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해바라기와 같은 그녀

내겐 해바라기와 같은 그녀

박완선 48세. 창원시 상남동

그 어디나 밝고 환하게 만들어 버리는 해바라기 같은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건 대학 졸업 후 대구의 한 종합병원 신경외과 병동에 같이 배치되면서였다. 교사로 근무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그녀는,  곧잘 나를 불러 맛깔스런 찌개와 밥을 지어주곤 하였다. 저녁 근무인 날에는 따뜻한 점심을 드시게 한다며 아버지 학교로 도시락을 갖다 드리고 출근하던 그녀! 그녀는 여태껏 나 중심적으로 앞만 보고 살아왔던 나와는 분명 다른 따뜻함이 있었다.

3교대를 하며 병실의 환자들의 인계를 주고받을 때 일명 독종(?)으로 통했던 나는 환자에게 하였던 처치나 투약 등을 철두철미하게 따지고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지적하기 일쑤였다. 그것이 환자를 위하는 길이고, 그렇게 해야 유능한 간호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환자나 보호자 편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들어주었다.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혼날 각오를 하면서까지. 뇌종양 환자가 씻지도 않은 손으로 주는 음식을 스스럼없이 받아먹고, 중풍으로 입원했던 할머니가 혼자 산다는 걸 안 후에는 퇴원 후에도 찾아가 돌봐주던 그녀. 그녀가 근무할 때면 간호사실 앞에 유달리 환자들이 많이 나와 북적거렸다. 한번은 밖에서 같이 차를 마시던 중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니는 밖에서 만나면 참 재밌고 좋은데 병원에서는 무섭데이!”

그녀 말이 맞았다. 나는 그 시절 그런 그녀가 밖에서 만났을 땐 좋았으나 병동 안에서는 왠지 거슬려 외면하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내 마음을 한순간에 녹아내리게 했다. “간호사로서 니는 참 유능해. 내가 입원하게 되면 니가 담당해주라. 그럼 정말 안심이겠다!”

그 어떤 사람이든 진심으로 도와주는 그녀의 성품이 나로선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또 못마땅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얼마 후 그녀는 결혼을 하며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면서 아이들 키우면서 온 집안을 온 동네를 특유의 허물없음과 초긍정의 마인드로 환하게 바꾸어 놓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끊임없는 그녀의 따뜻함과 배려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너는 어떻게 항상 너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가 있니?” 언젠가 내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복을 받았잖아. 그게 늘 감사해….”

며칠 전 그녀가 문득 그리워 벚꽃이 흩날리는 동영상 카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으로 경주 황남빵과 꽃 편지지가 담긴 소포가 왔다. 그녀가 그랬듯이 나도 고소한 황남빵을 여기저기 나누어 먹었다. 언제나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그녀, 그래서 자신보다 남을 먼저 위해줄 줄 아는 그녀, 그 어떠한 상대든 무장해제시키고 마음을 열게 해주는 그녀. 나도 그녀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은미 선생님, 고맙습니다

조금희 39세. 경기도 양서면

이은미 선생님은 우리 아이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아이가 시골에서 할머니 손에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복이 많은 우리 아이는 이은미 선생님을 만났다.

이은미 선생님은 엄마나 아이들을 대할 때 어떤 기준이나 선입견이 없었다. 한번은 반의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걱정된다고 했더니, 다른 아이들과 잘 놀아야 잘 자란다는 고정관념부터 놓아보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당장은 부족해 보여도 기다려주자고…. 나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에도 이은미 선생님은 아이에 대한 욕심과 조바심이 커질 때마다 그 마음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선생님은 학부모에게는 마치 친구 같았다. 아이 때문에 전화했다가 집안 문제까지 2시간을 넘게 통화할 정도로 마음의 벽이 느껴지지 않는 분이었다. 경제적인 문제나 남편, 아이 때문에 힘들다가도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나면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실제 선생님도 당신의 아들 때문에 맘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선생님 이전에 한 아이의 엄마로서 학부모들의 심정을 잘 헤아려주었다. 지금도 가끔 선생님과 함께 차도 마시고, 1학년 때의 엄마들끼리 연락을 하고 지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가 2학년으로 올라가고 새 학기가 시작된 작년 3월 초. 학기 초반이라 엄마들로서는 딱히 학교 갈 일이 없고 심지어 반이 다 갈렸는데도, 이은미 선생님 반 아이들의 학부모들은 자발적으로 학교에 나와 청소를 한 것이다. 모든 게 이은미 선생님의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바뀌어갔다.

학부모 모임에서 의견이 다를 경우, 전 같으면 ‘저 엄마 왜 저래’ 하면서 마음의 벽부터 쳤을 텐데 ‘이것도 내 기준이지’ 하면서 나를 먼저 돌아보게 된 것이다. 직장 생활로 바쁜 엄마들이 가끔 아이 때문에 걱정을 쏟아내기도 한다. “차라리 직장을 그만둘까요? 혹시 제가 학교에 자주 못 가면 우리 애한테 문제가 생길까요?”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친구들의 엄마가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엄마들이 급식 당번을 하려고 모일 때면 “내 자식도 귀하지만 엄마가 못 오는 애들을 생각해서 먼저 그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고, 더 먹으라고 챙겨주자”고 한다. 그렇게 서로 내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챙겨주다 보니, 엄마들 사이의 벽이 없어졌다. 이 모든 게 이은미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

“이은미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알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