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일에 미친 100인의 손을 만나다
김용훈 42세. IT 업체 근무. <당신의 손은 무엇을 꿈꾸는가> 저자
수년간 IT 업체에 몸담고 있다 보니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랄까 따듯한 무언가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의 정점에서 ‘손’을 떠올렸다.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PR성 자랑 글에 질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입은 말이 많지만 손은 티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생각에 ‘따듯한 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난 손에 미쳐 2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고은 시인,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새 박사 윤무부 교수, 만화가 이두호, 씨름인 이만기, 디자이너 장광효, 투수 송진우, 형사 고병천 등 이미 유명한 분들뿐만 아니라 순댓국집 할머니 오인숙, 갓 태어난 아기 김비취, 극장 간판 화가 이태동 등의 손을 만나면서 내 자신도 성숙해감을 느꼈다. 그야말로 수업료 안 내고 인생 수업을 듣는 참 공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자의 손까지 포함해서 총 100명의 손. 직접 99명을 만나면서 모든 분들의 손에서 감동을 받았지만 특히 지금 떠오르는 몇 분의 손이 있다. 얼마 전 은퇴한 이종범 선수의 손은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나이의 손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굳은살과 상처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의 손을 보고는 감동이 그칠 줄 몰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목련꽃 봉오리와 같은 그녀의 손은 아름다우면서도 가냘파 보였지만,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순간 전해지는 힘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여든 무렵의 한지장 장용훈 선생님의 손을 만날 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한지로 천년의 향을 만들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다 보니 이젠 허리가 굽고 다리도 불편해서 제대로 서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장인은 어쩌면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즐기는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손을 만나는 순간엔 그 손이 앞으로 어떤 것을 쥐고 살아갈 것이며 어떠한 이들의 손을 맞잡고 살아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그 순간의 순수함을 평생토록 간직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라본 내 손….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든 내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나를 훈계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삶인 만큼 다시금 더 알차고 다부진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게 되었다.
100인의 손을 통해 얻은 결론은 모두가 자신의 일에 미쳐 있다는 것.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진정으로 스스로 좋아서 몇 십 년 그 일만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원리는 통하리라 생각한다. 무얼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일에 빠져 열정적으로 임한다면 언젠가는 진정으로 찬사를 받게 될 것이다. 요즘은 자신의 줏대를 갖고 살아가는 소신쟁이보다 다른 이들의 눈치만 보는 눈치쟁이들이 많은 것 같다.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안정적인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다. 많은 이들이 무언가 좋아서, 미쳐서, 빠져서, 즐긴다는 단순하지만 행하기 어려운 이 원리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나 깨나 노래 생각’ 노래하는 경찰입니다
송인억(예명 송준) 45세. 서울중부경찰서 근무
어릴 때부터 워낙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라디오에서 노래만 나오면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곤 했다. 시골에서 4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을 도우며 농사일을 하고, 풀을 베고, 소를 키우고,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를 할 때도 내 입에선 노래가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라디오 옆에는 노트와 연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적기 위해서다. 노래가 나오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나는 마루에서, 둘째 누님은 아궁이에 불을 때다 말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신없이 받아 적느라 밥을 태운 적이 도대체 몇 번인지^^; 행여 놓칠세라 서로 한 소절씩 받아 적어간 노래가 노트 3~4권 분량. 100여 곡이 넘었다. 적어놓은 가사를 따라 부르며 노래를 외워나갔다. 당시엔 거의 트로트가 대세였는데, 나의 18번은 남진의 ‘님과 함께’, 나훈아의 ‘고향역’ 등이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가수를 꿈꾸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24살에 경찰이 되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경찰이 되었지만, 가수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노래와 자꾸 멀어지고, 성격마저 딱딱하게 변해가면서 마음 한구석엔 ‘이러다 내 노래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닌가, 나를 찾아야겠다’는 절실함은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13년간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2006년 서울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발령받은 근무지가 장충파출소였는데, 그곳에서 배호가요제가 열리는 게 아닌가! 장충단공원은 가수 배호씨의 히트곡인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 나오는 곳으로, 그 노래를 기념하여 가요제를 열고 있었다. 워낙 중·고등학교 때부터 배호 노래를 좋아해서 마스터한 것만 30곡. 그야말로 준비된 가수가 바로 나였다. 처음엔 자신이 없어 주저하다가 2008년 5월에 참가 신청을 했다. 바로 코앞에서 가요제가 열리는데도 머뭇거리면 점점 가수의 꿈이 멀어지겠구나 싶어, 떨어져서 망신을 당하더라도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결국 1, 2차 예선을 거쳐 15명과 겨룬 끝에 강진의 ‘남자는 영웅’이란 노래를 불러 금상을 수상하면서 내 나이 42살에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9년 3월, 드디어 첫 음반이 나왔다. 신곡 2곡, 기성곡 3곡이 담긴 나의 첫 앨범. ‘아, 이제 진짜 제대로 된 가수구나…!’ 너무나 행복했다.
가수가 되고부터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전에는 주로 지인들의 부탁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경사 ‘송인억’에서 가수 ‘송준’이란 이름으로 노래 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경찰 제복을 입고 노래 봉사를 나가다 보니 경찰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친근감 있게 해준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주로 찾아가는 곳은 장애노인,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행사, 복지회관, 노인분들 위안 잔치다. 주말은 물론이고 주간 근무가 끝나면 가고, 야간 근무 시작하기 전에 가고, 밤새고 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지만, 어르신들이 흐뭇해하시고 좋아하시니 자꾸 찾아뵙게 된다.
나는 여전히 파출소 지구대에서 근무하면서 112 신고가 들어오면 현장으로 출동한다. 하지만 내 인생에 노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경찰 업무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노래에 대한 열정을 경찰 진급하는 데 썼으면 더 큰 명예를 얻었겠지만, 나는 내 노래로 족하다. 그 행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렇듯 노래는 내 삶이자, 인생이고, 친구다.
피는 못 속인다고 얼마 전 아들이 전국노래자랑 강북구 편에 나가 인기상을 타왔다. 그리고 며칠 전엔 그 아들과 노인요양원에 가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아들과 함께 노래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이 되고도 항상 입에서 떠나지 않았던 노래, 어쩌면 내 인생은 타이틀곡인 ‘자나 깨나 당신 생각’이란 제목처럼, ‘자나 깨나 노래 생각’이 아니었을까.
내 나이 칠십 때 ‘영화’에 푹 빠지게 되었지요
이윤수 78세. 영화감독.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1동
나는 새벽 6시면 운동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날마다 안양과 서울을 오가며,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기술을 배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영화를 촬영한다. 작은 캠코더를 들고 주인공을 찾아간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는 57세 때 중풍으로 쓰러진 81세의 한 할아버지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가제로 정해둔 것은 <거북이의 꿈> 혹은 <어제 오늘 내일>이다.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된 몸으로, 그분은 매일같이 도로 가운데, 버스 정류장에 안전을 위해 설치된 철대를 잡고 운동을 하신다.
시작점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27년간을 그렇게 운동을 해오셨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질문에 “그동안 너무 고생한 부인한테 고마워서 고물이라도 팔아서 보답하고 싶어서”란다. 그렇게 운동을 한 덕분에, 그나마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가진 소박한 꿈,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노력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안선생님이라는 분이 촬영을 도와주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찍을 때 시나리오 쓰기, 콘티 잡기, 촬영, 편집하기 거의 다 내 몫이다. 벌써 여섯 번째 영화여서 그런지, 조금 더 기술이 생겨, 첫 장면부터 편집, 음악 등 더 세심하게 준비한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온통 그 생각뿐이다. 나이 든 할머니가 영화도 찍고, 포토샵이니 스위시니 그런 프로그램도 잘 다룰 줄 아니, 존경한다 하고 부러워하는 젊은 사람도 많다.
나도 젊은 시절엔 세 아이 키우며 사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데 내 나이 56세 때 남편이 돌아가셨다. 너무 막막해서 이불 가게를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아이들이 자리를 잡으며, 70세쯤 가게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힘든 시기가 왔다. 한창 바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외로움, 좌절감 같은 게 몰려왔다. 자꾸 남편 생각이 나서 남편이 묻힌 국립묘지에 찾아가곤 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한날은 딸이 컴퓨터를 배워보라고 하였다. 이 나이에 할 수 있을란가 싶었지만, 한번 해보자 싶어 동사무소에 개설된 컴퓨터 기초반에 갔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 그 강좌를 두 번을 더 반복해서 들으며, 열심히 연습하니 감이 잡혔다. 점점 컴퓨터는 나의 남편이자 애인, 친구가 되어갔다.
그러다 동영상을 배웠고 영화까지 찍게 되었다. 처음 찍은 것이 <국가유공자 미망인>이라는 다큐였다. 남편이 국가유공자여서 평소 주시했던 주제였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남편이 전사한 사람 등 남편 없이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첫 작품이어서 많이 흔들렸는데도,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주최하는 제2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본선에 입선을 하였다. 그때는 노인영화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뭐만 보면 이건 영화 소재로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질 좋은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기술도 더 부지런히 배우게 되었다. 첫 작품 이후, 월남전에 가서 남편이 죽은 두 미망인이 연인처럼 지내는 이야기를 담은 <내 짝꿍 정순아>, 그리고 독거노인들과 소년소녀가장들을 돕는 70세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천사의 향연>도 제작했다.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편집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기도 하고, 때로 냄비를 두 개나 태워먹은 적도 있을 만큼 몰두하며 한 작품, 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작품인 <황혼의 열정>에서는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열정적으로 사니까 이제는 외롭고, 힘들 시간도 없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력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다.
보통 한 작품을 만들 때 삼사 개월 정도가 걸린다. 출연자들이 카메라를 의식하기에 한 장면을 담기 위해 수차례의 촬영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하다못해 다섯 살만 아래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실망하진 않는다.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그때까진 인생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이대로 늙는 게 아니라 열정을 잃어버리면 늙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