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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7, 그리고 1994

“당신은 언제 첫사랑이 그리운가요?”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첫사랑을 추억하는 방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살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지금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내 마음속에 숨겨둔 순수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꺼내들게 된다. 그건 단지 첫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직은 많은 가능성을 품었던 나를 꺼내보는 것이니까.

<응답하라 1997(이하 응7)>에 이어, 호응을 얻고 있는 <응답하라 1994(이하 응4)>는 흡사, 이렇게 다시 꺼내보는 첫사랑과도 같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90년대의 그 시절에는 한없이 철없어 보이는 ‘빠순이’요, 서울에 와서 하숙집조차 제대로 못 찾아가고,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주문조차 못하는 ‘모질이’로 시작된다. 하지만 <응7>에서도 그랬듯이, 그런 그들이 현재로 오면 대단한 사람들이 되어 있다. 한없이 부족해 보이던 그들이 2013년의 현재로 오면 강남의 고층 아파트에 살며 넥타이를 맨 그럴 듯해 보이는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수나 쫓아다니고, 농구장이나 들락거리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거 없어 뵈는 철없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통령 후보도 되고, IT강국의 주체가 되고,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냈다는 세대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이다.

90년대의 세대가 누구인가. 고단했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낸 선배 세대와 달리, 정치적으로는 상대적 안정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풍족하게 젊음을 누렸던 세대다. X세대다 뭐다 하며 유별난 별칭을 가지고, ‘빠순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문화를 누릴 여건을 지녔던 세대였던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오히려 지금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란 고달프다.
경제는 장기적 불황기에 들어서, 앞선 세대와 달리 직장도, 집도, 그 어느 것도 녹록하게 내 몫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불안한 사회 안전망으로 인해 늘 위태롭고 흔들릴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어떤가. 지난 대선이 세대 대결이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첨단의 SNS 등을 통해 ‘투표’를 독려했으나, 최근 불거진 대선 결과를 둘러싼 부정 음모 등으로 패배 의식을 떠안았을 뿐이다. 획일적 문화와 조직적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개인을 흔들고 나락에 빠뜨리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세대적 불안함과 허무함을 위로한 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단지 추억팔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억을 길어 현실의 고단함을 툭툭 위로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나탈리 우드가 나왔던 영화 <초원의 빛>처럼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며 그 시절의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음을 다시금 조명해 준다.

현실에 지치고 고달픈 이 시대의 주역들에게, ‘너희들에게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어. 그리고 그런 시대를 지나 너희는 이만큼 성장하고 이루어내었어’ 하고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자존감’을 가지라고, 첫사랑을 꺼내보듯, 그 찌질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답던 청춘을 되새기며 위로받으라고.

물론 ‘추억’은 위험하기도 하다. 첫사랑과의 추억에 빠지다 지금의 사랑을 놓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주저앉아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때로는 빛이었던 자신의 젊은 날이 다시 한 번 일어설 힘이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부디,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90년대 세대에게 위로가 되기를.

이정희

케이블카 타고 산에 올라요

글 & 사진 김홍수 여행작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 저자

아이들이 유모차만 타고 다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 시작하면 부모는 조금씩 욕심이 생깁니다. 함께 산을 오르고도 싶고 경치 좋은 숲길이나 해변 길도 걷고 싶어지지요. 이 시기에 아이들과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케이블카입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들에 환호하고, 높은 산 정상에 서서 각종 포즈를 취하는 내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하고 매력적인 여행입니다.

○ 설악산 케이블카
설악산 여행 하면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고, 신흥사 경내를 둘러본 후 비선대까지 산보를 하거나, 울산바위에 올라 야호를 한번 부르고 오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하면 좋은 것이 바로 권금성 케이블카와 비선대까지 이어지는 숲길을 걷는 것이지요. 케이블카에서 내려 15분 정도 올라가면 권금성의 정상인 봉화대에 도착합니다. 봉화대에서 깃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면 만물상, 공룡능선 같은 외설악의 멋진 경치와 병풍처럼 펼쳐지는 울산바위의 웅장함을 한눈에 볼 수 있고요, 멀리 보이는 속초 시내와 푸른 동해도 찬찬히 감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TIP  케이블카 탑승까지 시간 여유가 있을 경우 탑승권만 미리 구입하고
비선대까지 걸어갔다 오는 것도 좋습니다.

○ 통영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
경남 통영시 미륵산에 가면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섬들과 통제영 300년 역사를 가진 통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습니다. 케이블카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남해 곳곳에 들어선 섬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TIP  충무김밥이나 꿀빵을 간식으로 준비해서 미륵산 정상에서 먹으면 꿀맛이랍니다.

○ 남산 케이블카
서울 사람들조차 가까이에 두고도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 남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산 케이블카는 서울의 오랜 명물로, 옛날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한번 내려다보면 서울 구경 다 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서울에 산다 할지라도 한 번쯤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 구경을 해보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로 남습니다.

TIP  대중교통 이용, 오전에 서둘러 탑승해요. N서울타워 셔틀 운행 코스
및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가면 편리합니다.

○ 울릉도 독도전망대 케이블카
독도전망대에 오르면 울릉도 도동항이 한눈에 보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87km 떨어진 독도까지 전망할 수 있다 합니다. 독도전망대 케이블카 승강장 바로 옆에는 쏘는 듯한 맛이 인상적인 도동 약수터와 독도박물관도 있습니다. 입장료는 무료.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독도의 모습을 생중계하는 모니터가 보이고, 그 외 독도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독도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울릉도의 생활 모습과 옛 풍습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물들도 아이들에게는 아주 인기가 많답니다.

TIP  날씨가 맑은 날 케이블카에 탑승해야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케이블카를 이용할 경우 인터넷이나 현장 예약을 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기다렸다 타야 하니까요. 현장에서 티켓을 구입해야만 한다면 시간이 남을 때 갈 수 있는 곳을 미리 알아두면 좋습니다.

와인의 일생, 인간의 모습과 닮다

왼쪽 프랑스 소테른 지역의 포도밭 전경. 와인은 다양한 토양과 환경을 가진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지므로 와인의 맛과 향은 포도밭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른쪽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포도 수확. 포도를 든 할머니들 뒤로 수확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 글 김 혁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와인 기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20년. 좋은 테루아Terroir에서 자란 포도나무가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고, 이 포도가 훌륭한 양조가를 만나면 최상급 와인으로 탄생하듯, 와인의 뿌리가 되는 포도밭의 향긋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온몸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게 와인 기행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와인은 자연을 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견디며 각 계절마다 자연의 혜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포도의 몸속에 저장한다. 그러나 항상 포도나무에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추위와 바람과 우박과 갈증을 동반한 자연은 포도나무에게 끊임없는 시련을 주지만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 포도나무의 최대 목표는 열매를 맺는 것이고, 이는 인간으로 보면 부모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피를 받은 자손들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태어난 인간이 모두 다르듯 포도 또한 다양하며, 와인은 자연스럽게 포도가 태어난 해의 자연 환경을 간직하게 된다. 그래서 와인 농부들은 포도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래 프랑스 보르도 페싹 레오냥 지역의 샤또 미씨옹 오브리옹의 셀러 오크통에서 숙성되고 있는 와인들. 보통 좋은 와인의 경우 18개월 이상 통 속에서 숙성하고 병으로 옮기게 된다. 오크통 주변에는 항상 고요함이 있다.

아래 왼쪽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서 수확한 포도

와인이 성장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 그것은 바로 고독과 기다림이다. 마치 한 인간이 깊이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 커다란 고독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와인이 숙성되고 있는 지하 저장고에는 고요함이 있다. 오크통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마치 심연에서 작은 방울들이 표면으로 올라오며 내는 듯한 신비한 소리만이 들린다. 살아 있는 와인이 숨 쉬는 소리다.

스치며 지나치는 길에 나무 사이로 농부를 보았습니다. 장마 중에 잠시 햇빛이 나니 서둘러 논에 나왔나 봅니다. 비는 벼도, 잡초도 무럭무럭 자라게 합니다. 비는 무엇에나 동등합니다. 자연이 그러하니 농사짓는 이는 제 노동만큼 결실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잡초를 뽑아내는 농부의 모습에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긴 잠에서 깬 와인은 식탁으로 옮겨져 자신이 태어났던 그 해의 자연의 맛과 향을 그대로 전해주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만약 당신이 한 잔의 와인을 마시며 그 와인이 태어난 연도로 회귀할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전 잊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해 그 시절로 돌아가 아련함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일이리라. 그래서 좋은 와인 한 잔은 때론 자신의 기억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추억을 일깨운다.

건강하게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세월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얼굴에 아름다움이 가득하듯 잘 숙성된 와인의 향기와 맛에서는 깊고 잔잔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엔 토양의 보이지 않는 힘이 숨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빗대면 근본이 있어 언젠가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유형과 같다.

왼쪽 부르고뉴 부조 마을의 지하 저장고. 병들이 또 다른 숙성의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 좋은 와인은 100년을 넘나든다.

왼쪽 아래 보르도 지역의 샤또 와인들 블라인드 시음. 같은 연도의 다른 샤또 와인들을 시음함으로써 서로 비교할 수 있다.

오른쪽 프랑스 남부론의 샤또 네프듀 파프 마을의 와인 오너가 그의 오크통에서 와인을 뽑아 맛을 보고 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한 와인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사랑한다. 하지만 단지 알코올이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고,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와인 속엔 문화와 역사, 철학이 있고, 그리고 삶이 있다.

김혁님은 1962년생으로 현재 포도플라자 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여행지에서 우연히 들른 부르고뉴의 와인 저장고에서 큰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와인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저서로는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 <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 <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 <김혁의 스페인 와인 기행>이 있습니다.

보고 싶다 다람쥐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배정받은 교실로 가는데, 교실 앞 골마루에 한 아이가 어슬렁거리더니 꾸벅 인사했다.
“선생님이 우리 반 선생님이세요?”
“그래, 너도 5학년 5반이냐?

아이와 나는 그렇게 첫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소문난 말썽쟁이였다.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넘나들다가, 교사가 방심하면 한순간에 수업 분위기를 제멋대로 만들어버리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하교할 때 녀석의 작별 인사말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안녕히계세요쿠르트라이앵글쎄올시다람쥐똥구멍!”

아이의 본색을 파악한 후 나도 까칠해졌다. 녀석은 기회만 생기면 노골적으로 일탈 행동을 하였고 나는 징벌했다. 어떤 때는 반 친구들을 웃겨주는 포상으로 방송부원으로 특채하였고, 또 어떤 날은 친구를 괴롭힌 죄로 일주일간 벌 청소를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진짜로 딱 걸렸다. 일기장을 안 낸 사람 나오라고 했는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녀석을 불러 교탁 위에 있는 일기장 중에서 네 것을 찾아봐라 했다.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도 자기는 정말 일기장을 냈다고 마구 우겼다. 아까운 수업 시간이 자꾸 지나가니, 일단 자리로 돌아가 잘 찾아보라고 했다. 그렇게 1교시가 끝나고, 나는 아침 회의를 하러 연구실로 갔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옆 반 개구쟁이 몇 명이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조금 전에 석이가 도서관에서 혼자 일기를 쓰고 있어서, 우리가 왜 거기서 일기 쓰냐고 하니까, 선생님한테 사기 치려고 그런다 하던데요. 킥킥~ 혼 좀 내주세요.”

사기? 교실로 돌아온 나는 험악한 인상으로 열두 살짜리 이탈자를 취조하였다. 녀석은 순순히 자백하였다.
“친구 일기장을 빌려 베껴 쓰려고 도서관에 갔어요. 일기를 베껴 쓰고 나서 친구한테 내 일기장을 주면, 그 친구가 선생님 책상 근처에 톡 떨어뜨려 놓기로 했어요…. 그러면 다른 아이들이 주워서 내 일기장 찾았다고 하면 될 것 같아서….”

듣고 보니 사기가 맞았다. 나는 배신감에 분노하여 그야말로 방방 떴다. 협박성 훈계와 공갈성 생활지도로 녀석을 닦달했다. 점심시간에도 밥 한술 못 뜨고 찬물만 들이킬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남아서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는 남들이 잘 모르는 착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에 수업 시작 전에 휴대폰을 수거하면, 비싼 고급 스마트폰이 한 바구니 가득하였다. 그 속에 낡은 구식 폴더폰 하나. 그것이 그 개구쟁이의 휴대폰이었다. 체육복이 작아서 축구할 때 사슴처럼 긴 발목이 훤히 드러나고, 배꼽이 다 보여도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운동장을 누볐다. 그리고 연말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할 때, 우리 반에서 처음으로 성금을 낸 아이도 그 아이였다. 동전이 고루 섞여 있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아이는 그 성금을 마치 잠시 맡아놓은 물건을 돌려주는 것처럼 슬그머니 교탁 위에 얹어놓고 갔다.

우리 반이 헤어지는 날, 아이들과 일일이 작별의 포옹을 하였다. 그 아이는 뒷전에서 어슬렁거리더니 맨 마지막 차례로 내게 왔다. 우리는 삼월의 개학 첫날 아침처럼 둘이 마주 보았다. 나는 느꺼워져서 힘껏 아이를 껴안아주었다. 그런데 녀석이 평소답지 않게 주뼛거리며 말했다.
“선생님한테 꼭 할 말이 있었는데…. 에이, 그냥 부끄러워서 말 안 할래요.”
그렇게 말하고 휑하니 교실을 나갔다. 나는 골마루까지 따라 나가서 아이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녕히가세요귀여운녀석아주가끔은네가보고싶겠다람쥐.’


마음수련 독자님들께 작별 인사 드립니다. 그동안 유기훈 선생님 삽화와 제 글로 꾸민 이 지면을 보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는 인연이었지만, 독자님께서 흐뭇하게 지켜봐주시는 듯, 생활 일기를 쓰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이제 월간 마음수련 옆에서 소박한 독자로서 함께하려고 합니다. 늘 맑은 행복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선생

정리 김혜진 & 자료 제공

성산 장기려선생 기념사업회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라 불리는 성산(聖山) 장기려 선생(1911~1995). 그는 가난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이 안타까워 무료 진료를 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섬겼던 장기려 박사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동화처럼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참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준 장기려 박사. 그를 기린다. – 편집자 주

부모님과 아내, 자식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뒷줄 오른쪽이 장기려 선생이다.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사가 되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중에는 평양에서 둘째 아들과 함께 피난 온 외과 의사 장기려도 있었다. 당시 부산육군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그는 피난민들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서, 미군에서 빌린 천막 3개로 1951년 복음진료소를 세운다.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응급수술을 하고 나무판을 수술대로 써야 할 만큼 상황은 열악했지만, 무료 진료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천막병원엔 환자들이 넘쳐났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한 달에 한 번 의료 기관이 없는 시골을 찾아다녔다. 1928년 경성의전에 지원하며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합격시켜 주시면 평생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국내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 및 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하다

장기려 선생은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의학 공부를 철저히 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간 전문 외과 의사로 주목을 받아왔다. 당시 간은 핏덩어리라고 생각해 칼을 대면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그는 간에서 출혈되지 않는 선을 발견하여 출혈 없이도 수술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1959년 간암 환자의 간을 75% 잘라내는 데 성공, 간암 치료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명의가 될 수 있었던 건 비단 의학적 성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1968년 복음병원으로 한 응급 환자가 실려 왔다. 환자는 자동차 폭발 사고로 3도 전신 화상을 입어, 온몸이 숯덩이처럼 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의 두밀리자연학교 교장으로 ‘ET할아버지’라 불리던 채규철씨다. 당시 화상을 치료하는 전문 시설이 없었던 터라 장기려 선생은 미국인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온몸을 칭칭 감은 붕대를 조심스레 풀고, 하루 두세 시간씩 드레싱을 하는 등 극진히 간호했다. 고통스런 치료 과정은 1년이 넘게 계속됐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던 환자는 기적처럼 생명을 얻었다. 이렇게 그는 진료나 수술 등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늘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 환자가 나라면, 혹은 내 가족이라면 무엇이 최선일까?”
선생은 가난한 환자들이 찾아와 입원비나 수술비가 없다고 사정하면 자신의 월급을 털었고, 돈이 없어서 퇴원을 못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곤 했다. 환자의 속옷이 남루한 것을 보고는 내복을 사다주고,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를 위해 처방전에 ‘닭 두 마리 살 돈을 주라’고 써주는 등 딱한 사정에 마음 아파하며 환자들을 대했다. 때론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행려병자들을 직접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하였다.
“눈앞에 나타난 불쌍히 여길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인술이야.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 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아프다면 돈이 없어도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의료보험제도가 없던 1960년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 문턱은 너무나 높았다. 전쟁이 끝난 후 복음병원의 재정 지원도 끊기면서 무료 진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자 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그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은 바로 채규철씨였다. 덴마크 유학 시절,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료보험의 혜택으로 무료로 치료받은 경험을 전했던 것. 선생은 의료보험이야말로 가난한 환자도 돕고 병원도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장기려 선생은 복음병원에서 퇴임한 뒤 1968년 5월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결성, 청십자 의원을 개업하고 청십자 의료보험을 적용해나갔다. 담배 한 갑이 100원 하던 때 조합원의 월 회비는 60원. 초반엔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1987년엔 회원 가입자만 20만 명을 넘어섰다. 첫 번째 수혜자는 부산 지역의 가난한 영세민들이었다. 이렇듯 ‘건강할 때 서로 돕고 아플 때 도움받자’라는 모토로 부산에서 시작된 청십자 의료보험은 1989년 시행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 1979년 8월 막사이사이상 수상식. 필리핀 정부는 장기려 선생의 헌신적인 사랑과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에 대한 공적을 인정, 이 상을 수여했다. 그는 상금 2만 달러를 전액 기부했다.
▶ 1951년 부산 영도에서 시작한 복음병원 앞에서.

진실과 동정으로 환자를 대하면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는 변변한 집조차 없었다. 복음병원 옥상에 마련된 옥탑방에서 홀로 지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환자를 향한 헌신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하고 겨울에 입고 나갔던 코트를 거지에게 벗어주었던 장기려 선생.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한쪽 팔이 마비된 불편한 몸으로도 매일 환자들을 진료하며 의사로서의 소명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가진 의술로 병든 자들을 구하고,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배불렸던 그는, ‘가난한 환자들과 평생을 함께하리라’는 서원을 60여 년간 온몸으로 지켜냈던 것이다.
1995년 12월 25일,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사람들은 그를 ‘바보 의사’라 부르며 추모했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장기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 전신)를 졸업했으며, 평양연합기독병원장, 김일성대학 의대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의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병원, 국내 첫 건강보험협동조합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설한 공로로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이 글은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저, 홍성사), <이 걸음 이대로 성산 장기려 박사의 삶>(장병호 저, 부산과학기술협의회) 등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그녀는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 패션이라는 말조차 생경하던 시절 국내 최초 패션쇼 개최, 최초 기성복 제작, 최초 ‘하이 패션’ 수출 등 급변하는 한국 패션 산업의 중심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디자이너이다. 그리고 지금,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패션계에서는 그녀의 삶을 재조명한 전시, 영화 제작 등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패션의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패션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뿌리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 뿌리의 뿌리를 찾아갔을 때 노라노 선생님이 계셨다. 그런데 코코 샤넬,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이제는 대한민국 패션사의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 서은영 / 스타일리스트. 2012년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 기획자

지난 10월 3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는 그렇게 서은영씨가 선생을 찾아와 전시회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44년 일본군 위안부 징집을 피해 17살의 나이에 결혼, 그러나 19살에 이혼을 선택한 노라노. 그 후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 결심한 그녀는 주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나는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처럼 살겠다 다짐하며 ‘노명자’에서 ‘노라노’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패션디자이너로 살아온 60여 년의 삶은, 그 시대 억압된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처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어떠셨나요?

사실 자기 영화를 찍는다는 거는 옷을 벗고 나간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처음엔 내가 한 거라고는 옷 만들어 판 거밖에 없는데 영화가 되겠느냐며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찾아온 젊은이들이 굉장히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또 우리 집안 젊은이들도 내가 세상을 떠나면 누군가는 찍을 텐데 살아생전에 하는 게 좋겠다 해서 하게 됐죠. 3년 동안 찍는데 내가 뭐 잘났다고 이렇게 찍히나 싶었지만, 그래도 이걸 계기로 젊은이들을 만나고 우리 시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니 좋네요.(웃음)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사는 날까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노라노

한국전쟁 전후 ‘패션’이라는 말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패션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존재했다. 1956년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하며 우리나라에 패션의 시작을 알린 노라노 선생은, 1960년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멋진 옷을 더 많은 여성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성복을 제작한다. 그동안 맞춤복을 하며 축적했던 고객들의 신체 사이즈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성복은 맞지 않는 옷으로 통칭되던 시절, 기성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기사들도 심심찮게 등장했지만 일하는 여성들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고 결국 성공이었다. 그 후 노라노는 1967년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나팔바지) 등등 수많은 사회 이슈를 낳는 패션을 스타일링한다. “노라노 선생님은 옷을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버렸다”는 가수 윤복희의 말처럼, 당시 노라노 선생의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을 깨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려는 여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하기 힘든 도전들을 많이 하셨는데요. 옷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일찍이 미국에 가보니 여성들이 당당하고, 우리와는 다른 사고의 차이를 많이 느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렇게 바꿔주면 좋겠다 생각했지요. 사실 해방 직후 여성의 지위가 없었거든요. 그런 시대에 우리가 활약한다는 것은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을 만들자, 그렇게 생각했죠.

언론의 지탄을 받는다거나 힘든 일도 많았을 거 같습니다.

일거일동이 다 비판거리였죠. 1950년대 초반, 미국 방송국에서 취재를 요청해 미니 패션쇼를 비공개로 연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한 신문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일선에서는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후방에서는 여성들이 웃통을 벗고 날뛴다’는 식의 가십 기사가 나서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정도 일에 흔들린다면 네 앞길이 염려스럽다. 호평보다는 혹평이 너를 더 빨리 알리는 길이다. 그렇게 마음이 약하다면 차라리 지금 그만두는 게 좋겠다.” 그 말씀이 제 인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 이후 나 자신에게만 엄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남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내 양심과 믿음에 따라 원리 원칙을 지키며 살았죠.

‘내가 삭스백화점에서 멋진 실크 드레스를 발견하고 상표를 보니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씌어 있었다. 너무 놀라 어떻게 백화점 최고급 디자이너 코너에 한국 제품이 걸려 있느냐고 물었다. 담당 바이어는 파리 기성복 전시회에서 발견하고 제품이 좋아 주문했다고 했다. 패션이 파리나 밀라노에서만 오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패션은 어디에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 – 미국 뉴욕타임스, 1973년 8월 6일 자

노라노는 최초의 패션 한류를 이끈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패션으로 어떻게 우리나라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던 선생은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옷을 만들 때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옷감을 쓴다는 것. 패션 덕분에 이탈리아의 섬유 산업이 발전했듯, 패션 산업이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될 날이 꼭 올 거라 믿었다. 그 원칙을 고수해온 노라노 선생은 1973년 국산 견직물로 만든 제품들로 파리 기성복 패션쇼에 참가한다. 그 패션은 뉴욕의 최고급 패션 거리인 5번가 바이어의 눈에 띄었고, 3백 50벌의 옷을 계약한다. 우리나라 무역 사상 처음으로 국산 소재로 만든 ‘하이패션’이 수출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돼 미국 뉴욕에서 국산 실크를 알리는 패션쇼를 열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패션의 중심지 뉴욕 ‘7번가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실크와 프린트 산업 수준에 놀라는 기사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 위에서 세계 패션 시장을 철저히 조사하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세계적인 패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였다.

우리나라 섬유 산업에도 큰 기여를 하셨는데요. 선생님께 조국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시대만 하더라도 미국은 너무 부자고 우리는 너무 가난했잖아요. 처음 패션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한국이 어려우니 여기서 더 활동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남의 나라의 좋은 환경에서 내가 즐긴다는 것이 뭐라 해야 하나, 배신이랄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비록 가난하지만 내 조국은 한국이고 그곳에 나의 부모님과 형제가 있으니까, 돌아가자. 내가 미국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걸 가지고 한국에 도움이 되자 그렇게 생각했죠. 그때는 누구나 다 그랬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보자는 열정이 넘쳤고, 그런 마음들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거죠.

‘패션’ 외길 인생을 걸어오셨는데, 한결같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늘 도전 정신으로 버텨왔던 거 같아요. 도전과 야망은 또 다른 말인데, 야망은 목적의식이 확실한 거라, 그 목적이 달성되면 힘이 빠져. 그런데 계속 도전하며 사는 사람은 그게 없어요. 계속 가는 겁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정과 긴장감을 즐기는 거죠. 그러니까 젊은이들에게도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또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행복한 사람은 성공을 못 한다, 분노가 있어야 한다고 해요. 저는 19살에 이혼하고, 집에서 쫓겨나고 갈 데도 없고 억울한 소리도 많이 듣고, 그때의 분노가 지금의 나를 만든 기본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곧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돼, 힘들어’ 그러잖아요. 근데 원래 산다는 게 다 힘든 거지요. 쉬운 일이 있나요? 지금 힘들어도, 그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서 계속 도전하며 밀고 나가야지요.

꿈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강연에 가면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가 두 가지 있습니다. 내 일이고 남의 일이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반드시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시기에 구원의 손길을 뻗어 나를 한 단계 올려준다. 그 한 단계 한 단계가 나를 오늘날까지 오게 했다. 또 한 가지는 욕심이 없어야 된다. 욕심을 내면 스트레스가 오니까 건강을 해치잖아요. 순리대로 살면 됩니다. 남들이 보면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는데 별거 아니야. 열심히 살고 있으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거거든요.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신 거 같습니다.

그렇죠. 50대 때 저를 괴롭힌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줄까 고민하는데, 어느 날인가 그동안 나한테 고맙게 해준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도 끝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 용서했어요. 지금 보면 나를 도와준 분들께 다 인사드리지 못해 마음이 아파요. 나중에 연락드려 보면 이미 돌아가신 분도 많았고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스미스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네가 성장한 것을 지켜본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으니, 넌 나에게 빚이 없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들거든 다음 세대에게 갚거라.’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지금은 젊은 사람들한테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궂은일을 한 적이 없군요. 일류 디자이너가 되려면 먼저 손가락에 못이 박여야 해요.” 미국 유학 시절 그녀가 패션을 배웠던 미국 의류 회사의 사장은 처음 그녀의 손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60여 년이 넘게 핀을 꽂고 가위질을 하면서 옷을 만들어 온 그녀의 손은 이제 손가락 마디마디에 굵은 못이 박여 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이 넘도록 2대 3대에 걸쳐 그녀의 의상을 찾는 고객들이 많다. 실용적이면서도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옷, 편안함과 우아함이 조화를 이룬 옷, 뛰어난 재능으로 정성을 다해 만든 옷, 여성들을 멋있고 당당해지게 만드는 옷. 10년, 2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멋이 나는 옷, 그리고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 명예가 된 옷.

86세의 현역, 대한민국의 최초이자 이제는 최고(最古)가 된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은 지금도 변함없이 옷을 만들고 있다. “옷을 만드는 일을 위해, 늘 스스로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훈련시켜야 했다”는 노라노 선생은 지금껏 단 하루도 아프다는 핑계로 결근한 일이 없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만들어온 하루하루가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를 만들었다.

요즘은 모두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과연 어떻게 입는 게 잘 입는 걸까요?

옷을 입는다는 게 뭐냐. 그게 중요하죠. 왜 옷을 입어요? 목욕탕에 가면 다 똑같은데.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의 개성이 나오고 뭘 하는지도 느낄 수 있잖아요. 제가 백날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옷이 사람보다 먼저 걸어 나오면 실패다. 저는 사람을 봐도 옷은 별로 기억을 못 해요. 옷이 아니라 사람을 보니까. 튀지 않으면 잘 입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옷을 기억하는 사람은 옷을 잘 못 입은 거지.(웃음) 옷이 잘 어울렸으면 그 사람이 멋있다라는 생각이 남죠. 글로 치면 산문이 아니라 시처럼 심플하게 디자인하는 것. 진짜 멋은 절제돼야 하는 것이지, 옷이 사람에 앞서 걸어 나오면 그것은 실패작이다. 그게 저의 패션 철학입니다.

나는 86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갈림길에 서 있었다. 때로는 어리석었고 때로는 지혜로웠다. 사는 동안 나는 그 갈림길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길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 영화 <노라노>에서 선생의 내레이션

“성공이라는 건 남의 거예요. 남이 인정하는 게 성공이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거야. 깊게 생각하면 요는 행복한 게 중요해요. 행복은 내 거니까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풀어내다가도 “젊은이들, 파이팅이야” 하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노라노 선생. 그녀는 이제 28년간 함께 일해 온 후계자와 더불어 ‘노라노’ 브랜드를 다시 국제화하려는 행복한 도전을 꿈꾸고 있다. 야망이 아닌 도전.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를 잃지 않는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

노라노 선생은 1928년 경성에서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이자 멋쟁이였던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레 ‘패션’에 눈을 뜬 그녀는 1949년 미국에서 패션을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의상실을 개업한다. 항상 세계적인 트렌드에 발맞춰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그녀는 이후 뉴욕, 홍콩, 일본, 중국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며 우리나라 패션 섬유 산업을 이끈다. 2010 <한국패션대상>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가 있다.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가 개봉했고, 신문박물관에서 ‘자료로 보는 노라노 발(發) 기성복 패션의 역사’를 12월 15일까지 전시하고 있다. 자료 제공_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황금나침반), 영화 <노라노>

때로는 용기가 없어 때로는 쑥스러워서 못 했던 그 한마디. 한 해를 보내며 글로나마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0년 만에 고백하나니… 남편, 난 당신이 좋다

신순화 44세. <두려움 없이 엄마 되기> 저자

꿈에서 나는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결혼하려는 순간 남편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남편의 슬퍼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후회가 밀려온다. 그런데 너무 늦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두렵다. 마음이 너무 괴롭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난다.

이런 꿈을 꿀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왜 이런 꿈을 꿀까. 남편을 정말로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불만이 많아서일까, 우리 둘 사이에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3개월 정도의 짧은 연애 기간. 남편과 나 사이엔 화끈하다고 할 것이 딱히 없었다. 서로 너무 나이가 들었을 때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했고, 두세 번 만나게 되니까 어린애들처럼 마냥 연애하듯 만날 수 없음을 알았고 결혼 상대자로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냥 모든 일이 순서처럼 흘러가 버렸다. 딱히 설레지는 않지만 딱히 맘에 안 드는 것도 아니고 좋은 사람인데 뜨겁진 않고, 헤어지긴 싫은. 남편은 내게 딱 ‘밥’ 같은 사람이었다. 매일 먹어도 새로울 게 없고 그렇다고 질리지도 않는 밥. 다른 맛난 것을 먹어도 밥이 아니면 안 먹은 것 같고, 밥 때문에 살면서도 특별히 고마워하지 않는… 그런 ‘밥’.

사람이 ‘밥맛’을 알게 되면 정말 어른이 된 거라고, 철이 든 거란 걸 이해하게 되었을 때가 결혼하고 10년쯤 흐른 다음이었다. 짧은 연애 끝에 결혼 후 바로 첫아이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아 기르는 동안 우리의 삶은 늘 눈앞에서 넘어가는 도미노를 막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너무나 예뻤지만 키우는 일은 힘들었다.

결혼 10년간 남편과 단둘의 시간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각자 회사와 집에서 일하고, 밤늦게 만나 밥 한 끼 먹으면 세 아이 씻기고, 치우고, 재우는 일로 하루가 다 갔다.

그 10년 동안 나는 남편에게 고마움보다 불만이 많았다. 주말이라도 애들과 놀아주었으면, 아들과 공도 차주고 자전거도 타주었으면, 학교생활도 물어봐 주고 이야기도 들려주었으면 하면서 원망을 했다. 그 세월 동안 남편은 내게 화가 나도 입을 꾹 다물곤 했다. 남편이 한 마디 하면 백열세 마디쯤 내뱉을 준비를 하고 있는 마누라에게 어쩌면 침묵만이 유일한 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우리 사이엔 이렇게 다른 점이 많을까, 남편과 통하는 것이 더 있었으면, 하다못해 남편이 책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이야기라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속상해 했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언제나 내 창문으로만 남편을 보고 있었다. 남편이 내 창가로 와서 함께 바라봐주기만 원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부터 남편의 회사에 큰일이 생겨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새벽에 퇴근했고, 그다음 날도 출근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회사 일이 수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어지는 남편의 삶이 문득 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여웠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지만, 정작 가족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한 삶. 새벽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는 것은 빨라야 밤 아홉 시 무렵. 남편에겐 그 저녁이 없다. 식구들과 함께 밥 먹으며 웃어보는 느긋한 저녁이. 주말엔 주 중의 모든 피로를 잠으로 풀고 싶어 하는 남편을 오랫동안 난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만 매달리는 세 아이가 힘들어서 남편의 잠을 오래오래 미워했다.

하지만 이젠 이해한다. 그런 남편을 이해하는 데 10년 걸렸다.

조금씩 주변에서 남편들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가끔 남편이 기침만 오래 해도 가슴이 철렁한다. 이따금 10년 넘도록 못 챙겨주는 아침밥이 맘에 걸리고, 늦게 와서 겨우 한술 먹는 저녁밥도 맘에 걸린다.

“여보… 난 당신이 좋아. 신혼 때보다도 지금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해. 아프지 마.”
며칠 전 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자 남편은 말없이 있다가 “말로만?” 하고 돌아누웠다. 좋으면서도 쑥스러웠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난 진심이었다.

연애할 때보다, 신혼 때보다, 지금 남편이 더 좋다. 어느새 밥의 진정한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이젠 그 어느 맛난 음식이 있어도 밥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꿈속에선 늘 떠나고 놓치고 다시 후회하는 남편이지만 지금 현실에선 난 이 남자를 꼭 붙들고 살고 싶다. 아주 오래오래 내 옆에 붙들어놓고 살고 싶다. 이제부터는 이 남자와 많이 친해지고 싶다. 더 많이 더 깊게 알아가고 싶다.

‘10년 만에 고백하나니… 남편, 난 당신이 좋다. 살아온 날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좋아한다. 그러니 오래오래 같이 살자. 싸우고 토라지더라도 손 내밀고 웃으면서 같이 늙어가자.

이영철 작.

<사랑 – 풍선나무 이야기> 227.3×181.8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0.

이제야 겨우 그걸 알아들었어!

유 경 54세. 사회복지사. <마흔에서 아흔까지> 저자

위로는 구십이 되신 연로하신 부모님과 아래로는 막 이십 대에 접어든 아이들 사이에서, 때론 내 말을 저들이 못 알아들어서 또 때로는 저들의 말을 내가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묻고 설명하고 짜증 내고 엉뚱한 소리에 기가 막혀 웃고 혀를 차고 뒤늦게 알아듣고… 늘 소란하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적당히 짐작해서 대답하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콕 집어 지적한다.
“엄마, 제발 엄마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마음대로 해석 좀 하지 마!”

이럴 때면 작년에 본 연극 한 편이 떠오른다. <인물 실록 봉달수>. 여기 보청기로 시작해 큰 기업을 이룬 회장님이 계시다. 직원들 늘어세워 놓고 호통을 치는 일이 다반사. 그러던 어느 날 불같이 화를 내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인생이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한다. 대필 작가는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있는 여자 작가. 불같은 기업 회장과 까칠한 여자 작가가 만났으니 그 싸움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 두 사람은 부딪치며 서서히 서로에게 적응해 간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기술을 배우며 죽어라 고생하던 청년기, 지금은 세상 떠나고 없는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봉달수 회장의 회고담이 이어지면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돼서 울고 웃는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한 사람의 일생 또한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외국에서 유학 중인 봉달수 회장의 외동딸이 귀국해 쏟아놓는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어머니를 때려 고막을 상하게 한 아버지처럼 봉달수 회장 역시 자기 방식으로 아내와 외동딸을 대했던 것. 한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여기며 열렬히 사랑해 결혼까지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아마비 아내가 부끄러워졌고,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더 이상 다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대화나 소통이 아닌 풍족한 물질로 채워준다.

입만 다물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걸고 자기 안으로 숨어든 아내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봉달수 회장은 진정 아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러다 딸의 처절한 외침에 비로소 눈을 뜨고 귀를 열게 된다. 배가 고프더라도 글 쓰는 일을 하며 못다 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는 딸. 아버지 방식대로 주는 사랑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싶었던 딸. 그 딸의 울부짖음을 통해 처음으로 아내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

“이제야 겨우 그걸 알아들었어!”
회한에 찬 회장의 말.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회장은 자서전 집필을 중단하기로 하고, 작가는 또 진심을 다해 설득에 나선다. 그러면서 작가 역시 오래전 다른 작가의 작품을 표절했던, 자기 자신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진실과 대면하는 용기를 얻는다.

결과는 해피엔딩. 진실을 담은 자서전과 작가의 양심 고백은 큰 반향을 일으킨다. 남편의 폭력으로 듣지 못하게 된 어머니, 소리를 잘 듣게 해주는 보청기 사업, 그러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회장, 이 연결 고리는 결국 우리들의 소통과 대화와 관계 맺음에 닿아 있다.

최근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일은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다. 고민을 꺼내놓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답을 가르쳐주지 못해 안달복달이다. 그것도 순전히 자기 경험에서 얻은 결론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그 고민을 드러내놓기까지 겪은, 겪고 있는 내 마음의 어려움과 불편함과 속상함에 대해서는 전혀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반성을 한다. 이제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맘대로 해석하지 않기로. 나이 먹어 말을 알아듣는 능력과 이해력이 떨어진 건 엄연한 사실. 그래도 노력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귀 기울이고 눈 맞추고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헤아려 읽으려는 노력이 없는데 세상일인들 제대로 보일까 싶다.

이제는 말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이영철 작.

<사랑은 시작되고> 194.5×97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2.

얘들아, 이제는 우리처럼만 살아라

정은균 45세. 국어 교사. 전북 군산시 미룡동

지난 날 정말 힘들었던 한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1990년대의 10년 동안이 특히 그랬다. 지방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으로 사글셋방을 전전하고, 하루 세끼를 멀건 된장국으로 때울 때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정말 힘들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야. 부모님께서는 왜 날 이 힘든 세상에 내보낸 거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 부모님께서는 내게 최선을 다하셨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오직 말없이, 내가 한 삶의 선택을 지지해 주셨을 따름이다.

1985년 2월의 시린 겨울 아침을 기억한다.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의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이 결정되고, 자취방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아버지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표정은 약간 들떠 있으셨다. 우리는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순천행 버스를 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순천 아랫장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갖고 싶었던 책상 일습을 챙겨주려던 것이었다. 가구점 주인이 사람이 없어 배달을 못 한다고 해, 아버지와 나는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 끈으로 묶은 후 책상 앞뒤의 좌우 귀퉁이를 잡고 가구점을 나섰다.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겨울 아침의 칼 추위는 여전했다. 삼십여 분을 걸어 자취방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속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보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참 지혜로운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실상은 ‘갑자기’가 아니겠지만) 그것을 들어주셨다. 마음속에 놀람과 감동이 아니 생길 리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결코 자식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놀게만 하지도 않으셨다. 쇠죽을 끓이거나 돼지 여물통을 채우게 하는 등 자잘한 일이라도 꼭 일손을 거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하는 구석이 보이면 숨겨 두었던 엿이며 과자를 챙겨주시곤 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배신한다.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로.
“얘들아,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아버지께서는 평생 농군으로 사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자랑스러운 농부임을 결코 잊은 적이 없으셨다. 나는 열 살 전후부터 꼴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그렇게 다닐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과 농부에 대한 당신의 자긍심을 내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으셨다. 그렇다고 ‘나처럼 살아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씀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삶이란 성실하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렇게 다닐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과 농부에 대한 당신의 자긍심을 내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으셨다. 그렇다고 ‘나처럼 살아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씀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삶이란 성실하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재작년 여름 돌아가셨다. 그해 여름 가장 많은 비가 쏟아진 8월 9일이었다. 그 비만큼이나 눈물을 쏟아냈다. 내게 살과 뼈를 준, 내 마음과 정신을 날카로운 바늘침 같은 가르침으로 단련해 주신 당신이 그립다.

자식 앞에서, 그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부모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에 임하고, 스스로를, 그리고 자식을 다른 이들과 견주지 않는 인생을 꾸려갔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우아하게 빛나는 삶을 자식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아직 어린 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부터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해본다. ‘얘들아, 우리처럼만 살아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이영철 작.

<Mimic the Ego – No 3, Sailing. Ego? 에고!> 61×91cm.

캔버스 위에 철필, 혼합 기법. 2009.

때로는 용기가 없어 때로는 쑥스러워서 못 했던 그 한마디. 한 해를 보내며 글로나마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부지, 그때 그 영수의 점수가 말입니다

전원일 59세. 소설가, 시인. 경남 밀양시 내이동

나는 시골 대농가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면 소재지 중학교 생물 선생님이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소 풀 먹이는 목동(牧童)이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 이유는 선생의 아들로서 항상 공부는 물론 언행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아버지의 독려로 나름 무거운 마음의 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소를 몰고 산에 가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면서 그런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목동이었던 ‘영수’라는 두 살 아래 아우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나와는 달리 부모님으로부터 미움을 엄청 받는 아이였다.

반에서 꼴찌를 맴돈다며 가문의 망신을 시키는 아이로서 늘 야단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영수가 모든 게 꼴찌는 아니었다. 영수는 몸이 비호처럼 날쌔어서 닭쌈왕이요, 혹말타기왕이요, 딱지치기왕이요, 구슬치기왕이었고 목동들 중에서 유일하게 소를 타고 가는 위풍당당 아이였다. 그렇게 산에서는 ‘왕’이었던 영수는 집에만 들어가면 늘 기가 꺾인 졸(卒)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주인에게 내몰린 개처럼 눈치만 슬슬 살피는 아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영수가 안쓰러워서 어떻게 하면 ‘목동의 왕’에게 집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게 해줄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해답(?)이 나왔다.

우리는 3월말고사를 쳤고 아버지는 채점하기 위해서 시험지를 자전거에 가득 싣고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1, 2학년 시험지 채점을 맡겼다. 그 안엔 영수의 시험지도 있었다. 나는 내 방으로 시험지를 들고 와 문고리를 잠그고 1학년 5반 김영수 시험지부터 펼친 후 답안지와 맞춰 떨리는 손으로 오답을 지우개로 지운 후 정답을 써주었다. 맞는 것은 두서너 개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틀려 있어서 손에 진땀을 흘리며 한두 개 정도만 틀리게 하고 모조리 고쳐주었다.

그 시절만 해도 시험지 종이는 물론 지우개의 품질도 형편이 없어서 지울 때마다 종이에 구멍이 뽕뽕 생겨 애를 먹었고 아버지한테 발각이 날까 두려워 빨강색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큼직하게 그려놓았다. 그렇게 영수의 성적은 단연코 <수>가 되었다.

다음 날 저녁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우리 마을 누구 집 아들이 공부를 잘하냐고 물으셨다.

“밀양댁집 아들 영수 그놈이 공부를 참 잘합니다.”
“영수가 공부를 잘한다꼬? 그놈은 늘 구슬치기만 하고 공부는 안 한다꼬 저거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던데?”
“아닙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제가 맡고 있는 생물 과목은 두 개만 틀리고 96점 받아 이번에 <수>를 받았습니다.”
“하하하. 영수가 늦재주가 터졌는가베. 그래 크는 아이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기라.”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곧장 영수 집을 찾아갔다. 나는 영수의 손을 꼭 잡고 엊그제 내가 저질렀던 일을 말해준 후 앞으로 생물 과목만은 열심히 하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는 영수가 하루아침에 학구파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아버지가 보는 참고서에서 중요하다고 빨강색을 쳐 놓은 부분을 적어 그것을 집중적으로 외우게 함은 물론, 영수와 개인적으로 둘이 앉아 문답식으로 묻고 답하며 예행 풀이 연습까지 했다. 그럼에도 1년간의 나의 노고는 겨우 절반 정도의 성적을 거두는 데 그쳐 나의 음밀한 공작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후딱 지나버렸고 나는 40킬로미터 떨어진 부산에 있는 인문계 고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고향에 왔을 때, 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가 중2가 된 영수가 소나무 아래에서 영어 단어장을 들고 중얼중얼 외우고 있는 걸 보았다. 영수는 사범대학에 진학해서 생물 선생님을 할 거라고 했다. 순간 얼마나 감동했는지.
하지만 영수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 영수의 성적은 여전히 미, 양, 가뿐이었다. 영수에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부턴 더 이상 공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리고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수는 결국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건설 회사 사장을 하고 있다.

어린 마음에 영수를 도와주고자 했던 행동은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영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르게 만들고, 영수에게도 삶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성적만으로는 알 수 없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걸 성적으로만 판단하려는 사회의 잣대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수가 생물을 참 잘했어. 그놈은 생물 선생이 되어야 했는데 저거 아버지가 애를 무조건 야단만 치갖고….”

한평생 고향 김해에서 살며, 중고교 교장을 역임하셨던 아버지, 이제 팔순을 넘기고 기억력도 쇠락해진 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영수 이야기를 하신다.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그 사건을 이제나마 고백하고 싶다. 아버지 40년 만에 고백합니다. 아부지, 그때 영수의 생물 점수는 말입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이영철 작.

<푸른 마을의 동화> 117×7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0.

소록도, 이번 겨울에 또 만나요

김한빛 24세. 대학생.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

지난겨울 국립소록도병원 행복병동으로 2주간 자원봉사를 가게 되었다. “니가 그동안 받은 사랑만큼 세상에 나눠줘야 하지 않겠냐”는 부모님의 권유로 가게 된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 두 번째니까 더 잘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비슷한 자리에 계신 할머니들, 간호사, 물리치료사 선생님들, 똑같이 돌아가는 병동 시간표인데 그곳에 서 있는 나는 또 다른 낯섦과 대면했고 또 어쩔 줄 몰라 했다.

봉사 마지막 날, 조그마한 내 손이 아기 손 같다고 꼭 쥐어주시고 날마다 우리가 물수건으로 세안시켜 드린 것처럼 내 손을 문질러주시며 제비처럼 돌아오라던 상기 할머니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날 아련하게 하고 잠 못 들게 한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성격이 불같으면서도 사랑에 올인할 줄 아시는 명정순 할머니. 할머니의 과거사를 들은 뒤로는 미워할 수도 짜증이 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할머니 유년 시절,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술꾼에 폭력을 쓰는 사람이었고 할머닌 아무것도 못 하고 이불만 쓰고 우셨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라 살림살이 다 빼앗기고 노동 착취를 당하셨고, 한센병 이후 이곳에 오실 때 마흔 즈음 만난 남자는 정부에서 준 옷가지 등을 빼앗아갔고,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인 손녀딸은, 엄마를 일찍 여의어 보육원에 있다고. 할머니는 운동을 하면서 너무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나만 눈물이 났다. 바보같이. 내가 가지지 못한 진정한 솔직함을 지니고 있으셔서 부러웠다. 난 솔직하지 못하니까. 진짜 나도 날 잘 모르겠으니까.

이런 내가 행복병동에서 찾은 건 무엇일까. 내가 찾아낸 건 사랑이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 해본 적도 없고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감정 느끼지 못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 말씀을 들으면 상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본인에게는 그것보다 귀한 건 없겠다 싶다.

정순 할머니에겐 손녀딸이, 최명순 할머니에겐 따님이, 조봉순 할머니에겐 손자 증손자들이, 김보원 할머니껜 남편이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가정이, 함께하고 있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너무 많은 행복을 갖고 있어서 몰랐던 나는 눈이 안 보이시는 할머니보다 눈뜬장님이었음을 알았다.

마지막 날, 두 번째니까 안 울 자신 있었는데 학기가 끝나면 또 오냐는 질문, 수고했다는 말씀들에, 제비처럼 돌아오라는 말씀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할머니 꼭 기억할게요,라는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했는데 사실은 나한테 한 말이었다. 또 돌아가서 생활하다 보면 잊어버릴텐데.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껜 손 한번 제대로 잡아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심지어 같이 사는 가족에게도 아쉬움과 불만이 있는데, 내가 잡고 있는 이 할머니의 얼굴, 손, 성격, 마음을 다 담을 수 있을까. 너무도 불안해서 자꾸자꾸 되뇌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 이곳에 와서 처음 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 믿어보고 싶어졌다.

설날 집에 못 가서 어떡하냐고 걱정하시며 미안하다 하시는 경순 할머니께 부모님 허락을 받았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훌륭한 분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칭찬받은 것보다 한 백배 천배는 더 기쁜 묘한 경험을 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오히려 난 가족의 사랑을 잘 못 느낄 때가 많았는데 할머니의 부모님 칭찬에 왜 내가 우쭐해지고 행복해진 것일까.

신기하고 중독성 있는 이곳 소록도. 아직은 십 년 넘게 오신 근재 삼촌처럼 마음의 고향이라 딱 잘라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이곳에서 지낸 시간들, 내가 가진 마음들을 돌이켜보면 조금씩 나에게 의미가 생겨가는 곳임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이곳에서 만난 윤영 대표님, 공재 오빠, 인선이, 성하, 성현 오빠, 대은 오빠, 성중 오빠, 영우, 윤미, 예희, 도경이 등등. 거금대교도 걷고, 마피아에 카드 게임, 바지락도 캐고 걸어서 간 녹동, 서로 웃고 떠든 기억들. 이곳이 아니었음 절대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유쾌하고 착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낸 이 시간들.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는 지금, 그때의 마음을 솔직히 많이 잊어버린 듯해서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또 그때 정말 가족처럼 대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해보기 위해 쑥스럽지만 용기 내서 말해본다. 모두, 이번 겨울에 또 만나요.

이영철 작.

<분홍꽃비> 45.5×33.4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

아빠는 키만 작을 뿐이란다

박재영 전북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

키가 큰 사람은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감정이 있는데, 그게 바로 키 작음의 비애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 번호를 키 순서로 붙였답니다. 반 배정을 받는 학기 첫날에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키 순서로 줄을 세웠지요. 그러다 보니 저는 늘 1, 2번을 달았답니다. 1번을 면해 보려고(이게 1등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몇 명 뒤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선생님은 그걸 금세 알아채시고, “야, 너는 키도 작은 놈이 왜 거기 서 있어! 빨리 앞으로 안 나와!”라고 짜증 섞인 고함을 치곤 하셨답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키가 크대요. 그렇다고 키가 장대처럼 쑤욱 자랐다는 것은 아니고, 평소 1번 자리에서 8번 자리 정도로 이동했다는 뜻이지요. 그대로만 꾸준히 성장한다면 대한민국 평균치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중학교 2학년 이후, 내 키는 백두산 천지의 수위만큼 변화가 없습니다. 입이 짧아서였을까요? 못 먹어서 그랬을까요? 운동이 부족한 탓일까요? 아니면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요? 아무튼 잘 자라던 키가 뚝- 하니 멈춰 서 버렸답니다. 그리곤 오늘날까지 한 치의 변함없이 그 높이를 지키고 있네요. 내 키도 꽤나 지조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지조만 높은 키 덕분에 결혼식 때 난감했던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신부의 키가 저보다 5만 원짜리 지폐의 길이만큼(가로가 아니라 세로입니다)이나 크거든요.(제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자인지 이제야 아시겠죠?) 신부의 키가 크다 보니 웨딩 사진도 앉아서 찍어야 하고, 함께 서서 찍을라치면 주변에 있는 돌이라도 가져다 신부 뒤에 놓고(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말입니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 돌 때문에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태연한 체 서서 멋진 포즈를 연출하기도 했지요. 결혼식이 있던 날 신랑을 배려한 신부는 신발을 신지 못했답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키가 커야 하냐고요? 도대체 이런 관념은 누가 만든 겁니까? 남자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은 여자가 만든 걸까요? 키가 크면 힘도 셀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상상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내세울 것 없이 키만 큰 남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작한 아이디어인가요? 아무튼 저는 이 관념 때문에 괴롭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청춘들의 엉덩이만큼이나 열심히 흔들리는 버스의 손잡이를 잡을 때도 그렇고, 터질 듯한 김밥 속 같은 지하철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모델처럼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학생들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도, 저는 작은 키 때문에 난감하기만 합니다.

딸이 세 살 때는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커?”라고 묻곤 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데요. 급기야 며칠 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러데요, “아빠는 왜 그렇게 키가 작아?” 그래서 내가 아니꼽게 대답했지요. “그래도 내가 너보다 크잖아!”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잇-” 하고 음흉한 썩소를 날립니다.

그래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쪼그려 앉아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랑하는 딸아, 세상에는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이 없단다. 키보다는 사람 됨됨이가 더 중요하거든.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알겠지?

이영철 작.

<행복을 주는 아이> 41×5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

왜 나는 네가 잘되면 배가 아플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각종 모임들이 열립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후배의 승진 소식이라도 들으면 왠지 마냥 축하해주게 되지 않는 나의 속마음. 옹졸해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뭔가 뒤틀리는 심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쟤들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난 여태 뭐 했나?’ 순식간에 분노마저 느끼게 하는 그것의 정체는 바로 부러움입니다. 혼자 살지 않는 이상 누구나 그런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애써 부정하기보다 삶의 전환점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처럼 부러워만 한다면 정말 지는 것, 그 부러움을 넘어서다 보면 어느 순간 더 멋진 나를 만나게 될 겁니다. -편집자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일반적으로 ‘가까운 남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속담 연구가는 원래 이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촌이 땅을 샀을 때 뭔가 도와줄 일이 없는지를 먼저 생각한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퇴비와 비료가 충분치 않았던 옛날 농경 사회에서는 인분이 중요한 거름이었다. 따라서 배라도 아파서 거름을 만들어줘야겠다는 뜻으로 그 속담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의미가 왜곡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고 보인다. 첫 번째 해석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기와 질투를 아예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경계 삼자는 뜻으로 본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라는 우리 조상들의 본래의 뜻에 맞지 않는가.

페이스북, 그대 이름은 질투 유발자

미국 미시간대의 사회과학자 크로스와, 벨기에 루벵대 베르듀인 박사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조사하기 위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피실험자들 82명을 모았다. 이들은 2주 동안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하루에 5번씩 자신의 페이스북 활동 경로와 자신의 감정 상태 등을 문자메시지로 보고했는데 그 결과 페이스북을 더 많이 할수록 기분이 더 불행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삶에 대한 만족도 또한 페이스북에 자주 들어가는 사람이 더 낮았다.
또 다른 독일의 사회과학자 연구팀은 584명의 20대 페이스북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이용 중 느끼는 감정을 조사했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용자들이 가장 자랑하고 싶은 모습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 때문이다. 친구의 페이지를 통해 친구의 가장 행복한 모습과 과장된 감정 표현, 성취를 멋있게 표현한 글을 보며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단순한 질투심 이상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2013년 8월 17일 자 이코노미스트 기사 중에서

마음속 시기와 질투에 대처하는 법

1. 침입 경로 분석하기
시기나 질투가 어떻게 마음속으로 들어왔는지 분석해보자. 우선 무엇이 질투하게 만드는지 원인을 찾아보고 그 원인을 제공한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이 옳은 것인지 의심해보는 것이다. “왜 이런 질투(부러움)를 느끼나?” “내가 질투를 통해 얻으려는 게 무엇인가?” 계속 자문해본다. 질투는 당신이 원하는 것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해 부러움을 느낀다면, 당신은 돈이 주는 자유나 안전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무엇이 당신을 질투하게 만드는지 알면 그 부분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다.

 

2. 인정하고 무시하기
단지 질투를 느낀다고 해서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질투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여러 감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이제까지 화를 내고, 행동에 옮기는 등 질투에 반응하며 싸워왔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질투를 느낀다면 그런 감정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음, 이 멍청한 질투가 또 왔군. 그래 넌 그냥 거기 있든가 말든가.” 질투를 귀찮게 날아다니는 파리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음 정도로 여기며 무시해라. 더 이상 확대하거나, 그렇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다.

 

3. 현명하게 비교하기
만일 당신이 ‘엄친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보자.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당신 역시 어떤 사람에게는 ‘엄친아’일 수도 있다. 결국 비교는 선택이다. 때문에 타인의 성공을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가장 현명한 비교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5년 전에 비해 내 감정 조절 능력은 얼마나 나아졌나, 내 의사소통 기술은 얼마나 유연해졌나, 이 부분은 나아졌지만 이 부분은 아직 부족해’ 식이라면 훌륭하다. 부러움을 자기 발전의 동력으로 삼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라.

참조 도서 <내 감정을 이기는 심리학>(황화숙 저 | 아름다운 사람들)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의 심리, 뇌과학이 증명하다

사람은 자신과 위치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만 비교한다. 친구나 라이벌의 성공이 가장 쓰디쓴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최근에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임이 뇌 사진으로 입증되었다.
지난 2009년 2월 <사이언스>에 실린 내용으로, 일본의 한 연구팀이 실험 대상자에게 공부 잘하고 이성에게 인기가 있는 학생과 평범한 학생이 등장하는 대본을 읽게 한 뒤 뇌 반응을 측정했다. 그 결과, 참가자 모두 뇌 안의 고통 관장 부위가 활성화되었다. 참가자들은 공부 잘하고 인기 있는 학생에게 실제로 ‘질투를 느꼈다’고 대답했다. 같은 참가자들에게 이번에는 애인이 바람을 피우거나 차가 망가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대본을 읽게 한 뒤, 다시 뇌 사진을 관찰했다. 그 결과 질투를 느꼈던 등장인물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기쁨’을 나타내는 부위가 더 활성화되었다. 질투를 많이 느낀 사람일수록 더 많이 기뻐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사람의 뇌에 ‘놀부 심보’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부러우면 이기는 것!

나랑 같은 해에 태어난 사촌 동생이 한 명 있다. 중3 겨울 방학, 설날에 큰집에 놀러간 나는 그 사촌이 외고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부를 잘하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소도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걔가 뜬금없이 외고라니! 그것도 내가 사는 서울로!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가 졌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나면서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 동안 잠만 잤다. 스스로도 너무 쩨쩨하다 싶었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였다.
그때부터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명절에 큰집에 가지도 않고, 스파르타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처음에는 부럽고 속상한 마음이 자극이 되었지만 점점 성적이 오르면서 ‘하면 된다’ 자신감이 붙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가 원했던 K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설날에 큰집에 갔을 때였다. 그 사촌은 재수를 하게 되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지만 그때는 ‘내가 이겼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의 합격 소식이 자극이 됐는지 그 동생은 다시 1년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했고 지금은 그 사촌도 나도 원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다.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과하면 안 좋지만 적당한 질투심은 삶에 자극제가 되는 것 같다. 중3 겨울의 그 불타는 시기심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볼 기회는 없었을 테니까.

김현성 30세.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나는 요즘 애들이 대개 그렇듯이 뭘 해야 될지 모른 채,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갔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때부터 뚜렷한 꿈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친구들이 엄청 부러웠다. 그들에 비해서 나는 낙오자 같았다. 또 한 가지 부러웠던 것은 부모님과 친한 친구들이었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스킨십도 많이 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가족이라니, 정말 신기했다. 일단 나는 부모님과 그렇게 친밀하지도 않고, 또 뭔가 새로운 걸 하겠다고 하면 ‘그게 잘되겠느냐’며 부정적인 말부터 하셨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점점 없어졌다. ‘나도 어릴 때 쟤네들처럼 마음껏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훨씬 더 잘됐을 텐데’ 하면서 부모님 원망도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해보지도 않고선 ‘어차피 안 돼’라며 쉽게 포기했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 졸업 전 어머니의 권유로 마음수련 대학생 캠프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나는 내 행동보다 남들이 어떻게 되는가에만 관심을 갖고 시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잘했는데 부모님이, 환경이 안 좋다고 했고, 친구들이 잘되면 ‘집에 돈이 많으니까’ ‘부모님이 다정다감하시니까’ 하면서 부러워하기만 했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장면 장면을 떠올려 보니 열심히 노력했다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내가 이렇게 된 당연한 이유는 실제로 행동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련을 하며 내 행동을 가로막았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두 버렸다. 지금은 뭐든 해보면 된다는 생각부터 든다. 부모님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도 없어지니 관계도 좋아지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모든 결과는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돌아보면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지, 또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이제 친구의 좋은 일도 진심으로 축하해주게 되었다. 그 아이가 해온 보이지 않는 노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옥다금 25세. 부산시 남구 용당동

커리어우먼, 직장 생활의 행복을 말하다

월간 마음수련 정기구독 10만 명! 그날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김혜진 기자입니다. 이번에 저는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커리어우먼을 만났습니다. 얘기를 나누며 능력자인 그녀가 순간 부러웠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으며 예리한 질문을 해댔지요.ㅎㅎ^^; 듣다 보니 잘나가는 자의 고충도 만만치 않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예전엔 허드렛일이라고 여기던 복사하는 일마저도 좋아하게 됐다는 진정한 직장인, 그녀와의 리얼 빼기 토크입니다.– 편집자 주

● 직장 생활 몇 년 차예요? 25살에 첫 직장에 들어갔으니까 18년 정도.

●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개인신용정보 관련 일을 쭈욱 해왔어요. 왜 은행에서 대출하거나 카드 쓰면 갚아야 되잖아요. 돈을 빌려준 입장에선 이 사람이 잘 갚을지 평가 기준이 없으니까 여러 기준으로 통계 모형을 만들어 점수를 내는 거죠. ‘이 사람은 안 갚을 확률이 몇%다’ ‘이 사람은 대출해도 된다’ 등등의 통계 모형을 만들고 전략을 짜는 일입니다.

● 능력자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제 별명이 신용평가계의 대모였어요.(웃음) 시작 당시엔 한국에선 생소한 분야였고, 한편으론 IMF와 맞아 떨어진 것도 있어요. 대부분의 은행에서 개인신용평가에 대한 시스템 도입을 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입사 후 6년간 완전히 일에 올인했어요. 야근이 기본이고, 결혼 일주일 휴가로 자리 비우는 동안에도 대학원 후배를 데려다 놓을 정도였으니까. 애기 낳기 전날까지도 출장을 다녀야 했어요.

● 와~ 진짜 열심히 하셨네요.

그때는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일이 재밌기도 했지만, 책임감, 자존심도 있었으니까. 당시 회사에선 주로 남성만 있는 직급에 나를 처음 뽑은 거였거든요. 남녀평등고용법에 의해서. 첫 시범 케이스가 된 거죠. 그래서 입사 초반엔 매일 한 명 이상씩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네가 시범 케이스야, 다 너 보고 있어.”(웃음) 내가 잘못하면 여자 후배들의 길을 막는 게 되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 암튼 직장에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 커리어우먼이라, 멋져요. 부럽~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6년 차 되니까 어느 순간 딱 숨이 막히더라고요. 회사라는 게 대리 직급 이상 올라가면 주변 사람들과 같이 하는 일이 많은데 문제는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거죠. 특히 윗사람에 대한 시비가 많았어요. 최대한 설명해도 못 알아듣고, 판단도 못 하고, 심지어 업무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는 상사. 이건 아니다 싶어 회사를 옮겼는데 그 직장에서도 윗분이 장난 아니게 일을 못하시는 거예요. 사장님한테 얘기했는데 그 사람은 여기 그만두면 갈 데가 없다, 니들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나는 그 사람 못 자른다, 하시더라고요. 도저히 안 돼서 나중엔 그 회사도 그만뒀어요. 내 얘기가 팍팍 먹혔으면 좋겠는데,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잖아요.

● 다 내 길을 막는 원수로 보였겠네요.

그러게, 사람들이 다 적이더라고.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 속이 하도 시끄러우니까 그걸 먼저 정리하고 싶었어요. 마침 영등포구청에서 마음수련 공개 세미나를 한다기에 갔는데, 마음 비우는 방법이 있다고 하는 순간, 딱 감이 오더라고요. 느낌 아니까!(웃음)

● 해보니까 시끄러운 마음들이 정리가 잘되던가요?

마음수련이 자기의 산 삶의 기억, 관념 관습 일체를 버리는 거잖아요. 제 경우는 일에 대한 생각, 잣대, 틀을 많이 버렸어요. 일을 잘해야 한다, 이 정도 직급이면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등등. 그러니까 화도 덜 나고 답답한 것도 덜해지더라고요. 전엔 항상 부족분만 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은 거예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지요.

● 1등 하고 잘하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그런 마음도 버려야 한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돼요.  

옛말에 20대에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성공이란 말이 있어요. 내가 그랬던 거 같아요. 나름 성과를 내다 보니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새삼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까, 전처럼 기억력이 빠릿빠릿하지 못하더라고요. 윗분들도 그랬겠구나, 어쩔 수 없는 게 있구나, 알게 되더라고요. 몸이 아파 그럴 수도 있는데 나태해서 그랬다고만 생각하고, 남들도 나처럼 하는 게 당연하다며 밀어붙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근데 잘해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 1등 해야 한다, 하는 기준치가 없어지니까 오히려 일이 훨씬 재밌어지는 거예요.

● 전에 비해 행복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수련을 하며 바늘구멍만 한 시야가 넓어지니까 내가 잘못한 부분도 보이는 거예요. 전엔 쓸데없이 목표를 높게 잡고 힘들어하고, 실패하면 모든 사람이 원수였는데, 이제는 상대가 보이고 그 사람 고유의 능력이 보여요. 즉 현실에 맞는 목표를 잡고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돕게 되더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성공 확률도 더 높아지고 일 자체가 재밌어지니까 복사하는 일 같은 사소한 것조차 다 감사하게 돼요. 모든 일에는 이유와 뜻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고 할까. 매순간 인정받기를 원하고 결과가 성취될 때만 행복해하던 때는 몰랐던 재미예요.

● 사실 직장 생활이란 게, 일보다 감정 소모가 더 힘든 것 같아요.

아휴~엄~청~. 근데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보다 더한 거 같애요. 그러니까 직장 생활 1, 2년이면 지치죠. 우리 회사에 명문대 나오신 상사가 있는데 그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잘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인정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을 안 해요. 근데 자기가 일을 안 하는지를 몰라. 모든 시간을 회사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몰라주는 데 대한 탓, 허무감에 몸서리치는 데 쓰고 있는 거죠. 그 옛날 스마트할 때만 기억하고. 안타까운 건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해도 모른다는 거예요. 나도 수련 안 했으면 저랬겠구나 싶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 고로 직장 다니는 우리들, 행복할 수 있나요, 없나요? 결론을 말해주세요.

아까 한 얘기에 다 답이 있으니까 스스로 찾으세요.(웃음) 암튼 너무 목표에만 매달리지 말고, 내가 부족한 것도 인정하고 상대가 부족한 거 인정하면서, 같이 도와주고 어울리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직장 생활이 행복해야 내 삶도 행복하다는 거 잊지 마시고요.
파이팅 합시다, 직장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