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해발 4,718m에 자리한 남쵸는 티베트에서 가장 높고 넓은 호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한 호수로 알려져 있다. 사실 티베트에는 남쵸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호수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티베트인들의 관념 속에서 남쵸는 티베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로 인식되고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하늘호수. 남쵸는 워낙에 넓은 호수인지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도 20여 일이 걸린다. 그럼에도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라 순례자가 적지 않고, 심지어 호수 한 바퀴를 오체투지로 도는 순례자까지 있다. 해발 4,718m, 길이 70km, 폭 30km, 수심 약 35m. 이것이 눈에 보이는 남쵸의 모습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남쵸의 본질은 이곳이 하늘과 맞닿은 ‘하늘호수’라는 것이고, 티베트인의 관념 속에 가장 신성한 호수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남쵸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지 남쵸에 가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쵸에 이르러 하늘을 닮은 호수와 호수를 닮은 하늘, 연이어 펼쳐진 만년설 봉우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숨이 턱 막힌다. 아무리 봐도 호수의 빛깔은 신비롭기만 하다. 푸른색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빛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보석!
라싸 버스터미널에서 시가체행 버스에 오른다. 라싸에서 시가체까지는 280km. 버스를 타면 5시간쯤 걸린다. 버스 안은 여기저기서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로 뿌옇고 매캐하다. 5시간이나 이런 버스를 타고 가자니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버스 안에서 ‘뽕짝’처럼 흘러나오는 티베트 노래가 짜증 난 마음을 달랬다. 버스는 예정보다 4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험한 강줄기와 가파른 산굽이를 휘영청 돌아가는 길. 거의 300도에 가까운 굽잇길에서도 버스는 상관없다는 듯 추월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승객들은 이골이 났다는 듯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1시간 40분을 달려 버스는 노천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했다. 건물이라곤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수를 파는 쓰러져가는 흙집이 한 채 있고, 변변한 화장실도 없는 곳. 남자들은 모두 강을 향해 소변을 보고, 여자들은 건물 뒤로 돌아가 일을 본다. 라싸를 출발한 지 4시간 50분, 드디어 시가체에 도착했다. 티베트 제2의 도시임에도 시가체는 라싸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전혀 번잡하지가 않다. 나는 버스 정류장 인근의 여관에 짐을 풀고, 걸어서 외곽의 들판까지 나갔다. 유채밭과 감자밭이 펼쳐지고, 칭커밭이 에두른 시가체 들판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우리나라 시골보다도 훨씬 시골다웠다.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길로 농부가 마차를 끌거나 당나귀를 몰고 간다. 어떤 아낙은 푸성귀가 가득한 망태기를 지고 총총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손을 흔들면 이웃이라도 되는 듯 반갑게 손을 마주 흔들어준다. 시가체에 당도한 뒤부터 비로소 느긋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서 나는 최대한 티베트의 시간을 즐겼다. 당나귀 걸음으로 그 시간을 따라갔다.
여행은 타임슬립 Timeslip(시간을 앞질러가거나 거슬러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티베트의 산중 마을에서 나는 30년 전의 내 어린 시절을 경험했다. 몽골 알타이에서는 전혀 다른 행성에 와 있다는 희한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라오스에서는 원시의 풍경 속에서 벌거벗은 아이들과 멱을 감았고, 벨기에의 몇몇 도시에서는 갑자기 중세 시대로 떨어져 성당과 종탑을 기웃거렸다. 전혀 다른 지층 연대로 나를 이끈 타임머신은 종종 연착되긴 했지만, 커다란 고장 없이 나를 현실 세계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시차 적응에 애를 먹었다. 30년 전 지층 연대를 당나귀의 걸음으로 거닐다가 느닷없이 공항버스를 타고 시속 100km로 달리자니 현기증이 났다. 버려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컴퓨터 메일함에는 수백 통의 메일이 쌓여 있었다. 나는 다시 호전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인 세상에 던져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