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씨네 삼 남매

아버지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한치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큰아버지, 2009년 중국 장백에서 잠시 아버지와 상봉했었던 북한에 사는 고모, 할머니(작고), 할아버지(작고), 작은아버지(작고). 아버지는 60년 만에 만난 고모에게서 받은 이 사진을 보며 이산의 아픔을 달래셨다.

사진 한치규 & 글 한승원

어린 시절, 아버지는 주말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가족사진을 찍어 주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행복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지난 50여 년간의 기록.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더 늦기 전에 보답해드리고 싶어 지난해 5월 어버이날을 기념해 <한씨네 삼 남매>란 이름으로 사진집을 내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헌사였다.

▲ 우리 언니 한정원. 강원 춘천, 1962. 5.

▶ 요강에 앉은 내 동생. 서울 내수동, 1967. 8.

▼ 최고의 별미 짜장면. 우리 것을 먼저

비벼주시고 사진을 찍으시던 아빠.

서울 내수동, 1969. 4.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나, 남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이다. 실향민인 아버지는 가족이 당신 삶의 전부였고, 일과 가족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릴 적 흥남에 있는 일본인 중학교에 다녔던 아버지는 학교에 가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 30분에 떠나는 화물 열차의 기관사 옆자리에 타고 50리를 달렸다. 그리고 중간 역에 내려서 다시 20분을 뛰어야만 잡아탈 수 있는 연결 기차를 타고 70리를 더 달렸다. 그렇게 모두 120리를 다니며 통학하면서도 항상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단 하나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으로 인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진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등이 휘어지도록 남매가 동시에 덥석 올라타도 웃음 짓고, 무더운 여름이면 마당의 하수구를 막아 수영장을 만들어주셨다.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우애 있게 자랄 수 있었다.

▲ “이놈들아, 아빠 허리 휜다. 허허허.”

서울 경복궁, 1967. 9.

아버지는 당신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의 아이들도 따뜻한 눈길로 담아내셨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상, 풍경 등을 사진으로 기록하셨고, 이 모든 것들은 아버지 최고의 유산이 되었다. 몇 년 전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신 후 아버지도 많이 쇠약해지시고 연로해지셨다. 가끔 모시고 외출을 하면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좋아하신다.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사진집을 선물해 드렸을 때, 너무나 가슴 벅차해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 우리 집 앞마당 수영장. 서울 내수동, 1971. 7.

 

▼ 이제 저도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어요. 한씨네 삼 남매. 왼쪽부터 막내아들 한승혁, 둘째딸 한승원, 첫째딸 한정원. 서울 내수동, 1976. 4.

한치규님은 1929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월남했으며 이후 군에 입대해 1979년 보안사 기조처장(대령)을 마지막으로 예편하기까지 30여 년간 군 생활을 하였습니다. 1959년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후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으며, 사진집 <한씨네 삼 남매>(눈빛)는 1960~1970년대까지 한 가장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이웃 아이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담긴 사진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사진 제공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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