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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 재배로 실내 습도 UP!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건조한 겨울 날씨에 난방까지 하다 보니 목이 답답하고 코가 자주 막히지요.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정전기는 더 싫습니다. 시원한 해결책 어디 없을까? 물론 ‘가습기’가 있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오히려 건강에 해를 끼치는 문제가 생긴다니, 가습기 대신 집안 습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 ‘수경 재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식물을 흙에 심지 않고 물에서 키우는 수경 재배는, 화기에 담긴 물이 공중으로 증발되면서 가습 효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이 담긴 그릇에 식물을 뿌리째 담가놓으면 끝, 너무 간단하지요? 단, 뿌리에 붙어 있는 흙을 모두 털어내야 해요. 흐르는 물로 뿌리를 여러 번 헹구어 깨끗이 씻어 준 다음 그릇에 담고 뿌리가 잠기도록 물을 부어주면 완성이랍니다.

집에 있는 그릇 중에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린 것만 아니라면 모두 수경 재배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찻주전자나 항아리, 뚜껑이 깨져버려 몸통만 남은 사기그릇, 투명한 유리병도 식물을 넣어두면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된답니다. 집 안 요기조기 여러 군데 해두면 더욱 좋겠지요. 수경 재배를 할 때의 물 관리는 그릇 속의 물이 줄어든 만큼 그때그때 보충해 주면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물이 탁해지면 화초 뿌리와 함께 그릇을 다시 씻어주면 돼요. 건조한 겨울철에도 촉촉한 우리 집! 진짜 친환경에, 확실한 가습 효과! 실내 습도 올리기 대작전 ‘수경 재배로 화초 키우기’ 올겨울 꼭 시도해 보세요.

‘대파 쪽파 실파’ 피자

재료

토르티야(또는 식빵) 2장, 양송이버섯 2개, 실파(또는 대파) 10뿌리, 블랙 올리브 2개, 안초비 2마리, 피자 치즈 2/3컵, 토마토소스 3큰술

겨울에 더 맛있는 재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파다. 파는 날것으로 먹으면 맵지만 익히면 단맛이 난다. 때문에 피자에 올리면 달콤한 맛이 잘 어울려 아이도 어른도 좋아하게 된다. 어릴 적, 파가 맛있는 계절이 오면 밥솥 위에 실파를 올려 쪄서 돌돌 말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파강회가 떠오른다. 그 맛이 아주 달콤해 오늘은 야참으로 만들며 피자에 올려보았다. 피자에서는 파도 주인공이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1 양송이버섯 2개는 모양대로 썰고, 실파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빼고, 블랙 올리브는 모양대로 썰고, 안초비 2마리는 굵게 다진다.

2 토르티야 1장에 피자 치즈 1/3컵을 뿌린 후 남은 토르티야 1장으로 덮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골고루 펴 바른다.

3 양송이버섯, 실파, 올리브, 안초비를 올린 후 소금, 후추로 간하고 남은 피자 치즈 1/3컵을 뿌린다.

4 토르티야를 200℃ 오븐에서 10분 정도 굽는다.

초소형 안전 가습기 ‘포그링’

이름은?  포그링. Fog+ring. 도넛 모양의 휴대용 초소형 가습기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해소해주고 재미있는 상품을 만들자는 생각에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아이디어 3천여 개를 골랐는데 그중 추리고 추려서 고른 아이디어가 휴대용 가습기였다. 당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졌던 때라 무엇보다 안전한 가습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제품의 원리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습기는 진동자가 물 안에 있는데, 포그링은 1초에 12만 번 진동하는 진동자가 물 위에 떠서 물 입자를 분해해 내뿜게 된다. 때문에 진동자 자체가 필터 역할을 하게 되어 기존 가습기처럼 물을 머금는 섬유 필터가 필요 없고 세균 걱정도 안 해도 된다. 포그링 하나에 물 1컵이면 개인 책상 하나 정도를 커버할 수 있다.

중점을 둔 부분은?  단순해 보이지만 링을 띄우는 것이 핵심이었다. 직접 공장에서 1~2개월씩 지내며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초음파 진동 기술로 만들어진 가습기는 많이 있지만 포그링은 지름이 5cm로 아주 작다. 여행 중이나 차량 내부에서도 USB의 5V 전원만으로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또한 어떤 용기에든 물을 담기만 하면 띄워 쓸 수 있게 했다.

주변의 반응은?  지난해 세계 최대 생활디자인 박람회인 ‘파리 메종오브제’의 참가 제품으로 선정되었다. 그 후로 세계 곳곳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는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태리 등 총 7개국에 수출을 준비 중이다.

 

만든 사람 함성욱, 김창덕 (주)네오티즌 공동대표

어바웃 타임

2014-01 (8)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싫을 까닭이 있을까? 나이와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좋아하는 변하지 않는 주제가 바로, 사랑이다. 사실, 너무 좋다.

<러브액츄얼리> <노팅힐>의 감독 리차드 커티스가 얘기하는 삶과 사랑 얘기는 소소한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그만의 화술로 풀어내는데, 겨울밤, 난롯가에 둘러앉아 ‘내가 이런 사랑을 했었지’ 하고 들려주는 그런 푸근함이 있다.

또한 그의 얘기는 항상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넘치면서, 때론 사랑의 절절함도 담고 있지만 그 아픔까지 보듬어주는 배려심이 넘치고, 아픔은 있을지언정 어두운 구석이 없어서 좋다. 이번 얘기는 더욱 독특하다. 바로, 시간 여행을 한단다. 혹시! 했지만 역시 그만의 스토리텔링으로 또 하나의 삶과 인생담을 풀어내어 준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시간 여행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된 평범남 ‘팀’은 기껏 알려준 이 시간 여행의 능력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 데 사용하겠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이 능력으로 거의 세계 정복까지 갈 태세를 하겠지만 이 친구는 참 소박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심정 정말 이해가 간다. 그것은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또 다른 절실한 게 있는 법이니까.

영화는 이렇게 팀의 좌충우돌 사랑 만들기에 골몰하며 그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팀은 열심히 시간 여행을 반복하며 그의 사랑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서 가족애와 행복의 조건을 얘기한다. 자신의 행복 찾기에 분주하던 팀은 행복이란 혼자 만들고 혼자 누려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지만, 이미 자신이 쌓아 놓은 시간을 다른 결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통의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희망한다. 하지만 그런 평범할 것만 같은 삶이 얼마나 큰 희망이었는지를 살면서 깨닫게 된다.

<어바웃 타임>은 그런 인생의 굴곡 속에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혹은 ‘만일 내가 ~ 했다면…’ 하며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바웃 타임>을 혹시 ‘시간에 대하여’ 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 여행’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about time’은 우리가 살면서 돌아가고 싶은 지점, 또는 미처 하지 못했던 그 무언가로 인해 후회가 되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얘기하며 그때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부터 쌓아나가는 현재의 시간에서는 놓치지 말라는 뜻에 더 가깝다.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다른 얘기를 더 듣고 싶은데 이 영화를 끝으로 그만둔다니 안타깝다. 하지만 달달한 로맨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따뜻한 충고로 끝내는 이 감독의 말을 되새기고 싶다.

It’s about time. (진작 그럴 일이지. 그때 했으면 좋았잖아, 지금 후회도 없고….)

그래도, 영화처럼 매번 돌아갈 수는 없어도 갈 수만 있다면, 한 번쯤은 갔다 오고 싶은 시간이 생각난다. 나도 어바웃 타임이 자꾸 귓가에 들려서 말이다.

영화에서 아버지가 해주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하는 멋진 시간 여행이야. 우리가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이지.”

김대형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김치와 김장 문화’

매년 겨울 초입이면 집집마다 담그는 김장. 그런데 우리에겐 당연하고 평범한 김장 담그기가 2013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치’라는 음식이 아닌, 김장 담그기가 동절기에 대비한 한국인의 나눔과 공동체 삶의 방식으로 등재된 것. 그래서 등재 신청서 제목도 ‘김장: 김치 만들기와 나누기(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이다. 어떻게 등재될 수 있었을까. 지난 3년간 등재 준비에 참여하여 신청서 작성을 주도한,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위원 박상미 교수(한국외국어대 국제학부)의 이야기다. – 편집자 주

인류무형문화유산은 유네스코가 2003년 제정된 협약에 따라, 급격히 소멸되고 있는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는 판소리, 강강술래, 아리랑… 김장 문화까지 총 16개가 등재돼 있다.

<김치명인 강순의의 계절 김치>
(중앙북스) 제공

현대인 80%가 김장 담근다
현대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전통

‘서울의 풍속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 등으로 김장을 하여 독에 담근다. 여름의 담그기와 겨울의 김치 담그기는 인가에서 일 년의 중요한 계획이다.’
19세기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통 발효 식품인 김치는 채소 재배가 안 되는 겨울철을 위해 채소를 염장했던 데서 생겨났다. 또한 김장은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늦봄의 젓갈, 여름의 천일염, 늦가을의 담그기 등 사시사철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이며 김장독을 땅에 묻어 오랜 기간 발효시키는 지혜가 담긴 문화다. 또한 김장 문화는 현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청이 지난 2011년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95%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김치를 먹고 있고, 64%는 하루 세 번의 식사에서 모두 김치를 먹으며, 한국인의 80%는 직접 김장을 하거나 친인척이 하는 김장에 참여한다고 한다. 현대 한국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김치냉장고도 과거 발효를 위해 땅에 묻은 김장독의 환경을 재현한 것이다.

‘어려우면 김장독에서 가져가셔도 됩니다’
나눔의 문화

김장의 과정은 곧 나눔의 문화였다. 한꺼번에 몇 개월 먹을 김치를 담는 김장은 남녀노소,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김치를 담그고, 음식도 먹으며 정을 나누는 것이다. 친척이나 이웃끼리 서로 도와가며 하는 품앗이 풍습도 있어, 이웃 간의 화목을 다지기도 하는 중요한 연중 행사였다. 과거에는 어려운 이웃들이 김장독에서 가져가는 것을 눈감아주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요즘으로 이어져 시청 앞 광장에서 수천 명이 김장을 같이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행사가 열리게 됐으니, 한국인 특유의 김장 문화다.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손맛
한국 여성의 정체성

김치의 맛은 집집마다 다 다르다. 그 맛은 여성들을 통해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데, 어머니의 ‘김장 김치’는 한국적인 ‘정’의 이어짐으로도 볼 수 있다. 2006년 당시 ‘김치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치에 대한 첫 번째 논문을 쓰며, 김치의 흐름은 곧 ‘정’의 흐름이라 결론을 내었다. 여성들이 김치를 만들어서 가족, 친지,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과정은 정을 전달하고 가족과 친척들의 네트워크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인 것이다. 논문을 쓰면서 받게 된 한 학생의 에세이에는 ‘김장철이면 온 가족의 김장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김장철에 가족들이 겪는 혼란, 뿔뿔이 흩어져가는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무척 마음에 와 닿았다.

김장 김치의 소중한 가치를 배우다
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며

등재 신청서는 작성에만 1년 이상 걸릴 정도로 함께 공을 들였다. ‘문화유산이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사업협약 의 정신에 기반하여,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위의 내 용들을 토대로 전체 인류 사회에서 김장 문화가 갖는 의미, 문화적 창 의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도록 했다. 내 스스로도 김장 문화가 갖는 의 미와 가치를 다시금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지금은 친 정 부모님께 김치를 갖다 먹고 있는데, 그러지 못할 상황이 되면 사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준비를 하면서 힘들더라도 김장 문화를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장이라는 게 편리하냐 아니냐의 기준을 뛰어넘는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걸 더욱 느꼈기 때문이다.

2012년 3월 말 제출한 등재 신청서는 유네스코 심사에서 ‘베스트 5’로 선정됐다. 인류무형유산 취지에 잘 맞게 작성했다는 평가였다. 올해 12월 초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린 위원회에서 24개국 투표를 거쳐 최종 등재되었다. 신청시 제출할 사진을 위해 국민 응모를 했는데 수백 장이 모였다. 김장의 순간을 담은 기록들이다.

하얀 세상으로 들어가다, 평온해지다

사진 & 글 김주원

몇 해 전 겨울, 폭설이 내린 강원도에서 갇혀 버렸다.
주위는 하얀 눈으로 둘러싸였다.
사람이 없는 풍경 속에는 눈 내리는 작은 소리들만 가득했다.
그리고 바람 소리, 나무들이 춤추는 소리….
우리의 오랜 풍경들이 마치 살아 숨을 쉬는 듯하다.
펑펑 내리는 눈으로 인해 사람들이 만든 요란한 물체들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
대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풀 한 포기, 쓰러진 나무 군락,
파헤쳐 놓은 땅, 채굴되어 사라질 섬, 굴러다니던 돌덩이가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후 눈이 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새벽같이 달려가 때를 기다리고 눈이 1m 이상 쌓이면 촬영을 시작했다.
때로 폭설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하는 위험한 상황도 있었지만
두려움보다는 하얀 구름 속을 헤엄치듯,
고요하고 경이로운 느낌에 오히려 마음은 평온해졌다.

하얀색은 백지처럼 무無의 상태를 연상시키지만,
빛이 모두 섞일 때 생기는 색, 즉 유有의 상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기에 더 가질 것도 없는,
아무것도 없기에 더 풍부해지는 하얀 세상.
새삼 자연의 숭고함과 아름다움, 존재의 가치를 생각한다.

‘WHITE’ 꾸미지 않은 순수함.
즉 ‘우리 땅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눈이 내려야만 볼 수 있는 세상 ‘WHITE’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또한 순수하게 드러난다.
필요 없는 것들은 깨끗이 정화시킨다.
평온해진다. 이 평온한 마음이 새해를 맞는다.

사진가 김주원님은 월간<포토넷> 기자를 거쳐 현재는 사진 에이전시 ZAKO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WHITE 시리즈는 폭설이 내리는 강원도와 서해안 지역 등지에서 5년간(2009~2013) 촬영해온 작업으로, 2012년 스페인 현대 미술 비엔날레에 초대된 바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좋은 사진을 만드는 김주원의 DSLR 사진 입문> <WHITE> 등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24시간이다.

나는 떡집 셋째 아들이다

최대한 27세. 2011 대한민국 ‘떡 명장’

나는 떡집 아들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내가 아버지를 도와 떡을 배우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던 나는 어쩌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를 한 대 쳤다가, 나도 싸움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중학생이 되기까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물으면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만날 싸움을 해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꿈이 없으면 차라리 떡집을 이어받아라 하시더니, 다음 날 새벽 2시부터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떡은 미리 만들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문이 오면 새벽 일찍부터 떡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친구들이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 영어 단어를 외울 때, 나는 쌀가루를 빻고 가래떡을 뽑았다. 공부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고, 학교에서도 ‘떡집 아이’로 생각해서 졸든 말든 일절 상관을 하지 않았다. 너무 하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힘들어지실 게 뻔히 보여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정말 떡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있었다. 2010년 제대를 하고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크게 보인 것이다.

“야, 쌀 몇 키로 몇 키로 달아.” “이거는 어떻게 어떻게 해.” 쌀, 물의 양, 각 재료의 특성까지도 하나하나 정확하게 알고 지시를 내리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목표를 세웠다. 아버지처럼 되자. 아버지처럼 될 때까지 떡 만드는 일을 하자~!

그때부터 휴대 전화도 끊었다. 친구한테 연락이 오면 나가고 싶고 마음이 흔들릴까 봐서다. 떡 학원에 다니면서 이론을 배우고,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떡 일에만 매진했다. 막상 내 일이다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배우니 재미도 더 생겼다. 공부도 못하고 특별히 관심 있는 것도 없었는데, 떡은 나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떡을 만들 수 있을까? 빵처럼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떡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하면서 새로운 떡들도 많이 만들려고 시도를 했다. 그렇게 ‘호박소담떡’이라는 호박 향이 나면서 호두가 씹히는 부드럽고 달달한 단호박 떡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떡으로 25살에 ‘2011 대한민국 떡 명장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나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보여 드렸는데 아버지는 상을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엉엉 우셨다. 어머니도 아무 말 없이 울고 계셨다.

아버지는 항상 엄하게 떡을 가르치셨다. 한 예로 제대하자마자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새벽에 나를 깨웠다. 나에게는 휴식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리고 한번은 명절 때 너무 바빠서 이틀을 밤새고 가래떡을 만들다가 기계에 손을 넣어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병원에 갔다 온 다음 날 새벽에도 나를 어김없이 깨웠다. 그리고는 비닐봉지로 내 손을 감싸주시고는 나에게 쌀을 퍼오라고 일을 시키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을 못 할 줄 알았는데 하려고 하니까 할 수 있었다. 그때 사람의 능력은 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못 할 거 같지만 상황에 닥치면 하게 된다.

그날 이후 손이 부러져도 일을 했고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려도 일을 했다. 지금 이 일을 완벽하게 안 해놓으면 다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플 때 하면 힘들지만 막상 하고 나면 산을 하나 넘은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한아, 일은 정말 중요한 거다. 손님이 주문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주문을 하는 거다. 그 약속을 절대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귀에 닳도록 하셨던 말씀이다. 부모님도 그 말씀을 몸소 보여주셨다. 아버지에게 섭섭한 순간도 많았지만 지금은 아버지께 감사하다.

명장이 되고 나서 처음엔 좋았지만, 그 기분은 정말 잠깐이었다. 아직 체계적인 이론도 정리되지 않았고 기대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아버지께서는 “너는 명장이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 아직 명장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겸손하라고 하셨다. 나도 지금 진정한 명장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떡들을 먹어보면 정말 맛이 깊고 엄청 맛있다. 그런 전통 떡들의 맛은 살리고, 현대인들의 입맛에도 맞는 떡을 개발해 전 세계에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아직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청소년들을 위해 재능 기부 형식으로 떡 강의도 해주려고 한다. 자기 싫어도 무조건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떡 만들기.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많았지만 사람마다 자기 삶의 길이 있는 것 같다. 떡 때문에 고생하며 철도 들었고 책임감도 배웠다. 앞으로도 떡과 함께할 시간들에 파이팅을 외쳐본다.

알랭 토마 작.

<흰가슴 투칸>

39×46.8cm. 석판화. 2007.

스웨덴에서 만난 100년 전의 나

이숲 소설가,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저자

2006년,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당시 내 생활의 한 부분이 정리되는 사건이 있었고, 완벽한 이방인의 삶,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를 정리하고 싶었다. 스웨덴 웁살라대학교에서 유럽 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중앙도서관 카롤리나 레디비바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1904년 국운이 기우는 한국에 대해서 쓴 책 <한국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대한 기억과 연구>였다. 화관무를 입고 족두리를 쓴 여인이 그려진 하얀색 낡은 하드커버를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한참 동안 표지만을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방인의 눈으로, 1세기 전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인은 내가 알고 있던 한국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정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내 의식 속에 있는 한국에 대한 표상들은 주로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텍스트 속의 한국인들은 달랐다.

‘자유분방하고 호탕하며 자연스럽고 총명하다’ ‘선량하고 관대하며 명석한 백성들’ ‘한국인들의 태도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당당하다’ ‘동면에서 깨어나면 독창적인 탐구심으로 불타오를 사람들’ ‘겉으로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 밑바닥에 있는 그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단호한 정신력’….

나는 왜 이렇게 긍정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 후부터 몇 년 동안 나는 한국인, 한국인들의 개성과 영혼에 푹 빠져 지냈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거나 체류했던 서구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두툼한 텍스트 속에는 잘나가는 권력가나 영웅이 아닌, 그들이 여행길에서 오가다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들의 감각 속에 포착된 이들의 개성과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 속에서 살아 있는 한국인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들에게 푹 빠졌고, 그 모습을 또렷이 상상하고 싶어서 그 부분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들을 만나 혼자 슬퍼하고, 기뻐하고…. 긴긴 스웨덴의 겨울밤을 보내는 게 외롭지 않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세계의 식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제국주의는 세계에서 마지막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던 한국에도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쾌활하고 명석한 한국’보다는 ‘무기력하고 무질서한 한국’이 필요했다. 특히 당시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쏟아냈다.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이 이용한 부정적이고 우울한 표상들을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 사람들을 좀 더 알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친절하고 악의를 모르며 진리를 탐구하고 또 매우 사랑스러운 성품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민족성에는 무서운 잠재력이 있다. (중략) 피압박 민족보다 더 열등한 민족이 4천 년 역사를 가진 민족을 동화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과업이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반면 한국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영국인 신문기자인 프레드릭 매켄지는 반일의 목소리를 담아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한 사람이기에 특히 인상적이었다. 수 세기를 거쳐 이 땅이 물려주고 물려받은 정신성. 그는 한국의 정신사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08년 겨울, 나는 그동안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한국에 대한 서구의 인식 1890-1930: 상호성과 식민담론의 연관성에 대한 비교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웁살라대학교에 제출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2년 이상의 준비 작업을 거쳐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이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역사에 묻힌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우리의 자화상에 드리워 있던 그늘을 걷어, 우리의 정체성에 유쾌한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내’ 나라를 지금에야 발견했다는 의미를 제목 속에 담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 오천 만이 한 명 한 명 소중해졌다.’ 한 독자의 감상평이 심금을 울렸다. 바로 내가 이러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해가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인의 기질 중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선함’과 ‘강인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절망적이리만큼 학대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들. 착하고 순박하다가도 위험이 닥치면 무섭게 일어서는 용감한 사람들. 눈부시게 성장한 한국의 잠재력은 이미 100여 년 전의 서구인들의 눈에 포착이 되었던 것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온 역사, 한국인에 내재된 고난을 극복한 자의 힘과 생명력. 누군가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우리의 오랜 정신을 믿고, 진취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우리 자신의 길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다시 무서운 잠재력을 끌어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한국인 연구’는 내가 놓칠 수 없는 화두가 될 것 같다. 주로 구한말의 한국인을 다루다 보니 현대의 한국인을 말하지 못했는데 훗날 나는 이 작업을 하고 싶다. 그래야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랭 토마 작.

<판다들>

42.5×45cm. 석판화. 2005.

늦깎이 대학생의 꿈

조정자 64세. 김포대학교 사회복지과 2학년, 환경미화원

나는 김포대학교의 환경미화원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는 늦깎이 대학생이기도 하다. 나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부터 시작된다. 아침 준비를 마치고 6시에 출근, 청소를 마치고 9시부터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화장실 청소를 하고 다시 수업을 듣고, 청소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와서 새벽 한두 시까지 공부를 한다. 이제 마지막 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데, 필요한 학점을 따지 못하면 졸업을 못 하기에 정말이지 1분 1초가 귀하다.

나는 전남 순천에서 9남매 중에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여러 가지 여건상 공부할 형편이 안 돼 초등학교만 겨우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온갖 고생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조금의 시간 여유가 나면서, 이상하게 머릿속에 잡념 같은 게 계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니까 괴로웠다. 잡념을 멀리하려면 뭔 취미를 가져야겠다 하면서 찾다가 시작한 게 공부다.

그렇게 50대에 다시 중졸 검정고시부터 준비를 해갔다. 그런데 공부가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 배운 걸 잊어버렸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아는 거 나는 20번 보자는 생각으로 보고 또 봤다. 영어 단어 외울 때는 온 집 곳곳에 단어를 써 붙여놓고, 항상 호주머니에 단어 수첩을 넣어놓고 다니며 외웠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를 하는 것은 힘들기도 했지만, 잡념도 없어지고 무식했던 내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기뻤다.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하면서 아, 나 같은 사람도 되는구나, 하면 되는구나, 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만학도 특별 전형으로 지금의 대학에 들어왔다.
“공부를 하게 해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맡은 일을 잘해내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을 해서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많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감을 더 가지게 되었다.

대학 들어와서도 F학점만 받지 말자는 목표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가장 어려운 게 컴퓨터 시간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하다 보니까 지금은 한글문서, 엑셀, 파워포인트로 과제를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는 해보니까 제일 정직했다. 책은 언제나 내가 노력해서 연구하려고 하면 그만큼의 지식과 지혜를 주었다.

공부를 못 했다는 한도 많았는데 어느새 대학까지 다닌다는 게 때로는 신기하기만 하다. 주변에서 도와준 사람들 생각하면 너무 고맙다. 내가 어려워하면 어린 학생들이 많이 가르쳐주었다. 날 무시 않고 존경해주었다. 남편은 나와 같은 학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내가 공부 때문에 청소 구역을 다 못 하면 남편이 다 해준다. 공부가 하도 안돼서 “난 돌대가리인가 봐” 푸념하면 남편은 “아주 똑똑한 사람도 하다 보면 다 틀리더라. 그만큼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최고지” 하며 용기를 주었다.

얼마 전 한 기업에서 만학도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을 땐 너무 감동스러웠다. 어떨 때는 너무 복을 받아서 딴 나라에 온 거 같기도 하다.

잠잘 시간 쪼개서 하다 보니 피곤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잡념 없이 딱 누우면 기절하듯 꿀잠을 잘 수 있어서 행복하다. 2014년 2월 졸업하면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대학에 다니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 장애인활동보조인 과정 수료증도 땄다. 사회복지과를 선택한 이유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1학년 때는 봉사 활동을 다녔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머릿속도 깨끗해지고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많이 느꼈다. 졸업한 후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싶다.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따고 싶고 계속 배우면서 살고 싶다.

인생은 자기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

알랭 토마 작.

<봄 부케>

50.7×42.5cm. 석판화. 2008.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24시간이다.

백수의 이십사 시

김재숙 69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강석로

사십 년 가까이 교직에서 종사하다 퇴임한 지 올해로 7년이 되어간다. 정말 거짓말처럼 세월이 빨리 지나갔다. 오늘 손가락을 꼽아보고 새삼 놀랐다.

지난해 서울로 시집간 딸이 바로 곁으로 이사를 왔다. 시집가기 전에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더니 둘째 아기를 갖고는 출산 한 달 전에 이사를 왔다. 나도 내가 아기들을 보게 될 줄 몰랐다. 애기 보느라 동창회 못 나온다거나 발이 묶였다는 친구들 보면 딱하게 여기던 나였다. 그런데 나이에 따라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자식이 출가해서 아기를 낳는 일도 요즘 드문 일이라 이것도 큰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벽 다섯 시 반. 머리맡 핸드폰의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기상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올빼미형이 바로 나였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공원 맞은편에 있는 딸의 집으로 간다. 여섯 시. 사위와 딸이 출근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 삶이 고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이들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 이리 부지런한겨?

손자는 다섯 살이고 손녀는 16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두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두 손 벌려 달려든다. 서로 다툰다. 두 돌도 안 된 녀석이 뭘 안다고 이만저만 샘을 내는 게 아니다. 무어든 오빠 하는 대로 하려고 하니 뺏고 빼앗기고 울고 야단이다. 오빠가 양보를 잘하고 동생을 너무 예뻐하니 동생은 점점 버릇이 나빠진다.

손녀에게 우유를 200ml 타서 먹이고 손자는 홍이장군을 먹는다. 어느새 손자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보는 사람이 따로 없으니 나도 온몸을 흔들어가며 아침 체조 겸 춤을 춘다. 다시 할머니를 위해 허리를 튼튼히 하는 운동 시범을 보인다. 따라하다 보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 후 동화책을 다섯 권 이상 읽어주어야 한다. 둘이 서로 자기 책을 읽어달라고 싸워 매양 힘들다.

드디어 아침 식사 시간. 뜨거운 밥에 계란을 깨어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비벼준다. 다음엔 세수하기. 둘이 똑같이 같이 하려고 나란히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히기도 전에 둘이 다 똥을 싼다. 손자는 화장실에서 손녀는 기저귀에 한바탕 황금덩이를 쏟아 놓는다. 그 똥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이제는 어린이집에 갈 시간이 다가온다. 손녀는 5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손자는 15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숲 속 오솔길을 걸어서 간다.

홀로 돌아오는 길, 앞산으로 가거나 커다란 모래 운동장으로 간다. 마침 아침 햇볕이 운동장을 반쯤 차지하고 있다. 열심히 걷는다. 다섯 바퀴 이상 걷는다. 그리고 둘레에 설치해놓은 운동 기구에 매달려 이십 분 정도 논다. 퇴임 후 병원에 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그걸 좀 모면해 보려고 하는 일과다. 집에 돌아와 신문을 본다.

12시가 넘으면 점심 식사를 한다. 점심을 먹고 베란다에서 놀고 있는 화초들을 돌아보고 잠시 누워 쉰다. 벌써 두 시 반이다. 배달된 월간지를 보아야 하고 컴퓨터의 메일을 뒤져 답을 써야 한다. 안 그런 날은 친구와 점심 식사를 한다. 늦어도 네 시에는 집에 돌아와야 한다. 네 시! 손자를 찾아 가지고 손잡고 걸어가며 하루의 일과를 묻고 답하고 한다.

오는 도중에 벤치에 앉아 우유나 두유를 마실 때도 있다. 애들과 나는 똑같이 그런 단백질 음식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자라느라 먹고 나는 사라져가는 근육 세포를 보충하기 위해 먹는다. 어느새 쌓인 낙엽에 발을 묻어가며 걷는다. 손자와 나의 정서가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집 앞에서 손녀를 찾아 함께 돌아온다. 다섯 시다. 에미가 올 시간이 한 시간 남았다. 병원 일이 끝나면 쏜살같이 달려오는데도 한 시간이 걸린다. 현관 벨이 울리면 무릎에 앉아 책을 읽던 손녀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현관으로 간다. 신발도 제대로 벗어놓지 못하고 아이들을 업고 안고 서성이는 어미를 보면 젊은 시절 내 모습을 바로 보는 것 같다.

아이들과 뽀뽀를 나누고 돌아온다. 벌써 어둠이 깔렸다. 6시 반에 며느리가 마련한 저녁 식탁에 둘러앉는다. 가장 맛있게 먹는 시간이다. 두 손자가 커가면서 음식도 푸짐해지고 종류도 다양해진다. 식사 후에 다시 나간다. 집 앞마당을 오락가락 다섯 번 정도, 심호흡을 하고 들어온다. 여덟 시가 넘어 아홉 시를 향해 간다.

부지런히 온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동안에 온 메일에 답장을 쓰고 운 좋은 날은 내가 쓴 시를 보내준다. 그냥 정보 메일을 전달했을 때는 답이 오지 않지만 내가 쓴 글을 보내주면 여기저기서 즉석 답신이 온다. 나도 신이 난다. 11시까지는 잠이 들어야 한다는데 늘 넘기게 된다.

나의 24시는 이렇게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잘못하면 백수가 과로사하는 수가 있겠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공원을 산책하고 걷고 운동 기구와 친해지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 어려움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고 즐기게 하심에 감사하다. 손자 손녀와 함께하는 나의 이십사 시. 뒤늦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건강을 주십사 기원해본다.

알랭 토마 작.

<기수가 있는 겨울 풍경>

14.5×40.5cm. 목판에 유채. 2006.

만화가의 꿈, 마침내 이루다

박광중 45세. 회사원. 경남 거제시 아주동

어릴 적 내 꿈은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마흔 중반인 지금 떠올려봐도 기억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원래 그림을 그리셨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 여백은 온통 낙서로 덮여 있었고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 그림은 내 삶의 전부였고 반드시 만화가가 되리라 마음먹었었다.

고교 진학을 앞둔 어느 날, 당연히 예술고등학교로 진학하리라던 내 소망과 달리 아버지께서는 반대를 하셨다. “그림은 안 된다, 기술을 배워라.” 당신은 7남매의 장남으로 그림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 분이셨다. 아버지가 무서워 고집을 피울 엄두도 못 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터라 원하지 않는 학교로 진학을 했다. 고교 시절은 암울했다.

미대를 가려고 입시 미술을 준비했지만 학력이 약해 고배를 마셨다. 사춘기 시절에 끝냈을 법한 방황은 이십 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여전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정확히 1년 후 모아둔 그림들을 챙겨 들고 서울로 향했다. 당시 목표로 정한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하숙집을 구하고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가 모여 있는 충무로 일대를 무작정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취직이 되었고 서울에서의 그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 조건은 열악했다. 월급으로 하숙비 내고 적금 십만 원을 붓고 나면 딱 십만 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지하철비와 점심값을 해결했다. 주문받은 그림을 기한 내에 그려내려면 일주일에 사나흘 밤새는 건 예사였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지만 행복했다. 기억에 남는 건 당시 대전 엑스포 공원을 소개하는 그림을 그렸을 때다. 정말 뿌듯하고 보람찼다.

서울 생활 만 2년째 접어들 무렵 아버지께서 크게 다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내 앞가림조차 버거웠던 터라 부모님께 생활비는 고사하고 용돈조차 드리지 못했는데….

장남이자 하나뿐인 아들로서의 선택. 다시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 난생처음 조선소라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좁디좁은 배의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며 녹을 벗겨내고 페인트를 칠했다. 퇴근 무렵이면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는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 1994년 초, 우리나라 조선소 가운데 1, 2위를 다투는 큰 회사에서 생산직 사원 공개 채용이 있었다. 고교 시절 전기과를 나온 터라 면접과 실기 테스트를 거쳐 무난히 합격이 되었다. 안정된 직장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수입이 생기면서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사내 미술 동호회에 들어가 그림도 다시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는 개선 제안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그림이 필수였다. 자연히 동료들의 제안서는 내 앞에 쌓였고 소속 부서의 제안 양식에 들어갈 그림을 원 없이 그리게 되었다. 안전 담당 부서에서 전사에 부착할 안전 표지판 원고 작업을 하면서 사내에서 꽤 알려지게 되었다.

입사하고 12년이 흐른 2006년 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 홍보팀이었다. 사내 신문 기자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2013년 현재 나는 홍보팀 근무 8년 차에 접어들었고 디자인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또 회사 신문에 만평과 숨은그림찾기도 연재하고 있다. 2007년 방송대학교에 편입하면서 야간 대학을 나와 모자랐던 공부도 이어갔다. 3년간 방송대 신문에 시사만평을 연재한 것을 계기로 지역 언론사와 잡지사, 관공서 등에 만평과 숨은그림찾기를 고정 연재하게 됐다.

퇴근 후 집에서조차 그림을 그리게 되니 버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인생은 분명 복 받은 삶이다.

사십 대 중반 내 꿈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퇴직 후에도 시사만평을 그리며 세상을 관조하고, 숨은그림찾기를 그려 이웃과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다.

나에게는 중학교 3학년 쌍둥이 딸들이 있다. 그중 한 아이가 그림을 곧잘 그린다. 대물림일까? 하지만 아이는 아직 꿈이 명확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아빠는 한때 꿈이 좌절되는 듯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했더니 이루어지더라.” “네가 재미있고 정말 잘하는 게 뭔지 찾아볼래? 그것이 너를 행복하게 만든단다.”

가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긋났던 꿈의 퍼즐을 다시 맞추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차근차근 미술 수업을 받고, 근사한 작가가 되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세상을 그리고….’

현실은 좌절이었지만, 그 좌절을 통해 정말 하고 싶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게 된 지금, 지난 삶이야말로 나를 단련시켜 준 시기였기에 후회는 없다. 훗날, 하루 24시간을 꽉 채우며 살아온 삶에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게 되리라.

알랭 토마 작.

<낭트 성당의 성탄 트립티크>

55×93.5cm. 석판화. 2004.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박성근 66세. 양봉인. 성근양봉원 운영

내가 처음 양봉을 시작한 것은 1974년 3월이었다. 매년 꿀을 따기 위해 벌통을 차에 싣고 전국 방방곡곡 밀원(꽃)이 많은 곳을 찾아 누빈다. 매년 520만(한 통당 8만 마리가 들어 있는 65개 벌통) 벌떼를 이끄는 꿀벌 총사령관인 셈이다. 4월에는 유채꽃이 피는 부안으로 가서 유채꿀과 꽃가루를 채취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국을 다니며 아카시아꿀, 밤꿀, 들깨꿀 등을 채취한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말도 있듯이 꿀벌은 나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하다. 또한 정직하며 공짜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나기처럼 세찬 비가 아니면 이슬비가 와도 일하러 나간다. 벌집에 꿀이 차 있어도 꽃에서 꿀이 나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한창 유밀기에는 어두워서 날지 못할 때까지 일을 하고, 그 이튿날 돌아오는 꿀벌도 있다. 꿀 1kg을 생산하기 위해 꿀벌 한 마리는 560만 개의 꽃을 찾아다닌다. 이 꽃 저 꽃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꿀과 꽃가루를 모은다.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란다.

자기가 맡은 일을 남한테 미루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목숨 걸고 일하는 꿀벌들을 보노라면 고개가 숙여진다.

일명 ‘꿀 아저씨’라 불리며, 꿀벌과 함께해온 지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런 꿀벌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듯이 새벽부터 준비하고, 아침 일찍 채밀(꿀 따는 일)을 마쳐야 한다. 그래야 꿀의 품질도 좋고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는 꿀벌들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낮에도 쉴 틈이 없다. 다음에 갈 지역을 미리 답사해서 벌통 놓을 장소를 섭외하거나, 아침, 저녁으로 벌통 안의 꿀벌 상태를 살피다 보면 하루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하지만 힘들어도 꿀벌들이 모아온 꿀을 따는 날은 그야말로 잔칫날이고 또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하다.

양봉인으로 살아오며 제일 힘들 때는 정성껏 천연 벌꿀을 생산하고 있는데도, 가짜 꿀이라는 오해를 받을 때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들에서도 언제나 말없이 때가 되면 묵묵히 부지런히 꿀을 모아주는 꿀벌들이 나를 더욱 채찍질해주었다.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컴퓨터 공부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컴퓨터를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공부하다 보니 블로그도 운영할 정도로 실력을 쌓게 되었다. 이곳에서 소비자들과 소통하면서, 정직하게 생산한 우리 꿀을 인정해주실 때면 보람을 느낀다. 바쁜 꿀벌은 오직 꿀을 딸 뿐 슬퍼할 시간도 주저앉을 시간도 없다.

알랭 토마 작.

<사과나무 산>

38.6×55.2cm. 석판화. 2007.

나는 매력적일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 매력. 볼매남(볼수록 매력적인 남자), 볼매녀(볼수록 매력적인 여자)란 신조어가 있을 정도로 우리는 매력에 열광합니다. 왠지 그 사람 말이면 더 귀 기울이게 되고 그 사람 부탁이면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반면, 만나도 왠지 심심하고 밋밋한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면 나는 과연 매력적일까? 혹 어느 구석에 꽁꽁 숨어 아직은 빛을 못 보고 있다면 새해에는 꼭 찾고 싶은 ‘매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편집자주

매력, 타고나는 걸까?

매력적이란 말은 외모가 잘생겼다는 뜻으로 들리기 쉽다. 그리고 사람들에겐 잘생긴 사람이 성격도 좋고 여러 가지 바람직한 행동 특성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10초라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인 중에서 표정(74%)이 준수한 외모(49.6%)와 외적 차림새(40.2%)보다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표정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매력이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뇌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밝은 표정에서 긍정적인 기운을 읽어낼 수 있고, 나를 환대해주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백만불짜리 매력의 비밀

인간의 매력 중에서 가장 큰 매력은 웃는 얼굴이다. 웃지 않아서 해고된 한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한 벨트 공장에 취직한 그녀는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했지만 회사가 기울자 단박에 해고당했다. 훗날 다른 회사에서도 해고를 당하자 그녀는 예전 공장의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왜 승진이 안 되고 해고됐느냐?” 물었다. 이에 부사장은 “당신은 정말 성실하고 능력은 좋지만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인간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해 매니저로서 자질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웃음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웃음 전도사’로서 미국에서 성공의 길을 달리게 됐다. 그녀가 바로 ‘펀 경영’ 컨설턴트로 미국을 대표하는 100대 여성 기업인이 된 진수 테리이다.
나도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근데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험악한 표정의 내가 나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나는 웃는 연습을 하겠다며 동그란 거울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엔 못 봐줄 정도로 어색했지만, 틈만 나면 웃는 연습을 했다. 평소 잘 웃지 않았던 탓에 얼굴 근육에 경련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연습한 지 10년이 지나 지금 나의 얼굴은 많이 바뀌었다. 웃으면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워지며 여유도 생긴다. 매력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부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끌리는 사람의 백만불짜리 매력>
(브라이언 트레이시·론 아덴 저 | 한국경제신문) 중에서


매력 DNA

① 몸짓 언어: 몸짓은 에너지를 밖으로 내뿜는다는 뜻이다. 몸짓 언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몸을 기울여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고 경청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사람은 100% 감정적인 동물이다. 상대가 질문하고 답변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낀다. 그 결과 자신을 좋아하게 되고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 상대방이 자신을 기분 좋게 했기 때문이다.

② 사회지능(SQ): 사회지능은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능력이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 교수는 각기 다른 도시에 존재하는 CEO 모임부터 교사 총회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그룹을 대상으로 좋은 상사와 나쁜 상사를 조사했다. 그 결과, 각 그룹에서 보내온 내용은 놀랄 정도로 모두 유사했다.
· 좋은 상사: 경청하는 사람 / 격려하는 사람 /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 / 용감한 사람 / 유머감각 있는 사람 / 공감 잘하는 사람 / 결단력 있는 사람 / 책임지는 사람 / 겸손한 사람 / 권위를 공유하는 사람
· 나쁜 상사: 벽창호 / 의심하는 사람 / 위협하는 사람 / 성질 급한 사람 / 자기중심적인 사람 / 우유부단한 사람 / 남 탓하는 사람 / 거만한 사람 / 불신하는 사람

<SBS 스페셜·매력 DNA, 그들이 인기 있는 이유> 중에서


볼수록 매력적인 사람

나는 직업상 다양한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난다. 그럴 때 느끼는 건 사람마다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첫인상은 물론 말투, 표정, 행동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캐릭터라고 할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경험일 것이다. 왠지 만나면 기분이 좋고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오히려 진이 빠지는 사람이 있다.

아는 선배가 있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세일즈맨이고 일도 열심히 하고 똑똑한 데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그런데 이 선배의 특징은 꼭 자기가 필요할 때만 연락한다는 거다. “혹시 회사에서 사람 안 뽑니?” “누구 연락처는 아니?” 따라서 만나고 나면 기분이 좋기는커녕 왠지 이용당한 느낌이 들고 오늘도 괜히 만났구나 하는 후회가 든다. 반면, 만날수록 좋은 사람은 항상 표정이 온화하고 웃음이 가득하며 온갖 스트레스와 역경에도 겸허해하고 다음에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 긍정적으로 믿는 사람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감이 넘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며 사랑할 줄 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알게 된 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면 남들도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고 깎아내리면 남들도 똑같이 나를 대충 대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전혀 예쁘지도 않았고, 몸도 좀 통통한 데다 목소리도 굵어서 10대 소녀에게 여성미보다는 남성미가 더 뿜어져 나오는 친구였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그 친구 사진을 보았는데 정말 놀랍게도 그녀는 승무원이 돼 있었다. 환한 미소와 날씬한 몸매.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여성미가 풀풀 넘치는 매력녀로서 온몸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흔히 외모보다 중요한 게 마음이라 하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조각 같아도 싹싹하고 긍정적이고 환하게 웃는 사람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말투, 행동, 표정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나는 소중한 존재야, 나는 사랑받는 존재야, 나는 자신 있어. 나는 아름다워.’ 그래서 남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서은진 30세. 홍콩 란타우 섬 통총 거주

직장 내 이상형 1위, 웃으면서 인사하는 동료가 최고

‘직장 내 이상형 1위’는 어떤 사람일까. 소셜데이팅서비스 업체 ‘마음씨’는 최근 20~30대 남녀 직장인 522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이상형’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직장 내 이상형 1위는 ‘매일 아침 웃으면서 인사해주는 스마일형’(37%)으로 나타났다. 2위는 ‘친절하게 업무를 가르쳐주는 동료’(27%), 3위는 ‘가끔 간식 등을 챙겨주는 동료’(24%)였다. 능력 있는 동료를 직장 내 이상형 1위로 꼽은 비율은 7%에 불과했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가?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라!

매력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다. 매력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성공하기 쉽다. 하지만 누구나 매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훌륭한 외모와 체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력적으로 보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는가와 상관없이 후천적 노력으로 매력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당신은 현재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가?

남의 입장에서 자신을 관찰해보자. 그리고 나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지금부터 고쳐 나가도록 하자.

매력을 만드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카리스마와 유머.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출발점은 하나다. 모두 자신감에서 출발한다. 자신감은 사람을 매력 있게 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자신감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매력으로 이어진다.

자신감을 가지고 싶다면 결국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자신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자신감을 가지고 싶다면 되도록이면 낯선 상황에 최대한 많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좋다. 한 번이라도 어떤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 해본 사람보다 훨씬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농구를 잘해 자신감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농구장에 자주 가야 한다. 자주 농구를 즐기면 당연히 어느 순간 자신감이 찾아온다. 결국 자신감이란 행하는 자, 움직이는 자가 쟁취한다. 하루 종일 무기력하게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자신감은 생겨나지 않는다. 결국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떨어지고 당연히 매력도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경험만 쌓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자신이 현재 하는 일을 거부하지 말고 집중하고 재미를 느껴야 한다. 사람은 집중할 때 매력적이다. 당신이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선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피하려고 하지 말고 침착하게 경험하고 몰입하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집중하며 도전하라. 당장 실패한다고 해도 집중하는 동안 당신은 매력을 얻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라.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하찮게 느낀다. 자신감을 회복하고 싶다면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라.

한지훈. 인간 계발 전문 작가


마음수련으로 이혼위기에서 탈출한 부부의 비하인드 인터뷰

저 김기자, 3남매 엄마인 한 주부님을 만났습니다. 결혼 생활 21년, 툭하면 버럭 하는 남편 때문에 이혼 위기까지 갔지만, 마음 빼기로 이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기막힌 반전의 주인공! 말조차 건네기 두렵던 남편과 이젠 장난치고 농담도 한다는 자칭 용 된 주부님과의 리얼 빼기 토크입니다.

♥ 남편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나요?

두려움의 대상이었어요. 부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가슴이 뛰는 거예요. ‘왜 부르지? 내가 또 무슨 잘못했지??’ 큰소리치는 신랑 앞에서 여지없이 깨졌으니까요. 나중엔 거의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정도였어요. 밥 한 숟가락 넘기려면 물 두 컵을 마셔야 했으니까. 이제 말 배우는 막내가 아빠 큰소리치지 말라고 엄마 운다고 얘기할 정도였어요. 정말 지옥이었다니까.

♥ 남편이 원래 그렇게 무서웠나요?

전엔 편했어요. 근데 10년 전인가, 남편이 5남매 중 셋째 아들인데도 10년간 시부모님을 모시다가 제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큰아들 댁으로 가시게 됐죠. 그때부터 바뀐 거 같아요. 나중엔 별의별 소리 다 들었어요. 애들 있는 데서 인간쓰레기란 말까지 들었으니까.

♥ 아유, 진짜 힘들었겠네요.

그때는 진짜 아무것도 안 보여요. 한번은 남편이 이렇게는 못 산다고 소리 지르기에 저도 그랬죠. “그래, 그만 살자! 나도 못 살겠다!” 하니까 남편 얼굴이 확 바뀌는 거예요. 내가 그럴 줄 몰랐나 봐.(웃음) 십 년 묵은 체증이 좀 내려가데~. 그 후로 가정 문제 상담소를 다녔어요. 하도 답답해서. 근데 갔다 올수록 벌거벗겨지는 기분만 드는 거예요. 답은 안 알려주고 얘기만 하라니까 회의가 들더라고요. 저는 이혼을 당해도 뭘 잘못했는지 알고 당하고 싶었거든요.

♥ 남편이 왜 그러는지 정말 궁금했을 거 같아요.

제 딴에는 해달라는 대로 다 했거든요. 좋게 말하면 순종파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 멍청이일 정도로. 근데도 지적질만 당하니까 답이 없는 거예요. 자다가 물 떠오라고 하면 물 떠와, 아침저녁 주물러 재우고 깨우고…. 근데도 만날 애들 잘못 키웠다, 너랑 못 산다 하니까 서러워 울었죠. 애들한테도 뭐라 하겠어요? 엄마, 아빠도 개판 오 분 전인데. 그런 어느 날 남편이 너라도 수련해라 하대요. 지인한테 수련이 좋다는 얘길 들은 거예요. 맞아요, 마음수련 안 했으면 전 말라 죽었을 거예요. 기적이 일어난 거지.

♥ 수련 해보니까 어떻든가요?

해보니까 정말 마음이 빠지는 거야. 너무 신기해서 일주일엔 2번만 갈 거야 했다가 점점 횟수가 늘어났죠. 그냥 너무 좋으니까. 마음이 버려지고 없어지는 걸 가르쳐주고 그게 인정되니까요. 전에는 세상이 다 컴컴하고 암흑이었잖아요. 그러다 우주가 원래 나임을 알았을 땐 세상이 그렇게 찬란하고 반짝반짝거릴 수가 없었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수련하면서 왜 그리 울었는지 오죽하면 수련원에서 눈물의 여왕이란 타이틀까지 붙여줬다니까.


♥ ‘눈물의 여왕’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닌데.

마음 버리면서 정말 만날 울었어요. 처음엔 남편 때문에 힘든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돌아보니 제가 남편 없는 엄마,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 보니 남편을 떠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더라고요. 남편이 있어야 내가 사니까. 어찌 보면 버르장머리 없는 남편을 만든 거죠. 또 다 나를 위해 한 거였어요. 물 떠다 주고 주물러준 것도 싫은 소리 안 들으려고 ‘으씨, 내가 니 종이야?’ 하면서. 그 사람도 다 느끼니까 싫었겠지요. 딸한테도 너무 잘못했고요. 제가 신랑한테 당한 걸, 어느 순간 다 딸한테 풀고 있더라고요. 너무 미안해서 또 펑펑 울었죠. 딸한테 그랬어요. 미안해. 엄마가 그것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는데 너한테 똑같이 했더라.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엄마가 막고 있었어. 우리 그 마음 다 내버리자. 엄마도 노력할게. 그러니까 딸이 “엄마, 알아~” 그래요. 우리 딸도 마음수련 했거든요. 엄마를 이해해주는 딸이 참 고마웠어요.

♥ 남편분도 아내가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요. 제가 딸한테 원했던 걸 남편도 원했더라고요. 나중에 남편 얘기 들어보니, 남편이 바란 건 내가 바깥바람도 쐬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사는 거였대요. 하긴 만날 친구들도 만나지 왜 집구석에만 있냐고 했어요. 남편은 그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집에서 애들만 쳐다보고 있고, 뭘 물어보면 애들한테 물어보거나, 몰라~ 당신이 알아서 해, 내가 어떻게 알아? 했으니 남편이 볼 땐 제가 답답함의 극치였던 거죠. 돌아보면 정말 사소한 걸로 벼랑까지 갔던 거예요.

♥ 답답한 문제들이 풀리면서 숨통이 좀 트였겠어요.

아유, 살 것 같았죠. 나는 다 잘하고 그 사람이 상처 준 거다 생각했는데, 버리다 보니까 그 사람이 이해되고, 내가 잘못한 게 화끈하게 인정이 됐으니까요.(웃음) 한편으로 남편한테 바라는 게 많았던 거 같아요. 나는 셋째 며느리인데도 당신 부모하고 10년 살았다, 할 만큼 하지 않았냐, 하면서. 근데 사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한 건데 이제 와 새삼 알아달라고 했구나, 그걸 아니까 남편에게 기대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점점 편해지데요. 지금은 그냥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정말 용 됐다~ 싶을 정도예요.

♥ 어떻게 용 됐다는 건지 자랑 좀 해주세요~

제가 남편한테 “당신 이거 잘못됐어!” 하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감히.(웃음) 신랑 얘기에 토를 달면서 제 생각도 얘기하고. 그럼 남편도 그 말이 인정되는지 귀담아 들어주는 거예요. 남편 말이, 예전에는 저하고 얘기하면 벽창호랑 얘기하는 거 같았는데, 어느 순간 자기 수준을 넘어섰대요.(웃음)

♥ 이제 같이 웃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신랑이 된 거네요.

전엔 남편이 인간쓰레기라고 한 걸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만 났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을 생각하면 픽 웃음이 나요. 어쩜 그리 정확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냥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통이잖아. 쓰잘데기 없는 헛부스러기 마음만 담아놓은 쓰레기통. 그러면서도 신기한 거예요. 어떻게 그 말을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지?(웃음)

♥ 진짜 기막힌 반전입니다~^^

그러니까요. 저는 신랑이 등 떠밀어 수련원 보내준 게 제일 감사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까요. 이 마음 빼기 아니면 어떻게 가족들하고 이렇게 웃고 살 수 있겠어요. 정말 마음 빼기 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