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면, 문달님 부부, 정글 속 원주민 찾아 떠나는 27번째 여행

경북 상주에 사는 오정면(77), 문달님(75) 부부는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의 정글 속 원주민들을 찾아 떠난다. 농한기 3개월여 동안, 마을마다 다니며 유기농법을 가르치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치료해주기 위해서다. 26년째 이어지는 변함없는 사랑에 원주민들은 이 부부를 ‘시가르바루(새 정신적 지도자)’, ‘아이윤싱가(사랑의 어머니)’라 부른다. 정글 속 원주민들과 만나면서 삶의 또 다른 길을 보았다고 말하는 노부부. 올겨울, 27번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오정면, 문달님 부부를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매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노부부의 여행 준비는 시작된다. 미리 준비해놔야 정작 떠날 때 빼놓고 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로 다니는 곳은, 보르네오 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보르네오 섬 일대는 정글과 밀림이 울창한 천혜의 원시림으로, 이들 부부가 주로 가는 마을은 말레이시아령과 인도네시아령의 경계 지점에 분포되어 있다. 깊은 산속엔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 마을이 있다. 두세 시간 때로는 7~8시간을 걷고, 거센 급류가 흐르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 다음 마을이 나오기도 한다. 워낙 방문해야 할 마을이 많기에 이들이 한 마을에 머무는 것은 3일 정도.

노부부가 이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87년이었다. 오정면 선생은 그해 봄 필리핀에서 열린 URM(Urban Rural Mission, 도시농촌선교) 국제 모임에, 한국 농민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건 원주민들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무모한 벌목 작업으로 산림은 황폐화돼가고, 가난과 질병, 무분별한 문명의 피해에 당하고만 있었던 원주민들. 게다가 무계획적인 농사법으로 겪어야 하는 폐단들도 컸다.

나 역시 평범한 농사꾼이지만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사명감을 느꼈고, 이들 부부는 그해 추수를 끝내자마자 무작정 원주민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문달님 여사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하나 버리지 않는다. 어린 콩잎은 장아찌로 만들고, 가을이면 감 껍질을 얇게 벗겨 햇볕에 말려놓는다. 그러면 한겨울 영양 간식으로 그만이다. 대개는 버려지는 바스락거리는 양파의 붉은 겉껍질도 물에 넣어 끓여 마신다. 그러면 각종 성인병에 특효약이기도 하다.

처음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 어떠셨는지요?  

보르네오 섬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광대한 자연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는 원주민들의 삶은 온전히 자연 순응적이었죠. 그런데 이곳에도 문명화 바람이 불면서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가난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실제로 마을의 거의 50퍼센트의 아이들이 영양실조 상태예요. 그런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상당수의 마을을 채우고 있었어요. 그게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시금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마을에 가면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우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줘요. 주로 맨발로 다니니까, 피부병도 많고 벌레에 물리거나 뾰족한 것에 찔린 상처가 심각한 질환으로 발전하기도 하거든요. 연고를 발라주거나 상처 소독, 간단한 약 처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해줍니다.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도시의 병원에 데려가고요. 그리고 유기농법을 전해요. 땅을 살리면서 농사짓는 법, 우리가 평생 농사지으며 배운 것을 알려주는 거지요. 마을 청년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유기농법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약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도 해요. 희망이 없으니까 어린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이가 뻘겋게 되도록 ‘쉘’이라는 마약을 씹어댑니다. 그렇게 중독되면 이빨이 모두 빠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변화가 있나요?

변화된 마을이 참 많아요. 보통 한 마을을 3년에 걸쳐 3번을 가요. 마약이나, 농약을 치는 마을의 경우, 계속해서 강조하니까 세 번째 가면 거의 안 하더라고요. 정부에서 주는 유기농 인증서를 받아놓은 마을도 있고요. 자생력이 많이 생기지요. 대한민국 시골 마을의 그저 가난한 농부인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구나, 감동을 느끼는 순간도 참 많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부족이 이반족이었는데, 참 다정다감합니다. 가까이 와서 자기들 살길도 가르쳐달라고 하고 어째 살아야 하는가 묻고. 점점 소문이 나면서 멀리서 찾아오는 부족도 있고요. 같은 마을을 두 번 세 번 방문할 때쯤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환영하고 그날은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지요.(웃음)

특히 오정면 선생 부부가 힘을 기울이는 일 중 하나는, 그곳에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시키는 것이다. 특히 언청이라 불리는 구순구개열 아이들, 심장병에 걸린 아이들을 10여 명도 넘게 수술을 시켰다. 비행기 값과 수술비 등 일체 모든 경비를 노부부가 내야 하기에, 눈에 밟히는 아이들은 많지만 매년 한 명씩밖에 하지 못한다고 한다.

빈민 지역일수록 구순구개열 환자가 많은데,
원주민 마을에는 유독 그런 아이들이 많다.
어린이 손님이 병을 고치러 한국에 오면
문달님 여사는 더욱 분주해진다.
뭐를 잘 먹는지, 어떤 것을 먹여야
살을 찌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온 아이들이거나 기형으로 마음의 상처가
깊이 박힌 아이들이기에 더 신경을 쓴다

입천장이 뻥 뚫린 기형으로 태어나 괴물이라 놀림받던 아이들이 수술을 받아 말도 하고 밝은 얼굴을 찾게 되었을 때, ‘예전하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앞으로 두 분처럼 남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받을 때, 간혹 우리말로 서툴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쓴 편지를 받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느새 이들 부부는 현지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오정면, 문달님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시가르바루(새 정신적 지도자), 아이윤싱가(사랑의 어머니)라는 애칭으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유명한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원주민 어린이들도 종종 만나곤 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면요?  

캐서린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원주민 마을에서는 드물게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인데, 심장병 말기 선고를 받고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을 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막 뛰어다니는데,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5,100만 원이라는 엄청난 수술비가 나왔지만, 그 돈도 결국 해결이 되더라고요. 몇 년 지나서 다시 캐서린을 만났는데 중학교 성적표를 보여줍디다. 전체 학년 중에서 8등이라고. “나는 항상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이다음에 두 분 은혜에 보답해야 하니까요” 하는데 뭉클했지요. 지금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해요. 그걸 계기로 많은 것을 느꼈어요. 정말 돈이 전부가 아니구나, 뜻이 있으니까 길이 있구나, 간절함과 사랑만 있으면 다 열리는구나.

우렁이 농법으로 짓는 논.
이들 부부는 거름조차도 가축의 배설물이나 인분은 쓰지 않는다. 항생제 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사용하는 것이 깻묵과 발효시킨 음식물 찌꺼기. 매년 먹을거리를 키워내는 땅을 소중히 해야 한다 여긴다.

보람도 있으시겠지만, 힘들 때도 참 많을 것 같아요.

15년 전쯤 그곳 풍토병인 댕기 피버에 걸려서 엄청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고열에, 등과 눈에 심한 통증이 오더라고요. 이렇게 죽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힘들게 도시의 보건소에 찾아갔어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를 신문에서 봤다며, 맨 앞줄에 옮겨 치료를 받게 해줬지요. 사람들이 같이 걱정해주고.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같은 거요. 하지만 그날 이후 더욱 겸손해져야 함을 느꼈지요.

그 먼 곳까지 한결같이 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사람들의 또 와달라는 간곡한 부탁 때문이지요. 우리 부부를 1년 내내 기다린대요. 그리고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계속 여행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많이 돌았지만 아직 3분의 1도 못 갔어요. 나이는 들어가는데,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그래도  도와달라고 할 데라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글 속 사람들은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삽니다.

사실 원주민들을 돕기 이전에도 이들 부부에게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정면씨와 문달님씨는 같은 신학대학에 다니며 만났다 한다. “나보다는 남을 더 사랑하면서 살자”는 가치관과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 신기할 만큼 통했던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1960년 오정면 선생의 고향 경북 상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야학 운영, 농민 단체 활동 등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일상생활처럼 해왔다. 마을마다 만연해 있던 동네 술집을 몰아내고, 도박을 없애고, 지붕을 개량하는 일들에도 늘 앞장섰다. 1남 5녀를 키우면서 물질적으로는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원주민들과 나누는 일에 함께할 만큼 잘 성장해주었다.

2004년, 노부부의 이야기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 이후로 이들 부부의 여행길은 ‘함께하는 사랑’이 되었다. 익명으로 성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매년 기부금 봉투를 선뜻 내놓는 딸과 사위들, 아이들의 수술을 해주는 병원들, 여행길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함께하는 세상은 언제나 따듯했다.

세상에 따듯한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참 감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삭막하다 해도 안 그렇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속에 늘 사랑을 품고 살아야겠구나,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하는 걸 느껴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우리 지론이 ‘미리 걱정할 것 없다,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맡기면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더라고요.

부부의 도움을 받은 원주민들은 잊지 않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온다. 부부는 여행 중 들은 말들을 그때그때 메모하거나 물어보는 식으로 원주민 언어를 하나씩 익혀왔다. 단어장도 만들어서 자꾸 쓰고 외우면서 공부를 한다. 2005년에는 그동안의 여행 기록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동안 원주민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요?  

사람 사는 모습이 참 각양각색입니다. 그동안 많은 원주민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삶이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고, 그 마음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가 만난 원주민들도 비록 가난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행복이, 그들이 경험한 기쁨이, 우리가 아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더라고요. 사람이 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도 하게 됐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지금 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것도 좋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에,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우리 젊은이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두 처자에게’ ‘캐서린을 수술해준 세종병원 관계자 여러분께’….   부부는 시간이 되면 책상에 앉아 고마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한번은 너무 고마워 한 해 농사지은 쌀을 돌리기도 했다. 해가 갈수록 감사할 사람이 많아 일일이 마음을 전하는 것조차 버거워진다며 활짝 웃는다. 그만큼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증거 아니냐며. 모든 인터뷰는 남편에게 맡기고, 여성 농민들이 모여 작업하는 날이라며 자리를 비웠던 문달님 할머니가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여쭙자 “아유, 늙어서 뭘 알겠나”며 극구 사양을 했다. 그리고 짧게 남기신 한마디가 긴 여운을 남겼다. “그저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좀 더 남에게 덕을 끼치고 편하게 해주고, 저 사람보다 낮게, 다른 사람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거지.” 앞으로도 이 부부는 봄, 여름, 가을 차곡차곡 준비하였다가 눈발이 날릴 때면 어김없이 그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원주민들은 아이처럼 순박한 웃음과 함성으로 그들을 반길 것이다.

“시가르바루!” “아이윤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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