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告解) (1)

고해 (告解)

살면서 고해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아니면 누군가의 고해를 받아보셨나요. ‘고백’이라는 말과는 다른 깊이로 다가오지요. 여기엔 성찰과 진실이 담겨 있어서 털어놓을수록 그 무겁고 응어리진 것이 연기처럼 풀어지지요. 미처 전하지 못한 참회와 감사의 말들…. 그 비워냄의 시간이 있어 우리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삶의 여정에 나섭니다. 고해(苦海)를 건너 순수에 이르게 해주는 마음의 별입니다.

3770_웹진

정명화 작. <분홍풍경>
유화, 오일스틱.
60x60cm. 2005.


 

저도 누군가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될게요

조은솔 / 16세. 경남 진주시

2010년 3월이에요. 어떤 선생님을 만날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교실에서 기다렸는데 짠~ 하고 나타나신 일진 선생님. 뭐야~ 일진회야? 장일진이라는 선생님 성함을 듣고 저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댔죠. 그때부터 선생님과의 전쟁도 시작이었어요.
첫날도 지각 다음 날도 지각. 사실 저는 중학교 내내 지각은 기본이고, 반에서 제일 말을 안 듣는 아이였어요. 반항적이고 부정적이고 선생님께 대들기 일쑤였어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때리기도 하고, “엄마 불러와!” 하며 화를 내셨어요. 그럴수록 저는 더 반항을 했고요.
근데 일진 선생님은 좀 달랐어요. 화 한번 내시지 않고, “이제부턴 하지 마라~” 엄마처럼 포근하게 충고만 해주셨지요. 그래서인지 처음엔 선생님을 좀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아요.(죄송^^;;) 반성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선생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말대꾸만 했잖아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저를 미워하시기보다는 바꾸어주려고 애쓰시는 선생님 사랑이 느껴졌어요. 따로 저만 데려가서 타일러도 보시고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고 약속을 하고…. 한 날은 배가 너무 아파 조퇴를 시켜달라고 했더니, 수업이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선생님 차에 태워서 저를 병원까지 데려가주셨잖아요. 그때 정말 나를 위해주는구나, 진심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잠시, 여전히 이기적인 성격을 바꾸지 못하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죠.
방학이 다가오던 어느 날이었어요. 선생님이 뭔가 할 말이 있으신 듯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시는 걸 봤어요. 그리고 얼마 후 저희들에게 슬픈 소식을 안겨주셨지요. 이제 선생님을 그만두신다고, 명예퇴직하신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간이 탁 내려앉는 느낌이었어요. 장난치시는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좀 들을 걸, 이때까지 속만 썩였는데, 설마 이대로 가시는 건가, 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떠나시는 날,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 평소 하지 않으시던 노래도 하시고 춤도 추시고, 또 억지로 눈물을 참는 선생님 모습에 저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펑펑 울었어요. 아무리 속을 썩여도 안 좋은 말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 좋은 말만 해주시던 선생님, 저는 그날 “이제부터 잘할게요” 하고 약속을 드렸지요.
선생님, 저 요즘은 지각도 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선생님들께 대들지도 않아요. 애들도 그래요, 저 많이 바뀌었다고^^. 다 선생님이 항상 제 손을 꼭 잡고 “은솔이도 그렇게 안 할 수 있어, 바뀔 수 있어” 하며 믿어주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선생님처럼 저도 누군가 말썽을 피울 때 끝까지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럴 수 있겠죠?
선생님 그동안 죄송하다고 말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런 말을 잘 못 해서 결국 편지로밖에 못해드리네요. 선생님! 감사하고 죄송하고 사랑해요.♡♡♡

– 마지막 꼴통 제자 올림

3247수정_웹진

정명화 작. <하얀비 노랑테이블>
유화, 오일스틱.
100x100cm. 2002.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 바비에게

제니퍼 김(Jennifer Kim) / 64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아들아, 기억하니? 네가 여덟 살 때였어. 내가 우리 아파트가 좁다고 불평했을 때 네가 말했지. “엄마,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잘 수 있는 집이라도 있으니 감사해야죠”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솔직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단다.
또 내가 회사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동료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와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모두를 욕할 때였어. 그때도 넌 “한 사람이 엄마를 괴롭힌다고 모두를 똑같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건 엄마의 편견이에요”라고 말했지. 그 순간엔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너에게 서운했단다. 하지만 나중에는 네가 한 말을 되새기게 되었고, 그 말이 옳음을 알았지. 그다음부터는 무슨 문제가 생겨도 한꺼번에 다른 사람들까지 싸잡아 생각지 않게 되었단다.
되돌아보면 너는 한 번도 엄마가 아침에 깨우게 하거나 벌을 주거나, 숙제하라고 잔소리하게 한 적이 없구나. 그만큼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해주었지.
너희 친구들이 내게 들려준 얘기도 있어. 네가 농구를 할 때면 공을 제대로 받거나 던지지 못하는 아이에게 공을 주면서 “넌 할 수 있어”라고 늘 용기를 주었고, 또 방과 후에 수학을 어려워하는 친구를 가르쳐줄 때도 “넌 할 수 있어. 잘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주었다고.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아이. 항상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던 아이. 아빠에겐 엄마 칭찬을 하고 엄마에겐 아빠 칭찬을 하며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던 아이.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게 신기할 때가 많았단다. 공부는 항상 최상위였으면서도 늘 겸손했지.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 엄마가 너를 남들에게 자랑하는 것이었어.
네 아빠가 중풍으로 누웠을 때 넌 날 돕기 위해 가까운 대학인 스탠포드에 가려고 했지. 하지만 엄마 아빠는 네가 어려운 상황 때문에 너의 삶을 잃지 않기를 원했고, 네가 캘리포니아를 떠나 예일대학에서 좋은 삶을 만들어 가기를 권면했었다. 그것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부모님 뜻을 따라 예일대학에 들어간 너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또 한 번 엄마의 자랑이 되어 주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항상 “엄마, 엄마는 저에게 뭐든지 말씀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어요, 진짜로요”라고 했고, 결국 나는 힘들 때마다 너에게 분풀이를 하곤 했지. 그러면서도 당시 난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를 못했단다.
너의 아픔을 헤아리기보다 내 자신만 알았던, 이기적인 엄마였던 내 모습….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구나. 참으로 부끄럽고, 또 네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사랑하는 내 아들 바비(Bobby)야, 이제 네가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난 지도 꼭 십 년이구나. 너는 22년이란 짧은 세월을 살았지만, 육십을 산 이 어미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그거 아니? 네가 친구들과 농구를 하던 그곳. 올로니 파크(Oloney Park) 농구 코트가 지금은 ‘바비 윈슬로 코트(Bobby Winslow Court)’라 불린다는 거. 언제나 친구들에게 용기를 주던 너를 기리기 위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 하더구나. 네가 수학을 가르쳐주던 그 아이는 평소 하고 싶었던 엔지니어를 전공하고 지금은 좋은 직장도 다니고 있대. 다 네가 준 용기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더라. 또 예일대학에서는 매년 한 명의 졸업생에게 ‘Bobby’ 이름으로 상을 수여하고 있단다.
이런, 엄마가 우리 아들이 제일 싫어하는 아들 자랑을 너무 했구나.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네 자랑을 멈출 수가 없구나. 아직도 너를 만질 수 없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렴. 엄마도 우리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 씩씩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22년을 누구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살아준 우리 아들. 사랑해 그리고 감사해.

3239수정_웹진

정명화 작. <바람 부는 날>
아사천 위에 오일스틱, 마커.
33.3×33.3cm. 2002.


 

고3 모의고사 때 컨닝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백두산 / 30세. 직장인. 경기도 광명시

나는 어릴 때 공부를 잘하였다. 하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시작된 방황은 학창 시절을 운동과 싸움, 술과 담배로 물들게 만들었다. 엄청나게 무서우신 아버지는 전혀 모르게….
어느덧 고3이 되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갑자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수능 성적이 지난 모의고사 때와 같이 150점이 나온다면, 아버지께서 그걸 아시게 된다면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우리나라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앞으로의 모의고사 점수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을 피해 갈 수도 없을 것이다. ━_━;;;
6월 모의고사 때였다. 나는 국어 시험지를 받아 열심히 풀었다.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큰 불만은 없었다. 다음은 수학 시간. 걱정이 밀려왔다. 워낙 수리영역에 타고난 머리지만 그래도 4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은 숫자들과 기호들. 교실 분위기를 살펴보니 다들 열공이다. 그중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옆에 앉은 녀석. 우리 학교에서 공부 쫌 하는 애다. 난 녀석을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대략 이렇게 말했다.
“상부상조하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가리거나 안 보이면 같이 죽~는 거야!”
녀석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감독 선생님이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녀석과 내 주위에서 꼼짝을 안 하시는 관계로 도중에 포기해야 했던 것. 다음은 내가 요즘 바짝 정신 차리고 제일 열심히 했던 수탐2 영역. 시험지를 보니 아는 용어들이 많이 보여 무지 반가워하며 최선을 다해 풀었다.
다음은 암담한 영어시간. 나는 그 녀석을 다시 불러냈다.
“아까는 계획성이 좀 부족했던 거 같다. 이번에는 눈치껏 손가락으로 표시해 봐!”
하지만 영어 역시 순탄치 않았다. 듣기 평가가 계획대로 끝나고, 시험지를 풀 때였다. 바짝 긴장한 녀석이 겁을 먹은 건지, 저 혼자 살겠다는 건지, 표시를 안 하는 것 아닌가. 대충 답을 적는 것으로 허무하게 영어도 끝내야 했다.
시험 결과는 이랬다. 국어 70점, 수학 38점, 수탐2 100점, 영어 42점….
“Olleh~^o^!!!”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 정도면 내가 모범생인 줄 알고 계신 아빠에게 핑계 댈 거리는 생긴 것이다. ‘답을 밀려 썼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그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구 마셔댔다. 한 잔 두 잔 세 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집이었고 아침 7시 30분. 아빠는 출근 준비를 하느라 욕실에 계셨다. 난 너무 겁이 나서 그대로 나와 버렸다.
아빠는 지금까지도 내가 그때 시험을 망쳐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술을 그렇게 먹었다고 생각하신다. 다행이긴 하지만 이 못난 자식 때문에 가슴 졸이신 걸 생각하면 정말 죄송하다. 무엇보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하고 싶다. 녀석은 다음 날부터 날 피해 다니느라 고생 좀 했었다. 그때는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준 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트레스 많은 고3 시절 나 때문에 얼마나 더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미안하다, 친구.
그리고 1999년 당시의 수험생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과 교육부 관계자님, 성스러운 모의고사 때 컨닝을 한 점 잘못했습니다.(ㅜ.ㅜ) 제가 그땐 철이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 지난 일이잖아요~ 헤헤~^^

3785수정_웹진

정명화 작. <베네치아의 여름>
유화, 오일스틱.
50x50cm. 2005.

2010년 12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가는 서양화가 정명화입니다. 그녀는 1959년 서울 생으로, 21세에 파리 살롱 데 아티스트 프랑세스 전에 입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14회의 개인전과 Artists Exhibit in SOHO 등 80여 회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며, 자유로운 감성과 유려한 색채로 두터운 애호가층이 형성돼 있습니다. 지금은 그림을 좋아하는 딸과 함께 파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특히 푸른색을 주조로 하는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