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처럼 다가와 필연이 되어버린 ‘그대’와의 운명적인 스토리

욕심 비울 때 마주쳐주시는 그대, 산삼

박형중 56세. 산삼감정협회 운영.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그날도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평소 산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전국의 산을 다니며 난을 캐곤 했는데, 그날 우연히 산삼을 발견한 것이다! 그 산삼(蔘)은 가족삼이라 하여 엄마삼이 서너 뿌리 되었고 나머지는 자삼 뿌리, 즉 자식 뿌리가 총 열아홉 뿌리였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뛸 듯이 기뻤다.

2년 뒤 내 나이 33살에 본격적으로 심마니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갑갑함을 느꼈고, 무엇보다 깊은 산 속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큰돈은 못 벌어도 밥은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직장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쉽게 뛰어들었다가 몇 달을 못 가서 대부분 그만둔다는 심마니란 직업. 나는 산삼에 인생을 걸고, 동물적인 감각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전국의 산은 모조리 다니며, 들고 간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산에서 나오지 않은 일도 허다했다.

하루, 이삼 일은 기본이고, 일주일 혹은 한 달이 넘게, 비닐 한 장으로 나무를 기둥 삼아 텐트를 만들어 지냈다. 수목의 종류, 산의 고도, 주위의 식도, 지형, 바람의 흐름 등이 모두 내겐 공부거리였다. 산삼은 보통 4~11월까지 발견되지만 한겨울에도 부지런히 삼자리를 봐두었다. 겨울은 나뭇잎이 없고 산이 보여 삼자리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7~8년을 꾸준히 하자 어느 정도 감각을 익히게 되었다. 산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발길이 산삼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런 노력 덕분에 1년에 200~300뿌리를 캘 수 있게 되었고, 2010년부터는 제대로 된 산삼을 보급하고, 무료 감정을 해주기 위해 산삼감정협회도 운영하게 되었다.

산삼은 내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특히 위암 말기였던 누나가 산삼을 먹고 회복했을 때의 그 보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죽음을 준비하던 누이에게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으로 건네주었던 산삼. 정말 기적처럼 누이는 회복했다. 이런 행복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소아암 환자와의 인연이다. 8년 전 일이다. 아픈 아들을 위해 산삼을 사고 싶다는 부모의 연락을 받고 병실로 찾아갔는데, 가격이 맞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소아암에 걸린 그 아이, 동환이를 보게 되었다. 항암 치료를 받느라 머리를 박박 밀어 새파란 그 아이의 눈이 내 가슴을 쳤다. 그런 아이를 두고 가격 흥정을 하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 그냥 산삼을 전해주고 나왔다. 그 이후 산삼의 10~20%는 저소득층의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전달하고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중 한 사람이라도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동환이가 나에게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작년엔 같은 동네에 살던 백혈병을 앓았던 중학생 아이가 어느덧 취직해서 첫 월급을 탔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와 밥을 사겠다고 했을 땐 정말 뭉클했다.

산삼은 곧 생명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어린 산삼을 캐어오는 사람들에겐 혼을 낸다. 10년이 지나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귀중한 산삼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그 기회를 빼앗긴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마니로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삼을 다룰 땐 욕심 부리지 말고 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심마니들은 민가에 내려와서 잠을 자게 됐을 때, 그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미련 없이 캔 산삼을 조용히 두고 나오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행여나 받는 사람이 미안해할까 봐 그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도록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도 항상 기도한다. ‘좋은 삼을 보고, 좋은 데 쓰게 해달라고….’ 심마니의 심도 마음 심(心)자를 뜻하듯, 욕심을 갖고 하면 삼을 캐지 못한다. 실제로 손님한테 주문이 들어와서 빨리 캐야겠다는 마음으로 하면 산삼을 캐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말 희한하게도 마음을 비웠을 때 산삼이 잘 캐진다. 또한 진짜로 필요한 사람한테 주고 싶어 산에 들어갔을 때도 잘 보인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하늘은 언제나 먹고살 만큼 내어주었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산삼은 내 인생을 변화시켰다. 아픈 사람에게는 선뜻 내어줄 수 있는 마음, 상대를 배려하는 순수한 마음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이왈종 작.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 48×33cm. 한지 부조 위에 혼합. 2007.

나랑 닮았다는 그 사람, 쪼재 형

이연호 22세. 군인. 부산시 연제구 연산5동

작년 10월이었다. 나는 9월 초 입대해서 5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3주 동안 내가 배치받은 자대와 관련된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다. 나와 동기들은 자대 사람들이 온다는 소식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첫 대면에서 동기들은 긴장한 나머지 얼어 있었다. 순간 나는 내가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생각에 질문이란 질문은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조교들과 교관님 눈에 띄었는데, 그때 한 조교가 날 지목하면서 말했다.

“저 훈련병 자세히 봐봐. 전역한 쪼재랑 똑같이 생겼어!!”

그 말에 조교들과 교관은 날 한 번 훑어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고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하게 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조재민!! ‘쪼재’는 그의 별명인데, 나보다 두 살 많고 집도 같은 부산이라 했다.

그때 이후부터 조교들은 모든 질문이란 질문은 나에게 다 하였다. 그리고 훈련 기간 내내 이상한 장난도 많이 쳤다. 나는 ‘쪼재’라는 그 사람이 과거에 안 좋게 해서 조교들이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줄 알고 불안해졌다. 그래서 한날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질문을 했다. 그때 교관이었던 소대장님의 대답은 이랬다.

“나쁜 사람이었다면 얘기 자체를 꺼내지도 않겠지. 다들 그 사람을 좋아했고 또 그리워하니깐 너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다.”

원래 나는 흔한 인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이렇게 똑같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건 생전 처음이었다. 조금 다른 거라면,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피부가 더 안 좋아서, 내 얼굴에 귤껍질을 씌웠다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내가 입이 좀 두툼한 편인데, 그 사람도 똑같다고 했다. 그 만화 캐릭터 같은 외모로, 언제나 웃음 메이커였고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한다.

무사히 3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자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자대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관심이 나에게 쏠렸다. 다들 ‘쪼재’가 재입대했다, 재림했다 했고, 나를 쪼재 또는 재민이 형이라 불렀다.

“쪼재랑 같이 다시 축구하는 기분이 들어서 즐거웠다”는 선임도 있었고, 전역자들은 “재민이 형 잘 있어. 나 먼저 집에 갈게. 그리고 난 형처럼 재입대하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라는 말을 하며 떠나곤 했다. 그리고 내가 군 생활 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선임은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딱 나까지 봤어. 그 재민이 형!”

선임들과 짬밥 차이가 엄청 나는데도 이런 관심을 받으니 솔직히 처음엔 좋았다. 그렇지만 갈수록, “재민이 형은 뭘 해도 잘했는데 넌 왜 이거밖에 못해?” 식으로 비교당하는 일들이 생기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물론 쪼재 형을 못 보았던 한 선임의 “예전에 조재민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난 그 사람하고 연호를 왜 그렇게 비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연호가 훨 귀여운데”라는 말에 조금 위로가 되기는 했지만.

한번은 간담회 때, 고민거리를 말해보라고 하자, 그 사람과 비교당하는 게 부담스럽다 했더니, 최고참 선임이 한마디 했다.

“쪼재는 내 조교였고 항상 잘했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 정도로 잘했었지. 근데 너랑은 다를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비교당하는 게 부담스러웠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암튼 그날 이후로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내 본명 이연호를 찾은 거 같았다. 그리고 이제 ‘쪼재’를 기억하던 사람들도 올해 9월 중순이면 거의 집으로 가버리고 만다. 좀 아쉬울 거 같기도 하다.

어떤 우울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개그맨처럼 분위기를 띄워주었다는 쪼재 형, 사람들을 잘 챙기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던 쪼재 형, 사람들 기억 속에 너무나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는 쪼재 형. 이제 군 생활을 한 지도 일년이 다 되어간다. 나도 쪼재 형처럼 선임이나 후임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휴가나 전역 후에 길을 걷다 나랑 비슷한 사람과 마주치면 무조건 먼저 말을 걸 생각이다. 혹시 그 멋진 쪼재 형일지 모르니까.

“재민이 형, 저랑 같은 동네 산다고 들었어요. 우연이라도 한 번쯤 마주쳤으면 좋겠습니다.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덕분에 군 생활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왈종 작.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 41×32cm. 장지 위에 혼합. 2011.

두 스님 모두 성불하시기를

이광식 61세. <천문학 콘서트> 저자. 경기도 강화군 내가면

아내가 저녁상에 보기에도 먹음직한 튀각을 올렸다. 가끔씩 대하는 튀각이지만 튀각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20대 초반 젊은 시절, 힘들고 팍팍한 시간에 부닥뜨릴 때마다 나는 늘 버릇처럼 배낭을 꾸려 무작정 집을 나서곤 했다. 텐트와 담요, 석유 버너와 약간의 먹을거리를 챙겨 담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배낭의 무게는 내 체력에 부칠 정도였다.

어느 산이었던가? 벌써 여러 날을 산행한 끝이라 체력은 거의 바닥이 났고, 먹을거리도 동이 나 부실하게 점심을 때우고 허적허적 산에서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오후 해는 서산마루로 달리듯이 기울어가고 피로와 허기는 몰려오는데, 조그만 산사의 마당에서 한 스님이 튀각을 튀기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젊은 스님이 연신 튀각을 튀겨내어 옆의 대소쿠리에다 쏟아붓는다. 배고픈 참이라 여간 먹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입을 떼었다.

“스님, 시장해서 그러는데 튀각 좀 주실 수 없을까요?” “스님들 저녁 공양에 올릴 거라 안 돼요.”

더 이상 말을 붙일 염이 나질 않아 주린 배를 달래며 그냥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 스님들 공양이 중요하지 지나는 나그네 사정까지 살필 여유가 있을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준비성 없는 자신을 탓할 따름이었다.

튀각 스님을 생각하다 보면 늘 습관처럼 떠오르는 또 다른 한 스님이 있다. 내 나이 일곱 여덟 살 때쯤, 한 스님과 마을 배꼽마당(배꼽처럼 볼록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에서 딱 마주쳤다. 도시 근교의 시골 마을이었고, 여름 해가 쨍쨍 내리쬐던 한낮이었다. 나는 집에서 좀 떨어진 마을 우물에서 주전자에 물을 길어오던 중이었고, 스님은 등에 바랑을 맨 것으로 보아 나중에 생각해보니 탁발승이었던 듯했다. 스님이 나를 보더니,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얻어 마실 수 없겠냐고 물었다. 힘들게 길어오는 물을 낯선 사람이 먼저 마시자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은 말이 이랬다.

“우리 집은 교회 다니는데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 이런 가증스런 거짓말을 둘러대다니. 나는 어릴 때부터 사악했는가 보다. 스님은 허허 웃더니 발길을 돌렸다.

나이가 들면서, 살아가면서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주전자 뚜껑에 물 좀 따라주면 그만이었을 것을. 여름 땡볕에 탁발을 하러 하루 종일 걸어 다녔을 그 스님이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어린 내게 물 좀 달라고 부탁했을까. 50년도 더 넘는 세월 저쪽의 일이니, 지금은 그 스님도 노스님이 되셨겠지. 물론 맹랑한 거짓말로 물을 거절한 아이와 그 일도 잊어버렸을 거고. 하지만 물 보시가 가장 큰 공덕이라는데, 그것을 매몰차게 거절해버렸으니 나는 극락왕생하기는 애당초 글러버린 것 같다.

튀각을 보면 튀각 스님이 생각나고, 그러면 또 목마른 스님 생각이 난다. 튀각 스님이 내게 튀각을 주지 않은 것은 그 옛날 목마른 스님에게 한 모금 물을 거절한 이 무명 중생에게 뉘우침과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스님 모두 큰스님이 되시어 성불하소서. 합장.

이왈종 작. <자화상> 60×72cm. 장지 위에 혼합.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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