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내가 모두 행복해지는 ‘치과’

홍수연 치과의사, 서울이웃린치과 원장

서울이웃린치과에서는 토요일이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진료를 한다.
무료 진료에 힘을 기울일수록 좋은 시설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 병원에는,
개원 당시 전국에 5대밖에 없었다는 고가의 CT 촬영기도 있다.
비싼 치료비 때문에 치과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200여 명의 환자들이,
틀니, 임플란트, 잇몸 치료 등을 받고 다시 웃음을 찾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 때문에 아픔 참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홍수연 원장.
“내가 살고 싶은 어떤 세상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살아보자” 다짐했다는
그녀의 이야기. <편집자주>

중학생이던 1980년 5월, 내가 살던 광주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나는 공부 잘한다는 칭찬이 제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네에서 명문 대학에 진학한 삼촌, 고모들이 어디론가 잡혀가거나 소식이 끊겨 버렸다. 씩씩했던 동네 할머니들은 금쪽같은 자식이 옥에 갇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하자, 한 분 한 분 앓아누우시더니 결국에는 돌아가셨다. 10·26과 5·18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시간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내가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아마도 내가 나 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 첫 경험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 어쨌든 공부를 잘하자. 공부해서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공부해서 남 주자.’ 그렇게 입시 준비를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으셨다. “어차피 이런 시대에 대학을 제대로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혹시 시대가 좋아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게 어떻겠니?” 그것은 내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85년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의 대학 시절은 집회와 시위의 연속이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고, 군사독재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거대한 시위의 물결에 휩쓸렸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서 민주화 시위의 중심은 넥타이 부대와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동하였다. 2학기가 되어 학교로 돌아온 나는 고민과 회의를 거듭했다. 과연 이런 교과목들이 민중의 고됨을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갔다. 열악한 현장 생활, 2년 동안 나름 공장의 여동생들과 즐겁게 지냈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래, 공부해서 남 주자.’ 중학교 시절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치과 공부를 하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적인 치과 치료의 많은 부분이 건강보험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먹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수준의 진료에 수백만 원씩 갖다 부어야 하다니! 평소 내는 세금, 건강보험료, 이런 걸로 최소한의 실질적 보장이 이뤄질 수는 없을까?

그래서 치과대학 졸업 후 보건학, 공공정책 등을 공부했다. 하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낸 정책들은, 번번이 정권에 의해, 관료들에 의해 무시당했다. 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때가 내 나이 갓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내 삶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늘 불편했다. 마치 이 세상에 빚 같은 걸 남겨놓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온 힘은 이웃과 세상에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병약했지만 온 동네 할머니들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함께 키워주신 덕분에 큰 탈 없이 잘 웃고 잘 노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아낌없는 사랑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된 것이다. 그 이웃들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그즈음 간디가 자신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인정했던 제자, 인도의 비노바 바베의 말이 가슴을 쳤다. ‘당신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금부터 그 꿈꾸는 세상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라.’

그 후 지역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수백 명의 아이들에게 무료 치과 진료와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의만 갖고 무료 진료를 하는 것은 자칫하면 일회적인 행사가 되기 쉬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예 ‘공익형 병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2009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평일에는 치과종합병원, 토요일에는 무료진료병원으로 운영되는 치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약 20여 개의 사회단체들에서 의뢰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한다.

이가 아프면 온몸이, 마음까지 아파지기 쉽다. 고가의 치료비 때문에 치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저소득층 환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주말엔 장애인, 독거노인, 새터민, 외국인노동자 등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다. 치료비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의 목표는 부디 씹는 기능만이라도 회복하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설암(舌癌)으로 인해 혀는 물론 구강 기관이 모두 상실된 장애인이 온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단 한 개의 치아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혀에 발생하는 암인 설암은 초기에 발견하면 방사선요법을 통해 쉽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주변의 무관심과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그 시기를 놓치고, 오랜 시간 방치된 터였다.

치료의 과정은 길고 길었다. 환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복잡하고 고통스런 치료를 받았다. 틀니를 걸 수 있는 뼈조차 없는 환자의 잇몸에 티타늄으로 만든 인공 치근을 삽입하고, 잘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위와 아래의 완전 틀니를 제작했다. 틀니를 착용한 후에도 미관상 적합하게 되었는지, 씹는 데 무리가 없는지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6개월 후, 음식물을 씹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환자가 이제 깍두기도 씹을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분처럼 치료를 마친 분들이, 잘 드시게 되었다며 활짝 웃으실 때처럼 행복한 순간도 없다. 고맙다며 삶은 감자, 옥수수를 가져오시는 할머니, 한국에서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며 직접 만든 떡을 포장해 오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손길에서 살아가는 정을 느낀다.

치과의사라서 행복하다. 삶이 즐겁다. 환자들이 치료 전과 치료 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어서 좋고, 내가 내 마음에 꽉 차게 잘할 수 있는 게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삶이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쁘다.

홍수연 원장은 서울대 치과대학, 서울대 보건대학원, 단국대 대학원 예방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UNC) 보건대학원, 미국 교정치과의사협회 정회원, 런던대학교(UCL) 연구교수를 역임했습니다. 현재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베트남평화의료연대, 건강과 대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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