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정자씨

사랑스런 정자씨를 만난 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당시 나는 B여중의 교사로 근무했는데, 수업 중에 유난히 주위가 산만한 여학생이 있었다. 선생님들에게는 이런 학생이 가장 골칫거리다. 결국 어머니가 불려왔고 나는 정자씨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아이가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니 종합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한번 받아보면 어떠냐고 권하였다. 어디선가 성장기 아이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산만한 경우, 몸에 이상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이삼 일 뒤쯤 정자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구, 선생님. 선생님 귀신 아니세요?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우리 지혜가 자궁에 혹이 있다네요. 의사 선생님이 내일 수술을 한다고 하시니 며칠 결석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당황한 것은 정자씨뿐이 아니었다. 나도 속으로 많이 놀랐다.

수술을 받고 일주일 정도 쉬고 나온 지혜는 멀쩡하였고 어찌나 차분해졌는지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정자씨는 오랜만에 중학생인 딸과 병원에서 지내며 잠시도 곁을 비우지 않았다고, 그게 참 행복했다고 했다.

정자씨는 매 맞는 아내였다. 술 취한 남편이 귀가해서 하는 일은 아내 때리기였다. 건설업에 종사하던 남편은 전국을 돌며 일자리를 옮겨 다녔다. 현장에서 다른 여자를 취하여 지내는 것이 예사였다.

정자씨는 내가 퇴근할 즈음이면 학교에 왔다. 조용한 상담실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 일에 살림에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1인 3역 내지 5역을 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다음부터는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놓고 가라고 했다.

사연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우울증 공포 수치심 좌절감 자살 아니면 이혼? 내가 감당할 정도를 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드디어 이혼 합의를 보았다고 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거리로 쫓겨 나왔다. 남의 집 헛간에 둥지를 틀어야 했다. 남대문 새벽 시장에 나가 여자 의류 속옷 등을 떼다가 동네방네 다니며 팔았다. 목욕탕이나 미장원이 물건 팔기에 좋다고 하였다. 학교 선생님들도 고객이 되었다.

정자씨는 전문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다. 문인협회에서 활동하는 나를 보고 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 쓰라고 했다. 문학이 구원이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장담해도 좋은 진리라고 늘 믿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한 그녀가 장하였다.

치열한 삶이야말로 문학의 중요한 테마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오자 탈자투성이로 시작하였지만 점차 좋은 글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사여구로 장식하는 일부 문인들의 글과 달리 노동의 가치와 희열이 종으로 횡으로 짜인 신성한 글이 내 가슴을 쳤다.

드디어 정자씨는 제대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시 낭송을 하고 시화전에 참여하며 입지를 넓혀갔다. 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국에 투고를 하여 받은 선물로 텅 빈 부엌살림도 장만할 수 있었다. 드디어 KBS의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하였고 주요 일간지의 모니터가 되어 중앙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정자씨는 나에게 선생님이 되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독서지도사에 도전하였다고. 그 후 당연히 독서지도사가 되어 중고생들의 독서 지도를 해주었다. 무거운 옷 보따리는 내려놓고.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길이 열리는가. 함께 공부하던 분이 사정상 운영하던 학원을 내놓게 되었는데 정자씨가 딱이라며 너무나 헐한 값으로 선물하겠다고 하더란다.

우리 정자씨, 이제야 길이 뚫렸네. 그것도 고속도로가!

지금 정자씨는 학원 원장이 되었다. 그래도 현대문학 고전문학은 손수 가르친다. 나의 제자이자, 정자씨의 큰딸아이는 대학을 나와 역사와 수학을 가르치고, 둘째딸은 회계학을 공부하며 학원 행정을 도와준다고 한다. 그뿐인가. 두 딸내미가 어찌나 엄마를 잘 보살피는지 정자씨가 내게 올 때 보면 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최고 멋쟁이가 되어 나타난다.

“선생님 저 시집 냈어요. 선생님보다 먼저 내서 죄송해요.” “선생님 저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했어요. 베란다에 꽃도 놓았어요.” “선생님 학원을 아파트 단지 안으로 옮겼어요. 한번 오실 거죠?” “선생님 우리 둘째가 회계사 1차 시험에 합격했어요.” 나날이 새로워지고 향상해가는 정자씨! 늘 나를 찾고 늘 나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정자씨! 이제 놓아줘도 도망갈 소가 아니라는 걸 알겠구료!

김재숙 68세. 경기도 고양시 마두2동

정자씨에게는 김재숙님의 마음을 담아 ‘사랑스런 정자씨께’라는 문구와 함께 예쁜 난 화분을 선물해드렸습니다.

협찬 예삐꽃방 www.yepp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