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곁에 있어 자칫 잊고 있던 ‘베프’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내 친구 영애를 찾는 것입니다

윤경선 56세. 미국 오리건주 힐스보로 거주

39년 전, 그러니까 1972년 여고 2학년 때 난 친구들과 헤어졌다. 이름은 최영애, 이해숙이다. 특히 영애와의 소중했던 우정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여고 시절 나는 반항기 어린 사춘기를 보냈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중학교만 나오고 그만두라는 것을, 1년 동안 전화국 급사 생활을 하다 마음에 맺혀 다시 고등학교 시험을 쳐서 붙으니까 할 수 없이 여고를 보내주셨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와 매사에 부딪쳤고, 급기야 가출도 여러 번 했다.

그때 나를 따듯하게 챙겨준 친구가 영애였다. 그 아이 역시 형편이 어려웠지만 자기 주머니를 털어 먹을 것을 챙겨주고,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었다. 성격도 깐깐하고 말썽만 피우는 나를, 보통은 멀리하려 했지만 영애는 달랐다.

그러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정년퇴직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부모님은 먹고살기 위해 큰 집을 줄여가며 이사를 여러 번 다니셨다. 이사를 다니다 보니 학교도 달라지고 어느 순간 서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26살에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삶이 힘들 때면 영애 생각이 나고, 해가 지날수록 영애에 대한 그리움은 오히려 더해갔다. 미국으로 들어온 뒤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가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언젠가 영애가 어린애를 업고 우리 집으로 날 찾아왔는데 엄마가 그냥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내가 가출을 하면 항상 영애가 보살펴주었으니, 엄마는 내가 영애를 만나면 다시 나쁜 길로 빠질까 봐 걱정을 하신 것이다. 여러 번 이사를 해서 틀림없이 물어물어 왔을 텐데. 그냥 돌아선 영애의 마음이 어땠을까. 한 번만 더 날 찾아주었더라면….

이영미 작. <내 안의 소리>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120×120cm. 2011.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온다.

“영애야, 정말 미안해. 그리고 많이 많이 보고 싶다. 친구야, 내가 널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우리의 우정을 회복해서 두 번 다시 널 아프게 안 할 거야.”

그동안 영애를 찾으려고 영애가 다닌 여고 카페지기에게 사정도 해보고, 우리 학교가 있었던 서울 영등포 어디엔가 살고 있을 것 같아서 국회의원, 각 방송국에도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편지를 보내보기도 했다. 몇 달 전에는 한국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 몇 년을 두고 애원을 해서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는 커다랗게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세계 일주 여행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소망은 오로지 영애를 찾는 것뿐이다. 영애의 목소리를 한 번만 들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에 살더라도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더 늙기 전에 꼬옥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드린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친구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더 정신을 차리려고 한다. 우린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될 거라 믿는다.

 

우리들의 꽃다웠던 열아홉 살

이상미 25세. 직장인.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나의 베스트 프렌드 은정이!! 중1 때, 14살 소녀 둘은 학교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또 다른 친구 동연이와 함께 우리는 삼총사처럼 늘 붙어 다녔다.

고등학교는 달리 갔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만났다. 조용하지만 웃을 때 덧니가 드러나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은정이. 은정이는 자기 집에 자주 초대해서 수준급 실력의 계란말이와 멸치볶음 등을 만들어주었다. 한번은 은정이의 집 가족사진에 은정이 아버지와 오빠 외에는 없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은정이가 10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후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나이에 맞지 않게 요리도 잘하고 굉장히 성숙한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정이는 늘 밝게 웃을 줄 아는 애였고 글씨도 잘 써서 해마다 서기를 도맡아 했다. 나는 늘 글씨를 잘 쓰는 은정이가 부러웠었다.

고등학교 때 은정이는 미용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내 머리도 수준급으로 잘라주었다. 나는 어떤 고민도 은정이에겐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내 편이 돼주었다. 남들이 오해를 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며 나를 믿어주었다.

그러다 고3이 되던 해 2005년 어느 날, 그날도 우린 셋이 만났다. 은정이는 얼마 전 밀가루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나와 동연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다만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말에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그날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그게 우리 셋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보름 후 은정이가 갑자기 쓰러졌고, 결국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그 충격적인 사실을 우리는 이틀 후에야 들었다. 뇌에 수술해도 소용없는 불치병이 생겼다 했다.

이영미 작. <꽃마중>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120×120cm. 2011.

 

19살, 너무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내 친구, 은정이.

은정이의 뼈는 벽제의 한 납골당에 안치되었고 난 은정이의 가장 친한 친구란 이름으로 그녀의 영정 사진을 들고 말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쓴웃음을 띤 채 나는 담담히 걸어갔다. 아직 열기가 남은 뜨거운 은정이의 뼛가루를 뿌릴 때에도 은정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건강하던 애가… 어떻게… 아니겠지… 이 뼛가루의 주인공은 은정이가 아닐 거야, 그렇고말고.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다 스쳐 지나갔다.

그해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제발 꿈속에라도 한 번만 나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잠들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은정이에게 못 해준 것이 너무 많아 아직도 가슴이 쓰리고 아프고 아쉽다. 늘 받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뭔가 해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더 이상 해줄 수가 없다.

몇 개월 전에는 은정이를 안치한 납골당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계절별로 은정이가 좋아했던 꽃도 사가지고 가고, 기일이 되면 편지를 써서 납골당 편지함에 넣는다. 이제는 슬픔보다는 은정이를 만난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간다. 힘든 일, 좋은 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다 들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은정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을 한다.

은정아, 비록 6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학창 시절은 네가 있어서 참 즐거웠어! 은정아, 언젠가 만나면 그동안 못 해줬던 것 다 해줄게. 은정아!

 

 

하늘이 너를 친구로 보냈다

내 삶의 등대가 되어주라고

임왕규 55세. 자영업.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1977년 봄.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는 교정의 서클 룸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 우리는 독서와 토론, 여행과 만남을 통해 운동권의 중심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갔다. 친구는 포용력과 즐거움으로 사람을 모을 줄 알았고 열정과 헌신으로 일을 만들어갔다.

용기 부족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나를 친구는 말없이 지켜보면서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3학년 1학기, 친구는 민주 쟁취를 외치며 데모를 주동하던 중 긴급조치로 구속되고 말았다.

친구가 떠난 교정에서 방황하던 나는 휴학을 하고 군 입대를 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나는 최전방 산골짜기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쯤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 부대에 배치되어 왔다. 우리 인연이 보통은 넘는다는 걸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는 부모님이 면회 오시면 함께 나가고, 주말이면 라면과 막걸리로 회포를 풀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제대 후 복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했고, 친구는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인천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

1987년 6월 여름, 넥타이를 맨 나는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깃발을 높이 쳐든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 중에 친구의 모습이 눈에 확 튀었다. 빵과 음료수를 사주며 몸조심하라 말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용인 수지에 터전을 잡고 살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안 학교 설립과 아이들 입학을 위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하였다.

어떻게 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참 우연치고는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말, 나는 23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막막하고 암담한 마음에 집 뒤의 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친구도 내 소식을 알고 있었다. 친구가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할 거니?”

나는 사업 준비를 위해 컴퓨터와 중국어를 배워볼까 생각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친구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왔으니, 이참에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세상 이치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며 마음수련을 권했다. “마음수련! 그거 내 동생이랑 누나가 수없이 권했던 건데, 너도 그걸 했니?” 하고 물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와 둘이 수련원에 있을 때였다. 수련원에 처음 오신 한 분이 둘이 너무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긴 세월 함께하다 보니 친구도 닮는가 보다.

친구와 나는 처음부터 확 가까워진 사이는 아니다. 대학에서 만나 함께 정의를 외쳤고, 군 생활의 어려움도 같이 이겨냈고, 또 이웃으로 한동네 살면서, 마음수련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나누며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이 하늘이 우리에게 준 조건이었다.

멀어지려고 하면 뭔가가 붙들어 매듯이, 그 인연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갈 길 몰라 헤맬 때마다 곁에서 나를 격려해 주고 안내해 준 친구. 내 삶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준 그 친구가 있었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고 일어나 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고맙다. 친구야! 네가 마음수련 8과정을 이수하던 날 축하의 메시지로 보낸 글 기억하냐? 내 마음 지금도 그대로다.

‘젊은 시절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어 민주를 쟁취했던 친구가

10년 정진 끝에 우주로 완성을 이루었네

회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절박한 시절

참의 길로 안내해 나를 살려준 친구야!

너 나를 갖고 30년 함께했던 우리가

마침내 너 나 없이 하나가 되었구나

이제 세상에 나서, 세상일 하며

바람처럼 물처럼 그냥 그렇게 영원히

하나로 살아보자’

이영미 작. <커피 작업실> 캔버스 위에 혼합 재료. 70×70cm.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