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가 말을 걸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강하고, 단아하지만 우아한 매력을 지닌 꽃이 바로 우리의 야생화다. 그렇게 우리 꽃에 매료당한 지 30여 년, 그동안 산과 들을 헤매며 숨 막히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이른 봄, 눈 속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이 나올 무렵이면 어느덧 내 발길은 산과 들로 향했다. 꽃에는 제 스스로 열을 발산하면서 언 땅을 녹이는 위대함이 있다.
바로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봄은 찾아온다.   사진, 글 김정명

두메자운 Oxytropis anertii Nakai 고산준령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에는 산속에서 자란다 하여 ‘두메’, 구름 속에서 핀다 하여 ‘구름’이라는 단어가 붙은 꽃들이 많다. 이들 식물들은 대부분 고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서 강한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바람의 저항을 줄이는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줄기에 잎이 거의 없고, 잎 모양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래야 바람을 통과시키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줄기 역시 바람의 저항에 견딜 수 있도록 가늘고 길다.

1986년 어느 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산에 올라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아주 작고 앙증맞은 흰 꽃을 보게 되었다. 너무 예뻐서 꽃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작은 꽃들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향기가 진한 법인데, 그걸 전혀 몰랐던 것. 그 꽃은 바로 ‘은방울꽃’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꽃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야생화 이름을 알기 위해 일일이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외우고 꽃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꽃에 대해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자료를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우리 꽃들이 너무 많았다.

처음 산에 가면 야생화가 보이지 않는다. 힘들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귀가 트이고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 후 하늘과 햇빛과 나뭇잎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발밑의 야생화가 보인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꽃의 순수한 자태를 포착할 수 없다. 동시에 조물주가 빛과 바람을 허락해줄 때, 그때 비로소 꽃이 말을 걸어온다. 이제 나를 찍으라고.

보라색 동강할미꽃 Pulsatilla tongkangensis Y. Lee 할미꽃은 어쩐지 지친 모습으로 느껴진다. 해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꽃을 피우기 때문일까? 그러나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고개 든 할미꽃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동강 주변에서 자라는 동강할미꽃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강인함. 이 꽃은 필자가 정선 동강에서 최초로 발견하여 사진으로 보고한 우리나라 미기록 식물종 중의 하나로 꽃색이 분홍 또는 자주색과 흰색이고, 꽃받침이 뒤로 완전히 젖혀지지 않는다.

노랑제비꽃 Viola xanthopetala Nakai
제비꽃의 잎은 가늘고 너비가 좁으며,
잎 아래쪽 잎자루 부분에서 갑자기 좁아진다.
땅속줄기는 땅속을 옆으로 기면서 뻗어나간다.
잎은 뿌리에 모여서 돋아나고,
꽃에는 짧은 꽃받침이 있다. 이른 봄,
어떻게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직접 온도계를 가지고 다니며 외부 온도와
꽃잎 속의 온도를 재보았다. 외부 온도는 영하 1, 2도
하지만 꽃술 속의 온도는 영상 11도였다.
‘꽃 밖은 아직 겨울이지만
꽃 안은 이미 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메 양귀비 Papaver radicatum Rott.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운 야생화.
가련한 꽃이 아름답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성급하게 얼굴을 내밀다가 추위의 기습으로
시린 이슬과 얼음 속에 갇히게 된 새싹들.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표정들이며,
오랜 기다림과 깊은 관찰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짧은 만남이다.
강렬한 햇빛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거두어 가기 전,
꽃들과 새싹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싱그럽고 아름답다.

노랑할미꽃 Pulsatilla cernua Spreng. var. koreana
할미꽃은 보통 자주색 꽃인데 반해 북한산의 노랑할미꽃은 겉은 연한 노란색, 안쪽은 연한 주황색 꽃이 핀다.
온몸에 털이 많고 꽃은 아래를 향하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할미꽃 종류에서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니고 꽃받침이다.
꽃잎은 퇴화되어 없어졌고, 꽃받침 속에 수많은 수술과 붉은 암술이 들어 있다.
안타깝게도 다 멸종됐는지 이제는 볼 수가 없어졌다.

 

우리나라 야생화가 각광받는 이유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다. 겨울엔 영하 25도, 여름엔 영상 25도의 환경을 넘나들며 살아낸다. 전 세계적으로 50도나 되는 큰 온도 차를 견디며 자라는 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이들은 봄이 오기도 전에 새싹이나 꽃봉오리의 체온으로 언 땅과 눈을 녹일 만큼 많은 열을 내뿜는다. 새싹이나 꽃봉오리 주변의 눈이 둥그렇게 녹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언 땅을 뚫고 눈을 녹이는 어린 식물들의 생명력은 신비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바람과 물과 흙과 빛, 우주의 힘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 창조의 최전선 현장에서 야생화는 말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봄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다 가져가십시오.”

* 야생화 보호를 위해 촬영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호범꼬리 Bistorta ochotensis Komarov
백두산 고산지대는 식물이
양분을 생산할 수 있는 기간은
짧은 반면에 추운 기간은 아주 길다.
호범꼬리는 오랫동안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땅속줄기에 많은 양분을 저장하여
어려울 때를 대비하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땅속줄기가 굵게 발달했다.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7월에서 8월에 걸쳐
엷은 분홍색 꽃이 줄기 끝에서 핀다.

야생화 전문 사진가로 불리는 김정명 작가는 1946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5살 때 카메라에 빠진 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우리의 산과 들을 다니며 들꽃을 찍어왔습니다. 4,500종으로 추산되는 국내 야생화 가운데 1,800종 70만 장의 사진을 찍었으며, 특히 98년 동강할미꽃을 처음 찍어 세계 유일의 특산종으로 등록시키는 등 이름 없는 들꽃들을 세상에 알려 왔습니다. 야생화의 생태적 특성을 모두 섭렵한 진정한 야생화 사진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한국의 야생화> <꽃의 신비> 등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