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버지’… 가슴 깊이 불러봅니다.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우리 시대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김충근 51세. 농부.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박수근 작 <소와 유동>

Oil on Canvas. 116.8×72.3cm. 1962.

아버지! 그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아버지는 어린 저를 무릎에 앉혀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도 매로 다스리는 엄마와 달리 그저 마음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말과 소를 끌고 다니며 운송업을 하셨던 아버지.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때, 말은 병에 걸려 죽고, 소는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집안은 삶의 터전을 잃었지요. 그렇게 집안이 힘들 때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삼 일 내내 당신의 주검 앞에 울부짖던 철모르는 아이를,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때론 원망도 했지만 아버지가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너무나 컸습니다.

고2 때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비행 청소년처럼 방황했고, 그땐 누구도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습니다. 단지 아버지만이 나에게 위로였습니다.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부모와 어머니도 미웠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나는 진정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가세가 힘들어졌을 때, 저를 가슴에 꼭 안고 흘려주었던 아버지의 눈물이 아니었던들 저는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부모와 입양해서 잘 키우고자 했던 어머니의 또 다른 사랑을 모르고 세상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어리석게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하던 저를 아버지가 살려주신 겁니다. 그 후 열심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힘을 냈습니다.

지금 제겐 다섯 아이가 있습니다. 세 아이는 배로 낳았지만 셋째 현지와 막둥이 승민이는 가슴으로 낳았습니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선지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 유독 마음 아파하던 아내의 제안으로 입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보고 대단하다 합니다. 하지만 우린 부끄럽습니다. 그 아이들로부터 받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차이가 있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다섯 아이 중 어떤 아이라도 없으면 못 견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다음에 커서 친부모를 찾지 않겠느냐? 걱정스레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그들의 뿌리를 찾아줄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들도 소중하니까요.

나는 농사꾼입니다. 유기농을 꿈꾸며 귀농했지만 딱히 내놓을 만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 농사만큼은 잘하고 싶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신의 사랑을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삶이 힘들어져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아버지’ 하면서 나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힘들 때 언제나 위로가 되어주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도 들려드리지 못했었네요. 사랑합니다….”

아빠의 흰머리가 말을 걸었습니다

강현민 25세. 대학생. 경북 김천시 지좌동

박수근 작 <길>

Oil on Hardboard. 31×18cm. 1964.

저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무서워하면서도 따랐고 따르면서도 무서워했습니다. 그렇게 아빠는 제게 친구 같기도 하면서 먼 사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칭찬도 잘 안 해주고, 잔소리만 늘어놓고 감정 표현에 서투셨습니다.

컴퓨터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항상 듣는 소리는 부정적인 말이었습니다. 고맙다, 잘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아빠만이 옳은 양 저를 이해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빠가 싫었고, 차츰차츰 대화를 안 하게 되더니, 꼭 필요할 때도 얼굴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된 것을 봤습니다. 머리카락을 보고 나니, 얼굴을 보게 되고, 몸 전체를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너무나 늙으신 아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저렇게 늙으셨는지….

마치 아빠의 흰머리가 저에게 말을 거는 듯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아빠와 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뭐 때문에 아빠를 봐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고 진짜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었나. 그 무렵 마음수련을 하고 있던 저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에 대해 쌓아놓은 부정적인 마음들이 어느새 벽으로 쌓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빠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수련을 시작한 이후 지금은 아빠에 대한 부정적 마음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나간 만큼 아빠를 대할 때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태도와 행동 또한 많이 바뀌며 그냥 아빠가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08년 입대를 앞둘 무렵 가정불화가 폭발하여 아빠가 정말로 힘들어할 때가 있었습니다. 회사, 술, 회사, 술…. 그때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답답했고, 싫었습니다.

“아빠 잘못이잖아” “엄마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하며 아빠에게 상처가 되는 말만 해댔습니다. 설령 아무리 아빠가 잘못했다 한들,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그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아빠, 그때는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동안 부정적으로 쌓아놓은 제 마음 때문에 진실로 아빠를 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가짜마음들에 속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아빠와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빠,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좀 내주세요. 제가 십 년은 젊어 보이게 염색해 드릴게요.”

철없던 막내딸의 고백

최윤아 32세. 직장인.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 어느덧 막내딸이 32살이나 되었네요. 하필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는 나이 사십에 막내딸을 낳으셨어요. 새벽 5시면 엄마랑 같이 꽃 배달을 다니시며 대가족을 먹여 살리시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셨던 아버지! 벌써 칠십이 넘으셨네요.

아들만 둘이 있던 집안에 뒤늦게 막내딸을 얻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쏟아주셨죠. 엄마 말로는 어릴 때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어주셨다지요. 돌아보면 자라면서 갖고 싶다는 것, 하고 싶다는 걸, 안 해주신 적이 없었어요. 형편도 어려웠을 때 어떻게 그것들을 다 마련해주셨을까요.

휴일도 없이 일하셨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안 하셨어요. 정말 아프실 때 빼고는, 하루도 늦잠을 주무신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셔서 다시 재기하신 아버지를 뵈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 철이 없었죠. 아빠를 보며 늘 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선뜻 제 주장도 하지 못하고 꾹꾹 참는 일도 많았지요. 그리고 지나치게 사랑받다 보니, 제 내면에서는 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졌잖아요. 성인이 되어,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때였어요. 갑자기 저에게 우울증 증세가 찾아온 거예요.

난 잘해야 한다, 내 뜻보단 부모님에게 맞춰드려야 한다, 거기에 왠지 모를 열등감, 중압감, 압박감들…. 그렇게 제 안에 차곡차곡 눌러놓고 살았던 것들이 터져버린 거예요. 항상 보호만 받고 살았기에, 의지력도 약하고 독립적으로 크지 못했던 저는 이 모든 상황에서도 아빠를 원망했으니, 얼마나 철모르는 딸인가요.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저는 부랴부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듣고 부모님께서 찾아오셨죠. 하지만 저는 부모님을 볼 자신이 없었어요. 6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오신 부모님께, 저는 그냥 가라고만 했죠. 혹여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나가시긴 했지만 병실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엄마 아빠….

몇 년이 지나고, 다행히 지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사이 마음수련을 하게 되어, 오랜 세월 쌓아왔던 마음을 버린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 그때는 아버지도 참 당황스러우셨지요? 힘들어하는 딸을 보면서 또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요…. 그때만 해도 저는 아버지 마음은 어떨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못난 딸내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아버지. 제가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언제나 변함없고 언제나 똑같았던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 32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께 마음으로 전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철없는 막내딸 지금까지 예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박수근 작 <강변> 종이에 크레파스, 과슈. 11.5×29cm. 195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