를 시골 버스 막차가 막 올라가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버스를 가로막아 그냥 밀어붙이니 호랑이를 피하여 갔다. 그런데 다음 커브 길에 또 버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피해서 가기를 여러 번. 계속해서 호랑이가 나타나니 운전수가 말하길 “웃옷을 호랑이에게 던져서 옷을 받는 사람은 여기 남아서 호랑이의 밥이 돼야 한다” 했다. 그리고 운전수가 먼저 던지니 호랑이는 받지 않았다.

 

승객들이 다 던졌는데도 아무도 안 받고 장가도 안 간 삼대독자 노총각이 옷을 던졌더니 그때야 냉큼 호랑이가 받았다. 총각은 울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총각은 차에 타라”며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총각 역시 그럴 순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타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두 사람만 남기고 버스는 떠나버렸다. 노총각과 할아버지는 같이 손을 잡고 호랑이를 피하려는데, 10분도 채 안 되어 총각의 옷을 놓고 호랑이는 사라져버렸다. 근데 그때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 버스가 사고가 날 줄을 안 호랑이는, 그렇게 막아선 것이었고 정 안 되자, 삼대독자라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남을 돕고자 하는 희생정신 때문에 같이 살았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이 아버지도 다단계라는 지울 수 없는 잘못을 해서, 나와 우리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돈을 빨리 벌려고 하면 안 된다. 인생은 길다. 인생길 정답은 없지만 명답은 있단다. 적어도 이십 년, 삼십 년을 내다보고 후회될 일은 하지 마라. 서로 돕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힘든 일은 내가 먼저 하고, 좋은 일은 상대방을 먼저 챙겨주는 습관이 내 몸에 들게 되면 덩달아 나도 잘 풀린다. 좋은 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흐뭇해져서 항상 웃음 띤 얼굴이 된다.

 

이웃과 함께 형제와 함께 한세상 다하는 날까지 말도 좋은 말만 골라서 하며 살아가야 한다. 건강도, 화목도 친척 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도 내 할 탓임을 명심해다오.

 

사랑하는 아들과 딸 식구들이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주니 고맙다. 살다 보면 서운한 일도 있겠지만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예쁘게 아름답게 재밌게 살아다오.’

우리는 누구나 산타 스타일

한송이 26세. 중앙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서울 관악구에는 특별한 우체통이 있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빨간색 우체통이 아닌 지역 주민의 소망이 가득한 파랑 우체통, ‘관악소망우체통’이 바로 그것이다. 관악소망우체통은 지역 주민들이 꼭 이루었으면 하는 소망을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 지역 주민이 힘을 모아 함께 이루게 된다. 지역 주민들 모두가 산타가 되어주는 것이다.

어느 날 ‘편하게 외출하고, 한글 공부를 꼭 하고 싶다’는 한 70대 어르신의 소원이 우체통에 접수되었다.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집 앞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시고,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관계로 간단한 은행 업무도 혼자서 해낼 수 없는 할머니셨다.

소망이 접수된 후 지역 내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지역 전문가로 구성된 ‘솔루션위원회’가 모여 회의를 했다. 어떻게 이 어르신의 소원을 이룰 것인가. 무엇보다 어르신이 보다 편하게 외출할 수 있도록 ‘보행보조차’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관악구 내에 보행보조차 같은 실버 제품을 제작하는 업체들에 나눔 제안서를 보냈다. 다행히 한 업체에서 멋진 보행보조차를 무료로 보내주었다. 한글 교육을 위해서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나섰다. 두 명의 대학생이 번갈아 일주일에 2번씩 어르신 댁에 가서 한글을 가르쳤고, 3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이제 어르신은 당신의 이름과 할아버지 이름까지 멋지게 쓰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소원을 이루고 너무 고맙다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에 나도 참 기뻤다.

2년 전, 처음 사회복지사로 이 복지관에 오면서 나는 막 시작된 소망우체통 사업의 담당자가 되었다.

정기호 작.

<무제> 90×72cm

Oil on canvas / 2005

소망우체통에는 한 달에 30명 정도의 소원이 들어온다. 아들을 찾고 싶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데 내복을 선물해드리고 싶다 등 정말 다양한 사연들이 접수된다. 때로 생활수급비가 끊겨서 앞으로 생활이 걱정이다, 난방이 안 돼서 너무 춥다, 집에 있는 큰 가구가 내려앉았다 등 가슴 아픈 사연들도 많다. 매달 소원 중에서 네다섯 분 정도를 선정해서 그분들의 소원을 들어줄 산타를 찾기 시작한다. 소원에 따라서 지역 구민들이 가진 물품, 재능, 시간 등을 나눌 수 있는 산타를 찾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작게 보이는 자원들도 함께 모이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마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어머니와 멋진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주부의 소원은 지역 내 영화관의 티켓 나눔으로 ‘영화데이트’라는 소망이 성취되었고,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10대 친구의 소원은 지역 내 극단의 재능 기부로 연극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아내가 치아가 없어 힘들게 식사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했던 한 할아버지의 소원은 지역 내 치과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졌고, 아이에게 받아쓰기를 가르쳐달라는 다문화가정의 중국인 엄마의 소원도 자원봉사 대학생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소원을 이루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볼 때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손톱만큼만 나누어도 이 사회가 확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일반 업체에 연락을 하면 50군데를 돌아야 1군데에서 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마지막 한 군데에서 해주겠다고 하면 정말 49군데에서의 문전박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기쁘다.

마음은 있어도 막상 나눔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분들, 아직 자신 안의 산타 스타일을 드러낼 기회를 못 가진 분들도 많은 듯하다. 그런 분들을 찾기 위해 더 열심히 발품을 팔까 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마법을 만들어주고, 그래서 세상이 더욱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우리 안의 산타 스타일이 계속 살아날 수 있기를.

난 불량엄마 스타일

김선미 42세. <지랄발랄 하은맘의 불량육아> 저자

난 불량엄마다. 요즘 개나 소나 다 간다는 주말 캠핑 한번 가본 적 없다. 격주로 다닌다는 가족 나들이며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 간 지는 백 년쯤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하나밖에 없는 4학년 딸내미 철철이 새 옷 사준 지도 꽤 된 거 같다.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사이 소녀시대마냥 쑤욱~ 커버린 녀석의 기럭지 덕분에 엄마 옷 몇 가지 주고 같이 입자고 했더니 녀석 좋다고 입고 다닌다.

학원은 한 개도 안 보낸다. 1시 40분,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연신 논다. 공기놀이, 줄넘기, 책 보기, 장기, 바둑, 자전거 타기, 그림 그리기, DVD 보기…. 일하는 엄마 덕분에 집 앞 할아버지 댁에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놀고 있는 초등 4학년 딸내미를 둔 난, 내가 봐도 불량엄마다.

대한민국 맘이라면 누구나 내 자식 교육에 관해서만큼은 다들 눈에 불을 켠다. 미친 정보력과 촌각을 다투는 내 자식 매니지먼트로 하루하루가 바쁘다. 백만 원이 넘어가는 벤츠급 유모차, 수입 장난감, 알록달록한 메이저 브랜드의 교구, 시간당 3만 원짜리 놀이 수업, 대학 등록금보다 더 비싸다는 영어 유치원과 학원. 그걸 챙겨야 교육에 관심 많고 영리한 엄마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저 세월아 네월아~ 띵까띵까 책만 읽혔다. 그런 불량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 지금 어떻게 됐냐구?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 원~^^.”

내 코가 석자라 내 삶 챙기기도 바쁜 사이 다행히 하은이는 제법 매력적인 아이로 커버렸다. 해리포터는 원서가 재밌다고 읽고 독서 수준 열라 높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녀석의 매너와 센스, 삶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깊은 몰입과 자립심 등등.

어차피 평생 품에서 챙겨줄 수 없는 게 내 자식이다. 그렇다고 네가 알아서 살아라, 방치해서 키워서는 더더욱 안 되는 바. 낳아놨으면 잘 키워야 하는 게 관건이다.

하은이가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내면의 힘으로 생활도, 관계도, 놀이도, 학업도 즐기며 자신 있게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사실, 어린 시절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녀석과 나누었던 눈빛 나눔, 24시간 징그러운 피부 접촉, 마음 나누기였다. 그리고 그 속엔 책이 항상 있었다. 남들 손가락질받으며 집에 녀석이 읽을 전집과 어미의 양식과도 같은 육아서를 계속 들이고, 새벽 3시가 넘어가도록 애가 원할 때까지 밤새 책을 읽어주며 녀석의 눈빛과 몸짓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었다. 사실 그게 나이 든 어미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남들처럼 밤새 인터넷 뒤져 새로운 육아 정보 꿰차고 휘황찬란한 육아 용품 들여 신식으로 키워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왜 안 불안했겠는가. 헌데 녀석과 24시간 찰싹 붙어 눈과 몸을 비비대며 지내다 보면 내 아이에게 적합한 육아법이 새순 돋아나듯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 오롯이 돋아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게 아닌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믿어주고 허용해주는 거라는 게 세포 사이사이 스며들었다. 미친 듯이 사랑해주고 뽀뽀해주기만 하면 됐다. 아이도 애를 쓰며 맨땅에 헤딩하는 어미의 노력을 그 맑은 눈과 몸으로 느끼며, 어미를 품고 이해하고 신뢰해주었다. 그 신뢰의 힘이 세상으로 이어져 누굴 만나든 생기와 에너지가 넘쳤다. 어찌나 예쁜지, 어찌나 기특한지….

정기호 작.

<여인과 새> 72×60cm

Oil on canvas / 2000

까꿍이 시절 5년을 미친 듯이 육아에 올인한 후 손 탁탁~! 털고 세상으로 나온 엄마. 그로 인해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 일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턱없이 많았지만 녀석은 너무도 잘 이겨내 주었다. 아직 어린애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조언을 가장한 비난들. 그래, 총알이 가슴팍을 관통하는 느낌이 그랬으리라. 헌데 지금은 그 힘겨운 시간들이 또 5년을 지나고 나니 홀로 당당히 선 녀석과 내가 있다. 녀석은 녀석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삶에 적당히 ‘관여’만 할 뿐, 깊이 간섭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이젠 그러지도 못한다. 숙제도 준비물도 시험도 친구 관계도 아이 스스로 해야만 했던 척박했던 초등 생활. 울고 불며 전화통 붙잡고 허둥대던 모녀의 모습은 추억 속에만 있을 뿐 이젠 편안하게 농담 따먹기 하는 두 친구가 그 자리를 대신해 있다.

난 지금 내 딸의 삶보다 내 삶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지금보다 더 멋져지면 녀석은 그대로 따라오니까. 어미의 멋진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왜 회의를 하나?

하루에 혹은 일주일에 몇 번이나 회의를 하시는지요? 업무회의, 부서회의, 팀장회의, 간부회의에다 소소한 회의까지 합치면 하루가 회의만 하다 끝날 때도 있습니다. 그나마 이왕 시작한 거 깔끔하게 결론이나 나면 좋으련만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산으로 가고, ‘그래서 결론이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때도 있고요. 이런 날이 반복되면 ‘회의(會議)가 회의(懷疑)적이군’ 하는 말이 절로 나오지요. 회의를 잘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 회의를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지 점검해봅니다. – 편집자 주

회의 참석자들의 지위가 다양할 때, 직급이 낮은 직원은 상관 앞에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당신이 의장이라면 분위기를 잘 살펴서 상관이 말을 하기 전에 직급이 낮은 사람들이 먼저 정보를 제공하거나,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마련해 주어라. 이때는 무대 감독의 역할을 어느 정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직급이 낮은 사람이 발언하는 것을 환영하고 격려해줘야 한다.

수 비숍

조직이 잘못 짜여 있으면 회의에 그대로 나타난다. 목표를 달성하는 경영자들은 ‘우리가 회의를 개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이해시켜야 한다.

피터 드러커

직장인들은 주요 업무 중 하나인 회의에 대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54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회의 효율성은 5점 만점에 평균 2.8점에 그쳤다. 회의가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결론은 없고 시간만 낭비하기 때문에’가 47%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항상 결론은 상사가 결정하기 때문’ 26.5%, ‘회의를 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인데 회의를 하기 때문’ 14.6%, ‘의견을 내는 사람만 내기 때문’ 7.3% 순이었다.

또한 전체 응답자의 42.1%는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유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면 내 일이 될 것 같아서’가 30.7%를 차지했다. ‘갈등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28.4%, ‘의견을 내도 반영되지 않아서’ 25.7%,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15.2% 등의 답변도 다수였다. 한편 직장인들은 ‘비효율적인 회의’를 일주일에 평균 3.2회 정도 참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2회’가 44.6%로 가장 많았으며 ‘3~4회’ 26.5%, ‘5~6회’ 15.1%, ‘전혀 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4.6%였다.

2.9:1은 무엇일까? 이를 로사다 비율이라고 하는데, 긍정성과 부정성의 비율을 말한다. 바버라 프레드릭슨(심리학자)과 마셜 로사다(수학자)가 60개 기업의 회의 내용을 녹취해 긍정적 단어와 부정적 단어의 사용 비율을 분석한 결과, 그 비율이 2.9 이상이면 번성하고 그 미만이면 쇠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적인 말을 한 번 할 때, 긍정적인 말을 세 번 이상 해야 좋은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조직이 발전할 수 있으며, 긍정적인 단어 사용이 서로의 이해를 돕고 조직의 성과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회의, 서서 해보면 어떨까요?

미국 미주리대학 연구팀은 미국 내 1백 11개의 회의 운영 실태를 관찰한 결과 의자에 앉아서 하는 회의가 서서 진행하는 회의보다 시간은 더 많이 소요되는 데 비해, 의사 결정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결과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19~44세 학생 5명을 한 조로 구성, 56개의 서서 하는 회의와 55개의 앉아서 하는 회의에 참석케 했다. 그 결과 서서 하는 회의보다 앉아서 하는 회의에 34%가량의 시간을 더 많이 빼앗겼지만 서서 하는 회의에 더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앉아서 하는 회의가 더 많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의에 대한 예의

1. 지각은 없다. 10시 3분은 10시가 아니다. 2. 아이디어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무죄, 맑은 머리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유죄. 3. 누군가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땐 마음을 활짝 열 것. 인턴의 아이디어에도 가능성의 씨앗은 숨어 있다. 4. 말을 많이 할 것. 비판과 논쟁과 토론만이 회의를 회의답게 만든다. 5. 회의실 안의 모두는 평등하다. 아무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팀장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무자비해야만 한다.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6. 아무리 긴 회의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7. 회의실에 들어올 땐 텅 빈 머리일지라도 회의실에서 나갈 땐 각자 할 일을 명확히 알아야만 한다. 다음 회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김민철. <우리 회의나 할까?>(사이언스북스) 중에서

모두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회의 – 자신의 권력을 놓아보자

효율적인 회의에 대해 수많은 조언과 방법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회의가 비생산적이고 피곤하며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장 선진적인 글로벌 컨설팅 회사조차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회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무언의 회의’를 자주 경험하곤 한다. 문제는 회의 형식이나 시간, 장소가 아니라 회의 자체에 있다. 회의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사회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직급에 따른 힘(회의 권력)과 관련된다. 특히 수직적인 체계,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한 조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회의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적극적인 사람은 둘 중 하나다. 그 회사 내에서 직급이 높거나 아예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회사에서 직급이 높은 사람은 회의 자체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회의에서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부장이 주최하는 회의에서 과장은 위험을 느끼고, 사장이 주최하는 회의에서 부장은 움츠러든다. 회의 방식을 아무리 선진적인 형태로 바꾸더라도, 회의의 본질적관계가 변화되지 않으면 여전히 참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게 된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우리 한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 다 들어줄게”라고 말하지만, 정작 직원들은 “또 우리를 괴롭히는구나…” 하면서 힘들어할 뿐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커피를 마시며 신나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회의가 시작됨과 동시에 후천적 언어 장애를 겪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매우 어렵다. 누군가 자신의 회의 권력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편집팀 회의에서 편집장이 자신의 회의 권력을 포기해야 다른 부서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회계팀 발표자가 자신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참석자들이 회의 내용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게 되며, 대표이사가 자신의 권력을 근거로 발표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으려 할 때 비로소 회의 참석자들이 입을 열게 된다. 결국 회의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행복감을 느끼고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번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하는지 점검해보면 어떨까. 간단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회의에 함께하는 것이 효율적인 회의의 핵심인 것이다.

이준영. 41세. 웹서비스 컨설턴트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오늘날 젊은이들이 겪는 고충은 전 세대와는 상반된 성격을 띠고 있다. 과거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던 속박의 상황이었다면 반대로 지금 세대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늘어난 만큼 책임의 몫도 커졌다. 어떠한 성공을 하든, 실수를 하든 책임은 선택한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의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단순히 만족감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책감까지 느껴야 하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젊은 청춘들을 위로하는 힐링 책이 각광을 받는 것도 이러한 선택 과잉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몰라서, 부모가 기대하는 삶, 세상이 기대하는 삶, 친구들과 비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 아픈 청춘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다른 삶을 위해 딱히 노력도 하지 않는 직장인들, 퇴직 후에 맞이할 노년이 두렵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중년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후회 없는 선택을 하며 살 수는 없을까.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에 대해 생각해본다.

정리 문진정  참조 도서 <선택의 조건>(바스 카스트 | 한국경제신문)

선택할 게
많은데도
기쁘지 않은
이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골머리를 앓게 된다. 우리가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숫자는 7~9개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선택할 게 많다는 것은 아쉬워하며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남과 비교하느라 자신의 선택에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하고 계속 미련이 남는다. 교환할 수 없는 물건은 장점을 찾고 물건에 만족하는 반면 교환 가능한 물건은 어디에 하자가 없는지부터 찾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택한 후에도 선택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 비슷한 30종류의 물건 중 하나를 샀다면 자신도 모르게 “너 때문에 내가 29개의 다른 훌륭한 것들을 포기했어. 네가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하길 바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경우 죄책감과 후회도 커진다. 그것이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결정이었다면 우리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며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만족한
선택을 위한
제안

거꾸로 생각하자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있다고 가정하고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자. 나는 무슨 일을 더 하고 싶고 덜 하고 싶은가?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또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선택을 할 때 죽음, 이별, 무소유 등 거꾸로 생각해보면 의외로 판단이 쉬워진다.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하자

‘귀농을 하면…’ ‘이직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면…’ 실천하지 않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것은 제한된 우리 상상 속에서 예쁘게 포장되기 때문에 현실과 괴리감이 크다. 1개월이든, 3개월이든 실천을 해보는 순간 나에게 맞는 일인지, 기쁨을 주는 일인지, 정말 할 수 있는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의도적인 싱글태스킹(한 번에 한 가지만)

금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한 빼기 습관을 길러보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정해서 보고, 이메일 체크는 하루에 두 번만, 온라인은 3시간만 이용하기 등 기준을 정한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거나 낭만적인 주말을 보낼 때는 잠시 휴대폰을 꺼두는 것도 좋다.

아토피 전문 한의사 박치영씨의 마음수련 이야기

아토피 치료에서의 마음빼기 원리를 설명하는 박치영 한의사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피부 계통의 명의로 알려진 박치영 한의사. 그가 환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오랫동안 심한 피부병을 앓으며 생긴 환자들의 마음의 병까지도 함께 치료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보통 서양의학에서 아토피는 난치성 질환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90% 이상 치료된다고 확신한다. 그 치료법의 근본 원리는 바로 ‘독소 빼기’. 박치영 한의사가 전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몸 마음 빼기 이야기. 정리 최창원 사진 김혜진

피부 질환을 고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해요. 살아온 환경은 어떤지, 작업 여건은 어떤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래서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오랫동안 아토피 같은 피부병을 앓고 나면 마음까지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심하면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까지 앓기도 하죠.

특히 요즘에는 ‘국민병’이라고 할 만큼 아토피 환자가 많아졌는데,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는 말도 못하게 힘들어요. 통증보다 참기 힘든 게 가려움인데, 하루 종일 긁고 보채고 우는 데다 몸을 하도 긁어서 온몸에 피가 나는 걸 봐야 하니까요. 정말 하루 종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꼭 낫게 해드리고 싶어집니다.

“잘 오셨습니다. 피부병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같이 치료해봐요.”

이런저런 치료 방법들을 시도해보다 좌절하신 분들이 많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치료를 시작합니다. 피부병이 낫는 데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해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을 잡지요. 점점 염증이 사라지고 깨끗한 새살이 돋아나면서 환자들 얼굴에 웃음이 피어날 때 저도 너무 행복해져요.

피부병 치료의 희망을 기록한 나무

작년 연말 병원 소망트리에 마련된 소망카드에 적은 환자들의 소원. 피부병이 나은 후 희망, 동기를 부여하고 싶어서 만들었다.

사실 서양의학에서는 아토피는 난치성 질환이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그동안의 경험상 90% 이상은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치료 원리는 단순해요. ‘배독 요법’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빼기 치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 습관으로 생긴 내부의 염증이나 독소들을 땀으로 빼내는 거예요. 그래서 한약 처방과 함께 목욕법, 운동법, 식이요법 등을 병행합니다. 좁은 공간에서도 할 수 있는 절 운동을 권하기도 해요. 30분 정도 절을 하면 땀이 나면서 독소도 제거되고,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서 스트레스 관리도 되거든요.

피부는 내부 장기의 건강 상태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아요. 동의보감에 ‘폐주피모(肺主皮毛)’라는 말이 있는데, 즉 폐가 피부와 털을 주관한다는 말입니다. 아토피를 예를 들면, 폐와 호흡기를 중심으로 한 전신의 불균형에서 온 이상(atophos)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신체에서 발생하는 열이나 탁한 기운이 배출될 수 있도록 폐 기능을 향상시켜 주고, 장기의 균형까지 잡아주는 방법을 통해 근본적인 치료를 하는 거지요.

그리고 마음의 빼기도 정말 중요합니다. 염증(炎症)이라고 할 때, 염은 불 화(火)자 두 개가 붙잖아요. 오늘날 아토피의 원인은 스트레스가 많아요. 화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당황하거나 열 받으면 얼굴이 붉어지잖아요. 긴장, 우울, 분노, 근심, 걱정 같은 마음의 스트레스들이 몸의 기혈을 막고, 혈액의 흐름을 정체시키니까, 피부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죠. 그래서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피부도 칙칙해져요.

마음빼기를 권하는 아토피 전문 한의사 생기한의원 박치영 원장

생기한의원 로고는 “진심으로 낫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 고마워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다”는 디자이너 환자분이 아무 대가 없이 해준 것이다. 그리고 치료된 환자들 중엔 고맙다며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분들도 많다. 한의원 벽면을 채운 환자들과 찍은 사진 등등을 보면 그가 환자들과 얼마나 진심으로 교감했는지 느낄 수 있다.

스트레스가 많은 분들에게는 마음 빼기를 함께 권해요. 피부 관리 노하우를 묻는 분들에게도 고가의 화장품이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빼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고 얘기합니다. 스트레스를 빼내고, 몸에 안 좋은 것을 덜 먹고, 등산 운동 반신욕 등을 통해서 독소를 빼내는 습관이 몸에 배면 피부 건강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빼기 치료’를 이해하게 되고, 한의사로서의 비전을 갖게 된 것은 마음수련을 통해서였습니다. 마음수련은 대학 본과 2학년 때 하게 되었는데, 마음수련의 원리는 정말 과학적이고 간단했어요. 내가 쌓아온 마음을 빼버리면, 원래의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한의학에서는 사람을 소우주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마음수련을 하다 보니까 내가 우주고, 사람이 우주더라고요. 그걸 알고 난 뒤로는 한의학이 너무나 잘 이해가 갔어요.

그러다가 운 좋게 공중보건한의사 생활을 하면서 피부 질환 치료에 엄청난 노하우가 있는 한의사분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그분의 스승님도 만나게 됐는데, 치료의 원리는 빼기였어요. 이미 마음수련을 하면서 빼기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딱 다가왔지요.

제대 후에 한의원을 개원해서, 본격적으로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증의 아토피 환자, 건선, 지루성피부염, 두드러기, 여드름….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면서 모든 피부병이 ‘빼기의 원리’로 나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지요. 그리고 실제 낫는 병인데도 ‘아토피는 불치병’이라고 인식하는 의사들이 많은 게 안타까워서, 책도 쓰고 무료 강의도 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노하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거든요.

박치영 한의사의 마음수련 이야기

진료받는 것을 겁내는 어린아이들이 오면 가운을 벗거나, 아예 대기실에서 편안하게 진료를 해주곤 한다.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 옷을 입는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치료한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가 단순히 피부의 병만이 아니라 삶의 희망까지 줄 수 있는 의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에 한 환자분이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보내셨어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연애 한번 못해본 아가씨였거든요. 온갖 좋다는 방법을 다 써 봐도 안 되니까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저희 한의원에 온 거였어요. 1년 정도 꾸준히 치료받으면서 나았는데, 그 아가씨의 소원이 연애였거든요. 그런데 결혼을 하신다니 정말 기쁘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연구하고 노력하게 돼요.

“원장님은 행복하십니까?” 언젠가 한 환자분이 진료 중에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예,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라는 대답이 저도 모르게 나오더군요. 그분이 보시기에 제가 늘 행복해 보여서, 언젠가 꼭 묻고 싶으셨대요.

사실 한의사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평수 없는 감옥에 산다는 말을 많이 해요. 하루 종일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봐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다행히도 학생 때부터 매일매일 마음을 빼면서 살다 보니까, 갈수록 세상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점점 편해져간 거 같아요. 지금도 늘 하루를 돌아보며 저에게 묻습니다.

기러기에게 배우다

겨울 하늘에 ‘V’자를 수놓으며 기러기 떼가 날아갑니다.
한겨울을 잘 보내기 위해 멀리 시베리아에서 찾아든 것이지요.
그냥 이맘때 흔히 보는 철새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기러기들이 ‘V’자로 날아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선두부터 서로 날개를 퍼덕이며 공기의 저항을 감소시켜서
뒤의 기러기가 손쉽게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힘들고 위험한 V자 대형의 선두를 맡느냐’입니다.
왜냐하면 선두의 기러기는 거친 맞바람을 가르면서 비행해야 하므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모해서 병이 들기 쉽고,
천적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기러기들은 힘이 센 누구 하나가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번갈아가면서 선두 자리를 분담한다는군요.
앞장선 기러기가 지치면 뒤로 물러나고
뒤에 있던 기러기가 차례로 앞으로 나서며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뒤따르는 기러기들은 선두에 선 기러기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번갈아가며 ‘끼룩끼룩’ 구령도 붙여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리로써 자신뿐 아니라 다른 기러기들에게도
‘우리는 함께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신념과 믿음을 주는 것이지요.
간혹 대형에서 벗어나는 기러기가 생기면 다른 기러기가 다가와
쪼아대거나 야단치는 등 나름 통제하는 시스템도 있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먼 거리를 비행하다가 병에 걸리는 기러기가 생기면
가족 또는 동료 두세 마리가 함께 이탈하여 아픈 기러기를 돌보고,
이후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함께 이동한다고 합니다.
아픔도 공유하며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지요.

늘 자연에서 배우지만 기러기에게도 배울 게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리더의 역할과 자세, 소통하고 협동하는 정신 그리고 사랑과 배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코끝을 스칩니다.
그래도 기러기 떼를 떠올리면 왠지 마음만은 훈훈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욱 따뜻하고 행복한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