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 뜨거운 태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여름 이야기들.

 

남미 농장에서 보낸 뜨거운 여름

김나영 26세. 직장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대학교 졸업 후 나는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을 해봐도 그다지 나랑 맞지 않았다. 내 스스로 만들어놓은 높은 기준, 하지만 거기에 못 미친다는 열등감 때문에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지인으로부터 ‘남미 농장 봉사 활동’ 제안을 받았다. 그곳은 아몬드를 키워, 남미나 아프리카 등 어려운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보면, 뭔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 넘고 물 건너 장장 34시간이 걸려, 아르헨티나의 농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중국, 멕시코, 일본, 미국 등에서 온 약 30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날에는 짐을 풀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잠이 들었다.

‘빰 빰빰빠라 빰 빠라 빰빰 빰빰빰’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기상나팔 소리가 울렸다. 해는 뜨기도 전이라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설렘 반 기대 반으로 농장으로 나섰다. 그제야 뜨는 해를 바라보며 트럭을 타고 10분가량을 가는 내내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땅은 마치 바다의 수평선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의 임무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밀짚모자에 하얀색 반팔 면티, 선글라스에 팔토시를 착용한 농장 주인이 우리가 할 일을 설명해주었다. 실제로 아몬드 나무는 아직 우리 키보다 작았고, 그 주위에는 성인 남자보다 더 큰 가시덩굴과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잡초를 제거해야만, 아몬드가 제대로 클 수 있는 것이다.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버거워 2인 1조로 팀을 꾸렸다. 그 드넓은 땅엔 아몬드 나무와 풀, 그리고 우리밖에 없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하루를 시작하고, 해가 질 때 농장 일을 끝냈다. 그리고 잠깐 눈만 감은 것 같은데 또다시 들려오는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농장 일을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삼 일… 계속되는 풀과의 전쟁. 잡초를 제거하던 중 불현듯, ‘나는 아몬드보다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냥 참 미안했다. 아몬드도 세상 사람을 위해 쓰이는데 나는 진짜 아무것도 해온 게 없었다. 오직 내 틀 안에 갇혀 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이 순간만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몬드는 살리고,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잡초를 제거했다. 나보다 더 큰 풀 하나가 뿌리째 뽑혀나갈 때, 내 안의 무기력함과 열등감, 자존심과 이기심도 같이 뽑혀나갔다. 예전의 나는 없어지고 아몬드처럼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당당히 새롭게 서는 것 같았다.

농장 일을 하며 틀도 많이 깨졌다. 깨끗한 것 좋아하고 매일 씻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그런 여건들이 풍요롭지 않았다. 때문에 씻을 수 있는 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또한 나 혼자만 잘해서는 되는 게 없었다. 점점 서로 간에 의지하며, 정말 다양한 국적,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갔다. 나보다는 세상을 위한다는 한 가지의 목적으로 모인 300명의 사람들, 그곳에 내가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내가 있는 모든 순간, 내가 설 수 있는 어떤 자리도 감사할 줄 알게 해준 곳. 세상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알려준 아르헨티나의 그 드넓은 농장. 꿈같았던 4주간의 뜨거웠던 여름이 그립다.

 

강석문 작. <너와 함께> 76×72cm. 한지에 먹, 채색. 2007.

 

‘천상의 휴가지’제주에서 알려드립니다

임병도 43세. 전문 블로거. impeter.tistory.com

이제 나에게 ‘여름휴가 어디로 갈 건가요?’ 하고 묻는 사람은 없다. 재작년 아예 제주로 귀촌했기 때문이다. 여름철 열대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를 보면,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제주에서도 중산간 지방에 사는 우리 집은 한낮에는 잠깐 덥지만, 저녁이면 서늘하고, 새벽에는 시원하다 못해 춥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사방팔방 모두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침 해가 마당을 비추면 그 상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집은 낡았어도 잠시 낮잠을 자려고 거실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지인들이 놀러오면 깻잎이며 상추를 따놓고,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지인들은 ‘진짜 너무 환상적이다, 나도 제주도에 내려오고 싶다’고들 한다.

한창 덥다 싶을 땐 그냥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차를 타고 나간다. 집에서 차로 딱 10분 거리에 바닷가가 있다. 나무숲이 우거진 비자림로를 타고 바다에 가서 몸과 마음을 한 번씩 씻고 오는 그 기분은 경험하지 않은 분들은 모르실 것이다.

예전에 강원도 동해로 바캉스를 떠났다가 고속도로에서만 8시간을 갇혀 있던 기억이 있는 나에게 지금은 하루하루가 휴가이고 여행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누구나 부러워하는 제주에 살면서 느낀 점은 이 세상에 천상의 낙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도에도 나름 안 좋은 건 있다. 특히 우리 집처럼 숲에 둘러싸인 집은 여름이면 매일 밤 벌레와의 전쟁이다. 거실에 불만 켜놓으면 온갖 벌레가 모두 달려든다. 담배 크기만 한 나방은 아주 애교스럽고, 벼룩이나 바퀴벌레, 풍뎅이, 딱정벌레 등 자연도감에서나 봤을 법한 벌레와 곤충들이 집 안에 수시로 출몰한다. 벌레가 컴퓨터 위를 기어 다니기도 하고, 다리에 올라타기도 한다. 모기약, 모기향, 전자 모기 퇴치기, 바퀴벌레약 등 철저한 대비를 하고, 온 창틈을 테이프로 물샐틈없이 막아도, 어느새인가 벌레들에게 물리기 일쑤다. 만약 일직선으로 물리고 모기 물린 것보다 훨씬 가려우면 벼룩이 문 것이다.(^^)

습기가 많아 제습기를 온종일 틀어놓아도, 벽지에 곰팡이가 끼는 것은 다반사이고, 옷이며 가방, 심지어는 아기 유모차에도 자고 일어나면 곰팡이가 핀다는 문제도 있다. 이곳에서는 열대야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벌레와 습기인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벌레가 나를 일깨워주었다. 세상은 공평하고, 늘 좋은 면과 나쁜 것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필요한 것만 생각하면 끝도 없고, 불만과 불평이 나오는 것이 인간이다. 제일 무서운 것은 벌레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 있던 불만과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무더위나 벌레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활짝 웃는 우리 딸아이의 미소와 지금의 삶에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제일 무섭다.

아무리 초호화 여행을 하고 나도 집에 도착하면 “아이고, 집이 제일 편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는가. 올여름, 최고의 휴가를 어떤 곳으로 갈 것인가 결정하기보다는 어떤 여행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쉬게 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그 역시 힘들다면 아이들과 방 안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즐기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여름휴가는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고, 최고의 여름휴가는 바로 내가 어디에 있든지 ‘이곳이 낙원이다’라는 생각으로 지내는 것임을, 천상의 휴가지 제주에서 주민으로 살며 깨닫게 되었다.

 

강석문 작. <붕붕> 50×68cm. 한지에 먹, 채색, 아크릴. 2010.

 

내 동생, 순철이

이기철 64세. 농부. 약물산토종농장 운영.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나는 팔 남매의 장남이다. 순철이는 두 살 차이의 바로 밑에 동생이었다. 천성이 착하고 순했던 순철이는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항상 자기 일인 줄 알고 살았다. 집에서는 장남인 나만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었고, 동생은 그냥 국민학교만 나와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나만 학교에 다니는 게 미안했지만, 동생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언제나 “형,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응원을 해줄 뿐이었다. 틈틈이 마을 서당에서 한문도 배우고, 혼자서 기타도 배워 칠 줄 알고, 농사일도 잘하고, 힘도 세고, 헤엄도 잘 쳤던 내 동생 순철이.

1974년 8월 23일, 그날은 억수로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군대를 막 제대하고 집에 와 있었는데, 잠시 나갔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이웃에 머물러 있었다. 비가 내리니 동생도 집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식구들 주려고 올해 첫 수확한 감자를 삶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웃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순철이를 찾았다. “애들이 떠내려가니 빨리 와서 건져 달라!”고. 당시 우리 마을 앞 강에는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그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일찍 귀가를 시켰다. 그런데 뱃사공이 그만 뱃줄을 놓쳐 버리면서 배가 뒤집힌 것이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학생들 11명과 할머니 한 분이 대책 없이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서둘러 강가로 달려간 순철이는 온 힘을 다해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씩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곱 명의 학생들을 구해냈다. 그리고 다시 강가로 뛰어든 순간, 그만 나룻배의 부서진 나뭇조각이 이마를 치면서 동생도 그대로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떠내려온 동생을 발견한 건, 오후 4시경. 동생이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강가로 나왔던 나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말았다.

내 착한 동생 순철이. 어머니는 삶아놓은 감자도 못 먹고 갔다며 참으로 서글피 우셨다. 4명의 학생들과 함께 순철이를 산에 묻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면, 어머니는 항상 강가에서 다슬기를 건져와 장국을 해주셨는데,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는 장국도 끓이지 않으셨고, 생전 물고기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동생을 먼저 보낸 후 병이 나서 일찍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나는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다음 해 서울로 나왔다. 하지만 5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토종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토종이라고 하면, 그전에는 흔하고 진절머리 난다고 했는데, 막상 다시 귀농을 하니 진짜 애착이 갔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렇게 토종 종자를 기르고 애를 쓰시던 게 생각이 났다. 토종 농사를 지으면서 토종의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개량종은 조그마한 재해에도 금세 사그러들지만, 토종은 밟아도 다시 올라온다.

그러다 2006년 8월, 정말로 마을이 다 없어질 정도로 큰 수해가 난 적이 있었다. 강과 밭이 완전히 뒤섞일 정도였다. 그때 아주 희귀 토종인 조개콩도 다 떠내려가버리고 말았다.

종자를 완전히 잃어버렸구나 싶어 속상했는데, 한 달쯤 지나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빗물에 쓸려 내려가다 전봇대에 걸렸던 조개콩이 그 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가 쏟아졌었는데… 그 와중에 살아남다니!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그걸 따서, 씨앗으로 보관한 후 다음 해 밭에 심었다. 그 조개콩은 지금도 풍성한 수확을 내면서 잘 자라고 있다.

그 조개콩 꽃이 피어날 무렵이 바로 동생의 기일이다. 동생의 희생 이후 마을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나라에서 다리도 놔주고, 지붕 개량도 해준 것이다. 또 동생에게는 공덕비도 세워주고, 대통령 훈장도 나왔다.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열매를 맺고, 그것이 다시 씨앗이 되고. 그렇게 모습은 없어지지만, 영원히 그 씨앗은 살아 있는 것처럼, 동생의 선량한 마음 또한 그렇게 영원히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순철이 덕분에 우리 형제들도 이렇게 화목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네가 살아 있었다면 형제간에 훨씬 더 화목할 텐데. 순철아, 미안하고 참 고맙다.”

 

강석문 작. <꽃놀이> 63×72cm. 한지에 먹, 채색.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