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롤트 뮐러 원작의 연극 ‘로젤’에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여주인공 로젤이 한 친구를 만나 모든 걸 털어놓은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고맙다. 너 같은 사람이 꼭 하나 필요했었어. 아무도, 단 한 번도 지금까지 내 진실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누군가에게 내 진실을 다 말하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다 말하고 나니까 너무 행복해. 정말 살 것 같아!”
놀랍게도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음보다 깊었던 사랑의 상처와 배신의 아픔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은 아니었다.
진정한 힐링, 즉 마음의 치유는 작위적인 설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젤처럼 우리의 가슴속에는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 가득 쌓여 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기에, 쌓아두고 있던 말들은 점점 마음의 병이 된다. 따라서 그 말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치유인 것이다. ‘힐링캠프’ 제작진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 즉 촬영 장소를 게스트가 임의로 정할 수 있게 한 것부터가 대단한 파격이다. 게스트는 가장 마음 편한 장소를 스스로 정하고,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듯 가슴속의 말을 털어놓는다. MC들은 이따금씩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게스트의 말에 차분히 귀를 기울인다. 세 명 MC 또한 게스트가 마음 편히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최상의 조합이다. 이경규의 넉넉한 연륜은 인생 선배의 든든함을, 김제동의 섬세한 배려는 좋은 친구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진지하면서도 엉뚱 발랄한 한혜진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부담 없이 꺼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근 ‘힐링캠프’에 출연한 게스트들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받고 돌아갔을 뿐 아니라, 보고 듣는 이의 마음까지도 치유해 주었다. 자기 잘못으로 빚을 지게 된 것이 아닌데도 지난 20년 동안 빚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신은경의 진실한 속사정과 긍정적 태도는, 억울한 이유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따스한 격려가 되어줄 수 있었다. 데뷔 초부터 높은 인기만큼이나 루머와 차가운 시선에 시달려왔던 이효리 역시 진솔한 내면을 털어놓음으로써 상당 부분의 오해를 벗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과의 1:1 결연을 촉구했던 차인표의 경우는 수많은 타인의 힐링까지 이루어낸,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치유받은 사람, 힐링에 성공한 사람은 그 자체로서 빛을 내뿜기 때문에 마치 등불과 같다. 등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밝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진심으로 들어준다면, 상대 또한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어둡고 험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아주 작은 일일지 모른다. ‘힐링캠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소중한 진리다.
글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