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주년, 무한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 공장 ‘토토’ 이야기

박소연  37세. 자영업. 충남 논산시 상월면

작년 겨울, 도시에서 시골로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올라온 나는 자연의 신선함을 느끼면서 이 땅에서 동물을 키워봤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다 우연히 강아지를 주겠다는 이웃 언니 집에 가게 되었다. 반가운 맘에 날아갈 듯 찾아간 집 마당에서는 어미 개가 새끼들에게 젖을 주고 있었다. 통통한 어린 새끼들이 눈에 띄어 만져보며 귀여워하는데, 저쪽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새끼 한 마리가 보였다. 거짓말 안 보태고 내 주먹보다 작은 아이였다. “쟤는 왜 저렇게 작냐?”고 물어보자, 언니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 개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엄마가 몸이 약해서 젖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미는 본능적으로 가장 약한 두 마리를 빼고 나머지 네 마리에게만 젖을 먹이더란다. 결국 한 마리는 얼마 못 가 죽었고, 그 강아지는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랬구나, 하며 통통한 강아지를 안고 뒤돌아 나오는데, 자꾸 그 강아지가 눈에 밟혔다. 그렇게 뒀다가는 얼마 못 가 죽을 텐테…. 결국 고민 끝에 그 강아지를 데려와 키워보자고 결심했다. 우선 이 아이를 살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자 언니는 흔쾌히 강아지를 내주었다.

우선 공장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장에 데리고 갔다. 직원들도 모두 좋아했다. 제일 먼저 우리는 ‘토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토토를 향한 우리의 지극정성은 시작되었다.

우유, 이유식 사료 등 새끼 강아지에게 좋은 음식들을 수소문해 주고, 안아주고, 재워주고, 목욕시켜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토토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걷지도 못하고, 눈에 초점도 없이 웅크리고만 있던 아이가 멍멍 짖기도 하고, 공장 사람들을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점점 몰라볼 만큼 빠르게 커가기 시작했다.

박남철 작. <Walk 45-한낮2>

91×65cm, 목천에 수간채색, 아크릴릭

2011

 

이렇게 죽어갈 뻔한 아이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는 게 경이로웠다. 아무리 죽어가는 것도 이렇게 사랑과 정성을 주면 살릴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토토를 보면서 배우는 것도 참 많았다. 항상 한마음이라고 할까. 우리는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좀 싫은 소리를 한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거리감을 두는데 토토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어찌나 장난꾸러기인지 말썽을 피울 때마다 아무리 세게 야단을 쳐도, 금세 꼬리를 흔들며 다시 다가온다. 그런 한결같은 토토를 보며 내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토토만도 못하구나, 반성하게 될 때도 많았다.

한번은 안 좋은 일이 생겨 밤에 공장에 간 적이 있었다. 얌전히 자던 토토가 반갑다며 쫓아 나왔다. 그런데 나의 심각한 표정에 이내 얌전해지더니, 가만히 옆에 있는 게 아닌가. 꼭 자기도 고민하는 듯했다. 그 몇 개월을 함께했다고 주인의 마음까지도 느낀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런 토토가 얼마 전 임신을 했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많이 크기도 컸고, 아이까지 생긴 토토를 공장에서 키우는 게 어려울 것 같아 곧 개를 좋아하는 분께 입양을 시킬 예정이다.

“토토야, 네가 이제 엄마가 되다니, 감개무량이다. 아이 잘 키워. 그동안 너에게 많이 배웠어. 고마워.^^”

힘들 때면 너를 생각한다,

나의 첫 제자 상용아

박현성  34세. 김해능동초등학교 교사

2004년 7월 처음으로 교단에 섰을 때였다. 잠시 음악 전담 선생을 맡게 되어 5학년 아이들 노래를 가르치는데, 한 아이가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야 아이의 이름은 ‘김상용’이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안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너무 안타까워 상용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꾸준히 말을 걸어도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2학기 때 다른 반의 담임을 맡게 되면서 차츰 상용이도 잊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걸까. 다음 해 담임을 맡게 된 6학년 우리 반에서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용이를 발견한 것이다. 놀라움은 곧 반가움과 미안함으로 교차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용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자’는 목표를 다시금 세웠다.

하지만 이 방법 저 방법 시도해 봐도, 상용이는 여전했다. 왜 말을 안 하는 걸까?

한 선생님이 상용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나 먼저 교원합창단에 들어가 보라 권유했다.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합창인데도 순간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본 것이다. 상용이는 5년 이상 말 한마디 안 했으니,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 그 두려움을 해소시켜주면 되지 않을까. 다시 시작이었다.

나는 먼저 집에서는 어떤지 궁금해 부모님과 통화를 시도해봤다. 놀랍게도 집에서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부모님은 학교에서 상용이의 상태에 무척 충격을 받으셨다. 역시 두려움이 문제였다면, 학교를 집처럼 편한 곳으로 만들어주면 어떨까.

그러려면 친구가 중요했다. 우선 사교성 좋은 아이들과 상용이가 같은 조가 되도록 하여, 조원들끼리 친해질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고맙게도 다른 조원들 모두, 알아서 상용이를 열심히 챙겼지만, 상용이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다음 생각한 것이 수화였다. 반 아이들 모두에게 수화를 가르쳤더니, 아이들은 수화를 재밌어하면서 서로서로 자연스럽게 수화를 사용했다. 상용이도 수화를 통해 ‘예’나 ‘아니오’ 같은 간단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상용이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 밝은 표정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계속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난타였다. 난타에는 중간중간 후! 하! 하는 간단한 후렴이 들어가니, 그것은 상용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후렴을 많이 넣었건만 그래도 좀체 입을 열지 않았던 상용이가, 어느 날 멋지게 ‘하!’ 하고 후렴을 넣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감격이란!

박남철 작. <Walk 45-13>

53×53cm, 목천에 수간채색

2012

 

그리고 어느새 9월이 되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계속 고민하던 중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분명 상용이가 집에서는 말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시도한 것이 전화 통화였다. 처음 아주 간단한 통화를 성공한 후, 그때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상용이와 전화 데이트를 했고, 어느 정도 전화 통화가 익숙해지자, 이제는 학교에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도 상용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곧 중학생이 될 텐데, 영원히 말을 잃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다시 나를 추스르고 상용이의 자신감 키우는 방법을 연구했다. 여태껏 상용이는 수업 시간에 한 번도 책을 읽거나 발표를 한 적이 없다. 말이 없다 보니, 친구들도 없었고, 점점 자신감도 잃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말이 없이 행해지는 무성극. 상용이는 서툴지만 적절한 행동을 취함으로, 나와 친구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어렴풋이 상용이가 아직 말은 못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상용이를 위한 작은 행동들이 서서히 결실을 거둬갈 즈음, 불행히도 나는 늑막염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출장 간 것으로 숨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입원 소식을 알아내고 말았다. 수술을 받은 날, 저녁 6시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그날 우리 반 아이들 5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3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그때 남아 있던 아이 중 유일한 남자아이가 상용이었다. 고마움에 일일이 아이들 손을 잡아주는데, 내가 손을 잡자마자 상용이가 글썽이는 눈으로 어렵게 “선생님! 괜찮아요?” 묻는 것이었다.

이런 기적이 있을까? 상용이가 스스로 말을 하다니. 눈시울이 차올라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상용이는 알았을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의 관심, 선생님의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졸업식 날, 아이들 모두 졸업가를 부르던 그 순간 상용이 또한 입을 열어 함께 노래했다. 상용이가 말하기를 잃어버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길고 길었던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5년 동안 말을 안 했으니, 그렇겠거니 단정 짓고 그대로 두었다면 지금쯤 상용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도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상용이가 나를 믿고 나를 걱정해 처음 입을 열었던 순간을.

산다는 건 죽는 날까지

씨앗을 심는 것

최복인  42세.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6년 전, 도시에 살다 시골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만난 친한 친구는 바로 건너에 사시는 할머니. 올해 아흔다섯이지만 우리 밭 한 켠에 콩 농사도 지으신다.

할머니는 시골로 이사까지 와 농사를 지어 보려는 젊은이가 신기한지 종종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신다. 말동무하러 오시기도 하고, 밭이 어떻게 되어가나 보러 오시기도 하고, 커피 한잔 하러 오시기도 하고, 가끔은 일을 도와주려고 오시기도 한다.

“이쯤엔 이런 씨를 넣을 때지.” “옛날엔 이렇게 농사했어.” “이번엔 이 농사 해볼까?”

이런저런 도움도 주고 말벗이 되어주시니 초보 농사꾼인 나로서는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늘 도움만 받다가 며칠 전엔 내가 가지고 있던 씨앗을 나눠드리게 되었다.

“겨우내 두었던 호박씨, 고추씨가 다 부실해. 호박씨는 쥐가 갉아 먹고 고추씨는 누렇게 떠서 심어봤는데 싹이 하나도 나지 않아. 혹시 씨 남은 거 있어?”

어머나, 나도 농부라고 나에게서 씨앗을 다 찾으시다니! 나는 신이 나서 보관하고 있던 호박씨, 고추씨, 오이씨를 드렸다.

“아이고, 바로 여기부터 올 걸 그랬구나. 그럼 진즉에 심었을 텐데.” 할머니가 몹시 좋아하며 씨를 받아 가셨다. 가시며, “농부는 죽을 때도 씨는 베고 죽는 건데 아무래도 내가 죽을 때가 됐는가, 원. 이제껏 한 번도 씨앗 관리를 이렇게 못하질 않았는데…” 하신다.

할머니께 씨앗을 나눠드리고 나니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을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씨앗을 선물로 받으면 참 기분이 좋았는데, 씨앗을 나누는 기쁨도 참 크구나 싶었다. 지금껏 내가 받은 씨앗들을 다 떠올려 봤다.

내가 처음 받은 씨앗 선물은 봉화에 사는 명지네서 받은 뚱딴지(돼지감자). 그 후 친구네 집에서 받은 고추, 야콘, 오이, 대파, 검은 찰옥수수, 남편 친구 어머님께 받은 찰옥수수, 친정에서 가져온 메주콩, 검은콩, 들깨, 토란, 삼백초, 호박, 부추, 마늘, 쪽파, 깨, 팥… 등등 쓰고 보니 참 많다. 씨앗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가. 씨앗 안에 한 해의 희망이 다 들어 있지 않았나.

박남철 작. <Walk 45-2>

112×162cm, 목천에 수간채색

2012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은 땅에 풀을 매고 씨앗을 심고 나면 오며 가며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싹을 보게 되면, 그날은 마구마구 가슴이 뛴다. ‘아, 살아 있었구나. 그래, 살아 있었어!’ 하며 씨앗이 살아 있는 생명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할머니 역시 한 줌 씨앗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너무나 좋아하셨다. 할머니에게 씨앗은 바로 그 ‘생명’이 아니었을까?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를 먹고, 이웃과 나누고, 팔아서 자식을 키우고 생활을 하게 하니 씨앗이야말로 할머니에겐 ‘참 생명’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늙으니 기력이 떨어지고 예전만큼 잘할 수는 없어도 자꾸만 일이 하고 싶어진다고 하신다. 그렇게 콩을 심고 팥을 심으며 말씀하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거 심으면 먹을 수나 있을는지. 그전에 죽을지 몰라도 사는 동안은 심어야지. 농사짓는 사람은 죽는 날도 씨를 베고 죽는다고 하니….”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다 보면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 두고 함께 지내고 계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하지만 또 아흔다섯이란 연세이심에도 하루하루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성실하게 사신다. 그런 할머니를 보면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산다는 건 아마도 죽는 날까지 씨앗을 심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