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곁에 있어 자칫 잊고 있던 ‘베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친구가 있기에

이윤아 32세. 물리치료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고등학교 1학년 때 알게 된 내 친구 이현승! 체구도 작고, 산만하고, 수업 시간에 매일 졸던 아이. 오지랖이 넓어 작은 고구마 몇 개라도 쪄오면 반 친구들 모두에게 나누어줄 정도로 정이 많은 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힘든 일을 겪으며 중학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진학한지라 까칠함이 몸에 배어 있었죠. 제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해 친구들이 노트를 빌려달라고 해도 싫다고 거절하고, 설사 빌려주더라도 구겨지거나 낙서가 되었거나 하면 노발대발 성질을 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친구들과 함께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반 친구들도 저를 무척 싫어했죠.

하지만 현승이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윤아랑 놀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항상 현승이의 대답은 같았죠. “윤아 좋은 애야. 그러지 말고 너희도 잘 봐봐. 정말 좋은 애야.”

그렇게 믿어주고 다가와 준 현승이 덕분에 저에게도 친구들이 몇몇 생겼고 2학년에 올라가며 반이 나뉘었을 땐 교실 뒤에 서서 부둥켜안고 울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이영미 작. <나들이>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45×45cm. 2011.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현승이에게 의지하며 보내고,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을 하고 졸업을 한 후에도 서로 연락하고 가끔 만나면서 우정을 쌓아갔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우린 마음이 잘 맞아서 오늘은 현승이한테 전화를 해야지, 하면 현승이한테서 전화가 오고, 내가 괜스레 기분이 좋아 전화를 하면 현승이도 오늘은 자기도 그냥 기분이 좋다며 수다를 떨고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인생에 정말 힘든 고비가 찾아왔었어요. 모두와의 연락을 끊고 은둔 생활을 할 만큼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현승이로부터 장문의 메일이 왔고, 저는 그 메일을 읽으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 생각하고 내가 의지할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생각했는데 현승이는 그저 그렇게 항상 제 곁에 있었던 겁니다. 메일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온 마음으로 날 사랑해주는 친구가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좌절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었고, 힘을 낼 수 있었고, 슬플 땐 펑펑 울 수 있었답니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존재, 그래서 가장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내 친구….

친구란 하나의 영혼을 가진 두 개의 신체라는 말이 있더군요. 현승이랑 저는 아마도 그런 하늘이 내린 친구인가 봅니다. 이런 친구가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의정부에서 화장품 장사하는

최영옥이가 내 친구라오

인영순 73세. 대전시 대덕구 연축동

내 나이 40대 중반이 되었을 때, 한순간에 가정 형편이 뒤집어졌다. 차라리 재산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있다가 없어지니 너무나 창피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의정부로 올라갔다. 의정부에는 미군이 많이 살고 있어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의정부에서 내 평생의 은인이자 더없는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세 든 집의 주인이었고, 나보다 12살이나 어렸다. 이름은 ‘최영옥’.

처음 만난 내가 뭐가 좋다고 친자매처럼 여기며 보살펴주었다. 김치를 담그면 나눠주고 맛있는 음식을 하면 꼭 불렀다. 내가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고 옷을 살 때면 내 것도 함께 사주었다.

나는 영옥이가 일하는 화장품 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성격상 물건을 팔았다 해도 값을 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결국 외상값이 쌓이고 쌓여 200만 원이나 되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약 2000만 원 정도를 빚진 셈이다.

반면 영옥이는 인상 좋고 체격 좋고 성격도 화끈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받을 때는 확실히 받으면서도 또 남을 도와줄 때는 확실히 도와주었다. 만 원을 벌면 삼천 원은 상대를 위해 쓰는 식이었다. 그렇게 확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영옥이가 부러웠다. 하지만 영옥이는 오히려 무슨 말이든 잘 받아들이는 내 성격이 좋다고 했다.

영옥이는 느리고 더딘 나를 보호자처럼 챙겨주었다. 장사도 가르쳐주고, 화장품 값도 같이 받으러 가주었지만 결국 나는 장사에 소질이 없다 싶어 6년을 하고 그만두었다. 그 후에도 공장, 커튼 가게, 식당 일 등 많은 일을 해봤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늘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영옥이는 늘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다. 자기 돈이 있으면 자기 돈을, 없으면 빚을 얻어서라도 꿔주었다. 간혹 내가 이자를 얼른 못 내면 대신 내주기도 했다. 한두 번 해주기도 어려운데 몇 십 년을 그렇게 한결같이 해주었다. 고맙다고 하면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언니가 잘사는 것만 보면 원이 없겠다”고 하여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영미 작. <커피 작업실>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45×45cm. 2011.

그렇게 의지하며 25년을 넘게 한동네에서 살았다. 만약 영옥이가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시절, 타지에 나가 크게 낙심하며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옥이를 만났기에 버틸 수 있었고 살아나갈 힘을 얻었다.

지금은 아이들을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이제는 영옥이 생일이면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돈도 챙겨줄 수 있으니, 영옥이의 소원을 이뤄준 셈이다.

화장품 장사로 성공해, 지금도 의정부에서 장사를 하는 영옥이와는 늘 연락을 한다. 전화만 하면 놀러 오라고 성화다. 지금도 자나 깨나 영옥이가 생각나고 보고 싶다.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인 영옥이를 위해서 늘 기도한다. 지금은 참 행복하다. 아이들도 잘 자랐고,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있으니,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남은 여생 같은 동네에서 오가며 그 친구랑 함께 보내고 싶다는 소망도 가져본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요즘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힘겨운 세상살이에 부딪친 누군가가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이 되는, 그런 친구가 되어주라고.

 

나의 사랑하는 명희씨

곽형두 56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왜 당신은 어려울 때 도와주고 속내를 터놓는 진정한 친구가 없어요?”

아내가 몇 차례 나에게 던진 말이다. 사실이다. 속마음을 꼭꼭 숨겨 놓는 ‘포커페이스’는 아니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인생이란 엄연한 현실 앞에서 버팀목이 돼 줄 수 있는 친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오십을 넘어서야 언제나 내 옆에 최고의 프렌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랑하는 나의 아내 명희씨다.

젊은 시절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 오십이 넘어 회사를 그만두며,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상황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매달 나가는 대출금 이자, 들어오는 돈은 없고 점점 쪼들려갔다. 처음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중산층의 몰락이 이런 거구나 실감했다. 마음의 병으로 건강 상태도 안 좋아졌다. 자격지심 때문에 친구들과의 만남도 꺼리며 집에만 있는 나에게, 아내는 나의 건강을 챙겨주며 위로해 주었다. 다들 돌아서도 아내만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곱게 자라 직장 생활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아내가, 일을 시작하겠다고 나섰다. 지방으로 일하러 떠나는 아내를 배웅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혼기념일에 아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 축하! 앞으로 미안하단 말 하지 마요. 열심히 살아서 앞으로 잘 살면 되지요. 함께 있지 못해 안타까워요. 내 생각 해서라도 잘 챙겨 먹고 건강한 모습 보여줘요.”

아내는 부족함 없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장남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님 모시랴, 조상님 제사 지내느라 약한 몸으로 불평불만 없이 고생했다. 넉넉한 형편에도 결혼 생활 25년 동안 부부끼리 여행 한번 제대로 다녀온 적이 없었다. 여름휴가 때면 당연히 ‘고향 앞으로’였다. 그리고 시댁에 가서 살림하며 휴가를 보냈다. 언제나 부모님 생각만 하느라 아내의 입장은 등한시해왔다. 잘나가는 회사원일 때는 모임도 많고 아내를 다정히 챙겨줄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불평한 적도 없었다.

이영미 작. <내 안의 소리>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45×45cm. 2011.

어느 결혼식 주례사가 떠오른다.

‘결혼은 우정의 시작이다. 언제든지 편이 되어주고, 조건 없이 상대 말을 경청해주는 진실한 친구가 돼야 한다. 서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 씩씩한 가족, 따스한 가족이 되어라!’

나에게 먼저 그런 친구가 되어준 것이 아내였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믿어준 아내가 있었기에, 그동안의 행복이 있었다는 것을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겪고서야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가장 추운 겨울 속으로 들어와 있다. 지금의 삶이 비록 고단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기에, 나도 움츠려만 있지 않고 뭐든지 해보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게, 아내에게도 더 잘하려고 한다. 집안 일 한번 해보지 않았지만, 빨래도 하고 아이들 밥도 챙겨준다. 우리 가족이 빨리 차가운 겨울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더욱 눈부신 봄을 맞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명희씨. 쑥스러워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이다.

“여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