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평가도 높고 낮음도 의미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재미에 관한 이야기들

진정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나는 ‘낭만 스타일’

강영순 70세. 직장인.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2동

나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한다.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새벽 5시 50분이면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집에서 지하철, 그리고 또 지하철에서 직장까지 40분을 걸어서 출근을 한다. 그렇게 매일 걷는 것만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다.

노후를 대비해 자동차 운전 기능강사 자격증을 준비했는데, 두 번의 고배 끝에 1, 2차 모두를 합격했다. 그리고 요즘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파트타임으로 운전연수를 해준다. 이 나이에 건강히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칠십 인생을 돌아보면 인생살이가 참 쉽지는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쉬는 날 없이 근면하게 일을 해왔지만, 재밌게 잘 산다는 게 어려웠다. 인생살이 긴 거 같아도 벌써 왔구나 후회하는 때가 많다. 나머지 인생은 정말 잘하고 재밌게 살아야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요새 시라고 할까, 하나 지어놓고 노래 비슷하게 부르는 게 있다. ‘참자송’과 ‘웃자송’이라고 할까. 그냥 트로트 가락을 붙여서 매일 흥얼거린다.

‘참자 참자 참자 참아야 한다 / 참다 보면 행복이 온단다 화가 나도 참고 억울해도 참고 참으면 웃음 온단다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참아야 한다 / 참아야 행복 온단다 웃자 웃자 웃자 웃자 웃어야 한다 웃다 보면은 행복이 온다…’

출퇴근할 때, 그리고 화날 일이 있을 때도 계속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하루가 그냥 즐겁다. 집을 나설 때면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까’ 생각하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강영순,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을 할까? 그러면서 차를 타고 가면서 나보다 나이가 적든 많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리도 양보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 있으면 들어주고 버스 기사와 인사도 주고받고. 그래서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모르는 사람하고 인사를 주고받으니 더 삶이 즐거워지는 거 같다.

작년에는 집사람과 2박 3일 강원도 고향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인생을 만들어가고 싶다.

이제 결혼하여 가정을 잘 꾸려가고 있는 아들딸들도 이렇게 인생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얼마 전 아들딸에게 ‘서로서로 도우면서 재밌게 살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준 적이 있다. 지금부터 55년 전, 나의 고향 문경새재 고개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기호 작.

<무제> 53×45cm

Oil on canvas / 2008

‘아들딸아 55년 된 이야기 하나 하마. 문경새재 99고비를 넘을 때 이야기다. 그때는 포장도 되지 않는 도로를 시골 버스 막차가 막 올라가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버스를 가로막아 그냥 밀어붙이니 호랑이를 피하여 갔다. 그런데 다음 커브 길에 또 버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피해서 가기를 여러 번. 계속해서 호랑이가 나타나니 운전수가 말하길 “웃옷을 호랑이에게 던져서 옷을 받는 사람은 여기 남아서 호랑이의 밥이 돼야 한다” 했다. 그리고 운전수가 먼저 던지니 호랑이는 받지 않았다.

 

승객들이 다 던졌는데도 아무도 안 받고 장가도 안 간 삼대독자 노총각이 옷을 던졌더니 그때야 냉큼 호랑이가 받았다. 총각은 울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총각은 차에 타라”며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총각 역시 그럴 순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타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두 사람만 남기고 버스는 떠나버렸다. 노총각과 할아버지는 같이 손을 잡고 호랑이를 피하려는데, 10분도 채 안 되어 총각의 옷을 놓고 호랑이는 사라져버렸다. 근데 그때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 버스가 사고가 날 줄을 안 호랑이는, 그렇게 막아선 것이었고 정 안 되자, 삼대독자라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남을 돕고자 하는 희생정신 때문에 같이 살았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이 아버지도 다단계라는 지울 수 없는 잘못을 해서, 나와 우리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돈을 빨리 벌려고 하면 안 된다. 인생은 길다. 인생길 정답은 없지만 명답은 있단다. 적어도 이십 년, 삼십 년을 내다보고 후회될 일은 하지 마라. 서로 돕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힘든 일은 내가 먼저 하고, 좋은 일은 상대방을 먼저 챙겨주는 습관이 내 몸에 들게 되면 덩달아 나도 잘 풀린다. 좋은 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흐뭇해져서 항상 웃음 띤 얼굴이 된다.

 

이웃과 함께 형제와 함께 한세상 다하는 날까지 말도 좋은 말만 골라서 하며 살아가야 한다. 건강도, 화목도 친척 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도 내 할 탓임을 명심해다오.

 

사랑하는 아들과 딸 식구들이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주니 고맙다. 살다 보면 서운한 일도 있겠지만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예쁘게 아름답게 재밌게 살아다오.’

우리는 누구나 산타 스타일

한송이 26세. 중앙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서울 관악구에는 특별한 우체통이 있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빨간색 우체통이 아닌 지역 주민의 소망이 가득한 파랑 우체통, ‘관악소망우체통’이 바로 그것이다. 관악소망우체통은 지역 주민들이 꼭 이루었으면 하는 소망을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 지역 주민이 힘을 모아 함께 이루게 된다. 지역 주민들 모두가 산타가 되어주는 것이다.

어느 날 ‘편하게 외출하고, 한글 공부를 꼭 하고 싶다’는 한 70대 어르신의 소원이 우체통에 접수되었다.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집 앞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시고,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관계로 간단한 은행 업무도 혼자서 해낼 수 없는 할머니셨다.

소망이 접수된 후 지역 내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지역 전문가로 구성된 ‘솔루션위원회’가 모여 회의를 했다. 어떻게 이 어르신의 소원을 이룰 것인가. 무엇보다 어르신이 보다 편하게 외출할 수 있도록 ‘보행보조차’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관악구 내에 보행보조차 같은 실버 제품을 제작하는 업체들에 나눔 제안서를 보냈다. 다행히 한 업체에서 멋진 보행보조차를 무료로 보내주었다. 한글 교육을 위해서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나섰다. 두 명의 대학생이 번갈아 일주일에 2번씩 어르신 댁에 가서 한글을 가르쳤고, 3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이제 어르신은 당신의 이름과 할아버지 이름까지 멋지게 쓰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소원을 이루고 너무 고맙다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에 나도 참 기뻤다.

2년 전, 처음 사회복지사로 이 복지관에 오면서 나는 막 시작된 소망우체통 사업의 담당자가 되었다.

정기호 작.

<무제> 90×72cm

Oil on canvas / 2005

소망우체통에는 한 달에 30명 정도의 소원이 들어온다. 아들을 찾고 싶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데 내복을 선물해드리고 싶다 등 정말 다양한 사연들이 접수된다. 때로 생활수급비가 끊겨서 앞으로 생활이 걱정이다, 난방이 안 돼서 너무 춥다, 집에 있는 큰 가구가 내려앉았다 등 가슴 아픈 사연들도 많다. 매달 소원 중에서 네다섯 분 정도를 선정해서 그분들의 소원을 들어줄 산타를 찾기 시작한다. 소원에 따라서 지역 구민들이 가진 물품, 재능, 시간 등을 나눌 수 있는 산타를 찾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작게 보이는 자원들도 함께 모이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마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어머니와 멋진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주부의 소원은 지역 내 영화관의 티켓 나눔으로 ‘영화데이트’라는 소망이 성취되었고,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10대 친구의 소원은 지역 내 극단의 재능 기부로 연극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아내가 치아가 없어 힘들게 식사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했던 한 할아버지의 소원은 지역 내 치과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졌고, 아이에게 받아쓰기를 가르쳐달라는 다문화가정의 중국인 엄마의 소원도 자원봉사 대학생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소원을 이루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볼 때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손톱만큼만 나누어도 이 사회가 확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일반 업체에 연락을 하면 50군데를 돌아야 1군데에서 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마지막 한 군데에서 해주겠다고 하면 정말 49군데에서의 문전박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기쁘다.

마음은 있어도 막상 나눔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분들, 아직 자신 안의 산타 스타일을 드러낼 기회를 못 가진 분들도 많은 듯하다. 그런 분들을 찾기 위해 더 열심히 발품을 팔까 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마법을 만들어주고, 그래서 세상이 더욱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우리 안의 산타 스타일이 계속 살아날 수 있기를.

난 불량엄마 스타일

김선미 42세. <지랄발랄 하은맘의 불량육아> 저자

난 불량엄마다. 요즘 개나 소나 다 간다는 주말 캠핑 한번 가본 적 없다. 격주로 다닌다는 가족 나들이며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 간 지는 백 년쯤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하나밖에 없는 4학년 딸내미 철철이 새 옷 사준 지도 꽤 된 거 같다.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사이 소녀시대마냥 쑤욱~ 커버린 녀석의 기럭지 덕분에 엄마 옷 몇 가지 주고 같이 입자고 했더니 녀석 좋다고 입고 다닌다.

학원은 한 개도 안 보낸다. 1시 40분,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연신 논다. 공기놀이, 줄넘기, 책 보기, 장기, 바둑, 자전거 타기, 그림 그리기, DVD 보기…. 일하는 엄마 덕분에 집 앞 할아버지 댁에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놀고 있는 초등 4학년 딸내미를 둔 난, 내가 봐도 불량엄마다.

대한민국 맘이라면 누구나 내 자식 교육에 관해서만큼은 다들 눈에 불을 켠다. 미친 정보력과 촌각을 다투는 내 자식 매니지먼트로 하루하루가 바쁘다. 백만 원이 넘어가는 벤츠급 유모차, 수입 장난감, 알록달록한 메이저 브랜드의 교구, 시간당 3만 원짜리 놀이 수업, 대학 등록금보다 더 비싸다는 영어 유치원과 학원. 그걸 챙겨야 교육에 관심 많고 영리한 엄마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저 세월아 네월아~ 띵까띵까 책만 읽혔다. 그런 불량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 지금 어떻게 됐냐구?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 원~^^.”

내 코가 석자라 내 삶 챙기기도 바쁜 사이 다행히 하은이는 제법 매력적인 아이로 커버렸다. 해리포터는 원서가 재밌다고 읽고 독서 수준 열라 높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녀석의 매너와 센스, 삶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깊은 몰입과 자립심 등등.

어차피 평생 품에서 챙겨줄 수 없는 게 내 자식이다. 그렇다고 네가 알아서 살아라, 방치해서 키워서는 더더욱 안 되는 바. 낳아놨으면 잘 키워야 하는 게 관건이다.

하은이가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내면의 힘으로 생활도, 관계도, 놀이도, 학업도 즐기며 자신 있게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사실, 어린 시절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녀석과 나누었던 눈빛 나눔, 24시간 징그러운 피부 접촉, 마음 나누기였다. 그리고 그 속엔 책이 항상 있었다. 남들 손가락질받으며 집에 녀석이 읽을 전집과 어미의 양식과도 같은 육아서를 계속 들이고, 새벽 3시가 넘어가도록 애가 원할 때까지 밤새 책을 읽어주며 녀석의 눈빛과 몸짓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었다. 사실 그게 나이 든 어미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남들처럼 밤새 인터넷 뒤져 새로운 육아 정보 꿰차고 휘황찬란한 육아 용품 들여 신식으로 키워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왜 안 불안했겠는가. 헌데 녀석과 24시간 찰싹 붙어 눈과 몸을 비비대며 지내다 보면 내 아이에게 적합한 육아법이 새순 돋아나듯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 오롯이 돋아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게 아닌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믿어주고 허용해주는 거라는 게 세포 사이사이 스며들었다. 미친 듯이 사랑해주고 뽀뽀해주기만 하면 됐다. 아이도 애를 쓰며 맨땅에 헤딩하는 어미의 노력을 그 맑은 눈과 몸으로 느끼며, 어미를 품고 이해하고 신뢰해주었다. 그 신뢰의 힘이 세상으로 이어져 누굴 만나든 생기와 에너지가 넘쳤다. 어찌나 예쁜지, 어찌나 기특한지….

정기호 작.

<여인과 새> 72×60cm

Oil on canvas / 2000

까꿍이 시절 5년을 미친 듯이 육아에 올인한 후 손 탁탁~! 털고 세상으로 나온 엄마. 그로 인해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 일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턱없이 많았지만 녀석은 너무도 잘 이겨내 주었다. 아직 어린애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조언을 가장한 비난들. 그래, 총알이 가슴팍을 관통하는 느낌이 그랬으리라. 헌데 지금은 그 힘겨운 시간들이 또 5년을 지나고 나니 홀로 당당히 선 녀석과 내가 있다. 녀석은 녀석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삶에 적당히 ‘관여’만 할 뿐, 깊이 간섭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이젠 그러지도 못한다. 숙제도 준비물도 시험도 친구 관계도 아이 스스로 해야만 했던 척박했던 초등 생활. 울고 불며 전화통 붙잡고 허둥대던 모녀의 모습은 추억 속에만 있을 뿐 이젠 편안하게 농담 따먹기 하는 두 친구가 그 자리를 대신해 있다.

난 지금 내 딸의 삶보다 내 삶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지금보다 더 멋져지면 녀석은 그대로 따라오니까. 어미의 멋진 뒷모습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