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원하는 바로 그것을 찾았을 때, 누구나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기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 찾게 해준 바다의 메시지

이동호 33세. 직장인.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24살, 이제 몇 개월 후면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 강렬한 햇살이 따가울 정도인 8월 초순, 친구들과 함께 동해안 경포대 해수욕장에 놀러온 나는 시원한 파도에 몸을 던졌다. 언뜻 오늘은 바람이 거세니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가 들렸으나 우리 중 누구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더 들어갔다. 그런데 순간 몸이 바닷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얼굴마저 들어가자, 아차 싶었다. 땅에 발이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땅을 박차면서 육지를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다. 하지만  밀려갔다 밀려오는 강한 파도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헤엄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주변에 1m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다. 하지만 손을 뻗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이렇게 죽는 건가? 크윽. 입과 코, 귀로 바닷물이 계속 들어왔고, 힘이 자꾸만 빠져나갔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살기 위한 버둥거림을 멈추고 죽음을 수용했다. 그러자 그 순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산 삶이 영화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팔이,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 항상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학원 한번 제대로 못 보내주시는 부모님을 원망했고, 나는 왜 이런 조건이냐며 모든 것에 불평만 하고 있었다. 내가 돈을 벌어야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어, 군대도 산업체를 선택했다. 하지만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24년간의 짧은 삶…. 항상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항상 내 위주로 판단하고, 항상 나만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었다. 단 한 번도 남을 위해 살아본 적도 없었고, 부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 죽을 것을,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을까….

이제 정말 죽는구나 싶을 때였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옆에 있던 친구가 장난이 아님을 알고 손을 뻗어준 것이다. 하지만 강한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친구조차 함께 위험에 빠져 버렸다. 다행히 구조 대원이 나타났고, 우리는 살았다.

박정민 작. <여름찬가>

Oil on Canvas. 92×72cm. 2009.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친구와 난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서 한참을 있었다.

왠지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물속에 빠졌을 때 그 순간 예전의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이제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우리 동네 복지시설을 찾았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아동들을 자립할 때까지 보호, 양육하는 아동복지시설이었다. 적은 돈이지만 나도 내가 번 돈의 일부를 매달 후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이 지나자 후원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고, 분기별로 한 번씩 어린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도 받아보니, 참 기분이 좋았다. 그때 남을 위해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걸 처음 배운 것 같다.

복학 후에는 전공도 바꾸었다. 취직을 고려해서 기계산업과를 선택했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경영이었기 때문이다. 내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가고 싶다. 지금도 종종 삶에 불만이 생기려고 할 때면,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그 순간을.

잃어버려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찾아줄게

박영자 48세. KT CS 상담사.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차를 어디에 주차해 놨더라? 그걸 어디에 뒀더라?

언제부터인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내 일상이 되어 버렸다. 30대까지만 해도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닐 정도의 기억력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40대에 들어서부터 건망증이란 놈(?)이 내 오만함을 경고하듯 찾아들었다. 처음엔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하면서였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를 주차해 둔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삼십여 분을 찾아 헤매던 날 한숨을 쉬며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남편에게 SOS를 청했다. 남편에게 연락이 되면 절반은 성공이다. 남편은 수사관처럼 내 행선지를 물은 후 추적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람처럼 들려오는 환호성.

"걱정했지? 찾았어!" ‘아니 그럴 리가?’

차가 아파트 주차장이 아닌 도로변에 떠억(?)하니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얼마 후의 일이다.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운전을 하고 돌아왔다. 차를 주차시키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병원에서 진료비를 지급하고 바로 왔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남편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신랑! 내 지갑!" "어디에서?" "평화동 00병원." "알았어!"

남편은 숙달된 솜씨로 114에 물어 병원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잃어버린 물건 찾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걸려오는 남편의 전화. 딱 6분 만이었다.

"걱정했지? 아까 그 병원에 가봐. 간호사가 보관하고 있대." "와!"

박정민 작. <오후의 풍경>

Oil on Canvas. 53×33.4cm. 2007.

건망증의 우울함으로 빠져들었던 나에게 남편의 "찾았다!" 외침은 희망의 전령이었다. 처음엔 물건을 잃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해결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니 몸도 지치고 기분까지 우울해졌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남편이 보디가드를 자청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깜빡하면 무조건 연락하라고.

그 후 몇 년째 반복되는 실수가 있었지만 남편은 짜증 한번 낸 적이 없다. 건망증.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가족들의 이해와 사랑 그리고 진득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건망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이었다. 한번은 남편이 빨래를 가지런히 개어놓았다. 평소 집안일을 하는 건 ‘남자 망신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못난 남편 만나 가정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살았잖아. 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잘해줄게…."

코끝이 찡했다. 22살 때 남편을 만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던 서글서글한 눈망울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다툼이 생길 때마다 이유 없는 패자의 자리에서 돌부처가 되어주었던 남편. 그동안 남편에게 무한정 받았던 사랑은 앞으로 내가 갚아가야 할 빚이 될 것 같다. "여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히말라야가 내게 준 선물

이어진 21세.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올해 초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스물한 살의 나이,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선뜻 내 자신을 던지지 못해, 하루의 반을 잠으로 때우는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던 때였다. 총 10일간의 일정 중, 6일이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였다. 네팔 포카라에서 중간 거점 격인 울레리를 거쳐, 최종적으로 히말라야 산의 장관을 잘 볼 수 있다는 푼힐 전망대까지 오르는 것이다. 일정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 푼힐 전망대로 가기 바로 전 코스인 고라빠니까지 가서도 여전히 날씨는 흐렸다. 대장님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상황을 봐서 구름이 없어진다면 푼힐로 올라갈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날씨 때문에 장관의 경치를 보여주지 못할까 걱정하셨다. 그 걱정은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구름은 가시질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트레킹을 앞두고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언젠가부터 현재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추억과 후회 때문에,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현재로부터 눈을 감고 쫓겨나듯 도망쳤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대장님이 일행들과 대화하는 소리에 깼다. 대장님은 "더 자도 돼. 어차피 구름 때문에 보이지도 않아"라고 말했다. 눈을 감으니 어제의 잡념들이 다시 찾아왔다. ‘내가 마음을 무겁게 먹고 있으니, 산도 무거운 구름을 머금고 있구나.’

어쩌면 트레킹 내내의 날씨는 내 마음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마술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는지 마술 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탔다. 그땐 마술이 너무나도 좋았고 평생 마술을 하며 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좋아하던 마술도 도망치듯 그만뒀다. 가끔씩 무대로 올라가기 전의 두근거림과 무대의 불빛, 관객들의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가장 그리운 것은 그것들을 위해 준비했던 열정과 노력의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았다. 대학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재능을 살려 나의 길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세상을 향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크게 말했다. "산이 보여요. 다들 빨리 나와 보세요." "어디 어디?" "참말로 산이 보이나?"

얇은 벽 사이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고 곧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쿵쿵쿵 울렸다. "히말라야의 여신이 자비를 베푸시는구나!" 대장님의 말씀대로 흰 눈으로 뒤덮인 산맥들이 히말라야 여신의 선물로 느껴졌다.

산은 두 시간 남짓 모습을 비추고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 그 두 시간은, 이제 다시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지금 이 순간 너의 열정을 모두 쏟으라는, 대자연이 주는 용기와 사랑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변할 뿐이다.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자, 제대로 현실을 마주하고 눈을 뜨자, 결심했다.

귀국을 앞두고, 네팔 분들에게 마술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몇몇 일행 앞에서 시작한 것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내 마술 실력은 6년 전에서 멈춰 있었다. 과연 멈춰 있는 건 마술 실력뿐이었을까. 도망치듯 그만둔 이후로 그때만큼의 열정으로 산 적도 없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공연이 끝났고 박수 소리가 들렸다. 몇 사람들이 악수를 청했다. "놀랍군요. 이렇게 신기한 마술은 처음 봤습니다." 분명 예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무대였지만, 나에게는 가장 큰 무대였다.

나는 히말라야가 내게 준 선물을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그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장기를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공모전에 사업 계획안을 제출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두렵기도 하다. 분명 좋은 일만큼 안 좋은 일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려운 만큼 기대도 된다.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나는 나아갈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 않고. 그것이 내가 히말라야에서 찾은 것이니까.

박정민 작. <만찬>

Acrylic on Acrylic board.

91×72cm.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