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리역에서

지난여름, 새내기 대학생 딸이 생애 첫 기차 여행을 하였다.
사박 오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딸은 어느 간이역에서 본 그림 같은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동해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어요. 차창 너머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들이 영화처럼 지나고 있었어요. 얼마나 달렸을까. 긴 철길이 들판과 마을 사이를 지나는 곳에 탑리역이 있었어요. 기차가 정차하자 사람들은 분주한 걸음으로 플랫폼을 빠져나갔어요. 그런데 그 속에 한복 차림을 한 노부부가 계셨어요. 하얀 모시옷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와 초록색 치마에 흰 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노부부의 여름 한복은, 짧고 간편한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어요.

나는 얼른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 친구를 깨워 창문을 가리켰어요. 우리는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객차 앞을 지나가시는 두 분을 유심히 바라보았죠. 머리카락이 새하얀 백발인 할아버지는 양손에 알록달록 무늬가 있는 가방을 들고 씩씩하게 앞서 지나가시고, 그 뒤 서너 발자국 뒤에 할아버지와 똑같이 완전 백발인 할머니가 다소곳이 따르고 있었어요. 성큼성큼 걷는 할아버지와 뒤따르는 할머니와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졌어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전통의 남성상! 친구와 나는 마주 보고 쿡쿡 웃었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할아버지는 역사에 양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바삐 할머니 쪽으로 되돌아오셨어요. 그리고 할머니에게 손을 내미셨어요.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을 할아버지에게 맡기더군요. 두 분은 그렇게 손을 잡고 천천히 역사 쪽으로 걸어가셨어요.

우리가 탄 기차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카메라가 롱샷으로 주인공을 따라가며 촬영한 것처럼, 그 고운 영상을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어요. 차창으로 바라본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너무 예뻤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늙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예뻤어요! 진짜! 그래서 손 흔들 줄도 모르고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니까요.^^

간이역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리고 어디로 떠나갔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먼 어느 곳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다녀가기도 했다.
그래서 간이역은 역무원이 없어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거다.

최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