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일성
요즘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면서 문득 차창에 비친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화장대 거울이나 화장실의 거울에 비친 모습과는 달리 많은 사람 속에 묻혀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영락없는 불혹의 아저씨 한 명이 초점 없이 멍하니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 속에서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지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 마흔 넘으면 골프 치고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난… 가끔 동네 사람들이랑 아직도 당구 치고 다닌다. 웃긴 건, 20년 전에 200 쳤는데 지금 120 놓고 물리고 다닌다.
나 마흔 넘으면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 맡아서 팀원들 이끌고 밤샘 회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난… 아직도 아침에 출근해서 밑에 직원들 오기 전에 화장실 청소한다. 웃긴 건, 직원들이 변기가 막혀도 날 찾는 거야. 부장은 부장인데 화장실 관리 부장인가 봐.
나 마흔 넘으면 항공사 마일리지 엄청 쌓여 있을 줄 알았다. 사진첩에 몽마르트 언덕 노천카페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한 장쯤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난… 태국에서 코끼리 엉덩이 만지며 어색한 미소 짓는 사진 한 장이 다다. 웃긴 건, 그 사진도 신혼여행 때 사진이야. 그때 태국이라도 안 갔으면 아직 외국 한 번 못 나가 본 거였다.
나 마흔 넘으면 드라마에 나오는 집처럼 집 안에 계단 있는 복층 집에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난… 좁은 집에서 부모님, 우리 부부, 남매. 이렇게 여섯 식구가 박 터지게 살고 있다. 웃긴 건, 방은 세 갠데 남매들이 자꾸 커 간다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형제나 자매를 낳을 걸 그랬어.
나 마흔 넘으면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80세 되신 아버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다니고 밤에는 집 안의 재활용 분리수거 담당이다. 웃긴 건, 재활용 버리러 나가셨다가 아깝다며 주워 오는 물건이 더 많으셔.
그리고 어머니 아침, 점심, 저녁으로 화투패 뜨기를 하시는데 똥광이 한 장 없어서 서비스 패를 똥광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치셔. 웃긴 건, 어느 날 똥광이 있기에 찾으셨나 했는데, 여전히 서비스 패가 한 장 보여서 물었더니 이번엔 홍싸리 한 장이 없어졌대.
나 마흔 넘으면 우리 남매 남부럽지 않게 키울 줄 알았어. 그런데 TV 같은 데서 다른 사람들이 자식들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교육시키고 하는 장면 나오면 다른 데 틀어…. 웃긴 건, 애들도 공부의 왕도 같은 모범생들 나오면 다른 데 틀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튕겨 나가듯 지하철에서 내려 아직도 쌓여 있는 눈을 밟으며 집에 들어왔습니다. 현관문을 여는데 아버지와 아내가 식탁에서 막걸리 한 병과 돼지고기 보쌈을 먹고 있습니다.
“다녀오셨습니까~~.” 비모범생 남매의 인사. “애비야 수고했다, 한잔해라.” 음식물 담당 아버지의 얼큰한 목소리. “자기야, 한잔하고 씻어.”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아내의 더 얼큰한 목소리. “홍싸리 찾았다.” 타짜 어머니의 해맑은 목소리.
엉거주춤 식탁 앞에 서서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막걸리 한잔에 마흔의 또 어느 한 해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