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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동중학교 교사 정연희

폭력 없는 학교로 잘 알려진 경기도 고양시 저동중학교. 2012년에는 학교 폭력 예방 우수 사례로 교육부 표창을 받으며 EBS 등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 중심에 인성복지부장을 맡고 있는 정연희(53) 선생님이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정적인 기억에서 벗어나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마음 빼기 교실을 연 것이다. 자신 역시 마음을 버리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었다는 정연희 선생님. 선생님도 아이들도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가는 정연희 선생님의 마음 빼기 이야기이다.

정리 문진정 & 사진 최창원

“자, 눈을 감습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마음들을 떠올립니다….”

저는 수업을 하기 전, 5분씩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버리고 싶은 마음을 조용히 떠올려보게 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밝아 보이는 아이들도 버리고 싶은 마음을 써보라고 하면 ‘친구가 날 버렸을 때’ ‘아빠에게 죽도록 맞았을 때’ ‘시험에 대한 공포’ ‘중1 때 있었던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 등등 공책을 가득 채웁니다.

친구에게도 부모님께도 말할 수 없는 내면의 상처들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기억들을 버리고 나면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다’ ‘뭔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개운하고 상쾌하다’며 아이들 얼굴이 금세 밝아집니다.

요즘 아이들은 워낙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 인터넷 게임 등에 노출되어서인지 빠른 속도로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쌓아둡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몸은 앉아 있지만 선생님 말이 귀에 안 들어오고, 계속해서 뭔가 말해야 되는 등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가진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머릿속이 시끄러우니 몸도 공격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외로움도 참 많습니다. 복잡한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요. 각자 자기만의 마음세계 속에 갇혀 있으니, 친구랑 이야기를 해도 각자 자기 말만 하게 됩니다.

왕따 문제나 학교 폭력도 친구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를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인해 오해를 하면서 시작됩니다. 순간순간 부정적으로 상대에 대한 사진을 찍어서 그걸 마음에 저장해놓고 그걸 실제인 양 믿어버리지요. 그런 마음 사진들을 버림으로써 친구들 간의 상처와 오해를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학교 폭력 예방의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작년부터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에게 징계 대신, 일정 기간 동안 매일 1시간씩 마음을 버리는 활동과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마음을 버리도록 도와주니 아이들도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며 감사함을 많이 표현합니다. 그런 아이들의 변화를 접하다 보면 더 많은 아이들에게 마음 빼기를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요.

저 역시 1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엄격한 언니와 오빠들 밑에서 자라며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살림을 도맡아 하던 저를 연탄집게로 혼내던 언니의 무서운 모습은 제 마음속 두려움의 근원으로 자리했고 그 불안함과 긴장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쳤지요. 그 후로는 미술 시간에도 늘 까만색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항상 잘해야 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 남을 의식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바름에 대한 틀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되어서도 우리 반은 공부도 환경 미화도 잘해야 되고 행동도 반듯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방과 후에 남겨서 기를 다 뺄 때까지 잔소리를 해댔지요.

새 학기가 되면 늘 다짐했습니다. ‘올해는 아이들한테 화 안 내고 짜증 안 내고 참 재미있는 교사가 되자.’ 하지만 아이들과는 전혀 가까워질 수가 없었고, 방학마다 보약을 지어 먹어야 할 정도로 몸도 아팠습니다.

정연희 선생님은 전인교육을 실천하고 마음 빼기 프로그램을 학교 현장에 도입하는 마음수련 교사 모임 ‘마음 힐링-Coexist’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 교사 동아리는 지난 12월 교육부로부터 2013 ‘인성교육 실천 우수 동아리’로 선정되었다.

이런 삶은 아니구나, 사람의 마음, 내 마음이라는 것이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고 방학을 이용해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3주가 지나니 ‘이제 살겠구나’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어떤 사람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유로움을 처음 느꼈습니다. 수련을 하며 남을 의식하는 마음, 열등감, 불안함들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동안 교사로,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주변 사람을 참 피곤하게 했었구나 싶어 미안했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큰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행동은 다 하는 문제 학생이어서, 아이 학교의 학생부에 불려 다녔지요.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 보기도 민망했고, 남의 자식을 지도하고 있는 교사로서 당시 제 심정은 너무나 처참했습니다. 아이는 절대 내 맘대로 할 수 없구나…. 저는 수련을 하며 아이에게 모범적인 삶을 강요했던 것조차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도 저의 변화를 알아차렸는지 마음수련 청소년 캠프에 가겠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 수련을 꾸준히 하고 나더니 “어릴 때 엄마 아빠가 다투던 모습이 마음에 남아 늘 답답했고, 엄마도 항상 무섭게 느껴져 학교 가서도 긴장을 하고 식은땀을 흘렸는데, 그때의 사진을 버리고 나니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거 같애. 고마워, 엄마”라고 하는데 정말 감격스러웠지요.

아이와 함께 마음수련을 계속하며 교사로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달라져갔습니다. 소위 문제 학생이라는 아이들도 학교에서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도 편견이나 미움 없이 대하게 되고, 무엇보다 아이 마음에 내재된 분노와 화를 버릴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축제 등 행사 준비를 할 때도 예전에는 못 미더운 마음에 제가 다 떠맡았다면, 지금은 결과를 떠나 다른 선생님들과 호흡을 맞추고, 또 아이들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기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겐 아이들이 마음 빼기를 통해 힘든 상처에서 벗어나고 밝게 성장해나가는 걸 지켜보는 것, 그 이상 기쁘고 감사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청소년기에 꾸준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선생님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더욱 넓은 시야로 아이들을 포용하고, 아이들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행복 가득한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고민 상담 신청은 시간도 걸리고 상담을 못 하면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마음 빼기는 시간 제약 없이 혼자 원하는 시간만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스트레스를 바로바로 푸니까 애들하고 틀어지지도 않고 성격도 밝아지는 것 같아요.”
– 성시영(14) 학생

평소 수업 시간을 통해 즐겁게 마음 빼기를 하고 있는 저동중학교 1학년 2반 학생들이 정연희 선생님과 함께 포즈를 취해주었다. 위쪽 가운데부터 시계 방향으로 주지윤, 이예원, 성시영, 이시현 학생.

행복의 비결

어떤 사람이 한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나도 불행합니다.
제발 저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쳐주십시오.”
스승이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은 정원을 가꾸어야 하거든요.
그동안 이 가방 좀 봐주시겠어요?”
스승의 말에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정원 일이 급한가 보다 하고 가만히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30분쯤 지나자 어깨가 쑤셔옵니다.
스승은 도대체 일을 마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참다못한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이 가방을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그의 말에 스승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무거우면 내려놓지 지금까지 들고 계셨습니까?”
“예……?!”
순간, 그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이렇듯 자신이 무겁게 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벗어난다는 것.
벗어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의 짐들을 버려야겠지.
마음만 닦으면 모두 해결되는 것을.’
막막했던 삶에 길을 찾은 듯,
행복한 삶으로의 길에 한 발 다가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이상주의理想主義

진리를 지향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여
진리가 되는 것이 이상인 것이다.
또 진리에 나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인 것이다.
종교에서는 이 이상주의를 지향하고 있지만
실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상주의에 가는 방법이 없고,
그러니 항시 이상주의를 경만 가지고 말로만 하고 있어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세계에 가지 않은 자가 경을 풀이하니
인간 생각이 경이 되어 수만 가지의 종파가 있는 것이다.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또 이상세계 자체에
다시 나는 것이야말로 참 이상주의이고
이 세계를 실현할 수가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방법은 가짜인 자기를 무시하고 없애면 본래가 있고
이 본래의 마음에서 다시 나면 이것이 이상세계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해보자.
태어나지 않아도 세상은 있고 세상에 있는
지구 달 별과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태어나지 않아도
허공인 빈 하늘은 있지 않은가.
이것이 본래이고 근원이고 신이신 창조주라.
이 자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여기서 빈 하늘의 재질로
다시 나면 천국인 여기가 이상세계인 것이다.
이상주의는 이 세계에 가기 위하여,
또 간 자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이 이상주의이다.
이상주의가 실현 가능할 때 이상세계가 이루어진다.
진짜 이상세계는 세계가 한마음이 되어
너나가 없이 하나 되어 사는 것이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열린 고민 상담소

제 고민은요?

음악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10개월쯤 됐습니다. 주로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일주일에 5일 정도 와서 배우는데, 항상 산만한 아이, 거친 욕설과 행동이 몸에 배어 있는 아이, 무조건 싫다고만 하는 아이….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학부모에게 말씀드리기도 했는데 아직 어려서 그렇다며 방치하는 분위기입니다. 가만 보면 아이들 중엔 이혼한 가정, 한부모 가정에서 크는 아이들도 많더라고요. 학원 강사가 주제넘나 싶으면서도, 그래도 선생님인데, 수업 외에도 인성적인 부분도 잘 가르쳐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은요!

초등학교 교사를 30년 가까이 했던 선생으로서 볼 때 아이들이 집 자체가 안 편하니까 학원에서 그렇게 표현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혼했다든지 한부모가정의 아이는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게 산만하거나 욕설, 화로 나타나곤 하거든요. 학원은 집하고는 다르게 자유롭고 편하니까 더 억눌려 있던 내면의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쟤는 왜 저럴까? 생각하기 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아이의 모습을 이해해 보려고 하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욕을 많이 하는 아이는 마음속에 욕과 화가 가득 차 있다 보니까 그렇게 튀어나오는 거거든요. 그만큼 아이도 힘들다는 뜻이지요. 저 같은 경우 욕설이 심한 아이에게는 “말이 입에서 나오면 누구 귀가 제일 가깝노?” 하며 결국 자기에게 하는 욕이고, 욕은 자기 마음의 표현이라는 걸 돌아볼 수 있도록 설명해줍니다.
특히 음악 선생님이시니, 음악 하는 재미도 느끼게 하면서, 늘 따듯한 미소로 즐겁게 대해주세요. 엄마처럼 사랑으로 따듯하게 품어주고 키워주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따듯한 말, 미소 한 번이 아이들 마음에 스며들어서 상처받은 마음도 녹아나게 될 겁니다. 배점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성함도 유쾌한 김용팔 선생님. 2대 8 가르마의 더부룩한 머리와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단추 구멍만 한 눈, 마른 체구에 큼지막한 옷차림. 시인이시기도 했던 선생님은 여고생들의 야유와 놀림에도 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주셨지요. 선생님에겐 학교가 전쟁터가 아닌 놀이터 같아 보였습니다. 좀 노는 아이, 성적에 예민한 아이 등 다루기 피곤한 아이들도 선생님에겐 호기심의 대상인 듯 유머러스하게 대해 주시고, 언젠가 출간된 시집에는 그런 아이들의 면면이 음률에 맞게 소개돼 있었지요.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기 전에 ‘아이들이 그저 좋은’ 선생님이 먼저 돼 보시면 어떨지요. 아이들은 다 느끼니까요. 명명정

저는 초·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속독학원 강사였습니다. 돈벌이를 떠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열의를 가지고 다가갔지만 아이들은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떠들고 장난치고.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학원 강사라고 무시하나? 하는 마음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즈음 제 마음을 깊숙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는 내가 잘 가르쳐서 학생들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능력 있는 선생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많았고요. 그때부터 마음을 달리 먹었어요. 일단 아이들이 자라온 환경에서는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 나는 아이들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잘 가르치려는 마음,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도와주자. 그렇게 마음을 먹은 후로는 신기하게 아이들이 집중을 잘하는 겁니다.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상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나 나나 똑같이 성숙되어 가는 존재로 생각하니 수업도 항상 편안했습니다.
고민녀님이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선생님으로서 충분한 자질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많은 거죠. 제 경험으로 깨달은 건, 아이들이 달라지기 전에 내가 먼저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잘 가르쳐야 한다, 바뀌게 하고 싶다, 그런 마음들을 놓는 순간 아이도 선생님도 행복한 교실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황현정


지금 고민 중이신가요. 혼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함께 나눠보아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한순간의 헛된 실수로 인하여 3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입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많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전기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로 돌아가면 분명 주변 사람들보다 뒤처질 테고, 또한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흠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고 싶네요. 힘내라고 응원 좀 해주세요.

우리 식구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고1 아들 녀석이 휴대폰을 잃어버려 요 며칠 밤마다 제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카톡을 합니다. 그 녀석이 한번 쓰고 나면 아들 녀석 친구들이 한두 명씩 친추가 돼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 내용도 다 안 지우고 그대로 있습니다. 한번 들여다봤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유치원 2년,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1년 한글을 배웠다는 놈들이 왜 이러는 걸까요? 도대체 둘이 대화는 통하는 걸까요?

중학교 2학년 딸아이 방에 네임펜을 빌리러 들어갔더니 딸아이가 휴대폰으로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책상 쪽으로 몸을 옮기는데 딸아이도 저를 따라 각도를 틀며 휴대폰 화면을 가립니다. 다시 반대편 책장 쪽으로 몸을 옮기자 딸아이도 휴대폰 각도를 바꾸며 움직입니다. 제가 몸을 옮길 때마다 휴대폰 화면을 주시하면서도 어찌 그리 각도를 사각지대로 잘 트는지 신기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제 딸이 30여 년 전 제 짝꿍 봉구일까요? 시험 시간 책가방으로 가리다 못해 손바닥으로 가리며 답을 적었던 그 봉구일까요? 시험 문제 중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 어디냐는 문제에 봉구가 각도를 틀며 안 보여줘서 얼핏 보고 하얼빈을 허허벌판도 아닌 허벌판으로 적어서 선생님한테 뒈지게 혼나게 한 그 봉구일까요?

아내가 식탁에 큰 냄비 하나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뚜껑을 엽니다. 먹어 보랍니다. 묵은지 갈치조림이랍니다. 국물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김치찌개에 갈치를 넣은 거 같습니다. 은빛 비늘이 살아 숨 쉽니다. 조림 무라도 있나 들춰 봤더니 무는 먹지 말랍니다. 깜박 잊고 늦게 넣어서 안 익었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요리 연구가 빅마마가 만든 묵은지 갈치조림이 진정 이런 비주얼이었을까요? 더 조리든지 더 익히든지 하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그냥 먹으라며 자기가 떠먹어보고 시원하고 맛있다며 먹어 보라는데 진짜 맛있어서 저렇게 갈치 비늘을 숟가락으로 치워가며 떠먹는 걸까요? 왜 아내는 점점 더 미각을 잃어가는 걸까요?

회사에 있는데 흑형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들 녀석 친구한테 카톡이 옵니다.
“어디삼? 지중해로 빨리 튀튀”
진짜 지중해는 아닌 거 같고 피시방 이름 같습니다. 제가 그냥 답장 한번 보내봤습니다.
“우헤헤~~~”
답장이 옵니다.
“케쿠에하앙러 우헤헹우헤헹~~~~~~~”

왜 이러는 걸까요? 도대체 흑형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요? 진짜 외국인 친굴까요?

백일성

백일성(43)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눈꽃축제

글 & 사진 김홍수 여행작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 저자

날씨가 어중간하게 추울 때는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돌아다니는 게 좋지만,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을 때는 아예 밖에서 뛰어놀아야 합니다. 한나절 눈밭에서 뒹굴고 들어오면 제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아이들은 감기에 걸리지도 않고 즐거워하지요. 여기에 눈꽃축제라도 한번 다녀오면 아이들에게 그해 겨울은 가장 따뜻한 겨울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얀 눈밭에서 엄마 아빠와 눈싸움! 상상만 해도 신나고 즐겁습니다.

■ 대관령 눈꽃축제
대관령 눈꽃축제에 처음 갔을 때 우리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무료 축제이기도 하지만 눈이 너무 와서 행사장 한 켠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다 보니 다른 놀이 시설을 타거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새가 없었지요. 그리고 아이들도 너무 어렸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큰 후 떠났을 때는 아예 출발할 때부터 아이들과 놀이 시설 타는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놀이 시설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눈썰매, 얼음 썰매, 봅슬레이 등입니다. 행사장 한편으로 눈밭을 달리는 사륜 오토바이와 래프팅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보트를 스노모빌이 끌고 빠른 속도로 달리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대관령 눈꽃축제의 또 다른 묘미는 다양한 종류의 눈 조각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 중에서도 뽀로로, 토토로,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 등 익숙한 캐릭터를 좋아합니다.

www.snowfestival.net

tip 다양한 놀이 시설을 즐기려면 일찍 도착해야 합니다.

■ 태백산 눈축제
해마다 1월 말경 열리는 태백산 눈축제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눈 조각 등으로 겨울 눈꽃 여행의 최고로 꼽힙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보니 숙박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음식점, 휴게실 등의 편의 시설은 몰려드는 인파를 감당하기에는 한계를 넘어버린 느낌이지요.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저희가 갔을 때는 행사 전날까지 따뜻한 날씨로 인해 눈은커녕 비까지 와서, 눈축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눈 조각들이 녹아 흘러 질퍽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생스럽고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신나했습니다. 한겨울, 춥다고 집에만 있기보다는 일단 떠나보세요. 더없이 멋진 추억이 될 것입니다.

festival.taebaek.go.kr

tip 아이들이 어릴 경우에는 방한복을 겹겹이 입어 중무장을 해야 합니다. 수도권에서 출발하는 경우라면 기차 패키지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 백운계곡 동장군축제
이름만 들어도 오들오들 추워지는 동장군축제. 우리가 참가한 날은 무려 영하 10도에 가까운 날씨였습니다. 계곡 바람이 얼마나 센지 똑딱이 자동카메라가 작동을 하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아이들은 동장군 추위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 미끄럼틀, 튜브 눈썰매, 얼음 썰매를 타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얼음판에서 팽이치기, 고구마 구워 먹기, 토끼 잡기 등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돼 있어 사실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을 새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토끼 잡기입니다.

www.dongjangkun.co.kr

tip 시간을 넉넉하게 할애해서 자유이용권으로 패키지를 이용하면 좋습니다.

즐거운 기부 문화 만들기, 소셜 벤처 ‘비카인드’

취재 문진정

앗, 이런 것이?
서울 시내 한복판, 슈퍼맨과 배트맨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동료를 찾고 있다. ‘소아암 환아들을 위해 모금을 함께하자’는 것. 이 영웅들의 정체는 소셜벤처 ‘비카인드’의 김동준 대표와 최준호 이사이다. 독특한 홍보로 대중과 유명인의 참여까지 이끌어내고 있는 비카인드는 모금 문화 확산을 목표로 탄생한 청년 벤처다.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자연스레 환경 운동, 자선 활동 등을 접하게 된 김동준 대표는 한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환경 보호 애플리케이션, 기부금 관리 프로그램 등을 만들면서 2년 전 한국으로 오게 된다. 이어, 한국에는 기부금 관리 프로그램은 있는데 관리할 기부금이 없는 단체들이 많다는 걸 알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기부금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만든 것이 바로 비카인드의 ‘생일 모금’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일날, 생일을 맞은 사람이 도움을 주고 싶은 프로젝트 하나를 선택해 모금함을 개설한다. 그러면 지인들이 생일 선물 대신 돈을 기부해주고, 목표액의 일정 부분을 달성하면 연극 관람, 강연, 손 편지 써주기, 한강에 입수하기 등의 독특한 공약을 내세워 기부자에게도 재미를 주는 식이다.

현재 200여 명이 생일 모금을 하고 있고, 그중에는 배우 김민정, 김지영, 신소율 등 연예인들도 있다. 대형 기부 단체의 역할이라고만 여겨졌던 모금 운동을 내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놀이로 만들어가는 비카인드. 비카인드는 당신도 친절한 영웅이 될 수 있다 말한다.

비카인드 김동준 대표 이야기

집단지성이라고 하잖아요. 개인의 노력이 모여서 훨씬 더 방대한 성과를 내는 크라우드 펀딩, 크라우드 소싱 등에 관심이 많았어요.

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위키피디아나 유튜브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처럼, 기부나 모금도 거대 기부 단체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서 시작해서 지인들에게 모금을 하면 더 영향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모금을 하기 전에는 잘 안될까 봐 주저하시고 생일을 알리는 것에 쑥스러워하시는데 일단 모금 페이지가 열리면 기부자들의 호응이 아주 좋아요. ‘저희를 집단 선행의 길로 인도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님은 생일마저 특별하게 하시네요~’ 등 댓글로 뜨거운 반응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런 글을 보고 모금이 많이 확산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생일뿐 아니라 돌잔치나 결혼 축의금 등을 더 의미 있게 쓸 수 있도록 모금을 다양화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모금을 해야겠다는 공감대가 생길 수 있도록 모금한 돈이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지 등의 구체적인 피드백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모금자가 뿌듯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이 저희의 미션인 것 같아요.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세상을 더 친절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느낌! 실질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느낌! 그걸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드리고 싶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6개월간 비카인드의 친절한 모금은 이렇게 쓰였습니다.

· 저소득층 청소년 진로 교육 50명 지원
· 입양 대상 아이들의 1달 분유와 기저귀 184명 지원
· 소아암 환아 1년 정기 치료비 6명 지원

즐거운 생일 모금 하는 방법

① 비카인드 홈페이지(www.bekind.co.kr)에서 회원가입 후 ‘모금함 만들기’를 클릭!
② 목표 금액(1만 원부터 가능)과 공약을 적고 기부금이 전달될 공익 프로젝트를 선택한다.
③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친구들에게 널리 알린다.
④ 모금이 끝나면 공약 인증! 모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확인한다.

이 땅의 진정한 농사꾼, 나의 남편

2014-01 (12)

서울에서 이곳 낯설고 물설은 섬, 무의도로 남편이 좋아 32살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무의도는 연안부두에서 2시간 배를 타야 올 수 있는 곳이었지요. 농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저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쯤 농사꾼 남편을 따라 들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 매일 함께한 시간이 벌써 26년이네요.

“땅은 정직하다. 심은 대로 거둔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늘 남편이 하던 말입니다. 농사꾼이었던 남편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 하지 않고, 더 얻으려 욕심부리지도 않으며 그저 주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가꾸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함께 농사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 순환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유기농을 시작하면서 바보라고, 돈도 안 되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저도 여름에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 풀을 매고 있을 때면, 가끔 제초제를 뿌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벌레와 곤충들이 먹고 우리 먹을 것도 남겨주겠지.” 태평스럽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늘 이야기했지요. 일을 재미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요즘 일어나는 천재지변은 모두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는 거라고. 내가 먹지 못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도 줄 수 없다는 것. 땅이 건강해지면 농약도, 비료도, 거름도 주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게 남편의 신념이었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풀이 많으면 많을수록 땅이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풀을 낫으로 잘라서 땅에 쓰러뜨리면 썩어서 퇴비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힘은 들었지만 땅이 점점 비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생물과 지렁이 등 온갖 곤충들이 득실거리고, 땅이 건강하니 작물 또한 건강하게 자라주었습니다. 또한 밭에 닭과 오리를 풀어놓아서 벌레를 잡아먹게 하고 풀도 뜯어 먹게 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어주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풀이 많으면 작물이 잘 안된다고들 하는데 해충들이 연하고 부드러운 풀을 먹느라고 농작물에 붙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까 수확은 감소되고, 그것이 돈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지요. 때론 무모한 모험으로 한 해 농사를 두 손 털어보기도 몇 번. 남편과 의견 충돌도 많았습니다. 2005년 9월에는 화재로 인하여 농장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얻는 것도 정말 많았습니다. 진실은 통한다고, 위기의 순간마다 많은 이들의 격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요.

먼 미래를 내다보는 마음으로 택한 길을 묵묵히 일체의 타협도 없이 앞으로 내닫는 사람.

그런 남편과 함께하며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아가 강한 나를 겸손해지게 했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게 했습니다.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변화되었고, 남편 말대로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갔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쁘고 보람되었던 일은 우리 아이들이 농부인 아빠의 삶에서 희망을 보았기에, 스스럼없이 둘 다 농대를 지원하였다는 겁니다. 살면서 자식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이상 바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행히 많은 분들의 사랑과 격려로 새롭게 ‘연’을 재배하기 시작한 지 7년. 좋은 먹을거리가 나오려면 자연환경부터 살아야 함을 잘 알기에, 우리 후손에게 빌려온 땅을 풍요롭게 물려주어야 하기에, 남편은 오늘도 열심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뭇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온 나의 남편을 존경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오늘 하루도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며 기쁨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내 남편이지만 이 땅의 진정한 농사꾼임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장명숙 57세. 농장 ‘실미원’ 운영 www.silmiwon.co.kr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오드리 헵번

정리 김혜진 & 자료 제공

<오드리 헵번-스타일과 인생>
(푸른솔)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이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꼽히는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 <로마의 휴일> 등 수십 편의 영화를 통해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던 그녀는 화려한 여배우의 삶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굶주린 아이들의 구호 활동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던 것. 그녀의 진심 어린 말과 행동은 영화보다 큰 감동을 전해주었고, 전 세계에 기부 문화를 불러일으켰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으로 언제나 빛나던 배우 오드리 헵번. 어느덧 그녀가 세상 떠난 지 21년, 그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편집자 주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사랑할 차례이다.”

오드리 헵번이 구호 활동을 위해 찾아간 곳은 수단,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는다. 그녀는 아프리카를 방문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매주 25만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더 빨리 이 일을 시작했다면 훨씬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음식을 찾아 10일 심지어 3주를 걸어 다닌 아이들과 엄마들을 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막에 임시 캠프를 치며 음식을 찾아다녔다. 난 ‘제3세계’란 단어를 굉장히 싫어한다. 우리는 모두가 한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당신들 반대편에 살고 있는 인류는 고통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린 그녀가 굶주림에 시달렸을 때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당시의 기억은 그녀가 구호 활동에 열정을 쏟는 계기가 되었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쟁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당시 파시즘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부모의 이혼은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녀는 독일 나치 점령하에서 지내면서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 배고픔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먹을 게 없어 튤립의 구근을 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특히 큰오빠인 알렉산더가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면서 가족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난 후 알렉산더는 돌아왔지만, 전쟁은 그녀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사람이 죽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매일같이 잔인함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거였다. 그 어느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직업, 재산, 자식과 명성은 더더욱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인간답게 그리고 품위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원래 오드리 헵번의 꿈은 발레리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런던의 유명한 발레 학교인 램버트 발레 학교에 입학했지만, 170cm의 큰 키는 발레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레의 꿈을 접게 된다. 이후 단역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오랫동안 연극 ‘지지’의 여주인공을 찾던 프랑스의 여류 작가 콜레트의 눈에 띈 것. 그녀의 연기는 평론가들의 큰 호평을 받았고, 당시 ‘지지’의 공연을 본 윌리엄 와일러 감독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 앤 공주 역할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특한 매력은 영화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발레로 다져진 완벽한 자세, 날 듯이 가벼운 걸음걸이, 타고난 우아함, 풍부한 표현력 등 할리우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럽풍의 귀엽고 발랄한 외모였던 것.

<로마의 휴일>의 장면들

아래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선글라스 그리고 검은 미니 드레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준 스타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헵번 스타일’로 불리며 전 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후 <사브리나>(1954)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마이 페어 레이디>(1964)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을 통해 ‘헵번 스타일’이라는 자신만의 패션 세계 또한 탄생시켰다.
하지만 영화배우로서의 삶과는 달리, 그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영화배우 멜 퍼러,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배우이기보다 엄마로서 행복한 가정을 꿈꿔온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그녀는 그저 두 아이와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를 끝으로 더 이상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1987년 오드리 헵번은 마카오에서 열린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성공적인 자선 기금 모집을 통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그저 덧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후 그녀는 자발적으로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전염병이든, 내전으로 위험한 지역이든 어디든 달려가 아이들을 보살폈다. 한편 대중 앞에 서는 것만이 범세계적인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여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인터뷰를 자청했고, 전 세계를 돌며 각국 정상들에게 선처를 구했다.

6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무리한 일정의 강행, 현장에서 받는 슬픔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건강은 악화됐지만, 그녀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행여 자신 때문에 일정이 취소될까 아픈 것도 숨긴 채 진통제로 고통을 참으며 일정을 소화해냈고, 여정은 계속됐다.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썹, 커다란 눈망울로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오드리 헵번. 1993년 1월, 63세를 일기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

오드리 헵번(1929~1993)은 총 27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53년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선행은 두 아들이 만든 오드리 헵번 어린이 재단과 2004년 유엔과 민간 구호 단체가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오드리 헵번-스타일과 인생>(스테파니아 리치 저, 푸른솔)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레슬링 김현우 선수

 

“나보다 더 땀 흘린 선수가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다.”
2012 런던올림픽, 한쪽 눈이 잘 안 보일 정도의 부상, 퍼렇게 멍든 눈으로 금메달을 따내며 많은 이들을 뭉클하게 했던 김현우(26) 선수. 그의 승리는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그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리며 해낸 혹독한 훈련을 통한 것이었다. 그 후 1년, 66kg급에서 74kg급으로 한 체급을 올려 2013세계선수권대회에 도전한 김현우 선수는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며, 한국 레슬링에 14년 만의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안겼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스물여섯 청년, 그에게선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레슬링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준 종목이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당시 전해진 양정모 선수의 첫 금메달 소식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경제적 낙후에서 조금씩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나라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희망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그 후 8회 연속 매 올림픽마다 한 개 이상의 금메달을 따내며 매번 기쁜 소식을 안겨주었고 전 세계에 한국이 레슬링 강국임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의 금메달 이후, 침체기를 겪었던 레슬링계. 2012년 런던올림픽 김현우의 금메달은 레슬링계에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나보다 땀을 많이 흘린 선수가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다” 메달을 따기도 전에 했던 그 말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감독님이 늘 “하늘을 감동시켜라. 그래야 금메달을 준다” “니가 그만큼 하면 금메달 딴다. 다른 선수가 더 많이 땀을 흘리면 그 선수가 딴다” 그러셨어요.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지? 어떻게 하늘을 감동시키지?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하늘이 보고 있는 거 같은 겁니다. 전에는 코치님 눈치도 보고 그랬는데, 그 이후로는 누가 있으나 없으나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늘은 알고 있잖아요. 그렇게 훈련을 하다 보니까 몸이 안 아픈 날이 없었어요. 안 아프면 ‘내가 열심히 안 했나?’ 반성하게 되고…. 그래서 오히려 몸이 아파야 좋았어요.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만큼 제가 훈련을 했고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말도 나오더라고요. 정말 저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린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가 가져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요.

레슬링 선수들의 훈련은 특히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매번 겁날 정도예요.(웃음) 하루 4번을 운동을 해요. 새벽 운동, 오전 운동, 오후 운동, 야간 운동. 운동하고 밥 먹고 쉬고 운동하고 밥 먹고 쉬고. 기계처럼 똑같은 날들을 보냈어요. 올림픽 때는 그렇게 4년을 준비하는 거예요. 한 번 운동할 때마다 하늘이 노래지고 근육이 터질 거 같을 때까지 해요. 힘들어도 참으면서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몸의 한계도 넘지만 정신적으로도 ‘나는 할 수 없다’ ‘안 된다’의 한계들을 계속 뛰어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금메달, 막상 딴 후에는 마음이 어땠나요?

너무너무 좋았죠. 아팠던 데도 하나도 아프지도 않고. 근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뭔가 허무한 마음도 올라오더라고요. 삶의 목표가 금메달이었고, 특히 올림픽은 최고의 목표였는데, 더 이상 올라설 데가 없고 ‘이제는 뭘 해야 하지?’ 이런 생각도 들고요. 올림픽 후에 손가락 부상 때문에 재활 훈련을 받느라고 4개월 가까이 쉬었다가 훈련에 들어가면서 다시 열심히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근데 올림픽 때 훈련했던 게 몸에 배어 있었는지 하면 또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몸이 자동적으로 뭘 시키면 열심히 하게끔 만들어져 버린 겁니다. 예전 같았으면 운동하면서 다른 생각을 막 하기도 했을 텐데, 다른 생각도 안 나고요. 올림픽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그 이후로는 운동할 때는 운동 생각만 나더라고요. 프로의식 같은 게 진짜 생긴 거 같아요. 올림픽 이후에는 다시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싶어서, 체급을 올려서 도전을 했어요. 다행히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자신감은 생겼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더 열심히 저를 만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2012 런던올림픽. 그레코로만형 66kg급에서 금메달이 확정되자 감독과 코치를 향해 큰절을 올린 김현우 선수는 곧이어 건네받은 태극기를 앞에 두고 다시 한 번 큰절을 했다. 사진_연합뉴스

“올림픽은 나의 희망이다. 전 우주가 내 품에 들어오는 그런 기분….”
– 양정모(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사람의 적응력이란 게 무서웠다. 죽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죽기 살기로 독하게 하니까 되었다.” – 심권호(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장을 토해낼 정도로 훈련했다.” – 김현우(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한국 레슬링계의 영광을 넘어, 평범한 개인이 노력을 통해 얼마나 큰 성취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자랑스러운 얼굴들.

그런데 지난 2013년 2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가 레슬링을 2020년에 개최될 올림픽 ‘핵심 종목’ 25개에서 제외하기로 했다는 것.

모두가 침통한 분위기, 하지만 김현우 선수와 동료들은 그 순간에도 얼마 후 있을 아시아선수권대회와 세계선수권대회를 묵묵히 준비했고, 그것은 금메달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행히 지난 9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가까스로 기사회생하였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레슬링이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느냐 마느냐의 당시 마음잡기가 쉽지 않았겠습니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하지만 절대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슬링이라는 종목이 고대 올림픽부터 이어져온 상징적인 종목인데 어떻게 빠질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했죠. 분위기에 다운되지 말고 평소대로 운동만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이걸 계기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퇴출 위기를 겪으면서 국제레슬링연맹에서도 룰을 공격적으로 많이 바꾸었어요. 좀 더 재밌게 관중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들려고요. 2분 3회전 세트제에서 3분 2회전 총점제로 바꾸었는데 그런 룰이 우리한테도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

3분 2회전 총점제가 어떤 면에서 우리 선수들한테 유리하다는 거죠?

사실 레슬링은 유럽 선수들한테 유리한 종목입니다. 워낙 체격 조건이 좋으니까요. 한국 선수들은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체력 지구력 그런 쪽으로 훈련을 엄청 해요. 그래서 후반으로 갈수록 우리는 안 지치는데 상대 선수는 지치는 게 보이지요. 그러니까 한 회전의 시간이 길수록 우리한테 유리한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우리는 룰이 어떻든 거기에 맞춰서 하기 때문에 어떤 룰이든 다 오케이예요.(웃음) 훈련을 그만큼 하니까요. 체력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레슬링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강도 높은 훈련 덕분입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정말 대단한 건 아무리 혹독한 훈련일지라도 다 따라갈 수 있는 정신 상태가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깡다구 악바리 정신으로 해내는 거죠.

김현우 선수는 속칭 ‘만두귀’라 불리는 귀를 가지고 있다. 훈련을 하며 몸과 몸이 자주 부딪치고 바닥에 쓸리는 일이 많다 보니 핏줄이 터지고 연골이 망가지면서 찌그러져버린 귀, 그런 귀는 고된 훈련과 강한 의지를 말해주는 레슬링 선수들의 훈장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부터 레슬링을 시작한 김현우 선수는, ‘레슬링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주니어 국가대표로 2006년 아시아주니어레슬링선수권 금메달, 세계주니어레슬링선수권 은메달을 따는 등 승승장구하지만, 20살 허리 부상으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 후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대표 선수로 참가하지만 2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되고, 김현우 선수는 그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고 말한다.

2013년 9월, 헝가리에서 열린 2013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그레코로만형 74kg급 결승전에서 로만 블라소프(러시아)를 2-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블라소프는 3년간 세계 최강을 지켰던 선수. 김현우 선수로서는 66kg급에서 74kg급으로 체급을 올린 직후라 적응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우승을 했다는 점에서 더 화제가 되었다.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합니다.

2010년에는 진짜 준비를 많이 해서 나갔는데, 딱 지고 나니까 요즘 말로 완전 멘붕인 겁니다. 시합 끝나고 나와서 몇 시간을 밖에 앉아 있었어요. 눈물이 나면서 ‘열심히 해도 나는 안 되나?’ ‘레슬링 그만둘까?’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그때 김인섭 코치님이 오시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니가 여기서 밑바닥 쳤으니까 이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 열심히만 하면 돼. 나만 믿고 따라와. 2년 뒤에 꼭 금메달 따게 해줄게.” 듣는 순간 딱 안심이 되더라고요. 코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그때부터 런던올림픽만 바라보면서, 운동할 때도 레슬링, 잘 때도 레슬링만 생각하면서 레슬링에 미쳐서 살았어요. 가장 큰 슬럼프를 코치님 덕분에 제일 빨리 나오게 된 거죠. 지금도 코치님한테 너무 감사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2008년에는 올림픽 나갔다고 해도 메달을 못 땄을 거 같아요. 그때는 그만한 간절함이 없었거든요.

여러 실패들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요?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는 너무 긴장돼서 몇 달 전부터 불면증도 오고 그랬어요. 큰 시합은 처음이다 보니까 너무 떨리고. 그 마음을 컨트롤하지 못해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도 진 겁니다. 다시 그런 실수 하지 말아야지 했지만 마음을 컨트롤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그게 또 결과에 너무 욕심을 부리니까 불안하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 집중을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시합이고 뭐고 생각하지 말고 훈련에만 집중하자. 그러면 당연히 실력도 좋아질 거고, 대회 때는 그대로만 하면 된다. 그리고 늘 긍정적으로 난 금메달 딸 수 있어, 그 정도 실력 있어, 그렇게 생각했더니 불안하지가 않은 거예요, 잠도 잘 오고요. 땀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는 나온다는 걸, 그런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거 같아요.

레슬링을 하게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제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솔직히 처음에 중학교 들어와서는 쫄쫄이 입고 운동하는 게 창피하고, 맨날 귀 찌그러져 있는 것도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점점 커가면서는 없어지더라고요. 우리 중학교 은사님이 그 당시 우리들한테 정말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는 것만큼 빡세게 시키셨어요. 그때는 엄청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 코치님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레슬링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레슬링이라는 게 재밌는 운동은 아니에요, 너무 힘드니까. 하지만 자유로운 기술이 구사된다는 굉장한 매력도 있습니다. 제 경기는 그레코로만형이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은 따분할 수 있는데, 자유형 경기는 기술이 화려하고 역동적이어서 딱 봐도 멋있거든요. 앞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레슬링의 매력을 알 수 있게끔 묵묵히 역할을 하고 싶어요.

1935년 전후 일본에 가 있던 유학생들에 의해서 소개된 레슬링. 한국에 레슬링 경기가 본격화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슬링 붐이 일기 시작했고 레슬링 인구도 서서히 증가했다. 레슬링에는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두 종류가 있는데, 자유형은 온몸을 이용하여 경기를 펼치는 데 반해 그레코로만형은 공격 때 발을 사용할 수 없고 또한 허리 이하를 공격할 수 없다. 이 방식은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적인 레슬링 경기를 모방한 데서 유래했으며, 김현우 선수도 그레코로만형 선수이다.

열심히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레슬링 하면서 정말 많이 갖게 된 게 인내심이에요. 정말 간절하게 금메달을 갖고 싶으니까 뭐든지 참게 되더라고요. 놀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훈련 힘든 거. 힘들었지만 목표가 확실하고 간절히 원한다면 다 견딜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것, 레슬링 선수면 레슬링, 유도 선수면 유도만 생각하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즐기게 되고, 즐기면서 하다 보면 금메달도 따게 됩니다.

2014년 9월에 있을 인천아시안게임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외에 계획이 있다면요?

아직 무슨 계획을 말하는 건 시기상조 같습니다. 지금은 인천아시안게임만, 또 거기 나가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하니까, 대표 선발전만 보고 있어요. 올림픽, 아시아선수권, 세계선수권에 이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되니까 열심히 해야죠. 다음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계획을 묻는 분도 있지만, 먼 미래보다는 지금 바로 앞에 있는 것들에 집중할까 합니다.

심권호, 정지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보며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꿨던 소년 김현우. 이제 아이들은 김현우 선수처럼 되기를 소망하며 레슬링을 선택한다.

“진인사 대천명.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레슬링을 해오면서 이런 좌우명이 저절로 생기게 되었다는 김현우 선수.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좌우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땀 흘린 자만이 하늘의 뜻도 기다릴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그의 성취가 더욱 값진 이유는, 그 과정이 그만큼 진실했고 간절했기 때문이다. 순간의 성취를 이룬 자는 많다. 하지만 그 성취가 오래도록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 어떻게 감동시키냐고? 레슬링 김현우 선수처럼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